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겹살 연상

엊저녁에 느닷없이 백만년만에 집에서 저녁을 드시겠다는 바쁜 따님께서 삼겹살을 먹고 싶다 하더니 애들 아범까지 가세해서 8시가 넘은 시간에 삼겹살 한 근에 갈매기살까지 굽기 시작했다. 귀찮아서 불판을 안 꺼내고 후라이팬에 구운게 화근이었다. 부엌 가스렌지 싱크대를 넘어서 기름이 방울방울 온 집안에 튀기 시작했다. 대체 튀겨지는 돼지의 기름은 어디까지 전달될 수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아침에 일어나니 온 바닥이 미끈거린다.
구워먹는 고기 중에 제일 탐탁치 않아 하는게 삼겹살인데 단 한 번도 내색한 적 없다. 상추와 깻잎을 씻고 기름장과 쌈장을 만드는 것도 지 새끼 차려 먹이는데 공 들이는 애들 아범이 알아서 했지만 연기와 냄새 때문에 에어컨도 못 틀고 서서 고기 굽는 나만 짜증이 잔뜩이었다. 삼겹살의 절차는 먹는 것은 일부분이고 준비하고 마무리하고 청소하는 절차까지 복잡하고 번거롭기 그지없어서 식당에서 돈 주고 사먹는 것이 얼마나 싼 지 다시 깨닫게 하는 것이다.

언제고 기회가 오면 나는 애시당초 삼겹살을 좋아하지도 않고 집에서 구워먹는 건 정말 끔찍하다 라고 말하게 될 날이 올 지도 모르겠다만, 떠오르는 건 가족들이 모르는 엄마의 식성이라는 거다.
얼마 전 노인복지관 프로그램을 같이 운영하시는 50대의 강사가 시어머니의 입맛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는 에피소드를 전하시며 아들들이 얼마나 자기 엄마 식성을 모르는지 깨달았다 하신 적 있다. 돌아가신 시어머니도 평생 그런 내색을 안 하셨다. 한 번은 입맛이 안 좋으셨던 투병 말기에 시댁에 늘 있던 반찬인 명태코다리찜을 좀 해볼까요 하고 물으니 나 원래 그거 안 먹는다 하셨다. 저는 늘 그 반찬이 있길래 좋아하시는 줄 알았다 하니 느이 아버님이 좋아하시지. 라고 대답하셨다.

결혼 후 내가 포기하지 않은 것이 물것보다 육지것을 좋아하는 내 식성인데, 김치찌게를 끓여도 꽁치김치찌게와 돼지고기넣은 것으로 두 가지를 끓여내거나 돼지고기비지찌게를 잔뜩 끓여 아무도 안 먹어도 혼자 다 처먹는 건 마지막까지 포기해선 안된다는 이상한 고집이었다. 평생을 먹어왔고 길들여진 내 식성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으며, 그건 어쩌면 나의 엄마 아빠, 그 위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었던 것이라고 말이다.

싫어하는 일을 하는 동안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계속해서 이어진다. 설거지를 쌓아놓고 인류의 가사노동을 생각하는 것처럼 바닥에 잔뜩 흔적을 남긴 돼지의 사체에 대해서 오늘은 조너선 사프런 모어의 와 그 책과 표지디자인이 비스무레한 과 제레미 러프킨의 을 식탁위에 깔아놓고 싶은데 그 책들이 식탁에 올려지는 순간 이 집에서는 냄비받침으로 전락할 것이다.

게다가 나는 여전히 육식을 거부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이건 단지 삼겹살은 밖에서 먹으면 안되겠냐!! 하는 감정적인 문제를 이성적으로 풀어내려는 아주 치졸한 먹물근성일 뿐이다.

2013. 7. 19.

마을지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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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수많은 도시민들은 도시의 시스템에 기생하여 살아가지 않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그러고 있는 것처럼 밀려오는 시스템에 거부감만 느끼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엉겨붙어 기생하고 있지 않나.
기생하여 사는 것은 그만큼의 불편함과 수치심을 동반하지 않았나. 그러면서 늘 불평하지 않았던가. 도시가 나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고.
내가 사는 곳에 대해 주인이라 느낀 적 없다.
나는 언제나 도시의 세입자였으며, 내 땅 한 칸 주장한 적 없다. 꾸역꾸역 밀려오는 정책은 파도처럼 늘 도시를 에워싸고 돌았으며 나는 그 안에서 늘 밀려났다.
내 집이 무너진 적 없다. 내 집을 가져본 적 없으므로.
언제나 나는 어디에서부턴가 떠나온 사람이며, 떠나갈 사람이었다.
사람이 한 곳에 정착해야 할 이유를 느낀 적 없으며, 고향은 언제나 이동 가능했다.
내 의지가 아닌 이유로 이동해야 한다면 나는 이동하는 호모노마드가 되려 했다.
말하자면 나는 그 어느 곳도 깊이 사랑한 적 없다.
끊임없이 나의 오늘을 부정하고 나의 정체성을 지우기 바빴다. 나에게 의미있는 장소는 타인에게도 같았다. 구태여 내 것만 아름다운 적 없다.
이제 기억속에 남은 그 거리들이, 나에게 과연 콩알만큼의 안정이라도 가져다주었는가 알 수 없다.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가.
살아가던 공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새로운 적응과 질서를 요구한다. 뜯어내고 고쳐내고 바꿔가는 것은 인간에게 적잖은 스트레스가 된다 한다.
늘 그렇게 부대끼며 살아온 자에게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찾는 일은 익숙하다. 집의 유통기한은 2년이며, 언제든지 보따리를 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외롭다고 말할 시간조차 없었던 것처럼, 낯설어서 어렵다고 말할 시간도 허락하지 않았다. 누가? 내가 나 자신에게.
삶의 일부분을 지우는 것, 끊임없이 나는 뒤돌아서서 내 그림자를 흙으로 덮었다. 삶의 공간을 잊고 끊임없이 떠도는 것, 천막 치고 사는 유목민의 고향은 땅이요 자연이지만, 1.5톤 트럭에 의지하는 도시민의 고향은 자고 일어나면 달라질 눈부시게 발전하는 조국의 빌딩숲이다. 모험과 도전은 돌아갈 곳이 있을 때만 즐겁다. 부유하는 불안정함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지운다.
새롭게 쓰기를 반복한다는 건 끊임없이 지워야 한다는 거다.
어느 날 문득 내 목덜미가 스산해 지는 것은 “나 자신”이 낯설어서이다. 나를 모두 잊기 위해 살아왔기 때문이다.
2013. 7. 7.

7시 42분

# 1.

뭐가 그렇게 힘들었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할 수 없다. 글쎄요. 라고 운을 떼기 시작할 것이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았지요. 라고 시작할 것이다.
누구 때문이라고, 어떤 환경때문이었다고, 이제는 그 누구도 원망하고 싶지 않다.
모든 일들은 내가 원하지 않았어도 나에게 다가왔고 그 과정속에서 내가 한 생각, 내가 내뱉은 말들과 엉켜 사건이 되었다.
그런 하루 하루가 뒤섞여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세월의 때와 땀이 섞여 내가 되었다. 지금 여기, 세상 그 어떤 고통도 신음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평화로운 순간의 나.

#2.

미뤄둔 것들이 있다.
지금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있다. 내 손길이 필요한 아이와 내가 반찬을 꺼내 뚜껑을 열어주어야만 하는 늙어가는 남자가 있다.
내 한 마디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내가 돌아와 산책을 나가길 간절히 기다릴 늙어가는 개도 한마리 있다.
때로는 그 모든 것들을 미루고 싶다.
왜냐하고 물으면, 글쎄요. 라고 시작할 것이다.
나는 신이 아니니까요.
나는 때로 도망치고 싶으니까요.
나도 때로는 모든 책임을 던지고 싶으니까요.
나도 때로는 그 어떤 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3.

유모차에서 내려 아장아장 걷는 아기와
그 아이를 터질 것 같은 눈동자로 바라보는 혈육이 저녁을 즐기고 있다.
인조잔디와 기계적으로 서양음악에 맞춰 압력을 달리하는 사람이 만든 분수 앞에서도 사람들은 쉴 줄 안다.
내 어린 아이도 저 앞에서 춤추며 흠뻑 젖기를 좋아했었다. 이 곳은 그래서 늘 비현실적이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분쟁, 오늘도 더위에 땀흘리며 지친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들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피부가 하얀 젊은 엄마들이 침을 질질 흘리는 아가들을 따라다닌다. 그 아이들은 때로 내 곁으로 와 낯선 존재를 빤히 바라보다 떠난다.
태초의 인간을 생각한다. 그 어떤 수치심도 책임감도 모르는 작은 인간들.

#4.
코오롱등산장갑을 낀 나이 먹은 여자 옆에 젊은 애기 엄마와 뽀얀 남자아이가 있다. 늘씬하게 키가 큰 애기엄마와 그니의 친정엄마일 것이다. 알 수 없는 괴리감을 느끼지만 나 역시 이 인조잔디에 앉아있다. 이건 사실이며 바로 지금이다.
다른 사람은 어찌 그 세월들을 견뎠는가 생각하기 전에, 나는 왜 여기 앉아 있는가 누가 묻는다면, 쉼없이 실패하고 끊임없이 좌절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해도 될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쩔은 내가 나는 허름하고 더러운 바에서나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음악이 사치스럽지 않으나 과도하게 평화로워 낯선 숲속으로 퍼진다.
이렇게 나는 오늘 여기서, 금요일의 저녁 7시 42분을 흘리는 중이다.

2013. 7. 5.

어떤가요 여기는

그래도 일기를 한 줄이라도 쓰고 나면 낫다.
상황을 적고 그럼 이제 내가 가져가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적는다.
매일 매일 나는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고 싶은 모양이다.
오늘은 어제 움켜쥔 것을 버릴 때가 되었다고 적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사람에게 공들이며, 보상이 올 것이라고 믿어마지 않았던 어리석은 마음을 버린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남는 것은 칭찬도 보상도 아닌 추억뿐이다.
때로 그 추억은, 매우 왜곡되기도 하고 재해석되기도 한다. 다시 끼어들어갈 틈도 없고 다시 돌이킬 수도 없다.
과거를 다시 만나는 것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말이며 자꾸 미래만 만나는 것은 정체성을 부정하려는 안타까운 노력이다.

과거의 모든 행위를 아까워하지 않고 이제는 씁쓸한 맛이 나는 기억만 가지고 갈 수 있다면, 이제 그 과거를 위해 더 이상 억지를 부리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걸로 극복이라 믿고 싶다.

문득, 늙어가는 여배우 정윤희의 목소리로 들었던 그 시의 첫문장이 생각난다. 어떤가요 그곳은. 이라던 문장.
나는 묻고 싶다. 어떤가요. 내가 살아온 것은.
정말 그렇게 힘에 부쳤던 건가요. 아니면, 내가 그렇게까지 깜냥이 안되는 인간이었던 것을 여태 내내 속이며 살아왔던 건가요. 라고.

2013. 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