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춘천마임축제

춘천마임축제는 1989년 한국마임페스티벌이 1995년 춘천국제마임축제로 이름을 바꾼 뒤 현재까지 이어지는 마임축제이다. 영국의 런던마임축제와 프랑스의 미모스 축제와 함께 3대 마임축제로 손꼽힌다는 평이다.

작년에 이어 연속 춘천마임축제를 찾다보니 아무래도 비교를 해볼 수 밖에 없는데 행사장소의 변경으로 인한 변화가 있고 올해는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도시 박람회”행사가 같은 장소에서 펼쳐진 게 눈에 띄는 점이다.

행사장 입구, 중도로 들어가는 길에 걸린 현수막

이번 춘천마임축제의 행사장은 춘천 북한강에 있는 섬, 중도의 레고랜드 주차장에서 열렸다. 말많고 탈많던 레고랜드는 거의 20년이 걸려 개장했고, 여전히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있었다. 생태자연환경이 남아있던 하중도에 대한 개발과 구석기부터 철기까지 모든 시대의 유적지가 나왔다고 하는 대규모유적지에 외국자본이 투입된 것도 반감을 샀을 것이다. 이곳까지 우리를 데려다 준 택시기사는 “모든 것이 불법으로 이루어진 레고랜드”이며, “전세계 최대규모의 유적을 그저 밀어부쳐 지어버린 곳”이라고 일갈했다. 그는 우리에게 중도의 노을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오늘 같은 날 저녁에 노을을 보면 좋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광활하다 말할 수밖에 없는 레고랜드 주차장에서 야자카펫으로 길을 내놓아 입장을 도왔다. 춘천마임축제는 작년에도 네이버예약을 통해 사전예약을 받았고 현장티켓구매도 가능하다. 입장료는 25,000원인데 전년도 예약내역이 있으면 할인을 해준다고 했으나 현장에서 재확인하지는 않았다.

춘천마임축제의 전체 행사는 5월 26일부터 6월 2일까지. 춘천시에 있는 각 극장과 거리에서 공연이 펼쳐지고, 오프닝은 <물의도시 아수라장>으로 시작해서 마지막 이틀동안은 <불의 도시 도깨비난장>으로 마무리된다. 마임축제동안 약 68개팀이 공연을 이어간다.

춘천마임축제 홈페이지 이미지. 마임의 마“ㅏ”를 좌우반전시켜 쓰는 게 특징.

마지막 밤에 펼쳐지는 <불의도시:도깨비난장>이 하이라이트라 토요일에 입장했다.

들어서자마자 춘천인형극의 즉흥공연이 펼쳐져 환영받는 느낌을 받았다.

춘천인형극은 1989년 춘천인형극축제를 시작해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인형극 전문극장도 있다.

전체 행사장을 안내하는 안내도가 곳곳에 비치되어 있다.

전체 행사 안내도. 일반 트러스를 짜지 않고 낡은 고철을 용접해 만든 틀이 눈에 띈다.
작년에도 봤던 것인데 홍보용 사진과 영상촬영이 이어지고 있으니 이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안내가 있다.

출입구는 1개로 정해져 있고 스탭들 출입구는 별도로 있으나 공개하지 않는다. 입구쪽에는 이번 축제의 슬로건인 웜바디(warm body)의 의미를 살린 피트니스, 댄스 등 몸짓에 관련된 워크숍이 열리는 공간이 있었다.

입구 슬로우빌리지에서 열리고 있던 웜바디 프로그램 중 하나. 줌바교실이었는데 강사들과 참여시민, 공연팀 등이 뒤섞여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역시 프로들이 섞여 있어야 분위기가 난다.
입구에 놓인 램프. 저녁이 되면 일일이 램프를 켠다. 이 램프만 관리하는 스탭이 따로 있었다.

몽골텐트로 필요한 부스들을 설치했다. 의료시설과 저녁 행사에 불을 크게 쓰기 때문에 춘천소방서에도 나와 있었다. 전년도에는 재활용품을 상당히 많이 사용했으나 올해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중간중간 눈에 띄는 독특한 설치물들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각각 분리해 렌탈업체에 용역을 배분한 것으로 보였다.

작년도 행사장은 삼악산 호수케이블카의 주차장이었는데 이곳은 흙을 파서나 흙을 돋궈서 자연상태의 무대를 만들 여건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번 행사장은 높낮이를 자유롭게 조정할 수 없는 만들어진 주차장이었기 때문에 보통 다른 지역축제와 비슷한 형태의 무대가 꾸려졌다.

또한 작년 축제에서는 폐기물을 모아서 객석의자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올해는 모두 렌탈업체 용품이었다. 작년의 경우 버려진 매트리스, 등산의자, 폐자재, 플라스틱의자 등 중구난방이었지만 오히려 그런 면이 마임축제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강조하고 축제의 지향점을 살필 수 있었다. 올해는 그런 부분이 모두 사라졌다.

2023년 류성국배우의 마임공연현장

먹거리코너도 올해는 조금 달랐는데 다회용기는 모두 사라졌고 일회용품 사용이 가능했다. 작년에도 푸드트럭이 들어오긴 했으나 올해는 QR코드로 주문을 받고 순서가 되면 카카오톡 메세지로 전달받는 시스템을 활용했다.

2023년 도깨비난장, 다회용기 수거함이 따로 있었다.
올해는 모두 일회용품 사용이 가능.
2024년 축제장에서 사용한 음식주문시스템
춘천의 명물, 감자맥주의 팝업스토어가 훨씬 커졌다.
먹기리공간 곳곳에 펴놓은 드럼통은 불을 피워 온기를 더한다. 밤에는 상당히 서늘하다. 드럼통에도 일일이 무늬를 넣어 효과를 더했다. 이런 것이 춘천마임축제의 매력이다.

도깨비난장의 하이라이트는 9시에 일어나는 불꽃놀이다. 폭죽을 쏘아대는 게 아니고 불을 활용한 새로운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게 매년 축제의 하이라이트.

올해는 무대가 한정되어 있고 전면을 바라보는 무대-객석 분리형태였다. 파이어스테이지와 광장스테이지 양쪽에서 파이어워크가 있을 거라 예보되었는데 정착 본공연은 파이어스테이지에서만 펼쳐져서 광장스테이지에 기다리던 사람들은 자리도 확보하지 못하고 멀리서 구경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2023년에는 무대가 자연물이었기 때문에 더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었고 가장 큰 퍼포먼스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었지만 올해는 그렇지 못했다는 게 상당한 아쉬움이다.

2023년 파이어워크 도깨비불
2023년 파이어워크 장소
2024년 파이어워크가 동시 진행될 것이라고 예고된 광장스테이지에서 바라본 장면

기획자가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장소와, 그렇지 못한 장소에서 연출하는 퍼포먼스는 다를 수밖에 없다. 도깨비난장의 특성은 상호 음향간섭이 계속 일어나고 때로 다른 무대의 퍼포먼스를 엿볼 수 있기도 하다. 객석이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형 퍼포먼스가 주목받을 경우 사람들이 한곳으로 몰려가거나 대규모 인파가 몰리는 우려도 있다. 특히 불을 사용하는 문제는 늘 안전문제를 고려해야 하므로 이에 대한 고민이 매우 크리라는 건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메인 행사의 경우 다양한 각도에서도 관람이 가능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쉽지 않겠으나 끊임없이 도전해야 할일이다. 따라서 올해처럼 정면을 일방적으로 바라볼 경우, 트러스로 무대를 3-4층으로 올려서 더 많은 관객을 확보할 수 있도록 설치한 것은 안전만 보장된다면 괜찮은 결정이었다.

1일 토요일 파이어워크 직후의 주행사

이 공연이 끝나고 나서 바로 허건이라는 허조교DJ의 EDM파티가 파이어스테이지에서 이어졌다.

파이어워크 직전에 춘천문화재단, 춘천인형극제, 문화도시 춘천의 막내들이 나와 “우리는 원합니다”라는 슬로건과 메시지를 낭독했다. 그 중 한 문장은 “전쟁없는 도시를 원합니다.”였는데 바로 군대문화를 소환하는 DJ가 출연한 것은 당황스러웠다.

이번 축제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슈트맨이다. 7인으로 구성된 슈트맨은 춘천마임축제의 마스코트라 할 수 있다. 작년에 결성되어 지속적으로 거리공연을 펼치며 춘천마임축제를 홍보하고 있다. 이들은 도깨비난장 행사장에 상주하며 공연을 이어갔다. “마임”이라는 행위를 주제로 하는 축제가 자리를 잡으려면 이 행위를 지속적으로 펼쳐내는 문화대사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본다. 슈트맨은 관객을 중심에 놓고 관객과 눈을 맞추고 공감을 불러오는 것에 주력했다. 괜찮은 브랜딩의 사례로 봤다.

슈트맨의 공연

전반적으로 도깨비난장 행사장은 낮에는 그늘이 부족했고 쉴 곳도 충분치 않았다. 나무가 아예 없는 곳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논란 많았던 장소가 본 행사장이 된 이번 춘천마임축제는 춘천시내에서는 배너나 현수막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지역 내 어떤 이야기들이 있는지 잘 모르겠으나 국제적 명성을 얻은 춘천마임축제가 보다 진보적인 문화예술을 담아내길 기원한다.

2024. 6. 2.

구체적인 시대

노래와 이야기가 어우러지는 형태의 콘서트가 유행이라던데 공연장에까지 앉아서 남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단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다. 그 누구보다 언어를 많이 사용하며 살고 있지만, 때로는 그 모든 언어들이 다 부질없어서 굳이 말로 이루어지 않은 것을 찾고 싶을 때가 있다. 목소리로 말을 하지 않고 알아들을 문장을 전달하지 않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들을 수 있고, 내가 아는 만큼 내가 듣고 싶은 만큼만 들어도 되는 그런 형태의 소리로 많은 것을 함축 시키고 싶을 때가 있다.
어릴 때부터 라디오를 들어도 말이 많은 것은 일부러 피했는데 그 반면 나는 이야기를 잘 하는 아이였다.
내 얘기만 들어달라고 하는 거였는지 아직 잘 알 수 없다.

오늘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는 박제동 화백을 모신 토크콘서트 형태의 국악콘서트가 있었다.
80분 공연에 음악 공연은 30-40분 정도로 할애하고 나머지는 정은아의 사회로 이루어졌다.
박제동 화백은 입담이 좋은 사람이었다. 객석에서 간간히 폭소가 터졌고 나 역시 프로그램북으로 입을 가리며 웃곤 했다. 그의 화법은 숨김이 없고 솔직하고 정직했다. 샘이 나고 화가 나고 오기가 나고 질투가 나는 인간의 칠정을 모두 무대에서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관객들이 웃는 부분은 바로 거기였다. 길들어지지 않는 인간의 건강하고 솔직한 감정을 표현할 때 말이다.

행복했어요. 오기가 났지, 화가 나서, 미치겠는거야. 어쩔 줄을 모르겠지, 부끄럽죠. 대체 어떻게 이런 짓거리를 했을까, 막 질투가 나지요. 아 나는 어떻게 하지, 나보다 더 잘 하는 사람을 보면 참을 수가 없어요. 질투가 나서 미치겠는거지. 그래서 어디 너 두고보자 하고 오기를 부렸어요.

오늘 그 공연장에서 박화백이 말한 자신의 감정들이다. 인간의 오욕 칠정을 숨김없이, 그렇지만 뻔뻔하지 않게, 솔직하지만 염치있게 말하는 것이 듣기에 즐겁다는 것을 알게 했다.

말과 음악이 같이 공연된다는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생소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사람들은 더 이상 구체적이지 않은 것을 고스란히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어려워하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의 중요성에 대해서 인지하는 시대다. 개나 소나 스토리텔링- 이라는 비아냥조도 떠돈다. 나 역시 이야기를 발굴하고 쌓아가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관통해 온 이야기들은 구체적이거나 노골적이라기 보다 상징적이며 여러가지 해석을 가능케 하는 가사없는 노래같은 특성이 있다.
소리를 더한 극을 하고, 그 극을 해설하고, 사람들은 점점 더 느끼는 것보다 알고 머릿속에 집어넣기를 원하는 지도 모르겠다.

유홍준의 “아는 만큼 보인다”가 그 출발점이었을 거다. 알지 못해도 볼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눈썰미” 라는 것인데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추상적인 것을 아름답게 느끼지 못할 만큼- 바쁘다.

그리하여 시대는 추상과 이별하고, 극사실과 해석, 해부와 분석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닐까.
박제동 화백의 그림으로 부족하고 그가 덧붙인 글씨를 읽는 것도 부족하여 그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를 구체적으로 듣고 거기에 걸맞는 음악을 연주해 특정한 느낌을 잡아넣고 그 음악에는 구체적 대사와 이야기까지 넣어 확장까지 시키는 시대.

좋다 나쁘다로 평가하고 싶지 않다.
그저 시대는 모든 예술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지고 있다는 것 뿐이다.

2013. 6. 26.

3월의 눈- 국립극단

130311_iphone5 030많은 사람들이 말을 하며 살지만
정작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술작품이라는 것을 보며 웃고, 울고,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표현한다.

남들의 입과 손, 그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나 그림, 음악을 들으며 울고 웃는 것은 그 사람들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인데 뭐라고 해야 할 지 설명할 수 없었던 것들”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마치 그들이 나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내가 직접 말하는 것보다 폼나게 표현해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술을 대할 때 감정의 찌꺼기를 밀어낼 수도 있고 더불어 나의 이야기가 더 가치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예술가라 불리는 직업은 남의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일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3월의 눈은, 노년의 이야기다.
그리고 오늘 본 이 연극의 이야기는 작년 가을 이별한 나의 시어머님과 빈집에 혼자 살고 계신 나의 시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 대신, 그분들 대신, 나에게 해주었다.

작은 극장이라 울음을 참았으나 통곡할 수 있는 상태였고, 주변에 앉은 모든 여성동지들의 울음을 참는 소리가 끝이 나지 않았다.

주연은 변희봉선생인데,
화를 내라는 아내의 말에
“누구한테??!!!” 라고 말을 하고 침묵을 지키는 몇 분간, 침묵으로도 관객의 오장육부를 뒤집을 수 있는 배우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이 연극을 올려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2013.3. 10.

나는 지금 버스를 타고 용산역 광장을 지나 집으로 가는 중이다…

[연극]우어파우스트 – 명동예술극장 공연

<10월 3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이어질
우어파우스트>
명동예술극장 안내링크
플레이디비 관련정보
우어파우스트는 쉽게 말해 괴테의 파우스트의 초고이다. 
그렇다고 이 초고를 그대로 무대에 올렸다고 보긴 어렵다. 
약간은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연출을 가미한 명동예술극장의 우어파우스트는 독일연출가 50인중 한 명인 다비드 뵈쉬가 연출을 했다. 해외연출가를 초청해 공연을 만들어 보자는 계획중에 우연히 인연이 닿아 젊고 실험적인 연출을 하는 다비드 뵈쉬가 그 적임자가 되었다고 한다. 
TV에서 낯이 익은 정보석씨가 출연해 대중적 흥미가 더할 수 있겠다. 
이 연극은 정통연출기법과는 상이한, 게다가 약간은 그로테스크하여 보는 이가 거북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대중성을 확보하는 일도 중요했을 것이다. 
실험적 예술적 연극을 한답시고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연극의 3대 요소중의 하나인 관객이 빠져버리는 일이므로. 
게다가 이 연극엔 중간중간 소극장 공연처럼 관객과의 소통도 (매우 미미한 양이지만) 대본에 속해있다. 
연극의 규모에 비해, 등장인물은 많지 않다. 
신(神)을 맡은 정규수 (올해 명동예술극장에서 가장 자주 만난 배우인듯), 파우스트 박사에 정보석, 메피스토텔레스의 이남희, 그레트헨의 정지아, 그레트헨의 오빠 역의 윤대열, 꽃님이로 변질된 학생역의 김준호. 
그리고 이 극의 주인공 중 한 명은 바로 무대다. 
약간 시선이 분산된 듯한 느낌의 무대 왼쪽엔 그레트헨의 초라한 생활을 나타내는 세면대가 있다. 그것이 그레트헨과 발렌텐의 공간 전부이며, 가운데 부분은 곡선의 빗사면으로 되어 있는 벽이 뒤에 펼쳐져 있다. 올라갈 수 있을 듯이 보이나 오르기가 힘겨운 그 어떤 추상적 이미지를 무대로 표현했으며 모두 검은색 일색이다. 

파우스트의 내용은 잘 알려진 바, 이 극에서 주의할만한 특이점들만 이야기 하려고 한다.
파우스트는 모든 것을 가진 지식인, 그러나 인간의 무능함에 답답함을 느끼는 자이나, 뚜렷하게 고고하거나 숭고한 인물은 아니다. 그리하여 메피스토텔레스와 계약을 맺고 때론 그를 조정하고 때론 그를 압박하고 때론 그에게 이끌려 다닌다.

메피스토텔레스는 성서에서 혹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비열한 악마의 모습이 아니라 매우 저돌적이고 지능적이고 파괴적이며 우월한 존재다.
타인을 정복하거나 그 위에 군림하는 능력이 뛰어난 캐릭터로 묘사되었다.
또한 매우 추접스러우며, 성적 욕구에 대한 묘사가 많았다.
불편함을 느낀 관객들도 있을 법한데, 식욕과 수면욕이 나름대로 존중받아 마땅한 것으로 당연시 된다면 성욕은 사람들이 매우 노출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과대식욕이나 과대수면욕에 대해서 사람들은 너그러우나 과대성욕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이 극의 메피스토텔레스가 표현하는 과대성욕은 거침이 없다.
단순히 성욕으로만 표현된 것 같겠지만, 메피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성욕은 그저 단순한 성욕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의 총체적 집합이다.

파우스트는 무료한 일상에서 그레트헨을 마주치고 한눈에 반한다.
그러나 그가 처음에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거나 소중한 존재로 여기고 싶다가 아니고 오늘 밤 당장 품에 안고 싶다. 라는 감정이다.
누군가 사랑은 사랑으로 포장된 성적욕구에 불구하다고 했던가.
거침없는 파우스트의 욕구는 왜곡되어 그레트헨에겐 사랑으로 여겨진다.

또한 파우스트의 욕구가 그레트헨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그레트헨은 물욕으로 인해 사랑을 확인한다. 사랑이라고 이름지어지는 것들은 일반적으로 남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성욕, 그 성욕을 채우기 위해 전달되는 선물공세로 여성의 물욕을 충족시키고 상호 욕구를 충족하는 그런 단계로 표현한 것이다.

(일부에선 여성비하, 여성혐오라 할 수도 있겠으나, 그저 남녀의 성별의 상징적 의미를 과하게 곡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역사에서 기록하는 여성성을 이토록 유혹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가.
사회유전학에서 말하듯이, 여성만이 출산을 할 수 있고 여성만이 생명을 잉태할 수 있기 때문에 남성의 동물적 본능, 존재를 남기고 후손을 생성하고 싶은 (혹은 그 후손을 생성하는 것이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함이라면)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는 오로지 여성의 자궁이 필요하다. 남성의 그 어떤 것으로도 대치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

역사이전에 모계사회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역사가 기록된 이후엔 대부분 남성중심으로 세계역사가 재편되었고 그것들이 증거로 남아있다.
결코 남성이 초월할 수 없는 경지,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는다면, 인간을 창조해 낼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존재가 남성의 시각에서는 오로지 여성이다. 남성은 여성을 차지하고 그로 인해 욕구를 충족해야만 생명의 의미를 갖는다.

자식을 낳는 것이 현대 사회에서는 교육과 양육의 책임이 더 커졌으나 역사적으로는 자식을 낳는 것은 자신의 영역과 유전자를 확대하는 의미가 더 크다. 물질이 부족하던 시절엔, 자손을 퍼뜨림으로써 왕국을 이룰 수 있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그리하여, 
파우스트 박사는 성적욕구와 물적 욕구를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그레트헨을 차지하나, 그레트헨은 가장 순결하고 아름다운 여성의 상징으로 잠시 물적 욕구에 흔들려 파우스트를 사랑한다고 믿지만, (그것도 하인리히라는 가짜 이름을 믿는 것) 애초에 욕구로 시작한 것이 사랑으로 돌변하긴 어려운 것. 
그레트헨을 만나기 전, 
메피스토텔레스가 파우스트박사를 찾아온 성공의 욕망에 불타오르는 한 청년을 개로 만들어버리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명성이 자자한 파우스트의 오른쪽에 앉겠느냐는 메피스토텔레스의 사기에 당해버린 농락당한 학생은 그 욕구 때문에 족쇄를 대신해 바지를 끌고 다니는, 모습을 하게 된다. 
개의 상징은 언제나 그렇듯. 
개같은 것. 
자, 그레트헨이 파우스트에게 유혹당하고 그에게 버림받고
이제 그의 오빠 발렌틴의 모욕이 기다린다. 
발렌틴은 지고지순한 누이에 대한 욕구로 그레트헨을 모욕한다. 
이 역시, 욕구다. 인간의 욕구, 뭔가 되고자 하는 욕구, 무엇으로 남고자 하는 욕구, 남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 아 욕구 욕구 욕구. 
이렇게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텔레스는 쌍둥이 같은 모습을 보이거나 서로 거울처럼 반영되는 모습을 종종 보이는데, 마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처럼, 사실 파우스트가 숭고한 인격체 자체가 안되므로, 그 안에 내면적으로 잠재해 있는 한 인간의 악마성에 대해서 표현한다. 
신은 극중에서 내내 무력하다. 
심지어 잘 걷지도 못한다. 초반에 메피스토- 를 외쳐 부를 뿐, 아무 역할을 못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는 세계가 존재하고 그가 순간, 모든 것을 덮을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지는 장면이 있다. 

후반부로 치달아, 그레트헨이 완전히 파괴되기 직전,
메피스토텔레스의 악마성의 최고조에 다르는 장면이 펼쳐진다.

메피스토텔레스는 높은 곳에 올라, 꽃님이를 옆에 호위무사처럼 인형처럼 앉혀놓고 마이크를 잡고 목사나 신부가 입을 법한 예복을 입었다. 그리고 마이크를 들고 그레트헨을 단죄하기 시작하는데 이 장면이 흡사, 기도원이나 부흥회에서 우리가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는 , 강대상위의 그분들의 단죄장면이다.

너는, 죄인이고 너는 더럽혀졌으며 너는 원죄가 있어 벌을 받아 마땅하니.
현실의 목회자들은 구원받을 지어다, 라고 하겠지만 메피스토텔레스는 너는 파멸을 면치 못하리라고 저주한다.

현실과 극의 완벽한 오버랩.
연극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서준식의 옥중서간을 읽으며 그가 느낀 예수의 모습에 대해서 다시 생각한다. 과연 우리의 신은 우리를 단죄하기 위해 존재하였던가.
그분은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를 용서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 아니었던가.
대체 누가 인간을 단죄하고 인간에게 죄를 물으며 인간에게 죄사함을 받기위해 종교기관에 충성하라고 말하더란 말인가.

(게다가 이 연극을 보고 온 날 PD수첩에서 기독교의 부정축재에 대한 꼭지를 내보냈다)

신은 그레트헨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기 위해 눈을 뿌려 모든 것을 덮어버리려 하지만, 결국 그레트헨은 미치광이가 되어버리고 파우스트는 또 다르게 시작한 아주 가벼운 작은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그레트헨을 떠나버린다.

욕구로 시작하여 욕구로 끝나는 우어파우스트.
현대적 영상과 현대적 음악, 그리고 매우 절도 있고 깔끔한 구성이 조금 낯설 수 있으나 복잡다단한 인간의 총체력 무력함과 선악을 표현하려는 괴테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가깝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싶다.

+ 매우 아쉬웠던 것은,
내 뒤에 영화계 원로분들이 앉으셨는데, 이 나라의 거목이신 김모감독님과 그 옆에 계신 분께서 연극을 보는 내내 관전평을 해대셔서 극몰입에 엄청난 괴로움을 겪었다.
내 뒷줄에서 서너자리 오른편이 앉으셨는데 바로 그 앞에 앉은 여자관객분은 연극을 보는 게 아니라 짜증만 받고 가신 듯 하다. 어이가 없어 사람들이 계속 뒤를 돌아봤지만 그 분들은 그치지 않았고 뭐라고 말하는지 거의 다 들릴 지경이었다.
무대위의 배우들도 누가 말을 하는지, 저 분이 누구인지 알았을 것이다.
아마 외국인인 연출자 빼고 아무도 그 분에게 항의하지 못했겠지.

당신이 만든 영화를 보고 늘 감사하게 생각했지만, 늙어지면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참담한 생각을 하고 돌아왔다.
정중하게 사과하시고 그 앞자리 여자분 표 물어주시면 참 좋겠다.

2011. 9. 20. 관람.
@명동예술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