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조선에서 게임을 읽다” 첫 강좌 소감 (7월 14일분)

Hell 조선에서 게임을 읽다. 첫 강좌를 듣고

첫 강좌의 내용은 중독과 몰입이었다. 게임을 몰입이라 보지 않고 중독이라 폄훼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을 것인가. 게임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이경혁 선생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키워드 :

괄시와 굴욕의 역사.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

게임은 태초부터 환영받은 적 없다.

Hell 조선이라는 용어도 게임에서 나온 말이라 한다. 다양한 종류의 심층적인 게임을 잘 하지 않지만 간간히 기사를 검색하거나 게이머들이 모인 커뮤니티를 들여다보면서 모르는 단어를 항상 검색해서 알아내려 했던 덕인지 강의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지경은 아니었다. 첫 강의는 우리가 게임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할 것인가에 대한 주제라 할 수 있다. 중독과 몰입이라는 단어는 비슷하지만 그 뉘앙스가 다르다. 과학적으로 두 가지의 뇌 상태는 같을 수 있으나 이 사회의 언어로써는 부정적, 긍정적 효과를 동반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제 1강에서는 게임의 본질이 무엇이며 우리는 중독, 혹은 몰입에 대해서 무엇이라 말할 수 있는가를 논의하기로 했다.

게임의 사전적 의미는 놀이다. 중국어에서는 게임을 유희라고 풀이한다. 우리가 말하는 놀이의 범주는 상당히 여러 가지다. 게임은 놀이의 한 갈래이지만, 놀이의 한 갈래로 완전히 편입하지 못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게임은 명확히 말해 비디오게임이며, 이 비디오게임이 현재는 컴퓨터게임으로 진화했다. 스마트폰에서 할 수 있는 게임들은 모바일게임이라 하는데, 스마트폰도 말하자면 작은 컴퓨터와 다름없으므로 모바일게임 역시 컴퓨터게임의 범주에 들어간다.

최초의 컴퓨터게임은 1958년 미국에서 나왔다고 알려져 있다. 주거니 받거니 공을 치는 화면이 컴퓨터로 만들어졌고 부룩 헤이븐 국립연구소에서 개발했다. 이는 비디오게임, 컴퓨터게임의 역사를 찾아봤을 때 나오는 정설이다. 그 이전에 어떤 개인이 어디선가 혼자 만들어 놀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의 전산시스템의 수준으로 봐서 한 개인이 혼자 만들고 놀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논다, 컴퓨터게임의 출발은 놀기 위한 것이었을 거다. 어쩌면 그 놀이를 위장해 사실상 다른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을 지도 모른다. 전략시뮬레이션은 전쟁전략을 짜기에 적당했을 것이고 컴퓨터의 능력을 평가하고자 퍼즐게임을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게임을 놀이, 여가를 활용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유사 이래 인간들이 찾아내는 놀이가 환영받거나 긍정적으로 평가받은 적은 별로 없다. 인간은 언제나 승부를 가르기 위해, 상징적인 경쟁을 하기 위해, 또는 개인이 즐거움을 찾기 위해 어떤 놀이를 찾아왔다. 이 놀이는 대부분 현재 문화예술의 갈래가 되었다. 오래 전 구텐베르크 활자가 발명되고 사람들이 쉽게 손에 책을 넣게 되었을 때 어떤 나라에서는 마구잡이로 베껴 퍼져나가는 소설이 사람들의 정서를 해친다고도 하였다. 영화가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은 시각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움직이는 그림이 가져올 폐해에 대해서 말했다. 사진도 마찬가지, 그림의 영역을 침탈당한 자들은 사진을 비난했다. 만화도 그러했고 세상에 새롭게 등장하는 대부분의 문화예술과 놀이는 처음엔 비난으로 시작했다. 왜 그랬던 걸까.

전쟁이후 국가재건에 열을 올리던 국내사정은 차치하고 이건 단순한 억압의 문제로 보긴 어려울 것이다. 각 매체마다 다른 이유가 있으니 일일이 여기서 따지긴 어려워도 대부분 새로운 문물의 등장은 기존 문물의 영역을 침범해왔고 파이를 나눠야 했다. 인간이란 종은 애시당초 보수적이라 새로운 물결이 거대하게 몰려올 때 불안과 위기감을 느끼는 게 당연한 일인지라 새로운 매체, 새로운 문물은 거의 다, 그렇게 시작이 되었을 것이다.

현대의 게임은 비디오게임에서 컴퓨터 게임으로 넘어가고 현재는 모바일게임까지 발전해왔다. 게임이라는 건 상호작용, Digital interactive Contents가 중심이다. 기존의 게임, 놀이도 상호작용이 중심이라면 게임은 digital 이라는 영역이 포함되어 상당히 복잡한 계산이 가능해져 더 풍부한 선택지를 만든다는 차이가 있다.

의문은 여기서 발생한다. 디지털 상호작용이 게임의 기본이라는 얘기를 듣자, 화면으로 넘어오기 전의 게임과 비교를 해봤다. 오래전 모니터없이 실제 사람과의 접촉으로 이루어지던 상호작용의 게임은 게임의 룰을 참가자들이 수정하고 변경할 수 있다. 모니터에서 펼쳐지는 게임은 제작자와 제공자가 있고, 디지털이라는 영역이 개임했기 때문에 게임의 룰도 그 계산 안에서 이루어진다. 비디오게임(모니터와 컴퓨터 게임을 이하 비디오게임이라고 칭하겠다)은 게임의 틀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해진 각본에 의해 제작해야 하고 수많은 선택지를 만드는 것 하나 하나가 비용이 소모되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바꿀 수 있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게임안에서 개별적으로 최적화되었다고 하더라도 개발단계에서 이미 완성품이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의미 있는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는 게임의 선택은 한계가 있다. 각종 게임들이 새로운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를 하거나 패치를 만들어도 그 역시 개발자, 즉 생산주체에게 게임의 규칙을 정할 권력이 주어진다.

비디오게임이 사용자의 적극적 반응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넓게 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게임은 각종 매체와 예술장르를 포괄하여 발전한다. 마치 블랙홀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화예술의 영역을 흡수하여 발전한다. 90년대 우리나라에서 게임OST가 주목을 받던 때가 있었다. 게임을 잘 모르던 사람들은 게임의 현란한 미적 기술과 아름다운 음악이 동반된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새로운 매체가 탄생했다고 환영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으나 게임은 최대한 사용자의 감정이입을 끌어들이기 위해 사람들을 매혹할 만한 수많은 수단을 동원한다. 기본적으로 문화예술은 매혹의 기술이 돋보여야 살아남는 장르이다. 그게 어떤 방향이건 간에 생산자의 취향에 맞는 소비계층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 계층이 넓고 깊게 빠져들수록 문화예술의 생산자는 흥하게 된다. 게임은 복합적인 문화매체를 동시에 품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기반이 되는 각본이 필요하다. 게임은 스토리를 중심으로 한다. 무모한 퍼즐게임은 사람들을 매혹시키지 못한다. 게임의 기본은 이야기구조의 흥미로움이다. 이야기로 사람을 매혹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게임은 다른 장르를 가져왔다. 중독성이 있는 효과음으로 시작한 단순한 게임들이 유려한 음악으로 스토리에 힘을 북돋는다. 또한 미술역시 사실적 기법을 동원하거나 단순화한 상징적인 것 여러 가지를 보태 가장 아름답게, 가장 눈에 띄기 쉽게, 소비계층이 가장 좋아할 만한 디자인을 구현한다. 게다가 사용자의 적극적 상호관계를 끌어내기 위해 연극적 요소를 배치한다.

1강에서 이경혁씨는 게임은 시간과 공간을 현실과 다르게 유리되어 있다고 했다.

게임에서의 시간은 현실에서의 시간과 다르게 흐르고, 장소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서 말하는 공간과 그 안에 주어지는 모든 미장센은 역할이 있는 소품들로 채워진다. 현실세계에서는 당장의 어떤 사건을 이루어내기 위해 모든 사물이 그 역할을 하지 않지만, 게임에서 보이는 공간의 사물들은 대부분 어떤 임무를 띠고 있다. 목적성이 강한 장소가 주어지는 것이다. 게임에서의 시간은 몰입도를 최적화하기 위한 계산된 시간일 테고 장소 역시 몰입도를 이끌기 위한 장치로 꾸며져 있다. 말하자면 게임속의 모든 사물과 세계는 필요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필요하지 않은 것, 그저 무용의 물체는 그다지 많이 존재하지 않는다. 게임유저들은 게임공간속에 무의미한 사물을 발견했을 때 황당해하기도 한다. 그것은 게임을 진행하기 위한 각종 도구들을 생산자가 이미 적절하게 배치했을 거라고 암묵적으로 모두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게임의 세계관은 유용한 사물과 유용한 시간, 유용한 공간의 연속이다. 일상생활에서처럼 존재 자체만으로 의미를 갖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도 되는 것은 필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물과 사용자간에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감각을 인지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또 다른 몰입이 탄생한다는 것이 이경혁씨의 주장이다.

생산자의 능력에 따라서겠지만 사실상 게임은 그 규칙과 세계가 정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확장이 가능한 영역이다. 무한히 확장하느냐는 개발자, 즉 생산주체가 정할 수 있다. 어쩌면 사용자중에 무한한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애쓰는 주체들이 생겨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마인크래프트 같은 게임이 그런 양상을 보이는데, 기초적으로 개발사에서 제공한 영역을 넘어서 사용자들이 끊임없이 변형판을 만들어 게이머들 사이에 상호 제공한다. 이들은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게 되고 개발과 비판, 사용의 영역을 마구 뛰어넘는다. 그렇다면, 현재의 비디오게임은 앞서 말한 “생산자에 의해 한계가 정해진 게임의 규칙”을 파괴할 수도 있다.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교체되고 영역을 넘나드는 일이 흔해지면 그 때는 비디오게임의 형태가 어떤 식으로 발전하게 될지 지금 내 수준으로는 예측하기가 어렵다.

본 강좌에서 짚은 부분은 생산과 소비 주체의 혼재가 아니라 사행성 게임에 대한 부분이었다. 게임이 모바일형태로 더욱 개인과 내밀하게 소통하면서 모바일게임은 돈과 더 가까워졌다. 지문인식이 가능한 경우 신용정보를 등록해두면 손가락을 대는 것만으로 지출이 가능해졌다. 결제가 간편해진다는 것은 소비가 더욱 쉬워진다는 말이다. 소비가 쉬워진 게임시장이 이런 기회를 간과할 리 없다. 현재 우리가 소비하는 대부분의 모바일게임은 어느 수준에 오르면 현금을 동원하지 않고는 레벨업이 어렵게 만들어져 있거나, 현금이 있으면 더욱 쉬운 게임을 펼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불평등의 수치가 가속화될수록 게임시장은 발전한다. IMF 시절 우리나라 e-sports가 가장 크게 성장했듯이, 그 때 수많은 프로게이머들이 탄생했고 PC방 마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이는 현실을 도피하려는 인간의 비겁함이라고 치부하기엔 사회적 원인이 매우 명백하다. 현실에서 시간과 노력을 들인 결과를 얻기 어려워질 때 사람들은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한 다른 수단을 택한다. 적어도 몇 백 시간 내에 한 세계에서 최고가 될 수 있고 그 쾌감을 아는 사람이라면 게임을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과거의 게임은 공들이고 시간 들인 만큼 댓가가 돌아오는 매우 평등한 매체였다.

모바일시장이 나타나면서 이 평등함도 해체되기 시작했다. 현질,이라고 하는 금융결제, 즉 돈을 가진 자가 더 앞서 나가는 게임의 룰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암담한 시대에 유일한 구원이었던 게임마저 더 이상 평등하지 않은 형태로 가고 있는 것이다.

현실세계와 유리된 듯 보였던 게임은 현실과 매우 가까워졌고 이제는 개인의 손바닥 위로, 화장실 안으로 침대 머리맡으로 아주 은밀하게 진입해 들어왔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끼리 커뮤니티를 자연스럽게 형성하도록 생산자들이 머리를 짜내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했다. 더욱 개인화된 게임은 밀실과 광장의 경계를 허물어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현실과의 경계를 점점 낮추고 있다.

게임은 마치 자생적으로 점점 커져가는 생명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유동체가 되었다.

단순히 화면 안에서 가상의 공간과 가상의 시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던 게임은 이제 현실에서도 아주 가까운 곳에 자리하며 그 영역을 계속해서 파괴해나가고 있다. 마치, 애니팡의 동물들이 줄을 지으면 강력한 폭발을 일으키며 터져나가듯이, 언젠가는 애니팡의 화면이 밖으로 터져 나올 것처럼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 게임의 확장력은 무서울 정도로 급격하게 성장할 수도 있다. 그것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게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말할 것이냐에 따라 달려 있을 것이다.

노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던 시절을 지나, 남녀노소 막론하고 지하철에 앉아서도 뭔가를 터뜨리며 쉽게 웃고 쉽게 돈을 지불하는 때가 도래했다. 이제 여기서 게임은 또 다른 전기를 맞을 것이다. 아케이드 게임이 피시방으로 옮겨가고 피시방이 손바닥으로 들어온 시기처럼, 모바일게임의 급속한 성장으로 게임은 이제 또 다른 영역을 찾아 나설 것이다. 게임은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가 되어, 어떤 차원의 공간으로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려고 할지, 그것은 어쩌면 이미 정해져 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직 미지의 차원 – 우리가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어떤 시공간 – 에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Hell 조선에서 게임을 읽다> 제 1강 중독과 몰임 / 이경혁씨의 강의를 듣고

본 강의는 7월 14일부터 총 5강, 서울 종로구의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진행하는

인문학협동조합의 기획강의입니다.

한심한 독서

1.
글자를 읽기 시작한 건 너댓살 무렵이다. 당시엔 그 나이에 글자를 읽는 아이들이 별로 없어서 신동소리를 들었다. 적어도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꽤 많은 분들이 동일하리라 생각한다.
처음으로 읽는 책이 국민서관의 <신데렐라>였다. 참으로 한심한 동화다.

7살엔 사촌오빠네서 얻어온 삼성출판사에서 나온 백과사전을 읽었다. 읽는 책인 줄 알았다.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48권짜리 위인전집을 읽었고 그 다음에 전래동화집을 읽었다.
지금 생각해도 잘 읽었다 싶은 건 전래동화전집이었다. 나머지는 차라리 읽지 않고 나가 노는 게 나았다.

초등학교 5학년때는 읽을 게 부족해 세로로 된 책이나 어른들 책도 읽었다. 선데이서울도 읽었고 뺑끼통도 조금 읽었던 기억이 있다. 세계걸작 다이제스트를 읽은 건 누군가 읽지 말라고 뺏었어야 했다.

초등학교 때 독서대회를 한 달간 했다. 상 받으려고 얇은 책만 골라 읽고 독후감을 날림으로 썼다. 한 달동안 53권을 읽고 전교 1등을 했다. 목적은 상장이었지 책 읽는 게 아니었다.

중학교때는 성경을 두 번쯤 읽고 휴거를 주장하던 다미선교회의 책과 두란노서원과 말씀사에서 나온 종교서적을 열심히 읽었다.
성경을 읽은 것 외에, 쓰레기를 읽느라 시간을 많이 보냈다. 차라리 연애나 하든가 연예인 팬질이 나았다.

진심으로 책을 읽은 건 중•고등학교 때였다. 한국근대문학을 많이 읽었고 정신세계사의 책을 읽고 몇 달을 앓기도 했다.

성인이 되고 난 뒤에 매일 먹고 사는 문제로 괴로운 주제에도 책은 읽었다. 무언가를 읽고 쓰는 일은 매우 당연한 일상이라 무시로 읽고 썼다. 쓰는 건 대부분 체계없는 일기였다.

중국으로 공부하러 건너간 다음에도 교보에 해외 책배송이 생기자마자 생활비를 탕진해가며 책을 샀고 한국에 들를 때마다 40kg를 채워 배낭에 넣어 지고 비행기를 탔다.

2.
문제는 이때쯤부터 시작되었다.
책을 읽고 싶었던 게 아니고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영화를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읽으며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는데 독후감을 위해 책을 읽게 되었다.

해결할 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들이 있었다. 쉽고 흔하게 말하는 트라우마나 컴플렉스 따위였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술과 책을 골랐다.

결혼을 하고 난 뒤에 책 사는 일이 더 쉬워졌다. 돈을 벌지 않아도 책 살 돈이 생긴 건 노다지 금광을 발굴한 셈이었다. 책을 읽으며 엑셀에 리스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서관이 가까이 있었으나 ‘구멍난 가슴’을 메우기 위해 책을 사제꼈다. 결혼 후 2년차부터 읽는 책보다 사는 책이 많아졌고 우울증이 심해지면서 책 집착은 도를 넘어섰다.

엑셀에 칸을 채우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쉽고 얇은 책을 읽어야했다. 1년 목표를 100권으로 잡고 2006년부터 꾸준히 목표를 달성했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는 매년 200권이 넘는 책을 읽고 리스트를 정리했다. 심할 때는 하루에 여러 권을 읽었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고 읽지 않으면 안된다는 압박이 있었다.

이 시기에 읽은 책은 대부분 글자만 읽었다. 책을 더 보관할 수 없어서 박스채 팔거나 여기저기에 기증을 했다.

책 읽는 속도는 당연히 빨라졌고 머릿속에 남는 것은 없어졌다. 책을 사들이는 속도도 엄청나게 빨라졌다.
사실 알라딘에서 책을 산 게 몇 년 안된다. 이 시대의 지식분자들은 다 거기서 책을 사는 거 같아서 거기서 산 것 뿐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책을 읽고 싶어서 읽은 게 아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남들에게 나는 이만큼 읽었다고, 이런 것도 읽는다고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내면에 곯아가는 문제를 어찌 해결해야 할 지 몰라 그저 앉아서 활자만 읽었다.
오래전에 그만둔 방송통신대에 복학을 했다가 1학기만에 그만두었다. 책 읽을 시간을 줄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런닝머신 위에서도 책을 읽었다. 실내 사이클 위에서 책을 읽어야 했기 때문에 수영장을 다니지 않았고 언제나 가방엔 한 권 이상의 책이 있었다.

집안은 책으로 점점 좁아져갔고 알라딘에 지불하는 돈은 점점 많아졌다. 그럴수록, 머릿속에 남은 건 없어졌다.

집주인과의 갈등도 본격화되었다. 두 번 읽지 않은 책을 사들이는 이유에 대해 추궁했다. 매달 몇 십만원 어치의 책을 사서 쌓아두었다가 다시 어디론가 처박는 일이 반복되었다.

아이가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아이의 책을 사들이는 일에도 집중했다.
그저 다 돈지랄이었다.

3.
2013년부터 엑셀에 리스트를 만드는 작업을 그만두었다. 제일 소중하게 여기던 파일인데 지금은 어디다 처박아뒀는지도 모른다.
읽는 책의 권수는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책을 사는 수량은 여전했다. 어설프지만 책 만드는 일을 하면서 필요한 책은 더 늘어났다.

여전히 책을 사고 있었지만 책에 집착하느라 일상을 무너뜨리는 일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대해 몇 명의 정신과 전문의와 진지하게 상담도 했다. 술을 못 마시면 활자를 읽었다.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거나, 삶의 위기가 오면 급격하게 책 구매액이 늘어났다. 택배가 올 때가 되면 뭘 샀는지 기억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일을 하고 돈을 벌면서 모조리 다 책값으로 탕진했다. 그 책들이 지금 다 우리집과 퇴직한 회사의 작은 도서관 일부에 있다.

견딜 수 없어서 대형 붙박이 책장을 짰다. 도서대여점같은 슬라이딩으로 했어야 했는데 만드는 분이 벽이 견디지 못할 것이라 했다. 도서대여점의 책은 얇고 가볍지만 내 책들은 그러하지 않으므로.

도서정가제 시행 한달전, 물욕이 폭발했다. 알라딘 할인을 받을 수 있고 무이자 할부가 잘 되는 카드를 새로 발급받았다. 폭풍처럼 택배가 밀려들었다. 알라딘 배송 아저씨는 급기야 짜증을 내기도 했다. 책 좀 나눠서 시키라고 박스를 던져놓고 가기도 했고 도서정가제가 언제 끝나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이 때 긁은 카드값을 나는 아직도 갚고 있다.

지금도 내 서재와 마루와 아이의 방은 당연하고, 거실의 테이블 위, 소파위, 안방의 침대 옆, 화장대 위, 식탁 위에도 책이 있다. 읽다 던져버린 책, 읽으려고 꺼내 둔 책, 읽고 안 치운 책.

올 해초, 1월달에 갈급증이 다시 생겨 한 달동안 빨리 읽을 수 있는 만화책과 동화책을 포함해 40여권의 책을 읽고 리스트만 기록해두었다.

그리고 3월부터 거의 책을 읽지 않고 근 10여년만에 최소수량을 매달 갱신하며 7월을 맞았다. 보름째 소설책 한 권을 읽고 있는데 한 편 읽고 던져놓고 애니팡이나 하다가 이해가 안된 구절을 다시 들춰 읽고 단편 하나를 두 번 세 번씩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4.
누군가는 무슨 개소리냐고 했지만, 나는 학력컴플렉스와 지적컴플렉스가 심했다. 이게 과거형인 건 이제는 그 컴플렉스가 극복되어 자신감이 생겼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시작된 것이다.

남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각자의 무기를 갈고 닦는다. 우연히도 나는 그게 책이 되었다. 라면봉지 뒷면의 조리법을 읽듯이 수많은 활자를 읽었을 뿐이다. 누군가는 그 모든 것들이 몸 속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이라 하지만 그런 것 같지 않다. 기억나는 스토리가 없고 핵심도 다 날렸다.

최근들어 글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심층적으로 나눌 사람이 생겼는데 도대체 내가 뭘 읽고 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분명 천권이 넘는 책을 읽었는데 사실은 한 권도 안 읽은 것 같다. 녹아내린 책은 과연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나 그거 읽었어.
나는 이것도 읽었어.
나 좀 봐줘.
나는 이걸 읽어.
나는 이만큼 읽었어.

내가 책을 읽은 이유는 허세를 부리고 지적허영심을 만족시키려는 것이었지 주로 숫자를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내면의 들키고 싶지 않은 여러가지 문제들을 직면하지 못해서 내내 활자속으로 도망다니기만 했다.

한심한 독서를 중단했다.
이제서야 책을 읽고 있다.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놓친 부분이 없나 다시 읽고 문장을 곱씹어 보면서 가만히 여운을 느끼게 된 지금이, 이제서야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알게 된 셈이다.

어릴 때의 독서편력을 들은 정신과 전문의는 그랬다. 외로웠을 거라고. 방임이 있을 때 활자에 천착할 수 있다고. 아이들은 친구와 노는 게 재미있고 가족과 교감을 나누는 많은 활동이 더 즐거운 것이지 책만 쳐다보는 것은 결코 친구와 노는 만큼 재미있는 일은 아니라고. 동생은 내 옆에서 그림을 그렸고 나는 동생 옆에서 책을 읽었다. 우리는 그렇게 자랐다.

많은 일들이 지나갔다.
마흔이 인생의 중반이라면 여러 방면으로 판을 바꾸고 있는 셈이다. 최근 몇달간 도서구입비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제 활자에 대한 집착은 내 정서상태의 척도가 된다. 기억도 나지 않을 글을 과자봉지의 성분분석표를 보듯 읽는 짓을 그만할 수 있으면 좋겠다.
죽기 전까지 못 읽고 가는 책이 있어도 행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끝.

2015. 7. 8.

푸닥거리

1.

행동과 실천이 잘 되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공부하다 보면 언젠가 변한다고 누가 말했다.
계속해서 인지하게 되면 언젠가는 행동도 변하는 걸 스스로 체험했다는 사람이 한 말이다. 공부를 쉬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공부란, 텍스트 놓고 답을 도출하는 주입식, 암기식 기술적 공부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학교에서의 공부는 진짜 공부가 아니었던 거다. 우리는 내내 가짜 공부를 하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버렸다.

2.

가치를 가지고 해나가는 모든 일이 너무 허망하다고 말했다.
쇠귀에 경읽기도 하루 이틀이지 어떤 날은 너무 지친다고도 했다.
과연 세상이 좋아질까요? 그가 물었다.

세상은 결코 지금보다 대단히 좋아지진 않을 것이고 평화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으나 인간이 부지런히 가치를 위해 숭고하게 살겠다고 결심할 이유는 그저 도전하는 바람이 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라 하겠다.

한 사람은 한 사람을 설득할 수 없고
백사람이 모여 백마디를 백년동안 외쳐, 한 사람을 설득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라 말했다.
인간은 그만큼 미약한 것이니, 혼자서 아무리 애를 써도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세상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라는 걸 인정한다면

산을 폭파시키지 않고 돌을 지어 나르던 시지프를 이해할 수 있겠지.

3.

대부분의 일은 하지 않아도 될 일.
외면해도 무관한 일.
내가 가진 것이 적지 않기에 대충 살아도 괜찮은 일.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무언가를 빼앗길까봐 두려워서 시작하는 일은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 일이다.

금요일날 본 연극 중 대사 몇 가지가 남았다.
습관대로 사는 인생 습관대로 살다가 아무 생각없이 죽는다고.
잡귀 들린 인생, 남을 원망하고 게으름을 피우고 물질에 의존하는 이 모든 것이 잡귀라던 대사. 우리가 아는 정서적 문제를 예전엔 잡귀가 들려서 그랬다고 하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잡귀를 쫒으며 사는 일.
푸닥거리는 언제나 필요하다.

2015. 7.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