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쓰기

나의 담임선생님은 환갑쯤 된 남자 선생님이셨다. 이름은 곽동희. 서글서글한 눈매와 진한 눈썹, 그리고 대머리, 인상이 참 좋았다. 1학년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앞에 놓고 율동도 하고 손유희도 해야되는데 학부형들이 와서 구경하면 얼마나 쑥쓰러워 하셨는지 얼굴이 빨개지셨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우리 엄마는 늙은 영감이 1학년 선생을 할려니 죽을 맛이겠다며 혼자 깔깔대고 웃었다.

 

나는 한글읽기를 다 떼고 학교에 들어갔다. 교과서를 받은 건 예비소집일이었는데 날씨가 무척 추웠고, 우리 엄마는 예의 그렇듯이 가죽코트에 가죽장갑을 끼고 나타나 선생님들 옆에 서서 아이들에게 교과서를 나눠주었다. 나는 우리 엄마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게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엄마는 나에게 자기가 제일 많이 배운 사람이고, 니네 선생들보다 엄마가 더 많이 배운 사람이고, 엄마도 예전엔 고등학교 대학교 선생님을 했기 때문에 한 수 가르쳐 주려고 그랬다고 했다. 그건 우리 집에서 매우 정당화된 일상이었다. 엄마는 세상의 모든 선생들보다 한 수 위라는 것. 한 수 위인 엄마 아래서 자식은 당연히 월등해야 했다. 나는 교과서를 받아 온 날부터 국어책을 읽어 내려갔고 입학식 때쯤엔 통째로 외워버렸다.

파란 하늘 파란 하늘에 우리 태극기로 시작되는 국어책은 그 때 “바른 생활”이라고 적혀 있었다. 숫자가 마구 적힌 것은 “슬기로운 생활”이고 음표와 그림이 있는 것은 “즐거운 생활”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 이름들은 꽤 괜찮다.

즐거운 생활은 7살 때부터 간간히 다닌 피아노학원에서 배운 것을 생각하며 악보를 보고 멜로디언으로 불어보기도 하고 노래도 불러봤지만, 슬기로운 생활은 덮어놓고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다. 학교에 들어가 바른생활을 다 외운 나는 동네에 천재가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다. 글자가 몇 개나 됐겠는가. 읽을거리는 다 떨어졌고 새로운 판형의 책이 신기했을 뿐이다.

 

서글서글한 대머리 선생님은 우리에게 매일 네 바닥씩 바른 생활 써오기를 시켰는데 나는 한창 동네 아이들과 들로 산으로 놀러 다니는 재미에 흠뻑 빠진 때라 이 숙제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오자마자 가방에서 바로 공책을 꺼내 네 바닥을 휘리릭 쓰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딱지치기로 온 동네를 휩쓸자 엄마는 사내놈처럼 그게 뭐냐고 동네 창피하다고 야단이었다. 조만간 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살게 되실 건데 할머니는 많이 배운 분이라 네가 그러고 다니면 엄마를 욕할 거라고 했다. 나는 딱지치기를 자중하고, 대신 이상한 말을 만들어 씨부리고 다녔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에게 이게 영어라며 거짓말을 해댔다. 그 동네는 가운데 큰 길이 있고 그 길을 가로질러 냇물이 흘렀다. 네 바닥의 쓰기 숙제는 부모들에게 공책이 빨리 닳아 불만이었다. 어떤 부모들은 선생님께 항의도 하지만 이 숙제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담임선생님이 강조하셨다. 그 동네의 부모들은 멀리 고개 넘어 우유공장에 다니거나 우리 집과 큰 길을 사이에 둔 건넛마을의 소가죽 공장에 다녔다. 논은 몇 마지기 안됬고 다들 밭농사나 조금 일구고 살거나 우리 주인집처럼 돼지를 길러 내다팔거나 젖소를 키워 우유공장에 납품을 했다.

 

많이 배운 엄마는 공책이나 책값은 아끼는 것이 아니라 했고, 엄마만큼 많이 배운 할머니는 매일 모로 누워 AFKN을 보다가 동네 노인대학에 가서 기묘한 율동을 배워야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글씨를 쓰고 문장을 만들 수 있을 때가 되었을 때 학교에서 독후감 숙제를 내주었다. 나는 집에 있던 스물 네 권짜리 위인전은 이미 독파한 상태라 그 중에 세종대왕을 골라 독후감을 썼다. 200자 원고지 다섯 장의 독후감을 받아든 담임선생님은 감격하여 손을 부르르 떨었다. 이 양반은 나에게 장래 노벨문학상감이 나의 제자가 되었다며 격양된 목소리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마 그 때쯤이었을 거다. 일기쓰기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그림을 전공한 엄마의 자식으로서, 집안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림일기를 그렸다. 나는 매일 매일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단 하루도 잊지 않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일기를 썼다. 그리고 어느 샌가 나는 일기를 쓰면서 훗날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이 일기가 증거가 될 것이라고 믿으며 열심히 일기를 썼다. 최불암의 “수사반장”을 열심히 봤던 탓이 아닐까 싶다. 일기는 나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해 줄 것이라며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그림이 없는 일기를 썼다. 그림이 없는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에겐 자꾸 억울한 일이 생겼다. 울면서 일기를 쓰기도 했고 일부러 눈물을 일기장에 떨구기도 했다. 정확하게 조준해서 목표한 글자에 떨어뜨려 여울지게도 했다.

 

5학년 때까지의 일기장은 서른 번이 넘는 이사도중 아마 스무 번째 이사쯤에서 잃어버렸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2학년 때까지 썼던 일기는 짝사랑에 너무 괴로워 3학년 때 학교 난로에 넣고 불태워 버렸다. 그 다음부터의 일기는, 고스란히 지금 내 방 장롱에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다이어리를 쓰면서 촘촘하게 작은 글씨로 별의 별 이야기를 다 썼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테이블에 전화기가 놓인 창 넓은 커피집에 앉아 눈썹을 그리느라 두 시간이나 걸리는 친구년을 기다리며 일기를 썼다. 나는 그 때 작가처럼 개똥폼을 잡는 것으로 만족했다. 다이어리를 펼치고 5만 원짜리 파이롯트 만년필로 담배를 벅벅 피워가며 커피집에 앉아 맹물 같은 콜롬비아를 마시며 한 두 시간씩 뭔가를 써 제꼈다. 완성된 글은 없었고 그저 주절거림이었다. 생각나는 것들, 눈에 보이는 것들을 계속해서 써댔다. 당시 종각역에 파이롯트 대리점이 있었고 나는 간간히 그 대리점에 들러 역시나 개똥폼을 잡으며 만년필 구경을 했다. 워터맨이나 몽블랑 같은 만년필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내 한 달 월급보다 훨씬 비싼 것들도 많았지만 3만원이나 5만원짜리 만년필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20대 후반이 되면서 때로 드문드문 썼다. 매일 매일 쓰지 않는 날도 많았고, 가계부로 대신한 적도 있다. 억울한 일이 적어져서 알리바이를 만들 필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일기를 쓰는 대신 술로 뇌를 씻는 일이 더 많아서였다. 외로울 때는 일기의 양이 많아졌다. 하룻저녁에 예닐곱장을 쓰는 일도 많았다. 결혼 후 아이를 가졌을 때 미치도록 닭살스러운 육아일기를 쓰다가 실패했다. 신혼 때 우리는 복층으로 된 월세집에 살았다. 2층은 작업실과 내 서재로 사용했는데 어느 날 낮잠을 퍼질러지게 자고 일어났더니 남편이 2층에서 씩 웃으며 내려왔다.

“내가 너의 일기를 모두 읽었다! ” 라고 호기롭게 말하며 크게 웃었다.

그 때 내가 친정에서 가져온 일기는 스물 서너살부터 쓴 일기장이었는데 무려 7여년의 일기를 모조리 읽었다는 것이다. 거기는 옛날 남자친구의 글씨도 있고 그가 써준 메모도 붙여놨었는데 이 남자의 몰지각한 행태에 분노를 금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만큼의 관심이려니 생각하고 인권침해라 여기지 않았다. 때로, 누군가 이 일기를 봐줬으면 하고 쓸 때도 있었다. 일부러 남편 눈에 띄는 곳에 일기장을 놓아두기도 했다. 그와 갈등이 심할 때 내 일기를 봤는지는 모르겠다. 남편이 일기를 봐주기를 바라지 않아도 되는 지금, 나는 삶을 다시 살고 있다.

 

매년 한 권 이상의 일기장은 남았다. 지금은 스프링노트를 쓰기도 하고 큰 맘 먹고 몰스킨을 사기도 하고 단행본 크기만 한 노트에 매일 한 장이상의 일기를 쓰기 위해 노력한다. 시간이 늦었으면, “너무 졸린 관계로 이만” 이라고도 적는다. 나의 기록은 다이어리에, SNS에, 회사 업무일지에 남는다. 나에게 일기는 하루의 기록이 아니라, 일기장을 펼쳤을 때의 생각과 감정뿐이라 때로 어떤 기록도 없다. 누군가 고은시인의 일기장 얘기를 했었다. 고은의 일기가 출판되어 나왔는데 이 양반은 대취를 한 날에도 대취했다고 일기를 쓰더라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다. 졸린 날은 몰라도, 술을 누구랑 누구랑 마셨는데 누가 뭔소리를 했고, 이런 거는 적을 수가 없다. 쓰러져 자야되니까. 라기 보다, 귀찮으니까.

 

일기를 쓰는 일은 그저 하루에 하나씩 돌탑을 쌓는 기분이다. 누군가 와서 한 번에 허물어 버릴 수도 있지만, 그냥 하는거다. 일기를 다시 성실하게 쓰고 나서부터 잠을 잘 잔다. 내 머릿속엔 매일 매일 어떤 요란스러운 새가 날아와 이상하고 기괴한 집을 짓고 가기 때문에, 일기에다가 오늘 이 요란한 새가 지은 집에 대해서 대충이라도 털어놓고 자면, 머리가 무겁지 않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구구절절한 일기에 대한 글을 쓰고도, 나를 증명할 어떤 알리바이가 필요하지 않더라도, 일기를 쓰고 잘 것이다.

 2013. 11. 27.

남도에 다녀오다

거기 가면 따뜻하겠지.

날씨 앱을 꺼내 보며 생각했다. 숫자가 말해주는 온도는 쉽게 와 닿지 않는다. 그 숫자를 기록했던 어떤 날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숫자는 언제나 막연하다.

두 번째 남도로 가는 길. 남도에 얽힌 이야기는 숱하게 많다. 스물 한 살부터 스물 세 살까지 살았던 고시원에는 모두 남도 사람들이었다. 전라도 순천, 벌교, 목포, 장흥, 고흥, 보성 그 동네 사람들이 모두 왁자지껄 했는데 전주 사람은 북도는 껴주지 않는다고 찬밥이었다. 남도에 대한 환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것을 다녀온 지난 가을, 그 풍요로운 땅에 홀딱 반했다.

이다지도 아름다울 수 있구나. 바다와 산이 가깝고 그 사이에 들이 펼쳐졌다는 것은, 불편함을 담보로 하되 이런 풍광은 댓가가 있다고 말해주었다.

먼 곳의 여행을 할 때마다 기가 막힌 경치가 늘 신기했다. 그 풍경들은 그만큼 먼 길을 굽이굽이 돌고 돌아 산을 넘고 물을 건너야 만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게 자연이 가까이 오겠느냐 묻는 것에 대한 댓가라 생각했다. 운전을 해서 가는 남도는 대여섯시간이 걸렸다. 피로따위, 참을 수 있는 길. 고흥에 간다는데, 운전 따위 못하겠느냐고 실실 웃었다.

상위에 차려진 음식은 언제나 싱싱했다. 냉동창고에 들어가 본 적 없는 풀과 물고기가 그대로 상 위에 음식이 되어 올라오는 곳, 파도가 거세 양식도 어렵다 했다. 험난한 자연환경이 외려 득이 되는 곳. 고흥에 다녀오면 바다와 들을 멀리 하고 사는 것이 이렇게 비루한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햇살이 좋은 오전, 그 집에 갔다. 마당에 있는 작은 나무에 노란 것이 달렸다. 제주도 귤나무를 심으셨다는데 열매가 열렸고, 그냥 따서 먹으면 되는 일이었다. 귤을 집에서 따 먹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동네에 유자가 지천으로 널렸는데 딸 사람이 없어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땅에 떨어지면 고양이나 들쥐의 먹이가 될 것이고, 나무에 달린 감은 까치의 밥이 되겠지. 문득 까치 같은 날짐승도 유자를 먹을까 궁금해졌다. 시큼할텐데.

한 식구가 먹을 만큼만 심은 작은 밭에 무와 배추가 커다랗게 자라고 있었다. 그 옆에 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누구 먹으라고 나란히 놓았을까. 누군가 먹으라고. 와서 달라고 말하지 못할 누군가를 위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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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도 매달린 채 말라비틀어지거나 썩어가고 있었다. 삼시 세끼 밥을 먹고 노인들만 사는 마을에서 이 모든 작물을 거둬들이는 일은 작정해야 할 일이다. 고향집에 간 아들은 아무도 따지 않은 유자나무위에 올라가 유자를 따기 시작했다. 유자나무에는 가시가 있다. 팔순을 넘긴 노인이 일일이 거둬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이 만든 것을 만나보지 못한 유자는 작고 쪼글쪼글했다. 겉껍질은 시꺼멓고 울퉁불퉁했다. 검게 변한 귤도 마찬가지였다. 내다 팔기에 애매한 과일이다.

충청도의 힘이라는 책을 쓴 저자는 자이랑 식품에서 일하는 남덕현이라는 사람이다. 작은 책이라는 잡지에 젓갈 담그는 얘기를 쓴 걸 읽었다. 보기에 좋지 않으면 사람들이 외면한다고. 가라앉는 새우 단백질 때문에 팔리지 않는 젓갈이 속상한 이야기다. 유자를 생각했다. 보기에 좋지 않아 아무도 돈을 내지 않을 것이다.

그 집의 작은 마루엔 유자냄새가 가득했다. 70년을 해로한 두 노인은 유자 껍질을 잘게 잘라 마당에 내놓고 말리고 있었다. 한약방에서 약으로 쓰기에 내다 판다 하셨다. 그게 뭐 얼마나 큰돈이 되겠는가. 그냥 버리기에 아까워 햇빛에 맡겼을 터.

냉난방이 완벽하고 햇빛도 걸러 받아들이는 아파트에 사는 나는 버리기에 아까운 모든 것들을 노란 비닐봉투에 담아서 내다 버려야 한다. 햇빛에도, 바람에도 맡길 수 있는 게 없다. 모두 다 입으로 들어가 똥이 되지 않으면, 씨앗 하나도 함부로 버릴 수 없는 도시.

남도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수산시장에서 갓잡은 싱싱한 생선과 해산물을 사온 그날 밤, 우리집은 쓰레기장이 되었다. 스티로폼 박스는 네 개가 넘었고, 그 안의 물건들을 포장한 퍼런 비닐과 녹아가는 얼음을 씽크대에 버리고 생선 뼈다귀, 내 옷에 붙은 들풀의 씨앗 하나 모두 다 떼어내 쓰레기통에 곱게 넣어야 한다. 먹고 남은 게껍질은 가위로 잘게 잘라 노란 쓰레기봉투에 넣어야 더 많이 들어간다. 생선을 나누어 담는다고 나는 지퍼백을 다섯 개나 꺼냈고 냉동실 칸칸마다 각종 비닐로 쌓인 먹을 것들이 가득한 걸 알아챘다. 냉동실은 블랙홀, 이제 하루가 지나, 돌바지락이라 부르는 살조개는 다 먹어버렸으니 남은 꽃게를 차곡차곡 냉동실에 잘 넣거나 쪄먹어 치워야 할 일이 되었다.

 

순천을 지나오면서부터 추웠다. 집에 도착한 다음날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베란다엔 유자냄새가 가득한데 그 집에서처럼 향긋하지 않다. 신바람이 나서 꽃게를 4kg 정도 사왔는데 언제 먹나 싶다. 잎새주를 사왔는데 남편은 웬지 당기지 않는다며 냉장고에 그대로 두었다. 식탁 위엔 며칠 전에 사온 식빵이 굴러다니고 냉장고엔 일주일된 스타벅스 케잌을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으며 그 사이 식구들은 컵라면과 봉지라면을 사다 찬장에 쟁여놓았다.

남도의 것을 사온다고 내 집이 남도가 되지 않는다. 장소가 바뀐 먹거리들은 짐짝처럼 물러가겠지. 아쉬울 뿐인가. 슬프기까지 하다.

그 동네의 편의점에서도 원두커피를 찾아 캡슐원액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다음에 거 참 커피 맛대가리 없다고 마실 때, 옆에 앉은 중년의 남자가 전화통화 하던 걸 들었다.

“돗돔을 하나 잡았는디. 먹을 사람이 있는가?” 하던 얘기.

어쩌다 생기는 것에 대한 반가움, 우리 집엔 그런 게 있던가.

어쩌다 생기는 게 뭔가, 생각나면 주문하면 될 일이다.

동하지 않는 것은 마음이지, 물건은 언제나 움직일 수 있다. 돈만 내면, 무엇이든 주문할 수 있고,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구할 것은 오로지 돈. 그러니 무엇이 환영받을 수 있을까.

어쩌면 이 도시에선 아무도, 아무 것도, 그 어떤 음식도 열렬한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다.

뜬금없이 걸려 올라온 돗돔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비가 추적추적 온다. 나는 남은 꽃게를 냉장고에 넣을 것인가, 냉동실에 넣을 것인가, 얼음팩에 넣어 딤채에 넣을 것인가 결정해야 한다.

 

2013. 11. 24.

사람구경

1.

나는 사람을 믿지 않지. 라고 쉽게 말하곤 했다.
그게 아마 작년까지였는지, 올 여름까지였는지 모르겠다.

사람은 예측할 수 없지. 라고 지금은 바꿔 말할 수 있다.
영 능력이 안되는 것 같던 사람이 갑자기 뒷심을 크게 발휘하는 경우도 있고, 매우 잘 해낼거라 기대했던 사람이 바닥을 기는 경우도 본다.

사람들의 진정성, 순수성, 자율성, 자치적 능력들을 전혀 믿지 않으며 살아왔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내가 생각한 인간의 조건 중의 하나는 “절실함”이었다. 절실하지 않으면 아무도 치열하게 살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다. 누군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잘 하지 않는다는 건 절실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한 해를 보내며 다시 점검하는 것들 중에 사람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한 사람이 역량을 발휘하는 문제에 대해서, 한 집단이 힘을 모아내는 일에 대해서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게으르고, 안주하길 원하며, 안전하길 기원한다는 건, 생존의 법칙 때문일 것이다. 변화는 모든 동물에게 두려운 일이고, 스트레스고, 도전이다.
“나는 쉴 새 없이 변하는 게 좋아.” 라는 건 그 바닥에 터져 나오지 않은 다른 이야기가 분명히 있다. 그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거나, 집중하지 못한다는 건, 달리 말하면 끝없이 탐색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은 구석에 몰리고, 위기에 봉착하면 힘을 발휘한다. 안전한 상태에서 굳이 치열하게 살아나가야 할 필요가 무엇일까. 위기라는 건 생계나 생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의 정서, 자존감, 스스로 지켜야 할 마지막 존엄에도 위기는 찾아오곤 한다.

“에이 썅 내가 본때를 한 번 보여주겠어! ”
이게 바로 자존감의 위기를 맞이할 때 하는 말들일게다.

2.

올 해도 참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든 역동의 이유를 들여다 보기도 했고 혼자 추측해보기도 했다. 나날이 사람에 대한 이해도는 높아지는 듯 한데, 이런 건 참 위험한 일이라, 섣불리 나대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으나, 나도 모르게 행동으로 표정으로 발휘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해마다 일기장을 새로 열며
“삶은 치열해야 한다” 라고 적었다. 그렇게 적은 게 20여년이 되었다.

어제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힘들게 살지 말자.
지나치게 치열하게 굴지도 말자.
힘을 차곡차곡 쌓아야 오랫동안 버틸 수 있다.
변함없이 버티는 일,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라고.

정말 매년 다짐처럼 치열하게 살았던가,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이삼십대는 그렇게 살면서 바닥을 굴러보는 게 나았을 게다.

인간의 숭고함을 철석같이 믿고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시각을 만나면 당황스럽다. 그럴 때는 쓰레기장에서 재활용을 줍다가 밖으로 나온 기분이 든다.
얼마 전 만났던 YMCA 꿈프로젝트 친구들에게 마무리로 그런 얘기를 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그 어떤 동물보다 더 한없이 악랄하고 저열하고 폭력적일 수 있으나, 또 그 똑같은 인간이 이루어 낼 수 있는 숭고함은 신과 닿을 수도 있는 것 같다고.

3.

딸아이가 낮에 절친이라 하기 어려운, 아는 아이의 이야기를 전했다.
실종된 지 3주가 됬다는데 소식도 없고 가족들도 적극적으로 찾고 있지 않는 것 같다 했다. 그 아이는 남자아이인데 두루두루 아이들과 친하지만 딱히 친한 친구는 없으며 가정환경도 복잡한 것 같다 했다.
나는 심드렁하게 “배타러 갔을 지도 모르지” 라고 대답했다.
“에?? 새우잡이?” 라고 대답하는 아이한테
“뭐 세상만사 귀찮고 정붙일 사람도 없고 배타고 돈 벌고 그런 생각 했을 지도 모르는 거 아냐. 죽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좀 그렇잖아.”

아이는 다른 이야기들을 연이어 꺼내놓았는데 우리는 결국 “개천에서 용난다” 이야기까지 발전했다.
딸아이는 “되게 열심히 살고 훌륭한 아이들이 있는데 식구들 때매 신세 망치는 것 같은 애들이 꼭 있어. 걔들은 그런 가족이 없으면 더 잘 될 수 있을 거 같은데.” 라고 하길래
“그런 가족이 있어서 열심히, 치열하게 살고, 훌륭해 지는 지도 모르지.”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날 봐라. 내가 안정적이고 아름답고 막 존나 우아하고 선량한 집구석에서 사랑 듬뿍 받으며 자랐으면, 엄마가 지금 이만큼 왔겠냐?”
아이는 피식 웃었다.

4.

원인을 찾는다는 게, 찾다 보니 원망이 쌓이고 그게 분노가 되고 되려 홧병이 되어 덮쳐 오기도 했다. 원인을 찾았으면 해결방법을 찾으러 가야 했는데 원인을 찾고 나니 해결방법을 찾기 전에 너무 쇼킹해서 눈은 멀어버리고 정신을 잃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고, 아는 게 병이라고 했던가.
몰랐던 건 약으로 때우면 되지만 알게 되면 개복을 해야 된다는 얘기인가..
(잘도 갖다 붙이고 있다)

5.

암튼 그랬다.
오늘도, 어제도 나는 매일 매일 사람구경을 한다.
한 사람의 표정과, 그 사람의 마음과,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과 슬픔에 대해서. 어두운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왜 엄마가 안 오지. 하고 혼자 별의 별 상상을 다 지어내어 훌쩍이고 있던 세상 모든 늙어버린 아이들에 대하여.

오늘도 내가 젖은 머리를 말리고 얼굴에 치덕치덕하게 끈적한 크림을 바르는 동안 “엄마 안아줘.”를 반복해서 옹알거리다 잠든, 서캐낀 대구빡의 내 새끼에 대하여도.

+ 요즘들어 자꾸 의심되는 것은 내가 살아온 세월동안 내가 믿어온 가치관, 옳다, 아니다. 라고 판단했던 그 당시의 생각들이, 정말 옳은 것인가. 하는 거다. 아주 어렸을 때도 “이건 아니지” 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 생각해도 “이건 아니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긴 한데 그게 과연 모두 다 객관적으로 검증해봐도 그렇게 볼 만한 사안인가. 하는 것들이다. 흠.

+ 그래서 내가 간혹 탈북. 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가치관의 전복, 살아온 모든 삶에 대한 부정. 그게 가져오는 충격은 과연 어떤 것일까.

 

2013. 11. 18.

오늘의 숙제

1.

 

오래 묵은 친구를 만나기로 한 날이다. 멀리 여름나라에 살다 와서 아이 겨울 옷을 물려주려고 같이 옷을 정리하고 개고 싸고 하던 중에 작은 놈 같은 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숙제 프린트 했냐고 묻는다.

무슨 숙제?

그거 숙제 있잖아. 사진 붙여 가는거.

어.. 나는 모르는 일인데.

우리 아들이 알림장도 잘 안 가지고 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숙제를 해 가는지 안 해가는 지 잘 모르지만 가끔 점검은 한다. 숙제 점검을 하더라도 대부분 해 지고 난 다음이고 전화가 걸려온 시간은 오후 2시쯤.

아이는 집에 오자마자 가방과 실내화 주머니를 멀찌감치 팽개쳐두고 티비 리모콘부터 잡는다. 일단 런닝맨이나 정글의 법칙을 한 편 보고 방과후 일과를 시작하는 습관이 들었다. 두 편 세 편 넘어가고 유난히 시끄럽게 들리는 날엔 그만 보라고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래 너도 학교 댕겨왔으면 쉬어야지. 하고 냅두는 편인데 사실은 잔소리 하기 귀찮고 애하고 씨름하기도 귀찮아서 그렇다.

 

2.

 

친구 엄마의 얘기는 오늘 숙제로 가고 싶은 국내 여행지를 골라 사진을 프린트해서 선없는 종합장에 붙이고 그걸 발표하는 게 있다는데 집 프린터가 안되더란다. 몇 명이랑 통화를 한 끝에 다들 안된다 혹은 잉크가 떨어졌다 하길래 우리 집은 프린터가 웬지 잘 돌아갈 거 같아 도움을 구하려고 전화를 했단다. 안그래도 며칠전에 잉크패드도 갈고 프린터 점검을 마친 상태. 그러면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주면 내가 프린트를 해주겠다고 선뜻 대답했다. 세 명분을 부탁했는데 독도, 제주도, 불국사, 석굴암, 우도의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을 프린트만 해 주면 되는 일어었다. 친구 엄마는 집에만 있다 보니 컴맹 된 거 같다며 제대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다시 전화를 했길래 메일함을 열어보니 네이버 백과사전 링크가 걸려 있다. 사진은 따로 저장이 안되서 일일이 캡쳐를 떴는데 PNG로 저장했다가 프린터에 안 잡혀 다시 JPG로 다 돌렸다. 여섯장 정도 된다. 캡쳐 떠서 크기 조절해 프린트를 하고 있는데 내가 이게 남의 숙제를 해 주고 있는 꼴인가 싶었다.

뭔가 아닌 거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3.

 

내가 아이패드로 즐겨 하는 게임은 SIMS Play 라는 건데, 집 짓고 사람 캐릭터 만들고 마을을 꾸려가는 게임이다. 여러명이 공동으로 사는 집을 짓기도 하고 혼자 사는 집을 만들기도 한다. 공동주택, 즉 Share house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지 책도 한 권 나온 걸 봤다.

뭔가 아닌 거 같은데, 남의 숙제를 해주고 있는 거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드는 찰라.

그래 집집마다 프린터를 다 한 대씩 두고 있을 필요가 있나. 이런 게 나누는 거 아닐까. 어찌 보면 대행해 주는 거 같아 보이는 일과 누군가 물질적/비물질적 재산을 가지고 공유하는 것은 어디부터 어디까지 다른가 궁금해졌다.

 

오래전엔, 누군가 손으로 하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남의 옷을 지어주기도 했을 것이고 큰 일은 돈을 받았겠지만 친분이 있다면 단추 하나 달아주는 일 정도는 거저 해주기도 했을 것이다. 나에게 프린터가 있고 내가 화면캡쳐를 할 줄 알고 파일명을 변경할 줄 알고 사진크기를 변경할 줄 안다면 (업계에 계시는 분들은 모르겠지만 이런 작업도 꽤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그런 재주와 물적 자산을 공유한다는 것도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대신, 상부상조, 할 필요는 있을 거다.

 

4.

 

아들의 작아진 옷가지는 새로운 주인을 찾아 생명을 연장할 것이다. 보따리가 많아 친구를 집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에 프린트한 사진을 전해줄 엄마들을 만났다.

나까지 아이 엄마 넷. 학교 정문 앞에서 만나 얘기를 하는데 아이들의 숙제 이야기를 한다. 시 외우기, 쓰기 숙제, 수학숙제 얘기를 하다가 종합장은 원래 유선, 무선 두 가지를 챙기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다. 나는 할 말이 없는 거다.

멀뚱하니 있다가

“나는 몰라. 홈페이지 보면 숙제가 뭔지 있지만, 뭐 알림장도 안 가져오는 놈 챙겨주면 뭐해. 지 말로는 쉬는 시간이나 아침에 가서 한다고 하던데. 확인은 안되고.” 라고 했더니 옆에 엄마가 우리 아들은 알아서 하는 스타일이니 뭔 걱정이냐며 좋겠다고 한 소리를 늘어놓는다.

“아 글쎄 그 자식이 알아서 하는지 뻥을 치는지는 모르는 일이지.” 라고 했지만 아마 알아서 잘 할 거란다. 선생님이 숙제 검사를 하긴 하냐고 물으니 검사는 다 하시고 스티커 받아오는 거 보면 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노무 스티커판이 알림장에 있는데 이 놈은 알림장을 안 가져온다니까. 그리고 이제 관심없대. ”

“예환이는 알아서 할 거야. 아침에 가서 한다는 생각을 하는 거 자체가 다른 거야.” 란다.

 

태권도 마칠 시간이랑 교묘하게 맞아 떨어져 먼저 가겠다 하고 도장 앞에서 아이들을 봉고차에 태우고 있는 사범에게 우리 아이가 나왔나 물었다. 2층에 있는 도장까지 젊은 사범이 올라갔다 오더니 어머님 오신다고 얘기 없었으면 아마 혼자 갔을거라고 한다. 나도 그럴 줄 알았다. 차 타고 다니면 빙 돌아서 오래 걸린다며 혼자 뛰거나 퀵보드를 타고 다닌 지 1년이 되어간다. 집에 왔더니 아들놈이 도복도 안 갈아입고 게임하고 있다.

 

“야. 니네 뭐 시 외우기 숙제 있다매?” 나는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어. 다 했어. 도토리. 근데 싸인받아야 되는데.”

“오올..다 했어?”

“어. 진작에 다 했지. 근데 싸인 안 받았어.”

“엄마가 알림장에 싸인해주는거?”

“응.”

“얌마 니가 알림장을 가져와야 싸인을 해주든가 말든가.”

“니네 뭐 쓰기 숙제도 있다매.”

이 자식이 말이 없다.

“너 안하고 엄마한테 얘기 안할라 그랬지!!” 했더니 아들놈이 씩 웃는다.

“너 숙제 안하면 선생님한테 안 혼나?”

“안 혼나. 스티커 뺏기면 돼.”

“그럼 스티커 많이 뺏겨라.”

“눼~~”

 

5.

 

잔소리 하기 귀찮고 싸우기도 귀찮다. 방치하는 걸지도 모르겠고 내 머릿속엔 아이 숙제보다 다른 것들이 더 많을 뿐이다. 내가 야단치지 않으면 밖에 나가서 흠씬 깨지고 올 것이고, 선생님한테 야단맞고 친구들한테 놀림받기도 할거다. 경험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다쳐보고 넘어져보고 틀려보고 울어보지 않으면 절대 절실하게 느낄 수 없다고 믿는다. 얼마 전 큰 애가 동생의 친구관계 문제를 얘기하며 동네 형들이 제 동생을 이용해 먹는 거 같지 않냐는 말을 했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만 놀게 해야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나는, 그래서 너는 내가 그만 놀으라 하니까 네 하고 그만 논 적 있드냐? 라고 되물었다.

지가 깨져보고 지가 당해보지 않으면 와닿지 않는 건데 그걸 뭘 지가 좀 당해봐야 아는 거 아냐? 라고 다시 물으니 큰 애는 에휴. 하며 돌아앉았다. 뭔 한숨인지 모르겠다. 복합적인 거겠지. 그렇다고 해서 큰 애가 그 때 나 좀 말려주지, 또는 말리지 말지라는 원망은 아직 한 적 없다.

6.

 

아이는 동네 형들이 놀러와 딱지치기를 하며 놀고 있고 아직 숙제 할 생각도 없는 모양이다. 배는 부른 모양이고 나는 앉아서 이런 글이나 쓰고 있다. 내가 어떤 원칙을 갖고 있는 것도 없고 그저 아이들은 모두 각자 역량과 기질이 다르다고 믿을 뿐이다. 집에서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밖에서 배우는 게 많고, 집에서 굳이 꾸짖지 않아도 밖에서 욕 먹는 일도 많고, 싸돌아다니고 아이들과 패를 지어 불량하게 껄렁거리며 돌아다니더라도 길바닥에서 쓴 맛 보는 일이 더 많다는 것도 안다.

내가 아는 것은 고등학교 때까지 성적이 좋다고 꼭 좋은 대학에 가는 것도 아니며 좋은 대학을 나온다고 좋은 직장을 잡는 것도 아니며, 좋은 직장을 다닌다고 그게 철밥통인 것도 아니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조건을 갖고 있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라는 거다.

공부는 내내 뒷전이다 이제와서 원서쓰기에 혈안이 된 큰 아이에게도 이번에 못 가도 그만, 대학 안나와도 그만, 니가 필요하면 서른에 가도 되고 마흔에 가도 되는 게 대학, 어딜 가나 너만 잘하면 그만, 그렇지만 네가 분위기에 잘 휩쓸리는 기질이 있다는 건 인정. 이 정도로 얘기하며 타협중이다.

그저 내가 확실하게 아는 건, 아침에 학교 가기 전에 이는 닦아야 남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고 집에 와서는 무조건 손을 씻어야 감기에 덜 걸린다는 확실한 사실 두 가지다.

부담되는 교육비를 투자하는 대신 내 앞가림이나 잘 해 부양의 부담을 주지 않는 부모로 늙는 게 더 현명하다고 믿는다. 내가 내 앞가림 잘 하고 지내면 아이들도 그럭저럭 보고 배울 거라고도 믿는다. 이건 그저 믿음이다. 제도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도 대안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저 그럭저럭 무리하지 않게 살아가는 것, 그래서 부담되지 않는 부모가 되는 게 목표일 뿐이다.

 

7.

긴 이야기를 적은 것은 매일 매일 부모교육, 부모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가득한 기사와 글이 SNS에 차고 넘쳐서이다. 나 역시 외면하기 어렵고 우리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공동체의 구성과, 나눔과 공유, 누군가의 몰빵 또는 독박쓰기, 혹은 대리자와 대표자의 역할, 상부상조와 품앗이, 그런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 굳이 첨언하자면,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온 지 2시간을 넘기기 전에 꼭 집에 도착하려고 한다. 혹은 대리인이라도 있도록 스케줄을 조정한다. 이유는 숙제 때문이 아니고, 배가 고프다며 울면서 전화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오후 2시쯤이 되면 어디에 있던 열심히 달려 집에 도착한다. 아직은 이 아이에게 엄마가 가장 필요할 때는 배가 고플 때이기 때문이다. 

 

 2013. 1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