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숙제

1.

 

오래 묵은 친구를 만나기로 한 날이다. 멀리 여름나라에 살다 와서 아이 겨울 옷을 물려주려고 같이 옷을 정리하고 개고 싸고 하던 중에 작은 놈 같은 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숙제 프린트 했냐고 묻는다.

무슨 숙제?

그거 숙제 있잖아. 사진 붙여 가는거.

어.. 나는 모르는 일인데.

우리 아들이 알림장도 잘 안 가지고 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숙제를 해 가는지 안 해가는 지 잘 모르지만 가끔 점검은 한다. 숙제 점검을 하더라도 대부분 해 지고 난 다음이고 전화가 걸려온 시간은 오후 2시쯤.

아이는 집에 오자마자 가방과 실내화 주머니를 멀찌감치 팽개쳐두고 티비 리모콘부터 잡는다. 일단 런닝맨이나 정글의 법칙을 한 편 보고 방과후 일과를 시작하는 습관이 들었다. 두 편 세 편 넘어가고 유난히 시끄럽게 들리는 날엔 그만 보라고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래 너도 학교 댕겨왔으면 쉬어야지. 하고 냅두는 편인데 사실은 잔소리 하기 귀찮고 애하고 씨름하기도 귀찮아서 그렇다.

 

2.

 

친구 엄마의 얘기는 오늘 숙제로 가고 싶은 국내 여행지를 골라 사진을 프린트해서 선없는 종합장에 붙이고 그걸 발표하는 게 있다는데 집 프린터가 안되더란다. 몇 명이랑 통화를 한 끝에 다들 안된다 혹은 잉크가 떨어졌다 하길래 우리 집은 프린터가 웬지 잘 돌아갈 거 같아 도움을 구하려고 전화를 했단다. 안그래도 며칠전에 잉크패드도 갈고 프린터 점검을 마친 상태. 그러면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주면 내가 프린트를 해주겠다고 선뜻 대답했다. 세 명분을 부탁했는데 독도, 제주도, 불국사, 석굴암, 우도의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을 프린트만 해 주면 되는 일어었다. 친구 엄마는 집에만 있다 보니 컴맹 된 거 같다며 제대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다시 전화를 했길래 메일함을 열어보니 네이버 백과사전 링크가 걸려 있다. 사진은 따로 저장이 안되서 일일이 캡쳐를 떴는데 PNG로 저장했다가 프린터에 안 잡혀 다시 JPG로 다 돌렸다. 여섯장 정도 된다. 캡쳐 떠서 크기 조절해 프린트를 하고 있는데 내가 이게 남의 숙제를 해 주고 있는 꼴인가 싶었다.

뭔가 아닌 거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3.

 

내가 아이패드로 즐겨 하는 게임은 SIMS Play 라는 건데, 집 짓고 사람 캐릭터 만들고 마을을 꾸려가는 게임이다. 여러명이 공동으로 사는 집을 짓기도 하고 혼자 사는 집을 만들기도 한다. 공동주택, 즉 Share house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지 책도 한 권 나온 걸 봤다.

뭔가 아닌 거 같은데, 남의 숙제를 해주고 있는 거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드는 찰라.

그래 집집마다 프린터를 다 한 대씩 두고 있을 필요가 있나. 이런 게 나누는 거 아닐까. 어찌 보면 대행해 주는 거 같아 보이는 일과 누군가 물질적/비물질적 재산을 가지고 공유하는 것은 어디부터 어디까지 다른가 궁금해졌다.

 

오래전엔, 누군가 손으로 하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남의 옷을 지어주기도 했을 것이고 큰 일은 돈을 받았겠지만 친분이 있다면 단추 하나 달아주는 일 정도는 거저 해주기도 했을 것이다. 나에게 프린터가 있고 내가 화면캡쳐를 할 줄 알고 파일명을 변경할 줄 알고 사진크기를 변경할 줄 안다면 (업계에 계시는 분들은 모르겠지만 이런 작업도 꽤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그런 재주와 물적 자산을 공유한다는 것도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대신, 상부상조, 할 필요는 있을 거다.

 

4.

 

아들의 작아진 옷가지는 새로운 주인을 찾아 생명을 연장할 것이다. 보따리가 많아 친구를 집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에 프린트한 사진을 전해줄 엄마들을 만났다.

나까지 아이 엄마 넷. 학교 정문 앞에서 만나 얘기를 하는데 아이들의 숙제 이야기를 한다. 시 외우기, 쓰기 숙제, 수학숙제 얘기를 하다가 종합장은 원래 유선, 무선 두 가지를 챙기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다. 나는 할 말이 없는 거다.

멀뚱하니 있다가

“나는 몰라. 홈페이지 보면 숙제가 뭔지 있지만, 뭐 알림장도 안 가져오는 놈 챙겨주면 뭐해. 지 말로는 쉬는 시간이나 아침에 가서 한다고 하던데. 확인은 안되고.” 라고 했더니 옆에 엄마가 우리 아들은 알아서 하는 스타일이니 뭔 걱정이냐며 좋겠다고 한 소리를 늘어놓는다.

“아 글쎄 그 자식이 알아서 하는지 뻥을 치는지는 모르는 일이지.” 라고 했지만 아마 알아서 잘 할 거란다. 선생님이 숙제 검사를 하긴 하냐고 물으니 검사는 다 하시고 스티커 받아오는 거 보면 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노무 스티커판이 알림장에 있는데 이 놈은 알림장을 안 가져온다니까. 그리고 이제 관심없대. ”

“예환이는 알아서 할 거야. 아침에 가서 한다는 생각을 하는 거 자체가 다른 거야.” 란다.

 

태권도 마칠 시간이랑 교묘하게 맞아 떨어져 먼저 가겠다 하고 도장 앞에서 아이들을 봉고차에 태우고 있는 사범에게 우리 아이가 나왔나 물었다. 2층에 있는 도장까지 젊은 사범이 올라갔다 오더니 어머님 오신다고 얘기 없었으면 아마 혼자 갔을거라고 한다. 나도 그럴 줄 알았다. 차 타고 다니면 빙 돌아서 오래 걸린다며 혼자 뛰거나 퀵보드를 타고 다닌 지 1년이 되어간다. 집에 왔더니 아들놈이 도복도 안 갈아입고 게임하고 있다.

 

“야. 니네 뭐 시 외우기 숙제 있다매?” 나는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어. 다 했어. 도토리. 근데 싸인받아야 되는데.”

“오올..다 했어?”

“어. 진작에 다 했지. 근데 싸인 안 받았어.”

“엄마가 알림장에 싸인해주는거?”

“응.”

“얌마 니가 알림장을 가져와야 싸인을 해주든가 말든가.”

“니네 뭐 쓰기 숙제도 있다매.”

이 자식이 말이 없다.

“너 안하고 엄마한테 얘기 안할라 그랬지!!” 했더니 아들놈이 씩 웃는다.

“너 숙제 안하면 선생님한테 안 혼나?”

“안 혼나. 스티커 뺏기면 돼.”

“그럼 스티커 많이 뺏겨라.”

“눼~~”

 

5.

 

잔소리 하기 귀찮고 싸우기도 귀찮다. 방치하는 걸지도 모르겠고 내 머릿속엔 아이 숙제보다 다른 것들이 더 많을 뿐이다. 내가 야단치지 않으면 밖에 나가서 흠씬 깨지고 올 것이고, 선생님한테 야단맞고 친구들한테 놀림받기도 할거다. 경험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다쳐보고 넘어져보고 틀려보고 울어보지 않으면 절대 절실하게 느낄 수 없다고 믿는다. 얼마 전 큰 애가 동생의 친구관계 문제를 얘기하며 동네 형들이 제 동생을 이용해 먹는 거 같지 않냐는 말을 했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만 놀게 해야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나는, 그래서 너는 내가 그만 놀으라 하니까 네 하고 그만 논 적 있드냐? 라고 되물었다.

지가 깨져보고 지가 당해보지 않으면 와닿지 않는 건데 그걸 뭘 지가 좀 당해봐야 아는 거 아냐? 라고 다시 물으니 큰 애는 에휴. 하며 돌아앉았다. 뭔 한숨인지 모르겠다. 복합적인 거겠지. 그렇다고 해서 큰 애가 그 때 나 좀 말려주지, 또는 말리지 말지라는 원망은 아직 한 적 없다.

6.

 

아이는 동네 형들이 놀러와 딱지치기를 하며 놀고 있고 아직 숙제 할 생각도 없는 모양이다. 배는 부른 모양이고 나는 앉아서 이런 글이나 쓰고 있다. 내가 어떤 원칙을 갖고 있는 것도 없고 그저 아이들은 모두 각자 역량과 기질이 다르다고 믿을 뿐이다. 집에서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밖에서 배우는 게 많고, 집에서 굳이 꾸짖지 않아도 밖에서 욕 먹는 일도 많고, 싸돌아다니고 아이들과 패를 지어 불량하게 껄렁거리며 돌아다니더라도 길바닥에서 쓴 맛 보는 일이 더 많다는 것도 안다.

내가 아는 것은 고등학교 때까지 성적이 좋다고 꼭 좋은 대학에 가는 것도 아니며 좋은 대학을 나온다고 좋은 직장을 잡는 것도 아니며, 좋은 직장을 다닌다고 그게 철밥통인 것도 아니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조건을 갖고 있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라는 거다.

공부는 내내 뒷전이다 이제와서 원서쓰기에 혈안이 된 큰 아이에게도 이번에 못 가도 그만, 대학 안나와도 그만, 니가 필요하면 서른에 가도 되고 마흔에 가도 되는 게 대학, 어딜 가나 너만 잘하면 그만, 그렇지만 네가 분위기에 잘 휩쓸리는 기질이 있다는 건 인정. 이 정도로 얘기하며 타협중이다.

그저 내가 확실하게 아는 건, 아침에 학교 가기 전에 이는 닦아야 남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고 집에 와서는 무조건 손을 씻어야 감기에 덜 걸린다는 확실한 사실 두 가지다.

부담되는 교육비를 투자하는 대신 내 앞가림이나 잘 해 부양의 부담을 주지 않는 부모로 늙는 게 더 현명하다고 믿는다. 내가 내 앞가림 잘 하고 지내면 아이들도 그럭저럭 보고 배울 거라고도 믿는다. 이건 그저 믿음이다. 제도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도 대안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저 그럭저럭 무리하지 않게 살아가는 것, 그래서 부담되지 않는 부모가 되는 게 목표일 뿐이다.

 

7.

긴 이야기를 적은 것은 매일 매일 부모교육, 부모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가득한 기사와 글이 SNS에 차고 넘쳐서이다. 나 역시 외면하기 어렵고 우리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공동체의 구성과, 나눔과 공유, 누군가의 몰빵 또는 독박쓰기, 혹은 대리자와 대표자의 역할, 상부상조와 품앗이, 그런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 굳이 첨언하자면,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온 지 2시간을 넘기기 전에 꼭 집에 도착하려고 한다. 혹은 대리인이라도 있도록 스케줄을 조정한다. 이유는 숙제 때문이 아니고, 배가 고프다며 울면서 전화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오후 2시쯤이 되면 어디에 있던 열심히 달려 집에 도착한다. 아직은 이 아이에게 엄마가 가장 필요할 때는 배가 고플 때이기 때문이다. 

 

 2013. 1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