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이후의 창동역

7시 30분, 지하철역 플랫폼에는 지하철이 도착하면 열릴 문 앞마다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마스크를 끼고 두 줄로 서 있었다. 모두들 서울로 가는 사람들일 거다. 이 지하철은 한강을 지나 강의 북쪽으로 가게 되어 있다. 열차가 도착했고, 나는 휴대폰 화면을 또릿하게 보고 있는 원피스 입은 아가씨 앞에 섰다. 지하철 안에서 누가 먼저 내릴 것인지 예측하고 싶었다. 내 모든 지략을 동원해도 당장 내릴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내 앞의 아가씨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내린 삼각지역에서 일어섰다. 거기서 내려 6호선을 갈아탈지도 모른다. 사당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내렸던 건 지하철이 4호선까지 있었을 때의 이야기였나보다. 동대문을 지나자 지하철이 한산해졌다. 자리가 많은데도, 한 여성노인이 내 옆에 와서 앉았다. 봇짐 같은 것을 안고 있었다. 나는 슬며시 몸의 방향을 비틀어 노인을 등지고 앉았다. 내 옆자리는 비어있었고, 그 옆자리엔 사람이 있었다.

노인은 교회에 다닐 것 같았다. 그는 마스크를 코까지 잘 아무려 쓰고 있었다. 나는 다른 자리에 가서 앉고 싶었다.

불안했다.

미아삼거리역은 미아사거리역이 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거기는 내가 살 때도 미아사거리였던 것 같다. 객차 안에 자리가 더 많이 생겼다. 나는 입구쪽에 있는 텅 빈 자리에 맨 끝에 가서 손잡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앉았다. 노인이 나를 의식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작년까지는, 살갑게 노인들과 먹을 것을 나눠먹으며 사는 이야기를 했고, 불과 며칠전까지만 해도, 그래도 다들, 다들, 악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몇 개로 서서히 쪼개지고 있었다. 창동역에서 내려 내가 좋아하는 루꼴라샌드위치를 먹으려고 스타벅스를 찾았다. 스타벅스는 이마트 안에 있었다. 물건을 정리하던 이마트 직원에게 출입구를 물으니 그 시간엔 문을 열지 않는다고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수백번 드나들던 그 동네는, 지금 내가 사는 동네에도 우후죽순으로 생기는 그 흔해빠진 스타벅스가 이마트 안에 단 하나 있었다. 나는 충전된 스타벅스 카드로 샌드위치를 사먹을 야심찬 계획을 포기하고 김밥을 수십 개 말아 쌓고 있는 분식집에 들어가 2500원짜리 잔치국수로 아침을 먹었다. 국수엔 요즘 비싼 애호박도 들어있었다.

일을 마치고 점심시간쯤, 마을버스를 탔다. 다시 내린 창동역 광장에는 남자 노인이 색스폰을 연주하고 있었다. 저 멀리 야외탁자 두어 개를 붙이고 말라가는 고추를 바라보며 뭐라 뭐라 말하는 노인 몇 명이 보였다. 역 주변을 돌았는데 마땅히 점심을 먹을 데를 못 찾았다. 나는 반대편 출구로 나가 점심 먹을 곳을 찾았다. 떡볶이와 튀김을 파는 집이 몇 곳 있었는데 집집마다 “생맥주 있습니다.”, “생맥주는 홀에서 드실 수 있어요.”, “테라 생맥주 팝니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나는 떡볶이 집에 들어가 3천원짜리 떡볶이 1인분을 시키고, 잠깐 참을까 하다가 생맥주 한 잔을 시켰다. 떡볶이가 먼저 나왔는데 맥주를 기다렸다가 맥주를 먼저 한 모금 마셨다. 역 주변을 도는 사이 이미 지쳤다. 떡볶이 한 개를 긴 꼬치로 집어 입에 하나 넣었다. 홀 안에는 둘이 앉아 점심으로 떡볶이와 분식을 먹는 같은 옷을 입은 남녀가 있었고, 노트북을 놓고 혼자 앉은 남자가 있었다. 나는 구석에 있는 2인석에 앉았는데 내 바로 옆 2인석에 한 남자노인이 와서 앉았다.

“아이구구구. 하아…”

노인이 되면 소리가 많아진다. 앉는 소리, 일어나는 소리, 물건을 내려놓을 때, 의자를 끌 때, 물을 마실 때, 음식을 먹을 때, 씹은 음식을 삼킬 때, 모두 소리가 난다.

노인은 떡볶이 1인분을 시키고 맥주는 시키지 않았다. 그가 나를 흘끗 보는 게 느껴져서 나는 휴대폰에 코를 박고 떡볶이를 씹었다. 노인은 모자를 벗어 테이블에 올려놨다. 마스크도 벗어 모자 위에 올려두었다. 그는 나와 너무 가까이 앉았다. 노인이 물을 뜨러간 것인지, 오뎅국물을 가지러 간 것인지 잠시 자리를 비웠다.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노인의 테이블을 보았다. 세탁한 지 오래된 듯 흔적이 있는 모자위엔 적어도 하루이상은 쓴 것 같은 꼬깃꼬깃한 마스크를 올려두었다.

노인이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떡볶이와 맥주를 번갈아 먹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말을 시작할 것만 같았다. 그러면 나는 ‘네 어르신 요즘 힘드시죠.’라고 교실 안에서 살갑게 웃던 나를 꺼내야겠지. 노인은 몇 가지 이야기를 더 할 것이다. 남성노인이니 대통령 이야기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씩 웃고 서둘러 입을 닦은 후 자리를 떠야겠지. 그는 마스크를 쓰지 않고, 떡볶이를 입에 넣은 채 말할 지도 모른다. 침이 튈 것이다.

노인은 몇 살쯤 되었을까. 칠십대 중반정도로 보였다. 그렇다면 내 부모의 나이와 비슷한 또래다.

거기, 창동이라는 넓은 동네 중에 중랑천과 각을 이루는 큰 도로에서 산쪽으로 오목하게 파인 지형에 새롭게 생긴 동네라 ‘신창동’이라고 부르던 곳이 있었다. 버스정류장의 이름이 ‘양조장앞’이거나 ‘신창시장’이었다. 내 친구들의 부모들은 신창시장에서 장사를 하거나, 어느 집 지하에 있는 공장에 다니거나, 양조장에 다니거나, 샘표간장에 다녔다.

거기, 그 창동역은, 87년, 그 동네로 이사한 뒤, 신창동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신창동에서 버스를 타고 다녀야 하는 방학역 부근의 중학교를 다니다 월계역 부근의 고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수시로 드나들던 몇 개의 지하철역 중의 하나다. 창동역 부근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국내 최초 대형마트인 하나로마트가 생기는 것을 보았다. 떡볶이를 먹는 저 노인은 내가 모르는 내 동창의 아버지일수도 있다. 떡볶이를 다 먹고 맥주도 다 마시고, 노인과 단 한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자리를 정돈하고 일어났다. 몸을 돌리자 가게의 문 앞에 노인과 거의 흡사한 모습의 다른 노인이 홀로 앉아 있었다. 테이블엔 튀김접시와 맥주가 있었다. 맥주 3천원, 떡볶이 3천원의 값을 치렀다. 휴대폰으로 ‘6천원, 점순이하우스’라는 문자가 도착했다. 열려 있는 문 밖에는 모자를 쓴 한 쌍의 남녀노인이 느린 걸음으로 길을 걷고 있었다. 백색의 SUV가 노인들의 뒤를 바짝 쫓았다. 남자가 오른손으로 머리가 허연 여자의 손을 잡고 왼손으로 차를 막는 시늉을 했다. 여자의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노인과 바짝 붙어 앉아 점심을 먹는 일은 흔치 않다. 창동역엔 노인이 많았다. 김밥 한 줄은 우리 동네보다 2천원이 쌌다. 인근에 내가 다니던 중학교가 있지만 가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쓰지도 않을 노트북을 가지고 간 데다가 땀을 너무 많이 흘려 마스크가 이미 홀딱 젖었다. 돌아오는 열차에서는 남녀노인한쌍이 내 옆에 앉았다. 분홍색 천마스크를 쓰고 있던 내 옆자리의 여성노인이 기침을 다섯 번 정도 했다. 에어컨을 틀어서 목이 건조해졌을거라고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지하철에서 내려 번화가로 들어가 상가건물 1층의 화장실에서 비누로 손을 박박 닦았다.

내가 복지관 교실 안에서 이야기를 듣던 노인들과 오늘 만난 노인들은 달랐다. 그들을 느끼는 내가 달라졌다. 웃을 수 없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퍼부을 것만 같아서, 고개를 돌렸다. 오늘 마주친 그 수많은 노인들 가운데 단 한명과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일주일내내, 노인들의 삶에 관한 칼럼의 마감날짜를 넘기면서, 절망하고 있다. 나에게 남았던 모든 이야기들이 증발해버린 것만 같다. 뉴스를 보지 않았으면, 조금 나았을까. 모르겠다.

애도의 시간, 추모의 세월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를 잃고 난 다음날부터 애도일기를 썼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에게 애도가 얼마나 필요한 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르트의 애도일기는 일반 노트를 사등분해서 만든 쪽지 위에, 주로 잉크로 때로는 연필로 일기를 써 나갔다. 그의 책상 위에는 이 쪽지들을 담은 케이스가 항상 놓여 있었다.’ 바르트의 애도일기는 현대저작물 기록 보존소에 보관되어 있었다. 나탈리 레제와 베르나르 코망의 공동작업으로 쪽지는 원고가 되어 책으로 나왔다. 한국에는 웅진출판사에서 2012년에 책으로 냈다.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내 무심결에 펼친 페이지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 12.9.애도: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 그 어떤 방어수단도 없는 상황.

28일 오후에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의 고장난 안전문을 고치던 청년이 열차와 스크린도어 사이에 끼어 숨졌다. 토요일 저녁에 혼자 작업했다. 2인 1조를 지키라는 매뉴얼은 애초에 직원이 없어 지킬 수 없었다. 공사시간동안 열차운행은 쉬지 않았다.
5월 30일 SNS에는 사망한 김 씨의 유품사진이 공개되었다.

▲ 사망한 김씨의 가방에서 나온 유품. 그는 19살 생일을 하루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SNS에는 사람들이 고인의 가방 속 유품 사진을 공유하며 분노하고 한탄했다. 가방 안에서 포장을 뜯지 않은 컵라면과 편의점에서 주는 나무젓가락, 집에서 가져왔을 숟가락이 나왔다. 지금 사람들이 애도하는 방식이다. 언제부턴가 이 나라의 애도엔 분노와 한탄, 자조가 뒤섞였다. 지하철 구의역에는 추모 쪽지가 붙기도 했고 국화도 놓였으나 이내 메트로 직원들에 의해 수거되었다고 한다.
2015년 8월에는 지하철 2호선 강남역에서, 2014년 4월에는 독산역에서, 2013년 1월엔 지하철 2호선 성수역에서 같은 사고로 작업자가 죽었다. 30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는 서울메트로노조 오선근 안전위원이 인터뷰를 통해 여태까지의 사고는 모두 2호선에서만 일어났고 그 외 스크린도어에 관련된 사고 모두 서울지하철 1호선에서 4호선사이에서만 일어났다고 말했다.

지난 봄, 내가 사는 아파트엔 외벽 도색작업이 있었다. 도색작업이 있을 예정이니 창문을 닫고 커텐을 치라는 방송이 있었다. 외벽 도색작업은 기가 막혔다. 아래는 화단 그대로, 맨 땅에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었다. 작업자는 줄 두 개에 매달려 12층부터 페인트칠을 하고 있었다. 관리사무실에 전화해 안전장치에 대해 물었다. 한참을 기다려 받은 대답은 이런 거였다.
아파트 주민협의체 (대부분 입주자대표회의다)에서 관리사무실에 외벽도색을 진행하도록 하고 관리업체는 건설사에 외벽도색을 의뢰하고 건설사는 하청업체에 도색작업을 의뢰하고 하청업체는 작업자를 찾아 외벽도색이 이루어진다. 관리사무소 직원은 맥 없는 목소리로 민원이 있었다고 말해보겠노라 했다. 입주자에서 관리업체, 건설사, 하청업체를 건너는 사이 도색작업은 끝이 났다.

지하철안전문공사도 비슷한 과정이 있다. 고장이 난 문이 있고, 지하철공사가 있고, 서울시가 있고, 안전문 설치업체가 있고 하청업체가 있고 비정규직과 계약직 노동자가 있다. 입찰가격에 10%을 깎아야 하는 암묵적인 룰이 있고, 예산을 줄이기 위해 더 싸고 더 빠른 업체를 찾고 업체들은 수익을 내기 위해 안전비용을 삭감하는 사이. 사람이 죽고 다친다.

주목할 것은, 애도의 물결이다. 이제 사람들은 잊지 않고 저 고매한 철학자가 했던 것처럼 쪽지에 애도의 글을 적는다. 사고 현장을 찾고, 기억하기 위한 물품을 만들어 몸에 지닌다. 온라인에는 추모공간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항의한다. 타인의 고통에 더욱 공감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 성숙의 결과일까 의심한다. 함께 분노한다는 것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무고한 죽음이 사람들의 삶 가까이 다가온다. 옆 사람의 숨결처럼, 고인의 슬픔이 내 품안에 들어선다는 건, 모두들 견디고 있다는 얘기다.

견디는 자들이 한데 모여 나의 팔을 엇갈리게 뻗어 옆 사람의 손을 잡아야, 대오는 단단해진다. 한 사람의 죽음이 씨앗이 되어 세상으로 흩어질 때, 영혼이 세포가 되어 공기를 떠돌 때, 우리는 옆 사람의 손을 꽉 잡고 걸어야 한다.

책이 된 《애도일기》의 해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번역이 끝났어도 여전히 번역이 안 된 채로 마음 안에 남아 있는 단어 하나가 있다. ‘슬픔’이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시대의 슬픔은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살아 남는 한 이 슬픔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이 해야 할 추모는 기억하고 따져보는 것이다. 애가 닳도록 쓰리고 아파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가야 할 곳은 더 이상의 희생자를 만들지 않겠다는 마음을 모으는 일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죽음이 가야 할 곳은 “기억했다”는 기념비 앞이다. 떳떳하게 죽기 위해 오늘을 견디는 모두에게 더 나은 내일이 있길 소망한다.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별표 부분은 책 서문에 적힌 문장을 발췌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