응답하라 1988의 판타지 

응팔 마지막회를 경건하게 기다리고 있다. 아들이 나에게 이제 오늘 응팔이 끝나면 뭘 할꺼냐고 물었다.
응팔은 골목에서 시작한 가족의 판타지를 말했다. 초반의 짜증나는 성보라 캐릭터와 아들 잡아먹은 며느리라는 시어머니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은 가족이라는 판타지를 구현하는데 충실하기 때문에, 민폐 캐릭터가 없다.
• 이것은 명백한 판타지다 •
운동화끈도 못 묶고, 주차 못해 골목을 점령하는 최택과, 동생 머리 끄댕이 잡아 뜯는 성보라와, 없는 형편에 쓸데없는 물건만 사오는 성동일도, 가만 보면 싸가지 없는 정팔이도, 딸년들이 싸우는데 그만하라고 말리지도 못하는 엄마 일화와, 카리스마로 동네에 군림할 수 있는 졸부 라미란이 없다.
바르기만 해서 엄친아를 시전하는 선우는 새아빠의 자리를 내주고 싶지 않은 갈등을 겪지 않고, 학생주임인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는 특공대 동룡이도 별 일 없이 순탄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위에 열거한 각자의 단점은 미화되었다. 그러니 이건, 판타지다. 주인공들은 크게 갈등하지 않고 서로 배려하고 편들어주며 화합한다.
이건 지금, 이 시대가 내 편을 그리워하는 판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리라. 이것은 명백한 판타지다. 동네 꼬마의 눈사람을 위해 회의를 여는, 그런 골목은 없다. 인간은 갈등하기 위해 존재한다. 골목은 “어메 짠한그…”가 존재하면서 동시에 뒷담화를 필수적으로 장착한다.
• 포기하는 자만 쟁취한다 •
응팔의 사랑은 가족보다는 현실적이다. 어남류 어남택에 대한 이야기가 분분한데 사람들은 시각적 이미지에 압도당하면 판단력이 떨어진다. 어쨌거나 드라마의 청춘들은 모두 곱다.

성덕선은 상징이다.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상징이지 동창의 75%가 좋아하는 여신을 말하는 건 아니다.
택이가 남편이 된다는 건 그의 승부수 때문이다. 결정적일 때 치고 나가고, 버릴 패를 확실히 포기하고, 대가를 아까워하지 않으며, 사랑 앞에 불친절하지 않다. 택이의 사랑은 정석이다. 이건 사랑을 얻는 법에 대한 이야기지 택이가 덕선이를 차지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환이가 탈락한 결정적인 이유는 성인이 된 아이들이 호프집에서 모여 피앙세 반지를 앞에 두고 한 고백이다. 친구들 앞에서 붕 띄웠다가 완전히 자빠뜨려 모래사장에 내리꽂은 형국이다.

덕선이가 정환이를 사랑했대도, 저런 남자와 결혼하면 안된다. 어따대고 고백을 장난으로 떡칠하나. 이건 정환이가 츤데레인 게 아니라 올바르지 않은 사랑에 대한 것이다. 사랑은 조롱하지 말아야 한다. 정환이가 사천에 내려온 택이에게 빨리 덕선이를 잡으라 말한 건 제 사랑의 알량함을 인정한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
내가 이 드라마를 본 것은 판타지의 구현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나에겐 저런 초등학교 동창들이 있고, 27년째 만나고 있으며, 아이들이 자라 술 한 잔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친구들이 생각났다. 나의 판타지의 빈 공간을 채워준 친구라는 소재가 맘에 들었다.
한 가지 더, 청춘들의 러브라인, 골목에서의 포옹과, 바닥이 뜨근할 거 같은 이불 위에서의 꿈결같은 키스가 전혀 추하지 않아서다.

다시는 저런 순간이 나에게 오지 않겠다는 걸 매 번 확인하고 나 자신에게 각인시키면서도 내 마음이 완전히 늙어 사그라지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게 해줘서, 그래서 좋았다.
인간에겐 판타지가 필요하다.

그 판타지가 더럽지도 추하지도 않다면 굳이 미워할 이유가 왜 있겠는가.
• 기분좋은 판타지였던 이유 •
건물주가 없기 때문이다.

정봉이네는 집주인이지만 단 한 번도 집세를 올리지 않은 듯 하다. 외려 이자 얘기도 안하고 차용증도 안 쓰고 세입자에게 돈을 빌려준다.
선우네도, 택이네도, 동룡이네도, 모두 자기 집을 가지고 있다. 택이아빠의 가게는 집에 붙어있고, 이들은 골목을 공유한다.
갑질하는 대상은 유일하게 드라마 끝날 때 성동일을 정리해고한 한일은행이다.

건물주 없는 세상, 상상해봤나.

어쩌면 이건 판타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로서 응팔은 끝났다.

성동일이 은행에서 짤린 건 이제 자본이 등장했다는 얘기로 해석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동룡이는 외식업에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으며, 보라와 선우는 결혼해서 검사와 의사커플이 되어 금수저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에게 곧 IMF가 닥치겠지만, 모두들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덕선이네는 검사 딸, 의사 사위, 국보급 바국기사 사위와 정규직 승무원 딸이 있고, 선우네와 택이네도 이 구도를 같이 가져간다. 정환이네는 이미 자본을 축척해뒀고 금성전자 대리점이 문제겠지만 하이마트가 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 둘째 아들이 철밥통이다. 정봉이는 희대의 럭키가이, 조만간 백종원이 될 것 같다. 동룡이는 곧 예식장과 장례식장 사업에도 진출하지 않겠는가. 아버지의 퇴직금으로 프랜차이즈에 뛰어들지도 모른다.
– 응답하라 1988의 마지막 회를 기다리며

백화점

서점은 백화점 안에 있다.
내일 있을 일 때문에 급하게 마련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꼭 백화점으로 갈 필요는 없었는데 마트와 옷가게와 문구점이 이동거리를 생각했을 때 가장 적게 움직일 동선은 백화점이었다.

걸음을 아껴야 한다. 겨울이니까.
문구 코너에 가서 검은 색 파일을 사야했다. 어디선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 피아노 연주가 들리는데 분명히 누군가 연주하는 소리였다. 음원을 틀어놓은 것과 그랜드 피아노의 해머가 두들기는 소리는 명확하게 다르다.
백화점의 가운데는 길게 뚫려 있다. 보이지 않는 기둥이 있는 것처럼 뻥 뚫린 공간을 가운데 두고 건너편에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여자의 주변엔 아이를 안은 어른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 각국에서 온 펜에 둘러싸여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쉽게도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고 연주는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으로 이어졌다.
스테들러, 사라사, 시그노, 몰스킨, 이룸, 프랭클린 사이에 서 있었다. 계산대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다들 한 권 정도의 책을 들고 있었다. <나는 부동산과 맞벌이한다>, <미움받을 용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이들의 학습만화와, 장난감만 손에 쥔 사람도 있었다.
자기 확인을 하기 위해 사는 물건들이 가득한 공간, 사람들은 굳이 필요하지 않은, 없어도 오늘을 넘길 수 있는 물건을 산다. 물건의 필요성은 주관적이다. 물건은 단지 실제로 쓰이기 위해서이기 보다 때로 위안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 굳이 오늘 사지 않아도 될, 시그노 펜 한 자루와, 펜텔의 펜 두 자루와 2016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을 내가 검은 파일 위에 올려 계산을 기다린 것처럼.
돈을 내기 위해 계산대 앞에 서서 서서 내 차례를 기다리는 사이 피아노 연주는 계속 되었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생명없는 물건이 위로가 되는 공간에서 사람이 규칙대로 맞추어 연주하는 음악은 어떤 지위를 갖는가. 인간에게 위로가 되는 건 생명없는 물건인가 아니면 물건을 사는 행위인가. 물건으로 위로를 받는다면 정말 그 물건은 무생물인가.
사물을 바라보고 주머니에 넣어 행복해진다면, 그 때부터 그 사물의 삶이 시작되는 지도 모른다. 얼마나 지독히 외로우면, 말 걸지 않는 사물을 사랑하며 계절을 건너는가.

2016. 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