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에 관하여
첫 번째 밤 – 241203
123 비상계엄이 선포된 것은 밤 10시 23분쯤, 이 비상계엄은 11시에 포고령이 발표되면서 시작되었다. 다들 기억하다시피, 일찍 잠이 든 사람들은 이 사태를 모르고 지나갔고, 잠자리에 들려던 사람들은 87체제 이후 처음으로 벌어지는 비군인출신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믿지 못했다. 남은 방법은 국회가 비상계엄을 해제하는 것이었다. 한밤중 야당의원들과 보좌관들, 시민들이 여의도로 달려갔다. 경찰들이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가로막고 출입을 통제했다. 국회의원, 보좌관, 시민들은 담을 넘어 국회 본회의장으로 달려갔다. 국회로 들어오는 탱크를 막아세운 것은 시민들이었다. 모임중에, 술 마시다, 집에 있다, 아르바이트를 하다, 강의를 듣다가 뛰어온 사람들, 그밤 사이 계엄군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과천청사, 국회의사당,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사에 진입했거나 진입을 시도했다.
국회는 신속하게 190석을 채웠다. 국회의장의 진행에 따라 12월 4일 01시 01분경,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되었다. 국회가 해제를 요구하더라도 대통령이 이를 해제한다고 발표해야 한다. 그 새벽을 뜬눈으로 기다렸다. 새벽 4시 26분경 윤석열은 대통령실 브리핑실에 나타나 자리에 앉아서 계엄을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자리에 앉아서. 대통령실 직원이 나와 그의 의자를 밀어주었다. 포고령 위반자는 영장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고 되어 있다.
두 번째 밤 – 241221
12월 7일 국회는 윤석열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상정하였으나 실패했다. 국민의힘의원들이 입장하지 않아서 투표가 성립되지 않았다. 일주일 후 12월 14일, 두 번째 탄핵소추안이 통과되었다. 국회의원 300명 전원 출석, 가 204표, 부 85표, 기권 3표, 무효 8표였다.
12월 21일 윤석열 탄핵촉구를 위한 집회에 참석하고자 전국농민회가 상경을 시작했다. 서울의 관문인 남태령에서 경찰에 의해 길이 막혔다. 한남동과 광화문에서 집회를 진행했던 시위대는 지하철을 타고 남태령으로 결집했다. 진보당을 비롯한 녹색당, 정의당이 합류했고 거대한 시위대가 남태령을 가득 메웠다. 12월 21일에서 22일사이 서울의 최저기운은 영하 7도였다. 남태령은 바로 옆에 군부대가 있는 고갯마루일 뿐이라, 바람이 거세고 유난히 춥다. 그밤, 트랙터를 지키겠다고 수천명의 시민들이 밤을 새웠다. 밤새 배달라이더를 통해 음식과 물품을 보낸 사람들이 있었다. 밤을 꼬박새우고 아침차를 타고 당도한 사람들과 밤샘을 한 시위대가 교대했다. 서로 약속도 하지 않았으면서.

세 번째 밤 – 250103
윤석열을 내란우두머리로 체포구금하여 수사하기로 결정한 고위공직자수사처는 윤석열 체포를 위해 12월 9일 그를 출국금지 조치했다. 1월 1일경부터 체포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체포촉구와 체포반대 시위대가 한남동 관저에 몰려들었다. 1월 3일, 공수처는 한남동 관저 주변에 차벽을 치고 시위대를 분리시키며 체포영장 집행을 위해 새벽 6시 14분 과천 청사에서 출발했다. 밤을 꼬박새우고 그 장면을 기다렸다. 윤석열이 체포되어 나오는 모습을. 7시 17분경 관저에 도착한 공수처 직원들은 관저 앞에서 경호부대와 대치했으며 저지선을 두 번이나 뚫었으나 13시 30분 체포영장 집행을 중지하고 청사로 돌아갔다.
윤석열체포에 실패하고 무기력하게 돌아가는 공수처의 모습을 본 시위대는 1월 3일 저녁 7시부터 한남동관저에 모여들었다. 저녁 7시부터 시작된 한남동 관저앞은 밤이 되어도 집회를 중단하지 못했다. 시위대가 자리를 뜨지 않았다. 1월 3일부터, 돌아가지 않은 시위대는 4일 낮을 맞았다. 5일 되는 새벽, 눈이 내렸다. 각자 챙겨온 응원봉, 핫팩, 알루미늄 은박담요를 뒤집어쓴 시위대는 아스팔트 위에 스티로폼을 깔고 은박지를 뒤집어쓰고 고스란히 눈을 맞았다.
1월 5일 저녁, 비상행동은 집회를 해산한다고 발표했다. 사람들은 함께 집회 장소를 청소했다. 그 사이 난방버스와 은박담요, 스티로폼, 핫팩과 간식, 푸트트럭이 정신없이 한남동에 도착했다. 빈손으로 갔다가 가방을 채워오는 형국이었다. 그렇게 한남동의 밤이 갔다.
네 번째 밤 – 250114
1월 14일, 23시부터 경찰들이 한남동 앞 관저앞에 차벽을 세웠다. 새벽 3시경부터 온갖 경찰차량이 한남동을 에워쌌다. 새벽 4시 13분, 공수처 차량이 관저 앞에 도착했다. 세 시간이 지나서야 7시 32분 관저 진입에 성공했다. 또 다시 세 시간이 지나 10시 33분 윤석열이 구속되어 공수처로 이동했다. 1월 17일 공수처는 윤석열 구속영장을 서울서부지방법원에 청구했다. 18일, 윤석열 영장실질심사가 있었다.
다섯 번째 밤 – 250119
1월 19일, 서울서부지방법원은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보고, 윤석열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윤석열체포를 반대하는 극우세력들과 지지자들이 서울 서부지법 앞에 모여있었다. 새벽 03시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새벽 03시 10분부터 윤석열 지지자들이 서울서부지법을 폭력적으로 진입하며 침탈했다. 서버에 물을 붓고 경찰을 폭행하고 기물을 파손했다. 이들은 서로 유튜브 방송을 하며 이 모든 걸 기록으로 남겼다.
여섯 번째 밤 – 250124
1월 24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윤석열 구속기간 연장을 불허한다고 밝혔다. 밤 10시 7분이었다. 토요일이었다. 광화문에서 종료되려던 집회가 연장되었다. 나도 종로에서 술을 마시다 광화문으로 달려갔다. 25일 새벽 2시, 검찰은 법원에 구속 기간 연장을 재신청했으나, 같은 날 밤 8시 57분, 법원은 구속기간 연장을 불허했다.
일곱 번째 밤 – 250325
헌법재판소의 시간은 길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다시 서울로 상경했다. 이번에도 남태령에서 길이 막혔다. 나는 그날 마감을 하나 정리하고 밤 11시에 지하철을 타고 남태령으로 갔다. 밤새 집회가 이어졌다. 물품과 간식이 계속 돌았다. 아침에 출근해야 한다던 시민들과 함께 새벽 6시까지 자리를 지키다 극우세력들을 지나쳐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12.3 내란 이후 일곱 번의 밤을 기억한다. 그밤은 길었고, 세상의 모든 험한 것들이 튀어나오는 시간이었다. 그럴 때마다 험한 것들을 다시 상자에 넣으려는 빛들이 어디선가 나타났다. 악귀를 퇴치하는 횃불들처럼, 쏜살같이 나타났다. 헌법재판소의 파면 판결이 있기 전에 4월 3일을 지냈다. 1947년 3월 1일부터, 1948년 12월 31일 제주의 계엄령이 해제되기까지 그들이 견뎌야 했던 무수한 밤을 생각했다.

2. 80년 광주에서, 45년이 지난 어젯밤
곧 5월이 올터였다. 전남도청을 지켰던 그 밤을 생각했다.
1979년 10.26 이후, 전두환은 민주화운동가를 석방하고 김대중의 가택연금도 해제하며 마치 민주주의를 실천할 것처럼 위장하였다.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3월 1일, 전두환이 중장으로 진급했다. 마치 서울의 봄이 올 것 같던 그때, 5월이 되자 전두환 신군부는 계엄군을 이동시키며 경계를 강화했다. 5월 3일, 9공수여단이 수도군단에 배치되고 5월 13일까지 여러 개의 공수여단을 옮겨 배치했다. 5월 7일 한국외대를 시작으로 학생들의 가두시위가 시작되었다. 5월 14일, 육군본부는 전군에 계엄군 투입준비를 지시하고, 소요진압본부를 설치했다.
5월 15일, 서울역 앞에는 10만여명의 대학생이 모여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날 밤, 서울 23개 대학교와 24개 지방대 총학생회장들은 자정에 고려대에서 모여 회의를 진행했고, 가두시위 철수를 결정한다.
5월 16일, 김영삼과 김대중은 비상계엄 즉시해제, 정부 주도 개헌 포기 등 요구사항을 발표했고, 다음날 국회의장 대리는 5월 20일에 비상계엄 해제안을 상정하겠다고 밝혔다.
5월 17일 오후 4시 50분, 전군은 부대 출동명령을 내린다. 밤 9시 42분, 국무회의에서 계엄확대 선포안을 찬반토론없이 8분만에 의결한다. 17일에서 18일이 되는 자정, 비상계엄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제7공수여단은 이미 17일 밤 10시에 광주에 투입되었고,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 광주교육대학교에 자리잡았다.
소년이 온다를 함께 읽는 시간을 17일 밤으로 선택할 수 있었던 건 주말과 겹친 이유도 있지만, 17일부터 18일이 넘어가는 그 새벽에 의의를 두고 싶었다. 광주에 투입되었던 진압군들과 광주에 진압군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과, 민주주의를 사수하겠다는 청년과 시민들의 두려움과 용기가 교차하던 그 날밤. 군부는 5월 18일 04시 이전까지 대학을 점령하고, 5월 18일 00시 01분까지 불순분자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우리가 모인 시간은 아마도, 계엄군이 광주에 들어와 자리를 잡기 시작했거나, 후발대는 이동을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지난 6개월간, 내내 밤에 대해 생각했다. 그 밤들에 대해서, 그 밤을 견딘 사람들에 관하여, 그 밤을 버틴, 마음에 관하여.

소년이 온다는 6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어린 새
2장, 검은 숨
3장 일곱 개의 뺨
4장 쇠와 피
5장 밤의 눈동자
6장 꽃 핀 쪽으로
<1장 어린 새>는 살아있는 동호의 시선이다. 동호는 정대와 정미누나를 찾으러 나섰다가 상무관에서, 적십자병원에서 사람들을 만난다. 진수형, 은숙이누나, 선주누나.
<2장 검은 숨>정대는 죽었다. 죽은 정대가 몸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묻는다. 왜 죽였지? 나를 왜 죽였지?
<3장 일곱 개의 뺨> 고기구이를 먹지 않는. 은숙이누나. 김은숙. 은숙이 누나는 출판사 직원이 되었다.
<4장 쇠와 피> 김진수를 기억하는 나. 스물 세 살의 교대 복학생. 살아남은 시민군
<5장 밤의 눈동자> 동호와 같이 있던 선주누나. 방직공장에서 일했고, 동일방직과 YH사건이 같이 등장한다. 광주항쟁 당시 성고문을 당했다. 19시부터 새벽 5시까지의 이야기로 나뉜다.
<6장 꽃 핀 쪽으로> 아들 동호를 잃은 어머니. 그 가족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들 소년이 온다를 이미 한 번 읽었거나, 절반정도 읽다 만 상황이라, 1장과 2장은 그 비통함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넘어갔다. 우리는 진수가 동호와 동생들에게 한 말에서 무너졌다.
“항복해야 해. 만약 모두 죽을 것 같다고 생각되면, 총을 버리고 즉시 항복해. 살아남을 길을 찾아.”
“하루하루의 불면과 악몽, 하루하루의 진통제와 수면유제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젊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누구도 우리를 위해 염려하거나 눈물 흘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자신조차 우리를 경멸했습니다. 우리들의 몸속에 그 여름의 조사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고작 하루의 졸음을 견디며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기억되지 못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고통이, 울분과 슬픔이 전해졌다.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써야 했을까. 하지만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마주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느낄 수 없다’.
‘대중이 함께 말하면 쇠도 삭게 만든다는 중구삭금이라는 말처럼, 이렇게 함께 읽는 것은 마치 주술을 거는 것과 같고, 강력한 염원을 담는다’는 걸 느꼈다. ‘소리가 가진 힘을 믿’었다. ‘가장 오래 가는 기억은 노래’라고 하더라. 그만큼 우리는 계속해서 읽고 소리내고 말하며 잊지 말아야 한다고 밤새 다짐했다. 고등학교때 1년 선배가 광주에서 시민군으로 사망했던 것을 기억하는 분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고, 이런 이야기를 남겨준 작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잊지 않는 것은 죽지 않는 것이며, 그래서 영혼으로 오는 것이라, 함께 소리 내어 읽는 것은 영혼의 울림’에 함께 전율하는 것이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문학의 힘이 있었다. 다시 책을 펼치게 되면 이날밤에 흐느꼈던 ‘당신의 목소리가 기억날 것이다.’ ‘작가는 이 글이 팔릴 거라 생각했을까, 아니었던 거 같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역사를 문자로 재현한다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즉 사람이 할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지난 겨울을 지내며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할 수 있는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에 대해서 계속 되물었던 밤이 있었다. 그 수많은 밤에 빚진 마음으로 함께 호흡하는 것 자체가 충만했다. ‘동호와 진수, 은숙과 선주가 느꼈던 그 공포에 대해서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계속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따금 당신은 생각한다.
한낮, 유난히 고요한 휴일 오후 해가 드는 창을 보다가 문득 동호의 옆얼굴이 흐릿하게 떠오를 때,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게 혼은 아닐까, 기억할 수 없는 꿈 때문에 뺨이 젖어 있는 새벽 그 얼굴의 윤곽이 별안간 선명해질 때, 혼이 머뭇거리며 거기 있는 것 아닐까.”
우리는 6장까지를 다 읽고 잠시 쉬었다.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끝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작가의 에필로그를 읽으며, 기술적으로도 지독하게 잘 쓴 작품이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중학교때 영어는 계속 한 선생님에게 배웠다. 전교조가 창립되고 교사들이 해직되던 때라, 5.18에 대한 이야기도 수업중에 나왔던 것 같다. 아마 앞 시간이 사회였고, 경상도 출신의 괄괄한 여선생이 그 얘기를 언뜻 흘렸던 거 같다. 우리는 영어선생이 전라도 출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이들이 웅성대는 걸 보고 무슨 일이냐고 차갑게 물었다. 영어선생은 한번도 살갑게 웃어주지 않는 2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우리가 광주.. 라고 이야기했을까.. 5.18이라고 했을까. 무슨 질문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녀가 차분하고, 아주 차갑게 말했다.
“그때 내가 광주에 있었습니다.”그는 이야기를 이어나가지 않았다. 우리를 바라보며 가만히 침묵했다. 차가운 냉기가 교실을 휘감아버렸다. 아이들은 모두 입을 닫았다. 그는 조용해진 우리를 보고 바로 수업을 시작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 선생은, 3학년때 내 담임이기도 했지만 단 한번도 광주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몇 살쯤 되었을라나.
그렇게 스쳐간 수많은 광주의 이야기와, 우리가 모르고 지나쳤던 영령들이 지금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그 밤들을 지켜준다고 믿고 싶다.
장미꽃이 곱게 핀 책방을 나서며 푸르게 밝아오는 새벽을 맞았다. 우리가 꿈꾼 세상은 무엇일까. 아무도 억울하게 죽지 않고, 누구도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을 수 있기를. 내 몸을 혐오하지 않기를, 내 삶을 스스로 비하하지 않도록, 나를 사람답게 존재할 수 있게 해주길. 그저 그 단순한 것을 계속해서 파괴하려는 저 자들과 이 새벽을 함께 누려야 한다. 그러니 더욱 거침없이 강건하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수밖에. 고통을 응시하는 힘을 가지고, 쏟아내고 떠들며, 다시 한 번 굳건하게.
2025. 5. 18.






장소대관과 간식을 제공해주신 안양 뜻밖의여행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서울 마포,서대문, 남양주, 화성에서 오신 참가자 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덕분에 잊지 못할 밤 하나가 더 생겼습니다.
” ” 큰 따옴표는 책 속 문장이고
‘ ‘ 작은 따옴표는 참가자들의 발화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