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강좌]활동가글쓰기 교육

경기도교육청 사업으로 진행하는 경기교육복지사협회와의 글쓰기 교육의 이론 수업 세 번의 시간을 모두 마쳤습니다.

다음부터는 자조 모임을 열고 각자의 이야기를 쓰게 됩니다. 저는 모임에 두어번 참석해 참가자들의 글을 함께 볼 예정입니다.

열린 마음, 써보겠다는 의지가 한 편의 글을 만들고 내 삶의 이야기를 정리해나갈 수 있습니다.

불안정한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이 내 이야기로 만든 벽돌 한 두개씩 굽는 과정은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줍니다.

준비해준 교육복지사 선생님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좋은 자리, 고맙습니다.

강사 : 문화공동체 히응 대표자 이하나

이미 무너진 폐허에서

처참한 마음이 가라앉을때까지 기다렸다가 쓸까 하루종일 서성였습니다만,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이 더 늦어질 거란 생각만 듭니다.

교권추락, 공교육 붕괴는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학교 내의 각종 교권침해 사례와 인권침해 사례는 굳이 더 보태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폭력적 교육현장의 문제는 또 다른 폭력을 낳습니다. 학교폭력뿐 아니라 마녀사냥도 이어집니다. 폭력의 양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한 작은 공동체의 이익이 우선이고 그 외부자들은 모두 내 공동체에 엎드려 조아려야 마땅하다는 이기주의입니다. 이 문장의 적용범위는 학교뿐 아니라 지금 이 시대 한국사회의 모든 조직에 해당됩니다.

학생은 어떤 가족의 구성원입니다. 그 가족은 이 사회의 시민입니다. 시민들은 각자의 번뇌를 안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귀가한 가족들은 사회에서 받은 수많은 모멸과 차별을 품고 있습니다. 아주 더러운 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집으로 갑니다. 사회의 모든 그림자가 담긴 보따리 옆에서 잠을 자는 아이들은 보따리에서 흘러나온 지꺼기를 몸에 묻힌 채 학교로 옵니다. 그러니까, 학교에는 이 사회에 흘러다니는 혐오, 물화, 차별, 배제, 모욕이 뒤섞였다가 정화되었다가 다시 폭발하는 곳입니다. 응축된 감정의 쓰레기장입니다. 교육은 이 쓰레기들을 씻어내는 역할을 해내야 합니다. 사회가 더러울수록 학교가 해내야 할 일은 너무 많아집니다.

공교육은 1980년대보다는 행정시스템이 조금 나아졌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우리 사회는 더욱 지독해졌습니다. 사회의 부패속도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교실 안은 아수라장입니다. 사회가 집약되어 있으니까요. 반면, 규율과 질서를 잘 지키고, 인내심이 강하고 수행능력이 뛰어나며, 체제적응을 잘 하는 사람들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위 덕목에 하나라도 어긋나면 교사가 될 수 없습니다. 공직자도 될 수 없습니다.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은 체제를 꾸려가는 정부의 돈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 이번 서이초 교사가 처음이 아닙니다. 2018년 전라남도 구례에서도 비슷한 죽음이 있었습니다. 초등교사였고 혼자 3개의 공모성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업무과중으로 스트레스가 많았다고 알려졌습니다. 당시에도 개인의 우울증이라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2018년에는 많이 외면했습니다. 구례의 교사는 “학교는 지옥이다”라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그 이후 5년 동안 수많은 교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 사이 학교는 딱히 대단한 대책이 없었습니다.

공교육이 과연 붕괴된 것일까 다시 질문합니다.

붕괴한 것이 아니라, 공교육은 완전히 달라진 세상에 전혀 적응하지 못해 분쇄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요. 세상은 변했어요. 아이를 때리면 안되고 모든 노동은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직업에 귀천을 두면 안되고 차별적인 말을 하면 안됩니다. 성적대로 줄을 세워도 안되고 가부장을 내세워도 안됩니다.

반면, 노동으로 돈 벌기 힘들어진 세상이고 부자되기 어렵습니다. 계급사다리는 부서진 지 오래고 금융자본은 전세계를 잡아먹고 있어요. 세상은 더욱 더 양극화가 심해져서 개천에서는 절대 용이 나지 않아요. 이제 금융자본으로 돈 벌 수 없는 노동자들끼리 부여안고 팔짱 끼고 걸어야 살똥 말똥한 세상입니다.

교권추락은 어떤가요. 교사의 역할이 지금 교사가 할 일이 맞나요?

교사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요? 가르치는 사람인가요? 지금의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들인가요? 아니예요. 지금의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르칠 수 없어요. 교사는 행정업무를 하는 사람이고 기간제교사를 채용하고 내보내는 사람이며, 돌봄교실을 배정하는 사람이고, 공모사업에 기획서를 제출하고 행정실에 예산지급 품의서를 제출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연락이 되지 않는 학부모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서 아이문제로 학교에 나와줬으면 좋겠다고 읍소해야 하며, 민원을 받아야 하고,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검은색으로 가려야 하는 사람이죠.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의 눈치를 봐야하고 폭력적인 아이를 달래야 합니다. 급식에 알레르기유발물질이 있는지 살펴야 하고 아이들의 콧물도 닦아줘야 합니다. 초등교사는 가르치는 일보다 행정과 돌봄을 더 많이 챙겨야 합니다. 선배들의 업무를 대신 처리하고 체육관 물품을 정리하고 과학실 도구를 닦아야 합니다. 교사는 누구인가요?

사회는 학교에 너무 많은 것을 밀어넣었습니다. 학부모들도 그걸 원합니다. 학교는 무너지는 이 사회의 마지막 안전망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요.

학교는 30년전과 완전히 다른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그 사이 공교육계는 여전히 30년전의 모습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교권추락, 공교육 붕괴로 해석되지 않습니다. 사회가 무너지고, 공동체가 작살났기 때문에 여태 버티던 학교의 담벼락은 이미 무너졌어요. 이번에 크게 보였을 뿐입니다.

각 교실에는 폭력적 성향의 학생뿐 아니라, 별도의 돌봄이 필요한 학생이 훨씬 많아졌습니다. 코로나 3년간 퇴행을 보인 학생들도 있고, 미숙아로 태어나 힘겹게 성장하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학교에 온갖 정책이 쏟아져 들어왔고, 돌봄의 크기가 커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제 목소리를 낼 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상상도 못할 민원이 있습니다. 담임교사의 연락처는 공개되어 있고 SNS는 수시로 사찰당합니다.

만약, 방법이 있겠냐고 묻는다면 여태 몇 년간 해왔던 이야기와 비슷한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1개 학급에 2명의 담임이 필요합니다. 생활지도와 교과지도가 분리되어야 합니다.

학생수가 줄어든다고 교사를 줄여서는 안됩니다.

행정실무자와 시설관리자는 각 학교에 더 많이 배치되어야 합니다. 특별교실을 관리하고 방역을 책임지고 학교시설을 지킬 사람들이 여러 명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공모사업 등 별도의 행정업무를 전담할 수 있고 결정권도 가진 행정실무사가 교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학교에 1명 이상의 상담전문가와 사회복지사가 필요합니다. 보건소와 정신건강보건센터와 빠르게 연락할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민원업무는 교사가 아닌 전문가가 처리해야 합니다. 또는 각 학교의 민원창구를 만들어 별도의 기관이 받아내야 합니다.

법률자문도 필요합니다. 수없이 쏟아지는 학교내 비정규직의 노무문제와 교직원 노동권에 대한 해석을 해줄 사람과 학교에 붙어올 민원을 법적으로 해석해줄 기구도 필요합니다.

학교의 급식지도는 급식의 영역에서 따로 진행하는 게 맞습니다. 특히 급식실이 없는 학교에서 교사는 식사시간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학교는 가르치기만 하는 공간으로 남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말그대로 시민을 길러내는 복합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학교의 주권도 분산되어야 합니다. 교사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주도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교사는 무슨 일을 할 수 있냐고요? 위에 언급한 일이 교사에게서 분리되면, 그때 교사는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겠죠. 교안을 개발하고 아이들 개개인의 특성을 고려하고, 문해력이 떨어지는 아이를 따로 지도하거나 발표연습을 더 시킬 수도 있습니다.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교육을 시도할 수도 있고 아이들과 재미난 프로젝트도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본인들과 구성원들의 노동권을 고려하고 지역사회와 연대할 길을 만들 수 있겠죠. 학교에 교사외의 직군이 많아지면 그 자체로 학교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교육청을 압수수색해봤자, 답은 없을 겁니다. 답은 현장에 있습니다.

지금의 시민은 자기가 맡은 일 외의 다른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하기엔 너무 바쁩니다. 세상이 그렇잖아요. 죽도록 벌어도 대출이자 갚기 바쁘고, 아무리 모아봤자 좋은 집으로 이사가기 힘들어요. 세상은 약한 자들을 계속 갈아넣다가 결국 죽여버리는데, 내가 왜 예정에 없던 일을 다 감당해야 합니까. 다들 똑같지 않습니까? 서로를 물어뜯지 않으면 내가 언제 갈려버릴지 모르는 세상에서, 혐오로 무장하는 게 살길이라고 터득한 사람들이 드글댑니다.

서로를 미워하고 질투하는 힘으로 버텨야 하는 한국사회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우리는 모두 자멸을 향해 힘껏 폭주하는 레밍과 같습니다.

“지난 시간동안, 나는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는 교사의 글을 읽습니다. 울지 말아야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통한 마음으로 함께 빕니다.

[강좌후기]모두가 인간이라

“저는 병 때문에 그런지, 이렇게 조금만 신경을 쓰면 머리가 너무 아프고.. 쉬어야해요….”

문장의 끝에 숨어있는 두 번째 말, ‘나는 언제쯤 괜찮아질까요?’ 가 자연스럽게 붙어오는 듯 했다.

나는 화이트보드 앞에 일어서서 검은색 마커를 들고 무릎뼈의 연결지점을 그렸다.

“제가 관절염이 있어요. 15년 정도 됐거든요. 이게 무슨 병이냐 하면..

무릎과 무릎 사이에 연골판이라고 있어요.” 무릎과 무릎 사이에 공간을 띄워두고 사이에 판막을 그렸다. 병원을 오래 다니면 정형외과 의사처럼 그릴 수 있게 된다.

몇 명이 안다는 듯이 응응. 네. 하는 소리를 냈다.

“연골판은 무릎뼈끝의 연골과 다른 무릎뼈의 연골이 부딪치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는데, 저는 여기가 찢어졌어요. 연골판.

연골판은 많이 찢어진대요. 운동하다가도 찢어지고요. 특히 축구하다가, 등산하다가, 앗! 하고 무릎이 팍 꺾일 때, 그때 많이 찢어진대요.

이게 딱 이렇게 금 그은 듯이 찢어지면, 다시 꿰매면 되겠죠. 운동선수들도 많이 그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여기가 딱 찢어진게 아니고 너덜너덜하게 올 풀린 걸레같다고 했어요.” 나는 연골판에 위아래로 죽죽 사선을 지그재그선을 그었다.

“의사가 한 말이에요. 올 풀린 걸레같다고. 그러면 이 조각들이 언젠가 떨어져 나와서 몸속을 돌아다닐 거니까…. 싹 다듬어서 도려내야 하죠. 그 수술을 한 게 12년쯤 됐고요. 앞부분, 뒷부분 찢어지고 터지고 뭐 그래서 수술을 세 번 했어요. 그리고 사람 몸이 희한한 게 회복은 안되는데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해서 여기 상한 부분, 연골 끄트머리에서 뼈가 다시 자라요. 아주 조그맣지만. 그래서 얘네들이 자라서 또 부딪혀요. 그러면.. 엄청 아프죠. 연골이 없이 속에서 뼈가 부딪히니까. 매일 아파요. 아픈 건 쉬지 않고 아픕니다. 아.. 가끔, 안 아플 때도 있긴 해요.”

나는 풉. 하고 웃었지만, 참가자들은 안타깝다는 듯이 여러 소리를 냈다. 질문도 있었다. 가볍게 몇 가지 답을 한 뒤에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처음 수술할 때, 지금 제 나이쯤 되면 못 걸어다닐 줄 알았어요. 휠체어 탈 줄 알았는데 걸어다니고 이렇게 수업도 하잖아요? 살은 많이 쪘지만. 근데 저는 다른 사람보다 무릎의 기능이 떨어지고 아프니까, 무릎이 건강한 사람들처럼 똑같이 걸어다닐 수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네. 천천히 걷고 자주 쉬어요. 가족이랑 같이 여행을 갈 때, 친구들과 어딜 갈때, 제가 건강한 사람과 똑같은 속도로 걸으면 어떻게 될까요? 금방 주저앉고 포기하겠죠?

그래서 같이 가는 사람에게 내 속도에 맞춰달라고 하고, 중간 중간에 쉬어요. 그러면 저도 건강한 사람과 같이 끝까지는 갈 수 있어요. 끝까지 같이 가긴 해야되니까.

중간에 나는 여기서 쉴테니까 너만 갔다와. 그러면 같이 뭘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많이 쉽니다. 뼈가 튼튼하지 못해서 근육을 많이 쓰는데 다른 사람에 비해 4배, 10배 정도 더 쓸 수 있을거래요. 그래서 집에 가면 뭉친 다리근육을 풀어주고 자야 다음 날도 걸을 수 있어요.”

“그럼 등산은 못 하세요?” 한 참가자가 물었다.

“안돼죠. 등산 하면 안됩니다. 관절염에 제일 안 좋은 게 등산이고 계단이에요. 저도 산을 좋아했는데 그건 이제 하면 안되죠. 큰일납니다.” 나는 웃었다.

이어서 말했다.

“선생님 머리 아픈 것도 저 다리 아픈 거하고 같아요. 남들보다 약한 상태니까 쉬어주는 게 맞아요. 다른 사람은 두 시간씩 집중하면 나는 20분 하고 쉬고, 30분 하고 자고, 그래야죠.

제가 산에 못 가는 것처럼 뇌신경이 약해졌으니 포기해야 하는 게 있을겁니다. 저는 뇌를 많이 쓰는 편이고 제 뇌는 튼튼하다고 생각하지만요. 저도 막 집중해서 몇 시간 뭐 하고 나면 자야됩니다. 그냥 팍 꼬꾸라지고 기절하듯이 잠들어요.

그러니까. 왜 나는 이게 안될까.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처음 발병했을 때에서 10년이 지났다고 하셨잖아요. 노화도 있을거에요. 저도 관절염이 일찍 왔지만 노화도 같이 오거든요. 그러니까 꼭 내가 아파서 생기는 일만 있는 게 아니고, 늙어가기 때문에 생기는 일도 있겠죠. 너무 좌절하지 않으셨으면 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저는 매일 등산도 하고 산책도 해요.” 발병한 지 20년 넘은 참가자가 말했다.

“네 맞아요. 선생님은 다리가 튼튼하고 저는 다리가 약하고. 누구나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요.”

“선생님도 약 먹어요?”

“그럼요. 관절염 약도 먹고, 가끔 병원가서 주사도 맞죠.”

머리가 자주 아프다는 여성은, 10년전 강도사건을 당한 직후 조현병이 발병했다. 환청과 망상에 시달렸고 10년을 누워지냈다. 이제는 약도 잘 먹고 관리가 잘되는 편이다. 석 줄도 못 쓸거라고 하더니 가장 단정하게 글을 잘 쓴다. 지난 수업 그의 노트를 사진 찍으며 글쓰기 교육할 때 보여줘도 되겠냐고 물어 허락을 받았다. 자기 이름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수업을 맡은 뒤에 조현병에 대한 다양한 글을 읽고 있다. 부산의 송곡클럽하우스 이야기도 읽고 일본의 베델하우스 이야기도 검색해봤다.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이다. 그만큼 사회가 너무 끔찍한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다수의 환자들은 명확한 가해자나 방아쇠 지점이 있었다. 인간은 강철처럼 단단하지 않다. 누구라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 나 역시도 그렇다. 수업을 거듭하며 이들과 동료의식 같은 걸 느낀다. 우리는 그저 평범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들이라서다.

#정신건강센터글쓰기

#조현병

지옥과 전쟁터 – 죽어가는 아이들

몇 년전 읽은 토니모리슨의 <빌러비드>는 자녀를 살해한 흑인노예여성의 이야기가 모티브다. 1856년, 실제 있었던 마가렛 가너의 사건이다. 마가렛은 가족이 있었다. 그들 모두 노예였다. 흑인노예들도 가족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 있었으나 백인주인에 의해 이 가족은 파괴되고 삭제되곤 했다.

가너의 가족 8명은 탈출을 준비한다. 농장이 있던 켄터키주에서 출발해 오하이오강을 건너 북부로 갈 생각이었다.

이들은 성공적으로 얼어붙은 오하이오강을 건너 신시내티에 도착했고 자유흑인의 집에 잠시 머물러 북으로 갈 채비를 했다. 추격자들이 이들을 금세 찾아냈고 가너의 가족은 죽음으로 저항할 지언정 다시는 노예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마가렛 가너는 당시 스물두살이었고 네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추격자들의 앞에서 가너는 세 살난 딸을 죽인다. 그도 바로 자살하려 했으나 바로 체포되어 감옥으로 이송된다. 배를 타고 감옥으로 가던 중에 물에 뛰어들었다는 증언이 있다. 마가렛이 남은 아이중 9개월된 아이를 안고 뛰어들었다는 증언과, 아이를 먼저 물에 던지고 가너가 뛰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강에 빠진 아이는 죽었고 마가렛은 사람들이 건져올려 또 살아남았다.

마가렛의 남편은 남북전쟁에 참전한 뒤 자유인이 되었고 마가렛은 다시 뉴올리언즈로 팔려갔다가 미시시피로 팔려가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김인선의 2014년 논문 <흑인노예의 자식 살해와 모성: 1856년 마가렛 가너 사건을 중심으로>에 따르면 가너의 아이들은 흑인과 뮬라토(흑인과 백인 혼혈)가 뒤섞여 있었다. 첫 아들은 흑인이었으나 둘째부터는 백인의 피가 섞였다. 마가렛 역시 뮬라토였다고 한다. 한 아이는 백인에 가까울 정도로 밝은 피부색이었다고 한다. 마가렛의 남편 로버트는 흑인이었다.

마가렛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흑인이었고 마가렛은 뮬라토였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마가렛이 누구의 자식이며 마가렛의 자녀들은 또 누구의 자식인가를 추정하게 한다. 논문에서는 이 부분을 상세히 다룬다.

요약하면 이렇다.

가너일가는 프리실라와 마가렛, 마가렛의 자녀들까지 한 농장에서 일했다. 마가렛의 어머니인 프리실라는 흑인과 결혼하였으나 백인소유주에게 성폭행을 당해 가너를 낳았을 것이다. 프리실라는 가너가 열 두살쯤 되었을 때 자신과 같은 일을 겪을거라 생각해 이웃에 있는 흑인노예 로버트와 급하게 결혼을 시켰으나 마가렛도 첫 아이 이후로 백인의 피가 섞인 아이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가족이 탈주를 결심한 때에 가너 가족의 소유주였던 존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아들들에게 농장을 맡겼다. 존의 아들들은 10대 후반에서 20대사이였다. 프리실라는 마가렛이 사실상 이복형제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의 자녀를 출산할까 두려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마가렛이 죽인 아이는 누구의 자녀였을까. 마가렛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가렛과 남편과 가족들을 잡으러 온 자들중에, 살아서 다시 노예가 된다면 다시 만나야 할 사람들 중에, 딸아이의 아비가 있었을 것이다.

수원의 한 아파트 냉동실에서 두 명의 영아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을 곰곰히 생각했다. 죽은 아이들 위로 자녀가 셋이 있다고 했다. 체포구속된 아이의 엄마인 고씨는 12살, 10살, 8살의 자녀가 있다. 그뒤로 둘을 더 낳은 것이다. 고씨는 서른 다섯살이고, 남편은 마흔 한 살이다. 고씨가 처음 아이를 낳았을 때는 스물 셋이었을거다. 아이들이 죽은 것은 2018년 11월과 2019년 11월로 추정된다고 한다. 5년 전 일이다. 나는 죽은 넷째와 다섯 째 아이가 1년 터울인 것에 놀랐다. 이미 한 아이를 낳아 죽였는데, 또 임신을 했다니. 나는 고씨가 어떤 심리상태였는지 알 수 없으나 가정폭력에 오랫동안 노출된 사람은 아닐까 의심했다.

사진 1 : The Modern Medea – The Story of Margaret Garner ARTIST Noble, Thomas Satterwhite, 1835-1907

160여년 전, 마가렛의 사건 이후 토마스 새터화이트는 The modern Medea 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다. 자신을 배반한 남자와 그 자녀들까지 모조리 죽여버린 메데이아.

마가렛 사건을 두고 죽음으로 인간임을 증명하려 했던 사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흑인노예의 저항은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노예의 삶을 대물림해주느니 ‘신에게 보낸다’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재임의 2022년 논문 <낙태와 아동학대 사이에서: 영아살해 처벌의 의미 변화에 대한 역사적 분석, 2010-2022년*>에 따르면 사회적 처벌은 이데올로기의 전파수단이며 사회적 통제의 기능을 한다. 조선시대의 영아살해는 출산통제의 수단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처벌을 받는 범죄가 되었다. 1951년 만들어진 형법에서는 “여성이 약자의 지위에 있는” 사회 현실을 고려하여 영아살해죄, 영아유기죄, 낙태죄의 형을 경하게 규정했다. 미국 심리학자 레스닉(Resnick, 1970)은 신생아살해를 다른 자식살해와 개념적으로 구분짓고 명명했다. 신생아살해(neonaticide) 가해자는 1살 이내의 유아살해(infanticide), 미성년 아동살해(filicide)와 같은 다른 자식살해 가해자와 달리 병원 진료를 받지 않고, 임신 사실을 숨기고 부정한다는 특성을 가지며, 의료 기관의 도움 없이 홀로 출산한 상황에서 범죄를 저지른다(Alder and Baker, 1997; Malmquist, 2013; Resnick, 1970; Saavedra and Cameira, 2018)고 한다. 한국의 영아살해도 같은 특성을 갖는다.

이재임논문의 표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아이들이 있다. 촛불같은 인생에 바람 한 점 가려줄 데가 미숙하고 부족해도 부모와 가족뿐인 세상이라고 치면, 그나마도 부족한 삶은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내가 사는 집이 지옥과 다르지 않고 내 일상이 전쟁과 다르지 않다면, 지옥과 전쟁터에서 아이를 낳고 기를 생각은 하기 어렵다. 이 지옥을 다시 물려주고 싶은 않은 어떤 어미들이 어딘가에 있는 것이다. 2013년 재판부는 한 영아살해 사건에 대해 “어린 미혼모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출산을 장려하면서도 양육은 제대로 도와주지 못하는 우리 사회 책임도 커 실형은 선고하지 않는다”고 적기도 했다. 갓 태어난 아이들이 어미의 손에 의해 죽어가는 세상. 어떻게 생각해도 방법을 찾을 수 없어서 아이를 버리고 아이를 죽여야 하는 바로 여기가 지옥이다.

참고문헌 : 이재임 (2022) <낙태와 아동학대 사이에서: 영아살해 처벌의 의미 변화에 대한 역사적 분석, 2010-2022년*

김인선 (2014) <흑인노예의 자식 살해와 모성: 1856년 마가렛 가너 사건을 중심으로>

한국일보 남보라 2023. 6. 29. ‘수원 영아살해’ 엄마 “막내 초등학교 졸업하면 자수하려했다”

수원 영아살해 피의자 고 모 씨의 편지

[강좌후기]뇌신경장애

정신장애라는 말을 싫어한다.

한국어에서 쓰는 “정신”이라는 낱말은 ’스스로 의지를 일으키면 변화시킬 수 있는 얼‘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_ 정신차려

_ 정신일도하사불성

_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

_ 정신줄 놓지마.

’정신장애‘의 정신과 ‘정신차려’의 정신이 과연 같은 ‘정신’일까. 정신장애는 이미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질병에 이르른 것인데 왜 정신장애라 말할까. ‘뇌신경장애’라고 하면 안될까. 오랫동안 그 생각을 했다. 좀 더 급진적인 말로는 ‘신경다양성’이 있다.

조현병으로 진단을 받았는데도 자신이 조현병인줄 잘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조현병이 정확히 뭐냐고 묻기도 했다. 복지사는 호르몬, 스트레스, 뇌신경의 문제 등 다양하고 복잡한 원인이 있어서 원인으로 말할 수 없고 그 증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말을 보태주었다.

환각, 환청, 환영등이 주된 것이라 했고, 망상이 일어나 현실과 현실 아닌 것을 분간하기 어려워진다고 했다.

복지사의 말을 듣던 나는 턱을 괴고 있었다.

무엇이 다른가.

”우울증도 그 증상 있는데요.“ 라고 내가 복지사에게 말을 건넸다.

2008년에 발병했던 내 우울증은 급성에, 중증이었다. 무기력이 시작되었고 환청이 들렸고 환영을 봤다. 증세가 심해졌을 때 환후도 있었다. 몸에 닿는 것들이 꺼끌거려 면으로 된 것 외에 다른 옷을 잘 입지 못했다. 2008년 첫 진단을 받고 바로 약을 먹었다. 사고위험이 있다며 의사는 복용량을 서서히 늘렸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눈에 초점을 맞추느라 30분 정도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고, 길을 걷다가 균형을 잃어 넘어지기도 했다. 내가 먹었던 약 중에 다수가 부작용이 있었다. 졸피뎀류는 6개월 정도 지나니 내성이 생겨 수면제의 효능을 잃었고, 쿠에타핀이나 자이프렉사는 부작용이 심했다. 쿠에타핀과 자이프렉사는 정신분열, 조현병 약으로도 쓴다는 걸 검색해 보고 좌절했다. 나는 결국 조현병 환자가 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가족력이 있다. 조현병 발병환자가 있었다고 들었다. 내 눈으로 확인하진 못했다. 그러니, 모든 조현병이 유전되지 않지만 가족력이 있으면 발병확률이 높아지는 건 사실이니까, 나는 이미 아이를 낳아버렸는데 조현병 환자가 되면 어떻게 되는 건가, 그 걱정에 우울이 더욱 깊어졌다.

우울의 끝에 조증이 오기도 했다. 2박 3일 잠을 안자고 뭔가를 읽고 써댔다. 그나마 책을 붙잡고 있어서 살 수 있었을 거다. 술이나 도박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떤 중독이 나를 거기서 구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의사는 나에게 우울증이 오래되면 성격으로 고착될 수 있으니 서둘러 집중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집착했다. 최선을 다해 치료를 받고 재빨리 복귀하고 싶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비웃고 있었고, 무시했다. 모두들 고의적으로 나를 괴롭혔고, 나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자이프렉사는 순식간에 30kg 정도를 찌웠고, 배란도 멈췄다. 갱년기 증후군을 그때 겪었다.

아이는 어쨌을까. 약으로 인한 섬망이 계속되어 중증이던 6개월의 기억이 없다. 아이의 사진도 일정기간 중단되어 있다. 매일 식탁에 앉아 무엇을 썼다. 앉은 자리에서 A4대학노트를 열 몇장씩 써내려갔다. 그냥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을 적었고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장을 적었다. 샤워를 해도 길을 걸어도 계속 머릿속에 문장이 이어졌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신경끝에 말풍선이 달려왔고, 내 발은 땅을 딛지 못했다. 늘 허공에 매달려 있는 기분이었다.

“양극성 장애를 가진 우울증과 조현병의 차이가 뭘까요.”

나는 ‘중증우울증도 환상, 환청, 환후가 있고 망상도 있다.’라고 짧게 말한 뒤 복지사와 참가자에게 되물었다.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면 망상의 빈도, 기간, 정도의 차이였던 거 같다”고 자답했다. 우울에서 조증삽화가 찾아오면 공격적이고 폭력적이 되었다. 남을 공격하거나 나 자신을 해치려고 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술이었다. 지하 27층 정도에 널부러져 있다가 술을 마시면 지상 20층 옥상에 올라가버리기도 했으니까.

그 터널을 어떻게 지나왔을까.

중환자실에서 3일만에 깨어나 폐쇄병동 입원을 거절하고 정신분석을 받는 게 2012년, 공황장애가 일어난 게 2014년, 그리고 정신분석이 끝난 게 2015년이고, 2017년쯤 다시 공황장애가 짧게 있었다. 그러니까 내 발병기간은 거의 10년정도다. 당시 나와 함께 일하면서도 눈치채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그저 좀 톡특하다, 강하다, 세다, 정도의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괴로워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삶의 경로를 뒤틀고, 내 삶의 주도권을 온전히 다시 잡고나서야 완전히 그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내 목줄을 쥐고 있는 어떤 것을 과감히 떨쳐버릴 수 있었을때, 다시 태어났다는 얘기겠다.

아니 어쩌면, 그냥 운이 좋았던 거다.

오늘은 한겨레6411의 목소리에 실린 “정신장애인 동료상담가”의 칼럼을 함께 읽었다. 어떤 부분이 맘에 와닿느냐고 물었더니 참가자들은 낙인, 배제, 억압, 고립, 망상, 가치없는, 정신장애, 와 같은 단어를 꼽았다. 그리고 ‘지도를 다시 쓰다’, ‘우정으로 확인하는’ 과 같은 문장을 짚어가며 다시 읽었다.

지도를 다시 그리는 사람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당사자의 목소리는 중요하다고,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을 필요가 있다고, 우리는, 뭘 잘못해서 병에 걸린 게 아니라고 말했다.

관절염이 생기면 죽을 때까지 관절을 회복할 수 없고, 위장장애가 있으면 늘 먹는 것을 조심해야 하듯이, 조현병도 마찬가지라고. 그건 그저 병이니까. 잘 치료해야 하고 잘 낫지 않더라도, 어쨌거나 그 병과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으니까.

다음주부터는 주제를 정하고 좀 더 깊이 있게 써보기로 했다. 할 수 있을거다.

멀리서 보면 그 깊이를 모르는 바다도, 자꾸 가보면 내가 어디쯤 갈 수 있는지 알게 되는 것처럼.

우울증을 겪었던 10년은, 나에게 가장 큰 바다가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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