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의 찌꺼기

아이의 옆 침대에 한두 살 많아 보이는 여자아이가 왔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 초까지의 아이들은 한창 성장하는 중이라 그런지, 어딘가 생김새에 균형이 깨져 있다.

진료를 받는다고 왔다갔다 하더니 어디서 다 큰 여자아이의 통곡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쭉 빼고 내다보니 옆 침대에 있던 그 아이인데 엄마 아빠가 말리고 난리다.

메르스 이후, 한림대평촌성심병원은 경기도 서남권역 응급센터가 되어 병동이 모두 격리되어 있고, 각 분과별로 격리병실이 따로 있어 무척 쾌적해졌다. 보호자는 1인만 동반입실 가능한데 그 아이는 엄마 아빠가 다 들어와서 설득하고 말리고 있었다.

나는 혹시 선단공포증인가 싶어 귀를 기울여 들었다.

주사바늘이 무서울 수 있다. 특정 공포증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일일거고, 나 역시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모두가 각자의 공포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게 잘못은 아닌데 세상은 극복하라고 윽박지른다. 세상이 늘 그렇듯이.

나는 그 가족의 대화를 엿들으며 응급실에 온 부모와 자식의 입장을 생각했다. 아이가 아파서 왔다. 응급실에 접수를 하는 순간 8만원이 청구된다. 검사비용까지 더하면 15만원이 훌쩍 넘어가기도 한다. 휴알의 야간 응급실은 북새통이고, 아이는 통증을 호소한다. 아무리 경미한 질병으로 왔어도 당사자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응급실에 오는 것이다. 부모는 아이보다 수십 년 더 사회적 질서를 몸으로 익힌 사람들이고 이들은 아이가 타인에게 폐를 끼칠까 걱정을 한다. 환자와 보호자는 의료진 앞에서 약자가 된다. 환자는 통증에 신경을 빼앗겨 자기 통증과 증상에 집중하는 반면, 그 통증을 고스란히 느끼지 못하는 보호자는 긴급하고 정확하게 의료진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환자와 보호자는 이미 단단하게 구축된 관계가 있으니 보호자는 응급실 안에서는 보호자와의 관계형성에 들일 에너지를 잘라내어 의료진과 관계를 설정하는데 힘을 다한다. 환자가 통증을 호소하거나 고통을 느낄 때 보호자는 의료진과 더욱 돈독하고 관계를 신속하게 맺으면 환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한다. 이것은 어쩌면 이 사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증상일수도 있는데, 타인과의 관계형성이 순조로운 일처리를 순조롭게 해준다는 인정과 감성에 호소하는 형태이기도 하고, 구조보다 개인에게 집중하는 인간중심적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사람은 모든 사람과 관계를 맺거나 모든 사람에게 집중하기 어려우므로 인간중심적이라는 것에는 “특정한”인간 중심이라는 말이 생략되는 것이 필수적인지도 모르겠다. 특정 인간 중심으로 구조가 개편되었을 때, 박근혜 게이트가 터지는 것이다. 의료진은 이러한 인정중심을 탈피하고 기계적으로 환자를 대해야 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환자는 보호자와 의료진 모두가 자신에게 집중해주길 바라게 된다. 의료진에게 환자 한 명은 응급실에 누워 있는 수많은 환자들 중에 한명일 뿐이다. 의료진은 공평한 의술을 펼쳐야 하고 순서를 지켜 각기 다른 증상을 가지고 각기 다른 언어형식으로 표현하는 모든 환자를 돌봐야 한다. 응급실이 개편된 다음 “응급실 진료 순서는 선착순이 아니라 응급정도에 따른다”는 표어가 여기 저기 나붙었다. 의료진에게는 더 급한 환자가 많이 있고 더 위중한 환자는 언제나 있는 법이다.

응급실 병동이 모두 격리된 다음 이제 이 병원 응급실의 “구경거리”는 줄어들었다. 타인의 고통을 구경한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타인의 더한 고통을 보며 자기 위안을 삼는다. 유치하지만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또한 그들이 응급실에 오게 된 수많은 사연들을 접하며 삶의 이치 한조각 정도 주워가려는 시도도 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견디기 힘든 특정한 장소에서 무언가를 배우거나 깨닫고자 하는 학습욕구가 있는지도 모른다. 응급실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환자들은 결국 익명으로만 존재한다. 그들은 그저 타인의 기억 속에 “어떤 사람”이 되거나 “교통사고 피해자”가 되거나 때로 “진상”이 되기도 한다. 이제 아이가 응급실에 가도, 술 취해 바닥에 마구 구토를 해대는 아저씨를 보며 깔깔대거나 무서워할 일이 사라졌다.

 

옆 침대 아이는 극심한 복통으로 병원에 온 거였다. 며칠 변을 못 봐 안에서 딱딱하게 굳어서 관장을 해야 된다는 말을 듣고 놀랐던 것이었다. 생전 해보지 않은 일을 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무서운지 내내 제 엄마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섭다며 엉엉 울었다. 엄마는 아이를 달래다가 창피하게 왜 이러냐는 말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된다는 말도 했다. 무서운 일이 아니라고도 하고, 다 컸으니 할 수 있을 거라고도 하고, 별 일 아니라고도 하고, 애기들 모인 소아병동에서 제일 큰 언니가 이러면 어쩌냐고도 했다. 아이 아빠는 경고조로 이러고 집에 가면 큰 일난다, 밤새 배가 아플 것이다, 내일도 해결이 안 될 것이다, 더 큰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노폐물이 너무 많이 차서 그러니 해결을 하고 가야 한다 등등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은 아이가 뭔가를 거부할 때 할 수 있는 모든 관용어구를 총동원해서 아이를 설득하고 있었다. 간호사는 어머니가 해주셔도 된다고 얘기했는데, 그 얘기를 들은 엄마도 경험이 없는지 방법을 알려달라면서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부모의 설득은 모두 다 타당한 말이었으나 아이의 마음은 쉽게 돌아서지 못했다. 거부한다는 것은 감정의 문제고, 설득한다는 것은 이성의 문제가 더 강한 것일까. 윽박지르고 따지기도 하고 화도 내고 달래도 보고 부모는 왜 늘 자식의 감정을 해결하지 못하며, 자식은 왜 늘 부모의 이성적 판단을 못 미더워하는 것일까.

내 앞에 누운 내 아이는 응급실에 와서 진료를 받고 집에 돌아갈 때가 되면 늘 기분이 좋아진다. 어릴 때부터 병원출입이 잦아서 그런지 의료진에 대한 신뢰가 있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괜찮다, 별 일 아니다, 라고 얘기해주면 의연해지고 가뿐한 표정을 짓곤 한다.

이 병원 응급실은 지난 10년간 내가 수차례 드나들던 곳이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고, 아이의 가벼운 중이염이나 아주 작은 골절로 찾기도 했다. 응급실의 구조가 완전히 바뀌면서 내 기억의 응급실도 사라졌다. 환자이기도 했고 보호자이기도 했다. 옆 침대의 대화는 때로 내 입 밖으로 튀어나왔고, 때로 내 입 안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우리는 타인을 설득하는데 얼마나 무능한가.

관계가 확실한 대상에게는 더욱 더 그러하다. 감정을 감정이라 말하지 못하고 논리적근거와 감정을 뒤섞어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대부분의 부모, 응급실의 보호자들은 비논리와 불합리, 부조리의 총체가 되어버린다. 간절한 욕망이 최고점을 찍는 순간, 어쩌면 인간은 바닥으로 내리 꽂히는지도 모른다. 인정하기 싫은 불행이 고개를 쳐들 때,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순간, 인간에게 남는 것은 온갖 감정과 이성에서 떨궈져 나온 찌꺼기들 뿐인지도.

2016년 12월 25일

 

 

 

배롱나무 꽃 필 때

  • 어떤  관계의 균열에 관하여

산책을 하다 문득 배롱나무를 본다.

그때 이후로 나는 여름마다 배롱나무 꽃피기를 기다린다. 배롱나무는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 만지면 간지럼을 타듯 흔들린다고 한다. 나무의 껍질이 벗겨지면 새 껍질이 드러나는데 그 껍질이 매우 부드러워 사람의 속살 같다고 한다. 배롱나무를 설명한 문건을 찾다보면 “여인의 속살”이라는 말이 나온다. 배롱나무 꽃은 7월부터 8월까지 이어서 핀다. 백일을 핀다고도 해서 목백일홍이라고도 부른다. 분홍색 꽃은 마치 구겨진 종이로 만든 것 같다.

배롱나무 꽃이 필 때, 나는 그와 헤어졌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배롱나무 꽃이 피던 계절이었다. 9년 동안 나는 그의 아내였으며, 그와 사는 동안 양가 가족들의 여러 가지 사건 사고를 겪었고 우리는 업무분담을 한 동료로 지냈다. 배롱나무의 이름을 알게 된 그해 여름, 그가 새 연인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내 의심을 거두지 않던 나는 그의 휴대폰에서 연인의 사진과 연인과 동행했던 여행의 이동경로를 알게 되었다. 배롱나무 꽃 아래서 나는 울었다. 아이를 업고 있었다면 더 그럴싸한 신파가 되었겠으나, 아이는 어느새 더 이상 업혀있을 수 없을 만큼 자라버렸다.

 

그와의 결혼이 격렬했던 것처럼, 이혼 역시 그랬다. 뜨거운 여름에 만나, 9년을 함께 살고 뜨거운 여름에 헤어지기로 한 뒤 우리의 서류는 차가운 겨울이 다 되어서 정리가 되었다. 다시 배롱나무 꽃이 피고 졌다. 올해도 배롱나무 꽃이 피었다.

그날의 비참했던 기분은 두 번째 배롱나무 꽃을 맞으며 사그라졌다. 마치 배롱나무가 껍질을 벗듯이, 배신이나 이별, 따위의 낱말이 벗겨져버렸다.

배신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일방적이다. 나는 관계의 균열에 대해 생각했다. 지붕이 깨진 집에 비가 오면 물이 새는 것처럼 균열이 시작된 관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드는 타자가 있을 뿐이다. 우리의 관계는 양가의 일을 해소하고 육아의 분담을 나누는 업무로 이어졌으며 어느 순간 그 모든 업무가 갑작스럽게 종료되었을 때, 관계는 갈 길을 없고 소멸되었다.

그가 나를 버렸다, 라는 문장은 쓰지 않기로 했다. 그가 나를 소유한 적 없기 때문이다. 관계의 균열은 서로 존중하지 않을 때 시작되었다. 존중을 버리고 편리를 취했을 때, 관계는 마치 공장의 부품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신속하게 재빨랐다. 그 사이 우리는 서로를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그 사람이 가진 기능에 집중했다.

 

그해 배롱나무 꽃이 필 때, 그가 새 연인과 아들바위 위에서 오징어회를 먹은 것은 관계의 균열에 빨려 들어간 어떤 타자가 우연찮게 발생한 사건일 뿐이다. 그때 우리는 과연 누가 누구를 배신하였는가. 나는 그를 사랑하던 나를 오래전에 배신했고, 그는 나를 사랑하던 그 자신을 배신했다.

그 사랑이 왔던 시절을 기억했다. 사랑은 언제 오는가. 자기를 충분히 사랑할 수 있을 때, 타인을 돌아보게 되지 않았던가. 내 자신이 가장 사랑스러울 때 오는 사람이 가장 사랑스럽다. 이것은 매우 우연한 사건이다. 사건은 시간과 장소와 대상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 때로는 맑은 냇물처럼, 때로는 거대한 파도처럼, 아주 우연히 발생한다. 불행은 예의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사랑도 무참히 왔다 비루하게 떠난다.

 

어떤 사랑은 깨져버린 지붕 사이로 쏟아지는 빗물에 대해 영원히 함구하고자 한다. 개입된 타자의 존재를 완벽하게 지우고자 한다. 어떤 사랑은 깨져버린 지붕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 한다. 빗물이 들이닥친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 그는 빗물을 지우고 지붕만 말했으며, 나는 지붕을 지우고 빗물만 말했다. 더 이상 접점을 찾을 수 없는 균열이 점점 벌어져 결국 집이 무너져버린 셈이다.

 

어떤 관계의 균열 사이에 휘말려 들어간 타자는 어찌 되는가. 폐허위에 쏟아진 타자의 욕망은 어디로 갈까. 타자는 당사자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내가 알 수 없다. 배롱나무 꽃이 지고 난 다음, 차가운 바람이 불면 알게 될까.

그 역시 알 수 없다.

2016. 7. 27.

서운함이 분노가 될 때 – 실은..

흰 가운을 입고 안경을 쓴 그니가 말했다.

속상하다는 걸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을 때 감정의 변화가 오잖아요? 그 때는 단순히 속상한 마음, 서운한 마음, 섭섭하고 사소한 것들이 이제 분노가 되거든요. 감정이 변하는 거죠.
그래서 그 감정이 변했을 때 터뜨리지 않으려고 거리를 더 두는 경향들이 있기도 해요.
그러다 보면 말을 안 하게 되기도 하고 물리적 거리를 멀리 하게 되는데요.
실은.. 그런 게 관계를 더 악화 시키거든요.

저 사람이 왜 나에게 말을 안 걸지?
그런 마음이 들면 그 때는 섭섭한 걸 넘어서서 이유를 모르게 화가 나는 마음으로 바뀌거든요. 그건 상호 마찬가지예요. 실은.. 서로 똑같이 느끼고 있는 거죠.
ㅇㅇ님이 느끼시는 것을 ㅁㅁ도 똑같이 느끼게 돼요.

이 사람은 한 문단에서 무척이나 많은 “실은..”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 사람은 진실을 밝히고자 애쓰는 사람일까 생각했다.
상대방이 나의 진실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느낄 때, 감정을 폭발시켜서 싸움이 날까 두려워서 회피하느라 말을 아낄 때, 숨겨둔 감정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분노로 치환된다는 진실을 나에게 알려주고자 했다.

그가 아는 것은 진실일까.

내가 생각하는 나만의 고립된 생각을 말할 때 그의 눈빛은 무척 커다란 호기심에 가득차 있었다. 그리고 내 눈빛에 강하게 주목하며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 눈빛을 받다 보면 내 말의 어딘가에서 논리에 맞지 않는 나만의 아집이 드러나 버렸다. 그래서 ‘이건 저만 느끼는 거겠지만..’ 이라고 덧붙일 수 밖에 없었다.

섭섭해.
기분나빠. 라는 말을 그대로 전달했을 때
저 사람이 과연 나에게 사과해줄까, 저 사람이 이 감정을 이해해줄까 의심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자리를 뜨거나 입을 다문다.

나의 고립된 생각, 내가 만들어 놓은 틀.
‘저 해당당사자는 절대 내 맘을 모두 이해하지 못할거야’ 라는 고정관념이 많은 것을 변질시킨다.
한 마디라도 더 하고 조금이라도 더 맘을 드러내는 일이 문제해결의 시작일텐데, ‘실은’ 쉽지 않은 일이다.

2013.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