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털끝

갑작스럽게 전화가 왔다. 이따 회의에 오시죠? 라는 뜬금없는 말이었다. 느릿한 억양으로 말하는 이 남자는 두꺼운 뿔테의 안경을 썼다. 얼굴의 반을 가리는 안경이었다. 매우 지적으로 보이려는 수작임에 틀림없었다. 지적이라기 보다 의뭉스럽다는 말이 걸맞은 사람이었다. 연락을 받은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오라면 가야 하는 입장이다. 그게 내가 할 일이었다. 시간에 맞춰 도착하겠노라고 말했다.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고 가지 않을“고양이 털끝” 계속 읽기

사람구경

1. 나는 사람을 믿지 않지. 라고 쉽게 말하곤 했다. 그게 아마 작년까지였는지, 올 여름까지였는지 모르겠다. 사람은 예측할 수 없지. 라고 지금은 바꿔 말할 수 있다. 영 능력이 안되는 것 같던 사람이 갑자기 뒷심을 크게 발휘하는 경우도 있고, 매우 잘 해낼거라 기대했던 사람이 바닥을 기는 경우도 본다. 사람들의 진정성, 순수성, 자율성, 자치적 능력들을 전혀 믿지 않으며“사람구경” 계속 읽기

어느 하루의 일기

#1. 힘들다. 힘들어. 죽겠다. 줄타기를 하는 기분이야. 너 그런 거 알아? 여기가 그냥 낭떠러지라고. 발 한 번 헛디디면 죽는 거란 말야. #2. 언제 힘들지 않은 적 있었나 잘 생각해보아. 그런 일은 없었지. 그저 다른 것으로 덮으면서 지내왔을 뿐. 힘겨운 일들은 한꺼번에 몰려오기도 하고 드문드문 몰려오기도 했을 뿐. 그 때 그 때 그 일들을 덮을 수“어느 하루의 일기” 계속 읽기

내게 거짓말을 했던 시간

심심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심심하다는 건 어떤 느낌이죠? 언제나 단순한 표현에 대해서 끝없이 캐묻는게 정신분석이다. 음. 그건 마치 뭐랄까.. 누가 있었으면 좋겠다? 누가 같이 이야기하고 놀아줬으면..? 좋겠다는 기대? 이게 외롭다거나 슬프다거나 그런 느낌은 아니구요. 약간 뭐랄까.. 유아틱? 하다는 느낌이죠. 그러니까 심심해~ 라고 하는 건 마치 저희 아들이 집에서 분명히 놀고 있는데도 뭔가 더 재미난 거를 찾고“내게 거짓말을 했던 시간” 계속 읽기

이 모든 역사는 나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바닥을 보는 때가 있다. 자기 내면의 깊은 바닥을 치는 순간이 온다. 바닥을 보는 일은 끔찍한 일이다. 한 개인의 바닥은 더럽고, 추잡스럽고, 미련하고, 이기적이다. 더러운 것이 눈에 띄는 순간 덮어버리고 싶은 건 당연하다. 한 사람이 얼마나 강인한가는 여기서 드러난다. 한 사람의 내면의 힘은 변화무쌍하여, 언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눈을 감아버리고 도망을 가기고 하고 언제는“이 모든 역사는 나의 것이다” 계속 읽기

외로운 곁

“글자를 어떻게 배웠나요?” 배운 게 아니고, 혼자 뗀 셈인데요. 4살 지나서 엄마가 디즈니 명작만화 전집을 사주셨어요. 처음 읽은 책이 신데렐라. 엄마가 그걸 읽어줬는데, 제 기억으로는 한 번이거든요. 아마 몇 번 더 읽어줬겠죠. 하루는 다시 읽어달라고 했더니, 엄마가 피곤해서 자야된다고. 아, 그 때 4살쯤 맞아요. 엄마가 임신중이었어요. 뱃속에 동생이 있었으니까. 저보고 읽어준 이야기를 기억해서 이야기를 맞춰보라고“외로운 곁” 계속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