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나잇

1.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노는 대부분 추측에서 벌어진다.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뻔할 때, 그 역시 내 생각이다.
그에게 묻지 않았다. 맞냐고. 내가 보기엔 거짓말 같은데 맞냐고.
눈을 맞추고 대화를 하다보면 모순을 찾을 수 없다. 대신 평정을 유지하며 관찰해야 한다.

추측은 추측을 낳고 눈덩이가 되어 원망과 분노에 사로잡힌다.
대부분의 이런 분노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어떤 것을 빼앗길까봐 빼앗기기 전에 두려워하다가 두려움은 인정하기 싫은 자아가 분노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겁이 나는 게 아니고, 이 분노는 정당한 나의 권리야!

분노가 정당한 권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시작점이 추측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잊어선 안된다.
추측은 또 다른 추측을 낳고 오해는 눈덩이처럼 커져가니까.

추측과 두려움이 분노가 될 때 해야 할 일은 당사자와 대화를 시도하는 일이다.
분노를 표현하지 말고, 화가 나게 된 경위에 대해서 설명하고 이 문제가 당신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니 나의 불안한 감정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지 않겠냐고 묻는 것이다.

그래야겠다.

2.

삶이 어떤 전환점을 돌아갈 때 삶은 생명과 에너지를 가진 것이라 관성의 법칙을 가져서 쉽게 전환하지 못한다. 게다가 살아온 세월이 이미 30년이 넘었다면 관성은 습관이 되어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애쓴다.

에밀 시오랑이 말하길, 우리는 매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데 사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을 잊는 것이라 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때로 재앙을 불러오기도 한다. 원래 그랬으니까. 라는 말은 재난사고에만 따라붙는 말이 아니다.
한 생명의 삶에도 분명히 적용된다.

3.

가진 것을 내려놓으면 내려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 순간부터 다른 것들이 생기기 시작할 것이다.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던 그물에서 벗어나는 순간 공기는 상큼할 것이지만 그것도 언젠가는 다시 시큼털털하게 느껴지리라.

계속해서 나는 새로운 아침이라고 우길 필요가 있다. 이 골목의 어귀를 돌아나가면 낯선 것들이, 또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내 고향의 냄새가 가슴 깊이 찰랑인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4.

허무맹랑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더욱이 성인이 된 지 꽤 오래되었다면 모든 일들은 당연한 귀결이다. 단지 내 생명의 관성과 탄성이 어느 정도였는지가 다를 뿐이다.

오늘도 그리하여
굿나잇.

배신의 계절, 비움의 시간

배신의 계절 2014

한 해에 몰아오니 오히려 다행이다.
내년에는 더 심한 일과 더 많은 횟수가 몰려와도 조금 더 덤덤할 수 있을거다.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인물들의 공백을 굳이 채워넣을 필요도 없다.

사막을 걷는 여행자의 유일한 희망이 두 다리뿐이라면, 지금 이 연옥을 걷는 나의 유일한 희망은 모든 파도를 바라볼 수 있는 나 자신과 그 옆에 앉아 모래놀이를 하고 있는 어린 아들이다.

비우는 시간 마흔의 가을.
어울리지 않는 악세서리를 떼어내면 맨얼굴로 더 환하게 웃으리라.

2014. 9. 21. 새벽

머리 못 감는 아이

신생아 목욕시키는 건 꽤나 귀찮은 일이다. 
페친의 포스팅을 읽다가 나도 그게 참 두렵고 어려웠던 기억이 났다. 
게다가 내 아이는 봄에 태어나 배밀이를 하기 전까지 뜨거운 여름을 보냈기 때문에 늘 땀이 흥건하여 매일 씻겨야 했다. 백일까지는 아이 아빠가 많이 씻겨주었는데 아홉살이 된 올 해 여름 끝물에 드디어 혼자 머리를 감게 되었다. 한 번 해보라고 시켰더니 곧잘 해내어 많이 칭찬해주었다. 오늘도 아이는 내가 설거지를 하는 사이에 혼자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다. 젖은 머리로 잠들었는데 아무래도 감기가 걸릴 것 같아 자는 아이의 머리맡에 앉아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려주었다. 

생각해보면. 

딸아이는 어릴 때 제 할머니가 키웠는데, 나를 처음 만난 초등학교 4학년때까지도 혼자 머리를 못 감았다. 머리는 긴데 혼자 감을 수 없다 하니 가끔 우리 집에서 자고 가면 머리를 감겨달라 했다. 머리도 혼자 묶을 줄 몰라 머리도 묶어줘야 했다. 

‘뭐 이런 애가 다 있지?’ 
그 때는 그런 속내를 들켜선 안되는 시기였기에 입밖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열 한 살이나 되어 혼자 감지도 못하고 묶지도 못하는 긴 머리를 하고 다니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건 내가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희한한 케이스라고 생각했던 거다. 

어릴 때부터 무수하게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여고를 나오기도 했지만 친구들과 어릴 때 몇 살까지 엄마가 머리를 감겨줬는지 말해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데 내가 내 이야기를 먼저 해버리는 바람에 아이들이 입을 닫았을 지도 모른다. 나도 선명하지 않은 기억은 조각조각 여기 저기 처박혀 있다가 가끔 이런 자라닮은 솥뚜껑들을 보고 문득문득 떠올라 조합이 된다. 사람마다 우울해지기 쉬운 케이스가 있다고 하는데, 그건 아마 이렇게 많은 기억들을 쪼개놓고 살다가 한 번에 조합을 하면서 오늘만 사는 게 아니라 과거도 같이 살아가는 뇌구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맘에 들거나 안 들거나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닌 유전자적 구조이거나, 성장과정의 수많은 이야기들 때문이거나. 그건 내가 부모를 택할 수 없었던 것과 같다. 

동생이 아직 태어나기 전이니 나는 네 살이었거나 동생이 태어난 해라면 다섯 살이었을 거다.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일을 하다가 일찍 들어온 엄마가 나보고 혼자 샤워를 하라고 했다. 그 때 우리 집은 큰 방이 두 칸, 작은 방이 한 칸에 안에 욕조도 있는 목욕탕까지 딸린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나중에 가보니 연립주택과 유사했지만 그 때는 그런 구조를 모두 아파트라고 불렀다. 나는 목욕탕에 들어가 혼자 할 수 없다고 징징거렸다. 무슨 연유인지 욕조엔 물이 한 가득이었는데 아마 당시엔 단수가 되는 일도 종종 있었거나 물을 받아놓고  쓰는 문화가 습관이 되어 있어서 욕조에 물이 가득 담겨 있었을 것이다. 바가지로 물을 퍼서 씻어야 하는데 머리를 감을 수 없다고 징징대기 시작하자 동생을 임신해 배가 어지간히 나왔던 엄마가 벌컥 컴컴한 목욕탕에 들어와서 왜 혼자 머리를 못 감냐고 소리를 지르더니 내 머리채를 잡고 욕조안에 깊이 처박았다. 그리고 이제 감으라고 했다. 

욕조 옆에는 2조식의 무지개 세탁기도 있었는데 나는 그 세탁기통에도 한 번 들어간 적이 있다. 엄마가 벌컥 들어서 집어넣고 죽여버린다고 했던 건데 그게 같은 날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칠곡계모사건이 터졌을 때 아이를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는 기사를 보고 아 그래도 우리 모친은 버튼을 누르진 않았어. 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상한 것은 나는 그런 기억이 매우 선명한데도 불구하고 물에 대한 공포도 없고, 욕조에 대한 공포도 없고, 세탁기나 폐쇄된 공간에 대한 공포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충분히 있을 만한데 없다는 게 더 이상하다. 건강하다는 얘기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몇 번 안되기 때문이다.  

엄마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외롭게 자랐고 외롭게 살았다. 청춘도 외로웠고 결혼을 해서도 외로웠다. 아버지와 엄마는 서로 그 문제를 같이 해결하지 못했고 같이 살면서도, 헤어져서도 엄마는 외로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애초에 그닥 외로운 사람도 아니고 그다지 부정적이거나 우울한 사람도 아닌 듯 하여 엄마와 헤어지고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지만 엄마의 문제는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채 칠십을 바라보고 있다. 

아버지가 헤어지고 난 뒤 혼자서 쭉 산 것도 아니었지만 혼자서 딸 둘을 키우는 그 짧은 기간마다 모든 화를 나에게 풀었다. 엄마의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돈벌이도 못하고 현실에 보탬도 안되는 쓸모없는 년들”이라는 개념이었다. 나는 그 개념을 당시에 알 지 못해 싸우지 못했고 그저 지속되는 매타작에 반복하여 저항할 뿐이었다. 매번 한 번도 지지 않고 바득바득 소리 지르고 반항하는 큰 딸년인 내 덕분에 진이 다 빠진 모친은 내 동생은 돌아보지도 못했다. 스물 한 살이 되어 독립해서 나올 때까지 지속되던 폭력도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지 못했다는 게 신기하다. 어쩌면 그게 내가 여태 이렇게 잘 살고 있는 생명력이라는 생각이 오늘에서야 든다. 엄마가 뭔가 무기가 될 만한 것을 들면 나는 도망을 치거나 손으로 막거나 일일이 따져 대들거나 골목을 튀어나가거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저항했다. 주눅이 들면 사람이 이상해진다는 얘기를 듣고 공황발작이 일어난 것처럼 쇼도 해봤는데 돌아오는 건 두 배의 저주와 두 배의 폭력이었을 뿐. 게다가 우리 모친은 여고 때 육상선수 출신이라 내가 온 동네를 뛰어다녀도 금방 잡혀오기 일쑤였다. (이 부분에선 좀 웃어야) 

마흔을 넘겨, 혼자서 80년대에 딸 둘을 키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 좀 알 것 같은 이제, 엄마의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결국 본인이 도전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단 한 번도 진실한 모습을 들여다보거나 마음의 거울을 보거나 단 한 명의 타인 앞에서도 그 속내를 꺼내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으려고 한다. 

나의 생명력이 끝없는 엄마의 매타작에 대한 저항에서 기원했다면, 엄마의 생명력은 끊임없는 원망과 저주에 기원한다. 그래서 당신은 주변에 은은하게 피해를 주면서도 매우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불사조처럼 백살은 너끈히 넘기고 살 것같은 나의 모친이 언제쯤 기운이 빠질 지, 언제쯤 생명을 다 할 지 알 수 없다. 과연 엄마의 장례식에 누가 올까 궁금하다. 아직도 엄마는 욕망이 끓어 넘쳐 “돈벌이도 못하고 자기 삶에 보탬이 안되는 훼방꾼 
같은 년들”의 기본개념은 곤고하다. 그 생각은 내가 스스로 물려받아 가끔 나를 자학할 때 사용하는 도구가 되곤 한다. 
부모가 아이를 바라보는 생각은 고스란히 눈동자를 통해 전달된다. 엄마와 손잡고 걸어본 적 없어도 나는 엄마가 어떤 생각으로 나를 바라봤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타인앞에 내 딸일 때는 지상최고의 여성이 되지만, 단 둘이 있을 때는 당신 인생을 망친 주범이 된다. 엄마가 나에게 들었던 각종 매와 연탄집게와 빗자루, 등산용 지팡이 따위는 오늘도 가끔 나를 내려친다. 여전히 나는 저항하고 있다. 

그게 아니지 않냐고. 엄마 생각은 분명히 틀린거라고. 아닌 건 아닌거라고. 돈이 없으면 안 먹으면 되지 왜 선생 김밥을 엄마가 싸야 되냐고. 생일파티 안해도 된다고. 나는 죽어도 외상으로 두부를 사올 수 없다고. 여전히, 오늘도, 내일도, 아마 그 다음날도, 엄마는 아직도 손에 매를 들고 있고 나는 여전히 그 매를 어떻게 하면 낚아 채서 던져버릴까 고민하고 있을 뿐이다. 

2014. 9. 18.  

꿈없는 세상 – 그들의 눈동자

내가 상하이에서 학부를 다닌 화동사범대학은 말 그대로 사범대학인지라 국가에서 적극(?) 지원하고 졸업한 아이들의 취업이 모두 보장되어 있으며 등록금도 타 학교에 비해서 저렴한 학교였다. 상하이에는 명문이라 불리는 복단(FUDAN)대학교와 각 단과대학이 잘 되는 몇 개 대학이 있었는데, 이과쪽은 교통대(JIATONG), 건축은 동제대(TONGJI) 외에도 상해외대나 상해대학교등이 있었다. (대학이름은 한국식 한자 독음으로 표기함)

화동사대는 캠퍼스가 예쁘기로 유명했다. 애초에는 복단대에서 학부를 하려고 갔으나 복단대에 한국학생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모양새를 보고 학부를 옮기기로 했다. 내가 처음 갔던 2001년도 2월에 복단대의 한국유학생은 200명이었는데 그 가을학기에 400명이 되더니 2002년도 2월에는 한국학생만 2000명이 등록을 했다. 언어연수생에 국한한 숫자였다. 김정일이 2000년에 상하이를 다녀간 뒤 천지가 개벽했다고 선언한 후 한국에서 상하이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 급격하게 한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학부지만 나는 나름대로 한국에서 공부를 좀 하다 온 애들이 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24세 미만이었다. 나는 당시 스물 일곱이었으니, 내 위로는 주재원으로 왔다가 한 학기 정도 어학연수를 하려고 쉬는 아저씨들 외엔 몇 명 없었다. 학부를 하겠다고 온 내 또래도 당연히 없었다.

복단대는 중국 본토의 양자강 이남의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다. 학구열도 괜찮았으나 유학생이 과하게 몰리다 분리정책을 썼다. 대신 화동사범대학은 그렇게 많은 유학생이 몰리지 않아 분리하고 말 것도 없었다. 중문학부 한어언문학과 (중국어는 소수민족의 언어까지 통틀어 말하기 때문에 한어언문학부는 漢字로 된 문학만을 말한다)에 전무후무한 한국유학생이 있었으니 그게, 나와 나보다 다섯 살 어리던 박모씨. 우리 둘 뿐이었다.

화동사범대는 국가정책대학이라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타 학교보다 싼 학비와 기숙사 지원금등이 관건이 되었다. 다들 시골마을에서 플랜카드 하나씩 걸고 온 애들이라고 보면 된다. 양자강 이남 사람들은 체격이 작은 편인데 아이들이 어찌나 고만고만한지, 나이도 어렸지만 중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장 어린애는 열 일곱짜리도 있었다. 월반에 월반을 거듭한, 말하자면 그 고장에서는 대단한 수재였던 아이라는 거다. 중국내에서도 가난하기로 소문한 안휘성 아이들이 많았고 소수민족 아이들도 몇 있었으며 1학년 교실엔 그야말로 땟구정물이 줄줄 흐르는 코흘리개 같은 분위기였다. 상하이 현지에서 우리 과에 들어온 아이는 극소수였다. 혼자 뽀얀 얼굴에 배낭이 아닌 가죽가방을 메고 다니는 나에게 어디서 샀냐고 물어보곤 하는 아이가 상하이 아이였다. 유학생을 제외하고는 일괄적으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는데 기숙사는 8인실이었다. 2층짜리 침대를 벽에 붙여 두 개씩 놓으면 꽉 차는 방. 겨울엔 난방이 되지 않았고 온수공급도 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붉은 보온물통에 뜨거운 물을 받아다가 차가운 욕실에서 머리를 감았다. 11시인가 12시쯤 되면 기숙사에 전기는 차단되어 시험기간을 앞두고 한 달 정도는 강의실을 밤새 열어주었다. 아이들은 기숙사에서 나와 밤새 차가운 강의실에서 공부를 했다.

그 학교에서 아이들과 지내며, 나는 언제나 동동 떠 있는 섬같았다. 내가 당시 썼던 생활비는 한 달에 한국돈으로 35만원 정도였는데 그 정도면 충분히 먹고 술도 마실 수 있는 돈이었다. 가끔 스타벅스에 가서 하루종일 진치고 공부를 하다 올 수도 있었다. 외국인 유학생이라고 알바생이 시음음료도 잘 갖다줬다. 대신 내 동무들은 내복을 사느냐 휴대폰을 장만하느냐를 가지고 고민해야 했고 내가 쓰는 돈의 3분의 1정도로 한 달을 생활했다. 가끔 한인들이 중국어 과외선생을 구한다고 알아봐 달라 하여 잘 가르칠만한 친구를 보내놓으면 너무 어리다는 둥, 예쁘지 않다는 둥, 별 씹스러운 소리를 지껄였고 이 개자식들은 시간당 25위안 (당시 한화 4천원 가량)이 비싸다며 그것도 깎으려고 들었다. 나도 노하우가 생겨 2학년 끝날 무렵부터 한국인 중 누가 원어민 과외를 찾으면 이쁜 여자 찾으시려면 KTV(룸싸롱) 가시고 진짜 공부하실 거면 나한테 얘기하라고 대답하곤 했다.

내가 영어를 알려주고 중국친구가 중국어를 가르쳐주는 식의 언어교환을 하던 복단대 친구는 나보다 2학년 위였는데, 안휘성에서 온 아이였다.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그녀가 얻은 직장에서의 봉급은 택시기사의 반절도 안 되는 금액, 그러니까 내 한 달 생활비가 못 되었고 그 친구가 기숙사에서 나와 사는 주택은 우리식으로 말하는 닭장집 같은 곳이었는데 천장에 백열전구 하나 덜렁 달려 있는 방 하나에 공동주방을 쓰는 곳이었다. 그래도 그 친구는 맘에 든다고 좋다 했다.

부자동네로 소문난 절강성의 항주나, 복건성의 온주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온 아이들의 겁에 질린 눈동자가 자꾸 떠오른다. 커피숍에서 아이패드를 놓고, 노트북을 놓고 영어책에 미친 듯이 줄을 치며 이어폰을 끼고 있는 이 나라의 20대들을 볼 때마다 2002년도쯤 내가 함께 밥을 먹던 땟구정물 흐르던 그 아이들이 생각난다. 눈빛이 닮아서다.

10년도 훨씬 전에 하나언니 하나언니하며 노트를 빌려주는 아이들은 갑작스럽게 거대한 도시에 와서 돈의 위력에 주눅들어 하루 하루 조심스럽고 위태롭게 살아갔다. 중국어 과외를 하러 갔는데 이상한 몸짓을 보내는 한국남자도 만났고 눈 뜨면 코 베어간다는 한국속담같이 상하이라는 도시는 학교만 벗어나면 줄줄이 돈 달라는 곳만 있었는데 아이들의 미래는 보장되지 않았다. 아이들의 꿈은 월급 꼬박꼬박 받는 학교 선생이 되는 것이었다.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우거나, 고전문학의 당나라 詞도 잘 짓던 아이들의 재능에 비해, 아이들의 눈빛은 늘 흔들리고 불안했다. 물론 그 눈빛엔 맑고 순수함이 깃들어 있었고 3학년이 되어가면서 아이들은 살아남는다는 것이 뭔지, 도시가 뭔지, 돈이 뭔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 아이들에게 결여되어 있던 것은 정확한 방향과 철학, 꿈이었다. 막스 레닌 시간에 모두 엎어져 자던 아이들에게 철학은 돈 버는 일이었던 것처럼, 지금 내가 이 도시에서 옆 도시에서 만나는 청년들에게 자꾸 그 모습이 중첩되어 나타난다. 대신 이 나라 오늘의 눈빛은 원한과 불만이 조금 더 강하게 엿보인다는 것이다.

꿈을 위해 달린다고 얘기하는 청년들이 있다. 옆에서 지켜보면 도대체 쟤가 말하는 꿈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꿈을 위해 살아왔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있다. 그 역시도 그 사람이 말하는 꿈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온갖 부조리에 침묵하고 타협하며 결국 이 시대가 말하는 꿈은 돈을 많이 번 다음에 생각해야 하는 것인 모양이다.

저 사람이 무엇을 꿈꾸는지 명확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아주 소수지만. 그들을 응원하며 나도 그렇게 늙어가고 싶어졌다. 그간 타인의 눈에 비친 내 눈동자엔, 맑고 순수함 따위는 없었겠지만, 원망이나 불만이 조금이라도 가셔지는 날을 죽기 전엔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꿈 없는 세상, 꿈꾸기 힘든 세상에서, 제대로 된 꿈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 도시에 둥둥 떠다니는 불안한 눈동자가 거대한 황포강의 야경을 바라보던 아이들의 순수한 눈동자를 자꾸 그립게 한다.

2014. 9. 24.

오늘.

1. 이른 저녁 들른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들렸다.

– 나는 딱 육십까지만 살래.
– 어머 언니 안돼. 우리가 언니 보고 싶을 때 아무 때나 봐야돼.
– 육십은 너무 젊지 요새는.
– 곡기를 딱 끊으면 된다더라. 나는 그렇게 죽을꺼야.
– 아 진짜 왜 그러니?
– 난 자살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
– 어머 무슨 소리야! 하나님 믿는다는 사람이 그런 소리 해도 돼? 자살은 죄악이야.
– 그러니까 곡기를 끊는 게 제일 좋은 거 같아. 난 추해지기 전에 죽고 싶어.

자기 의지로 죽고 싶다는 여자는 병원 간병일을 했던 경험을 이어서 말하고 있었다.
내 뒤에는 남녀가 앉아 있었는데 지방대 나와 석사를 하면 인정을 받을 수 있냐고 여자가 묻고 있었다. 듣고 있자니 심사가 뒤틀렸다.

2. 며칠 전 아이와 긴 산책을 하는데 아이가 다시 물었다.
엄마 사람은 어차피 죽을 건데 왜 살아?
일년째 이어지는 질문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 잘 죽으려고 살지.
– 뭔 소리야.
– 엄마는 그렇게 생각해. 일단 태어난 건 되돌릴 수 없잖아. 그럼 어떡해. 기왕 태어났으니까 되돌릴 수 없는 건 포기하고. 죽는 날 사람들이 이 사람 참 잘 살다 갔다고 죽어서 아쉽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살아야지.
아이는 알아듣는 듯이 조용해졌다.
– 너 할머니 장례식 기억나? 손님이 정말 많이 왔지?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걸 슬퍼했어. 그건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그만큼 잘 사셨다는 뜻이야. 그게 쉬운 게 아니야. 평생 나쁜 짓을 하고 산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해봐. 사람들은 나쁜 놈 잘 죽었네. 하고 만세를 부를 수도 있잖아.
– 축제를 할 지도 몰라.
– 그러니까.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잘 살아야 하는거지. 엄마는 그렇게 생각해.

3. 에밀 시오랑의 책의 부제는 ‘태어남의 불행에 대해’이다.
어차피 인생은 그런 거라는 거다. 염세주의라기 보다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삶의 수많은 생채기들은 발목을 잡고 늘어지지만 그래도 하루의 10초 정도, 행복감을 느낄 때 사람들은 웃으며 살아가고 미래에 대한 꿈이 보이면 가열차게 걷기도 한다.

해피해피한 인생이 어디 있겠나. 아무리 뒤져봐도 그런 인생은 없다. 해피해피한 인생은 무료한 인생일 뿐.
작품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인간은 대부분 출생의 비밀, 환난과 고통, 지속되는 도전, 고칠 수 없는 신경증과 정신적 장애를 가졌다. 그건 작품의 주인공뿐 아니라, 지금 저 밖 공원에서 떠드는 아이들과 어디선가 곤히 자고 있는 평화로운 사람들 모두에게도.

단 한 번도 쉬운 인생은 없었다.

4. 우리는 모두 아프다.
나도. 당신도.
아프지 않은 날도 있다.
아! 오늘은 아프지 않구나.
그래서 하루를 넘기도 또 살아있다. 반복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오늘은 아프지 않을거야. 라고 때론 거짓말도 하면서.

풍선이 뒹구는 밤

오후부터 비가 내렸다. 가까운 곳에 친구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언제나 같은 생각을 한다.
초등학교부터 한 동네에서 살던 녀석들과 겨울밤 거의 매일 모여 삼치구이에 소주를 마시던 생각을 한다. 꼭 삼치를 시켜달라 하고 꼬닥꼬닥 졸던 녀석이 있다. 집에 가서 자라고 욕지거리를 해도 있다 갈꺼라 했다. 그 때 우리는 서른을 몇 년 남겨두고 있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할 것 같지 않았으나 늘 취해서 헤어지곤 했다. 초등학교 동창들은 만나면 퇴행현상을 보인다. 우리는 늘 별 일 없이 만나서 별 일 없이 헤어졌다. 퇴근길에 집 앞에 와서 나와. 라고 말하면 그냥 나가던 시절이다.

비오는 저녁 운전은 해야 하는데 아이는 전화를 해서 끊지 않는다. 나와, 하면 나가던 시절에서 무려 14년 정도가 지난 저녁이 되니 차를 돌려 동네 친구에게 간다. 동네 친구와 남의 영업집에서 삼치를 구워 소주를 마시는 게 아니라 내일을 생각해서 동네 친구의 까페에서 히비스커스차를 마신다.

내일따위 없던 시절에서 아주 멀리 돌아왔다. 그 먼 길을 돌아돌아 다시 동네친구를 만나게 되는 비오는 밤, 길거리에 풍선이 굴러다녔다. 흰색과 연분홍색 고운 풍선 네 개가 하나로 묶여 있다. 어느 아이가 잃어버렸을지, 아니면 행사장에서 굴러온 것인지, 누가 힘겹게 얼굴이 벌개지도록 불어댄 풍선인지 기계로 한 방에 부풀린 풍선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왠지 저 풍선엔 누군가의 숨이 담겨 있어 차로 치이면 안될 것만 같다. 우회전으로 들어오는 차도 풍선이 신경쓰이는지 속도를 낮췄다. 풍선을 불면 날아갈 수 있을 것 같던 때를 굽이굽이 돌아오면 풍선을 부는 게 노동이 되는 세월이 기다린다. 그래도 마음속엔 풍선을 함부로 터트리면 안된다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누군가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긴 풍선이 빗속에 굴러다닌다. 누군가의 숨결이 잦아드는 그 밤에도 그랬겠다.

2014. 9. 2.

복수를 잊는 파도

평생을 복수와 증오심으로 살던 사람이 있었다.
그 증오는 그 사람이 살아가는 힘이 되었다.
그렇게 30여년을 보내고 난 뒤 나는 그에게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이제 그만 원망하고 이제 그만 증오하라고 할 수 없었다. 그 사람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은 그 사람의 삶을 지탱해 온 핏줄이었다. 그 사람이 복수심을 멈추는 날은 그의 생명도 끝날 것이 자명했다. 그 사람의 뇌가 멈추든, 심장이 멈추든, 둘 중 하나는 분명히 멈출 것이었다.

사람이 복수심을 갖게 되는 것이 이다지도 사소한 일이라는 걸 깨닫는 며칠을 보냈다.
야구방망이를 차 트렁크에 싣고 다녔다는 어느 잘생긴 가수의 이야기도 떠올렸다. 갑자기 그 모든 분노의 에너지가 다시 다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런 날이 있었다.
스타벅스에서 카푸치노를 시켰는데 바리스타가 내 주문을 잊었다. 나는 한 참을 기다려 너무도 힘겹게 그에게 내 커피를 달라고 말했고 커피를 받아 매장 밖으로 나오면서 울었다. 지하철역에서는 공원을 지나는 두 여고생에게 아무 이유없이 칼을 휘두른 남자의 끔찍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카푸치노를 손에 들고 눈물을 감추던 나는 조용히 뇌까렸다. “이해해. 왜 그랬는지 나는 알아.” 코를 풀면서 말이다.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다. 거기까지 가게 되는 과정 중에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책임지는 일은 우주를 떠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 쉽게, 그 말들을 한다. 책임지겠다. 라고.

나는 진심으로 신의를 다했다고 주장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왜곡된 내 결함의 반영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상대방이 쥐똥만큼 악의를 가지고 내 선의를 이용해 먹었다는 걸 알게 된 먼 훗날, 그 누구도 보름달이 뜬 밤에 부싯돌을 꺼내놓고 칼을 갈 수 있다.
파도소리만 가득하던 깜깜한 어느 바닷가가 매섭게 그립다.
부싯돌을 꺼내놓고 칼을 갈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매일 밤 아름다운 파도가 치면 좋겠다.

2014. 9. 3.

저녁

새벽녘 두어 번 뒤척였다고 휴대폰 어플이 알려준다. 내가 잘 잤는지, 잘 못 잤는지, 그런 것도 기계에게 묻고 사는 한심한 삶. 내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씹다버린 사과모양의 전자제품인지도 모른다. 내가 나인지 사과가 나인지, 이미 그 경계는 허물어 진 것 같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말을 찾아 헤맨다. 쓰리고 아린 상처를 적확하게 표현해 줄 단 한 줄의 문장을 찾아 긴 터널을 쑤석거려도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다. 어스름은 삽시간에 사위를 덮고 아이들이 내 새끼를 부르는 소리가 크게 들리면, 아이도 돌아오지 않는 저녁. 늙은 개 한 마리는 네 다리를 곧게 뻗고 편안하게 자기 시작한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라고 말하는 것과, 아프다고? 씨발 나도 좆나 아프다고! 라고 말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빨을 드러낸 작은 개새끼는 커다랗고 하얀 아름다운 진돗개를 보고 주제넘게 짖고 있다. 빈 식탁은 굴러다니는 몇 가지의 펜만 싸안고 아무 것도 잉태하지 못하는 버려진 땅처럼 울고 있다. 계절이 바뀌는 바람이 분다. 고통의 무게는 가늠하지 않는 것이며 비교하는 일은 절대 불가한 것이라고 남들 앞에서 쉽게 말해도 머리통을 짓누르는 이 두통의 무게는 펜잘이나 게보린 수백 알로도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세상천지 아무도 남지 않은 그 느낌을 알고 싶어서 사막에 서보는 자가 있고, 마음의 고통과 몸의 고통을 일치시키기 위해 손목에 커터칼로 글씨를 쓰는 아이가 있다. 사랑, 이라고. 말해 본 적 없는 사연 때문에 가짜 자아를 만들어 자신을 둘로 나누는 청년이 있고 세상은 모두 내 편이라고 스스로에게 거짓말하며 계속해서 돈을 꾸고 도망가는 여자가 있다. 글줄께나 쓴다는 그 어떤 문인도 헤아리지 못하는 각자의 마음들이 어느 집 밥상위에서 작두를 탄다. 피칠갑을 하고 갯벌을 기어가던 어느 미친년이 했던 말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갈꺼여 갈꺼여.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내 지문이 없으면 열리지 않는 저 작은 전자기계 속으로 들어가 휘적거리며 다녀야 할까. 말라비틀어진 씨앗은 어디서 열리는 것인지 기계에다 대고 말을 하면 저 년이 알려줄까.

2014. 9. 1.

저녁

새벽녘 두어 번 뒤척였다고 휴대폰 어플이 알려준다. 내가 잘 잤는지, 잘 못 잤는지, 그런 것도 기계에게 묻고 사는 한심한 삶. 내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씹다버린 사과모양의 전자제품인지도 모른다. 내가 나인지 사과가 나인지, 이미 그 경계는 허물어 진 것 같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말을 찾아 헤맨다. 쓰리고 아린 상처를 적확하게 표현해 줄 단 한 줄의 문장을 찾아 긴 터널을 쑤석거려도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다. 어스름은 삽시간에 사위를 덮고 아이들이 내 새끼를 부르는 소리가 크게 들리면, 아이도 돌아오지 않는 저녁. 늙은 개 한 마리는 네 다리를 곧게 뻗고 편안하게 자기 시작한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라고 말하는 것과, 아프다고? 씨발 나도 좆나 아프다고! 라고 말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빨을 드러낸 작은 개새끼는 커다랗고 하얀 아름다운 진돗개를 보고 주제넘게 짖고 있다. 빈 식탁은 굴러다니는 몇 가지의 펜만 싸안고 아무 것도 잉태하지 못하는 버려진 땅처럼 울고 있다. 계절이 바뀌는 바람이 분다. 고통의 무게는 가늠하지 않는 것이며 비교하는 일은 절대 불가한 것이라고 남들 앞에서 쉽게 말해도 머리통을 짓누르는 이 두통의 무게는 펜잘이나 게보린 수백 알로도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세상천지 아무도 남지 않은 그 느낌을 알고 싶어서 사막에 서보는 자가 있고, 마음의 고통과 몸의 고통을 일치시키기 위해 손목에 커터칼로 글씨를 쓰는 아이가 있다. 사랑, 이라고. 말해 본 적 없는 사연 때문에 가짜 자아를 만들어 자신을 둘로 나누는 청년이 있고 세상은 모두 내 편이라고 스스로에게 거짓말하며 계속해서 돈을 꾸고 도망가는 여자가 있다. 글줄께나 쓴다는 그 어떤 문인도 헤아리지 못하는 각자의 마음들이 어느 집 밥상위에서 작두를 탄다. 피칠갑을 하고 갯벌을 기어가던 어느 미친년이 했던 말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갈꺼여 갈꺼여.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내 지문이 없으면 열리지 않는 저 작은 전자기계 속으로 들어가 휘적거리며 다녀야 할까. 말라비틀어진 씨앗은 어디서 열리는 것인지 기계에다 대고 말을 하면 저 년이 알려줄까.

2014. 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