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빵, 마른 잎 

이한열열사의 추모제가 열리는 시청 앞 광장에 노을이 내려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치환이 나와 거칠고 익숙한 목소리로 “마른 잎 다시 살아나”를 부르고 있었다. 

시청 뒤 NPO센터에서 있을 행사에 가러 나온 길이었다. 

행사 시작전인 센터 안은 꽤 무더웠다. 냉방이 필요했는데 아직 장치를 가동하지 않은 듯 했다.

북태평양에서 바람이 불어온다는 며칠, 바깥 바람이 상당히 시원했다. 

베이스와 낮은 드럼 소리의 진동이 거리를 쿵쿵 울리는 시청 뒷골목에 앉아 있었다. 

사위가 곧 어두워질 것이었고 아직 여기 저기 햇빛이 남아 있었다. 

선배를 만나 벤치에 앉아 일 이야기를 하다, 80년대의 이야기를 잠시 들었다. 
우리가 앉아있던 벤치 앞,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이면도로에 작은 원동기가 하나 섰다. 뭔가 들은 것 같은 비닐봉투를 안장에 얹은 작은 원동기에서 노인이 내렸다. 그는 내가 바라보는 방향의 가장 끄트머리 벤치에 앉았다. 주섬주섬 품에서 빵과 우유를 꺼내 천천히 입에 쑤셔 넣었다. 나는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가 빵을 먹는 모습이 자꾸 시야에 들어왔다. 70년대 학번들의 낭만과, 80년대 학번들의 전투적이고 조직적인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빵이 들어가는 노인의 입 매무새가 자꾸 눈에 들어와, 87년쯤, 저 사람은 몇 살이었을까, 딴 생각을 했다. 
칠순은 훌쩍 넘었을 거 같은 노인의 저녁은 시원한 북풍이 부는 시청 뒷골목의 벤치 위에서 마른 빵 하나. 오늘치 빵 하나의 노동은 어떠했을까.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대통령 탄핵을 거머쥐고, 새로운 정권을 창출한 오늘, 박종철과 이한열이 죽고 30년이 지난 지금, 노인의 삶을 얼마나 달라졌을까. 
적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대오는 흩어져 골목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가스처럼 낮게 깔리는 귀신에 사로잡혀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단 하나의 마른 빵을 위해, 마른 잎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걱정말라는 노래의 가사를 믿어도 될까. 
20170609

별바다집

남자는 배를 타고 고기를 낚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그물을 손질하는 사이, 여자는 의자에 앉아 해금을 연주하고 있었다.
밖에 놓인 메뉴판엔 식사가 세 종류.
백합조개가 들어간 칼국수가 있었지만, 

칼국수보다 커피가 궁금했다. 

예상치 못한 사물은 낮게 말한다. 

여기, 무언가 숨어 있다고. 
드립커피가 3500원.
벽에는 LP판이 꽂혀있고 피아노 위엔 영농일지가 있었다.

어느 도예가가 선물했을 법한 도자기들과 

바다를 좋아하는 작가가 붓을 뻗쳤을 바다풍경, 

한지를 우그려뜨려 붙인 천장, 

나무로 된 싱크대, 

피아노 위 주인여자의 흑백사진과  

멀찌기 걸려 있는 어부의 파안(破顔), 
별바다호(號),가 잡아오는 물것으로

노래를 잇는 여자가 있는 곳.
별바다집.

 
20170402 인천 옹진 장봉도 

공범

1.
오전에 목동까지 가서 바이올린 앙상블을 연습했다. 근처에 사는 분과 동행했고 같이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포도밭과 산을 갈아엎어 만든 아파트에 사는 그 사람과 나는 각각 15,000원이 넘는 스테이크를 하나씩 먹었다.
그 분은 내 차를 얻어탔다며 밥값을 내겠다고 했다. 나는 밥을 잘 얻어먹고 집으로 돌아와 주차장에 차를 댔다. 한 달째 주차장 크랙을 메우는 공사를 한다. 주차장에 내려갈 때마다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사람들이 거기에서 일을 하고 있다.

차를 세우고 내렸는데 미화원 아저씨가 공사가 끝난 바닥을 마대자루로 닦고 있었다. 공동현관을 들어서자 우리 동 미화원 아주머니가 엘리베이터 앞을 닦고 있었다.
바이올린 가방을 쥔 손이 사라졌음 싶었다.

2.
저녁엔 약속이 있어 그 포도밭이 끝난 산 언저리에 있는 작은 식당에 가서 닭도리탕과 오리구이를 먹었다. 저녁도 얻어먹었다.
단체가 모인 자리였는데 인사를 하다가 목이 메었다. 자꾸 목울대가 울컥거렸다.

식사중인 분들을 두고 먼저 일어나 골목을 지났다. 차가 줄지어 서 있는 어두운 골목에서 모자를 쓴 한 남자가 박스를 들고 걷고 있었다. 남자는 뒷문이 열린 트럭으로 걸어갔다. 택배기사였던 것 같다.
내렸던 창문을 올려 닫았다.

자다가 깨어 울컥대는 목울대를 만져본다.
거대한 슬픔에 어떻게 화를 내야 할 지 모르겠다. 소소한 서러움엔 그저 고개를 숙이면 될 일이고 일기를 쓰면 넘어갈테지만.

이제 두 주먹을 꽉 쥔 소녀들은 어찌할 것인가.
이러나 저러나 나는 공범자다.

눈이 많이 오던 날 

눈 내리는 해장국집에 여자 둘이 들어섰다. 신발 벗기 귀찮다며 의자에 앉자더니 이내 방으로 올라왔다. 그 집의 의자가 있는 테이블은 알량하기 짝이 없어서 앉으라고 채워둔 거 같지 않다. 안경 쓴 총각이 들여오는 식재료나 다듬던 콩나물이나 무우를 쌓아두거나 때로 주인장이 읽던 신문지를 놓아두는 곳에 더 걸맞다.
해장국 두 그릇을 시킨 여자가 창문을 보며 비명에 가까운 탄식을 뱉었다. 어머 어머 눈 오는 거 봐.

눈은 진즉부터 오고 있었는데 오늘 처음 눈을 본다는 듯 중년 여자가 흥분했다.

이런 날은 저수지에 가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앉아 있어야 하는데.

여자가 말해놓고 까르르 웃었다. 앞에 앉은 여자가 아직 낭만이 죽지 않았다고 말을 받았다.

언니 나는 저번에도 비오는 날 저수지 가서 혼자 커피 시켜놓고 두 시간 앉아있다 왔잖아?

여자가 다시 까르르르 웃었다.
해장국을 가져다 주는 앞치마 입은 여자에게 저수지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여자가 말을 건넸다. 언니도 땡땡이 치고 저수지 가서 커피나 마시자.

해장국집 의자에 앉은 남자는 계속 혼잣말로 씨팔, 이라 말했다. 막걸리를 한 병 시켜놓고 해장국을 간간이 떠먹으며 또 말했다. 씨팔.
눈발이 흩날리는 사거리를 지나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사이가 좋아보이는 중년 남녀가 우산 하나를 쓰고 마주보며 웃고 있었다. 택시 한 대가 두 사람 앞에 와서 서자 여자가 혼자 택시에 올라탔고 창문을 내려 남자에게 살뜰하게 손을 흔들며 떠났다.
신호등이 바뀌지 않은 사이 나는 떠나간 여자의 날씬한 다리를 기억했다.

문득 어제 만난 서른 일곱의 대리기사가 떠올랐다. 프랜차이즈 관리직을 하다 프랜차이즈를 내려고 수제 햄버거집을 열었는데 적자를 면치 못해서 대리운전을 시작했다는, 아리송한 얼굴의 사내는 오늘도 부지런히 고기를 굽고 있겠다.

2015. 12. 3.

비둘기 두 마리 

사람들이 북적이는 어느 지하철역 길거리가 훤히 보이는 커피집에 앉았다. 

사람들이 오가고 차가 지나가는 좁은 골목의 입구 비둘기 몇 마리가 좀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계속해서 뭔가를 먹고 있다. 

일행은 계속 비둘기를 바라보며 초조해했다. 좀처럼 비키지 않는 비둘기는 혐오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지나는 차마다 비둘기때문에 속도를 늦추고 조심조심 움직였다. 
종이를 놓고 펜을 하나씩 들고 중요한 계획을 서로 조정하는 중이었다. 비둘기를 눈여겨보던 일행이 탄식을 뱉었다. 

“엇. 아… 저거 뭐야.”
좁은 골목에 깃털이 마구 날렸고 결국 비둘기 두 마리가 납작해졌다. 
오전엔 4년 반을 감옥에서 보낸 사람의 수기를 읽었다. 독방에 살던 징역수는 비둘기 둥지를 만들고 비둘기 알을 기다리고 알에서 깬 비둘기가 다시 돌아오길 애타게 기다렸다. 
길바닥에 납작하게 깔릴 비둘기 두 마리는 아직 있는가, 이미 없는가. 

세상은 복잡하게 움직이고 우리의 수명은 조금씩 줄어드는데 비둘기라도 애타게 기다리던 간절함은 여기에 있을까, 거기에 있을까. 
올겨울은 유난히 쓸쓸하게 온다. 

누군가의 옛이야기를 들으며 술에 취해 졸고 싶은 밤이다. 
11월의 마지막 토요일 

인덕원역에서.

22원 그리고 10원

 
지난 금요일 롱바이라는 동네에 갈 일이 있어서 자전거를 타고 출발을 했었다.
날씨는 갑자기 추워졌고, 시간은 촉박해, 털모자와 목도리를 하고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보니 땀이 나서 옷은 젖어가는데 바람이 칼같아서 속도는 나지 않았다.
이제는 아무렇게나 아플 수도 없는 생활임을 알고 있었다.
자주 가던 시엔시아루 스타벅스앞에 다다라 자전거를 묶어놨었다.
그리고 오늘 저녁 자전거를 다시 찾으러 갔다.
 
원두커피가 떨어져 가서 4봉지를 사면 한봉지를 꽁짜로 주는 스타벅스 수첩에 도장을 한 개 받으면서 골드 코스트를 가장 굵게 갈아달라고 했다. 그리고 22원을 내고 작은 컵에 담긴 카페 모카를 주문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겨울. 스타벅스에서는 붉은 색 크리스마스 종이컵을 쌓아놓고 있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마시고 갈 것이라 머그컵에 커피를 담아주었다. 아마 전세계 어디를 가도 같은 노래가 나오겠지, 스타벅스에서는 조용한 캐롤이 나오고 있었다. 언제나 그 곳의 음악은 들릴 듯 말 듯 하다. 언제나처럼, 하얀 건물로 된 시엔시아루 스타벅스밖의 야외테이블에는 독한 연기를 내뿜는 홍쑤앙시라는 담배를 피우는 상해의 중년남자들이 하나 둘 앉아있고 안에는 노트북을 펼쳐놓은 남자와 여자들, 광동어를 하는 사람들, 일본어를 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있다.
우리가 늘 앉던 2층 창가엔 자리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커피를 들고 1층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커피를 다 마시는 그 시간을 기다렸다.
 
묶어놓았던 자전거의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다. 자물쇠가 잠겨버린 자전거는 매우 무거웠다. 튼튼한 자물쇠가 굴러가지 않는 자전거 바퀴에 끼어 타이어의 한 쪽 바닥만 긁히고 있었을 것이다. 장기판을 벌리고 있는 자전거 수리공을 찾아 자물쇠를 펜치로 끊어 버리고 새 자물쇠를 샀다. 그는 나에게 자물쇠값 20원을 달라고 했고 수공비는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 수리공의 옆에 써 있던 回收 香煙이라는 글자를 보면서 담배를 돌려받아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를 고민했으나, 나는 그에게 묻지 않았다.
 
10미터도 가지 못해서 자전거 뒷바퀴가 펑크 났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자전거를 끌고 가 그에게 바퀴에 바람을 넣어달라고 했으나, 타이어는 바깥쪽도 안쪽도 모두 펑크나 있었다. 언제나처럼, 자전거 수리공들이 모두 그러는 것처럼, 안쪽 타이어를 끄집어 내어 바람을 넣었다가 더러워진 물이 담겨있는 세수대야에 타이어를 부분씩 담궈서 물이 새는 부분을 확인한다. 그리고 은박지로 된 강력한 테잎을 붙이는 것이 이들의 수리법이다. 바깥 타이어는 어떤 물리적인 힘에 의해 찢어져 있었다. 오는 길에 찢어졌는지, 누군가가 내 자전거를 가져가려다가 자물쇠 열기에 실패하고 화가 나서 타이어를 찢어버렸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타이어안에 못쓰게 된 폐타이어의 조각을 이어붙여 자전거는 다시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2원을 다시 주었다.
키가 작은 그 남자는 아까 자물쇠를 살 때 얘기했으면 다시 2원을 주지 않아도 됬을 거라며 웃었다. 22원. 커피값, 그리고 자전거를 고친 수리비.
 
슈주허를 넘어오는 길에 달이 커다랗게 떠 있는 걸 보고, 아이를 안고 포르노 CD를 파는 여자들을 뒤로 한 채 사진을 찍었다. 문혁때나 썼을 법한 군청색 모자를 쓴 노인이 길을 잃어서 그러니 10원만 보태달라고 했다. 검은 핸드백을 메고 동그란 항아리 몸을 가진 노부인이 그 뒤에 따라 서 있었다. 팅부동이라고 거절을 했으나, 이미 나는 그들의 말을 모두 알아듣고 있었다. 지갑을 열어 10원을 건네는 나에게 그들은 핸드폰 번호를 달라고 했다. 내일 갚겠다고.
나는, 괜찮다고, 조심해서 가시라고 인사를 했다. 설령 그들이 거짓말을 했더라도, 내 양심은 뿌듯한 것이었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도둑이 되거나 거지가 된다. 그들은 어느 편이었을까. 정말로 길을 잃은 노부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비슷한 방법으로 구걸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거지에 비슷한가, 도둑에 비슷한가. 모든 것은 명확하지 않다. 어디쯤엔가 비스무리하게 서 있는 것이었다.
 
22원짜리 커피를 사 먹고 자전거를 타고 슈주허 다리를 건너던 나처럼.
 
2004. 11. 28.

소나기가 지나간 저녁

 
지난 밤에 공씨디를 사러갔던 대형전자상가에는 내가 찾는 공씨디가 없었다. 지난 금요일쯤 그 곳에 갔을 때 남아있는 19장의 씨디를 모두 챙겨나왔는데, 그 빈자리 그대로였다. 빈자리 그대로, 장사를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어젯저녁 심한 돌풍과 비가 내렸던 그 축축하고 어두운 길을 걸어왔었다.
 
집 근처에 있는 다른 전자상가는 흡사 용산전자상가의 축소판 같았다. 공씨디를 여러종류 쌓아놓고 파는 집이 많이 있었다. 예상보다 저렴한 가격, 양질의 씨디를 스물 다섯장 사고 돌아오는 길에 비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올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집을 나서기 전부터 하늘이 어두웠고, 명확하지 않는 하늘을 바라보는 내 시야안으로 비구름이 분명히 몰려오고 있었는데, 나는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단순히 귀찮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비를 맞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여름, 비를 한 참 맞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감기에 걸린다고 했다. 소설이나 영화속의 주인공들은 유난히 나약한 탓에 폐렴에 걸리기도 했다. 그러다 죽는 주인공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존재가 아님을 알고 있다. 적당히 집에 걸어들어가도 그리 많이 젖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에 자주 가던 국수집에 들어가 만두국을 한 그릇 시켰다. 이 집은 여름에 냉만두국과 더운 만두국을 같이 파는데, 문 앞에 멍한 눈으로 서 있던 종업원은 찬 거? 더운 거? 라고 생뚱하게 들리지도 않는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만사가 귀찮은 그 태도, 내 깊숙한 곳을 보는 것만 같아 두려웠다. 50원짜리 지폐를 내고 잔돈을 퉁명스럽게 거슬러 받으며 나는 창가자리에 앉아서 비가 쏟아지는 길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느 새 오색의 비옷을 챙겨입고 자전거 위에서 페달질을 하고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기다리는 아늑하고 가난한 집으로.
 
방금 전 내가 돌아온 그 길 어귀엔 대형 극장의 공사가 몇 개월째 계속 되고 있었다. 저 멀리 내가 다니던 헬스장도 보였다. 그 어귀에서 쇠그릇을 앞에 놓고 얼후를 연주하던 남자가 얼후를 집어들고 일어섰다. 내가 어젯밤 이 길을 지났을 때 주머니를 뒤져 1원을 건네줬던 그 남자 같았다. 대머리가 살짝 벗겨진 그 남자가 앉아있는 그 자리엔 바로 뒤 극장을 짓는 공사장에서 나오는 독성 가득할 법한 시궁창 냄새가 올라오는 액체가 흐르고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빗줄기가 거세지자 남자는 더럽고 낡은 바지를 걷어올렸다. 갈색 슬리퍼를 입은 그 남자의 발은 비를 맞는다 해도 도무지 깨끗해질 것 같지 않았다. 호주머니에서 누렇게 변색된 수건을 꺼내 남자는 벗겨진 머리와 얼굴을 닦았다. 그 남자에게 뛰어가 5원짜리 지폐를 건네주고 싶었다. 5원이면, 밥도 한 그릇 먹을 수 있고, 1원을 보태면 어느 욕실에 들어가 샤워라도 한 차례 할 수 있는 돈이다. 10원이면, 내일 아침도 먹고 내일 점심까지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저 멀리 습기 가득찬 통유리창이 달린 그 헬스장을 다녔을 때 그곳까지 가는 곳에 앉아있던 서너명의 얼후를 든 남자들과, 구부러진 다리를 가진 남자 아이와, 머리가 하얗게 탈색된 남자아이를 안고 있던 여자를 기억했다. 그 때, 나는 매일 매일 그 길을 지나며, 매일 매일 그들을 외면했다. 이제 나의 가난이 그들의 가난을 동정하게, 그들의 가난을 이해하게 한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쌀 한 톨 건네주지 않는다는 진실도. 그 사람에게 내가 돈을 주고 싶다는 생각은 나누고 싶은 생각에서였는지도 모른다. 나의 한 끼와 그의 한 끼가 동일해지도록, 나의 근원없는 억울함과, 그의 이유있을 억울함에 대해서 공감을 형성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내가 만두국을 반쯤 먹고 나서 양이 많다고 느꼈을 때쯤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 전 나에게 살기 싫은 표정을 보여줬던 그 여자 종업원은 내 뒤에 바로 들어온 두 명의 젊은 사내들에게 농지거리를 하며 살살 거리고 있었다. 남자라는 존재가, 그녀의 삶을 바꿔놓는가. 때로 여자는 남자를 살게 한다. 그리고 때로 남자가 여자를 살게 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무슨 이유로 잣대를 들이미는가. 사람은, 동물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인데.
 
자신의 밥줄을 가만히 들고 서서 비를 맞고 있던 그 남자가 사라지고, 나의 만두국 그릇속의 만두도 남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단 한 번도 비오는 하교길에 누군가의 우산속에 뛰어든 적도, 누군가가 마중을 나온 적도 없었다. 비가 조금 더 많이 온다면, 그래서 지금 추레하게 슬리퍼를 끌고 나온 나에게 누군가 우산을 씌워준다면 그 사람이 당황할 만큼 그 우산속에서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다행스럽게, 비는 그쳤고, 나는 울 기회를 놓쳤다.
 
한 차례 소나기가 지나간 길엔 풀과 물이 만난 냄새가 가득했다. 상해의 그 고단한 여름은 사라진 것만 같았다. 길에는 시원한 바람, 비 온 뒤에 산책을 해야겠다는 그 누군가의 말이 생각나는 공기만 가득했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나에게 그래도 혼자 자기엔 조금 넓은 침대가 있고 에어컨까지 달린 작은 집이 있다는 사실이 더 할 수 없는 사치로 느껴졌고, 그 사치를 영유하고 싶었다.
 
요즘은, 해가 너무 늦게 진다.
 
2004. 7. 13.

볶음 국수 한 그릇

 
먼 하늘에서 구름이 밀려오는 게 보였다.
 
구릉구릉 거리는 소리가 공기를 휩싸더니 바람이 심하게 불기 시작했다. 비가 오려나보다 생각하자 마자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는데, 후두둑 거리는 소리가 요란해 마치 우박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 비는 오래 가지 않았고, 10여분 만에 그쳐버렸다. 비가 그쳤다고 생각하고 슬리퍼를 신고 국수나 한그릇 먹어야겠다 하고 아파트를 나섰을 때 굵은 빗방울은 셀 수 있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조금씩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복도 창가에 서서 다시 집으로 올라가 우산을 챙겨나와야 할까를 아주 잠깐동안 고민하다가 그냥 몇 방울의 비라면 맞아보기로 했다.
 
국수집에 도착할 때쯤엔 그 몇 방울의 비도 멈추었고, 오랜만에 찾은 그 국수집의 볶음국수의 가격이 4위안인지, 5위안인지가 잠시 헷갈렸다. 계산대에 서서 종업원 아가씨에게 4원인지 5원인지를 묻고 동전 4개를 올려놓고 자리에 앉으려고 거의 텅 빈 식당을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TV 소리가 났고 맨 가운데 테이블 의자위에 커다란 흰 고양이가 늘어져 있었다.
귀여워하기엔 너무 커다란 고양이, 나는 그 자리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벽쪽 테이블에 앉았다. 눈이 마주친 고양이는 의자에서 내려와 어슬렁거렸고 반바지를 입은 내 다리 주변으로 왔다갔다 하더니 내 의자밑으로 들어가 맨 발을 툭 건드렸다. 흠칫 놀라 다리를 움직였더니 고양이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TV 소리는 작은 흑백TV를 테이블위에 올려놓은 직원아저씨의 것이었다. 주방에선 키가 큰 젊은 요리사가 커다란 후라이팬 위로 올라오는 불과 함께 놀이를 하는 듯 했다.
 
그 때쯤 바로 옆에 안경을 쓰고 키가 작은 여자가 오렌지색 티셔츠를 입고 비닐봉지를 탁자위에 소리나게 올려놓으며 앉았는데 맞은 편에 동행한 열 일고여덟 살쯤 되어보이는 남자아이에게 계속해서 목소리를 억누르며 화를 내고 있었다.
상해방언은 스즈츠 발음이 많아 듣기에도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탁한 소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언어를 짓눌러가며 그녀는 계속해서 소년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소년은 탁자위에 배낭을 확 집어던지기까지 했으나 물론 싸움이 될 상대도 되지 않아보였다. 그녀와 소년은 모자간처럼 보였는데다가, 여자의 목소리는 짓누르는 깽깽거리는 목소리였고 남자아이는 계속해서 징징거리며 웅얼거리는 말투로 말꼬리를 질질 끌고 있었다.
 
볶음국수가 다 되었다는 말을 주방에서 했을 때 이 집에서 아침을 먹을 때처럼 나는 습관적으로 일어나 주방에서 작은 탕 그릇과 국수그릇에 젓가락까지 챙겨 내 자리로 돌아왔고, 나보다 한 걸음 늘 늦을법한 종업원 아가씨가 뻘쭘하게 옆으로 다가왔으나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자리로 돌아왔다.
 
급기야 옆자리의 소년은 울음을 터뜨렸고 주방사람들도 힐끔힐끔 그 모자를 쳐다봤으나 여자의 깽깽거리는 꾸중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내 국수를 가져다 줄 기회를 빼앗긴 종업원 아가씨가 소년의 식사를 가져다주자 아이는 울면서 징징거리면서 음식을 밀어넣고 그 앞자리에 앉아 아무것도 먹지 않는 여자는 계속해서 짓누르는 목소리로 앵앵거리고 있었다. 소년은 반쯤 식사를 하고 벌떡 일어나 냅킨을 가지러 갔다와서는 자리에 앉았다가 밖으로 휙 나가버렸고 여자는 여전히 변함없이 끈질기게 쫑알거리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 손님수보다 많던 종업원들이 모두 빤히 밖을 쳐다보았고 야채를 도마위에 올려놓고 신나게 칼질을 하고 있던 남자는 휘파람을 불면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킥킥 댔다. 나는 상해방언을 모르므로 그 두 사람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장난스럽게도 내가 그 순간 한 생각은, 상해방언을 할 줄 안다면, 이 땅에서 사람들이 왜 저렇게 싸우는지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수를 다 먹고 일어나는 길엔 잘 먹었다고 말할 필요도, 잘 가라는 인사도 필요없는 순간이었고, 국수집을 나오자마자 그 앞의 한 남자가 나를 바라보며 맨손으로 코를 팽팽 풀어대고 있었다.
뚱뚱한 시츄가 뚱뚱한 아줌마와 함께 궁둥이를 들썩거리며 지나갔고 아파트 단지에는 면식이 있는 사람들끼리 이제 들어오냐는 안부를 묻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나는 터덜걸음을 걸으면서 핸드폰으로 문자메세지를 주고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다가 담배를 사야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고 다시 아파트 단지앞에 있는 편의점엘 갔다.
 
비는 여전히 오지 않는데 하늘은 구룽구룽하는 소리를 내고 친구에게선 한국드라마 “엄마야 누나야” 가 너무나 재미있다는 문자가 왔다.
 
2004. 5. 21.

일요일밤 어떤 가족

유흥가 편의점 앞에 금발머리의 서양 여자아이가 늙은 남자와 공놀이를 하고 있다. 할아버지인가 싶었다. 편의점 앞 붉은 의자, 지저분한 탁자 앞에 아이와 머리색이 똑같은 금발의 여자가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탁자의 한 쪽 끝, 여자와 가장 먼 곳에 가장 싼 생수병이 놓여 있었다. 

유흥가는 일요일 밤이라 텐프로라고 쓰인 곳의 간판불은 꺼져 있었지만, 치킨집과 호프집엔 야외 탁자 가득 사람들이었다. 

편의점에 들어가 물과 담배를 사서 나왔을 때도 아이는 계속 해서 그 늙은 남자와 공을 차고 있었다. 남자는 연신 웃고 있었다. 색깔이 들어간 어두운 안경을 쓰고 있었고 군복무늬의 반바지를 입고 초라한 쓰레빠를 신었다. 그에 비해 아이가 너무 반짝였다. 

아이가 소리높여 외쳤다. 
Daddy! Sixty two! mommy! Look! 
할아버지가 아니라. 아빠였다. 담배를 피우며 앉아있던 여자를 다시 멀리서 바라봤다. 쉰살이라도 해도 괜찮을 얼굴이었다. 
아이가 안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 돌아와 늙은 개와 산책을 하며 다시 그 가족을 떠올렸다. 비록 남루한 차림의 늙은 아비더라도 그 어떤 젊은 아비보다 진심으로 즐겁게 아이와 놀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며 인상을 쓰고 있던 금발의 아이엄마는 단지 내가 본 그 순간에 잠시 인상을 지푸렸을 뿐인지도 모른다. 내내 기쁜 마음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을 지도 모른다. 아이는 더 없이행복해 보였던 것을 다시 떠올렸다. 

세상을 보는 눈은 내 눈이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서 본 것일게다. 
좀 더 젊은 부모, 좀 더 세련된 부모, 좀 더 부유해 보이는 외모를 가진 부모가 아니라 아이가 안스럽다고 생각한 나의 시선에 내 욕구가, 내 불만이 가득 차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행복한 가족이 한가로운 밤을 보내고 있었을 뿐인데 나는 왜 그것을 굳이 오해하고자 했는가. 

난곡, 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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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이유 – 아름다운 집
서울 신림동
Nikon D5000 Nikor 18-70mm / Digital Printing /
76.2cmX101.6cm (30X40) 액자 미포함 사이즈
2009. 11. 촬영
1st Edition – Digital Printing /76.2cmX101.6cm (30X40)/ 경기도 안양시 안양6동 이야기너머 작은 도서관 소장중

2006년 12월
돐이 되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우리는 갑자기 이사를 하게 되었다.
집주인이 바뀌게 되었기 때문이었고, 아이가 어려서 아파트 생활에 도전해보기로 했으나 근처의 아파트 단지들은 매우 낡았음에도 불구하고 값이 만만치 않았다. 세입자로 들어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친척의 정보로 옮기게 된 곳이 관악구 신림동, 난곡이었다.
나는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알지 못했고, 서울의 남쪽 끝, 안양에서 넘어가는 산비탈에 새롭게 거대한 아파트단지가 들어선다는 것만 몇 년 째 구경하던 차였다.
난곡이라는 지명이 무엇을 뜻하는 지, 내면에 숨어 있던 기억이 조금씩 불거져 나올 때쯤, 택시를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사가 해 준 문구가 귀에 딱 박혔다. “난곡이 천지개벽을 했구나. 서울이 버린 동네. 대한민국이 버린 동네.” 인터넷으로 난곡에 대해서 검색을 해봤다.

난곡에 살던 사람들을 밀어내고 대한주택공사가 지은 아파트단지는 2300여세대.
주공 1단지와, 2단지, 그리고 그 밑에 영구임대주택은 3단지로 분류되었으나, 길이 나뉘어져 있었고, 입구도 완전히 달랐다. 분양가는 평당 1200만원에서 평당 1400만원. 월세는 24평 기준 5000만원 보증금에 월 70만원 정도. 안양의 삼막사에서 경인교대앞을 지나 호암터널을 지나는 산길에서 내려오거나, 난곡사거리에서 올라오는 그 길의 아파트 단지는 신림역보다 해발 300미터 정도가 높다는 소문이 있었고, 피부로 느낄 만큼 확연하게 날씨가 달랐으며, 산안개가 2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의 꼭대기를 감싸고 돌 때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성채, 사람이 살아서는 안되는 불길한 예감이 흐르고 있다고 미친 척 지껄여도 신빙성 있게 들릴 만큼, 때로는 신비롭고, 때로는 기괴한 분위기를 뿜어낼 줄 알았다.
봄이 되면 산에서 아까시 냄새가 흘러내려왔고, 밤꽃 냄새가 지천에 진동했다. 조금만 걸어올라가면 관악산과 삼성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펼쳐졌고, 차 지나가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절간 같은 곳도 있었다.

이 곳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갑자기 트럭에 실려 자 이제 여기서 한 번 살아보라고 강제로 이주 당해 몇 십년을 일궈먹고 살면서 골목과 골목을 통해 같은 화장실에서 똥을 싸고 오줌을 싸고 옆집에 수저가 몇 개 인지, 누구네 서방이 마누라를 얼마나 두들겨 패는지 적나라가 알 수밖에 없던, 모든 집을 지나가야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었다는 구비구비 돌아가던 난곡에 살던 사람들은 그 아파트에 단 한 사람도 남을 수 없었을 게 뻔했다. 원주민이라고 말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두 승용차를 끌고 다니고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냈으며, 대부분 대학을 나왔고, 좋은 직장에 다녔다. 딱지를 사서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비밀도 아니었으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지 나는 알 지도 못했다. 나는 세입자였으므로.

그 성채로 들어설 때마다 부채의식에 시달렸다.
그런 나에게 무슨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있냐고 낯선 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가난하고 못 배웠다면, 공기라도 좋은 데 살면 안되나. 단 하나 남은 천혜의 것. 달이 가까운 동네라는 게, 우리나라야 척박한 도로 환경으로 인해 산동네 달동네가 빈민가가 되었지만, 아침마다 들려오는 새소리와 쏟아져 내려오는 꽃냄새를, 누군가가 눈물 흘리며 쫒겨났을 거라는 그 땅에서 가만히 앉아 맡는다는 것도 힘겨웠다.

내 양심에 발린 소리였던가.
간혹 나는 삼성산 아래 고시촌을 떠돌다 6동 시장이라 부르는 재래시장에서 아이를 들쳐업고 장을 보고 마을버스를 타고 올라왔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저기 어딘가 사람이 살고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삼성산 성당의 뒷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그리고 이 집을 만났다.
아파트가 밀어내지 않은 골목. 이 집은 몇 평이나 될까.
이 집이 열평이라면, 평당 1200만원 시세를 적용하면 1억 2천짜리 집이 될테지만, 그렇지 않다는 건 너무나 빤한 일.

고마웠다.
내 어린 날, 화장실을 가기 위해 어두운 산길, 휴지를 쥐고 마구 내달려야 했던 기억처럼, 아무 것도 없고, 설령 부모는 끼니걱정을 하더라도, 엄마 아빠가 집에 있어서 좋아. 라고 뇌까렸던 철없으나 암울했던 그 시절처럼, 완전히 색이 바랜 가림막에도, 여기,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고.
내 알량한 양심에, 조금 기름칠을 해 준 셈이라 고맙다고.
보증금 5000만원에 월세 70만원을 내면서 일곱식구일지, 여덟식구일지 모를 사람들을 내 쫒은 자리에서 내가 두 발 뻗고 살고 있지 않다고 변명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게끔. 나, 당신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게끔. 말해줘서. 고맙다고. 그렇게 기념한, 겨울의 풍경이다.

2013. 2. 1.

_최근들어, 이 사진에 대해서 설명해야 할 일이 생겨서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