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이 뒹구는 밤

오후부터 비가 내렸다. 가까운 곳에 친구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언제나 같은 생각을 한다.
초등학교부터 한 동네에서 살던 녀석들과 겨울밤 거의 매일 모여 삼치구이에 소주를 마시던 생각을 한다. 꼭 삼치를 시켜달라 하고 꼬닥꼬닥 졸던 녀석이 있다. 집에 가서 자라고 욕지거리를 해도 있다 갈꺼라 했다. 그 때 우리는 서른을 몇 년 남겨두고 있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할 것 같지 않았으나 늘 취해서 헤어지곤 했다. 초등학교 동창들은 만나면 퇴행현상을 보인다. 우리는 늘 별 일 없이 만나서 별 일 없이 헤어졌다. 퇴근길에 집 앞에 와서 나와. 라고 말하면 그냥 나가던 시절이다.

비오는 저녁 운전은 해야 하는데 아이는 전화를 해서 끊지 않는다. 나와, 하면 나가던 시절에서 무려 14년 정도가 지난 저녁이 되니 차를 돌려 동네 친구에게 간다. 동네 친구와 남의 영업집에서 삼치를 구워 소주를 마시는 게 아니라 내일을 생각해서 동네 친구의 까페에서 히비스커스차를 마신다.

내일따위 없던 시절에서 아주 멀리 돌아왔다. 그 먼 길을 돌아돌아 다시 동네친구를 만나게 되는 비오는 밤, 길거리에 풍선이 굴러다녔다. 흰색과 연분홍색 고운 풍선 네 개가 하나로 묶여 있다. 어느 아이가 잃어버렸을지, 아니면 행사장에서 굴러온 것인지, 누가 힘겹게 얼굴이 벌개지도록 불어댄 풍선인지 기계로 한 방에 부풀린 풍선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왠지 저 풍선엔 누군가의 숨이 담겨 있어 차로 치이면 안될 것만 같다. 우회전으로 들어오는 차도 풍선이 신경쓰이는지 속도를 낮췄다. 풍선을 불면 날아갈 수 있을 것 같던 때를 굽이굽이 돌아오면 풍선을 부는 게 노동이 되는 세월이 기다린다. 그래도 마음속엔 풍선을 함부로 터트리면 안된다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누군가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긴 풍선이 빗속에 굴러다닌다. 누군가의 숨결이 잦아드는 그 밤에도 그랬겠다.

2014. 9. 2.

비오는 밤

기억이 잊혀지는 게 구슬프다.
내가 잊어가는 것도 구슬프다.
빗소리는 더 이상 양철지붕을 때리지 않는다.
곱게 화단에 내려 앉아 값비싼 향나무를 적시고 비싼 개밥을 먹고 사는 개들의 똥무덤을 적실 것이다.

하나씩 잊혀져 가는 게 구슬프다.
온 몸을 감싸던 외투를 벗는 계절이라 슬프다.
태양이 빛나고 꽃이 피더라도 답답하던 옷에 배어 있던 체취가 그리운 날이 있더라.
갑자기 눈이 왔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날이 흩어진다.

올 겨울은 너무 길었지. 올 겨울은 너무 힘들었지, 그래서 빨리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하면서도 꽃은 기다릴 수가 없네.

그 겨울의 시작부터 믿기지 않았으니까. 결국은 그래도 겨울은 가고 봄은 오는 건데, 이렇게 쉽게 가고 이렇게 쉽게 와도 되는 건가..
이렇게 쉽게 가고, 이렇게 쉽게 올꺼면 왜 그렇게 잔혹했나.. 싶은게지.

곧 저 멀리 남쪽 마을엔 산수유가 핀다는데, 삼중창 유리밖에 잘 들리지도 않는 빗소리가 들린다고 우기면서, 갈 봄 여름없이 꽃피네 꽃피네. 라고 중얼중얼.
개 한마리 애기 하나 드르렁 거리는 애매한 계절의 비오는 밤이다.

2013. 3.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