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풍경

일요일에 파스타를 먹을 만한 집은 세 군데정도.

그 중 두 곳은 오늘도 만석일게 분명해서 혼자 가기 저어했다. 한 곳은 음식맛이 좋은데 건물위치 때문인지 손님이 붐비지 않는 곳이다. 나는 붐비지 않는 곳을 선택했다. 들어가자 한 테이블이 있었고, 내 뒤에 두 팀이 들어왔다. 오늘도 서빙을 보는 중년남자는 분홍색 셔츠에 넥타이를 맸다. 이 집은 부부가 한다고 들었는데, 부인이 주방을 보고 남자가 홀을 맡는다. 비어있는 1인석을 가르키며 내가 저기에 앉겠다고 하자 남자가 약간 당황한 듯 주춤했다. 내가 앉으려고 한 곳엔 식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남자가 금세 테이블보와 식기와 앞접시를 가져다주었다. 내 옆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는 물이 아닌 연한 연두빛의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그가 킁킁 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간헐적으로 계속 어떤 소리를 냈다. 틱이구나.

수 년 전에 이 집에 왔을 때 주인내외의 자녀로 보이는 사내 아이 둘이 있었다. 동생은 똘똘한 말을 계속 내뱉고 있었고 형은 약간 굼뜬 모양새를 보였던 기억이 났다. 그게 언제였던가. 벌써 4년도 넘은 일이다. 그때 덩치가 큰 아이는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으니 그 아이가 자라 저 청년이 되었을수도 있겠다.

넥타이를 맨 남자가 뭔가 부탁하는 말을 하자 청년이 일어나 테이블을 치웠다. 청년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다시 킁킁 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파스타를 먹는 사이 청년이 주방에 들어갔다. 주방에서 “안돼”라는 여자의 낮은 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일어나니 청년은 기계적으로 일어나 자리를 치웠고 주방에 잠깐 들렀다가 테이블에 앉았다. 계산을 하러 계산대에 섰을 때 청년과 나는 마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파스타맛은 옛날과 조금 달랐다. 기름이 적어 뻑뻑했다. 한 때 평촌에서 제일 맛있는 파스타를 한다고 소문났던 곳이다.

파스타집을 나오는데 옆 식당의 주방이 엿보였다. 긴 비닐앞치마에 머릿수건 마스크를 쓴 여성노인 두 명이 식재료를 손질하며 어떤 이야기를 큰소리로 나누고 있었다. 한 사람은 화가 난 것 같았다.

차를 세워둔 곳으로 돌아가니 주차관리 아저씨가 앉아 있어야 할 곳에 보이지 않았다. 관리원 부스가 가까이 있었는데 주차관리원은 부스 안에서 반찬통을 꺼내놓고 밥을 먹고 있었다. 12시 50분이었다. 나는 차 앞에 꽂힌 쪽지를 들고 부스로 다가갔다.

식사 하시는 거 같아서 제가 왔어요.

주차관리원은 입을 닦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저쪽으로 가서 끊어드려야 하는데. 관리원이 입을 가리며 말했다.

식사 시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식사하셔야죠. 멀지도 않고.

관리원은 고맙다고 인사했다. 주차비 1200원.

그 구역의 주차관리원들은 모두 노인이다. 비오는 날, 눈 오는 날, 햇빛이 내리쬐는 여름에도 늘 자리를 지키고 늦게 나타난다고 화내는 운전자들의 짜증을 받아내는 사람들의 점심시간은 정해지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오늘부터 점심시간에는 전화를 받지 말라’고 지시하던 어느 중소기업사장이 떠올랐다. 내가 자주 가는 사무실 백반집에는 AS를 다니는 기사들이 자주 오는데 그들은 밥을 입에 물고 한참 이야기를 듣다가 이렇게 말하곤 한다. “네네 고객님, 제가 지금 밥 먹는 중인데요. 얼른 먹고 가겠습니다.” 점심시간에 점심을 먹는 것도 사치가 되는 건가.

온갖 차들이 쏟아져 나온 공원 부근을 지나 시험을 앞둔 아이들을 태우러 나온 학부모들의 차로 학원가의 정체된 도로를 지났다. 일요일. 누군가의 노동을 먹고, 나도 출근을 했다.

일요일 밤, 세신

일요일 밤인데 이해할 수 없을만큼 목욕탕에 사람이 많았다. 일요일 낮까지는 그럴만 한데, 원래 월요일 출근 전에는 어디나 썰렁한 법 아닌가. 밤 10시가 다 되어 들어섰는데 꼬맹이들도 엄청 많고 가족단위 입장객이 많았다. 다들 가족단위로 어디 놀러갔다가 비오고 으슬으슬하니 단체로 목욕이나 하고 가기로 맘 먹은 걸까.

들어서자마자 세신을 할 요량으로 오만원짜리 지폐를 카운터에서 만원짜리 다섯 장으로 바꿔 장농열쇠로 돌돌 싸맸다.

내가 가는 목욕탕에서 세신을 맡기는 규칙이다. 지폐 두 장을 돌돌 말아 장농열쇠로 싸서 세신관리사들이 있는 코너 창가 선반에 줄을 세워두면 순서에 따라 번호를 불러준다. 이곳의 세신관리사는 평균 다섯 명 정도, 2교대로 일하는데 대부분 자정에는 퇴근하고 조금 일찍 끝나거나 조금 늦게 끝나거나 1시간 정도 변동이 있다. 사람이 너무 많은 날엔 1시까지도 일을 한다. 아주 손님이 적은 날에는 두 명 정도만 일을 하고 있는데 출근을 해서 휴게실에서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체적으로 다섯 개의 세신베드가 끊임없이 돌아가는 편이다. 인근에 다른 찜질방+사우나가 2km 정도 떨어진 곳에 두 세개씩 있지만 여기가 제일 깨끗해서 자주 찾는다.

열쇠를 올려놓으려고 김이 서린 안경을 내리면서 살살 걸어가 열쇠 놓는 곳을 보니 열쇠가 10개 넘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40분 정도 넉넉하게 여러 개의 탕을 돌며 쉴 예정이었기에 나는 일요일 저녁이니 40분쯤 있다가 불러달라고 얘기하려고 여유있게 갔는데 낭패다. 이러면 순서대로 해도 40분 넘어서야 내 차례가 돌아올지도 모른다.

목욕탕에 가면 대부분 세신관리사에게 몸을 맡긴다. 그냥 귀찮아서, 라는 핑계는 너무 구차하니까 내가 왜 세신을 포기하지 않느냐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생각해본 적 있다. 때 미는 게 너무 힘들면 안 밀면 될 거 아닌가. 안 밀어도 안 죽는다. 때 미는 게 피부에 그다지 좋지 않다는 설도 있다. 애를 낳고 난 다음부터 세신관리사에게 몸을 맡기기 시작했는데 내 스스로 내 몸을 닦는 것보다 훨씬 더 세심하고 야무지기 때문이었다. 애가 어릴 때는 녹초가 되어서 머리 감는 것도 기력이 딸릴 때가 있었는데 그때 세신관리사는 지치지 않고 구석구석 내 몸을 살펴주니 얼마나 좋은가.

어떤 세신관리사는 나에게 유방에 멍울이 잡히는 것 같다 해서 병원을 갔다가 유선염 진단을 받기도 했다. 세신관리사는 하루 종일 남의 몸을 만지게 된다. 세상 수만가지 사람들이 벌거벗고 그 앞에 드러눕는다. 어떤 단서도 없다. 가끔 악세사리를 했거나 문신이 있는 경우를 빼고 대체적으로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에서 세신관리사를 만난다. 그들은 벌거벗은 몸을 만지며 삶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나보고 앉아 있는 일을 하는 모양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여자들만 가득한 날 것의 공간이라 말을 아끼는 사람들이지만 나는 그들이 한 사람을 만나면 대략의 역사를 훑어내는 능력도 갖출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직업이란 게 그렇다. 사람을 대하다보면 사람을 읽어내는 능력을 갖게 되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몸에 자기 역사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니까. 내 다리를 움직이면서 관절이 이상하다는 걸 느낄 거고 어깨를 두들기며 같은 자세로 오래 앉아 있다는 걸 유추할 것이다. 나는 이들의 전문성을 믿는다. 이들이 병원 가보라는 조언을 했을 때 그 말을 들어서 손해봤다는 사람 없다. 물론, 가끔, 마사지를 받으라고 강력하게 권하는 사람이 좀 난감할 때도 있다.

수년전, 그날도 세신관리사에게 몸을 맡기고 눈을 감고 있었다. 맨 몸으로 드러누우면 시력이 나빠 사방 분간이 안되기 때문에 이런 저런 생각을 하기에 좋은데 문득 누가 날 이렇게 정성스럽게 씻겨줬었는지 기억이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감정기복이 커서 일관성 없는 육아로 가끔 학대하고 가끔 과하게 상냥했던 엄마는 내가 세 살일 때 혼자 머리를 못 감는다고 욕조에 거꾸로 처박은 적이 있다. 그때부터 목욕이 공포가 되는 게 논리적으로 타당한데, 나는 아랑곳없이 물을 좋아했고 여전히 목욕하는 걸 즐긴다. 사주에 물이 적어서 그렇다나. 사주 말고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아이를 낳고 나서도 누군가 지극정성으로 돌봐주거나, 아니면 그 이전에 지독하게 앓았을 때도 극진한 돌봄을 받아본 적 없는 나는 한 달에 두 세번쯤 세신관리사에게 2만원을 내고 때를 미는 것으로 최소한의 자기 방어를 해낸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박산호 샘의 책 제목인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나에겐 그정도 타인의 돌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사업가가 되어 돈을 잘 벌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한 명이 수 년전에 “마흔에 가까울 수록 타인의 돌봄을 사서라도 챙길 필요가 있다.”라고 한 말도 나의 이런 생활습관에 좋은 핑계가 된다.

아무튼 오늘은 대기가 길 것이라 한참을 탕을 오갔는데 1시간이 가까워지자 지루할 뿐 아니라 지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때를 불릴려면 계속 물에 몸을 담그고 있어야 세신을 받기가 쉬운데 이벤트탕이나 약탕에 들어가면 몸이 미끌거려 때가 잘 안나온다고 세신관리사들이 잔소리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잔소리도 달갑게 받는다. 이제는 나에게 잔소리 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런 잔소리가 반가울 때도 있다.

한 시간이 다 되었는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냐고 침대쪽에 가서 기웃거리며 물었더니 순서가 다 되었으니 두 명 정도 내려가면 부르게 될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오늘의 내 번호는 223번. 223번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다다다다 빠르게 걸어가서 착지 완료, 자세를 잡고 세신관리사가 딱 폼을 잡았는데 관리사가 부른 번호는 223번이 아니고 213번이었다며, 213번 임자가 나타난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내려가려고 했는데 관리사가 그냥 있으라며 됐다고 했다. 유쾌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얼핏 듣기로 (안경을 벗으면 눈치를 살피지 못해 귀도 잘 안 들린다) 213번은 5천원을 추가하는 뭔가 다른 코스였던 모양. 그러니 나를 받은 세신관리사는 뚱뚱해서 밀기 힘든데다가 5천원을 잃어버린 심정이었을게다. 때가 안 불었느니, 소리를 잘 듣고 왔어야느니 관리사의 심기불편함이 전해졌다.

바빴다는 얘기다. 이 일은 사실 예측할 수 없는 일이라 손님이 밀린다고 일할 사람을 더 불러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람을 하염없이 기다리게 하고 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대부분의 서비스업이라는 게 그렇듯이 말이다.

“얼굴 비누칠 해드려?”

이 말은 ‘에지간하면 하지 말고 그냥 내려갔으면 좋겠다.’는 뜻이고,

“뒤꿈치 밀어드려?” 라는 말은 ‘이것도 바쁘니까 생략하고 내려가서 니가 알아서 했음 좋겠다.’는 마음으로 읽는다.

나는 둘 다 생략해도 좋다고 했지만 관리사는 굳이 발뒤꿈치를 조금만 밀어주었다. 시늉에 가까웠다. 그 정도는 내가 하는 게 차라리 낫다. 간지러워서 원. 한마디 한 마디 말투나, 손놀림이 거칠었다. 아주 짜증이 나서 죽겠는 모양이다. 이 관리사는 이미 내가 여러 번 세신을 받은 적이 있는데 수차례 7만원짜리 마사지를 받으라고 권했고 그때마다 내가 사양했었다. 딱 한 번 5만원짜리 마사지를 받은 적 있는데 그때는 정말 어깨와 목이 너무 안 좋아 오랫동안 병원을 다니던 차였고 이 관리사에게 안마를 받고 나서 하루 정도 시원하게 지내기도 했다. 돈도 돈인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매번 사양했었다. 손이 야무지고 매운 편인데 체격이 작고 날렵하다. 나는 이 목욕탕에 1년 넘게 꼬박꼬박 다니며 몇 명의 성향을 파악했는데 이 관리사는 일을 잘 하고 돈 욕심도 많은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얼굴비누칠이나 간단한 얼굴마사지를 생략하고 세신베드에서 내려왔다.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목욕탕을 나가 탈의실에서 내 옷장을 열고 만원짜리 하나를 꺼내 카운터에 가서 5천원짜리 두 개로 바꿨다. 그리고는 5천원짜리를 작게 접어서 다시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나를 방금 내려보낸 관리사는 새 손님을 받아 열심히 때를 밀고 있었다. 나는 뿌연 안경을 들어올려 눈을 마주친 다음 그 이의 오일통 아래에 오천원짜리를 넣었다.

나를 빤히 보던 그이가 환하게 웃었다.

“어머 이를 어째.”

“덩치값이예요.” 나는 호기롭게 웃으며 다시 인사를 했다. 돌아서는 나에게 그이는 “고마워서 어째. 바빠서 잘 해주지도 못했는데. 고마워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오천원에 그이의 미소를 샀다. 그러니까 나는 오늘 밤 편안하게 잠들 것이고 그이도 어딘가 억울한 마음을 조금 달랬을지도 모른다. 개뿔도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겐 ‘누군가를 화나게 한 것을 수습했다.’는 변명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좋은 게 좋은거라고 말하려면 지갑을 열면 되고, 그러기 위해서 또 열나게 일을 하는 것이다. 타인을 불편하게 했다는 것은 나에게 적잖은 타격이 된다. 사실 세상 이치가 합리적이지 않은 게 많다. 택배기사가 20kg 짜리 쌀을 나르거나 여섯 개 들이 생수를 배달하면 돈을 더 받는 게 옳은 것 같은데 세상은 그렇지 않고, 나처럼 살이 많은 사람은 일 해야 하는 면적이 넓어지니 돈을 더 받아도 되겠지만, ‘뚱뚱하다고 차별하냐’는 논리가 있을테니 그냥 퉁쳐서 간다.

푼돈에 예민한 사람들이 있다. 그게 사람의 마음이라 그렇다고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냥 일하는 것보다 대가가 적을 환경에 계속 노출되면 푼돈에 예민해진다. 그리고 간혹 나는 내 잇속을 챙기기 위해 푼돈으로 짧은 순간의 마음을 사기도 한다. 세상에 선한 게 있을까. 나이를 먹어버린 자들에게.

여자들의 도시

1.

오늘 아침엔 늦잠을 자려고 맘을 먹었는데 일찍 깨어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다. 이명박 구속으로약간 흥분상태였던 게 분명하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는데다가 어깨와 팔 통증이 심해 집 근처 사우나에 갔었다. 불가마에 들어가려는데 입구를 떡 막고 어떤 여자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육중한 몸을 움직인 여자가 통로를 열어주어 나는 불가마 안에 들어가 앉아 책을 폈다. 여자는 궁둥이를 조금 움직인 상태로 계속 통화를 하고 있었다. 수원에 누군가 입원을 했고 그 입원한 환자의 지인인지 본인인지와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여자의 목소리를 작지 않았고 나는 15분이 지난 걸 확인한 뒤 문장을 고를 새도 없이 “아주머니 통화 더 하셔야 되면 좀 나가서 하시면 어때요?”라고 큰 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여자는 고개를 돌리고 등을 돌리더니 몸을 부비적거리며 자리를 떴다. 그 여자가 통화를 하는 그 15분 동안, 나는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아침 9시도 안 된 시간에 찜질방에 온 사연은 무엇인지, 여기서 통화를 못하게 하면 밖에 나가선 통화를 할 수 있을 것인지,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는 모두들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는데 저 여자는 거기서도 저런 통화를 할 수 없을 것이며, 가족이 있다면, 집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있지 않고서야, 가족들도 큰 소리로 장시간 통화를 하는 것에 타박을 할 것이며, 그렇다면 저 여자는 어디서 마음껏 통화를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라도 참아야 하나.

알지도 못하는 한 사람의 행동으로 타인의 삶을 이리 저리 재단해보며 나는 15분을 견뎠고 결국은 참지 못해 그 여자를 내몰아버렸는데. 몰지각한 행동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말하는가.

2.

명동을 나가는 지하철을 타고 회현역에 진입했을 때 내 앞에 통 넓은 회색바지에 회색 코트를 입은 여자가 섰다. 마른 여자였다. 내 눈높이에 닿은 그녀의 배가 동그랗게 불러 있었다. 가방에 “임산부 먼저”라는 고리가 달린 것을 보고 자리를 양보했다. 여자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가방을 끌어안고 자리에 앉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임산부인지 확인하려 들었을까 생각했고, 행여 성질 못된 노인을 만나 폭언을 들은 적은 없었을까 생각했고, 그 이야기를 집에 가서 남편에게 털어놓으며 엉엉 울었을까 생각했고, 오늘도 퇴근을 하는 길인 것 같은데 3개월쯤 되어 보이는 산모와 태중의 아이는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까 염려했다.

3.

명동성당을 올라가는 계단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중늙은이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여자는 스카프인지 목도리인지 모를 것으로 머리통을 감싸고 있었는데, 그 감싼 것 밖으로 흰 머리칼이 삐져나와 있었다. 여자는 웃고 있었다. 분명히 나를 보고 내 눈을 바라보며 실실 웃고 있었는데 제정신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계단을 올라가는 게 쉽지 않은 내가 천천히 계단을 하나씩 디뎌 올라가자 여자는 “천원만 줘.”라고 말을 했다. “천원만 줘.”

나는 목소리를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계단을 올랐다.

신을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제단을 보러 가는 것도 아니다. 저기 남겨둔 기억 하나를 되살리고 싶었던 건, 공기 때문이었다. 적당히 쌀쌀한 날씨에 어둠이 깔린 거리를 환하게 밝히는 전등 사이를 헤매고 다니다 이 분주한 도시 한 복판의 섬같은 저 곳을 찾아가는 이유는, 거기 그 건물이 있기 때문이다.

구걸을 하는 사람을 외면하는 부자들을 떠올렸다.

행여 그와 마음이 닿을까봐, 그 마음에 가난이 옮아올까봐, 전염병을 피하듯 돌아가고자 하는, 걍팍한 마음을 느꼈다. 내 안에 있었다. “천원만 줘.” 그 말이 어색하지 않은 날이 올 수도 있다.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공포는 골목 마다 숨어있다. 기억이 없던 시절부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고갔던 그 거리에서 나를 밀쳤던 어쩔 수 없는 것들의 힘은 언제나 나를 짓누른다.

4.

명동의 섬.

카톨릭회관 지하에 있는 전광수 커피에서 저녁커피라는 드립커피를 시켰다. 커피를 마시고 화장실을 갔다가 집에 가면 되겠다. 휴대폰을 열어 집에 가는 여러 가지 경로를 찾아보다가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코스를 살피고 있는데 한 여자가 나를 빤히 본다. 중년의 여자가 입구에 있는 테이블에 짐보따리를 올려놓는 걸 내가 보고 말았다.

“짐 좀 봐주세요.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보따리가 많아서.”

나도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날까 하던 참인데 예기치 못한 남의 짐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내가 검색을 끝낸 뒤에 금세 돌아왔다. 커피를 다 마시고 화장실에 갔더니 그 여자가 짐을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머니가 안 나오셨다며 웃었다.

5.

집에 오는 버스엔 자리가 있었다. 앉자마자 이어폰을 꽂고 학교 강의를 들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휴대폰을 잡은 내 손을 누군가 몇 번 누르는 느낌이 나서 잠이 깼다. 휴대폰을 들은 여자의 손이었다. 내 고개가 의자 밖으로 떨어지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여자의 얼굴은 확인하지 못했다. 내 휴대폰이 떨어지려고 해서 나를 살며시 깨운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저 손잡이를 잡지 못해서 실수로 내 손을 스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낯모르는 여자의 손길 덕에 잠에서 깨어 갈아타야 할 정류장에 무사히 내렸다.

6.

집에 돌아와 늙은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몇 번 봤던 늙은 시츄가 공원에서 혼자 어기적대며 걷고 있었다. 따뜻한 천으로 몸을 감쌌는데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같은 단지에서 봤던 아이였다. 많이 늙었고, 눈은 안 보인지 오래된 듯 했고 걸음걸이도 좋지 않았다. 나는 주인이 보이지 않아 엄마는 어디로 갔냐고 시츄에게 물었다. 쭈그려 앉아 엉거주춤 걸음을 겨우 떼는 시츄의 사진을 찍었다. 생각했다. 버렸나? 잃어버렸나? 주인이 있는 개인데. 그 개가 맞는데. 아프다고, 늙었다고 버린 건가. 데리고 가야 하나? 동물병원은 문을 닫았을 텐데. 얘를 내가 또 데리고 갈 수 있나? 내가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자 내 시야 밖에 있던 개주인인 여자가 나타났다.

“다리를 잘 못 써서 좀 걸어보라고 데리고 나왔어요.” 개 산책을 시키다 몇 번 마주쳤던 그 여자였다. “아…”나는 말을 보태지 않았으나 나보다 나이가 열 댓살은 많아 보이는 그 여자는,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 알 것이다. “개를 데리고 다니다 보니 혼자 있는 애들 보면 걱정되죠.” 여자가 내가 할 말을 대신 했다.

 

날씨가 적당히 쓸쓸하다. 세상엔 이렇게 여자들이 많다. 품고 기르고 돌보고 그리고 헤매는. 수많은 여자들의 도시를 저녁 내내 걸었다.

2018년 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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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을 까며 

마늘을 까며 송곳을 본다. 이렇게 많은 마늘을 까본 적 없다.

이렇게 많이 깔 필요가 없었는데 그냥 그렇게 세 시간 정도를 보냈다.
안하던 짓을 하려니 왼손 검지손가락이 붉어지며 지릿지릿 통증이 왔다.

마늘을 많이 까면. 맨 손으로.

이렇게 되는구나.
매번 사먹던 깐마늘을 생각했다.

장갑 끼고 까야되는구나.

장갑없이 일하던 중국의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맨손으로, 인이 배겨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
지난 주에 놓친 송곳을 다시 본다.

고문 후유증으로 죽어가는 고구신때문에 운다. 마늘 때문은 아니다.

마트 언니들 때문에 운다.

오늘 이마트를 갔다와서는 아니다.
고양이가 와서 나를 본다.

손을 내밀자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고개를 치켜든다.
고구신도

이수인도

정부장도
모두 열심히 살았다.
우리 모두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왜 언제부터 우리모두 패배했는가.
2015. 12. 5.

눈이 많이 오던 날 

눈 내리는 해장국집에 여자 둘이 들어섰다. 신발 벗기 귀찮다며 의자에 앉자더니 이내 방으로 올라왔다. 그 집의 의자가 있는 테이블은 알량하기 짝이 없어서 앉으라고 채워둔 거 같지 않다. 안경 쓴 총각이 들여오는 식재료나 다듬던 콩나물이나 무우를 쌓아두거나 때로 주인장이 읽던 신문지를 놓아두는 곳에 더 걸맞다.
해장국 두 그릇을 시킨 여자가 창문을 보며 비명에 가까운 탄식을 뱉었다. 어머 어머 눈 오는 거 봐.

눈은 진즉부터 오고 있었는데 오늘 처음 눈을 본다는 듯 중년 여자가 흥분했다.

이런 날은 저수지에 가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앉아 있어야 하는데.

여자가 말해놓고 까르르 웃었다. 앞에 앉은 여자가 아직 낭만이 죽지 않았다고 말을 받았다.

언니 나는 저번에도 비오는 날 저수지 가서 혼자 커피 시켜놓고 두 시간 앉아있다 왔잖아?

여자가 다시 까르르르 웃었다.
해장국을 가져다 주는 앞치마 입은 여자에게 저수지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여자가 말을 건넸다. 언니도 땡땡이 치고 저수지 가서 커피나 마시자.

해장국집 의자에 앉은 남자는 계속 혼잣말로 씨팔, 이라 말했다. 막걸리를 한 병 시켜놓고 해장국을 간간이 떠먹으며 또 말했다. 씨팔.
눈발이 흩날리는 사거리를 지나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사이가 좋아보이는 중년 남녀가 우산 하나를 쓰고 마주보며 웃고 있었다. 택시 한 대가 두 사람 앞에 와서 서자 여자가 혼자 택시에 올라탔고 창문을 내려 남자에게 살뜰하게 손을 흔들며 떠났다.
신호등이 바뀌지 않은 사이 나는 떠나간 여자의 날씬한 다리를 기억했다.

문득 어제 만난 서른 일곱의 대리기사가 떠올랐다. 프랜차이즈 관리직을 하다 프랜차이즈를 내려고 수제 햄버거집을 열었는데 적자를 면치 못해서 대리운전을 시작했다는, 아리송한 얼굴의 사내는 오늘도 부지런히 고기를 굽고 있겠다.

2015. 12. 3.

초승달 2

살수록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는 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자꾸 겪게 된다는 뜻이다.

이따봐용맘미. 라고 카톡을 보내는 딸아이의 수줍은 미소는 왜 이리도 처연한가.

하루 종일 술독에 절궈져 초저녁부터 코를 고는 사내 앞에서 티비를 틀어놓고 춤을 추는 아이의 허벅지가 튼튼하다.

늙은 개와 손바닥만한 아파트단지를 두 바퀴 돌았다. 이제는 누구 앞에서도 울고 싶지 않은 나이가 되었구나.

하늘에 초승달이 날을 세운 채 반짝인다.
이 가슴에 와서 꽂힐 것처럼. 누구를 노려보는지.

2014. 12. 28.

초승달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콧수염 사내가 말했지. 요즘들어 잘 알지도 못하는 그 사내가 참 그립네.
처음에는 비극으로 나중에는 희극으로 온다는 말은 참담하다. 수많은 비극을 겪어야만 한다는 건지.

“칭얼칭얼”을 하지 못해 그 자리에 “씨발씨발”을
넣는 어른들이 있네. 익숙했던 풍경은 수십년이 지나도 그대로 반복되고, 우물속에 빠진 두레박에 어린 계집애 둘이 떨고 있는 그림이 되네.

달님 달님
우리를 살리시려면 튼튼한 동아줄을 내려주세요. 달님은 귓구녕이 막혔는지 대꾸가 없네. 손톱이 파이도록 기어 올라온 우물가에 입을 떡 벌리고 서 있는 호랑이 한 마리.

떡 하나 줄께 잡아먹지 말렴. 제발. 너도. 고양이가 되는 건 어떻겠니. 누군가를 잡아먹는 건 너무 고달픈 일 아니겠니.

2014. 12. 28.

저녁

새벽녘 두어 번 뒤척였다고 휴대폰 어플이 알려준다. 내가 잘 잤는지, 잘 못 잤는지, 그런 것도 기계에게 묻고 사는 한심한 삶. 내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씹다버린 사과모양의 전자제품인지도 모른다. 내가 나인지 사과가 나인지, 이미 그 경계는 허물어 진 것 같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말을 찾아 헤맨다. 쓰리고 아린 상처를 적확하게 표현해 줄 단 한 줄의 문장을 찾아 긴 터널을 쑤석거려도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다. 어스름은 삽시간에 사위를 덮고 아이들이 내 새끼를 부르는 소리가 크게 들리면, 아이도 돌아오지 않는 저녁. 늙은 개 한 마리는 네 다리를 곧게 뻗고 편안하게 자기 시작한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라고 말하는 것과, 아프다고? 씨발 나도 좆나 아프다고! 라고 말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빨을 드러낸 작은 개새끼는 커다랗고 하얀 아름다운 진돗개를 보고 주제넘게 짖고 있다. 빈 식탁은 굴러다니는 몇 가지의 펜만 싸안고 아무 것도 잉태하지 못하는 버려진 땅처럼 울고 있다. 계절이 바뀌는 바람이 분다. 고통의 무게는 가늠하지 않는 것이며 비교하는 일은 절대 불가한 것이라고 남들 앞에서 쉽게 말해도 머리통을 짓누르는 이 두통의 무게는 펜잘이나 게보린 수백 알로도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세상천지 아무도 남지 않은 그 느낌을 알고 싶어서 사막에 서보는 자가 있고, 마음의 고통과 몸의 고통을 일치시키기 위해 손목에 커터칼로 글씨를 쓰는 아이가 있다. 사랑, 이라고. 말해 본 적 없는 사연 때문에 가짜 자아를 만들어 자신을 둘로 나누는 청년이 있고 세상은 모두 내 편이라고 스스로에게 거짓말하며 계속해서 돈을 꾸고 도망가는 여자가 있다. 글줄께나 쓴다는 그 어떤 문인도 헤아리지 못하는 각자의 마음들이 어느 집 밥상위에서 작두를 탄다. 피칠갑을 하고 갯벌을 기어가던 어느 미친년이 했던 말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갈꺼여 갈꺼여.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내 지문이 없으면 열리지 않는 저 작은 전자기계 속으로 들어가 휘적거리며 다녀야 할까. 말라비틀어진 씨앗은 어디서 열리는 것인지 기계에다 대고 말을 하면 저 년이 알려줄까.

2014. 9. 1.

저녁

새벽녘 두어 번 뒤척였다고 휴대폰 어플이 알려준다. 내가 잘 잤는지, 잘 못 잤는지, 그런 것도 기계에게 묻고 사는 한심한 삶. 내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씹다버린 사과모양의 전자제품인지도 모른다. 내가 나인지 사과가 나인지, 이미 그 경계는 허물어 진 것 같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말을 찾아 헤맨다. 쓰리고 아린 상처를 적확하게 표현해 줄 단 한 줄의 문장을 찾아 긴 터널을 쑤석거려도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다. 어스름은 삽시간에 사위를 덮고 아이들이 내 새끼를 부르는 소리가 크게 들리면, 아이도 돌아오지 않는 저녁. 늙은 개 한 마리는 네 다리를 곧게 뻗고 편안하게 자기 시작한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라고 말하는 것과, 아프다고? 씨발 나도 좆나 아프다고! 라고 말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빨을 드러낸 작은 개새끼는 커다랗고 하얀 아름다운 진돗개를 보고 주제넘게 짖고 있다. 빈 식탁은 굴러다니는 몇 가지의 펜만 싸안고 아무 것도 잉태하지 못하는 버려진 땅처럼 울고 있다. 계절이 바뀌는 바람이 분다. 고통의 무게는 가늠하지 않는 것이며 비교하는 일은 절대 불가한 것이라고 남들 앞에서 쉽게 말해도 머리통을 짓누르는 이 두통의 무게는 펜잘이나 게보린 수백 알로도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세상천지 아무도 남지 않은 그 느낌을 알고 싶어서 사막에 서보는 자가 있고, 마음의 고통과 몸의 고통을 일치시키기 위해 손목에 커터칼로 글씨를 쓰는 아이가 있다. 사랑, 이라고. 말해 본 적 없는 사연 때문에 가짜 자아를 만들어 자신을 둘로 나누는 청년이 있고 세상은 모두 내 편이라고 스스로에게 거짓말하며 계속해서 돈을 꾸고 도망가는 여자가 있다. 글줄께나 쓴다는 그 어떤 문인도 헤아리지 못하는 각자의 마음들이 어느 집 밥상위에서 작두를 탄다. 피칠갑을 하고 갯벌을 기어가던 어느 미친년이 했던 말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갈꺼여 갈꺼여.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내 지문이 없으면 열리지 않는 저 작은 전자기계 속으로 들어가 휘적거리며 다녀야 할까. 말라비틀어진 씨앗은 어디서 열리는 것인지 기계에다 대고 말을 하면 저 년이 알려줄까.

2014. 9. 1.

내일의 전쟁, 오늘의 일상

내일 세상이 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던가.

뭐 영국에서 염려됬는지 연락이 왔었다.
BBC 는 매일 매일 북한 소식 전하느라 정신이 없고, 미국은 CNN도 난리를 치는 모양이다.

나는 일단 전쟁은 나지 않는다. 라고 믿고 있긴 하다. 그 이유는

1. 본국보다 영국과 미국에서 더 수선을 떠는 게 매우 의심스럽고
2. 북한의 결속력이 그렇게 전력투쟁 할 만큼이 안된다고 생각하고
3. 늘 사고치고 강짜 부리는 건 조직이나 사람이나 비슷한데 그들이 원하는 건 정말 전면불사 자폭이 아니고 뭔가 다른, 매우 유치찬란한 것일 경우가 많으며
4. 북한은 남한은 솔직히 쳐주지도 않고 자기들의 적이 미국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싶고
5. 북/중의 관계상, 디펜스 21에서 논평한대로 한국 수도권에 중국인이 너무 많아 외교분쟁 가능하다. 여기 한 표 주고 싶고
6. 지금 전쟁분위기와 한반도 위기를 극도로 끌어올리면 양쪽 정부가 자리를 잡는데 매우 유리한 것이, 한국도 미국도 북한도 모두 정권 초창기라는 점이고
7. 동아시아내의 우경화는 필연적이고 이로 인해 권력자들은 우경화의 초석을 다지는 게 매우 중요하고
8. 이 국면에 조용하게 팔짱끼고 있는 한국정부의 태도도 무지하게 의심스러우며
9. 나는 음모론을 믿는 편이고
10. 전쟁 따위 생각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내일의 불확실한 전쟁보다 오늘의 나의 하루가 훨씬 더 중요하다.
나는 불확실한 전쟁보다

내가 지켜야 할 약속이 훨씬 중요하고,
내 아이의 알림장이 더 중요하고,
이 새끼가 왜 매일 줄넘기 하기를 안 지키는가도 중요하고
내일 있는 딸래미의 모의수능도 중요하고
가계부에 어디 빵꾸가 나지 않았나 챙기는 게 중요하고
중요한 내용이 들은 내 하얀색 USB를 어따 처박았는지 찾는 게 중요하고
내일 오전에 있을 강좌 진행이 중요하다.

나는 내일보다 오늘이 중요하고 오늘 몇 시에 자서 내일 몇 시에 안 피곤하게 일어날 수 있는가가 훨씬 더 중요한데. 그건 나에게 오늘이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남편이 그런 말을 했었다.
젊은 아이들이 비전이 뭐냐고 묻는다고.
그러면 그는 “오늘은 버티는 게 내 비전이다” 라고 한다 했다.

그렇게 하루 하루가 전쟁처럼 치뤄야 할 일들이 많은 경우, 내일을 생각하기 어렵다.
당장 밀려닥치는 전화, 처리해야 할 일, 여기저기서 손내미는 요청, 챙겨야 할 일상들. 그런 것들이 복잡다단하고 회오리가 몰아치는데 언제 내일을 생각하나.

나이를 먹을 수록 걱정이 많아진다고 한다.
오늘 동네 어떤 언니는 애는 학원가서 저녁이나 되야 오는데 심심해 죽겠다고 카톡을 보내왔다. 심심해 죽겠는 일상을 비난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지내본 적이 없어서 그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나이를 먹을 수록 걱정이 많아진다는 건 오늘이 한가해진다는 얘기일게다.
오늘이 한가하니 내일을 생각하고, 내일을 생각하다 보니 어제도 떠오르고 그러는거겠지.

괜시리 쓸쓸해진다.
오늘이 한가해서 내일의 불확실한 전쟁을 걱정하는,
많은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나는 전쟁위기보다 더 가까이 와닿는다.

2013. 4.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