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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그 해 여름, 아르바이트를 해서 탄 첫 월급으로 리바이스 청바지를 샀다. 헐렁하고 여기저기가 찢어진 바지를 85,000원이나 줬다. 내 손으로 돈을 받으면 꼭 하고 싶었던 일이 리바이스 청바지였다. 리바이스 청바지는 광활한 대지를 가르는 카우보이와 개척자의 유니폼이었다. 채찍을 휘두르며 땅따먹기를 하는 서부의 폭력성 따위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살아남아야하는 절실함은 폭력 앞에 눈을 감기 좋다. 헐렁한 리바이스 청바지에는 딱 달라붙는 민소매티가 제격이었다. 나는 그 해 내내 소매가 없고, 매우 짧아서 배꼽이 드러나는 회색 티를 입었다. 물론 다른 옷을 입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회색 배꼽티를 입고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명동거리에 서면, ‘활보’할 수 있었다. 현실은 시궁창이었으나 쏟아지는 시선은 쾌감으로 꽂혔다. 거리에 붉은 햇빛이 길게 늘어지면 맥주 썩은 내가 진동하는 300평짜리 대형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서빙아르바이트였다. 오후 6시까지 출근하여 12시까지 쉴 새 없이 맥주와 안주를 날랐다. 5000cc짜리 맥주통을 한 손에 들고 330cc짜리 맥주컵 6개를 다른 한 손에 들었다. 3000cc짜리 맥주피처는 한 손에 든 채 330cc짜리 맥주컵을 여섯 개까지 같이 끼워들 수 있었다. 여섯 개다. 내 손이 더 컸더라면 한 손에 여덟 개까지 끼울 수 있었겠지만 내 손은 여섯 개가 한계였다. 다른 한 손엔 낙지볶음과 골뱅이무침을 같이 들 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나 외에 다른 알바생들은 3000짜리 맥주피처를 들면 한 손에는 맥주컵만 들었다. 한 번에 많은 일을 하기 위해 나는 기술을 익혔고 머리를 굴렸다. 다리가 안 보이도록 뛰어다닌다 해도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성취감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맥주잔과 맥주피처, 안주를 동시에 들고 300평짜리 호프집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건너가는 일. 대학은 떨어졌고, 재수할 돈은 없었다. 예비합격자 통지서는 내 손으로 찢어버렸으며 엄마가 사는 집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는 동생은 기숙사에서 그림을 그리며 매일 눈두덩에 풀로 쌍꺼풀을 그렸다. 새아버지는 간간히 집에 들어왔고 엄마가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스스로 벌어 재수를 하겠다는 핑계를 그럴싸하게 둘러댄 나는 그 무렵 서울역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누우면 끝나는 자기만의 방. 벽의 끝에 독서실 책상이 있고, 그 벽의 다른 끝엔 문이 있었다. 책상아래 머리를 집어넣고 자는 일은 영원히 산 채로 나올 수 없는 관 속에 들어가는 일 같아서 모두들 머리를 문에 대고 잤다. 새벽녘 화장실을 가기 위해 가냘픈 베니어합판에 조각조각 둘러붙인 문이라는 것을 열고 나오면 복도엔 여자들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문틈을 뚫고 나와 늘어져 있었다. 환기를 위해 문은 약간 들뜨게 되어 있었다. 조밀하게 밀어붙인다 해도 베니어합판은 견고한 틈새를 만들 수 없는 자재니까. 책을 넘기는 소리, 삐삐를 확인하는 소리까지 들리는 고시원에서 한 숨을 쉬거나 재채기를 하는 일은 쉽게 용납되었다. 마른기침이 터져 나오면 밖으로 나가야 했다. 누군가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면 복도엔 폐혈관 곳곳에 박힌 니코틴 냄새가 스멀스멀 퍼져나갔다. 단 하나 좋은 것은 냉난방이 잘 된다는 것이었다. 여름엔 복도에 놓인 에어컨이 강력한 바람을 내뿜어줬고, 겨울엔 시멘트 바닥위에 홑겹으로 깔린 얇은 비닐 장판으로 찜질을 할 수 있는 보일러도 뜨끈했다. 서울역 고시원의 정확한 주소지는 용산구 동자동이었다. 서울역사가 새로 생기기 전이니 서울역 광장엔 밤마다 포장마차들이 국수를 말아 팔았다. 그 포장마차의 주인들이 고시원 골목에 모여 살았다. 사람들의 과거를 굳이 들추고 싶지 않았으나 앞집에서 부부싸움을 할 때는 그 부부가 혼인관계가 아니며, 여자의 아들은 소매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옆집에 거대한 냉장고가 들어올 때는 얼마 전 지하철에서 마주친 반짇고리를 파는 아줌마가 거기 산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아침 10시부터 소주병이 굴러다니는 동자동 골목의 시작엔 벽산빌딩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든 청소부가 있다는 벽산빌딩의 벽에는 노숙자들이 갈겨놓은 오줌 지린내가 진동했고 가을이 되면 골목마다 알록달록한 이불들이 깔렸다. 때로는 벽산빌딩쪽이 아닌 반대편으로 나가기도 했다. 울퉁불퉁한 계단을 내려가면 엄지만화방이 있었다. 붉은 바탕에 노란색으로 엄지, 라고 쓰인 서너 평짜리 만화방엔 재수생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들이 드글드글했고 엄지만화방에서 고개를 들면 어쩌다 알게 된 계집애에게 돈을 꿔주고 돌려받지 못한 내가 돈 갚으라고 악다구니를 쓰며 삐삐 메시지를 남기던 공중전화박스가 있었다. 공중전화박스는 대일학원의 담벼락에 붙어 있었다. 나도 그 학원에서 수학강의를 들었다. 대일학원 앞에는 매일 300원만 달라는 아저씨와 담배 두 개비만 달라고 하는 사내도 매일 서성였다. 한 때 힘깨나 썼다는 조폭출신 총각은 내리막길의 끝에서 어머니와 떡볶이를 만들어 팔았다. 창문달린 고시원 끝방을 쓰던 목사아들 정용이녀석은 생활비가 떨어지면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떡볶이 집에 들어가 아양을 떨며 하루 이틀 일을 하고 담뱃값을 벌어내곤 했다.
한 번도 차가 끊기는 적이 없을 서울역 앞길을 걸어 남대문 경찰서를 지나 대우빌딩을 지나 남대문 시장의 양갈래 길을 골고루 건너가며 명동으로 갔다. 고시원으로 옮기는 사이 해가 지기 전에 출근을 하여 홀을 청소했다. 4시까지 출근하면 두 시간을 더 일할 수 있고, 두 시간을 더 일하면 시간당 2500원씩, 매일 5천원을 더 벌 수 있었다. 그 호프집은 왕년에 대한민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가수가 운영하던 곳이고 내가 일할 때는 연극영화를 전공한 사람이 사장으로 있었다. 매일 홀이 미어터지게 들어차는 호프집에 얼마나 많은 이권이 걸렸는지 스물 한 살짜리가 알 바는 아니다. 이름은 영스타였다. 촌스럽기도 하지.
저녁 5시 반부터 30분씩, 그리고 30분 쉬는 시간 간격을 두고 통기타 가수들의 공연이 있었다. 내가 아는 사람과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무대에 올라 기타를 들고 노래를 했다. TV에 나오던 사람도 있었고, 라디오에만 나오던 사람도 있었다. 남대문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디제이가 얼굴과 전혀 안 어울리는 근사한 목소리로 멘트를 날렸다. 넥타이를 맨 남자들이 환호성을 외치며 신나는 노래에 맞춰 덩실덩실 일어나서 춤도 추었다. 거친 목소리로 노래를 하던 가수들은 기타 하나를 들고 맥주잔을 든 술 취한 사람들을 뒤집었다 엎었다.
그 날은 4시에 나와 같이 출근해 100개쯤 되는 테이블과 400개쯤 되는 의자를 같이 닦는 두 살 위의 아르바이트생과 벽에 기대 마감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9시에 무대에 올랐던 밴드의 리더는 그 날 매니저까지 앉혀 놓고 늦도록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적당히 취한 그가 화장실을 가다가 벽에 기대어 당신들이 빨리 집에 가기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말했다.
“느그 오늘 우리 가게 가서 술 한 잔 하지 않을래?”
뚱뚱하고 변죽좋은 내 옆의 언니는 반색을 하며
“아저씨 가게가 어딘데요?” 라고 물었다.
“마포에, 서교호텔 뒤에 내가 오늘 가게 오픈이야. 단란주점을 하나 열었거든. 무대도 있다 아이가. 그냥 내 놀이턴데, 오픈날이니까 여기 식구들하고 다 같이 가서 회식이나 한 번 하자. 오늘은 내가 기분좋게! 한 잔 살꺼거든?!”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나란히 서 있던 알바생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손님이 몇 명 남지 않았고 평소에는 뭉기적거리던 알바들이 갑자기 잽싸게 움직여 순식간에 영업이 끝났다. 서교호텔이 어딘지도 모르던 나는 택시를 탄 여러 사람들과 부산 사투리를 억세게 쓰는 밴드리더가 차렸다는 단란주점으로 갔다. 무대가 있었고 칸막이만 되어 있는 낮은 소파들이 들어차 있었다. 손님은 없었고 술을 마시다가 예의 한국 사람들이 모이면 그렇게 되듯, 돌아가며 노래를 했다. 고등학교 때 중창단에서 2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노래를 했고, 중간에 성악레슨도 받아봤다. 노래를 한 곡 부르고, 술 취한 동료들의 박수를 받고 또 한 곡 노래를 끝내고 내려오자 가게 주인인 밴드리더가 나를 따로 불렀다.
“니 키보드 칠 줄 아나?”
“어릴 때 피아노 쳤는데요. 코드는 잡을 줄 알아요.”
“코드 잡을 줄 안다고?”
“예.”
“니 내일부터 무대 함 서볼래?”
“예?”
“우리 밴드에 그 노래하는 딸아 안있나. 갸가 오늘 갑자기 그만 두겠다고 하는기야. 내 그래서 아까 느그 매니저하고 한 참 그 얘기를 한기다. 갑자기 가스나가 그만 두겠다고 하면 내는 낼부터 으찌냐. 니 낼부터 내랑 무대 함 서볼래? 요새는 기계가 반주 다 한다. 엠알이라카거든. 다 된다. 키보드 코드만 잡고 흉내만 내면 된다. 함 해볼래? 니 쟁반 들고 맥주 나르는 거보다 수입은 훨 날끼다. 내 그보다는 훨씬 더 쳐주꾸마. 니 한 달에 얼마 받노?”
“4시부터 12시까지 해서 60만원 정도 되는데요..”
“우리가 요새는 업소를 세 군데 뛰거든? 한 군데 30만원씩 해서 내 90주께. 시간도 짧고 안 좋나? 해봐라 마. 이런 기회 쉽게 오는 거 아이다. 니 소리 참 좋다. 해라. 좋제? 어떻노?”
그 다음날 오후 2시까지 서교호텔 그 가게로 갔다. 소리를 맞춰보고 작년에 팔려나간 피아노와는 완전히 다른 야마하 키보드를 잡았다. 리더는 악보를 몇 개줬고, 오늘은 소리만 맞춰보자 했다. 당시 성행했던 라이브호프집에서 키보드를 치는 여자들이 부르는 노래는 뻔했다. 우순실, 심수봉, 손현희, 흘러간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의 수상곡과 햇빛촌의 유리창엔 비, 그리고 박미경의 빠른 신곡들이 주를 이뤘다. 목을 아끼며 노래를 하기 위해 애썼지만 거친 소리를 내기 위해 담배를 빠르게 피워댔다.
하루 일과는 서교동 단란주점에서 시작되었다. 느지막이 모여 다같이, 때로는 나 혼자 키보드를 두들기며 연습을 하기도 했다. 리더의 그랜저를 타고 노원역에 도착해 개업한 지 얼마 안된 집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리더는 기타를 쳤는데 주법은 촌스러웠고, 목소리는 조용필 모창가수임이 선명했다. 아무래도 음악을 한다고 말하기도 곤란했고, 내가 뭘 배울 수 있을 지도 애매했다. 노원역에서 30분 무대를 마치고 바로 명동으로 이동했다. 내가 맥주를 나르던 그 집에서 매니저, 아르바이트생들과 인사를 하고 나는 무대로 올라갔다. 가장 손님이 많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종로에 가서 마지막 무대를 닫았다. 종로의 둘리호프는 라이브가수들에 대한 평가가 철저한 편이라 매니저가 자주 내 건반실력에 대해 타박을 했다. 리더는 매니저와 내가 직접 얘기하지 않게 했고 나름대로 보호해주는 차원이라고 여겼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던 풍경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해 여름, 아주 잠깐 동안의 일이었던 것처럼 느낀 것은 서교동까지 가는 길엔 버스를 탔는지, 택시를 탔는지 그 때의 기억은 완전히 사라졌다. 어떤 남자가 우리 밴드가 가는 길에 어슬렁거렸고 가끔은 리더의 그랜저를 그 남자가 운전하기도 했다.
어느 저녁, 상계동의 일이 끊기고 난 다음이었던 것 같다. 아마 겨울의 시작이었을 거다. 고시원에서 어스름을 타고 미끄러지듯 명동에 들어섰다. 넘어가는 햇빛이 아닌 네온사인과 간판 불빛에 길어진 내 그림자를 보았던 기억은 그 날이 아닐 수도 있는데, 땅바닥 치고는 요염했던 보도블록에 깔린 내 그림자는 그 시절의 배경이다. 영스타에 들어서자 무대 위 내 옆에서 베이스기타를 치던 필리핀사람 미스터봉이 대기의자에 구부정한 허리로 앉아 있었다. 작은 키에 눈썹이 짙고 눈이 크던 매니저가 들어서는 나를 보고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업무에 충실하고 능청스럽지만 지저분하지 않은 사람이라 적잖이 신뢰하던 사람이다.
“연락 없었어?”
“누구요?”
“니네 리더.”
“없었는데요?”
매니저는 뒷짐을 지고 무대 쪽으로 걸어갔다. 내 앞 순서인 쌍둥이 남자 듀오가 노래를 마치고 있었다.
매니저는 그들이 무대를 정리하는 것을 보고 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날랐네.”
“예?”
“니네 리더. 돈 떼먹고 도망갔어.”
미스터봉은 집으로 갔다. 나는 혼자 빈 무대에 오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매니저는 나에게 물었다.
“너 기타 칠 줄 알지?”
“잘 못 쳐요.”
“내일 다섯 시에 나와. 너 혼자서라도 올라가봐. 노래로 카바하면 될 거야.”
매니저의 배려로 그 무대에 이른 시간에 일주일 정도 섰다.
밴드가 차지했던 시간은 업소의 골든타임, 밤 9시였다. 그 시간에는 3인조 이상의 밴드가 서는 것이 규칙이었다. 가장 손님이 많은 시간, 흥겹고 시끄러운 소리가 필요했다. 매니저는 홍대에서 활동하던 5인조 재즈 밴드를 불러왔다. 나는 6시 타임을 채우고 그 자리에 앉아 5인조 재즈밴드의 노래를 들었다. 내가 있던 밴드와 차원이 달랐다. 내가 속했던 밴드는 마치, 아무도 찾지 않는 지방의 온천장에 어울리는 팀이었다면, 매니저가 새로 불러온 그 밴드는 바로 그 자리가 차고도 넘치는 팀이었다.
저런 팀에 들어갔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저런 사람들에게 배웠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며칠을 내가 딱히 할 일 없는 저녁시간에, 이미 공연을 끝낸 무명가수가 되어 그들의 연주를 들었다. 장난감 병정을 부른 키 작은 가수가 3천만 원짜리 수제 기타를 샀다며 나에게 보여줬다.
우리 밴드가 세 군데 업소에서 벌어들인 돈이 매달 천만 원이 넘고, 내가 아무리 적게 받아도 세 배는 더 받았어야 했다는 사실은 영스타의 사장이 알려줬다. 리더가 대형 행사를 준비하다 잠적했고, 수천만 원의 빚을 졌다는 것은 영스타의 매니저가 알려줬다.
길어진 그림자를 배경으로 기타를 메고 서울 시내를 헤맸다. 라이브호프라는 간판이 있는 곳에 무작정 들어가서 오디션 안 보냐고 물었다. 더러는 그 자리에서 오디션을 보기도 했고 더러는 자리가 찼다고 했으며 더러는 라이브를 더 이상 하지 못한다고 했다. 수유역에 한 군데 자리를 잡았다. 영스타에서 7시 공연을 하던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그 사람이 은평구에 한 군데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영스타를 다시 찾아갔다가 꾸준하지 못하고 들락날락거린다고 10시 공연 대선배에게 통박을 듣기도 했다.
남대문 시장에 연말 세일 행사가 있어서 노래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일자리를 소개해 준 것은 스크래치를 배우지 않아 디제이 생명이 곧 끝날 것이라고 말하던 대머리의 영스타 디제이였다. 나이 많은 디제이는 영스타의 일이 끝나면 남대문 대형상가에서 노래를 틀어줬다. 그의 작은 디제이박스에 앉아 시장에서 유통되는 대중음악의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해줬다. 무명가수가 유명해지는 과정에 시장 디제이의 역할도 만만치 않다고 강조했지만 자신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했다.
나는 그의 작은 디제이박스에서 나와 남대문 한 복판의 의류종합상가 앞에 설치된 가설무대에서 노래를 했다. 12월 말이었다. 손가락이 곱았다. 추위로 얼어버린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숨을 뱉을 때마다 수증기가 뽀얗게 뿜어져 나왔다. 실수가 있어도 박수가 없어도 상관없었다. 30분에 10만 원짜리였다. 게다가 내가 거처하던 곳과도 가까워 택시비도 들지 않았다. 30분을 쉬는 동안 앞머리가 긴 아이들이 힙합바지를 입고 나와 얼어붙은 몸으로 춤을 췄다. 그 아이들이 쉬는 동안 나는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랐다. 2시쯤 되어 일당이 담긴 봉투를 들고 키보드를 어깨에 메고 아직도 밝은 불빛을 헤쳐 고시원으로 몸을 돌렸다. 내 등 뒤 조명에 길어진 내 그림자가 길바닥에 놓였다.
그 해 겨울, 남대문 행사가 끝나고 녹번동에 있는 지하 호프집에서 30분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고 30분 키보드를 치며 노래를 하고 1시간은 취객들의 노래자랑의 사회를 봤다. 영화의 OST를 불러서 이름을 알린 선배를 다른 업소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그림자가 길어지던 시간에 지하철에서 만났던 어느 선배는 얼마 전에 앨범을 냈다고 했다. 네가 막노동꾼이냐고 나무랐다. 노래하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굴면 안 된다고 했다. 음악을 할 거면 제대로 하라고 했다. 제대로 따위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고, 나는 고작 스물 두 살이었다. 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일주일을 굶을 수도 있었다. 내가 지하 호프집에서 취객들을 웃기며 사회를 보는 사이 동생은 기숙사에서 쫓겨났고 엄마의 집은 사라졌다. 고시원 창문달린 방에 처박힌 동생은 학교를 간다고 나갔다가 이제는 우리 집이 아닌 양주 산골짜기의 그 건물을 찾아가 하루 종일 앉아 있다 돌아오곤 했다.
기타와 키보드를 누구나 쓸 수 있는 고시원 휴게실에 펼쳐놓았던 것은 더 이상 취객들 앞에서 노래하지 않을 때였다. 퇴근 후 고시원 식구들과 늦도록 술을 마시고 새벽엔 노래방에 가서 아무도 개의치 않고 엉망진창으로 노래를 불러댔다. 삐삐번호를 두어 번쯤 바꿨을 때 고시원에서 나와 이대앞 옥탑방으로 이사했다. 고시원에서 끄집어져 나온 나와 내 동생의 짐은 엄지만화방으로 내려가는 계단까지 가득 찼다. 천장까지 꽉 맞게 쌓아올려 꺼내 볼 수 없었고 자다가 무너지면 바로 압사할 것 같던 책들과 엄마가 한 번도 쓰지 않은 딱지 붙은 코렐그릇이 담긴 아이스박스까지 모두 2.5톤 트럭에 실렸다. 명동에서부터 서울역까지 태양의 어스름에, 내 등 뒤 늘어선 번쩍이는 조명등에 길게 늘어졌던 그림자를 보고 걷지 않을 줄만 알았다. *‘아직도 해거름에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은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새벽이면 남몰래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길이 운명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 숨 쉬는 순간마다 돈이 필요했고 벌 수 있었고 가장 빨리, 치욕적이지 않게 벌 수 있는 수단을 운 좋게 거머쥐었을 뿐.
영스타는 사라진 지 오래됐고 그 자리엔 건강식 샐러드바를 자랑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이 들어섰다. 세월을 굽이돌아 아이를 안고 패밀리 레스토랑을 가는 길엔 사보이호텔 뒷문을 지난다. 그 코너에 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어스름의 길이 놓여있다. 슬리퍼를 신고 기타를 들어다 주던 키만 크던 옛 애인의 발이 부끄러웠다.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갔던 것이다. 96년도에서 97년도쯤의 일이다.
2014년 6월 25일
이하나
*부분은 도종환의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의 일부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이 글은 <이야기너머>문학치유강좌의 일환으로 적습니다.
남도에 다녀오다
거기 가면 따뜻하겠지.
날씨 앱을 꺼내 보며 생각했다. 숫자가 말해주는 온도는 쉽게 와 닿지 않는다. 그 숫자를 기록했던 어떤 날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숫자는 언제나 막연하다.
두 번째 남도로 가는 길. 남도에 얽힌 이야기는 숱하게 많다. 스물 한 살부터 스물 세 살까지 살았던 고시원에는 모두 남도 사람들이었다. 전라도 순천, 벌교, 목포, 장흥, 고흥, 보성 그 동네 사람들이 모두 왁자지껄 했는데 전주 사람은 북도는 껴주지 않는다고 찬밥이었다. 남도에 대한 환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것을 다녀온 지난 가을, 그 풍요로운 땅에 홀딱 반했다.
이다지도 아름다울 수 있구나. 바다와 산이 가깝고 그 사이에 들이 펼쳐졌다는 것은, 불편함을 담보로 하되 이런 풍광은 댓가가 있다고 말해주었다.
먼 곳의 여행을 할 때마다 기가 막힌 경치가 늘 신기했다. 그 풍경들은 그만큼 먼 길을 굽이굽이 돌고 돌아 산을 넘고 물을 건너야 만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게 자연이 가까이 오겠느냐 묻는 것에 대한 댓가라 생각했다. 운전을 해서 가는 남도는 대여섯시간이 걸렸다. 피로따위, 참을 수 있는 길. 고흥에 간다는데, 운전 따위 못하겠느냐고 실실 웃었다.
상위에 차려진 음식은 언제나 싱싱했다. 냉동창고에 들어가 본 적 없는 풀과 물고기가 그대로 상 위에 음식이 되어 올라오는 곳, 파도가 거세 양식도 어렵다 했다. 험난한 자연환경이 외려 득이 되는 곳. 고흥에 다녀오면 바다와 들을 멀리 하고 사는 것이 이렇게 비루한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햇살이 좋은 오전, 그 집에 갔다. 마당에 있는 작은 나무에 노란 것이 달렸다. 제주도 귤나무를 심으셨다는데 열매가 열렸고, 그냥 따서 먹으면 되는 일이었다. 귤을 집에서 따 먹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동네에 유자가 지천으로 널렸는데 딸 사람이 없어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땅에 떨어지면 고양이나 들쥐의 먹이가 될 것이고, 나무에 달린 감은 까치의 밥이 되겠지. 문득 까치 같은 날짐승도 유자를 먹을까 궁금해졌다. 시큼할텐데.
한 식구가 먹을 만큼만 심은 작은 밭에 무와 배추가 커다랗게 자라고 있었다. 그 옆에 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누구 먹으라고 나란히 놓았을까. 누군가 먹으라고. 와서 달라고 말하지 못할 누군가를 위해일까.
고추도 매달린 채 말라비틀어지거나 썩어가고 있었다. 삼시 세끼 밥을 먹고 노인들만 사는 마을에서 이 모든 작물을 거둬들이는 일은 작정해야 할 일이다. 고향집에 간 아들은 아무도 따지 않은 유자나무위에 올라가 유자를 따기 시작했다. 유자나무에는 가시가 있다. 팔순을 넘긴 노인이 일일이 거둬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이 만든 것을 만나보지 못한 유자는 작고 쪼글쪼글했다. 겉껍질은 시꺼멓고 울퉁불퉁했다. 검게 변한 귤도 마찬가지였다. 내다 팔기에 애매한 과일이다.
충청도의 힘이라는 책을 쓴 저자는 자이랑 식품에서 일하는 남덕현이라는 사람이다. 작은 책이라는 잡지에 젓갈 담그는 얘기를 쓴 걸 읽었다. 보기에 좋지 않으면 사람들이 외면한다고. 가라앉는 새우 단백질 때문에 팔리지 않는 젓갈이 속상한 이야기다. 유자를 생각했다. 보기에 좋지 않아 아무도 돈을 내지 않을 것이다.
그 집의 작은 마루엔 유자냄새가 가득했다. 70년을 해로한 두 노인은 유자 껍질을 잘게 잘라 마당에 내놓고 말리고 있었다. 한약방에서 약으로 쓰기에 내다 판다 하셨다. 그게 뭐 얼마나 큰돈이 되겠는가. 그냥 버리기에 아까워 햇빛에 맡겼을 터.
냉난방이 완벽하고 햇빛도 걸러 받아들이는 아파트에 사는 나는 버리기에 아까운 모든 것들을 노란 비닐봉투에 담아서 내다 버려야 한다. 햇빛에도, 바람에도 맡길 수 있는 게 없다. 모두 다 입으로 들어가 똥이 되지 않으면, 씨앗 하나도 함부로 버릴 수 없는 도시.
남도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수산시장에서 갓잡은 싱싱한 생선과 해산물을 사온 그날 밤, 우리집은 쓰레기장이 되었다. 스티로폼 박스는 네 개가 넘었고, 그 안의 물건들을 포장한 퍼런 비닐과 녹아가는 얼음을 씽크대에 버리고 생선 뼈다귀, 내 옷에 붙은 들풀의 씨앗 하나 모두 다 떼어내 쓰레기통에 곱게 넣어야 한다. 먹고 남은 게껍질은 가위로 잘게 잘라 노란 쓰레기봉투에 넣어야 더 많이 들어간다. 생선을 나누어 담는다고 나는 지퍼백을 다섯 개나 꺼냈고 냉동실 칸칸마다 각종 비닐로 쌓인 먹을 것들이 가득한 걸 알아챘다. 냉동실은 블랙홀, 이제 하루가 지나, 돌바지락이라 부르는 살조개는 다 먹어버렸으니 남은 꽃게를 차곡차곡 냉동실에 잘 넣거나 쪄먹어 치워야 할 일이 되었다.
순천을 지나오면서부터 추웠다. 집에 도착한 다음날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베란다엔 유자냄새가 가득한데 그 집에서처럼 향긋하지 않다. 신바람이 나서 꽃게를 4kg 정도 사왔는데 언제 먹나 싶다. 잎새주를 사왔는데 남편은 웬지 당기지 않는다며 냉장고에 그대로 두었다. 식탁 위엔 며칠 전에 사온 식빵이 굴러다니고 냉장고엔 일주일된 스타벅스 케잌을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으며 그 사이 식구들은 컵라면과 봉지라면을 사다 찬장에 쟁여놓았다.
남도의 것을 사온다고 내 집이 남도가 되지 않는다. 장소가 바뀐 먹거리들은 짐짝처럼 물러가겠지. 아쉬울 뿐인가. 슬프기까지 하다.
그 동네의 편의점에서도 원두커피를 찾아 캡슐원액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다음에 거 참 커피 맛대가리 없다고 마실 때, 옆에 앉은 중년의 남자가 전화통화 하던 걸 들었다.
“돗돔을 하나 잡았는디. 먹을 사람이 있는가?” 하던 얘기.
어쩌다 생기는 것에 대한 반가움, 우리 집엔 그런 게 있던가.
어쩌다 생기는 게 뭔가, 생각나면 주문하면 될 일이다.
동하지 않는 것은 마음이지, 물건은 언제나 움직일 수 있다. 돈만 내면, 무엇이든 주문할 수 있고,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구할 것은 오로지 돈. 그러니 무엇이 환영받을 수 있을까.
어쩌면 이 도시에선 아무도, 아무 것도, 그 어떤 음식도 열렬한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다.
뜬금없이 걸려 올라온 돗돔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비가 추적추적 온다. 나는 남은 꽃게를 냉장고에 넣을 것인가, 냉동실에 넣을 것인가, 얼음팩에 넣어 딤채에 넣을 것인가 결정해야 한다.
2013. 11. 24.
이천십삽년 유월 십일
생각해보니 아침나절 내 차선에 어린 고양이가 죽어 있었다. 순간 속도를 줄이고 더 밟지 않게 건너갔다. 내 뒤에 오던 차도 더 밟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고양이는 차도의 정 가운데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이 될 무렵 골목길에 세워둔 차의 틈새로 다 큰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무척 놀라 속도를 늦췄고 다행히 고양이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고양이를 지나치고 난 다음 안양시청 앞에서 술에 취한 게 빤해 보이는 남자가 무단횡단을 하고 있었다. 아크로타워 앞에서 유턴을 하던 차들이 남자를 피해 주저 하며 천천히 움직였다. 10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고양이 얘기를 쓰고 나니 어젯 밤 낙동강 하류를 휩쓸고 있다는 뉴트리아 얘기가 떠오른다. 고양이는 아무리 개체수가 늘어도 생태계를 교란시킨다는 얘기까지 나오진 않는다. 사실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가장 큰 주범은 인간이다.
내가 그런 인간이다.
동물을 좋아하지만 동물보호에 앞장서고 싶지는 않다. 간혹 동물학대를 비난하는 글들을 보면, 이들이 과연 어떤 생명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인가 싶을 때가 있다. 그들은 동물을 학대한 사람을 함무라비 법전보다 더 격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욕을 퍼붓는다. 동물에 대한 사랑은 느껴지지 않고 동물사랑을 빙자한 – 그저 그 마음에 깊이 박힌 인간종에 대한 적대감만 느껴질 뿐이다.
밤이 깊어간다.
어두운 하늘엔 이불솜같은 구름이 가득하고 나는 조경업자가 돈을 받고 만든 인공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개와 함께 걷고 있다.
하루는 이렇게 지나고 어떤 생명은 길에서 사라지고 어떤 생명은 살아남았다.
운전을 하면 인생의 축소판을 걷는 것 같다고 말하던 사내는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갔다.
오늘 나는 살아남았고 산 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매일 매일 죽은 자들의 이야기만 탐닉하던 때가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한 자리에 있었고 나는 매일 그들을 찾았다. 모두 다 살아있을 때 했던 이야기들인데 나는 그들이 죽고 난 뒤 만났다.
매일 밤 죽은 자들의 도시를 헤매고 죽은 자들의 바다를 구경했다. 그들을 더 만나기 위해 산 자들을 외면했고 나의 생명도 점점 조악해졌다. 이제는 죽은 자들을 외면하고도 잠을 자곤 한다.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다.
누가 먼저 세상에서 사라지는 지,
내 눈앞에서 없어지는 지 알 도리는 없다. 대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조금 더 빨리 내가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신의 삶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라고 그들에게 말할 수 없다. 생명력이라는 건 누군가에게 끝없는 부러움이요, 채울 수 없는 욕망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을 돌아본 적 없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하루를 기억한 적 없다. 내일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하루를 살기 위해 어제를 잊고 내일은 미뤄둔 채, 내일은 언제나 내일이고, 어제는 언제나 어제이므로, 그렇게 하루만 살아온 삶이 있다.
단 하루, 오늘만 살기 위해, 오늘만 산다면, 아침나절 죽은 어린 고양이따위는 잊어야 했을 것이다.
하루를 기억할 수 없는 삶은 얼마나 고단한가. 그 삶은 모든 질문에 한 가지로 답한다. 없다. 라고.
기억도, 추억도, 행복도, 슬픔도 없다고. 그러나, 힘들었다고.
기억하지 못하는 삶은, 힘겹다.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천십삽년 유월 십일을 기억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