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 뿌리와 이파리

위험할 수 있는 책이다.

꼼꼼하게 읽고 저자의 의중을 잘 살펴야 한다.

한마디로 일반화하지 말고 호도하거나 곡해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책이다.

제국의 위안부

이 제목은 이 책의 정체성을 아주 잘 표현하는 좋은 제목이다.

“진보측의 이런 대응은 ‘정의’편에 서 있다는 자기확신이 만든 것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그런 식의 자기확신이 때로는 경직된 자세와 무책임한 폭력을 만들기도 한다는 점이다” (318쪽)

이 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위안부문제의 해결과 정확한 역사의식이 필요하다는 대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점검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아마 저자는 이 전에도 그랬듯이 친일파라는 공격과 최근 불거진 일베(충이라 일컬어지는)의 세력이 아니냐는 비아냥도 감당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사람이 흔치 않은 것처럼 타인의 의견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사람도 많지 않으므로.

적어도 내가 판단하기에 이 저자의 의견은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 할 적확한 주제이다. 그러나 이 문제의식이 보편화되기엔 대중과 정치의 기질적인 문제로 실현되기 어려워 보이기도 한다. 그 점이 이 책을 위험하게 만든다.

저자는 일본과의 화해가 난항을 겪으며 위안부문제가 청산되지 않는 문제가 어디에 있느냐를 집중 추궁한다. 분노는 화해를 불러올 수 없다. 저자는 이 점에서 우리의 위안부에 대한 인식이 일본과의 대화를 더 단절시키는 게 아닌가 의심한다. 그 의심은 직관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씩 증언록과 정대협의 활동을 통해 이 나라에서 만들어내는 위안부의 이미지가 왜곡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요약하면 이렇다.

일본의 전시에 동원되었던 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르다.

정신대는 근로노동을 위해 동원되었으며 일본이 국가적으로 동원한 식민지 노동동원 수탈에 해당한다.

위안부는 일본정부와 군에서 묵인한채로 조선인이나 일본인등 국적이 중요하지 않은, 그저 돈벌이에 급급했던 자들이 속이고 꼬드겨 모집한 10대 후반에서 30대까지의 여성들이다. 강제로 차에 태워 끌어간 사례는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 가정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취약계층의 여성들에게 돈벌이를 할 수 있고 여성이지만 자립할 수 있다는 것으로 꾀어내 각 전장으로 보내는 포주와 업자들이 존재했으며 그 포주와 업자들은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물론 일본정부는 이에 대해 묵인한 책임이 있다.

위안부는 성노예의 역할뿐 아니라 부대내에서 함께 전투를 보조하는 역할까지 해내야 했는데 간호사의 역할을 하거나 단지 성매매뿐 아니라 술과 노래와 춤이 있는 행사를 진행해 군대를 위안하는 전투적 조력자의 역할도 해내야 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조선인 위안부는 이미 공창제가 보편화되어 있는 일본인 위안부를 대체하는 역할이었으며 조선여성은 일본여성의 대체제이지만 같은 제국의 신민으로서 적국의 여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 역할을 위해 위안부들은 일본옷을 입는 경우도 있었으며 위안부 동원당시는 일본의 식민지배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는 점도 있다.

전쟁초기에는 나름 화기애애한 동지애적 분위기도 있었으며 사연모르고 위안부가 되어버린 조선인 여성들이 긍지를 가질 수 있는 분위기도 분명 존재했다는 것. 예를 들어 친절한 일본군이나, 너무 어린 위안부를 탈출시킨 사례나 일본군과 사랑에 빠진 케이스도 있다는 것. 그러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수록 이런 분위기는 당연히 폭력적으로 변했다는 것.

그러니 저자가 택한 제목은 조선인 강제 위안부라는 패러다임을 바꿔 <제국의 위안부>라는 패러다임으로 이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다소 강경한 말투로 정대협을 비판하고 있는데, 정대협은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약자이다. 이들이 사업초기에 위안부와 정신대를 혼동하였던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이 의의가 분명해 진 다음에도 왜 정정하지 않는가 묻고 있다. 또한 몇 몇 위안부출신 할머니들이 정대협과의 불화를 겪고 위안부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한 사례를 들기도 한다. 또한 구술이나 증언에도 질문자의 의도가 개입된 약탈적 인터뷰로 위안부 피해여성들을 극도의 피해자로만 규정하여 그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심리적 요인도 있다고 파악한다.

이런 운동의 주인공은 활동가이며, 정작 현장피해자는 그 들러리가 되어버리는 경우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묻고 있다. 피해여성 중에는 당시 전쟁이 심각하지 않았던 시절 일본병사들과 들판에서 소풍을 즐기거나 말을 타고 애들처럼 놀던 기억을 얘기하는 증언자도 있는데 이것은 이후의 삶이 얼마나 혹독했는가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정대협에 협조하는 순간 이런 모든 기억들은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다.

정대협의 주장이 국가의 주장이 되어버렸으며, 대부분의 증언자들의 내용을 종합했을 때 얼마전 만들어진 위안부 소녀상은 실제 위안부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는 것, 그런 것이 바로 적대감을 부추키고 끊임없이 일본과의 대화를 단절하여 서로 분노만을 주고 받는 감정선을 이루게 된 것이 아닌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힘겨웠던 것은 내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뒤틀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위안부의 모습도 바로 그 소녀상에 다를 바 없으며 평범하게 살던 집안의 금지옥엽 딸들도 무조건 끌려가 트럭에 실려 위안소에 던져지고 아편을 맞으며 버텨내야 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증언자들의 증언이 번복되는 사례와 전후 희생자들의 삶이 곤궁했던 것을 감안하여 진정 피해자들을 위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면 개별적이고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지 않는가 말하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다음 단락으로 축약된다.

“지금 필요한 일은, 그들을 ‘올바른 조선인 투사’로 존재하게 하면서 ‘국가의 품격’을 높이는 일이 아니다. 그저 그들을 ‘한 사람의 개인’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일이다. 중국이나 네덜란드와 같은 적국 여성들의 ‘완벽한 피해’의 기억을 빌려와 덧씌우고, 조선 여성들의 ‘협력’의 기억을 벗겨낸 소녀상을 통해 그들을 ‘민족의 딸’로 만드는 것은, 가부장제와 국가의 희생자였던 ‘위안부’를 또 다시 국가를 위해 희생시키는 일일 뿐이다.”

읽는 내내 불편했던 점은 일본의 패망이후 버려진 이들은 일부 일본군의 도움으로 전장을 탈출하기도 했으나 밀려드는 소련군과 미군으로 인해 더 극심한 (일부 증언자는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 해리성 기억장애를 말하는 듯) 2차 피해를 입고 인생을 7-80년 더 살고 나서는 완벽한 희생자의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할머니들의 행적을 보면 90년대 정대협이 출범하고 나서 도처를 다니며 생생한 증언을 들려주는 행사를 하고 있는데, 세상 살기 힘든 끔찍한 기억을 자꾸 말하다 보면 아무리 무덤덤해진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런 증언을 반복해서 할 자신이 없다.

일본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며 나는 반일주의자에 가까운데 문제는 사실을 왜곡하고 상징성을 덧칠하여 다른 목적을 추구하고 이득을 취하는 세력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등은 분명히 필요한 움직임이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사실 타인을 탓하기 전에 우리를 돌아보자는 것인데 이건 상당히 성숙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이 목적이 잘 이루어질 수 있을까는 의심이 든다. 물론 타인의 잘못도 비판하고 요구할 것은 요구해야 하지만 그 전에 나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자는 것은 식민지지배의 복잡한 구조속에서 위안부를 전장으로 내몰고 현재까지 괴롭히고 있는 그 적확한 주체와 말하자면 그 끝나지 않은 전쟁의 적이 과연 “일본”뿐인가 하는 것이다.

일본에 책임을 묻는 것을 넘어서, 반일과 극렬한 반대는 이 나라의 민족주의와 극우세력을 자극하여 전체주의로 몰아갈 가능성이 크다. 거대한 제국주의의 처음부터 끝까지 피해의식으로 똘똘뭉친 식민지배의 유령은 다시금 파시즘을 불러올 수 있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의 민족주의자들은 “히틀러”를 독일민족의 선구자와 대단한 혁명가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 때는 2차 대전이 본격적으로 잔혹성을 띄기 전이었고 히틀러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위인으로 평가할 수도 있어던 것이다.

책의 말미에는 전쟁시에 이루어진 일본인 위안부의 역할이 한국전쟁에도 이어져 유엔군이 한국에 주둔했을 때 유엔군 위안소가 있었으며, 미군들은 한국정부가 만들어 준 위안소를 즐겨 이용했으며, 그에 대해 미국은 단 한 번의 언급도 없이 한국의 일본정부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에 거들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도 묻고 있다. 기가 막힌 일이다.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0838.html

이에 대한 자료를 검색해보니 진보진영의 한겨레에서 보도한 바가 있었다.

식민지라는 것은 매우 복잡한 구조라는 걸 다시 깨닫는다.

솔직히 책을 읽어나가며 일본이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면, 이 나라가 과연 광복을 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광복 68주년. 우리의 전체주의는 어디까지 와 있는가. 추천한다. 대신 이 책을 읽기 전에 모든 편견을 내려놓을 준비를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책을 맹신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엔 수없이 많은 의견이 있다. 일베도 있고 51.6%의 투표율을 만들어준 사람들도 있다. 그 모든 의견을 듣고 판단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며, 개인의 자유다. 이 심리적으로 무거운 책을 내가 선택하고 꼼꼼히 읽은 것은, 솔직히 이 책을 펴낸 출판사를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2013. 8. 16.

저 새끼는 어떻게 살아있는거지?

1930년대생 어르신들을 만날 일이 생겼다.

오늘 처음 자리를 가졌고, 내 딴에는 그 분들께서 다채로운 이야기를 구성지게 펼쳐주시지 않으실까 기대도 했으나 기대일 뿐이었다. 할아버지들은 단답형으로 이야기가 끊어지기 일쑤고 가장 연세가 많으신 구순의 할머니는 한맺힌 이야기를 반복하셨다.

 

1930년대.

이 분들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일본제국은 곤고했다.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국가나 민족에 대한 의식이나 개념이 생기기 전에 일본이름이 주어졌다. 학교에 가면 일본어를 배웠으며 일본선생에게 일본노래를 배웠다. 불과 여섯 살, 일곱 살, 많아봐야 열 살인 아이들에게 왜 일본이름을 썼냐고 물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1930년대생, 그들의 부모들은 190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 일제침략을 직접 목도한 세대일 것이다. 그들이 새파랗게 두 눈을 뜨고 국권이 침탈되는 과정을 지켜보았을 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갖지 못한 백성의 한 사람으로 나라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지는지, 내부가 얼마나 썩어들어갔는지 이미 다 체감하지 않았을까.

한 국가가 외세의 침략으로 무너지는 것은, 강력한 무력과 고도의 심리전이 같이 동반된다 하더라도, 어딘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분명히 존재했으리라. 물샐 틈이 없는 집구석에 도적이 들어오진 않으니. 어쩌면 일제시대의 개막을 환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본의 점령을 환영한 자가 과연 친일이었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 폭압과 차별에 대한 반감으로 어찌됬건 무엇이 됬건 “새로운 것”이 도래하길 기다리지 않았을까 말이다. 물론 친일의 문제는, 폭력을 인정하고 수긍하고 동조했다는 점이 크기에 비난받아 마땅하다.

국가와 민족을 생각해, 정치적으로 독립을 주창하고 굳게 맞서 싸웠어야 하는 것은 국가구조를 지켜내는 명목으로 녹을 먹는 자들이지, 논밭에서 뒹굴고 해지면 피곤해 곯아 떨어지는 백성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1930년대생.

이 분들은 자연스럽게 일본학교를 다니고, 국가와 민족의 사전적 정의를 알게 될 때쯤에 해방을 맞이 하게 된다. 그리고 신속하게 퍼져나가는 애국심과 민족주의의 급물살을 타게 된다. 그렇다면 이들은 1945년 8월에,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 것인가.

자기의 의지와 무관하게 배웠던 일본어와 불과 20년이 안되는 세월동안 정겹게 써오던 두 개의 이름들, 그 중의 하나를 처참하게 밟아버리고 정들었던 일본인 선생과 이웃들이 (모든 일본인 개개인이 제국주의인 것은 아니므로) 있었다 한들 모두를 부정해야 하는 역동의 순간을 맞이했을 것이다. 매일 보고 다녔던 일장기를 불태우고 저들은 모두가 다 악마와 같은 것들이라고 한 순간에 세상이 뒤집혔을 때, 10대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태평성대에도 자기 정체성에 혼돈을 느끼던 순간,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한 개념이 한꺼번에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그리고 해방과 동시에, 이들은 문맹이 된다.

배운 것은 일본어요, 썼다가 불이익을 당한 것은 조선어였으니, 그들이 조선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다시 돌아왔을 때 국가는 이데올로기에 휩싸여 이리저리 흔들렸고, 곧 전쟁이 터져 피란을 가거나 숨어 지내거나 전쟁터에 나가거나 살아 있기 위한 시간을 지낸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을 무렵, 피폐해졌거나, 혹은 무기력해진 모습으로 다시 새로운 세상에서 잘 살아나가기 위해 부지런히 벌어, 먹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악착같이 조선말을 다시 익히고 갈고 닦고 학교로 돌아간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19세기, 20세기만 그랬던가, 그 때 동아시아만 그랬는가.

인간은 그저 큰 물결에 휩쓸려 흘러 흘러 떠내려 간다. 그 중에 누가 더 근력이 좋아 떠내려가는 통나무를 끌어안는지, 그 통나무 위에 떠내려가는 누구를 건져 올리는지, 어떤 사람은 떠내려 가는 돼지를 실어 올릴 수도 있고 거센 물살 속에서도 실속 차리는 인간은 분명히 존재하고 힘에 부쳐 물밑으로 가라앉는 자도 있다.

물길은 끝없이 흐르고 우리는 언제 헤엄을 치고 언제 고개를 들며 언제 숨을 쉴 것인가 결정하며 떠내려 간다. 죽어가는 생명을 외면할 것인가, 같이 죽기를 불사할 것인가 말이다.

소용돌이 치는 물결, 아래는 한 치도 예측할 수 없는 흙탕물속에서 끝없이 내몰리고 휘몰아치는 일. 그런 자아들이 모여, 타인은 과연 어떻게 생존해 나가는 지 들여다보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누가 그런 얘기를 했었다.

한반도가 3면이 바다인데, 그 모든 바다를 포기하는 순간, 한반도의 모든 인간은 중앙만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고. 모두가 사대문안에 모여, 다른 놈은 어떻게 담을 타고 오르는가, 끊임없이 관찰해야 하는 것은, 누구도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으며, 어떤 집단도 정당한 제도를 만들어 번호표를 끊어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옆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다 알게 되는 정서의 출발.

그건 바로 “저새끼는 어떻게 아직도 안 죽고 살아있는거지?” 라는 끊임없는 생존의 위협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2013. 5. 20.

일본극우주의자들의 망언 및, 일베충 광주모독 때매 매우 속이 시끄러운 2013년 5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