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별아의 <영영이별 영이별>에 이런 대화가 나옵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래.” “사람이니까 그렇죠. 사람이라 그럴 수 있는 겁니다.”
사람은 추악할수도 있고, 숭고할 수도 있죠. 짐승도 하지 못하는 잔인한 짓을 할 수 있는 게 사람이고, 여러 생명을 구하는 아름다운 일도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일로 노인들을 만나기 전에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누구나 사는 게 힘든데 어찌 저들은 그 세월을 다 견디고 버티고 죽지 않고, 살아있을까. 대단하다.’
강의로 만나며 한 가지 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소설가 김훈이 말했듯이 ‘야만과 폭력의 시대를 견뎌왔으면서도’ 뭘 더 배우겠다고 여기 오시잖아요. 시댁, 시누이 가부장제의 괴로움, 여자라 하지 못한 일, 남자들은 또 조직이 시키는대로, 까라면 까는대로, 일하고 대가도 못 받고, 사생활도 포기하고 일하며 지냈던 시대를 견디고 다 넘겨서,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어보겠다고 여기 나오시는 걸 보면서, 견디고 버티는 걸 넘어서 ‘인간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참 숭고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존경합니다. 수업 중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인류가 처음으로 고령화시대에 들어갑니다. 그 첫 세대십니다. 여태 살아온 날은 돌이켜보면 2/3 정도 되죠. 이제는 다른 삶을 사실 수 있습니다. 그동안 키우고 돌보고 살리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나 자신이라는 인간에게 집중해서 하루하루 더 성숙하고 훌륭해지는 길을 걸어주신다면, 후배들도 잘 보고 배우게 될 겁니다.
잘 살아오셨습니다. 서로 칭찬하시고 모임도 만드시고 매일 매일 더 행복하고 즐거운 일 많이 만드시길 바랍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많이 버렸다.
나에게 장애물이었던 것들, 내가 사랑하지 않는 것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
서른 살무렵부터 빨리 늙고 싶었다.
나이를 먹으면 사는 게 편해질거란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어쩌면 지금이 제일 좋은 시기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다시 힘들어질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삶은 몇 년째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 더 이상 등짐을 진 당나귀 같은 삶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건 내가 간절히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경새재를 넘어오며 골짜기 깊이 파고드는 땅과 비구름을 뿌리는 하늘을 보며, 이제 다시 산을 좋아하긴 어렵다는 걸 알았다.
나는 여전히 너무 많은 걸 사랑하고 있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괴롭던 시절이 있다. 그게 나에겐 청춘이었던 것 같다. 한 소설가의 문장을 읽으며 명치가 뜨거워졌다. 한때 모든 것을 상징으로 읽고 깨달으려 노력한 적 있다. 지금은 그저 있는 그대로를 본다. 노력하지 않는다. 잘 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칭찬받으려고 눈치를 살피지 않는다. 마흔 넷에 이 정도 인간이 되었으면 내 깜냥에 알맞다 생각한다. 모자라도 어쩔 수 없다.
이대로 10년쯤 살다가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불쾌한 것에 화를 내고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점점 편안해진다. 아마 점점 괴팍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방도는 없을 것이다. 이제사 인간이 뭔지 알아채기 시작했다. 자고 일어나면 나는 다시 업무모드로 돌아간다. 많은 것을 잊은 척 할 것이다.
첫 번째.
나같은 범인들은, 아침이 되면 아무리 내가 프리랜서라도, 남들이 모두 출근할 시간이라는 걸 아니까. 진동으로 해 놓은 휴대폰에 알람이 울리면 잠결이라도 한 번은 들춰보기 마련이다.
게다가 계속 울리는 전화가 있다면, 내가 늦잠을 자는 건 내 사정이니까, 잠결에 잠긴 목소리 티 안 내려고 애쓰며 정중하게 받곤 한다.
특히 아침 8시 반 이후면, 내 사정이 어쨌든간에 전화는 받는다. 단지 생계가 연관되지 않았더라도.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전화를 하는 경우라면, 널널한 일이 아닐 가능성도 높다.
게다가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자마자, 혹은 출근하는 길에 나를 찾는다면, 그 사람은 밤새, 혹은 출근길에도 나에게 전화할 걸 생각했다는 이야기다. 월요일 오전이라면, 쉬는 주말동안 나와의 통화를 기다렸을 거다.
두 번째는,
나이를 먹을 수록 아침잠이 없어진다 하고, 마흔을 넘기며 나도 겪고 있는데 칠순이 다 된 노인이. 오전 10시가 넘어서.
귀마개를 하거나 암막커튼에 완벽한 방음장치를 한 방에 있거나.
세 번째는, 눈 뜬지 20분이 지나 의료용 가글을, 그것도 타인의 손을 빌려 받아 써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20분이면 세수도 하고 이도 닦을 수 있는 시간인데 매일 의료용 가글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독특한 습관이라도 있는 건가.
그래, 그건 그나마, 개인의 취향이니 이해할 수 있다. 누구나 이해받기 어려운 습관은 하나씩 있는 법이니까.
네 번째는, 미용사에게 급하다고, 전화도 아닌 문자를 보낸 윤전추. 그리고, 강남에 있는 미용사 자매를 기다리느라 두 시간을 보낸 노인. 물론, 이 두 시간동안, 노인은 자신의 멘토, 아니 분신보다 더 소중한, 자신의 결정권자를 기다리며 두 손을 모으고 안절부절 했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절대적으로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멍청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는 매우 영리하고, 진심으로 눈물을 흘릴 줄도 안다.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만.
박근혜가 일찍 일어났다면, 아이들이 살았겠냐고, 그들은 그저 무능했고 담당자들은 소심했을 뿐이라는 주장을 보았다. 물론, 박근혜가 문제가 아니라 전체 시스템의 문제라는 이야기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무능하다는 건 사전 그대로 능력이 없음을 말한다. 능력이 없다는 것은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무능하다고 한다.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을 때 우리는 개인의 태도를 들여다 보게 된다.
권력을 쥔 자가 아닌 한 인간의 태도로 보건데, 자신을 급박하게 찾을 사람들이 때때로 있고, 국가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는 자는 무능할 수 없다. 그는 말 한마디로 많은 것을 결정할 수 있고 국가를 움직일 수 있다. 말 실수로 외교의 단절을 가져올 수 있고, 말 한 마디로 한 사람의 밥줄을 끊을 수 있다.
그가 탄핵된 이후, 우리는 그가 얼마나 많은 그의 능력을 발휘해 왔는지 보았다. 그는 공무원 한 사람의 생계를 끊었고,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검사를 밀쳐냈으며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의 생계를 끊었다.
그의 썰렁한 농담에도 수많은 고관대작들이 배를 잡고 웃었으며, 그의 결정으로 개성공단의 수많은 이들이 길바닥에 나와 물건을 팔았다. 아직도 그들이 놓고 온 물건과 집기는 개성에 남아있다.
그는 무능하지 않다. 누가 그를 무능하다 하는가. 그는 유능했다. 자신의 권력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모든 권력을 총동원해 스스로의 보위를 지켰다.
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룰 줄 알았기 때문에, 이전의 대통령들은 할 수 있어도 하지 못했던 권력을 휘두를 줄 알았기 때문에, 그의 수하에 있던 이들은 감히, 잠에서 깨지 못하는 그의 침실문을 박차고 들어가지 못했고, 감히, 그에게 말로 설명하지 못했으며, 감히, 그에게 배가 모두 침몰했다고, 아이들이 죽을 것 같다고, 아무도 살아나오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하지 못해서, 감히, 그에게 자신의 판단을 말했다가 “나쁜 사람”이 되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할 무능한 인간이 될까 두려워서, 배가 뒤집어지는 그 장면을 보면서도 영상을 찍고, 전화를 하고, 보고서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결단코, 박근혜의 무능때문이 아니다.
그는 유능했다. 오로지 그 자신에게만.
그는 권력이 있었고, 역대 그 어떤 대통령보다 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다만, 오로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썼을 뿐이다.
박근혜의 권력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했다.
이명박의 권력이 오로지 자신의 돈을 위해 존재했듯이.
1.
엄마, 신이 인간을 만든 게 아니고,
인간이 신을 만든 게 아닐까?
– 그거 니가 몇 년전에도 물어봤던 거야.
그때도 엄마가 그런 거 같다고 했었어.
그랬나?
– 어.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까. 이 풍진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왜 이따위로 살아야 하는지, 왜 계속 싸워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까.
신이 있다고, 불가항력이라고, 내가 범접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믿어버리면 그때부터 모든 삶은 심플해진다.
이것이 내 팔자라고, 사주가 그렇더라고.
그렇게 믿어버리면 안간힘을 써도 안되는 일에 관해,
알 수 없는 우주의 기운을 믿어버리면,
내 인생이 그닥 쓰레기같지 않게 느껴지니까.
내 삶의 모든 노력이 공허하게 부정당하지 않는 기분이 드니까.
2.
다음 주에 끝나는 종로구 모처의 노인글쓰기 수업의 참여자들은 중산층 이상, 대다수 연금생활자로 보인다.
그 격차는 있겠으나, 대체적으로 고학력자들이고 글솜씨가 매우 빼어나다.
직접 한글파일에 사진을 붙이고 사진에 캡션을 붙이는 70대가 있다. 반포주공아파트가 천 만원일 때, 아파트를 사지 않고 카메라를 샀다는 노인이 있다. 평생 공직에 있어서 인생이 참 무료했고 오만하게 살았다고 고백하기도 하며, 개인의 모든 울분을 사회적 문제와 정치이슈로 간단하게 치환해버리는 수구전통의 성향을 가진 분이 거침없이 박근혜는 자결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남편이 은행원이었고 나중에 회계사가 되었는데도 사는 게 늘 가난했다고 고백한 77세 여성노인이 있었다. 모두들 은행원 월급이 썩 괜찮은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반문했고, 그녀가 혹시 사치를 한 건 아닌지, 욕심이 많았던 건 아닌지 의심하는 질문이 오갔다. 77세의 곱상한 이 할매는 성격이 명랑하고 장난기도 많아 뒤에서 보고 있으면 중학교 2학년 응원단장 같다. 사람들의 질문에 토라진 할매에게 다가가, 남편이 자수성가했고 줄줄이 동생들 공납금을 대셨다는 얘기를 들으니 무슨 사정인지 알 거 같다고 말을 걸었다.
저는 그거 이해해요. 밑빠진 독에 물 붓기죠. 라고 웃었더니,
육남매의 외아들이고 혼자 공부한 남편이었다며 자기도 육남매의 맏딸이었다고 했다.
이 나라에서 개천에서 난 용은, 그 개천의 장력에 의해 이무기로 생을 마감하기 마련이다. 집집마다 개천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하늘로 승천하지도 못한 채, 가시나무 가지에 걸려 억울하게 뜬 눈으로 소멸되는 삶이 있다.
줄줄이 매달리는 동생들의 공납금을 대고, 병든 가족의 병원비와 약값을 대고, 집집마다 있는 화상들의 사고를 치닥거리 하다가 지쳐 나가떨어졌던 사람들이, 왜 국가의 의무에 대해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나, 이해하고 싶어졌다.
복지관 뒤에 아파트에 혼자 사는 영감님은 월 300만원 정도 되는 연금을 받아 살고, 막내딸은 미국에서 박사과정 공부중이라 했다.
3.
큰 아들이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보증사기를 당하고 갑자기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한 상태로 1년이 흘러가, 며느리와 교대로 아들을 돌보는 84세의 노인은 월 40만원으로 살고 있다. 쓰러진 아들이 빚을 내어 구해준 전세집의 보증금이 5천만원이 넘고, 연락이 끊긴 둘째 아들도 호적에 올라 있어 아무 혜택을 받지 못하지만, 그래도 복지관에 나오면 시름을 잊는다고 고백했었다.
평생을 비정규 공무원으로 일했던 78세 노인은 부인을 일찍 여의고 딸들은 가난하고 아들은 소식을 모른다. 복지관 청소를 하며 노인사회활동 급여로 월 20만원을 받고, 노령연금 20만원도 받는데, 매달 월세가 22만원이다. 12월부터 2월까지는 노인사회활동이 중단되어 다음 달 월세를 내기 어렵다고 주거비 지원을 요청했다고, 복지사가 전했었다.
지난 달에 만난 노인들의 이야기다.
그 이전에는 쪽방촌에 사는 노인들을 만났고, 작년 겨울에는 쪽방촌의 작은장례에 갔다. 발이 없는 노인이 문상을 왔다. 그는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지하 장례식장으로 들어서 슬리퍼를 벗고 고인에게 절을 했다. 고인과 그는 지나가다 몇 번 본, 이웃이다.
나는 수업 중에 노인들이 하는 말을 기록하다가
“왜 노인들의 빈부격차가 이리도 큰가” 라고 적었다.
그리고 10초쯤 쉬었다가 바로 아랫줄에
늙으나, 젊으나 매한가지. 라고 덧붙였다.
4.
파업과 철야농성중에도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더라는 전설같은 사내가 환갑을 넘기고도 여전히 뽀얀 얼굴로 매일 TV에 나와 조근조근 말을 한다. 이제 그는 원했던 원치 않았던, 사람들이 그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난세의 영웅을 바란다.
그 방송국에서 하는 예능프로에 “운이 좋아 노래로 먹고 살게 되었다”는 빼어난 미모의 여가수가 나와 말한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건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의 꿈이 부정당하는 말과 같으니까. 그 사람이 간절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간절히 원했던 게 무엇일까.
그녀의 말과 달리, 사실 나는 아무 것도 간절히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간절히 원했던 건 살아남는 거였다.
폭탄이 빗발치는 전쟁터, 지뢰가 터지는 언덕을 넘어 까닥하면 온 몸이 터져버릴 지도 모르는 순간마다, 그저 살아남기를, 그저 별 일 없기를 바랐는지도.
5.
일찍 세상을 떠난 막내삼촌은, 1951년 1월 1일 생이었다. 천하에 불운한 팔자라고들 했다. 남들의 말처럼 삼촌은 자기 능력을 단 한번도 발휘하지 못하고 바다 건너에서 위암으로 일찍 갔다. 문득 삼촌 생각이 났다.
미국의 오바마 케어가 사라질 거라 한다. 나는 다시 아버지의 약을 부쳐야 할 것이다.
모두들 살아남고자 한다.
조금 더 근사한 모습으로 살길, 조금 더 의연한 모습으로 죽길.
올 겨울은 박근혜탄핵을 돕는 우주의 기운 때문인가 뜨듯한 겨울이다. 몸이 많이 피곤한데, 사람들의 상처가 자꾸 혓바늘처럼 입속에 맴돈다.
광화문을 지나 사직공원쪽으로 올라가면 배화여대로 올라갈 수 있다. 서울의 중심인 광화문과 경복궁을 지나 사직공원 옆 사직파출소부터 이어지는 곳은 서촌이라 부른다. 조선의 임진왜란 이후 관청이 모여있던 이 곳에 민간인들이 살기 시작했고 1930년대부터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오늘날 서촌에는 각종 단체들이 모여있다. 환경연합과 참여연대를 비롯해 크고 작은 시민단체들이 모여 있다. 세종음식문화의 거리가 시작하는 지점에 아담한 건물 2층에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이 자리를 잡고 있다.
2009년 4월 풀뿌리공제운동연구소가 한국 상조사업의 현황과 대안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며 상조사업의 현황을 점검했다. 동년 9월에 한겨레신문사와 풀뿌리공제운동연구소가 공제조합 운동을 함께 하기로 결의하고 각 지역 주민운동, 협동조합운동, 시민사회운동가들이 모여 한겨레두레공제조합 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
우리의 고유 관혼상제 문화 중 공동체정신이 있는 두레와 품앗이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 형태를 찾다보니 그 중 하나가 장례문화였고 그 어떤 문화유산보다 가장 빠르게 상업화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합원 가족들의 상장례를 함께 준비하려고 출발한 한겨레두레공제조합은 조합원을 모집하던 중 장사서비스 제공에 심각한 문제점을 발견한다. 뒷돈거래, 폭리구조를 파악하고 이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다시 공력을 들인다. 2010년 가을, 한겨레두레공제조합은 뒷돈거래와 폭리가 없는 장사서비스 제공 시스템을 구축하고 다시 조합원 모집을 시작한다. 이후 법인 설립을 놓고 치열한 논의를 거쳐 한겨레두레공제조합은 상포계를 중심으로 한겨레두레협동조합으로 등록하기에 이른다.
당시 한겨레두레공제조합은 생협으로 인가신청을 하였는데 생협법상 사업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청이 반려된다. 2012년 12월 1일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되면서 그제서야 한겨레두레공제조합은 “협동조합”의 형태로 사업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죽음의 존엄함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다.
1997년 구제금융 이후 경제적 곤궁함은 인간의 존엄성마저 훼손했다. 산 자의 삶이 가치를 잃는 순간 죽은 자의 가는 길은 더없이 쓸쓸해졌다. 가족형태가 변형되고 구성원이 줄어들고 집안과 가족의 일도 자본에 넘겼다. 상장례를 도맡아 하는 업체가 등장하면서 죽음은 집 밖으로 몰려났다. 건강보험의 혜택으로 병원문턱이 낮아지면서 사람들은 끝까지 죽음과 싸워 이기려는 투쟁을 시작했다. 많은 삶이 병원에서 사라졌다. 살기 위해 가는 곳도 병원이지만 죽기 위해 가는 곳도 병원이 되었다. 병원은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곳을 넘어서 상장례를 치르기 위한 외부기관이 되었다. 집안에서 상장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장례는 사업이 되었고 자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한 뒷돈거래와 과다한 비용의 청구로 장례식은 계산서와 영수증으로 점철되고 고인에 대한 애도는 온데간데없다. 장례식을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밀려드는 문상객과 습관처럼 인사하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례식장에 보이지 않는 바가지를 물리치기 위해서이니.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서울조합 사무실을 처음 찾은 것은 2015년 여름이었다. 아담한 건물의 2층에 위치한 사무실은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서울조합과 연합회가 같이 사용하는 공동사무국이다. 연합회 상근직과 서울조합 상근직이 함께 사무실을 공유하며 서로 협력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각 지역별 조합이 있고 각 지역조합들이 결합하여 연합회를 구축한다. 연합회에서는 전체 조합의 사무를 관장하고 각 조합의 총무부문을 정리한다. 각 지역조합은 지역마다 자생적으로 구축된 조합이 있기도 하고 정관과 규정에 따라 새로 조합이 구성되기도 한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지난 3년간 조직의 체계를 갖추는데 집중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총괄상임이사 김경환 씨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협동조합이 한국에서 성공하고 자리잡는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외부의 목소리를 익히 들었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활동가들과 80년대 민주화세대들이 주축이 된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당연히 갈등과 반목이 반복되는 일이 끊임없는 게 당연하다고 평가한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을 주목한 것은 24%의 기적이라는 협동조합의 사회적 역할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조합원들만의 이익을 도모하는 공제조합의 성격을 갖추기만 해도 되는데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이념을 관철하고 죽음의 가치를 재고하기 위해 사회공헌의 장치를 찾아냈다.
▲ 한겨레두레 겨울 워크숍
죽음의 가치를 통해 삶을 다시 보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조합원은 초기 출자금과 매달 조합비를 낸다. 이 조합비중의 24%를 별도로 모아 사회공헌에 사용하는데 2013년부터 종로구 마을주민제안사업의 일환으로 무연고노인의 결연장례를 몇 개 단체와 함께 진행했다. 법무법인, 사회단체, 비영리단체들을 규합하고 마을주민들과 협력사업으로 무연고노인이 많이 살고 있는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의 거주민들을 대상으로 장례 결연을 맺었다. 종로구 돈의동은 일제강점기에 집창촌으로 조성된 지역이다. 이후 1968년 나비작전이라는 집창촌 철거 계획에 따라 집창촌은 모두 사라졌고 대신 성매매가 이루어지던 공간에 하루 벌어 하루를 버티는 사람들의 일세방이 생겨났다. 이 지역은 현재까지도 한 평남짓한 공간에 인생을 맡기는 여러 사연들이 모여 산다. 돈의동 103번지 일대는 노인들이 모이는 파고다공원일대부터 헐리우드 극장까지를 말한다. 서울 한 복판에 대규모 쪽방촌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거니와 그들의 삶은 있어도 없는 것으로 치부되다가 결국 마지막 가는 길도 “처리”가 된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서울조합은 지역 공동체의 회복과 삶의 가치를 회복하는 방법에 고심하다 돈의동 쪽방촌에서 죽음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계기를 찾게 된다.
2015년에 급부상한 키워드는 고독사다. 그 이전에 고독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술인들의 고독사가 사회적 이슈로 떠올라 예술인보호법이 생겨나기도 했다. 사회의 사람다움을 측정할 수 있는 지표가 있다면 그것은 그 사회가 죽음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 있다. 도시의 인간성을 알아보려면 그 도시의 고양이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라는 말이 있다. 길고양이에게 친절한 사람들이 사는 도시는 인간도 당연히 존중하는 문화가 남아 있다. 한 사람의 삶이 사라지는 죽음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우리 사회는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죽음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이나 인간 본성의 가치회복, 삶의 목적 따위는 차치하고, 죽음에 대한 예를 어찌 갖추는가도 이 사회의 인간성을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
늘어나는 고독사는 멀리 있지 않았다. 골목 곳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간간히 뉴스에 등장했다. 심지어 한 건물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던 건물주 노인이 혼자 지내던 방에서 죽은 지 오래되어 발견되었고, 한 가족이 집단으로 자살하는 경우 등 사회에 이슈가 되는 뉴스거리 외에도 이름은 있으나 기억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홀로 죽어간다.
한 때 우리는 죽음의 예를 “축제”에 빗대어 부르기도 했고, 살만큼 살고 여한 없이 떠난다며 호상이라는 단어도 붙였다. 노령인구가 급속하게 늘어나면서 이제 이 사회는 더 이상 “장수”를 미덕으로 여기지 않는다. 정치도, 행정도, 장수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이제 정치와 행정에서의 장수는 골치 아픈 일이 되어간다. 환영받지 못하는 노령인구는 밀려 밀려 혼자 죽어간다. 골목에서 아무도 모른 채, 옆집에 누가 사는지 인사 한 번 제대로 못한 채, 사라진다. 이 사람들이 떠나고 난 자리에 남은 흔적을 지우는 업체가 있고, 그들의 물건을 수습하는 유품정리업체가 있다. 모든 것은 자본이 대신한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 그들의 죽음을 정리할 수 없다면 모여 있는 곳부터 파고 들 수 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서울조합은 같은 지역에 속한 종로구 돈의동을 찾았다. 돈의동의 복지를 책임지는 사랑의 쉼터 복지관과 종로1·2·3·4가동 담당 공무원과 장례결연을 맺을 대상을 우선 선정했다. 장례결연이란, 혼자 사는 쪽방촌의 무연고 노인이 이 세상과 이별할 때, 그들의 장례를 대신해주기로 약속하는 것이다. 쪽방촌에 사는 사람이라고 가족이 전혀 없지 않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연락이 끊겼고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거나 가족과 연락이 닿아도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이들은 무연고자가 된다. 무연고자의 죽음은 기억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
돈의동과 같은 빈곤지역에서 사망자가 발생하면 복지관이나 담당공무원을 통해 일단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된다. 연고자를 찾을 수 있도록 기다리는 시간은 48시간이 된다.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이들의 시신은 직장(直葬)처리된다. 바로 장사를 지낸다는 것이다. 상례가 없이, 즉 장례식이 없이 바로 화장장으로 가게 된다. 사망진단서를 끊고 사망자에 대한 행정 처리를 하고 서울시시설관리공단에서 운영하는 화장장으로 간다. 시신운송 차량은 버스 기사 1인이 운전한다. 동행자는 없다. 이들의 시신이 화장장에 도착하면 바로 화장하고, 유골은 “처리”된다.
이 시대 대다수 사람들은 병원에서 죽어 병원에서 장례를 치른다. 장례를 치르기 전에 의사와 의료행위에 대한 합의를 가족들이 하게 된다. 사망이 확인되면 그 때부터 상례 절차가 시작된다. 상조 회사를 부르고 병원 장례식장을 예약한다. 사망한 병원과 장례식장이 상이한 경우 정복을 입은 장례식장 관계자가 나와 시신을 운송한다. 가족들은 상조회사와 각종 계약을 체결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계산이 오고간다. 관은 얼마짜리로 할 것인지, 수의는 무엇으로 할 것인지, 손님접대를 위한 밥상은 얼마짜리를 할 것인지, 가족들은 수도 없이 계속해서 장례지도사와 상례에 대한 비용을 확인한다. 이 과정이 끝나면 그 때부터 문상객이 몰려든다.
돈의동 103번지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만성질환을 앓고 있다. 전쟁고아부터 IMF때 사업이 무너져 생사의 갈림길에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까지.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이 사람들 중 장례결연이 필요한 사람들 중 협동조합에서 약속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선정하여 장례결연을 맺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구술생애사집을 출간하기로 하였다. 서울조합의 사무국장이 이 작업을 맡았고 결연장례 어르신의 집단생애사집에 들어갈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동행했다.
▲ 돈의동 구술생애사 기록과정
돈의동 103번지 골목
여름이었다. 처음 만날 어르신은 두 분이라고 사무국장이 말했다.
종로 3가 파고다공원 뒤로 들어가면 돈의동으로 향하는 길이 있다. 파고다공원의 담벼락엔 대낮부터 만취한 사람들이 등을 기대고 있거나 장기를 두기도 한다. 돈의동에 사는 사람도 돈의동에 살지 않는 사람도 여기서 낮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한 여름, 비지땀을 흘리며 사무국장이 커다란 검은 봉투를 들고 사랑의 쉼터 사무실로 들어왔다. 인터뷰를 할 어르신들에게 선물을 드려야 하는데 사무국장이 사는 동네의 마트가 싸다며 10kg짜리 쌀을 두 포대나 짊어지고 왔다. 사무국장은 남다른 미모의 40대 여성이다.
첫 인터뷰는 사랑의 쉼터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사무국장은 선글라스를 쓴 멋진 차림의 노인에게 원래 고향을 물었다. 전쟁고아인 박노인은 원래 살던 집이 남산동이었으며 폭격을 맞아 집이 날아간 기억이 생생하다고 전했다. 사무국장이 준비한 쌀과 라면, 커피를 전달해드리기 위해 박노인의 쪽방으로 향했다. 멀끔한 춘원당 한의원을 지나면 바로 쪽방촌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있다. 입구부터 지린내가 진동을 했다. 골목 어귀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이 박 노인을 보고 인사했다. 박 노인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그는 없이 살수록 깨끗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평 남짓, 잡다한 물건들이 그득한 방은 나름대로 질서를 갖추고 있었다. 먼지도 별로 없었다. 박노인의 성품은 방에서 모두 드러났다. 허투루 보이지 않으려는 노력, 깨끗하게 정돈하는 습관, 깨끗하게 걸어둔 옷가지 등, 놀라울 정도였다.
박노인과 일별하고 만난 두 번째 결연장례 대상자도 박 씨였다. 이 분은 무연고자의 장례문제에 대해 복지관에 건의를 한 적도 있다. 옆방에 같이 살던 노인을 아버지처럼 오래 모셨다. 그 분이 돌아가시고 나니 장례식도 제대로 치를 수 없이 그저 화장장으로 보내야 했던 일이 잊을 수 없이 가슴 아팠다. 기관과 복지재단의 도움을 받아 돈의동 노인들의 장례를 치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그 바람이 이루어져 기쁘다고 전했다. 기초수급자로 공공근로를 다니면서도 봉사활동을 하고 자기 장례식을 준비하기 위해 미리 상조회사에 가입도 해두었다. 두 번째 박 노인은 봉사활동으로 받은 표창장도 선 보였다.
자칫 잘못하면 뒤로 나가떨어지기 십상인 계단을 오르내리며 참담한 기분이 들었지만 두 분의 태도는 예상보다 훨씬 긍정적이었다. 방안에 앉아 있으니 땀이 줄줄 흘렀다. 7월이었다. 두 분과 함께 불고기 백반을 먹고 헤어졌다. 한겨레두레의 사무국장은 두 분에게 엔딩노트를 보여드렸다.
“어르신들 돌아가시면 원하시는 게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 내용을 여기 적어서 방에 잘 보이는 데에 걸어두시면 저희가 나중에 와서 어르신 필요하신 거, 왔으면 좋겠는 사람, 연락해서 장례를 치러드릴 거예요.”
본인의 장례에 대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풀어내는 사무국장도, 그 얘기를 듣고도 좋게 고개를 끄덕이는 두 분의 모습은 매우 낯설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처음 만났다.
IMF때 사업에 실패하고 돈의동에 들어온 지 얼마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황 씨 어르신, 열여섯에 팔려가듯 시집을 갔다가 쫓겨나 식당일을 전전하며 모은 돈을 사기 맞아 돈의동에 들어온 신 씨 어르신, 전쟁 때 가족을 잃고 평생 종로구를 떠돌았다는 강 씨 어르신을 만났다. 가정불화로 평생을 방황하다 노동으로 생계를 잇던 홍 씨는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 부상을 입었는데 병원비를 낼 돈이 없었다. 카드깡으로 급한 치료비를 메꿔보려다가 불법업체에게 사기를 당해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그는 쪽방에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달랬는데 그 솜씨가 보통이 넘었다. 가장 젊은 안 씨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가 집을 떠나며 친척집을 전전하다 이런 저런 기술을 배우며 열심히 살았으나 어느 순간 알콜중독자가 되어 중환자실에서 다시 살아보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미 간경화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결연장례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돈의동 103번지를 아우르는 종로1·2·3·4가 주민센터의 공무원들은 돈의동 골목을 지날 때 주민들과 일일이 인사를 했다. 사랑의 쉼터 복지사와 사무국장은 이웃처럼 지내는 모습도 보았다. 그래도 생각보다 절망적이지 않다거나, 나름대로 살만하다고 평가할 수 없다. 내가 마주친 돈의동 103번지의 주민과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은 매일 매일 애쓰며 살아야 한다. 나는 그저 그 곳을 지나친 이방인에 불과하며, 이방인이 보는 시선은 짧고 얕다. 그들은 때때로 배를 곪는 게 차라리 편리하여 평소에 많이 먹지 않는 습관을 들이고, 병원에 실려 가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 하며, 작은 일거리라도 끊이지 않기 위해 성실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오랫동안 몸에 익은 여러 가지 낡은 버릇들을 버리기 위해 오랜 시간 자기 자신과 싸워왔고, 지나간 날을 들추는 고통을 잊기 위해 주어진 하루에 충실하다. 통풍이 되는 창문이 있다는 것에 행복해 한들, 삶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언제 쓰러져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자신의 불안한 미래에 대해서 덤덤해 지기 위해 이를 악물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삼켜야 했을지, 나는 감히 짐작할 수 없다. 돈의동 103번지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성품이나 기질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아파도, 슬퍼도, 하물며 죽어도, 연락할 곳이 없다는 것. 무연고이다. 내가 그들을 “우리”라고 칭할 수 없다면 나는 “그들”의 삶의 곤고함을 이해할 수 없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사는 삶이 결국 무연고로 이어지고 영결식이나 장례식도 없이 “처리”되는 죽음으로 마무리 된다면. 우리는 모두 가족을 가져야만 온당한가. 질문이 생겼다.
▲ 한겨레두레협동조합과 종로구마을장례지원단의 협업 돈의동 결연장례 증서 전달식
한겨레두레가 지향하는 장례
시대가 변하고 가족의 형태는 변형되었다. 가족이 붕괴하였다고 표현하지 않는 것이 좋다. 가족이란 형태가 가장 이상적인 형태인지도 모를 일이며, 어떤 가족은 폭력적이고, 어떤 가족은 사람의 삶을 더욱 고단하게 한다. 때로 가족제도는 국가가 복지의무를 방임할 기회를 제공한다. 가족이 꼭 정당한지 가족이 꼭 필요한지 알 수 없다.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의 단위로 역사를 차지한지 오래된 형태임은 분명하고, 그로 인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상포계를 서비스한다. 전통한국사회의 두레와 계의 형식을 계속해서 구현하되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상포계이다. 상업적으로 영리를 추구하는 상조 회사는 “상조”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한겨레두레협동조합에서는 상포계가 전통양식에 맞는 말이라 한다. 상포는 상례에 사용되는 천(직물, 삼베)을 서로 추렴하던 계의 형식에서 가져온 말이다.
한겨레두레조합원은 1구좌 (1만원) 이상의 출자금을 내고 매달 3만원의 조합비를 낸다. 이 중 24%가 조합운영비로 사용되는데 조합사무국운영비 외에 사회공헌에 이 비용을 상당 지출한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조합원은 직계가족 만에게 상장례 서비스를 국한하지 않고 친구나 지인의 장례도 주관하도록 돕는다. 장사물품의 목록을 보고 필요한 물품만 구입하게 되며 상장례에 사용되는 물품은 조합에서 직거래를 통해 제공한다. 여타 장례식과 상이한 비용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겨레두레는 장례서비스의 혜택의 폭을 넓히고 궁극적으로 장례를 통한 공동체의 회복을 꿈꾼다. 집장례가 사라진 세상에서 품앗이 마을장례와 작은 장례를 다음 단계로 추진하고 있다. 품앗이 마을장례는 변화되는 가족형태에 맞춰 마을사람들이 함께 장례를 치르는 일이다. 집장례를 하고 싶은 조합원이 있다면 기꺼이 집장례가 가능하도록 함께 준비한다.
실제로 조합원 중 집장례를 치른 조합원이 있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가장 긴 시간을 머물렀던 집에서 장례를 치르고 오래전 풍경처럼 동네 사람들이 들여다보며 서로 위로하고 애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집장례를 추구하기엔 지금 우리의 삶이 모습이 여의치 않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한겨레두레는 품앗이 마을장례를 제안한다. 마을의 공동체 공간을 이용하여 함께 장례를 치르는 것이다. 한겨레두레에서 추진하는 “작은 장례”는 품앗이 마을장례와 상포계를 결합한 형태라 볼 수 있다. 마을회관, 공동체 공간에서 장례를 치르고 이 구조를 행정기관과 협조하여 녹색장례로 추진하는 것이다. 일회용품과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는 장례식의 형태를 바꾸고 수의를 고집하지 않고 생전 본인이 좋아했던 옷으로 대체할 수도 있고, 대규모 장례가 아닌 소규모 장례를 지향하고, 인공장이 아닌 자연장, 산골(散骨: 화장한 유골을 자연에 흩뿌린다는 의미)을 자리 잡고자 한다. 수목장의 형태는 또 다른 상업화를 낳아 현재 전국 도처에 무허가 수목장 난립이 이루어지고 있다.
시대가 그러하다.
어떤 움직임만 있어도 촘촘히 돈 벌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두뇌를 가진 게 현대인들이다. 틈새시장, 벤치마킹이라는 단어가 자리를 잡은 이후 어떤 분야도 물질이 틈타지 못할 곳이 없다. 작은 장례가 자리를 잡게 되고 보편화되면 그 때 또 어떤 산업이 밀려올지도 모른다. 이를 지켜나가는 것은 하나의 신념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의 가치와 그 가치를 지켜나가려는 조합원들의 굳건한 협동과 신뢰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2015년 말, 돈의동 103번지의 결연장례 주민들과 결연장례 전달식을 가졌다. 종로1,2,3,4가 주민센터의 행정공무원들과 돈의동 사랑의 쉼터 실무자들, 종로구 마을장례지원단의 각 단체와 법률자문을 맡은 법무법인 명륜의 변호사, 돈의동 자원봉사센터와 적십자 병원에서도 참여했다. 결연장례를 맺은 10명의 돈의동 주민들 중 어떤 이는 자신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다는 생각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고맙다는 인사를 진심으로 전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연고가 없는 이들의 마지막 길을 약속해준다니 고맙다.”고 명료하게 말했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이익을 우선시할 필요가 있다. 대의와 사회공헌을 위해 구성원의 희생을 마냥 강조할 수 없다. 조합원이 직접적으로 혜택을 받을 이익을 놓치지 않고 조금씩 추렴하여 사회에 공헌하는 형태가 가장 이상적인 협동조합의 형태라면,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이 바로 그 모범사례라 할 수 있다. 1년간 지켜본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행보는 의미심장했다. 이 사람들이 무언가 작은 바람을 일으켜 언젠가 거대한 물결이 된다면, 세상은 분명 더 따듯해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의 선한 마음에 축복을 기원한다.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를 잃고 난 다음날부터 애도일기를 썼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에게 애도가 얼마나 필요한 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르트의 애도일기는 일반 노트를 사등분해서 만든 쪽지 위에, 주로 잉크로 때로는 연필로 일기를 써 나갔다. 그의 책상 위에는 이 쪽지들을 담은 케이스가 항상 놓여 있었다.’ 바르트의 애도일기는 현대저작물 기록 보존소에 보관되어 있었다. 나탈리 레제와 베르나르 코망의 공동작업으로 쪽지는 원고가 되어 책으로 나왔다. 한국에는 웅진출판사에서 2012년에 책으로 냈다.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내 무심결에 펼친 페이지에는 이런 글이 있었다.
▲ 12.9.애도: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 그 어떤 방어수단도 없는 상황.
28일 오후에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의 고장난 안전문을 고치던 청년이 열차와 스크린도어 사이에 끼어 숨졌다. 토요일 저녁에 혼자 작업했다. 2인 1조를 지키라는 매뉴얼은 애초에 직원이 없어 지킬 수 없었다. 공사시간동안 열차운행은 쉬지 않았다.
5월 30일 SNS에는 사망한 김 씨의 유품사진이 공개되었다.
▲ 사망한 김씨의 가방에서 나온 유품. 그는 19살 생일을 하루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SNS에는 사람들이 고인의 가방 속 유품 사진을 공유하며 분노하고 한탄했다. 가방 안에서 포장을 뜯지 않은 컵라면과 편의점에서 주는 나무젓가락, 집에서 가져왔을 숟가락이 나왔다. 지금 사람들이 애도하는 방식이다. 언제부턴가 이 나라의 애도엔 분노와 한탄, 자조가 뒤섞였다. 지하철 구의역에는 추모 쪽지가 붙기도 했고 국화도 놓였으나 이내 메트로 직원들에 의해 수거되었다고 한다.
2015년 8월에는 지하철 2호선 강남역에서, 2014년 4월에는 독산역에서, 2013년 1월엔 지하철 2호선 성수역에서 같은 사고로 작업자가 죽었다. 30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는 서울메트로노조 오선근 안전위원이 인터뷰를 통해 여태까지의 사고는 모두 2호선에서만 일어났고 그 외 스크린도어에 관련된 사고 모두 서울지하철 1호선에서 4호선사이에서만 일어났다고 말했다.
지난 봄, 내가 사는 아파트엔 외벽 도색작업이 있었다. 도색작업이 있을 예정이니 창문을 닫고 커텐을 치라는 방송이 있었다. 외벽 도색작업은 기가 막혔다. 아래는 화단 그대로, 맨 땅에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었다. 작업자는 줄 두 개에 매달려 12층부터 페인트칠을 하고 있었다. 관리사무실에 전화해 안전장치에 대해 물었다. 한참을 기다려 받은 대답은 이런 거였다.
아파트 주민협의체 (대부분 입주자대표회의다)에서 관리사무실에 외벽도색을 진행하도록 하고 관리업체는 건설사에 외벽도색을 의뢰하고 건설사는 하청업체에 도색작업을 의뢰하고 하청업체는 작업자를 찾아 외벽도색이 이루어진다. 관리사무소 직원은 맥 없는 목소리로 민원이 있었다고 말해보겠노라 했다. 입주자에서 관리업체, 건설사, 하청업체를 건너는 사이 도색작업은 끝이 났다.
지하철안전문공사도 비슷한 과정이 있다. 고장이 난 문이 있고, 지하철공사가 있고, 서울시가 있고, 안전문 설치업체가 있고 하청업체가 있고 비정규직과 계약직 노동자가 있다. 입찰가격에 10%을 깎아야 하는 암묵적인 룰이 있고, 예산을 줄이기 위해 더 싸고 더 빠른 업체를 찾고 업체들은 수익을 내기 위해 안전비용을 삭감하는 사이. 사람이 죽고 다친다.
주목할 것은, 애도의 물결이다. 이제 사람들은 잊지 않고 저 고매한 철학자가 했던 것처럼 쪽지에 애도의 글을 적는다. 사고 현장을 찾고, 기억하기 위한 물품을 만들어 몸에 지닌다. 온라인에는 추모공간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항의한다. 타인의 고통에 더욱 공감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 성숙의 결과일까 의심한다. 함께 분노한다는 것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무고한 죽음이 사람들의 삶 가까이 다가온다. 옆 사람의 숨결처럼, 고인의 슬픔이 내 품안에 들어선다는 건, 모두들 견디고 있다는 얘기다.
견디는 자들이 한데 모여 나의 팔을 엇갈리게 뻗어 옆 사람의 손을 잡아야, 대오는 단단해진다. 한 사람의 죽음이 씨앗이 되어 세상으로 흩어질 때, 영혼이 세포가 되어 공기를 떠돌 때, 우리는 옆 사람의 손을 꽉 잡고 걸어야 한다.
책이 된 《애도일기》의 해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번역이 끝났어도 여전히 번역이 안 된 채로 마음 안에 남아 있는 단어 하나가 있다. ‘슬픔’이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시대의 슬픔은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살아 남는 한 이 슬픔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이 해야 할 추모는 기억하고 따져보는 것이다. 애가 닳도록 쓰리고 아파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가야 할 곳은 더 이상의 희생자를 만들지 않겠다는 마음을 모으는 일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죽음이 가야 할 곳은 “기억했다”는 기념비 앞이다. 떳떳하게 죽기 위해 오늘을 견디는 모두에게 더 나은 내일이 있길 소망한다.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강남역은 서울시 강남구와 서초구의 경계에 걸쳐 있다.
강남대로와 테헤란로가 맞닿는 곳에 강남역이 있다. 강남대로 동쪽은 강남구 역삼1동, 강남대로 서쪽은 서초구 서초 4동이 된다. 강남역 1,2,3,4,11,12번 출구는 강남구이고 마주보는 강남역 5,6,7,8,9,10번 출구는 서초구가 된다. 서울시 통계(2012년부터 2015년 통계의 평균치)에 따르면 강남역 9번 출구 주변 일 평균 유동인구는 17,334명, 저녁평균 유동인구는 6,646명이다.
▲ 23일 월요일 정오. 추모메세지는 서울시 여성재단으로 옮긴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잘 알려진대로
2016년 5월 17일 오전 1시 7분쯤, 강남역과 신논현역 중간지점 번화가의 한 프랜차이즈 노래방 공용화장실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이 노래방은 90년대에 여타노래방과 차별화된 “편안한 럭셔리”컨셉의 인테리어와 서비스로 각광을 받은 곳으로 현재 전국 23곳의 체인점이 있다. 다른 노래방보다 입구와 간판, 외부벽면까지 무척 밝고 깨끗한 느낌이며 조도도 상당히 높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당일 피해자는 강남역 인근 1층 주점에서 지인들과 술을 마시다 이 노래방의 화장실을 이용했다고 한다. 주변 건물 중 조명이 상당히 밝은 편이라 아무도 이런 극악무도한 범죄를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골목은 밤이 되면 술집과 식당의 불이 켜지지만 근처엔 일반 상점과 대형 옷가게, 사무용 빌딩, 어학원과 취업준비 학원이 강남대로를 따라 늘어서 있다. 월요일에서 화요일이 되는 밤은 한산하지도 않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점은 서울시 유동인구 조사보고서의 조사지점인데 주중 평균 하루 11,278명, 저녁에만 2,242명이 오가는 것으로 밝혀진 곳이다. 서울시 평균치의 세 배를 훨씬 웃돈다.
5월 17일 오전 서초경찰서 강력3팀은 사건발생 9시간 만에 피의자를 긴급체포했고 보도자료를 통해 이 사건을 발표했다. 피의자는 화장실 안에 숨어 6명의 남자가 화장실을 사용하는 1시간 30분을 기다려 일면식도 없는 피해자 여성을 흉기로 공격해 숨지게 했다. 17일 오후 온라인에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까페가 개설되었고 시민자발적인 추모행사가 제안되었다. 국화꽃 한 송이와 추모메시지든 추모객들이 17일 밤부터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여들었다. 주말 21일엔 사건장소를 한 바퀴 돌고 오는 추모행사가 있었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강남역 10번 출구에 포스트잇에 추모메세지를 적고 헌화를 하는 추모의식을 가졌다. 24일 화요일에 비 예보가 있어 추모현장을 지키던 자원봉사자들이 23일 새벽부터 이를 수거하기 시작했다. 추모메세지를 담은 쪽지들은 서초구청과 서울시로 옮겨졌다. 일단 서울시민청에서 24일 화요일부터 피해자를 위한 추모공간을 운영한다. 동작구 대방동 서울시 여성가족재단의 여성플라자 1층엔 추모공간에 있던 메시지를 영구 보관하는 추모공간을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23일 오후 여성가족재단에 확인한 결과 공간을 마련해놓고 추모쪽지를 기다리고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 여혐을 혐오하는 여성들이 여중생을 폭행했다는 피켓을 든 남성이 서 있었다. 지나가는 시민들은 고요히 피켓과 1인 시위자를 번갈아 보며 한참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
살인의 소비
“강남역 묻지마 살인”이라는 제목으로 언론이 이 소식을 쏟아냈다. 종편방송은 사건현장이 수습되는 모습까지 내보냈다. 오열하는 피해자의 남자친구의 모습도 전파를 탔다. 이 화면은 유투브에도 게시되었다. 일부 언론은 피의자가 신학대학생이었으며 불우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는 제목을 달아 뭇매를 맞았다.
서울의 최고 번화가라 할 수 있는 밝은 곳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여론은 여성혐오냐 정신질환자의 범죄인가를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진보 페미니즘 커뮤니티로 알려진 메갈리아와 메르스갤러리엔 여성혐오에 대한 고백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뒤이어 어느 커뮤니티에도 속하지 않은 여성들이 자기가 겪었던 여성혐오, 여성이라 위험했던 순간을 고백했다. 일베 사이트는 여성혐오 뿐 아니라 강남역 추모를 혐오하는 게시글이 넘쳐났다. 일부 일베 회원은 추모현장 포스트잇 제거나 1인 시위 계획을 게시했고 회원들은 서로 용기를 북돋아주는 모습도 보였다.
18일부터 시작된 추모열기는 주말에 정점을 찍었다. 대로변 전철역 앞은 숙연했으나 그 사이 좋게 보면 열띤 토론이, 나쁘게 보면 분란이 일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낯선 자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그에 대한 반대의견을 전개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휴대전화로 촬영되어 SNS에 올랐다. 때로 경미한 폭행이 일어나거나 야유와 항의도 있었다. 자극적인 모습은 SNS에 게시되어 소비되었다.
온라인 쇼핑몰에는 여성용 호신용품이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가스총이나 스프레이, 호신용경보기나 호신봉부터 주먹에 끼고 상대방을 가격하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너클이라는 용품은 반지형태와 펜던트형태로도 출시되고 있다.
언론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초점에서 벗어나 추모공간과 추모행위로 이동했다. 일베와 매갈리아의 대격돌이라는 이분법적 논쟁과 여혐과 남혐의 충돌이라는 논리도 퍼져나갔다. SNS에는 매일 여혐과 남혐의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 희생자를 추모하는 의미의 흰색과 분홍색이 섞인 리본. 2016년 5월 23일 강남역 10번 출구
인간이란 무엇인가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는 언론에 더 이상 소개되지 않았다. 경찰은 본 사건이 여성혐오범죄보다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에 가깝다고 결론 내렸다.
검찰청 발표 통계자료 (2014)
항목
남성
여성
전체 범죄자수
1,515,159
336,748
전체 피해자수
869,618
443,507
살인 범죄자
866
170
살인 피해자
511
404
성폭력 범죄자
24,710
428
성폭력 피해자
1,375
27,129
정신장애 살인 범죄자
초범 26명
재범 38명
묻지마 살인 건수
2013년 14건
2014년 10건
통계자료는 신고 접수된 사안에 국한되는 맹점이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이후 SNS에는 수없이 많은 여성들의 공포가 나열되었다. 성평등을 저해하는 행위나 사소한 성희롱과 성추행의 가장 큰 문제는 가해자들이 “이것이 범죄”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여자아이들의 치마를 들치는 행위부터, 속옷을 입었냐고 검사하는 중고등학교의 남성교사가 있었다. 여성들의 고백은 이 나라에서는 여성과 남성 모두 성희롱과 성추행에 무덤덤해진 상태로 살아왔다는 걸 드러냈다. 우리의 깊은 치부가 까발려지는 순간이다.
이번 일은 하나의 비극적 사건이 사회적 이슈로 공론화되는 단계를 순차적으로 보여줬다. 사건이 발생했고 순수한 추모가 있었다. 피해자에게 공감하는 사람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는 것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가해자를 옹호하는 자들까지 등장했다. 그 이면에는 그들 역시 “죽을 만큼 살기가 힘들다”고 외치지도 못하는 마음이 보였다. 그러나 어떤 환경적 문제와 개인적 결함도 범죄가 허용되지는 않는다. 지금 우리는 도덕과 윤리가 무엇인지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강남역에서 한 여자가 무고하고 억울하게 죽었다. 범인은 고의적으로 여성을 기다렸고 그는 정신질환이 폭력적으로 발현된 인간이다. 이것이 그저 단순한 살인사건이라거나, 정신질환자의 사회적 방기로 일어난 사건이라거나, 복합적인 성별 불평등에 기인한 사회적 현상이 집약된 사건이라는 의견이 모두 각자의 이해가 될 것이다. 모두의 다양한 의견이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였다.
강남대로와 테헤란로가 만나고, 강남구와 서초구가 만나는 자리에 반목하고 화합하는 사람들이 교차되었고, 혐오와 공감이 한 자리에 있었다. 남성과 여성이, 메갈과 일베가 만났다. 2016년 봄, 지금 이 나라를 지배하는 모든 상반된 정서가 강남역 10번 출구에 응축되어 폭발했다.
한 여성이 무고하게 죽었다. 그녀의 죽음은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반성을 불러냈다. 추모의 기억이 오래 지속되어야 할 까닭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답을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면 길에서 만나는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이 전부일 수도 있다. 누가 누구를 왜 어떻게 죽였는지를 넘어 비극에서 인간이 배워야 할 것은 질문하는 것이다. 무엇이 인간이냐고 끊임없이 질문했던 프리모 레비처럼, 이 비극적인 역사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묻고 되묻는 일 뿐이다.
공감하는 인간은 추모와 애도를 통해 자기치유를 시도하고 상처받은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자 한다. 누군가 이를 조롱하거나 평가하고 규정지을 때, 눌러왔던 분노가 터지곤 한다.
애도가 조롱을 만날 때, 추모가 평가를 받을 때, 투사가 태어나고 전쟁이 시작되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폭풍을 바라보는 사람의 등을 때릴 필요는 없다. 누군가 억울하다고 말할 때는 제발 좀 닥치고 듣자. 타인의 공감과 애도를 평가하지 말자. 나의 사연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듯이 타인의 역사를 내가 강제할 수도 없는 일이다.
세월호 이전과 이후 우리의 삶이 달라졌듯이, 강남역 10번 출구가 성평등의 새로운 출구가 되길 바란다. 한 사람의 죽음이 오래 기억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 어떤 죽음도 오롯이 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 무엇보다 숭고하게 오랫동안 기억되길 바란다.
집을 나서면 삼거리가 있다. 늘 내가 보는 방향에는 오래된 동네서점을 사이에 둔 편의점 사잇길이다. 동네서점은 길거리 모퉁이에 있다. 서점 옆에는 20년은 되었음직한 자전거포가 있다.
이곳으로 이사왔을 때 아이는 다섯 살이었다. 아이는 보조바퀴가 달린 토마스 자전거를 탔다. 1년이 지난 뒤 아이는 보조바퀴를 뗄 수 있게 되었고 우리는 작아진 자전거를 질질 끌고 자전거포에 갔다. 아저씨에게 보조바퀴를 떼 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분홍색 알루미늄 자전거를 그 집에서 샀다. 아저씨는 그 자전거가 얼마나 좋은 건지 유난스럽게 강조했다. 길 건너 자전거전문점에서 샀던 28만원짜리 자전거를 도둑맞고 난 뒤였다. 일곱 살이 된 아이는 더 이상 토마스자전거를 탈 수 없었다. 아이의 키에 맞는 하얀 자전거를 사려고 했더니 아저씨가 토마스자전거를 가져오면 버려주겠다고 했다. 군데 군데 낡은 토마스자전거를 다시 질질 끌고 아저씨에게 갔다. 아저씨는 우리에게 새 자전거를 팔았다. 며칠 뒤 그 자전거포에는 아이가 타던 토마스자전거가 말끔하게 고쳐져 걸려 있었다. 친하게 지내는 동네 언니는 아이의 자전거를 그 집에서 샀는데 녹이 슬어 있었다. 아이 아빠가 자전거포에 가서 아저씨에게 화를 내고 새 자전거로 바꿔왔다. 내 아이의 토마스자전거는 오래도록 팔리지 않았다.
겨울이 지날 때면 자전거는 뻑뻑해졌다. 가슴이 뻑뻑해진 걸 풀려면 자전거도 풀어야 했다. 봄이 되면 아저씨에게 가서 손을 봐달라고 하고 바람을 새로 넣었다. 가끔 미안한 마음에 자물쇠를 하나 더 사기도 했다. 올 봄은 어쩌다보니 온데간데 사라져 자전거를 베란다에 넣어놓고 꺼내지도 않았다. 지난 달 어느 휴일에 아이는 자전거 바람을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전거포 아저씨에게 다녀오라고 했다. 금새 다녀온 아이는 자전거가게가 문을 닫았다고 했다. 아저씨가 문닫는 날이 많아졌다고 생각했다. 한 번 손 봐달라고 해야겠야지, 결심은 굳건하지 않아 미적거리다 5월 말이 되었다.
도서관에 책을 돌려주러 가는 길에 자전거가게 셔터가 닫힌 것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최근 1년 사이에 그 전과 다르게 더러 문이 닫혔던 거 같다. 자전거포는 밖에 자전거를 열 대 정도 세워놓고 몇 대는 걸어놓기 때문에 문을 닫는 일이 여간 성가시지 않을 것이다. 자전거포에 가까이 가자 상중이라는 글자가 쓰인 흰 종이가 붙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아저씨네 누가 돌아가셨나보다. 나는 한 두 걸음 옮기다가 다시 와서 그 글씨가 쓰인 색바랜 셔터가 맘에 들어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저녁으로 냉면을 먹었는데 냉면집에서 녹슨자전거를 사서 남편이 한 판 붙었던, 그 언니를 만났다. 저녁나절 개를 데리고 아파트단지를 휘휘 돌며 전화통화를 했다. 냉면집에서 만난 언니도 어린 개를 데리고 나와 벤치에 같이 앉았다. 한참 다른 얘기를 하다 그 언니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자전거집 아저씨 죽었대.”
지난 주말 자전거포 주인은 응급실에 실려 갔다. 간경화로 고생을 하고 있었고 응급실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우리는 고인이 되어버린 그 아저씨가 낮에도 항상 술에 취해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얼굴이 검게 변한 것도 떠올렸다. 언니는 그냥 햇볕에 그을린 것 같았다고 했고 나는 햇볕에 그을린 피부색과 간이 안 좋은 사람의 낯빛은 다르다고 말했다. 우리는 대낮에 그 자전거포에서 아저씨와 함께 술을 마시던 택시기사가 운전을 해서 가는 걸 보고 어머어머 미쳤나봐 하며 호들갑을 떨었던 걸 기억했다. 자전거를 고치러 갈 때마다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소주를 마시며 티비를 보던 아저씨의 굽은 등을 생각했다.
자전거포 셔터에 붙은 상중이라는 글씨는 본인상을 말하는 것이었다. 상중, 이라는 글자 아래는 자전거 수리 맡기신 분은 연락하라는 전화번호가 따로 적혀 있었다. 사람은 죽었는데 일상은 밀려있다.
아저씨는 외로웠나보다. 좋아하는 술을 마시며 스스로를 서서히 죽인 사람. 가끔 바가지도 씌우던 사람, 거짓말도 하던 사람, 어깃장도 놓고, 허풍도 떨던 사람. 키가 작고 단단했던 사람. 이 동네 사람들은 다 아는 사람. 그냥 그런 사람.
돈의동은 탑골공원의 담벼락을 끼고 돌아 종로 3가에서 5가의 숨은 골목으로 이어지는 주거지역이다. 주소는 돈의동 103번지. 103번지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 한 사람이 산다. 103번지에만 700여명이 산다. 이들은 모두 혼자 산다. 옆 방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고, 삶을 나누며 형제처럼 가족처럼 지내는 이도 더러 있지만 대다수의 주민들은 혼자다. 사람들은 이들을 쪽방촌 홀몸노인, 혹은 독거노인이라고 부른다. 700여 명 중, 노년층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가 노인인 것도 아니다. 103번지의 골목을 오가다 보면 꽤 많은 장년층을 볼 수 있다. 사회적 약자인 청년 장애인도 눈에 띈다.
고독사가 이슈로 부각되며 노인고독사에 대한 이야기가 연일 언론에 오르내렸다. 통계청에 발표에 따르면 2015년 고독사망자 연령비율 1위는 60대 이상 독거노인이 아니라, 50대 남성이었다.
103번지 주민들은 어딘가가 아프다. 젊은 시절 산업재해를 입은 사람, 직업으로 인한 질병을 얻은 사람, 여러 이유로 마음을 다쳐 술로 달래다 몸도 다친 사람, 직업병, 만성질환, 성인병, 신체적 정신적 장애, 이들은 모두 각자 다양한 이유로 아프고 다쳤다.
돈의동 사랑의쉼터 복도에 붙어 있는 돈의동 지도
가족은 인간사회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기초공동체다. 이 기초공동체를 기반으로 사회가 이루어지고 지역과 국가와 이익집단이 탄생한다. 기초공동체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돈의동과 다른 쪽방으로 흩어진다. 이들은 공동체를 이루지 못한 개체가 되어 골목을 떠돈다. 이들은 가난과 굶주림, 추위나 더위 따위의 물리적 환경은 사람이 사람의 손을 잡고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한다.
몇 년 전 노숙자 인문학운동을 하던 이가 했던 말을 잊지 않는다. 노숙자의 공통점이 게으르거나, 술문제가 있거나, 아프기 때문인 거 같냐 물었다. 그는 단호하게 가족이 없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무도 없습니다. 대화를 할 사람도, 없어요.”
돈의동에 사는 사람들도 그러하다. 세상에 가족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태어나고 사람에 의해 길러진다.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려보니 아무도 없는 막막한 어둠, 어쩌겠는가. 그래도 살아야 한다. 돈의동에 모인 사람들은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돈의동 103번지. 2015년 가을촬영
이 돈의동의 복지를 담당하는 것은 종로1,2,3,4가 주민센터와 사랑의쉼터라는 복지관이다. 복지관은 구세군재단이 위탁운영을 한다. 작은 골목의 사이로 허름한 건물이 하나 있다. 지하엔 교육관과 샤워시설이 있고, 1층과 2층엔 휴게공간이 있다. 3층에는 사무실과 상담실이 있다. 이화순소장과, 사무국장과, 복지사 둘이 이 공간에서 업무를 본다. 복지관 쉼터 계단에는 “주폭”에 대한 경고가 여기 저기 붙어 있다. 술을 먹고 난동을 피우는 주민들이 많다. 5년간 일한 복지사는 주민에게 폭행을 당해 상해를 입었다. 그래도 그는 아직 거기 있다. 주민들이나, 주민복지를 책임지는 행정직들도 술 때문에 괴롭다. 술을 마셔서 괴롭고 못 마셔서 괴롭다. 술에 취해서 괴롭고, 술이 안 취해서 괴롭다. 그래도 살아야하니까. 맨 정신에 버틸 수 없는 날이 지속되면 사람들은 술을 마신다. 가난한 자들의 마취제는 화학작용으로 만든 술뿐이다. 소주 한 병 만큼의 위로는 쉬이 다가오지 않는다.
다들 자기 한 몸 누일 쪽방보다 커다란 사연을 품고 산다. 죽이고 달래고 얼러봐도 상처받은 일들은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추운 날 시린 걸음을 걸을 때마다 길모퉁이에서 툭 치고 튀어나오는 고통이 이들을 들볶는다. 사연을 말한들 무슨 소용 있겠냐고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든다. 추운 겨울, 쪽방촌에 죽음이 문을 두드린다. 한 달에 한두 명은 시신이 되어 103번지를 떠난다. 이들은 무연고자다. 공고를 내도 가족을 찾아도, 시신양도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죽음은 무연고 독거자의 시신처리라는 이름을 쓴다. 장례절차 없이 바로 화장장으로 향한다. 죽어 사라질 육신은 모두 마찬가지지만, 이들을 기억하는 103번지의 이웃들은 애도를 표할 방법이 없다. 살아서 한 줌 도움이 못되었다면 가는 길이라도 잘 보내주고 싶은 103번지의 사람들이 있다.
돈의동 쪽방촌의 한 건물. 아래에서 위로 3층까지 주거공간이 있다. 2015년 여름 촬영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죽음의 의식을 개선하는 단체다. 상업주의에 휩쓸려 가정의 대소사도 외주를 주게 된 이 시대에 함께 하는 상포계를 통해 의례의 힘을 확인하고자 한다. 자본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출자금과 조합비를 내고 혈연으로 한정하지 않은 타인의 장례를 준비한다. 그 조합비의 24%중 20%는 조합운영비, 그 중 1%를 공동체 기금으로 조성하고 4%는 연합회 회비로 사용한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야 지속성을 가진다. 무턱대고 사회공헌만 하는 곳은 협동조합보다 사회복지재단이 걸맞다.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모인 협동조합이라면 공동체의 회복에 지출도 할 줄 알아야 한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이 원칙을 지켰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는 상포계를 통해 상장례의식을 전문적으로 다룬다. 자기 분야를 지키며 사회공헌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돈의동 사랑의쉼터와 MOU를 맺었다.
직장으로 처리되는 돈의동 주민들의 장례를 대신해서 치르기로 약속했다. 병원의 영안실이나 상조회사의 식사대접, 화려한 제단과 방문객을 대신해, 이웃들이 죽음의 본질을 생각하며 애도하고 한 번쯤 그를 기억하고, 영정사진을 놓고 잘 가라고 이별의 인사를 건네고, 함께 살던 공간에서 그를 기리는 일,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이 착안한 “작은 장례”이다.
장례의식은 상업적 상조회사의 난립으로 변질되었다.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알고 있는 장례절차는 전통의식과도 다르고 죽음을 대하는 성숙한 자세도 아니다. 상품으로 만들어질 수 있고 계산서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이 남았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작은 장례를 통해 이윤을 창출할 필요가 없다. 그야말로 사회환원이기 때문이다. 2015년 겨울이 깊어갈 때 작은 장례를 약속했다.
2016년 1월에 돈의동에서 사망자가 발생했고 약속한대로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사랑의쉼터와 첫 작은 장례를 준비했다.
좋은 일을 할 때 외부에 얼마나 알려야 하는가에 대해 사람들은 갈등한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서의 가르침 때문인지 좋은 일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불편해한다. 작은 장례를 준비하며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이 보도자료를 배포한 것은 이 사람의 죽음을 한 번쯤 기억해 달라는 의도였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추도식을 취재하겠다는 기자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사무국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슈화되어 이것이 마치 행사처럼 비춰질 때, 가치가 훼손되고 본질이 곡해될까 두려워했다.
돈의동 사랑의쉼터 복지관 앞 2016년 1월 21일 아침
2016년 1월 21일 목요일 아침. 며칠 째 혹한이 몰아치고 있었다. 엘니뇨현상으로 겨울이 따뜻할 거라더니 자연현상은 인간이 예측하기 어렵다는 걸 반증이라도 하듯, 일주일째 영하 10도에서 수은주는 깔짝대기만 했다. 대설이었다. 눈은 내리지 않았다. 겨울철 맑은 하늘은 추위의 상징이다. 하늘이 맑고 햇빛이 쨍쨍했다. 사랑의쉼터 앞에는 카메라와 휴대폰, 수첩을 든 취재진들이 몰려왔다. 이 풍진 세상을 등지고, 가시는 길 평안하길 바란다는 추도사를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김상현 이사장이 읽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이사장과 사랑의쉼터 이화순 소장이 상주가 되었다. 삼베완장을 차고 조문객을 맞았다. 고인을 기억하는 이웃들이 소식을 듣고 와 조문을 했다. 사랑의쉼터 지하 교육장엔 작은 제단이 차려졌다. 고인의 독사진도 없어 주민등록증을 확대해 영정사진을 놓았다. 검소한 꽃바구니 두 개가 제단을 지켰고, 흰 국화와 향, 간소한 제기가 놓였다. 간단한 다과가 한쪽에 차려졌다. 쪽방만한 돗자리에 이웃들이 차례대로 신을 벗고 올라가 고인과 이별했다. 신발을 벗은 맨발을 사진기자가 뒤에서 찍었다. 굳은살만 남은, 한 생명의 삶을 말해주는 발뒤꿈치에 애도가 흘렀다.
동행한 아이가 조문을 했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그에게 소주 한 병의 위로가 되었을까.
적어도 오늘 돈의동을 떠난 고인의 죽음은 여러 경로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여기 한 사람이 힘들게 살았고, 그리고 오늘 이 세상을 떠난다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그를 기억했고, 2천 원짜리 국수를 지하시장에서 먹었다고.
낙원상가 지하시장, 조문객들은 2천원짜리 잔치국수를 나눠먹었다.
몇 사람은 말했다. 나도,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알 수 없는데, 나 가는 길도 저 정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전했다.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은 2년째 결연장례를 약속했다. 가는 길을 약속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집단구술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다. 조합원이 늘어나고 한겨레두레의 공동체기금이 늘어날수록 외로운 죽음이 줄어들 것이다. 누구나 죽는다. 같은 하늘 아래 머리를 내리고, 같은 땅 위에 발 딛고 살던 사람들은 먼저 가는 사람들의 명복을 빌어주고 그의 삶을 기억하고 이별을 슬퍼할 권리가 있다. 사람답게 사는 길 너머에 사람답게 이별하는 의식이 있다. 장례를 통해 삶을 돌아보고 옆에서 울고 있는 사람의 손을 맞잡을 수 있다면,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모르는 차가운 삶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질지도 모른다.
골목에 뒹구는 소주병처럼 깨어지지 말자고, 훈훈하게 덥힌 따뜻한 술이 되어, 고인의 가는 길을 덥히고 싶다.
어머님의 장례식을 치르며 장례식장에서 집에 잠시 들러 내가 부랴부랴 한 일은 집에 와서 기록을 챙기는 일이었다. 2008년부터 시작된 병원순례, 어머님의 마지막 5년은 병원기록으로 남았다.
진료비 영수증, 예약증, 병원을 옮길 때 받았던 의무기록지, 의사의 소견서, CT 촬영 안내문, 영상CD, 혈액검사결과, 임상실험권유안내서, 더 이상 병원에서 해줄 것이 없다고 했을 때 받았던 되의뢰서, 발급기관은 온통 병원이었다. 5년간, 병원수발을 들며 모든 기록을 40페이지짜리 두 개의 클리어파일에 정리했다.
기록을 모아두지 않으면 그 일도 사라지는 것처럼, 마치 없었던 일이 되는 것처럼, 나는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을 붙잡는 심정으로 하나씩 기록을 모았다.
사그라지는 생명이 기록된 영상CD에는 암세포가 동글동글한 모양으로, 하얗게 가득차 있었다. 이제 이 모든 기록이 소용없다는 걸 알게 된 건, 임종 일주일 전이었다.
어머님의 옷가지를 태우며 나는 클리어파일을 통째로 불속에 집어던졌다.
통증도, 고통도, 모두 사라질 것이라 말하며, 남은 진통제도, 진통제패치도, 아미노산도 기록과 함께 불속으로 던져버렸다.
이듬해 아버지의 자서전을 내고 싶다는 한 사람을 만났다. 구남매의 막내라던 그는 자기 아버지를 엄청난 기록광이라고 소개했다. 팔순을 넘긴 아버지의 기록을 그대로 두기 아까워 책으로 묶어 정리하고 싶다는 얘기와 함께 요즘은 아무도 쓰지 않는 흰 편지지를 펼쳐 보였다. 편지지에는 자필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팔순 노인의 글씨가 그득했다. 문서의 제목은 “비망록”이었다. 어떤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적어둔 기록. 비망록.
구남매의 아버지는 전라남도 고흥군 나로도에서 평생을 살았다. 단 한 번도 외지로 나간 적 없고 고흥군 면사무소에 다닌 것이 이력의 전부다. 막내아들은 아버지의 두꺼운 수첩을 하나 가져왔다. 단행본만한 합성피혁 다이어리에 본인의 사주, 조상들의 생몰년도, 제삿날부터 큰 딸의 결혼식 때 지출한 내역과 지난 30년간 자식들이 보내온 용돈과 방문기록까지 꼼꼼히 적혀 있었다. 경기도 남부에서 출발해 전라남도 고흥까지 달려갔다.
1980년대에 지었다는 집은 나로도 바닷가가 내려다보였다. 노인은 멋쩍게 웃으며 별 일도 아닌데 일을 크게 만들었다며 작은 상자를 하나 꺼내보였다. 노인은 1960년대부터 손바닥만 한 농협수첩에 매일 매일 일지를 적었다. 감상은 적었다. 그날 있었던 일을 또박또박 연필로 꼼꼼하게 적었다. 그날 무엇을 샀고 무엇을 팔았고, 몇 째가 서울에서 전화를 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하루도 빠짐이 없었다. 연말이 되면 농협에 가서 수첩을 하나 구해오고 매일 밤 작은 소반을 놓고 앉아 그날의 일을 적은 것이 50여권이 넘었다. 두꺼운 클리어파일에는 신문스크랩, 자식들에 대한 서류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자료는 차고 넘쳤다. 손수 정리해 둔 비망록노트를 기반으로 구술을 받았다. 노인의 듬성듬성한 이야기는 글로 옮겨져 그대로 책이 되었고, 책 뒤편엔 손수 정리한 비망록을 그대로 스캔해서 실었다. 이 분은 스스로 자기 연대기를 표로 만들었는데, 본인의 삶과 지역사건, 국내 사건과 국외사건까지 같이 나란히 들어 있었다.
왜 이렇게 기록을 하셨냐는 질문에 노인은 그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라며 웃었다.
구술을 시작할 때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초연하던 노인의 눈가가 붉어졌다.
“내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였소. 그게 내 한인디, 뱃사람이 아닌디, 배를 하나 인수해서 그 배안에서 하룻녁 주무시던 중에 화물선인가 뭐인가가 충돌해가지고 침몰했지. 지금도 다들 옛날 사진은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어째 우리 아버지는 초상 하나도 없소. 아버지 인상이 어쩌코롬 생겼다 대충 이런 것으로 연상해서 만들수가 있다 하는디 이제 다 끝나버렸지 않소. 이제 끝나부럿어.”
나무처럼 한 곳에서 뿌리내리고 산 노인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서류 한 장 남아있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꾹꾹 눌러쓰는 연필로 이어갈 수 있을까.
“어째 초상하나 안 남기고.”라고 먼 산을 보던 노인의 선한 눈매가 가슴에 박혔다.
고흥에서 돌아와 시댁의 안방을 뒤적거렸다. 1988년부터의 가계부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매일의 기록을 넘겨보다 1995년 7월 손녀, 3.8, 출산 9시, 고대병원. 이라는 기록을 발견했다. 그 아래는 과일 4,000, 차기름 10,000, 과자 1,200, 소주 2,000이라는 그날의 소비가 적혀 있었다. 몇 권의 가계부를 뒤적거리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의 가계부도 있어 꺼내보았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것은 이런 것이었다.
“8월 24일, 장남 가는 날, 어머니와 있다가 병상에 엄마 돈 두고 떠나감. 눈물을 흘리면서 갔다. 아버지 마음 몹시 아프다. 엄마의 가슴에서 손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