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환경조사서라는 솥뚜껑

내일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이다.

학교 입학에 대해서 크게 개의치 않고 지냈다가 필요한 서류를 챙기기 위해 검토를 했다. 학교에서 나눠준 유인물 묶음에 입학식에 제출하는 서류가 있었다.

가정환경조사서 / 예방접종증명서 / 저녁 돌봄 지원서 세 가지다.

저녁 돌봄은 신청하지 않을 것이라 취학통지서를 받고 준비해 온 예방접종증명서를 민원사이트에서 출력했다. 각종 전염병에 대해서 미리 접종을 완료했다는 증명서인데, 입학식 전에 미리 접종을 받은 기관과 연락을 취해서 전산망에 올려달라고 요청을 해야 했다. 이런 서식은 최근에 전산화가 되었기 때문에 올해 입학하는 아이들은 어느 정도의 수작업이 필요한 부분이다.

가정환경조사서를 펴놓고 가족사항을 적는데 짜증이 밀려왔다.

아마 그 전에 봤던 학교 유인물에 영어와 한자가 마구 뒤섞여 있었던 것의 영향도 있을 것이고, 개인적인 다른 이유의 몇 가지 사건 때문에 좀 짜증이 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옛 말이 있다.

살면서 다들 그렇게 말하듯이, 옛 말 그른 거 하나도 없다.

이 속담은 매우 쉬운 말로 전하고 있지만 그 말은 사실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다.

가정환경조사서는 나에게 트라우마다.

내가 초등학교 즉, 그 때 말로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는 80년대였다. 그 시대에 나의 부모님은 이혼을 했다. 그 사람들은 30여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봐도 같이 살지 않는 편이 각자에게 훨씬 좋은 경우이다. 더 같이 억지로 살았다가 어떤 불행이 펼쳐졌을 지 예상할 수 없다.

이혼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잘못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별에 대해서 굳이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도 옳지 않다. 이미 한국이라는 이 고리타분한 보수의 나라에서, 조선조 이상하게 왜곡된 유교사상이 깊이 물들어 있는 이 환경에서, 이혼만은 절대 불경스러운 일이라며 참고 지내다가 결국 더 큰 불행을 앞두고, 아니면 이미 불행해 질대로 불행해 진 상태에서 서로에게 칼을 겨누며 헤어지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당신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의 이혼은 단지 두 사람만의 관계에서 작용하지 않는 것이 이 나라이다.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기에, 헤어지는 결혼부부들은 이 나라에 그리 많지 않다. 이 국가의 결혼은 수많은 인간관계와 불필요한 친족관계 때문에 얼기설기 꼬이는 경우가 훨씬 많다. 물론, 되도록이면 헤어지지 않고 사는 것이 좋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굳이 인간의 일부 나라에서 일부일처제를 고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깊이 따져본다면, 그 역시 주장의 논거는 희박하다. 단순히 그런 거 아닌가.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원래 그래 왔으니까. 글쎄 그 보다는 사회체제가 더욱 복잡해 지지 않았으면 하는 암묵적 동의 아닐까 싶은 것이다.

성장 후 여러 가지 이유로 이혼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였지만, 문제는 그 당시에 이혼녀의 딸로 살면서 받았던 여러 가지 상처들이다. 정작 당사자는 오죽했겠는가. 교회에서 주보를 나눠주는 시간에 사람들 많은 데서 “이집사 이혼했다며?” 라는 말도 들은 사람이 모친이다. 그게 그 때는 수모였다. 그런 시절이었다. 내가 늘 의아했던 것은 담임선생님에게 살짝 귀뜸한 일이 왜 전교에 소문이 퍼졌는가 하는 거다. 내가 고의적으로 누설을 했는지는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때는 “이혼자녀”라는 것이 매우 흔치 않은 사례였다. 전교에 단 두 명이 이혼자녀로 알려져 있고 그건 꼬리표가 되었다.

“쟤 엄마 이혼했대.” 라는 말.

가정환경조사서에 억지로 아빠를 적어 넣기도 했다. 아빠라는 존재가 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없으니까. 단지 같이 살지 않을 뿐이었고 자주 만날 수 없을 뿐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환향녀가 화냥년이 되던 세상을 지나, 사람이 죽어도 열녀가 났다고 숭앙하던 극악무도한 세상을 지나, 전쟁을 거쳐 수많은 남자들이 죽어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부부가 척을 지는 것은 대단히 불손한 일로 여겨지던 세상에서, 이혼은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강요했으며, 결핍된 것은 모자란 것이고, 그 모자란 것은 정상에서 벗어난 일이며, 정상에서 벗어난 것은 옳지 않다는 폭력이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흔히들 결손가정이라고 말했다. 최근에 들어서야 결손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이 좋지 않다며 굳이 그런 낱말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되묻는 사람들이 생겼지만, 국가와 사회가 정해놓은 가족의 이미지는 아빠 엄마 자식 둘로 이루어진 것이 정상, 그 외의 것은 비정상으로 여겨지던 규칙이 있었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것은 매우 폭력적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동일할 수 없고, 모든 것은 변화가 가능하다. 그 이유는 살아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변화할 수 있고, 다른 것들과 같을 수 없다. 다양성은 인간 존재의 근원이지만, 정치가 시작되고, 사회가 조직화되면서 정상과 비정상으로 범주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게 바로 통치하기 쉬운 조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줄을 세워, 이 줄에 들어서지 못한 자들은 이방인이라고 말을 하면, 그들은 법이 굳이 보호하지 않아도 되는 명분이 생긴다. 조르주 아감벤이 말했던 호모사케르의 존재 이유와 법철학이라고 하는 어려운 이름의 학문의 요점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법은 법 안에 있는 사람만 보호할 수 있고, 법 밖에 존재하는 것들은 외면해도 되는 정당성을 갖는다는 것. 그 편이 통치하기에 편하다. 누구도 반발하지 않으려 드는 것은 법안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방인이 되지 않고 법 안에 속한 존재가 되어 보호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보호받고 싶기 때문이다. 사회가 복잡하고 불안할수록 사람들에게 법은 마치 커다란 성채처럼 느껴진다.

그 성채 안에 들어간 자만,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규칙과 윤리, 도덕과 원칙, 이 것들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성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 폭력이 가득한 성채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는 사회를 만드는 일, 그 안에서 떨궈져 나오면 어쩔 것인가 하는 두려움을 이용하면 사람들은 “고분고분” 해진다.

 

사회적 질서를 위해, 사회적 문란함을 없애기 위해, 말도 안되는 이유로 정해놓았던 “올바른 가족상”에서 벗어났던 나는, 지금 그 “올바른 가족상”에 또 얼마나 멀리, 혹은 얼마나 가까이 서 있는지 모르겠으나, 가정환경조사서에 남편의 이름과 나의 이름을 적으면서 학력을 적는 란이 없다는 것을 새삼 희한하게 느꼈다.

 

없어야 마땅한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세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줄 서지 않으면 보호해 주지 않을테야. 이 나라는 전쟁이 언제 터질 지 모르는 나라니까. 게다가 삼면이 바다니 도망갈 데도 없고, 그 위엔 당신을 잡아 먹으려는 괴수들이 드글거리거든” 이라는 협박을 들으며 고분고분 줄 서던 기억.

 

가정환경조사서, 부모의 화목 정도와 내 집의 경제를 책임진 자들이 기업에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했는지 확인했던 그 고리타분한 서류가 30년을 돌아 나에게 다시 왔다. 내가 학부형이 되면 실내화를 빨지 않아도 되겠지 라고 생각했던 건 꿈이었으며, 이제는 학교에 경찰관이 나타나 학교폭력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학교폭력을 당하지 않으려면, 움츠러진 몸씨, 주눅든 말씨, 머뭇거리는 마음씨가 모두 문제가 된다고 했던 것은 정해진 매뉴얼이었을 게다. 그리고 그는 읽었다. 당당하고 큰 소리로 말하도록 합니다. 그 이유는 굳이 그가 덧붙여 읽지 않아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쫄면 피해자가 되니까” 라고.

가해자가 되지 말라는 말보다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키우고 조금 뻔뻔한 태도를 가지라고, 조용하거나 얌전한 성격은 법으로도 보호해 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삐딱한 마음이 들었다.

법과 폭력의 반복이 거듭되는 동안, 이제는 피해자가 될 성격과, 가해자가 될 성격의 유형이 나뉘고 있다. 모든 아이들이 당당하고 큰 소리로 말하고 “싫어. 저리 가. 하지 마”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세상의 폭력이 사라지는가.

 

이 사회는 사회의 조직보다 언제나 개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 더 많고, 사회가 개인을 지배한다는 것은 절대 인정하지 않으면서 “당신이 잘해야 국가가 잘할 수 있다”고 강요하고 있다.

 

대체 이 파렴치한 구조의 사상은 언제쯤 끝이 날까.

의리와 대의를 위해 싸우는 무사도 아닌, 징징대며 삥이나 뜯는 골목상권의 양아치 같은 이 조직은, 예전엔 자라였고 여태 솥뚜껑으로 남아 있다. 거리 곳곳이 솥뚜껑이다. 밥도 짓지 않은 무겁기만 한 솥뚜껑이, 솥은 어디로 간 지 뵈지도 않은 채 여기 저기서 날아다니고 있다. 이 나라의 전쟁과 테러는 솥뚜껑들이 해내고 있다.

 

2013년 3월

무가치의 의미

고통과 폭력의 치하에서 매일 매일을 살다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억압된 상태에 놓여 있는지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심리학 용어로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하는 상태에 빠져들고, 생명체는 생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특성을 지녔기 때문에 되도록 고통받지 않기 위해 나름의 방어기제를 발동시키기 마련이다.

어느 순간, 우연치 않은 계기로 그 세상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 때 자각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자신이 얼마나 폭력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져 왔는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하나 하나 주워올리는 고통의 조각들은 생명이나 재산을 담보로 스스로 얼마나 무력하게 살아왔는가를 비수처럼 정확하게 아픈 곳을 다시 찔러준다.

그 고통의 과정에서 스스로 어떤 경험치를 가지고 연마를 해왔느냐에 따라, 사람은 그 아픔을 일일이 드러내어 치료하고 일어나기도 하고, 자책감과 자괴감에 빠져 완전히 넋을 놓기도 한다.

때로는 없는 자아를 창조해내어 정신질환자가 되기도 하고, 무기력에 빠져 다른 중독에 빠져 고통을 회피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정서와 정신 장애에는 분명한 폭력의 이유가 있다.

한 자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타인의 행위는 폭력의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며 이 중에 신체적 폭력 외에 언어폭력, 방임, 통제 등도 포함되어 있다.

때로 한 공동체에서 정신적 나약함을 보이거나 특별한 정신장애를 보이는 경우는 가장 정상적이고 윤리적이며 비폭력적인 자아를 가졌을 개체일 가능성이 크다. 폭력의 치하에서 인정받는 방법은 같이 폭력을 배워 가해자의 아바타가 되는 것인데, 이런 개체는 그 사회에서 주목받는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 즉 영웅으로 비견되기도 한다.

사람이 갖게 되는 여러가지 고통은 대부분 하나의 큰 이유로 통합될 수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존재자체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이다.

한 인간의 노동에 대한 가치, 한 인간의 존재와 존엄성 자체에 대한 가치를 잔인하게 묵살당하고 호도당했을 때, 사람은 죽음만큼의 고통을 느끼거나 혹은 그 죽음을 실천하여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하고 자아의지와 실천이성이 살아 있음을 증명해보이고자 애를 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회피하지 않고 맞서 버텼던 자들은 대부분 극단적 종말을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애초에 폭력의 가해자가 생존하는 한, 이러한 죽음 역시 다시 한 번 몰가치 해지는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크다.

승리는 살아남아 버티는 자의 것이고, 한 번 자각된 폭력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인간의 순리다. 인간은, 아니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고 살아있는 그 자체로 존엄하여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

폭력의 반복

내재된 폭력의 기억이
다시 폭력을 부른다.
인간에게 복수심이란
존재를 유지하려는 관성,
혹은 형평성을 뜻하는 것인가 생각한다.

굳이 누군가에게 복수하겠다는 구체적인 마음을 갖지 않고 고상한 마음의 수련이나, 또 다른 행동의 승화로 변질되었을 때도, 잠재의식속에 숨어서 치유받기 매우 어려운 그 수많은 폭력의 기억들이, 타자를 향해, 혹은 자아를 통해 다시 발현된다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이 폭력인 줄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살았던 세월동안, 폭력은 이미 영혼 깊이 각인되어 살아가는 방법의 하나로 자리를 잡아 버린다.

각성이 일어나고 그 마음과 몸의 표현들이 모두 대단한 폭력성을 띄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한 다음엔, 이미 살아가는 방법과,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서 다른 여지를 다 차단해 버린 후다. 그리하여 가치관의 붕괴와 세계의 몰락이 동시에 발생하고 쉽게 이름 지을 수 있는 “우울증” 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몇 가지의 약물로 감정이 전달되는 시냅스들의 연결을 차단하고 깊이 사고하지 못하도록 나른한 육체를 만들어주어, 그 당시의 제 2의 반사적 폭력사태를 면하게 도와준다.

그러나 내재된 폭력의 문법을 고치는 방법은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고 세상엔 이미 혼자다.

세상의 모든 이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삶은 언제나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고 하나의 인간개체에겐 오직 하나의 우주가 존재하며 그 우주엔 오롯이 그 우주의 주인 단 하나다.

고립된 채 다른 세상의 문법을 배우는 일은 어렵다. 언어는 늘 타자를 모방하면서만 배울 수 있다. 모방이 불가할만큼 폭력에 길들여진 채 세월이 지나버리면, 반복되는 것은 좌절과 좌절의 연속이다.
게다가 이미 인간과 사회에 대한 맹목적 신뢰 없이 불신마저 무럭무럭 자라난다면.

그 이후는 걷잡을 수 없는 카오스.
그 누구도 사전에 막을 수 없고 오로지 결과, 상처와 폭력, 혹은 시체만이 남곤 한다.

2013. 01. 16

말하라 기억이여 치유하라 상처여

내앞에 깜빡이를 켜고 지나가는 405번 버스, 그리고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강남세브란스병원

이길을 지날때마다 얼마나 많은 일들을 안고 달렸는가 생각한다
서초 사거리에서 유턴을 하던 일, 급하게 여기 저기 전화를 하며 다시 예술의 전당 아래 우면산 터널을 지난 일 그런 것들 말이다.

여기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국립중앙도서관이 보이고 그 아래 검찰청과 경찰청이 이어져 있나. 한때 나꼼수라는 팟캐스트에서 열심히 활동했던 정봉주 전위원이 여기서 크리스마스의 구속이 결정된 날 사람들이 모여 역사상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구속 환송회를 했다

프로파일러의 강의를 듣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다. 이 사회에서 경찰과 검찰이 존재하고, 누군가를 단속하고 누군가가 누군가를 강제하고 재판하고 판단하고 단죄하고 구형하는 시스템, 그런 권리가 과연 인간에게 있는가 아니면 인간이 만든 시스템 위에 군림하는가 생각한다. 법안에 있는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밖에있는 누군가를 내쳐야 하는 것이 법의 기본이라던 아무리 읽어도 삐딱함이 느껴지는 조르주 아감벤을 떠올린다.

인간 세상에 대해서 유지되는 그 시스템의 효율성에 대해서 사람들은 한 번이라고 고민하고 살까. 특정한 계급이 세상을 엄호한다는 핑계아래, 한없이 자행되는 폭력의 연속성을 생각한다.

인간이 얼마나 처참하게 걍팍하고 잔인할 수 있는지 알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람의 인격의 밑바닥을 보고 싶을 때마다, 나는 살인범이 사람을 죽이고 토막내고 그러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영화를 즐긴다. 어쩌면 그건, 그래, 내가 겪은 폭력의 역사는 매우 고상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강요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모두 침묵하고 살고있다
말해야 한다.

나보코프의 말이 떠오른다.
말하라. 기억이여.

나는 얼마나 말 할 수 있 는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