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죄

사람이 모르는 게 죄가 아니라고 했던 건, 무학자를 차별하지 말라는 뜻이었을게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공부를 한다는 건 적어도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어야 하고, 공부를 하는 게 필요하다는 각성이 있는 양육자가 붙어있어야 어린 나이에 공부를 할 수 있으니, 이건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불과 30-40년전만 하더라도 저학력이 사회생활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양육자가 적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지금의 4-50대 중년여성들 중 고졸로 직장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대학을 간 여성들도 수두룩하게 많다.

무학이나 저학력의 약점은 고통스럽게 배우고 익혀본 경험이 적어서 배우는 힘이 약한거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고, 공부도 해 본 놈이 잘 한다고, 남들 놀 때 어떻게든 탐구하고 책상에 붙어있어본 자는 일종의 짬밥이 생겨 다음 단계도 거기까지 못 간 사람보다 쉽게 넘어간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학습 숙련도가 높아지니 더 어려운 단계의 공부에도 접근하기 좋아진다. 그러나 학력의 기초단계 – 즉 초등학교 정도 – 에서 문제를 풀기 위해 낑낑대고, 모르는 말의 뜻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물어볼 기회조차 없었던 사람이 더 어려운 공부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런 경우에서나 모르는 게 죄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르는 게 죄가 되는 경우는 권력을 쥐었을 때다.

그 말 한마디로 예산이 바뀌거나 누군가의 일자리가 사라질 때, 그 말 한마디로 다른 사람이 매달 받던 쌀 한 푸대가 두 달에 한 번씩으로 줄어줄 때, 권력자가 모르는 것은 죄가 된다. 책상에 앉아서 보고 싶은 서류나 들여다보고, 제 가족이 분통터졌던 일에 대해서 기관장을 불러서 되려 내가 갑질했냐고 협박이나 일삼는 자나, 나도 학교 다닐 때 국어가 싫었으니 지금도 영 교과과정이 별로일 거라고 확신에 차서 입을 놀리는 자는, 자신의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고 때로는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는 계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권력을 이미 쥐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거침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면 되니까. 갈라치기와 혐오와 차별을 담아 떠들어도 당장 그 불손한 입을 가진 자가 어떻게 되진 않는다. 대중의 분노는 더디게 끓어오른다. 생계가 바쁜 경우도 있고, 그래도 권력자라면 나보다 많이 배웠을테니, 나보다 경험이 많을테니, 나보다 나은 판단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잘 하겠지. 그래도 한 번쯤 믿어주자는 선량한 마음과 귀찮은 마음이 뒤섞인다.

끌려내려오기 전에는 별로 불안감도 없을 것이다. 권력자들의 분노는 가볍고 하찮다.

모르는 게 죄가 되지 않은 경우는 알려고 할 때다.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모르는 것을 묻고, 현장의 소리를 듣고, 혼자 궁리하고,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누군가 크게 소리치면 뛰어나가 물어보면, 모르는 게 죄가 되지 않는다.

결국 태도의 문제다.

모든 정치인이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다. 어쨌거나 그도 사람이고 자기가 경험한 세계가 세상의 전부라는 착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을 쥐었을 때는 모르는 것을 자랑스럽게 떠벌리지 말아야 한다. 국가로부터 급여를 받고 국가가 4대보험처리를 해준다면, 적어도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을 다 해봐서 함부로 말하던 권력이 있었고, 아무 것도 안 해봐서 함부로 웃던 권력이 있었다.

권력을 쥔 정치인이 자기 세계에 빠져 제 멋대로 판단하고 재단하며 잔소리하고 윽박지르는 것은 죄다.

이 이야기는 대통령 이야기가 아니기도 하고, 어느 기초단체 의회의 이야기가 아니기도 하다.

종교가 필요한 나라

2020년 4월 11일자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고 나니
정말 이 나라 사람들은 정의로운 복지국가를 꿈꾸고 자기 공동체에서 정당한 댓가를 받는 경제 시스템까지 구축하길 원하는 정서가 매우 오랫동안 발현되어 왔다고 느꼈다.

그게 어떤 형태의 시스템이라 부르건간에, 사민주의나 민주주의나, 때로는 어떤 공산주의적 요소도 충분히 함의하고 있는 공동체들이 있었고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구원자에 의해 그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길 오랫동안 염원해온 것이다.

정치와 반체제적 혁명 주체들이 이를 소화하지 못했을 때, 사이비종교가 나타나 그들을 구원한다며 나꿔채갔고 그들은 자기들만의 왕국에서 최면에 취한 채 살아갔다.
그 왕국은 부실하게 지어진 것이라 외부와 내부의 균열로 깨어지곤 했고, 세상에서 고립된 사람들의 공동체가 박살나면서, 갑자기 세상에 내동댕이쳐지는 일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였다.

신천지와 그 이전의 종교들이 보여왔던 행태를 보면 분명 공산혁명, 또는 주체사상을 이해하고 있는 자들이 그 안에 들어가 일부의 형식만 빌려 왜곡된 형태로 시스템을 정비한 것이 아닌가 싶다.

1990년대에 시민운동의 한 갈래가 급진적 환경생태운동으로 분파되었을 때, 교조주의적이고 종교적인 기이한 모습으로 변모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이들 중 일부가 분명 신흥종교에 들어가 브레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 의심한다. 유물론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되었겠는가 질문한다면, 내가 아는 한 87세대에서 유물론이나 막시즘을 잘 이해한 사람을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저 시대 정서가 그랬기 때문에 합류한 얼치기들도 많았다.

사이비를 비롯한 신흥종교가 대를 이어 성공을 거두는 것은 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욕구를 정확하게 겨냥하고 마음을 사는 데 정확한 대응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정치판에서도 한 리더를 신화속 주인공쯤 되는 영웅으로 만들어 한없이 선량하고 깨끗한 그분으로 만드는 정서가 있다. 우리공화당으로 대표되는 박근혜 추종자들이 그렇고 문재인을 지키는 것이 공적 약속이라고 말하는 일부의 문재인 지지자들이 그렇다.

이들은 이전에도 도처에 있었다. 정치인을 하나의 권력지향적인 자연인으로 보지 않고 마치 신탁을 받아 아버지의 칼 반쪽을 가지고 대모험을 떠나는 어린 유리왕으로 보는 것이다. 권력은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 하고 그러려면 일반인들은 경험하지 못하는 엄청난 에너지의 암투를 견디고 버텨야 우뚝 설 수 있는 것이다. 순전무결한 우리의 왕을 찾는 사람들은 신흥종교와 정서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시민으로서 가장 적절한 정치인을 찾는 것은 그 사람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내 삶을 더 낫게 만들만한 무기를 찾는 것이다. 게임을 한다고 생각하면 쉽다. 내가 고를 수 있는 캐릭터가 여러 개 있는데 그 중 승률이 가장 높거나 내 취향에 맞는 캐릭터를 뽑아내고 나는 노동과 시간을 투자해 그 캐릭터를 길러내면 되는 것이지, 그 캐릭터를 숭배하거나 제사를 지낼 필요는 없는 것처럼.

일부 열혈 정치 지지자들은 무단으로 수백명의 사람들은 단톡방에 초대해 집단 제사를 지내자며 울며 읍소한다.
그러나 언제나 선거판에서 나라의 명운을 결정짓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필요한 캐릭터를 쓰고 버릴 각오를 하고 투표하는 사람들이었다.

시대가 정의로워졌는가.
예전보다 부정한 것을 적발하기 쉬운 시스템이 만들어진 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명박과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가. 싫더라도 그들은 우리의 가족이고 이웃이며 운명공동체다. 거래를 하며 사는 현대인의 어쩔 수 없는 숙명 같은 거다. 그들을 어떻게 내 편으로 끌어당길 것인가는 각 신흥종교의 흥망성쇠를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2020년 4월 12일

싸움의 규칙

눈 내리는 오후, 늦게 일어난 탓에 끼니를 거르고 약속장소로 갔다.
만나기로 한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 60번쯤 겨울을 겪은 사람.
그가 대부분 잊었을 17년전 기억을 끄집어내어 상기시켜주어야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었다.
공공기관의 2층에 있는 무인까페.
미리 보내준 서류를 읽지 못했다기에 출력해 간 같은 서류를 넘겨주었다.
그가 집중해서 서류를 읽는 사이, 나는 1500원을 카드로 결제하고 큰 종이컵에 커피를 한 잔 뽑아왔다. 내가 커피를 가져온 후에도 그는 진지하게 서류를 읽고 있었다.

내가 앉은 자리는 공간의 정중앙에 놓인 TV가 보이는 자리였다. TV는 켜져 있었고, 몽골로 보이는 화면이 흘러갔다. 어린아이가 초원을 뛰어놀았고, 여자와 남자들, 염소인지 산양인지 모를 짐승들이 지나갔다.
고개를 잠깐 숙였다가 들었더니 화면 속의 사람들이 흰털의 그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있었다. 벌겋게 드러낸 짐승의 속살, 화면이 바뀌어 내장을 꺼내고 그 안에 고인 피를 사람들이 쓰는 양동이에 옮겨 담았다.

내가 그를 만난 이유는, 17년 전 시작된 일이 왜 이제야 완성이 되었는지, 그동안 어떤 욕망들이 오갔는지, 찬성하는 사람들의 명분은 또렷하고 단순한데, 반대하는 이들의 명분은 왜 그렇게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었는지, 그 단서를 찾기 위해서였다. 사실 나는 반대자들의 이유를 알지 못해도 그만이지만, 알고 싶었다. 욕망의 실마리를 잡아보려고 간 자리에서 살아있던 생명이 고기가 되어가는 압도적인 화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창밖에 내리는 흰 눈을 맞으며 멀리 달아나고 싶어졌다.

약속장소 바로 앞엔 샤니 빵공장이 있었다. 언제였더라. 인터넷에서 본 곳인데, 여태 경험한 중에 가장 최악의 근무지였다고, 샤니에서 보름을 견디면 어디든 견딜 수 있다고. 그런데, 그 이야기는 택배상하차가 생기기 전의 글이었던 거 같다. 보름을 견디면 어디든 견딜 수 있는 곳의 어디는, 어디일까?
집에 오는 길, 운전을 하던 박부장이 다시 한번 가고 싶은 곳을 말했다. 오늘 같은 날이어야 하는데. 우리가 갔던 곳 중, 눈이 와야 더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이나, 도담삼봉같은 곳 말이다.

한 지역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몇 가지 승자와 패자의 규칙을 찾았다.

첫 번째는 며칠전에 적은대로,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던 사건들은 결국 10년이나 20년을 두고서라도 그 물증들이 나타나는거다. 스스로의 행동이 물증이 된다. 대부분 올바르지 않은 행동들이라, 결국은 잘 드러난다. “의심스럽던 자들”은 욕망을 감춰서 이슈를 이슈로 덮는 데는 능숙하지만, 결국 어느 순간 덮을 이슈가 없어지거나 궁극적으로 욕망을 실현해야만 하니까,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간이 걸릴 뿐이지.

두 번째는, 내부총질을 하는 자는 필패를 면치 못한다는 것이다. 이 나라의 특성인지 모르겠으나, 내부고발과 내부총질은 다르다. 공익을 위한 고발이나 부당한 권력에 항거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돋보이고 싶어서, 앞서 가는 자를 추월하고 싶어서, 등 뒤에서 “저 자에게 구린내가 난다”고 떠들어대던 자는 부활하지 못했다.

세 번째는, 단순하고 정확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이유로 싸우는 사람들이 이긴다는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이것은 공익과 꼭 연결되지 않는다.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고, 어쩐지 의심스러운 이유를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지키려 했던 ‘보이지 않는 그 무엇’ 때문에 소멸하고 만다.

내가 찾은 이 싸움의 논리들이 완전히 틀려먹었을수도 있을테니, 앞으로도 잘 지켜봐야겠다. 어떤 싸움들이 결국 승리하는지, 알고 싶다.
갑자기 징기스 칸이 생각나네.

2020.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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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링 vs 팀추월

<컬링 VS 팀추월>

올림픽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수백년된 나무를 베어내는 걸 몰랐더라도, 순실이가 개입했다는 걸 몰랐더라도, 난 스포츠가 만들어내는 감동의 드라마 따위에 관심을 잃은 지 꽤 되었다. 교훈적인 이야기는 진부했고, 현실에서 의미를 찾는 것도 귀찮았다.

올림픽 개막식이 이슈가 되고, 올림픽에 대한 관심은 북한이 온다는 것 하나. 대통령에 대한 인기가 올림픽을 이끌어가는 건 아닌가 의심도 했다.

그러던 중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두 가지 일어났다.

여자 컬링이 사상 최초로 상위권에 진입했다는 것.

그 안에 숨은 스토리가 재미있었다. 동네 언니와 친구가 학교 방과후 수업으로 시작한 취미생활이 국가대표까지 오르게 했고 이 글을 쓰고 있는 21일 저녁, 여자 컬링 대표팀은 조별 예선 7승 1패로 현재 덴마크와 경기를 치르고 있다. 경북 의성의 의성여고 출신인 네 명은 잘 알려진대로 영미랑 영미친구, 영미 동생, 영미 동생 친구로 구성된 지연과 혈연의 팀이다.

의성은 마늘로 잘 알려진 고장이기도 하지만 몇 달전 발표된 조사결과에 의하면 인구소멸도 1위로, 사라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도시 1위이기도 하다. 시사인에서 취재한 기사를 보면 의성엔 산부인과가 없고 노인인구만 남아 의성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사람들도 인근 대도시로 다시 나가야 하나 고민한다는 얘기가 있다.

의성 사람들은 설령 인구소멸가능성이 1위더라도, 그 사실을 입에 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그런 도시에서 세계 1위를 할 지도 모르는 여성 스포츠팀이 나타났다.

어릴 때부터 엘리트 체육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 동네 언니, 동네 친구가 뭉쳐 올림픽까지 왔다는 건, 수년간 인기를 끈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과 비슷해 보인다. 이 팀의 인기는 혈연과 지연으로 꽉 짜여진 이 나라의 정서에 맞아 떨어지면서도 그들이 비수도권출신으로 성공스토리를 써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과거사를 밝힌 의성의 전 구의원의 글도 이슈가 되었는데 가정형편이 부유하거나 뛰어난 엘리트가 아니었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칠판에 <컬링 배울 사람> 이라고 쓴 글을 보고 하나씩 모여들었다는 건, 보는 사람들에게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나만큼 평범한 친구”를 만나 말도 안되는 도전을 했다는 얘기로 들린다.

단언컨대 이번 동계올림픽 최고의 스타는 컬링여성대표팀이며, 그 이유는 영미와 영미친구와 영미동생과 영미동생친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컬링팀의 인기가 치솟는 사이에 여성 팀추월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다. 팀추월이 무슨 경기인지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팀워크를 이루지 못하고 한 사람을 따돌린 것으로 보이는 영상에 흥분했다. 한 명의 주자를 이끌지 못하고 낙오시킨 채 결승점을 통과하고, 실소를 뿜은 한 선수가 있었다. 밤새 대표팀 자격박탈과 빙상연맹 해체를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이 일어났고 이틀밤이 지난 오늘 이 청원에 동의한 사람들의 숫자가 50만명이 넘었다. 분노를 금치 못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놀라웠다.

가장 약한 고리를 공격한다는 이야기와 선수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의견에 이어 빙상연맹의 오래된 파벌문제와 전명규 부회장의 공과논란이 엘리트체육교육에 관한 성토로 이어졌다.

하룻밤새 30만명 넘게 청원했다는 얘기를 듣고 몇 개 커뮤니티 게시판을 들여다보았다. 사람들은 따돌림 당한 것으로 보이는 노선영 선수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고 그 사연에는 각자 겪었던 공동체 내에서의 따돌림 경험이 섞여 있었다. 수십개의 게시글을 읽고 나서 나는 분노의 원인을 여럼풋이 느낄 수 있었다.

이 나라는 라인을 잘못타면 망하기 십상이고, 알량한 권력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기 쉬우며 자기 의사를 솔직하게 얘기했다가 어느 편에도 끼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이 억울한 경험은 고스란히 공동체의 기억속에 쌓여 있었다.

2016년부터 이어져 결국 대통령 탄핵까지 이어진 촛불혁명의 불쏘시개는 정유라였다. 최순실과 정윤회의 딸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특혜를 받았던 아이. 그래서 달그락 훅, 하는 것으로 명문대학을 다녔고, 수십억의 기업체 후원을 받았으면서 “부모 잘 만나는 것도 능력”이라는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주장을 했던 정유라에게 사람들이 분노했던 건, 특혜였다.

안 그래도 출발선이 다른 아이가, 특혜까지 받았다는 것, 평등과 호혜를 거스르는 일이다. 꽤 많은 인류가 민주주의를 선택한 이유는 더 넓은 평등과 더 많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함인데, 돈과 권력을 가진 집안의 아이가 그 이유로 특혜까지 받는다면 수많은 민중이 민주주의를 지향해봤자 다 헛거다.

동료가 쳐진 것을 두고도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고, 인터뷰에서 피식 웃어버린 김보름 선수에 대한 비난을 보며 사람들은 정유라를 떠올렸을 것 같다. 스피드 스케이팅이 엘리트체육이 아니면 도전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건 동계올림픽을 보는 사람이라면 아는 일이고, 게다가 대학과 파벌로 나뉘었다는 얘기까지 알려지면서 이 집단감정의 오버랩은 점점 강화되는 듯 하다.

사람들이 말하는 적폐는, 평등과 자유를 저해하는 수많은 집단의 구조일 것이다. 팀추월을 보며 화를 낸 이유도, 컬링을 보며 환호하는 이유도, 모두들 좀 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기 때문이라고 본다.

누군가의 실수, 누군가의 행운 따위를 말할 필요는 없겠다.

나는 이 두 사건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토리가 무엇이고, 지금 필요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았을 뿐이다.

2018년 지금 이 나라 민중들의 원하는 스토리가 무엇인지, 왜 무한도전이 수년간 인기를 끌 수 있었는지, 우리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세상은 우리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게 미래를 만든다고

더 많은 내부고발자

 

외부충격이다, 음모론이다,

잠수함이다, 암초다.

믿고 싶지 않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이유를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우리는, 그 커다란 배가 어찌 그렇게 넘어갔으며, 모두가 살아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당연해보였던 예상을 뒤엎고 너무 많은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생중계로 봤기 때문이다.

그날 해가 지던 순간을 기억하는가.

청문회에 나와 마이크 앞에 앉은 자들은 모두 그날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헌법재판소에서는 “그날은 일반 국민들도 자기가 뭘 했는지 기억할 수 밖에 없는 날”이라고 했다.

2014년 4월 16일, 해가 지던 순간을 기억하는가.

목이 메이고 눈물을 참으려고 눈알이 벌개지도록, 당신도, 나도 TV 화면을 바라보며 옥죄어드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으니까.

해가 진다,

해가 진다,

해가 지면 안 되는데,

해가 지면 안 되는데.

그날 아침 8시 49분, 세월호가 침몰했고, 뉴스 속보가 떴다.

진도 앞바다 여객선 침몰. 이라는 속보를 보고 앞바다라니 별 일 없을거라 생각했다. 비어 있는 큰 아이의 방문을 닫다가 한 여자아이를 보았다. 젖은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교복을 입은 아이가, 큰 아이의 방에 잠시 섰다가 사라졌다. 아이의 머리는 길었고 앞머리가 단정했다. 그 교복은 하복이었다. 살아남은 아이들이 나중에 학교로 돌아올 때 입었던 그 교복의 형태. 반팔의 흰 셔츠로 되어 있는, 짧은 치마와 흰 양말이 흐릿한 형체.

팔에 돋는 소름을 거두고 서울 서초에서 볼일을 보고 나올 때 전원구조라는 속보가 떴다. 그리고 나는 제암리에 있었다. 제암리교회에 도착해 기념관을 둘러보고 자목련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바람이 적당히 불었고, 공기가 텁텁했다. 봄마다 오는 그런 날이었다. 갑자기 대기가 묵지근해지고 바람엔 먼지와 모래가 섞여 있는 듯 하고, 멀리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자꾸 아른아른하고 몽롱하게 들리는, 햇빛은 나지만 찬란하지 않은, 조금 걸으면 몸이 더워져서 겉옷을 벗어들게 되는, 화창하지 않은, 그런 날이었다.

바람이 불어 자목련 잎사귀가 마구 떨어지는 것을 영상으로 찍으며, 전원구조가 오보였다는 걸 알았다. 나는 왜, 지금, 왜 하필이면 여기 제암리에 있는가, 참담했다.

별 일 없을 거라 믿었다. 침몰했다는 여객선은 거대했고, 쉽게 넘어갈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며, 진도 앞바다라 어민들도, 해경도, 모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저녁이 되면 아이들이 오돌오돌 떨며 담요를 뒤집어쓰고 엄마아빠에게 안겨 실컷 울다가 저주받은 수학여행이라 운수가 나빴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저녁이 되면, 전 국민이 뉴스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고 대참사를 피해가는 과정에 등장한 시민영웅이 한두 명쯤 나와 인터뷰를 할 것이라고, 믿었다.

당연하게 펼쳐질 거라 생각했던 뉴스는 없었다. 진도에는 비가 왔고, 아이들은 바다에서 나오지 못했고, 아이들이 왜 나오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다. 비 오는 진도에서 비옷을 입고 청와대로 가겠다는 길이 막혔고, 우리의 모든 소망이 그때부터 가로막혔다.

이후로 우리는 바다, 침몰, 여객선 같은 단어를 쓰기 어렵다. 노란색, 배, 고래, 리본을 보면 가슴이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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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2일, 안양 범계역

자로의 세월X는 돌을 던진 셈이다.

그는 동영상 시작부분에서 “개인적 견해”라는 점을 밝혔다. 이렇게 2년간 세월호가 왜 침몰했는지 궁금해 한 사람이 있다고, 그게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려주며 모든 것을 원점에서 재수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정유라가 독일에 있고 독일검찰이 수사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한 네티즌이 썼던 댓글을 잊지 못한다. “독일이 어떤 나란데. 과거를 청산한 나라다.”

오늘은 자로의 세월X가 업로드되었고 언론에 조명을 받았다. K스포츠재단의 내부고발자가 한 명 더 나타나 이제 K스포츠재단내의 내부고발자가 세 명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의인”이라 칭함은 옳지 않으나 “내부고발자”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과거를 청산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죄를 인정하고 처벌을 감수하되 개인의 사익을 위해서라도 더 많은 공익을 위해 위험을 감내할 각오를 보였다. 지금 여기엔 더 많은 내부고발자가 필요하다. 세월호를 잊고 싶던 개인의 내면, 유가족들에게 가졌던 불편한 마음의 내면, 고통을 응시하지 못했던 비겁한 내면, 때로는 잊히길 바랐던 이기적인 내면, 그 모든 내부에 깊숙이 파고 들어가 다시 끄집어내고 이 모든 것을 전부 다 바로 세워야 한다고 말하는 각자의 내면의 고발이 필요하다.

그날 아침부터 모두들 해가 지기 전에

아이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그 하룻동안, 박근혜는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일정이 없는 날이니 느즈막이 일어나 드라마를 보거나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며 쉬었을 것이다. 배가 가라앉았는다는데 해경은 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냐고 질책하며, 본인은 아무 책임이 없다는 것을 굳게 확신하며 머리를 올리고 화장을 한 뒤 중대본으로 갔을 것이다. 책임자들이 제대로 구조하지 않은 것에 분개하며, 자신의 임무에 집중했을 것이다. 박근혜가 알고 있는 자신의 책임은 오로지 의전뿐이니까.

그런 자를 대통령으로 뽑아 앉힌 자들이 내 이웃에 있다. 어떤 기관의 보안손님이고 싶었던 내 내면에 최순실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더 많은 내부고발자가 필요하다.

왜 그랬을까.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작은 욕망들이 뒤틀려 기괴한 모습으로 갑작스럽게 튀어나올 때 일어난다. 왜 그랬는지. 세월호의 진실은 아무리 파헤쳐도 우리가 죽는 날까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들을 왜 구하지 못했는지 왜 구하지 않았는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진실도 살아남은 자들을 설득할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하다.

끊임없이 의심하는 일. 지치지 말고 진실을 파헤치는 일, 끝까지, 책임을 묻고 스스로 내부고발자가 되어 이 모든 과거를 청산하는 일.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다.

2016년 12월 26일

그날, 2014년 4월 16일, 화성 제암리

시민의회 “대표”유감

오늘 오전 트위터를 들여다보다가 며칠 전 명부에 이름을 올린 “시민의회”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는 것을 보았다. 아마 오늘자 한겨레에 시민의회에 대한 기사가 실렸기 때문이리라. 시민의회를 처음 접한 건, “박근혜게이트”사이트를 통해서였다. 박근혜게이트와 박근핵닷컴을 계속 열어보며 의원 청원을 클릭하고 그 직전날은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문자를 열나게 돌린 다음이다. 월요일 밤이었거나, 화요일 오전이었다. 구글닥스 형태였고 제목은 “촛불광장의 민의를 대변할 시민대표를 선출하자” 라는 제목이었다. 내가 생각한 “시민대표”라는 것은 광장에서 연단에 올라 자유롭게 발언하는 뭇사람들이었다. 어린이도, 청소년부터 그야말로 남녀노소에 이르기까지 ‘새누리밖에 모르고 살았습니다’라고 고백한 부산 아지매까지, 내가 생각한 “시민대표”는 그런 모든 나의 이웃 길에서 마주치는 시민들이었다.

시민대표를 선출하자는 말과 그 아래 글을 읽어본 뒤 나는 서울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아니고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니 정보력을 갖추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이름을 적어냈다. 시민대표 중 한 사람이 될 생각이 아니라 (지금 하는 일도 정신없다.) 그 사이트를 통해 얻게 되는 정보는 장기전이 될 이번 싸움에 직접적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여기서 이름을 적어내는 과정은 서명운동이나, 국민청원 정도로 여겼다. 말하자면 광화문에 나가 촛불 드는 것과 똑같은 심정이었다. 내가 거기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위에 적은 바와 같이, 내가 다른 데서 얻은 정보를 공유하고, 그들이 취합하는 정보를 받아 내가 속한 커뮤니티에 전하는 일 정도였다. 다시 광화문을 빌려 말하자면 내가 생각한 정보공유와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란, 안양지역에서 받아간 손피켓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그들에게 초를 빌리기도 하고, 내가 아는 화장실을 알려주는 것에 다름 없었다. 그래서 여기 저기 공유도 했고, 관리하는 페이지에도 올렸다.

박근혜게이트가 알려져 있는 사이트라 참가자가 많을 거라 생각했고 광화문에 모이는 인파를 생각해 적어도 1차 시민의회 모집에 1만 명 정도 지원할거라 예측했으나 이후 사이트에서 발표한 명단을 보니 1천명 정도였다. YMCA 각 지역 사무총장들이 들어가 있는 게 눈에 띄였고 우리 지역 선배도 있었다. 이름 옆엔 괄호치고 직업이 적혀 있었는데 나름 엘리트 계층이 상당히 많아서 역시 인물들이 먼저 모이는 건가 의심했다. 쉽게 말해, 내가 낄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는 거다.

어제 내가 관리하는 페이지에 시민의회 모집 구글닥스를 걸어놓은 게시물에 와글 공식페이지 관리자가 고맙다는 답글을 달아서 와글에서 한다는 걸 알았다. 오늘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와글과 YMCA 연맹도 함께 기획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우리 지역도, 내가 아는 다른 YMCA 사무총장도 명단에 들어가 있다. YMCA에 대해 한 마디 보태면, 지역마다 약간씩 다르겠지만, 기독청년운동에서 시작했다지만 종교성을 드러내 거북한 단체가 절대 아니고 나의 경우 매우 편하게 소통하고 조력하는 지역운동의 협업단체이기도 하다. 시민사회단체의 대표자 격을 갖추기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대표자 격은 가장 많이 일을 하고 가장 넓은 분야를 아우른다는 것이다. 조직력도 좋고 활동력도 강하고 기본적 철학도 잘 갖추어져 있는 편이다. 적어도 나에겐 그런 팀이다. 내가 지역에서 활동가의 구실을 하게 된 것도 안양YMCA와의 인연 때문이다.

자 그리하여 화요일이 지나, 8일 목요일에 이메일을 하나 받았다. 수신자인 나는 “공동제안자”가 되어 있는데 향후 정국에 관련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이메일로 회신해줄 것을 부탁하며 시민공동토론 운영원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달라고 했다.

하루에도 해결할 일이 한 둘이 아니고 주로 SNS는 페이스북, 밴드, 카카오톡으로 대부분의 정보를 유입하는 입장에서 매일 “시민의회” 사이트를 들여다 본 적은 없어서 그날 메일을 받고 일단 의견을 달라고 한 질문에 답장을 썼다. 마감시간은 9시라고 했는데 시간을 지키기 어려워 조금 넘겨 보냈다.  질문에 답을 쓰는 과정이 내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날 이메일을 보내고 사이트를 들어가봤다. 시민대표 추천란이 개설되어 있었고 오늘 트위터에서 공개된 여러 유명인사들의 사진과 추천하기 버튼이 붙어 있었다. 의료사협대표도 있고 정말 제대로 일하는 역량이 대단한 활동가도 한 둘 보였다. 기억나는 건 이계삼씨가 있었다는 것과 그 외 유명인들이 있었는데 석연치 않았다. 이 사람들이 모두 이 명단에 나처럼 스스로 이름을 올렸을까 싶은 의심이 들었고 할 일이 있어 금방 창을 닫았다.

그리고 오늘자 한겨레에 기사가 실리며 난리가 쏟아진 것이다. 사람들이 캡쳐해서 올린 시민대표 명단을 보니 김제동 같은 유명인사가 있고 더러 어떤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빼달라고 한 모양이다. 동의가 없이 진행했다는 말이다. 게다가 저녁나절 내가 공유한 이진순씨의 글은 화를 돋우기에 충분했다.

오후부터 시민대표, 라는 것이 무슨 말인가 한참 생각했다.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시민단체란 시민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대신 싸우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또한 나도 타인을 위해 싸우려고 애쓸 때가 있으나 사실 그건 궁극적으로 타인이 아니라 나를 위해 싸우는 과정이다. 타인을 위해 싸운다기 보다, 남들보다 조금 더 전투력이 좋은 사람들이 모일 필요는 있다. 그들을 “대표”라고 부른다면 “대표”라는 명칭을 다시 정의해야 할 것 같지만 우리 사회는 흔하게 “대표”라고 칭한다. 이번 촛불집회에서도 참여연대가 계속 소송을 내서 청와대 접근을 점점 가깝게 한 것이나, 이 나라의 노동운동을 위해 앞장섰던 수많은 사람들의 공로는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번 촛불집회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덜 나올까봐.”,“그냥 촛불 하나가 되고 싶어서”나온, 뭇사람들이고, 그들이 연단에 오르고 깃발을 들고 자유롭게 참여했기 때문에 이만큼의 성과가 나올 수 있었다. 트위터리안 수유리킴은 이번 혁명의 성공은 지도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일갈했다. 그의 말에 동의한다. 반면 각 지역에서 연대한 “비상시국행동”에서는 주도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대를 세우고 피켓을 만들고 집회장소를 섭외하고 사전에 지자체에 신고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연대”라 하지 “대표”라고 스스로를 칭하지는 않는다.

이 글을 쓰려고 한글 파일을 열 때 바로 시민의회측에서 “제안자분들에게 드립니다” 라는 이메일이 왔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고 사과를 실었다. 방금 전 본 이진순씨의 페북 글과는 논조가 상당히 달라졌다. 시행착오라고 보고 싶다. 나는 이 시민의회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 것 같다. 플랫폼을 만들고 다양한 만민공동회를 구성하자는 말인데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해본 사람들이 협의체와 네트워킹의 한계를 느낄 때마다 해왔던 말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공동의 “플랫폼” 하나가 필요하다는 얘기는 수없이 들었고 나도 그렇게 느꼈고 그런 플랫폼들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여기 저기 산발해 있다.

그러나, 과연 하나의 플랫폼이, 지금 이 시대에 가능할까?

올 봄에 사경계의 언론사 설립에 도전하면서 사경분야의 하나의 플랫폼이 가능한가 타진해봤으나 단 하나의 플랫폼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구조는 앞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합집산, 느슨한 네트워크, 산발적인 조직력이 하나의 명징한 주제 아래서만 뭉칠 것이다. 딱 이번의 촛불혁명처럼 말이다.

얼마 전에 적었던 대로 이번의 촛불혁명의 성공요인은 쉽고, 안전하고 (어린이와 노약자의 진입 문턱이 낮다), 주제가 선명하고 요구조건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후의 거대한 연대의 힘은 이럴 때만 발휘될 것이다. 앞으로는 각자의 욕구와 각 단체의 욕구가 끊임없이 충돌하며 갈등을 접하고 그를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적어도 1년 이상, 민주주의와 시민주권에 대한 온갖 담론과 비판과 응원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질 것이라 예상한다. 여기서 이것을 혼돈이라 보고 등돌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이것이 과정이라 인정하며 스폰지처럼 흡수하며 단단해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후자가 되고 싶다.

시민의회에서 지금 저런 논란이 될 법한 구상을 한 것은 분명 내부의 구조가 그러하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누군가 권력을 잡고 있을 것이고 관료적인 시스템이 있을 법하다. 나는 그것을 의심한다. 시민운동과 민주주의, 자유와 평등, 복지와 취약계층을 말하는 사람들이 지독하게 관료적이며 권위적인 경우를 많이 본다. 그들이 권위를 내려놓고 관료제를 타파하는 순간, 그들은 자리에서 밀려나거나 생계에 위협을 받는다고 여기고 있을 지도 모른다. 조직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단체들이 있고, 조직에 속했기 때문에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활동가들이 있다. 시민 후원금을 유지되고, 회원들이 계속 개입하고 감시하는 구조가 아닌 시민사회단체는 조직유지를 위해 공모사업 분야에 뛰어들었고 폭력적인 80년대 운동권의 권위적 구조를 그대로 가져왔다.

이번 시민의회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 이런 “적폐”다. 폭력적 구조와 그 시절의 폭력성을 낭만으로 치환시키는 수많은 선배님들, 눈을 뜨고 자신을 돌볼 수 없으면 이제 그 자리를 내려놓으셔야 한다. 이번 시민의회의 대표선발에 관한 아이디어는 아마 내부의 선배님들에게서 나오지 않았을까. 나는 한 번 더, 그 구조를 의심한다. 시대가 분명히 바뀌었고, 역사의 전환점인 게 맞다. 오늘 불거진 시민의회의 사태가 바로 이를 증명한다.

나는, 굳이 탈퇴를 하거나 항의를 하거나 명부에서 삭제해 달라는 말은 안 할거다. 아마 나 따위는 자연스럽게 소거될 거라 보기 때문이다.

2016년 12월 10일


자료1.

시민의회측에서 최초 제안한 구글닥스 내용 (삭제될 것을 우려해 복사 붙여넣기)

(공개제안문) 촛불광장의 민의를 대변할 시민대표를 선출하자

제목 : 촛불광장의 민의를 대변할 시민대표를 선출하자

부제 : 각계각층 시민들의 공개제안

광장에 서 본 이들은 안다. 직경 50센티의 작은 공간 안에 송곳처럼 곧추서서 직경 2센티의 작은 불꽃 하나로 자신의 온 마음을 담아내는 이들의 간절함을. 눈비 흩뿌리는 차가운 도로 위에 내 아이를 앉히고, 사랑하는 이의 언 손에 나의 체온을 덜어주며, 끝내 자리를 떠나지 않는 이들의 단호함을. 스스로 한 점 불꽃이 되어 거대한 촛불의 은하수를 이루는 시민들이 침몰해 가는 대한민국을 건져 올릴 유일한 희망이며, 부끄러운 역사를 바꾸어낼 대한민국의 주인이자 품격이다.

정부와 정당, 기회주의적 언론은 더 이상 국민을 들러리로 삼지 말라. 이제 우리는 일부 특권층의 사유물로 전락한 국민의 주권을 바로 세우고, 우리의 생명과 안전, 우리아이들의 미래를 우리 스스로 논의하고 설계하려 한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다양한 목소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지혜의 창고이며, 혼돈의 시대를 헤치고 나갈 거대한 사령탑이다.

거대한 촛불의 바다가 주권자의 존엄한 목소리를 가감 없이 모아내는 용광로가 되게 하기 위해서 많은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시도들이 수렴되는 플랫폼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대의구조’나 ‘대리자’에 대한 거부감이 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민을 위한 대변인은 필요하고 그래서 우리는 그간의 대변인 제도와는 달리,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창구를 마련하고자 한다. 우리는, 주권자의 목소리를 여과 없이 전달하고 주권자가 요구하는 새로운 대한민국의 방향을 적시하기 위해, 특권층의 이해관계로부터 독립된 시민대표를 선출할 것을 공개 제안한다. 촛불시민대표단은 신망 받는 시민 가운데 온라인 최다추천을 받는 이들로 구성될 것이며, 공개적인 온라인 의사결정구조에 의해 수렴된 민의를 시민들과 순환적 토론을 이어가면서 정부와 정치권, 특검과 언론기관에 전달하고 압력을 가하는 평시민들의 시한부 대표기구가 될 것이다.

시민대표는 주권자의 요구를 대변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헌법이 규정한 유일무이한 권력의 원천은 국민이다. 국민의 뜻은 국가의 명령이며 그 어떤 당리당략적 이해관계나 정치공학적 이해타산과도 무관하게, 투명하게 수렴되고 여과없이 수용되어야 하는 시대적 요구이다. 그러나 박근혜 퇴진과 그 이후의 과제를 논의하는 국가적 의사결정체계 어디에도, 현재 국민의 여론을 가감없이 대변할 정직한 대리자는 보이지 않는다. 지지율 4%의 대통령은, 국민의 뜻이 명백히 드러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국회로 공을 넘겨 정치공작과 범죄은닉을 꾀하고 있으며, 국민의 대의기관이 되어야 할 국회는 정치적 이해득실을 앞세워 민의를 왜곡 대표하고 있다.

박근혜게이트의 공범세력은 자신의 치부를 감추고 배를 갈아타는 데 혈안이 되어 있고, 정치권은 광장의 방식과 제도권의 방식이 별개라고 주장하며, 대선후보들은 정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말과 행동을 바꾼다. 처음부터 일관되게 박근혜 퇴진과 포괄적인 국가개조를 주장해온 국민의 목소리는, 정치적 협상의 명분으로, 흥정의 대상으로 축소되고 있다. 우리의 운명을, 우왕좌왕하는 제도정치권에 모두 맡길 수 없다. 시민이 직접 추천하고 선출한 시민대표단을 구성해서 국가적 의사결정과정에 국민의 뜻을 전달하고 관철하도록 해야 한다.

시민대표단은 무엇을 할 것인가

첫째, 박근혜게이트에 대해 성역 없는 수사와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도록 고발하고 감시한다. 지난 10월 25일 이후 한 달 넘게 이어지는 촛불항쟁에서 확인된 시민들의 목소리는, 박근혜 한 사람의 탄핵이나 측근 몇몇의 처벌로 이번 사태가 마무리되어서는 안 되며 뿌리 깊은 특권층 비리가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포괄적인 국가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비리에 가담한 부역자들은 개혁의 대상이지 주체가 아니다. 이들이 꼬리 자르기를 통해 특권연장에 나서지 않도록 법적, 정치적, 윤리적 책임을 분명하게 물어야 한다. 시민대표단은 성역 없는 수사와 엄중한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도록 시민의 입장에서 고발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둘째, 시민대표단은 전면적이고 포괄적인 국가개조를 위한 시민들의 요구와 의견을 수렴한다. 불공정하고 부도덕한 권력집단의 횡포를 막고 국민의 생명과 주권이 존중받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시민대표단은 각계각층의 다양한 의견을 모으고 건강한 토론과 합의를 모아내는 역할을 할 것이다. 지역과 성별, 직업과 세대별로, 각계각층의 총의를 모아 포괄적인 국가개조방안을 정리해서 국가적 의제로 제출하는 것을 과제로 한다.

시민대표단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시민대표단은 제한된 임기동안 시민의 의견을 모아내고 대변하는 무보수 자원봉사자이다. 평시민의 일원으로, 어떠한 특권과 독단적 지휘권도 용납되지 않는다. 특정정당이나 이권단체, 대권후보의 입장에 기반한 개인의견을 앞세워서는 안 되며 어디까지나 온라인을 통해서 수렴된 국민여론만을 대변한다. 시민이면 누구나, 연령과 학력, 성별, 직업에 상관없이 시민대표 후보로 온라인 추천할 수 있으며 이들 후보 가운데 최다 신임을 받은 이들이 시민대표단을 구성한다.

시민대표단 구성을 공개 제안하는 우리들은, 빠른 시일 내에 시민대표의 자격요건과 선출방법, 시민대표단의 구성원칙과 윤리강령에 대한 방침을 세울 것이며, 논의과정은 모두 온라인사이트(http://www.citizenassembly.net)를 통해 실시간으로 국민 앞에 공개하고 의견을 물을 것이다. 공개제안단은 시민대표들이 선출될 때까지 필요한 제반 실무를 담당하고, 대표단이 꾸려지는 즉시 해산한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촛불행진만으로는 다 보여줄 수 없었던 시민의 위대한 힘을 창의적 공공지대를 통해 수렴하고 제도화 해내야 한다. 정부가, 정당이, 언론이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시민적 공공성을 확립해 나가야 한다. 여덟자 구호만으로는 담아내지 못하는 탁월한 발상과 열정과 힘을 제대로 모아내고 공식, 비공식적으로 확산할 때이다. 직접민주주의,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토론과 성찰에 기반한 숙의적 민주주의를 통해, 정부와 정당, 언론이 지금껏 보여주지 못했던 민주주의의 새 역사를 이제 시민의 손으로 만든다.

공동제안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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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을 입력해주시면, 공동제안자 명단에 오르게 됩니다.

공동제안자는 대표단의 구성을 위한 논의에 참여하며 대표단이 구성되는대로 역할을 종료합니다.

공개시점은 12월 7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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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제안자 신청이 마감되었습니다. 곧 공동제안자를 공개하고 시민대표 추천단계를 진행합니다.

관련 토론 및 제안은 http://www.citizenassembly.net 에서 진행됩니다.


자료 2.

 

12월 8일 수신한 시민의회측의 이메일

시민공동제안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번 시민공동제안의 실무를 맡고 있는 와글입니다.

‘촛불광장의 민의를 대변할 시민대표를 선출하자’는 제안은 여러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1차로 128명, 2차로 1,013명까지 총 1,141명의 시민들이 공동제안자로 함께 해주셨습니다(박근혜게이트.com에서 명단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이제부터 공동제안자 여러분들의 활발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두가지 부탁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온라인 시민의회 사이트(http://www.citizenassembly.net)에 들어오셔서 “시민의회 운영원칙” 토론방이 있으니 주제별로 여러분들의 의견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11일까지 의견을 모을 예정입니다. 12일부터는 시민대표 선출과정에 들어갑니다.

두 번째로는, 공동제안자들의 제안과 관련해 <한겨레21>에서 취재요청이 왔습니다. ‘시민의 시간- 촛불 시민의 꿈’(가제)이라는 주제로 기사를 실을 예정인데 아래 공통질문 세가지에 대한 여러분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보내주시는 답변은 한겨레21 기사에 반영될 것이며, 한겨레21 지면에 다 반영되지 못한 의견들은 온라인 시민의회 사이트에 전부 올려놓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1) 87년 이후 민주화 시대가 열린 듯 보였지만, 지난 30년 동안 우리가 믿어왔던 한국의 민주주의는 ‘가짜’에 가까웠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무너진 대의민주주의의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2) 당신이 생각하는 ‘진짜 민주주의’. ‘새로운 민주주의’는 무엇인가요? 민주주의를 재편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3) 국가 위기의 상황마다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촛불이 국면을 전복한 경험을, 우리는 아직 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촛불을 꺼트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요?

마감 때문에 8일(오늘) 오후 9시까지 회신되는 답변에 한해 한겨레21에 전달될 예정입니다. 바쁘시겠지만 info@citizenassembly.net 로 간단한 답변 부탁드리겠습니다.

공동제안에 함께 해주신 점 다시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앞으로 온라인 시민의회에서 더 많은 토론이 이루어지길 바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자료 3.

위 메일에 관해 답변한 내용

1) 87년 이후 민주화 시대가 열린 듯 보였지만, 지난 30년 동안 우리가 믿어왔던 한국의 민주주의는 ‘가짜‘에 가까웠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무너진 대의민주주의의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87년 체제가 가짜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만큼도 잘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87년 이전의 이 국가는 누군가 가져다 준 민주주의의 한 토막, 공화제의 한 토막을 가지고 스스로 자위하며 살아온 건 아닐까요? 87년의 투쟁으로 얻어낼 수 있는 수준 자체가 아니었을 겁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배운 적 없는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해 낸 민주주의과 공화제를 시민들의 힘으로 결합시켜 헌법을 개정하고 직선제를 쟁취하고 군부 독재 정권을 종결한 것도 큰 업적이라 생각합니다.

이후 독재정권은 바로 신자유주의, 자본의 폭주로 가면을 바꿔 씁니다. 신도시 개발이 바로 그 시발점이었다고 봅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전면에 나서야 하는 일이지만, 자본은 거대해서 그 뒤에 숨어 폭력을 휘두르기 좋습니다. 그저 폭력정권은 시대가 바뀌자 그에 걸맞은 열차로 바꿔 탄 것일 뿐입니다. 시민들이 이를 알아채지 못한 것입니다. 괴물과 싸우다 보니 괴물이 된 것이 아니라, 폭력정권이 얼굴을 바꾼 것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이겠지요. 시대에 영합하는 재빠른 이들이 바꿔 쓴 가면을 이제야 알아챈 것은 아닐까요?

 

2) 당신이 생각하는 ‘진짜 민주주의‘. ‘새로운 민주주의‘는 무엇인가요? 민주주의를 재편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지방자치제의 확립, 균형있는 발전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 실행안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굽은 나무가 마을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곧은 나무도 마을을 지킬 수 있는 제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입시제도를 어찌 바꾸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이 나라 대부분의 적폐는 입시제도 중심으로 벌어져 왔습니다. 성적순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제도를 뒤집으면 우리가 처해 있는 수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서 지역별로, 모임별로 꾸준한 공부모임과 토론방이 이어져야 합니다. 모든 공적기관, 공공시설물의 사용권을 확대하여 시민들의 모임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공공기관과 정부는 시민모임을 적극 지원하고 지역별로는 직접민주주의에 가까운 형태가, 이를 집적하여 대의민주주의를 이루어나가는 이중구조를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입법기관이 절대적으로 대리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국가 위기의 상황마다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촛불이 국면을 전복한 경험을, 우리는 아직 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촛불을 꺼트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요?

 

2번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지역별, 모임별로 꾸준한 시민모임이 이어져야 합니다. 시민단체들은 시민단체의 유무를 인지하지 못하는 시민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시민단체들이 자생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개방적인 체계로 급전환해야 합니다. 운동성을 유지한다고 세상과 격리되어 있는 단체들도 있습니다. 시민단체가 가장 먼저 변해야 합니다. 문턱을 낮추고 쉽고 편안한 말로 마을에서 함께 느리고 느슨한 연대를 추구해야 합니다. 거기부터 다시 시작입니다.

이는 제2의 건국에 다름아닙니다. 대신 싸워온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 2016년 11월, 촛불을 경험한 사람들은 성공의 기억을 가진, 집회와 시위를 즐기는 자들입니다. 이런 시민들을 이겨낼 세력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공의 기억을 더하고, 모이기에 힘쓸 때입니다. 각 지역별 활동가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시점입니다.

 

https://allmytown.org/2016/12/09/%EB%B0%95%EA%B7%BC%ED%98%9C-%EC%9D%B4%ED%9B%84-%EC%8B%9C%EB%AF%BC%EC%9D%98%ED%9A%8C-%EB%8B%B5%EB%B3%80%EB%82%B4%EC%9A%A9/

 

 


자료 4.

오늘 밤 11시경에 들어온 시민의회측의 메일

 

시민의회 논란에 대한 입장을 전달합니다

제안에 참여해주신 분들께 심려를 끼친 점 죄송합니다

온라인시민의회 공동제안자분들과 시민후보로 추천되신 분들께 사죄 드립니다.

온라인시민의회 사이트 운영진으로 참여하고 있는 와글 대표 이진순입니다. 오늘 하루 온라인시민의회에 대한 많은 분들의 질타와 염려의 말씀을 깊이 가슴에 새기며 들었습니다. 저희 사이트 운영진의 미숙함과 성급함으로 인해서, 촛불시민들의 다양한 국정개혁 요구가 수렴되고 표명되어야 한다는 취지에 공감해서 마음을 모아주셨던 모든 분들께 본의아니게 깊은 심려를 끼쳐드리게 돼서 뭐라 송구한 말씀을 전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깊이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저의 불민함으로 평시민들의 의견을 전달할 시민대변인단의 명칭을 시민대표로 개괄함으로써 많은 분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당사자 동의 없이 추대된 후보분들의 명예에 큰 상처를 입히게 되어 송구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간 제기된 비판과 질타를 겸허히 수용하면서, 온라인시민의회 플랫폼의 운영 전반에 대해서 전면적인 재검토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온라인시민의회 사이트를 전면 교체하여 시민대표후보 추천란을 폐쇄하고 제안문에 서명해 주셨던 분들의 명단은 삭제하고 제안문 원문만 올립니다. 그간 논의의 배경과 그간 토론방에서 제기된 논의를 중간 요약하여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트 자체를 폐쇄하지 않은 것은, 저희의 뼈아픈 실책으로 인해서 시민공론장에 대한 모든 시도가 불온한 것으로 간주되는 전례를 남겨서는 안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견이나 꾸지람에 대해서는 겸허히 수용하겠습니다. 아낌없는 쓴소리 들려주세요.

아래는 온라인시민의회 사이트에 게재할 운영진의 입장 글입니다. 다시 한번 깊이 고개 숙여 사죄드리며 더 많은 비판과 조언 들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와글 대표 이진순 드림

안녕하십니까. 온라인 시민의회 사이트 운영자입니다.

10일 트위터와 페이스북, 카카오톡 등 여러 온라인 공간에 많은 시민들께서 시민의회에 대한 우려와 질타를 남겨주셨습니다.

먼저, 논의의 충분한 공유없이 미숙하게 시민의회의 사이트를 운영함으로써 시민 여러분들께 걱정을 끼친 점에 대해 깊이 사과 드립니다.

저희들에게는 시민들이 주신 질타 하나하나가 깊은 반성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르쳐 주신 점 깊이 감사 드립니다.

이 과정에서 촛불 시민의 대변인을 뽑자는 저희의 뜻에 흔쾌히 동의해 공동제안자로 참여해주신 분들께 누를 끼친 점에 대해 뭐라 드릴 말씀이 없을 만큼 송구스럽습니다.

시민들께서 질타해주신 점들을 새겨, 저희는 아래와 같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시민의회 대표단 구성에 대한 논의는 원점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시민대표는 어떤 권한을 가진 대의기구의 대표자가 아니라 시민의 의견을 모아 제도정치권에 전할 전달자 혹은 대변인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된 표현이었습니다. 그 역할을 누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자격요건과 선출방식, 구성, 명칭에 대한 논의도 토론방에서 진행 중이었으며, 시민의회를 제안한 사람들의 토론과 합의를 통해 결정되는 것이 맞다고 보았습니다(시민의회 논의된 원칙 보기).

그런데 이 논의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민대표 추천하기 메뉴를 시범운영하여 인기투표처럼 시민대표를 추천받은 점에 대해 깊이 반성합니다. 추천된 분들의 사전 동의나 본인 확인 과정은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치 본인이 수락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점에 대하여 대표로 추천받은 분들과 추천하신 분들 모두에게 사과드립니다.

지금까지 진행해 온 시민대표 추천은 잠정중단하고 온라인 시민의회의 필요성과 운용방식에 대한 폭넓은 의견을 수용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겠습니다.

왜 온라인 시민의회를 구성하려고 했는가.

온라인 시민의회는 제도권 정치를 배제한 채 새로운 법적, 제도적 장치를 새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번 탄핵소추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시민들은 이제 국회의원들에게 직접 카톡으로 제보도 하고, 메신저를 통해 탄핵 가결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직접 민주주의의 실천들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담보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자는 것이 저희가 온라인 공간에서 시민의회를 만들고자 한 뜻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 투쟁 과정에서 광장의 주체로 우뚝 선 시민들은 저마다 대한민국을 새로 고침 할 소중한 의견과 대안들을 제기하셨습니다. 저희는 이 소중한 민주주의의 자원들이 촛불 광장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축적될 수 있는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다른 나라의 여러 사례들이 이러한 시민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해외 사례 보기). 박근혜 대통령 퇴진 투쟁 이전에도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직접 민주주의 실험들이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이 무르익었다는 논의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제기 되어 왔습니다.

저희는 시민대표 선출에 대한 논의는 중단하지만 국정개혁과제에 대한 평시민들의 의견을 모으는 것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의제별 논의의 결과를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고 표명할 지에 대해 폭넓은 논의를 거치고자 합니다. 시민의 참여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면 좋겠는지, 시민의 의견을 모아낼 공론의 장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저희의 시행착오가 더 나은 시민공론장 형성의 발판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토론방 가기)

다시 한 번 시민의회에 관심과 질타를 쏟아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12.10. 온라인시민의회 사이트 운영진 드림

박근혜 이후 – 시민의회 답변내용

citizenassembly.net 에 공동제안자로 참여했는데 다음 세 가지 질문에 답변을 요청해와서 적어본 내용입니다.

 

1) 87년 이후 민주화 시대가 열린 듯 보였지만, 지난 30년 동안 우리가 믿어왔던 한국의 민주주의는 가짜에 가까웠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무너진 대의민주주의의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87년 체제가 가짜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만큼도 잘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87년 이전의 이 국가는 누군가 가져다 준 민주주의의 한 토막, 공화제의 한 토막을 가지고 스스로 자위하며 살아온 건 아닐까요? 87년의 투쟁으로 얻어낼 수 있는 수준 자체가 아니었을 겁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배운 적 없는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해 낸 민주주의과 공화제를 시민들의 힘으로 결합시켜 헌법을 개정하고 직선제를 쟁취하고 군부 독재 정권을 종결한 것도 큰 업적이라 생각합니다.

이후 독재정권은 바로 신자유주의, 자본의 폭주로 가면을 바꿔 씁니다. 신도시 개발이 바로 그 시발점이었다고 봅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전면에 나서야 하는 일이지만, 자본은 거대해서 그 뒤에 숨어 폭력을 휘두르기 좋습니다. 그저 폭력정권은 시대가 바뀌자 그에 걸맞은 열차로 바꿔 탄 것일 뿐입니다. 시민들이 이를 알아채지 못한 것입니다. 괴물과 싸우다 보니 괴물이 된 것이 아니라, 폭력정권이 얼굴을 바꾼 것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이겠지요. 시대에 영합하는 재빠른 이들이 바꿔 쓴 가면을 이제야 알아챈 것은 아닐까요?

 

 

2) 당신이 생각하는 진짜 민주주의‘. ‘새로운 민주주의는 무엇인가요? 민주주의를 재편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지방자치제의 확립, 균형있는 발전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 실행안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굽은 나무가 마을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곧은 나무도 마을을 지킬 수 있는 제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입시제도를 어찌 바꾸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이 나라 대부분의 적폐는 입시제도 중심으로 벌어져 왔습니다. 성적순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제도를 뒤집으면 우리가 처해 있는 수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서 지역별로, 모임별로 꾸준한 공부모임과 토론방이 이어져야 합니다. 모든 공적기관, 공공시설물의 사용권을 확대하여 시민들의 모임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공공기관과 정부는 시민모임을 적극 지원하고 지역별로는 직접민주주의에 가까운 형태가, 이를 집적하여 대의민주주의를 이루어나가는 이중구조를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입법기관이 절대적으로 대리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국가 위기의 상황마다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촛불이 국면을 전복한 경험을, 우리는 아직 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촛불을 꺼트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요?

 

2번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지역별, 모임별로 꾸준한 시민모임이 이어져야 합니다. 시민단체들은 시민단체의 유무를 인지하지 못하는 시민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시민단체들이 자생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개방적인 체계로 급전환해야 합니다. 운동성을 유지한다고 세상과 격리되어 있는 단체들도 있습니다. 시민단체가 가장 먼저 변해야 합니다. 문턱을 낮추고 쉽고 편안한 말로 마을에서 함께 느리고 느슨한 연대를 추구해야 합니다. 거기부터 다시 시작입니다.

이는 제2의 건국에 다름아닙니다. 대신 싸워온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 201611, 촛불을 경험한 사람들은 성공의 기억을 가진, 집회와 시위를 즐기는 자들입니다. 이런 시민들을 이겨낼 세력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공의 기억을 더하고, 모이기에 힘쓸 때입니다. 각 지역별 활동가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시점입니다.

불우한 이웃

차 안에선 주로 CBS라디오 93.9를 듣는다. 탤런트 정애리가 애틋한 목소리로 안타까운 사연을 전하며 모금을 독려하는 월드비전 후원모금광고가 자주 나온다.
오늘은 젊은 부부의 사연, 아빠가 암에 걸려 항암치료중이고 엄마는 미용실 스텝인데 월수입이 600,000원 정도. 아이는 유치원에 다니는데 방과후 특별활동비를 내지 못해 특별활동 시간에 혼자 교실을 지킨다는 내용이었다.
불현듯 화가 솟구쳐 올랐다.

정애리 목소리가 울먹이는 듯 했고 그 톤으로 전화번호 읊는 걸 듣고 있자니 더 성질이 났다.
구호, 긴급구제가 필요한 이 사회 시스템에 화가 났다. 복지제도의 빈 칸을 국민들이 돈 모아 때우는 구조가 신물난다. 중국 공영방송에서 이런 행태를 자주 보이는데 극악한 상황에 내몰린 가족을 조명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섬기고 살림을 도맡아 하는 어린이들을 미담으로 포장해 내보내는 것이다. 국가에서 해야 할 일을 “효도”나 “이웃에 대한 배려”로 뒤집어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일, 그 사이에 대상화 되는 가난한 타자들, 테두리를 나눠 그 안에 사람을 넣어두고 여기는 불쌍한 집단이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고 강요하는 국가의 폭력적이고 지능적인 사기에 모두가 놀아나고 있는 건 아닌가.
언제까지 모금으로 세상을 도울 수 있을까.

이제는 법안을 발의하고 행정소송을 내고 국회와 공조하여 제도를 바꿔낼 때가 되었다.
초대형화된 구호단체가 초등학교까지 진입해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을 돕자”는 이야기는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가난을 몰아내기 위해 제도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필요하고 구호단체도 생각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여러 단체에 기금을 내고 있는데 이번에 좀 정리해서 참여연대로 돌려야겠다.
2016.11.21.

1987년, 민주주의는 더디게 온다 

1987년 나는 6학년이었다. 우리 담임선생님은 젊은 여선생이었는데 화장은 거의 하지 않고 개량한복을 입고 다녔다. 입술위에 검은 점이 있었다. 

선생님이 노래를 가르쳐주었다.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가난뱅이 등치고” 로 시작되는 노래였다. 

6월이 지나고 대통령 직선제가 선포된 이후 담임선생님이 나와 같은 반 남자 아이 하나를 불렀다. 

아마 그때 내가 2학기 반장이고, 걔가 부반장이었을거다. 성적은 비슷했다. 

담임선생님은 우리에게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되야 한다고 생각해?” 라고 물었다. 

나는 당당하게 

“노태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평화적인 정권이양이 이루어져야 88올림픽을 잘 치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88올림픽은 우리 나라에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그래?” 라고 반문한 뒤, 그래, 하나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라고 말하고 내 옆에 섰던 그 녀석에게 물었다. 

이 녀석은 장래희망이 “직장인”이라고 쓰는 매력 터지는 녀석이었는데 대답하기를 

“김대중 선생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 녀석에게 선생님이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그 자식의 그 대답 자체가 충격적이었다.

내가 틀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거다. 

참고로, 내가 다녔던 학교는 서울 도봉구에 있었다. 

지금 어떤 6학년은 

다음 대선에서 누가 되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 살짜리도 최순실을 아는 세상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누가 되더라도 “국민의 말을 귀담아 들을 사람을 뽑으면 좋겠지만, 감시할 권리와 의무는 우리에게 있다”고 말해야 하겠지. 

죽 쒀서 노태우줬던 87년은 실패였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그렇게 더디게 오니까. 

당당하게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내가 부끄럽지도 않다. 내가 봤던 건 이득렬앵커의 뉴스 뿐이었으니까. 

모두가 어른들의 몫이다.
2016.11.29. 

피리부는 사나이, 깃발을 내려라.

진보나 보수는 성향과 철학의 차이이지 옳고 그름의 가치는 아니다.
단지 이 나라에서는 예외인 것이 보수를 자칭하는 것들이 파렴치범인 경우가 더 눈에 띄기 때문인데, 진보를 자칭하는 것들 중엔 더 파렴치한데도 불구하고 사회 중심에 있지 않고 비주류로 비껴나 있기 때문에 덜 주목받는 부분이 있다.

대부분 사회불만이 진보로 투영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사회불만의 일부는 개인불만에서 출발해 죄책감과 공감능력으로 포장되어 발전할 때 타인의 힘을 빌리려고 한다.
타인의 힘을 빌리는 방법 중 하나는 설득이다. 설득은 논리와 감성이 고루 자격을 갖춰야 가능하다.
공감능력과 죄책감이 진보의 무기라면, 자수성가형 노력과 수치심이 보수의 무기다.
죄책감은 수치심보다 더 공감력을 이끌어내기 쉬운 집단의 성격을 띈다. 수치심은 개인적인 일로 전환되기 쉽다. 수치심을 외부에 노출시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파괴할 줄 알아야 하는 일이지만, 죄책감은 그렇지 않다.
인간의 본성은 보수적이다. 있는 것을 지키려는 보수성은 모든 생물에게 공통적이다. 그런 이유로 진보는 늘 보수에 밀리는 바람이 되기 쉽다.

최근 들어 진보입네 하고 여러가지 주장들을 펼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이 얼마나 편협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가 다시 느낀다. 물론 나도 그랬을 것이다. 적어도 이번 대선을 거치기 전에는 그러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가 있었고 그 가치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건 말하자면 나는 옳은 가치를 믿는 사람, 즉 나는 옳은 판단을 하는 사람, 여기서 비약된 논리는 나는 곧 “옳은 사람”이라는 거다.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어내지 못하는 진보진영의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자기가 믿는 가치가 너무나 옳아서, 타인들의 의견- 반대파의 의견은 “옳지 않은 것”으로 치부한다. 그들은 모두 미쳤고 그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니며 그들은 모두 사리판단을 할 줄 모른다. 그래서 진보는 진보가 아닌 자를 쉽게 욕하고 쉽게 밀쳐낸다.

타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줄 모르는 진보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그들은 진보가 쉽게 욕하는 “수꼴”과 다를 바 없다. 나와 가치관이 다르고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귀를 닫고 소리를 지르는 것은 아무 발전도 가져오지 못한다. 왜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귀를 기울여 듣고 반대진영에 서 있는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원하는지 조근조근 따져봐야 한다.

우리는 연대하겠습니다 라는 말은 자칫 잘 못하면 패거리를 형성하겠습니다. 가 될 수 있다.
우리 편이 되어주세요. 라는 문화는 김어준의 곽노현 쉴드에서 분수령을 이뤘다. 김어준은 바로 이런 식의 패러다임을 전복시켜버리는 가공할 능력을 지녔다. 우리끼리 편을 먹고 저들을 싸워 이기자. 라는 논리가 정당하게 들리는 건 그 때부터였다. 그러나, 두 번의 선거를 치르고 대한민국에서 “진보”라 일컬어지는 진영은 처절하게 패배했다. (이 나라에서의 보수/진보 개념에 대한 논쟁은 일단 미루고 편의성을 위해 용어를 사용하도록 한다)
말하자면, 한나라당이 자리를 차고 앉아 세상을 휘젓는 꼴이 보기 싫어 억울함이 하늘꼭대기까지 닿은 비새누리당진영이 외친 구호들은 한마디로 찌질하기 그지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렇다.

우리는 옳고 당신들은 그르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한나라당이기 때문에. 당신들은 이명박과 박근혜와 한 패이기 때문에. 라는 논조는 아무 동의도 얻어낼 수 없다. 이 나라의 반이상이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모든 사람들이 정치평론가가 된 SNS 대한민국에서, 이제 그 자리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나 한 때 나도 한 패거리였던 진영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래서는 또 망하는 길밖에 없겠다는 생각만 든다.
종북 빨갱이를 몰아내자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들도 외롭고, 우리도 외롭다.
외로운 사람들에게 내 얘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은 먼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진보라는 사람들은 여전히 고함만 지르고 있다. 여전히 깃발을 높이 세워 북을 치며 전진한다. 그리고 소리 높여 구호만 외친다. 그들은 그들의 행진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고민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래서는 앞으로도 필패다. 그리고 몇 몇 진보의 패거리에서 함께 웃고 떠들던 사람들은 슬슬 뒤로 물러나 부동층으로 옮겨가며 정치에서 멀어질 것이다. 깃발을 내리고 주저 앉아 귀를 열어라. 지금의 반 한나라당 정서는 여전히 피리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는 쥐떼로 보일 수 있다.
2013. 5.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