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를 떠나며

안녕하세요 지역교육네트워크 이룸 이하나입니다.
2014년 안양지역 공교육의 회복을 돕고자 설립한 이룸이 만 10년을 넘겼습니다. 2013년 가을부터 교육지원청 혁신지구 담당교사들의 제안으로 안양의 시민사회단체 중 학교 교육이 가능한 단체가 모여 2014년 3월 창립했습니다. 초대 대표를 맡은 故문홍빈 YMCA 사무총장의 유고로 사무국장 체제로 전환하여 운영하다 2020년 비영리임의단체로 등록을 마치고 제가 이룸의 대표를 맡아 2023년까지 안양과천교육지원청의 민주시민교육을 운영하며 지난 10년간 약 4만 8천여명의 학생을 만났습니다.
그 외 각 단체의 연대활동으로 문화다양성을 지역에 보급하고 커리큘럼을 개발하여 관내 청소년들과 문화다양성의 방향을 모색하고 정책제안활동을 제안하며 많이 배우고 성장했습니다.

이제 지난 만 10년의 지역교육네트워크 이룸의 대표직을 다시 지역에 돌려드립니다. 2024년부터는 안양나눔여성회의 강은정 사무국장이 이룸의 대표를 맡아 운영하게 됩니다. 2015년부터 전문강사로 활동해 온 차윤주, 김묘순 두 분이 사무국을 맡게 됩니다.
지난 10년간 민주시민교육은 곳곳에 뿌리내렸다고 생각합니다. 체제전환을 꿈꾸는 2024년부터 더욱 새롭고 역동적인 이룸의 새 운영진을 환영해주시고 응원해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시간 함께해서 행복했고 많이 배웠습니다. 개인사의 전환을 이루게 된 지역교육네트워크 이룸의 모든 구성원에게 감사드립니다. 안양지역의 제 시민사회단체와 이룸의 무궁한 발전을 빕니다.

저는 이룸 대표직 사임으로, 안양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의 대변인도 그만두게 됩니다. 앞으로는 개인사업체인 “문화공동체 히응”의 운영에 매진할 예정입니다. 지역에서 신나고 즐거운 일로 다시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24년 2월 28일 / 2024년 이룸 정기총회의 날
이하나 드림

사진 : 2014년 3월

[로컬]인제 기적의도서관

강원도인제 #기적의도서관

사진 50장 (사진마다 설명)

강원도 인제 기적의도서관에 가봤다.
며칠 전 박은하 기자님이 공유해주신 기사를 보고 가봐야 할 도서관을 지도에 찍어두었다. 올해는 좀 집중해서 다녀볼 요량.
인제 기적의도서관은 감동 그 자체.
바로 옆에 박인환문학관이 있고 동네서점도 하나 있다.
요기는 인제군청 부근이고
(댓글 참고해 추가하면) 용대리에 시집박물관과 만해마을도 있다.

인제군은 작가레지던시 하면 문학도시로 거듭나기 좋을 듯. 책 읽고 쓰는 걸 주업으로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겨울 산속에 갇혀서 매일 도서관에 출근만 해도 평생 못 잊을 시간을 만들 수 있을 것.

특징적인 걸 나열하면

  1. 도서관 구조는 원형 – 탁 트인 느낌이라 답답하지 않아 오래 머물기 좋음. 다양한 형태의 의자와 탁자가 있음.
  2. 읽고 공부하기도 좋은데 커뮤니티 공간도 세심
  3. 강좌를 열 수 있는 사랑채공간이 자바라 문이 아닌 한옥 미닫이로 구분된 점이 인상적
  4. 적당한 마당과 전통한옥을 가까이 지어 교육용으로 좋음.
  5. 장서도 안양시같은 곳에서는 ’비싸서 못 사준다‘ 하는 책도 꽤 있음.
  6. 어린이실 등 인테리어 곳곳의 세심한 배려가 눈에 띔
  7.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조화가 즐거움

규모가 아주 크진 않으나 공간이 주는 즐거움이 있음. 한가지 아쉬운 건 1-2층 연결이 엘리베이터 외 슬라이드로는 불가능했을까.
왜 건축가들은 건강한 사람을 디폴트로 놓고 설계하는지 늘 의문임.

어쨌거나 언제고 인제에서 한 달살이 정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옴.

회센터와 능력주의

지난 주 일요일과 월요일, 1박 2일로 봄이 오기 전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남편과 강원도를 자주 가는 편이다. 분기에 한 번은 가게 된다. 동해바다의 역동적인 파도를 좋아한다. 주로 동해안 해안도로를 따라 속초-강릉-동해시를 넘나들다가 온다. 이번에는 오래 안 찾은 고성으로 방향을 잡았다. 속초와 가깝고 바다가 보이는 숙소를 잡았다. 숙소의 바다경치는 끝내줬지만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설마 4층짜리 숙박시설에 엘리베이터가 없겠어?’ 생각한 게 패착이었다. 나는 관절염을 앓은지 15년이 넘었다.

지방 여행을 다니다보면 아주 흥하는 몇 개 도시 외에는 저녁 8시 이후에 밥 사먹기도 힘든 곳이 많다. 고성도 비수기라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도 인근에 대학도 있고 편의점도 둘이나 있었다. 해산물 파는 집은 활어회센터에 집중된 것으로 보였다. 거리에는 온통 육고기를 재료로 하는 식당들 뿐이었다. 남편과 걸어서 활어회센터에 갔다. 관절염환자여도 여행을 하면 보통때보다 더 걸으려고 애를 쓴다. 회센터에는 몇몇의 손님들이 횟감을 고르고 있었다. 여기도 1층에서 활어를 골라 회를 떠주면 2층에 올라가 먹는 식이다.
1층에서 어느 집에 뭐가 있나 보고 있는데 상인이 뭘 찾느냐고 묻는다. 뭐가 좋냐고 반문했다. 그날 들어오는 배가 뭘 갖고 왔느냐에 따라 추천할 횟감이 있을 수 있으니 보통 오늘 뭐가 좋냐고 묻는다. 상인은 가격을 먼저 말하지 않고 어종을 먼저 이야기했다. 남편과 나는 2017년부터 집중적으로 바닷가를 다니며 매번 회센터에서 회를 사 먹었는데 가격 먼저 말하지 않고 어종 먼저 말하는 경우엔 부르는 게 값이다. 사람 보고 값을 부르는 느낌이라는 뜻이다.
상인의 답을 기다렸더니 광어와 밀치 정도를 얘기하며 15만 원을 달라고 한다. 스끼다시도 많이 주고 여기는 ‘초장집이 아니라 횟집이다’라고 한다. 초장집은 스끼다시라고 부르는 전채음식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상추, 간장, 초고추장까지 모두 1-2천 원을 주고 사는 식이다. 우리가 보통 회센터에서 먹던 값이 있어서 너무 비싸다 하고 옆의 옆집으로 갔다. 그랬더니 비슷한 어종을 말하고 이번엔 12만 원을 부른다. 나는 숨도 쉬지 않고 남편을 잡아끌고 나와서 카카오택시를 불러 가까운 속초의 A항으로 갔다.

A항은 워낙 자주 가서 노련해졌달까. 넷이 가면 8만원~12만원, 둘이 5만원~8만원 선에 서너마리를 받게 된다. 우리가 지난 번에 갔던 집이 좋았던 거 같다며 남편이 해당 호수 앞에 섰다. 회센터 1층은 이름도 붙어있지만 호수도 붙어 있다. 남편이 그 호수의 주인을 찾으니 자리를 비웠다면서 옆 상인이 조금 기다리라고 한다. 우리에게 대꾸를 해준 상인에게 괜히 미안해져서 “꼭 여기서 안 사도 돼요.”라고 했지만 “기다리면 더 많이 준다”며 기다리라고 한다. 옆집 상인이 안쪽으로 들어가 주인을 찾았지만 답이 없다. 옆 호 상인은 “주인도 없으니까 내가 그냥 막 퍼줘야겠다.”라며 몇 가지 어종을 추천하고 너댓마리를 후루룩 담고는 멍게와 새우도 두어개 줬다. 회뜨는 곳으로 움직이며 한 마리를 더 부어줬다.
옆 호 상인은 우리에게 “내가 팔아도 되지만 그러면 마음이 불편하니 찾아온 데서 사 드시라.”한다. 나는 “담엔 사장님한테 올께요.”했는데 “마음만 받아도 고맙다.”고 한다.

앞서 갔던 고성의 B항은 속초의 A항에 비해 손님이 적었다. 우리도 A항이 훨씬 더 익숙했다. 상인들이 사람 보고 가격을 부른다고 치자. 그 판단은 불과 5초 이내에 하게 될거다. 몇 초 안에 사람을 파악하고 가격을 부르는 게 사실일까. 상인들에게 직접 묻지 않았으니 알 수 없다. 허나, 분명히 같은 어종에 항구마다 다른 가격인 건 맞다. 나의 말투에 따라 가격이 달라질 때도 있다. 꼭 사람에 따라서는 아니라고 본다. 사람이 많고 장사가 잘 되는 곳, 예를 들어 통영의 활어시장 같은 곳은 기본가격대가 저가에 형성되어 있다. 지도앱의 후기도 천차만별이다. 별점 1점부터 5점까지. 리뷰를 쓴 사람들이 사진을 올리기도 하는데 3만원에 둘이 배터지게 먹었다는 얘기부터 15만원 냈는데 먹을 게 없다는 등, 극과 극이다. 리뷰는 얼마나 주관적인가. 아무 것도 믿을 수가 없다. 쓰는 이의 행간에서 어떤 ‘감’을 잡아내야 한다.

회는 풍성했고 맛도 좋았다. 흥성흥성한 회센터 2층의 분위기도 좋았다. 속초는 언제부턴가 늘 밤늦게까지 손님이 많다. 나는 회를 씹으며 불편해졌다.
남편이 B항에서 바가지 쓸 뻔 했다는 이야기를 하길래 나는 “손님이 없어서 그랬을지도 몰라.”라고 얘기하며 종이컵에 맥주를 따랐다.
우리처럼 회센터에 자주 가는 사람들, 바닷가 출신이고 한때 바다낚시를 즐기던 남편과 횟감을 고를 때 편안하다. 나는 물고기를 잘 모르고 최근 들어 처음 먹어본 것도 많다. 주변 지인들도 회센터에 갈 때는 ‘물고기를 잘 아는 사람’과 같이 가는 걸 선호한다. 내륙도시에서만 산 사람들은 고기 종류도 구분을 잘 못하므로 파는 사람이 그렇다 하면 그런 셈이다.
왜 가격이 다른지는 알지 못하겠다. 시장이라고 모두 가격이 동일할 필요도 없지 않나. 나는 여기서 ‘물고기를 구분할 줄 알고 흥정을 잘 하는 사람’에게 유리한 구조가 마뜩치 않았다. 왜 여기서도 능력이 필요한가.
청담동의 회는 비싸도 되고 강원도의 회는 싼 게 마땅한가? 그것도 이상하다. 평생 살며 바다 한 번 못 보고 생을 마칠 수도 있다. 과거에는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러다 인생에 어떤 일이 생겨 처음으로 바닷가 회센터에서 회를 골라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들과 같은 횟감을 고르고 더 비싼 값을 치른 사람은 ‘어리숙해서 당했다’는 핀잔을 듣는다. 왜 어리숙하면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할까. 내 기억에 한국사람들은 ‘어리숙해서 당한 것’에 대해서 그 어리숙한 사람을 비웃거나 핀잔을 주는 게 우선이고, 그를 속여먹었거나 바가지를 씌운 사람에게 분노하는 건 나중의 일이었다. 물고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게 잘못인가? 흥정을 잘 하지 못하는 게 잘못일까? 물건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사는 사람이 물건에 관해서 파악하고 있어야 할까? 회센터는 아는 사람들만 즐길 수 있는 시장일지도 모르겠다.

오래 전 가격 정찰제가 자리잡으면서 편리하게 느껴진 건 바로 이런 이유였다. 물건에 대해서 잘 몰라도 되고, 흥정하려고 기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고. 구매자가 판매자를 이겨먹을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고 본다. 승부는 정해져 있는 싸움이다. 인간은 간혹 이런 경쟁과 싸움, 소소한 분쟁으로 성장한다. 일종의 게임처럼, 규칙을 정하거나 그 규칙을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서로 각축을 벌이는 건 건강한 자극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리숙한 사람이 억울해지는 게임은 별로 달갑지 않다. 회를 먹으며 지도 앱에 달려있는 억울해진 사람들의 리뷰를 본다. 가족들과의 모처럼 나들이를 망쳤다는 분노를 읽으며 이 나라는 살기가 빡세다는 생각만 했다.

사진은 : 속초에서 그날 먹은 횟감. 5만원.

#로컬_어디까지가능할까

2023 안양춤축제를 종료하며

개인적 소회를 담습니다.

2022까지 안양시민축제로 진행된 것을 2023년 안양춤축제로 변경하면서 대도약을 도모했다. 이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는 측도 있다던데, 글로벌 겨냥해서 관광축제로 가려면 관 냄새 지우는 것은 필수다.

“시민주체”는 이미 당연한 것이니 굳이 시민이라는 이름을 고수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었다.

무단횡단 잦은 곳에 “횡단보도로 건넙시다” 현수막 거는 것이지, 무단횡단 일절 없는 곳에 그런 말 할 필요 없는 것처럼.

올해는 시승격 50주년이라 여느 해보다 빠르게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안양시 최대호 시장은 시승격 50주년을 맞이해 일주일 정도 시민들이 진짜 즐길 수 있는 기간이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어차피 가을에는 각종 행사가 펼쳐지니 하던 대로 하되 일정만 적당히 조율하면 행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안양시 일대에 공연과 시민들의 참여무대가 계속 돌아갈 수는 있는 구조다.

문제는 어느 시군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행정에서 이 칸막이를 뚫고 업무협력을 이뤄낸다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인사발령도 있고 기존에 없던 질서를 만들어내려면 상당한 파격이 필요하다.

작년에 실패한 브랜드이미지 제작도 신경써야 했다.

흥미로운 건, 사람들은 이미지에 대해서는 모두 한 마디씩 던진다는 것이다. 전문영역을 넘어서서 글이나, 기획안, 소리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견을 내지 않는데 시각적인 것은 모두가 한 마디씩 보탠다.

별의 별 의견이 많았기 때문에 이번 “춤”글자를 만들어 낸 업체 대표가 상당히 고전했다.

디자인은 민주주의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

없는 시스템에서 각기 연결지점을 찾아 전 부서가 한꺼번에 움직이게 만드는 것도 골치아픈 일이었다. 올해는 유난히 회의비 없는 긴급 회의가 많았고 실무진과도 자주 소통한 편이었다.

나는 먹고 사는 일에 치여죽을 판인데, 봉사직으로 맡은 일을 외면하기도 어려웠고.

그래서 사실 축제 직전에 이미 나는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본청의 여러 직원들은 업무협력을 하기 위해 막판까지 애썼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시민축제로 굳어진 20년간 관의 개입은 지나치게 많았다. 시민들은 춤축제의 콘텐츠보다 별개 부서에서 진행하는 음식문화축제에 수없이 많은 의견을 냈다가, 막상 부서장이 나타나면 그가 있다는 게 알려지지 않았는데도 아무도 의견을 내지 않는 희한한 일도 있었다.

부서협력과 연계행사를 논의했더니 같은 날 일정을 잡아버려 예년에는 쉽게 갈 수 있던 행사를 아예 못 가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공직사회시스템은 이런 오류가 잦다. 모여서 정확하게 의견을 개진하고 협의를 해나가야 하는데 명확하게 의견을 내지 않고 대체로 “최선을 다해 준비하여 행사에 차질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고 있으며.” 라는 대답이 줄줄이 이어진다. 그리고는 ‘미루어 짐작해’ 각 부서의 형편껏 참여시민들을 설득해 행사일정과 장소를 확정한다. 무슨 군부대 작전 명령 받는 자리인 줄 알았네.

하나의 브랜드를 지자체에서 확보한다면 대형 이벤트성 행사로 거대한 무대를 꾸리고 1년 중 단 며칠만 집중하는 축제는 이제 지양해야한다. 축제가 연중 돌아가고 그 축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사람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시 곳곳에서 축제를 준비하는 배움터가 만들어지고 축제인력을 찾아내 시민들이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계속 주어져야 한다.

유명연예인을 부르는 일에 대한 반발이 많은데 각 도시에는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단계가 있다. 흥을 돋구고 무대를 신나게 만드는 가수들은 초기단계에서 필수다. 이들은 축제를 불러오는 제사장의 역할을 한다. 시민들이 스스로 즐길 수 있는 단계가 될 때까지 연예인은 꼭 필요한 마중물의 역할을 한다.

내가 바라보는 모범적인 축제의 모델은 역시 춘천이다. 춘천은 이제 대형 연예인 행사도 없다.

강릉같은 초대형 규모가 아니더라도 시민들의 삶 속에 스며드는 축제브랜드와 콘텐츠가 상시 실행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관의 개입을 줄이고 독립성을 갖춘 실행팀이 준비되어 계속 활동을 이어나가야 하는데 그간 관이 주도했던 각 지자체에서는 하루아침에 이걸 이룰 수 없다. 거의 파괴 수준의 혁신이 필요한 일.

축제를 준비하고 구성하는 팀은 업이 될 수 있는 장치도 필요하다. 전문성은 시간과 예산이 주어질 때 더욱 강화된다.

올해 축제를 준비하며

1. 본청의 업무협력은 끝까지 실망스러웠으나 개인을 탓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시스템의 문제다.

2. 추친위원 중 주요 역할을 맡는 자는 나처럼 생계부담이 있는 사람이 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얻었고

3. 그 외 각종 시정에 개입하며 의회의 말도 안되는 시비와 반발에 지치기도 했고 이해하기도 싫다.

아이디어를 낸 것에 대해서 오래 후회했고

제안에 대해 많이들 불편해한다는 걸 확실히 느꼈다.

이제 좀 거리를 두고 업자로 살까 한다.

이글은 공유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친구공개로만 적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내 페친중에 많이 있을 것이고

– 위원장으로서의 입장표명도 필요하기 때문에

– 관계자들과는 공유할 필요가 있어서다.

모든 축제가 그 본질을 잊지 않고

사람들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는 역할에 충실하길 바라며.

수고했다는 말의 성찬도 지겹다.

활동가글쓰기 마지막 날

올 초 교육청 연수에서 경기교육복지사협의회 선생님들을 만났습니다. 쉬는 시간에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한 사람을 같이 기억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교육복지설계 초창기에 과중한 업무를 혼자 감당하다 먼저 세상을 떠난 김선경 선생님이었죠.

선생님들과 저는 연수 이후에도 몇 차례 만나 학교교육복지의 필요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며 떠들기도 하면서 우리의 기록을 스스로 만들어나가자고 다짐했습니다.

복지사 선생님들은 교육청 공모사업에 응모해 활동가글쓰기 강좌를 열었고 히응을 다시 초대해주셨습니다.
세 번의 강의와, 두 번째 원고 첨삭, 그리고 자조모임을 거쳐 오늘 모두 한 편씩 글을 써와 낭독회를 열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교사들도 잘 모르는 “교육복지사”
현장의 이야기를 모두 담으면 혹시 복지대상학생을 대상화하는 것이 아닐까 가슴 졸이는 선량한 마음이 담긴 글을 듣고 있으니 목울대가 뜨겁습니다.

내 삶의 이야기를 스스로 기록하는 매일이 이어져, 소박한 사람들에게 작은 용기를 전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경기교육복지사협의회 고맙습니다.
늘 뜨겁게 응원합니다.

이미 무너진 폐허에서

처참한 마음이 가라앉을때까지 기다렸다가 쓸까 하루종일 서성였습니다만,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이 더 늦어질 거란 생각만 듭니다.

교권추락, 공교육 붕괴는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학교 내의 각종 교권침해 사례와 인권침해 사례는 굳이 더 보태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폭력적 교육현장의 문제는 또 다른 폭력을 낳습니다. 학교폭력뿐 아니라 마녀사냥도 이어집니다. 폭력의 양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한 작은 공동체의 이익이 우선이고 그 외부자들은 모두 내 공동체에 엎드려 조아려야 마땅하다는 이기주의입니다. 이 문장의 적용범위는 학교뿐 아니라 지금 이 시대 한국사회의 모든 조직에 해당됩니다.

학생은 어떤 가족의 구성원입니다. 그 가족은 이 사회의 시민입니다. 시민들은 각자의 번뇌를 안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귀가한 가족들은 사회에서 받은 수많은 모멸과 차별을 품고 있습니다. 아주 더러운 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집으로 갑니다. 사회의 모든 그림자가 담긴 보따리 옆에서 잠을 자는 아이들은 보따리에서 흘러나온 지꺼기를 몸에 묻힌 채 학교로 옵니다. 그러니까, 학교에는 이 사회에 흘러다니는 혐오, 물화, 차별, 배제, 모욕이 뒤섞였다가 정화되었다가 다시 폭발하는 곳입니다. 응축된 감정의 쓰레기장입니다. 교육은 이 쓰레기들을 씻어내는 역할을 해내야 합니다. 사회가 더러울수록 학교가 해내야 할 일은 너무 많아집니다.

공교육은 1980년대보다는 행정시스템이 조금 나아졌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우리 사회는 더욱 지독해졌습니다. 사회의 부패속도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교실 안은 아수라장입니다. 사회가 집약되어 있으니까요. 반면, 규율과 질서를 잘 지키고, 인내심이 강하고 수행능력이 뛰어나며, 체제적응을 잘 하는 사람들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위 덕목에 하나라도 어긋나면 교사가 될 수 없습니다. 공직자도 될 수 없습니다.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은 체제를 꾸려가는 정부의 돈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 이번 서이초 교사가 처음이 아닙니다. 2018년 전라남도 구례에서도 비슷한 죽음이 있었습니다. 초등교사였고 혼자 3개의 공모성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업무과중으로 스트레스가 많았다고 알려졌습니다. 당시에도 개인의 우울증이라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2018년에는 많이 외면했습니다. 구례의 교사는 “학교는 지옥이다”라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그 이후 5년 동안 수많은 교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 사이 학교는 딱히 대단한 대책이 없었습니다.

공교육이 과연 붕괴된 것일까 다시 질문합니다.

붕괴한 것이 아니라, 공교육은 완전히 달라진 세상에 전혀 적응하지 못해 분쇄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요. 세상은 변했어요. 아이를 때리면 안되고 모든 노동은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직업에 귀천을 두면 안되고 차별적인 말을 하면 안됩니다. 성적대로 줄을 세워도 안되고 가부장을 내세워도 안됩니다.

반면, 노동으로 돈 벌기 힘들어진 세상이고 부자되기 어렵습니다. 계급사다리는 부서진 지 오래고 금융자본은 전세계를 잡아먹고 있어요. 세상은 더욱 더 양극화가 심해져서 개천에서는 절대 용이 나지 않아요. 이제 금융자본으로 돈 벌 수 없는 노동자들끼리 부여안고 팔짱 끼고 걸어야 살똥 말똥한 세상입니다.

교권추락은 어떤가요. 교사의 역할이 지금 교사가 할 일이 맞나요?

교사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요? 가르치는 사람인가요? 지금의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들인가요? 아니예요. 지금의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르칠 수 없어요. 교사는 행정업무를 하는 사람이고 기간제교사를 채용하고 내보내는 사람이며, 돌봄교실을 배정하는 사람이고, 공모사업에 기획서를 제출하고 행정실에 예산지급 품의서를 제출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연락이 되지 않는 학부모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서 아이문제로 학교에 나와줬으면 좋겠다고 읍소해야 하며, 민원을 받아야 하고,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검은색으로 가려야 하는 사람이죠.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의 눈치를 봐야하고 폭력적인 아이를 달래야 합니다. 급식에 알레르기유발물질이 있는지 살펴야 하고 아이들의 콧물도 닦아줘야 합니다. 초등교사는 가르치는 일보다 행정과 돌봄을 더 많이 챙겨야 합니다. 선배들의 업무를 대신 처리하고 체육관 물품을 정리하고 과학실 도구를 닦아야 합니다. 교사는 누구인가요?

사회는 학교에 너무 많은 것을 밀어넣었습니다. 학부모들도 그걸 원합니다. 학교는 무너지는 이 사회의 마지막 안전망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요.

학교는 30년전과 완전히 다른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그 사이 공교육계는 여전히 30년전의 모습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교권추락, 공교육 붕괴로 해석되지 않습니다. 사회가 무너지고, 공동체가 작살났기 때문에 여태 버티던 학교의 담벼락은 이미 무너졌어요. 이번에 크게 보였을 뿐입니다.

각 교실에는 폭력적 성향의 학생뿐 아니라, 별도의 돌봄이 필요한 학생이 훨씬 많아졌습니다. 코로나 3년간 퇴행을 보인 학생들도 있고, 미숙아로 태어나 힘겹게 성장하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학교에 온갖 정책이 쏟아져 들어왔고, 돌봄의 크기가 커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제 목소리를 낼 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상상도 못할 민원이 있습니다. 담임교사의 연락처는 공개되어 있고 SNS는 수시로 사찰당합니다.

만약, 방법이 있겠냐고 묻는다면 여태 몇 년간 해왔던 이야기와 비슷한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1개 학급에 2명의 담임이 필요합니다. 생활지도와 교과지도가 분리되어야 합니다.

학생수가 줄어든다고 교사를 줄여서는 안됩니다.

행정실무자와 시설관리자는 각 학교에 더 많이 배치되어야 합니다. 특별교실을 관리하고 방역을 책임지고 학교시설을 지킬 사람들이 여러 명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공모사업 등 별도의 행정업무를 전담할 수 있고 결정권도 가진 행정실무사가 교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학교에 1명 이상의 상담전문가와 사회복지사가 필요합니다. 보건소와 정신건강보건센터와 빠르게 연락할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민원업무는 교사가 아닌 전문가가 처리해야 합니다. 또는 각 학교의 민원창구를 만들어 별도의 기관이 받아내야 합니다.

법률자문도 필요합니다. 수없이 쏟아지는 학교내 비정규직의 노무문제와 교직원 노동권에 대한 해석을 해줄 사람과 학교에 붙어올 민원을 법적으로 해석해줄 기구도 필요합니다.

학교의 급식지도는 급식의 영역에서 따로 진행하는 게 맞습니다. 특히 급식실이 없는 학교에서 교사는 식사시간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학교는 가르치기만 하는 공간으로 남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말그대로 시민을 길러내는 복합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학교의 주권도 분산되어야 합니다. 교사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주도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교사는 무슨 일을 할 수 있냐고요? 위에 언급한 일이 교사에게서 분리되면, 그때 교사는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겠죠. 교안을 개발하고 아이들 개개인의 특성을 고려하고, 문해력이 떨어지는 아이를 따로 지도하거나 발표연습을 더 시킬 수도 있습니다.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교육을 시도할 수도 있고 아이들과 재미난 프로젝트도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본인들과 구성원들의 노동권을 고려하고 지역사회와 연대할 길을 만들 수 있겠죠. 학교에 교사외의 직군이 많아지면 그 자체로 학교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교육청을 압수수색해봤자, 답은 없을 겁니다. 답은 현장에 있습니다.

지금의 시민은 자기가 맡은 일 외의 다른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하기엔 너무 바쁩니다. 세상이 그렇잖아요. 죽도록 벌어도 대출이자 갚기 바쁘고, 아무리 모아봤자 좋은 집으로 이사가기 힘들어요. 세상은 약한 자들을 계속 갈아넣다가 결국 죽여버리는데, 내가 왜 예정에 없던 일을 다 감당해야 합니까. 다들 똑같지 않습니까? 서로를 물어뜯지 않으면 내가 언제 갈려버릴지 모르는 세상에서, 혐오로 무장하는 게 살길이라고 터득한 사람들이 드글댑니다.

서로를 미워하고 질투하는 힘으로 버텨야 하는 한국사회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우리는 모두 자멸을 향해 힘껏 폭주하는 레밍과 같습니다.

“지난 시간동안, 나는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는 교사의 글을 읽습니다. 울지 말아야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통한 마음으로 함께 빕니다.

[강좌후기]모두가 인간이라

“저는 병 때문에 그런지, 이렇게 조금만 신경을 쓰면 머리가 너무 아프고.. 쉬어야해요….”

문장의 끝에 숨어있는 두 번째 말, ‘나는 언제쯤 괜찮아질까요?’ 가 자연스럽게 붙어오는 듯 했다.

나는 화이트보드 앞에 일어서서 검은색 마커를 들고 무릎뼈의 연결지점을 그렸다.

“제가 관절염이 있어요. 15년 정도 됐거든요. 이게 무슨 병이냐 하면..

무릎과 무릎 사이에 연골판이라고 있어요.” 무릎과 무릎 사이에 공간을 띄워두고 사이에 판막을 그렸다. 병원을 오래 다니면 정형외과 의사처럼 그릴 수 있게 된다.

몇 명이 안다는 듯이 응응. 네. 하는 소리를 냈다.

“연골판은 무릎뼈끝의 연골과 다른 무릎뼈의 연골이 부딪치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는데, 저는 여기가 찢어졌어요. 연골판.

연골판은 많이 찢어진대요. 운동하다가도 찢어지고요. 특히 축구하다가, 등산하다가, 앗! 하고 무릎이 팍 꺾일 때, 그때 많이 찢어진대요.

이게 딱 이렇게 금 그은 듯이 찢어지면, 다시 꿰매면 되겠죠. 운동선수들도 많이 그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여기가 딱 찢어진게 아니고 너덜너덜하게 올 풀린 걸레같다고 했어요.” 나는 연골판에 위아래로 죽죽 사선을 지그재그선을 그었다.

“의사가 한 말이에요. 올 풀린 걸레같다고. 그러면 이 조각들이 언젠가 떨어져 나와서 몸속을 돌아다닐 거니까…. 싹 다듬어서 도려내야 하죠. 그 수술을 한 게 12년쯤 됐고요. 앞부분, 뒷부분 찢어지고 터지고 뭐 그래서 수술을 세 번 했어요. 그리고 사람 몸이 희한한 게 회복은 안되는데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해서 여기 상한 부분, 연골 끄트머리에서 뼈가 다시 자라요. 아주 조그맣지만. 그래서 얘네들이 자라서 또 부딪혀요. 그러면.. 엄청 아프죠. 연골이 없이 속에서 뼈가 부딪히니까. 매일 아파요. 아픈 건 쉬지 않고 아픕니다. 아.. 가끔, 안 아플 때도 있긴 해요.”

나는 풉. 하고 웃었지만, 참가자들은 안타깝다는 듯이 여러 소리를 냈다. 질문도 있었다. 가볍게 몇 가지 답을 한 뒤에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처음 수술할 때, 지금 제 나이쯤 되면 못 걸어다닐 줄 알았어요. 휠체어 탈 줄 알았는데 걸어다니고 이렇게 수업도 하잖아요? 살은 많이 쪘지만. 근데 저는 다른 사람보다 무릎의 기능이 떨어지고 아프니까, 무릎이 건강한 사람들처럼 똑같이 걸어다닐 수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네. 천천히 걷고 자주 쉬어요. 가족이랑 같이 여행을 갈 때, 친구들과 어딜 갈때, 제가 건강한 사람과 똑같은 속도로 걸으면 어떻게 될까요? 금방 주저앉고 포기하겠죠?

그래서 같이 가는 사람에게 내 속도에 맞춰달라고 하고, 중간 중간에 쉬어요. 그러면 저도 건강한 사람과 같이 끝까지는 갈 수 있어요. 끝까지 같이 가긴 해야되니까.

중간에 나는 여기서 쉴테니까 너만 갔다와. 그러면 같이 뭘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많이 쉽니다. 뼈가 튼튼하지 못해서 근육을 많이 쓰는데 다른 사람에 비해 4배, 10배 정도 더 쓸 수 있을거래요. 그래서 집에 가면 뭉친 다리근육을 풀어주고 자야 다음 날도 걸을 수 있어요.”

“그럼 등산은 못 하세요?” 한 참가자가 물었다.

“안돼죠. 등산 하면 안됩니다. 관절염에 제일 안 좋은 게 등산이고 계단이에요. 저도 산을 좋아했는데 그건 이제 하면 안되죠. 큰일납니다.” 나는 웃었다.

이어서 말했다.

“선생님 머리 아픈 것도 저 다리 아픈 거하고 같아요. 남들보다 약한 상태니까 쉬어주는 게 맞아요. 다른 사람은 두 시간씩 집중하면 나는 20분 하고 쉬고, 30분 하고 자고, 그래야죠.

제가 산에 못 가는 것처럼 뇌신경이 약해졌으니 포기해야 하는 게 있을겁니다. 저는 뇌를 많이 쓰는 편이고 제 뇌는 튼튼하다고 생각하지만요. 저도 막 집중해서 몇 시간 뭐 하고 나면 자야됩니다. 그냥 팍 꼬꾸라지고 기절하듯이 잠들어요.

그러니까. 왜 나는 이게 안될까.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처음 발병했을 때에서 10년이 지났다고 하셨잖아요. 노화도 있을거에요. 저도 관절염이 일찍 왔지만 노화도 같이 오거든요. 그러니까 꼭 내가 아파서 생기는 일만 있는 게 아니고, 늙어가기 때문에 생기는 일도 있겠죠. 너무 좌절하지 않으셨으면 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저는 매일 등산도 하고 산책도 해요.” 발병한 지 20년 넘은 참가자가 말했다.

“네 맞아요. 선생님은 다리가 튼튼하고 저는 다리가 약하고. 누구나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요.”

“선생님도 약 먹어요?”

“그럼요. 관절염 약도 먹고, 가끔 병원가서 주사도 맞죠.”

머리가 자주 아프다는 여성은, 10년전 강도사건을 당한 직후 조현병이 발병했다. 환청과 망상에 시달렸고 10년을 누워지냈다. 이제는 약도 잘 먹고 관리가 잘되는 편이다. 석 줄도 못 쓸거라고 하더니 가장 단정하게 글을 잘 쓴다. 지난 수업 그의 노트를 사진 찍으며 글쓰기 교육할 때 보여줘도 되겠냐고 물어 허락을 받았다. 자기 이름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수업을 맡은 뒤에 조현병에 대한 다양한 글을 읽고 있다. 부산의 송곡클럽하우스 이야기도 읽고 일본의 베델하우스 이야기도 검색해봤다.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이다. 그만큼 사회가 너무 끔찍한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다수의 환자들은 명확한 가해자나 방아쇠 지점이 있었다. 인간은 강철처럼 단단하지 않다. 누구라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 나 역시도 그렇다. 수업을 거듭하며 이들과 동료의식 같은 걸 느낀다. 우리는 그저 평범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들이라서다.

#정신건강센터글쓰기

#조현병

지옥과 전쟁터 – 죽어가는 아이들

몇 년전 읽은 토니모리슨의 <빌러비드>는 자녀를 살해한 흑인노예여성의 이야기가 모티브다. 1856년, 실제 있었던 마가렛 가너의 사건이다. 마가렛은 가족이 있었다. 그들 모두 노예였다. 흑인노예들도 가족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 있었으나 백인주인에 의해 이 가족은 파괴되고 삭제되곤 했다.

가너의 가족 8명은 탈출을 준비한다. 농장이 있던 켄터키주에서 출발해 오하이오강을 건너 북부로 갈 생각이었다.

이들은 성공적으로 얼어붙은 오하이오강을 건너 신시내티에 도착했고 자유흑인의 집에 잠시 머물러 북으로 갈 채비를 했다. 추격자들이 이들을 금세 찾아냈고 가너의 가족은 죽음으로 저항할 지언정 다시는 노예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마가렛 가너는 당시 스물두살이었고 네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추격자들의 앞에서 가너는 세 살난 딸을 죽인다. 그도 바로 자살하려 했으나 바로 체포되어 감옥으로 이송된다. 배를 타고 감옥으로 가던 중에 물에 뛰어들었다는 증언이 있다. 마가렛이 남은 아이중 9개월된 아이를 안고 뛰어들었다는 증언과, 아이를 먼저 물에 던지고 가너가 뛰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강에 빠진 아이는 죽었고 마가렛은 사람들이 건져올려 또 살아남았다.

마가렛의 남편은 남북전쟁에 참전한 뒤 자유인이 되었고 마가렛은 다시 뉴올리언즈로 팔려갔다가 미시시피로 팔려가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김인선의 2014년 논문 <흑인노예의 자식 살해와 모성: 1856년 마가렛 가너 사건을 중심으로>에 따르면 가너의 아이들은 흑인과 뮬라토(흑인과 백인 혼혈)가 뒤섞여 있었다. 첫 아들은 흑인이었으나 둘째부터는 백인의 피가 섞였다. 마가렛 역시 뮬라토였다고 한다. 한 아이는 백인에 가까울 정도로 밝은 피부색이었다고 한다. 마가렛의 남편 로버트는 흑인이었다.

마가렛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흑인이었고 마가렛은 뮬라토였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마가렛이 누구의 자식이며 마가렛의 자녀들은 또 누구의 자식인가를 추정하게 한다. 논문에서는 이 부분을 상세히 다룬다.

요약하면 이렇다.

가너일가는 프리실라와 마가렛, 마가렛의 자녀들까지 한 농장에서 일했다. 마가렛의 어머니인 프리실라는 흑인과 결혼하였으나 백인소유주에게 성폭행을 당해 가너를 낳았을 것이다. 프리실라는 가너가 열 두살쯤 되었을 때 자신과 같은 일을 겪을거라 생각해 이웃에 있는 흑인노예 로버트와 급하게 결혼을 시켰으나 마가렛도 첫 아이 이후로 백인의 피가 섞인 아이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가족이 탈주를 결심한 때에 가너 가족의 소유주였던 존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아들들에게 농장을 맡겼다. 존의 아들들은 10대 후반에서 20대사이였다. 프리실라는 마가렛이 사실상 이복형제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의 자녀를 출산할까 두려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마가렛이 죽인 아이는 누구의 자녀였을까. 마가렛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가렛과 남편과 가족들을 잡으러 온 자들중에, 살아서 다시 노예가 된다면 다시 만나야 할 사람들 중에, 딸아이의 아비가 있었을 것이다.

수원의 한 아파트 냉동실에서 두 명의 영아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을 곰곰히 생각했다. 죽은 아이들 위로 자녀가 셋이 있다고 했다. 체포구속된 아이의 엄마인 고씨는 12살, 10살, 8살의 자녀가 있다. 그뒤로 둘을 더 낳은 것이다. 고씨는 서른 다섯살이고, 남편은 마흔 한 살이다. 고씨가 처음 아이를 낳았을 때는 스물 셋이었을거다. 아이들이 죽은 것은 2018년 11월과 2019년 11월로 추정된다고 한다. 5년 전 일이다. 나는 죽은 넷째와 다섯 째 아이가 1년 터울인 것에 놀랐다. 이미 한 아이를 낳아 죽였는데, 또 임신을 했다니. 나는 고씨가 어떤 심리상태였는지 알 수 없으나 가정폭력에 오랫동안 노출된 사람은 아닐까 의심했다.

사진 1 : The Modern Medea – The Story of Margaret Garner ARTIST Noble, Thomas Satterwhite, 1835-1907

160여년 전, 마가렛의 사건 이후 토마스 새터화이트는 The modern Medea 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다. 자신을 배반한 남자와 그 자녀들까지 모조리 죽여버린 메데이아.

마가렛 사건을 두고 죽음으로 인간임을 증명하려 했던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흑인노예의 저항은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노예의 삶을 대물림해주느니 ‘신에게 보낸다’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재임의 2022년 논문 <낙태와 아동학대 사이에서: 영아살해 처벌의 의미 변화에 대한 역사적 분석, 2010-2022년*>에 따르면 사회적 처벌은 이데올로기의 전파수단이며 사회적 통제의 기능을 한다. 조선시대의 영아살해는 출산통제의 수단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처벌을 받는 범죄가 되었다. 1951년 만들어진 형법에서는 “여성이 약자의 지위에 있는” 사회 현실을 고려하여 영아살해죄, 영아유기죄, 낙태죄의 형을 경하게 규정했다. 미국 심리학자 레스닉(Resnick, 1970)은 신생아살해를 다른 자식살해와 개념적으로 구분짓고 명명했다. 신생아살해(neonaticide) 가해자는 1살 이내의 유아살해(infanticide), 미성년 아동살해(filicide)와 같은 다른 자식살해 가해자와 달리 병원 진료를 받지 않고, 임신 사실을 숨기고 부정한다는 특성을 가지며, 의료 기관의 도움 없이 홀로 출산한 상황에서 범죄를 저지른다(Alder and Baker, 1997; Malmquist, 2013; Resnick, 1970; Saavedra and Cameira, 2018)고 한다. 한국의 영아살해도 같은 특성을 갖는다.

이재임논문의 표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아이들이 있다. 촛불같은 인생에 바람 한 점 가려줄 데가 미숙하고 부족해도 부모와 가족뿐인 세상이라고 치면, 그나마도 부족한 삶은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내가 사는 집이 지옥과 다르지 않고 내 일상이 전쟁과 다르지 않다면, 지옥과 전쟁터에서 아이를 낳고 기를 생각은 하기 어렵다. 이 지옥을 다시 물려주고 싶은 않은 어떤 어미들이 어딘가에 있는 것이다. 2013년 재판부는 한 영아살해 사건에 대해 “어린 미혼모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출산을 장려하면서도 양육은 제대로 도와주지 못하는 우리 사회 책임도 커 실형은 선고하지 않는다”고 적기도 했다. 갓 태어난 아이들이 어미의 손에 의해 죽어가는 세상. 어떻게 생각해도 방법을 찾을 수 없어서 아이를 버리고 아이를 죽여야 하는 바로 여기가 지옥이다.

참고문헌 : 이재임 (2022) <낙태와 아동학대 사이에서: 영아살해 처벌의 의미 변화에 대한 역사적 분석, 2010-2022년*

김인선 (2014) <흑인노예의 자식 살해와 모성: 1856년 마가렛 가너 사건을 중심으로>

한국일보 남보라 2023. 6. 29. ‘수원 영아살해’ 엄마 “막내 초등학교 졸업하면 자수하려했다”

수원 영아살해 피의자 고 모 씨의 편지

[강좌후기]뇌신경장애

정신장애라는 말을 싫어한다.

한국어에서 쓰는 “정신”이라는 낱말은 ’스스로 의지를 일으키면 변화시킬 수 있는 얼‘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_ 정신차려

_ 정신일도하사불성

_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

_ 정신줄 놓지마.

’정신장애‘의 정신과 ‘정신차려’의 정신이 과연 같은 ‘정신’일까. 정신장애는 이미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질병에 이르른 것인데 왜 정신장애라 말할까. ‘뇌신경장애’라고 하면 안될까. 오랫동안 그 생각을 했다. 좀 더 급진적인 말로는 ‘신경다양성’이 있다.

조현병으로 진단을 받았는데도 자신이 조현병인줄 잘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조현병이 정확히 뭐냐고 묻기도 했다. 복지사는 호르몬, 스트레스, 뇌신경의 문제 등 다양하고 복잡한 원인이 있어서 원인으로 말할 수 없고 그 증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말을 보태주었다.

환각, 환청, 환영등이 주된 것이라 했고, 망상이 일어나 현실과 현실 아닌 것을 분간하기 어려워진다고 했다.

복지사의 말을 듣던 나는 턱을 괴고 있었다.

무엇이 다른가.

”우울증도 그 증상 있는데요.“ 라고 내가 복지사에게 말을 건넸다.

2008년에 발병했던 내 우울증은 급성에, 중증이었다. 무기력이 시작되었고 환청이 들렸고 환영을 봤다. 증세가 심해졌을 때 환후도 있었다. 몸에 닿는 것들이 꺼끌거려 면으로 된 것 외에 다른 옷을 잘 입지 못했다. 2008년 첫 진단을 받고 바로 약을 먹었다. 사고위험이 있다며 의사는 복용량을 서서히 늘렸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눈에 초점을 맞추느라 30분 정도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고, 길을 걷다가 균형을 잃어 넘어지기도 했다. 내가 먹었던 약 중에 다수가 부작용이 있었다. 졸피뎀류는 6개월 정도 지나니 내성이 생겨 수면제의 효능을 잃었고, 쿠에타핀이나 자이프렉사는 부작용이 심했다. 쿠에타핀과 자이프렉사는 정신분열, 조현병 약으로도 쓴다는 걸 검색해 보고 좌절했다. 나는 결국 조현병 환자가 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가족력이 있다. 조현병 발병환자가 있었다고 들었다. 내 눈으로 확인하진 못했다. 그러니, 모든 조현병이 유전되지 않지만 가족력이 있으면 발병확률이 높아지는 건 사실이니까, 나는 이미 아이를 낳아버렸는데 조현병 환자가 되면 어떻게 되는 건가, 그 걱정에 우울이 더욱 깊어졌다.

우울의 끝에 조증이 오기도 했다. 2박 3일 잠을 안자고 뭔가를 읽고 써댔다. 그나마 책을 붙잡고 있어서 살 수 있었을 거다. 술이나 도박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떤 중독이 나를 거기서 구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의사는 나에게 우울증이 오래되면 성격으로 고착될 수 있으니 서둘러 집중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집착했다. 최선을 다해 치료를 받고 재빨리 복귀하고 싶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비웃고 있었고, 무시했다. 모두들 고의적으로 나를 괴롭혔고, 나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자이프렉사는 순식간에 30kg 정도를 찌웠고, 배란도 멈췄다. 갱년기 증후군을 그때 겪었다.

아이는 어쨌을까. 약으로 인한 섬망이 계속되어 중증이던 6개월의 기억이 없다. 아이의 사진도 일정기간 중단되어 있다. 매일 식탁에 앉아 무엇을 썼다. 앉은 자리에서 A4대학노트를 열 몇장씩 써내려갔다. 그냥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을 적었고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장을 적었다. 샤워를 해도 길을 걸어도 계속 머릿속에 문장이 이어졌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신경끝에 말풍선이 달려왔고, 내 발은 땅을 딛지 못했다. 늘 허공에 매달려 있는 기분이었다.

“양극성 장애를 가진 우울증과 조현병의 차이가 뭘까요.”

나는 ‘중증우울증도 환상, 환청, 환후가 있고 망상도 있다.’라고 짧게 말한 뒤 복지사와 참가자에게 되물었다.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면 망상의 빈도, 기간, 정도의 차이였던 거 같다”고 자답했다. 우울에서 조증삽화가 찾아오면 공격적이고 폭력적이 되었다. 남을 공격하거나 나 자신을 해치려고 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술이었다. 지하 27층 정도에 널부러져 있다가 술을 마시면 지상 20층 옥상에 올라가버리기도 했으니까.

그 터널을 어떻게 지나왔을까.

중환자실에서 3일만에 깨어나 폐쇄병동 입원을 거절하고 정신분석을 받는 게 2012년, 공황장애가 일어난 게 2014년, 그리고 정신분석이 끝난 게 2015년이고, 2017년쯤 다시 공황장애가 짧게 있었다. 그러니까 내 발병기간은 거의 10년정도다. 당시 나와 함께 일하면서도 눈치채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그저 좀 톡특하다, 강하다, 세다, 정도의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괴로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삶의 경로를 뒤틀고, 내 삶의 주도권을 온전히 다시 잡고나서야 완전히 그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내 목줄을 쥐고 있는 어떤 것을 과감히 떨쳐버릴 수 있었을때, 다시 태어났다는 얘기겠다.

아니 어쩌면, 그냥 운이 좋았던 거다.

오늘은 한겨레6411의 목소리에 실린 “정신장애인 동료상담가”의 칼럼을 함께 읽었다. 어떤 부분이 맘에 와닿느냐고 물었더니 참가자들은 낙인, 배제, 억압, 고립, 망상, 가치없는, 정신장애, 와 같은 단어를 꼽았다. 그리고 ‘지도를 다시 쓰다’, ‘우정으로 확인하는’ 과 같은 문장을 짚어가며 다시 읽었다.

지도를 다시 그리는 사람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당사자의 목소리는 중요하다고,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을 필요가 있다고, 우리는, 뭘 잘못해서 병에 걸린 게 아니라고 말했다.

관절염이 생기면 죽을 때까지 관절을 회복할 수 없고, 위장장애가 있으면 늘 먹는 것을 조심해야 하듯이, 조현병도 마찬가지라고. 그건 그저 병이니까. 잘 치료해야 하고 잘 낫지 않더라도, 어쨌거나 그 병과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으니까.

다음주부터는 주제를 정하고 좀 더 깊이 있게 써보기로 했다. 할 수 있을거다.

멀리서 보면 그 깊이를 모르는 바다도, 자꾸 가보면 내가 어디쯤 갈 수 있는지 알게 되는 것처럼.

우울증을 겪었던 10년은, 나에게 가장 큰 바다가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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