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 수 있는 건 오늘이다

3·1절을 전후하여 위안부이야기를 다룬 영화 “귀향”이 화제를 모았다. 국민모금으로 14년에 걸쳐 제작한 영화다. 관객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개봉 10일만에 220만명을 넘어섰다. 윤동주 시인의 이야기를 다룬 이준익감독의 “동주”도 100만 관객을 넘었다. 제88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미국영화 “스포트라이트”도 순항중이다. 바티칸의 성추문을 취재하는 기자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TV에서는 tvN의 주말극 “시그널”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1990년대 미제사건을 다루던 시그널에서 밀양여중생집단성폭행 사건을 다루자 SNS에는 당시 가해자들의 실명과 사진이 돌기 시작했다. SBS의 “그것이알고싶다”가 방영된 밤에는 포털마다 관련 게시물이 등장하고 해당 게시물의 댓글이 계속 달린다.

그 사이 국회방송은 최고 시청율을 기록하며 야당의 필리버스터를 중계했다. 마이국회텔레비전이라는 패러디게시물이 온라인에 등장했고 필리버스터 요약정리사이트까지 등장했다.

소와다리라는 작은 출판사에서 펴낸 초판본 시집이 인기리에 팔린다. 윤동주와 백석, 김소월의 첫 시집의 활자체를 고스란히 구현했다. 계간지 창작과 비평은 2015년 봄호에 1966년 판본을 복원해서 독자들에게 증정했다.

 

인기를 끌고 있는 문화컨텐츠들의 주제는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복고의 옷을 입은 정의다. 수년전부터 문화계에는 복고바람이 불고 있다. 복고의 소재를 가져오지만 그 안에 담긴 욕구는 정의의 회복이다. 올바르지 못했던 것들을 되돌리자는 의도가 숨어있다. 역사를 바로잡는 정의, 양심을 지키고 싶은 정의, 불의를 응징하고, 악을 궤멸하고자 하는 욕구가 드러난다. 거시사부터 미시사까지 그르친 것들을 복원하고자하는 대중의 열망에 부합하는 작품이 인기를 얻고 있다.

 

서울 인사동 가나아트센터에서는 “리얼리즘의 복권”이라는 제목으로 민중미술작가들의 전시를 열었다. 2월 한달간 이어진 전시는 이종구, 신학철, 황재형, 임옥상의 작품이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나란히 전시되었다. 1980년대에나 볼 수 있었을 법한 작품들이 2016년 인사동 한복판에 내걸렸다. 이 역시 복고열풍인가 싶었으나 폐광의 모습이나 6월항쟁을 그린 작품만 있는 게 아니었다. 바로 몇 달 전 민중총궐기에서 백남기농민을 쓰러뜨린 그 물대포의 현장이 목탄드로잉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다시 빙빙 돌아 그 자리다.

마을공동체운동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새마을운동과 그 맥을 같이 한다거나 새마을운동의 성과를 되새겨야 한다는 논조의 논문을 찾았다. 지금의 대통령은 태극기 옆에 서 있는 것 자체만으로 과거를 불러오는 표상이 된다. 현실이 무겁고 괴로울수록 사람들은 현재를 직시하기보다 다른 곳으로 도피한다. 어제는 굶었는데 오늘은 밥을 먹게 되니 좋았다고들 한다. 그것이 스스로 일군 것임을 부정하고 타인의 권력에 의해 수혜를 받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스스로 해 낸 것도 허상으로 믿는 것은 강력한 독재의 결과이다.

 

“사울의 아들”이라는 영화는 1944년 아우슈비츠에서 끔찍한 강제노역을 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 줌의 슬픔도 애도도 허락되지 않는 시공간에서 인간은 어떤 표정을 짓게 되는지 알 수 있다. 2016년 봄, 대중들이 그리워하는 과거에는 슬픔과 애도가 허락되었던가. 국가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슬퍼할 수 있었던가. 갈비탕에 기름이 많다는 김수영의 저 사소한 분노처럼 사람들은 TV가 불러온 개인의 범죄에 분노하고, 혐오의 대상을 재빠르게 찾아낸다. 바닥에 낮게 깔리는 가스처럼 독재의 힘이 이 땅을 휘감던 과거의 공포는 생각보다 명이 길다. 두려움은 오래 오래 살아남아 다시 소생했다. 테러방지법을 등에 지고, 공포가 부활했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악한 과거는 뻔뻔하게 되살아났다.

 

과거의 폭력을 바로잡아 오늘의 평화를 지킬 수 있을까. 과거를 돌이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건 드라마의 설정일 뿐이다.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건 과거가 아니라, 그저 오늘 뿐이다.

임옥상 2015 종이에 목탄 220*720 상선약수(上善若水)
임옥상 2015 종이에 목탄 220*720 상선약수(上善若水)

 

– 편집장 칼럼으로 쓰려다가 주제에 맞지 않아 개인 블로그로 돌립니다.

응답하라 1988의 판타지 

응팔 마지막회를 경건하게 기다리고 있다. 아들이 나에게 이제 오늘 응팔이 끝나면 뭘 할꺼냐고 물었다.
응팔은 골목에서 시작한 가족의 판타지를 말했다. 초반의 짜증나는 성보라 캐릭터와 아들 잡아먹은 며느리라는 시어머니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은 가족이라는 판타지를 구현하는데 충실하기 때문에, 민폐 캐릭터가 없다.
• 이것은 명백한 판타지다 •
운동화끈도 못 묶고, 주차 못해 골목을 점령하는 최택과, 동생 머리 끄댕이 잡아 뜯는 성보라와, 없는 형편에 쓸데없는 물건만 사오는 성동일도, 가만 보면 싸가지 없는 정팔이도, 딸년들이 싸우는데 그만하라고 말리지도 못하는 엄마 일화와, 카리스마로 동네에 군림할 수 있는 졸부 라미란이 없다.
바르기만 해서 엄친아를 시전하는 선우는 새아빠의 자리를 내주고 싶지 않은 갈등을 겪지 않고, 학생주임인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는 특공대 동룡이도 별 일 없이 순탄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위에 열거한 각자의 단점은 미화되었다. 그러니 이건, 판타지다. 주인공들은 크게 갈등하지 않고 서로 배려하고 편들어주며 화합한다.
이건 지금, 이 시대가 내 편을 그리워하는 판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리라. 이것은 명백한 판타지다. 동네 꼬마의 눈사람을 위해 회의를 여는, 그런 골목은 없다. 인간은 갈등하기 위해 존재한다. 골목은 “어메 짠한그…”가 존재하면서 동시에 뒷담화를 필수적으로 장착한다.
• 포기하는 자만 쟁취한다 •
응팔의 사랑은 가족보다는 현실적이다. 어남류 어남택에 대한 이야기가 분분한데 사람들은 시각적 이미지에 압도당하면 판단력이 떨어진다. 어쨌거나 드라마의 청춘들은 모두 곱다.

성덕선은 상징이다.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상징이지 동창의 75%가 좋아하는 여신을 말하는 건 아니다.
택이가 남편이 된다는 건 그의 승부수 때문이다. 결정적일 때 치고 나가고, 버릴 패를 확실히 포기하고, 대가를 아까워하지 않으며, 사랑 앞에 불친절하지 않다. 택이의 사랑은 정석이다. 이건 사랑을 얻는 법에 대한 이야기지 택이가 덕선이를 차지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환이가 탈락한 결정적인 이유는 성인이 된 아이들이 호프집에서 모여 피앙세 반지를 앞에 두고 한 고백이다. 친구들 앞에서 붕 띄웠다가 완전히 자빠뜨려 모래사장에 내리꽂은 형국이다.

덕선이가 정환이를 사랑했대도, 저런 남자와 결혼하면 안된다. 어따대고 고백을 장난으로 떡칠하나. 이건 정환이가 츤데레인 게 아니라 올바르지 않은 사랑에 대한 것이다. 사랑은 조롱하지 말아야 한다. 정환이가 사천에 내려온 택이에게 빨리 덕선이를 잡으라 말한 건 제 사랑의 알량함을 인정한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
내가 이 드라마를 본 것은 판타지의 구현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나에겐 저런 초등학교 동창들이 있고, 27년째 만나고 있으며, 아이들이 자라 술 한 잔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친구들이 생각났다. 나의 판타지의 빈 공간을 채워준 친구라는 소재가 맘에 들었다.
한 가지 더, 청춘들의 러브라인, 골목에서의 포옹과, 바닥이 뜨근할 거 같은 이불 위에서의 꿈결같은 키스가 전혀 추하지 않아서다.

다시는 저런 순간이 나에게 오지 않겠다는 걸 매 번 확인하고 나 자신에게 각인시키면서도 내 마음이 완전히 늙어 사그라지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게 해줘서, 그래서 좋았다.
인간에겐 판타지가 필요하다.

그 판타지가 더럽지도 추하지도 않다면 굳이 미워할 이유가 왜 있겠는가.
• 기분좋은 판타지였던 이유 •
건물주가 없기 때문이다.

정봉이네는 집주인이지만 단 한 번도 집세를 올리지 않은 듯 하다. 외려 이자 얘기도 안하고 차용증도 안 쓰고 세입자에게 돈을 빌려준다.
선우네도, 택이네도, 동룡이네도, 모두 자기 집을 가지고 있다. 택이아빠의 가게는 집에 붙어있고, 이들은 골목을 공유한다.
갑질하는 대상은 유일하게 드라마 끝날 때 성동일을 정리해고한 한일은행이다.

건물주 없는 세상, 상상해봤나.

어쩌면 이건 판타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로서 응팔은 끝났다.

성동일이 은행에서 짤린 건 이제 자본이 등장했다는 얘기로 해석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동룡이는 외식업에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으며, 보라와 선우는 결혼해서 검사와 의사커플이 되어 금수저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에게 곧 IMF가 닥치겠지만, 모두들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덕선이네는 검사 딸, 의사 사위, 국보급 바국기사 사위와 정규직 승무원 딸이 있고, 선우네와 택이네도 이 구도를 같이 가져간다. 정환이네는 이미 자본을 축척해뒀고 금성전자 대리점이 문제겠지만 하이마트가 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 둘째 아들이 철밥통이다. 정봉이는 희대의 럭키가이, 조만간 백종원이 될 것 같다. 동룡이는 곧 예식장과 장례식장 사업에도 진출하지 않겠는가. 아버지의 퇴직금으로 프랜차이즈에 뛰어들지도 모른다.
– 응답하라 1988의 마지막 회를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