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넷

마흔 넷.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많이 버렸다.
나에게 장애물이었던 것들, 내가 사랑하지 않는 것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

서른 살무렵부터 빨리 늙고 싶었다.

나이를 먹으면 사는 게 편해질거란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어쩌면 지금이 제일 좋은 시기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다시 힘들어질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삶은 몇 년째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 더 이상 등짐을 진 당나귀 같은 삶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건 내가 간절히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경새재를 넘어오며 골짜기 깊이 파고드는 땅과 비구름을 뿌리는 하늘을 보며, 이제 다시 산을 좋아하긴 어렵다는 걸 알았다.

나는 여전히 너무 많은 걸 사랑하고 있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괴롭던 시절이 있다. 그게 나에겐 청춘이었던 것 같다. 한 소설가의 문장을 읽으며 명치가 뜨거워졌다. 한때 모든 것을 상징으로 읽고 깨달으려 노력한 적 있다. 지금은 그저 있는 그대로를 본다. 노력하지 않는다. 잘 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칭찬받으려고 눈치를 살피지 않는다. 마흔 넷에 이 정도 인간이 되었으면 내 깜냥에 알맞다 생각한다. 모자라도 어쩔 수 없다.

이대로 10년쯤 살다가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불쾌한 것에 화를 내고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점점 편안해진다. 아마 점점 괴팍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방도는 없을 것이다. 이제사 인간이 뭔지 알아채기 시작했다. 자고 일어나면 나는 다시 업무모드로 돌아간다. 많은 것을 잊은 척 할 것이다.

2018년 5월 6일

 

IMG_6752

마른 빵, 마른 잎 

이한열열사의 추모제가 열리는 시청 앞 광장에 노을이 내려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치환이 나와 거칠고 익숙한 목소리로 “마른 잎 다시 살아나”를 부르고 있었다. 

시청 뒤 NPO센터에서 있을 행사에 가러 나온 길이었다. 

행사 시작전인 센터 안은 꽤 무더웠다. 냉방이 필요했는데 아직 장치를 가동하지 않은 듯 했다.

북태평양에서 바람이 불어온다는 며칠, 바깥 바람이 상당히 시원했다. 

베이스와 낮은 드럼 소리의 진동이 거리를 쿵쿵 울리는 시청 뒷골목에 앉아 있었다. 

사위가 곧 어두워질 것이었고 아직 여기 저기 햇빛이 남아 있었다. 

선배를 만나 벤치에 앉아 일 이야기를 하다, 80년대의 이야기를 잠시 들었다. 
우리가 앉아있던 벤치 앞,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이면도로에 작은 원동기가 하나 섰다. 뭔가 들은 것 같은 비닐봉투를 안장에 얹은 작은 원동기에서 노인이 내렸다. 그는 내가 바라보는 방향의 가장 끄트머리 벤치에 앉았다. 주섬주섬 품에서 빵과 우유를 꺼내 천천히 입에 쑤셔 넣었다. 나는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가 빵을 먹는 모습이 자꾸 시야에 들어왔다. 70년대 학번들의 낭만과, 80년대 학번들의 전투적이고 조직적인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빵이 들어가는 노인의 입 매무새가 자꾸 눈에 들어와, 87년쯤, 저 사람은 몇 살이었을까, 딴 생각을 했다. 
칠순은 훌쩍 넘었을 거 같은 노인의 저녁은 시원한 북풍이 부는 시청 뒷골목의 벤치 위에서 마른 빵 하나. 오늘치 빵 하나의 노동은 어떠했을까.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대통령 탄핵을 거머쥐고, 새로운 정권을 창출한 오늘, 박종철과 이한열이 죽고 30년이 지난 지금, 노인의 삶을 얼마나 달라졌을까. 
적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대오는 흩어져 골목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가스처럼 낮게 깔리는 귀신에 사로잡혀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단 하나의 마른 빵을 위해, 마른 잎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걱정말라는 노래의 가사를 믿어도 될까. 
20170609

뒤통수

1.
몇 년전,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이었다.

암 생각없이 길을 걷다가 갑자기 턱에 뭔가가 날아왔고 엄청난 충격이 있었다. 날아와 내 턱에 부딪쳐서 떨어진 건 일수대출 찌라시.

일수대출 찌라시를 뿌리는 사람들은 스쿠터를 타고 다니며 여기 저기 종이를 던지는데 그 종이는150~200g 정도 되는 아트지 류다. 코팅된 두꺼운 종이라는 얘기.

기껏해야 책 표지 정도 되는 얄팍하고 작은 종이가 바람을 얹고 날아왔을 때 중력이 얼마나 더 해지는지 실감했다. 꽤 오랜시간 아팠고 자칫했으면 종이에 베었을 수도 있었을 거다.

종이를 던진 사람은 스쿠터를 타고 있었으니 온데간데 없고 나는 길거리에 서서 황망해져서 두리번 거리고 있었지만 어떤 방법도 없었다.

길거리에 찌라시를 뿌리는 행위는 적법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생계를 유지하는 일일테고 그는 그렇게 사는 게 방법이라고 배웠을 터이다. 한 번이라도 누군가가 그 행위로 인해 타인이 다칠 수 있다는 걸 알려줬거나, 스스로 생각해 본 적 있다면, 방법을 바꿔야겠다고 자각한 적 있다면 그날 내가 봉변을 당할 일은 없었겠다. 나 외에 다른 누군가도 그런 일을 당했을 수도 있다.

2.
올해 겪은 많은 일들이 이런 누군가의 습,으로 일어난 일들이었다. 스스로를 깨지 못하고 질문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 나의 습때문에, 혹은 타인의 습때문에. 때로 나는 피해자가 되고 중간에 끼인 자가 되고, 동조자가 되고 혹은 모르게 가해를 했을 것이다.

행동 하나 하나를 살피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일이라는 주장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일이라는 주장에도 모두 동의한다.

길가다 똥을 밟은 이유는 누군가 똥을 싸질렀거나, 누군가 알고도 미리 치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가 똥을 밟은 것에 분개하느라 똥을 치우지 못하고 가버린다.

3.
뒤통수를 친다는 표현은 그래서 적확하다. 뒤통수를 맞는 일은 대부분 과거에서 발생해 현재의 나에게 닥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은 없다.

사고와 갈등은 언제나 과거에서 온다.
당신의 과거로부터, 나의 과거로부터.
청산하지 못한 우리 모두의 과거로부터.

공범

1.
오전에 목동까지 가서 바이올린 앙상블을 연습했다. 근처에 사는 분과 동행했고 같이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포도밭과 산을 갈아엎어 만든 아파트에 사는 그 사람과 나는 각각 15,000원이 넘는 스테이크를 하나씩 먹었다.
그 분은 내 차를 얻어탔다며 밥값을 내겠다고 했다. 나는 밥을 잘 얻어먹고 집으로 돌아와 주차장에 차를 댔다. 한 달째 주차장 크랙을 메우는 공사를 한다. 주차장에 내려갈 때마다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사람들이 거기에서 일을 하고 있다.

차를 세우고 내렸는데 미화원 아저씨가 공사가 끝난 바닥을 마대자루로 닦고 있었다. 공동현관을 들어서자 우리 동 미화원 아주머니가 엘리베이터 앞을 닦고 있었다.
바이올린 가방을 쥔 손이 사라졌음 싶었다.

2.
저녁엔 약속이 있어 그 포도밭이 끝난 산 언저리에 있는 작은 식당에 가서 닭도리탕과 오리구이를 먹었다. 저녁도 얻어먹었다.
단체가 모인 자리였는데 인사를 하다가 목이 메었다. 자꾸 목울대가 울컥거렸다.

식사중인 분들을 두고 먼저 일어나 골목을 지났다. 차가 줄지어 서 있는 어두운 골목에서 모자를 쓴 한 남자가 박스를 들고 걷고 있었다. 남자는 뒷문이 열린 트럭으로 걸어갔다. 택배기사였던 것 같다.
내렸던 창문을 올려 닫았다.

자다가 깨어 울컥대는 목울대를 만져본다.
거대한 슬픔에 어떻게 화를 내야 할 지 모르겠다. 소소한 서러움엔 그저 고개를 숙이면 될 일이고 일기를 쓰면 넘어갈테지만.

이제 두 주먹을 꽉 쥔 소녀들은 어찌할 것인가.
이러나 저러나 나는 공범자다.

기록으로 남다

 

아래의 글은 한겨레두레협동조합의 서울지역 조합원 자격으로 은빛기획, 서울시시설관리공단과 같이 진행한 다음스토리펀딩의 연재글로 작성한 것입니다.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3234

mom_장지가는길

2012년 9월, 5년간의 투병을 끝으로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님의 장례식을 치르며 장례식장에서 집에 잠시 들러 내가 부랴부랴 한 일은 집에 와서 기록을 챙기는 일이었다. 2008년부터 시작된 병원순례, 어머님의 마지막 5년은 병원기록으로 남았다.

진료비 영수증, 예약증, 병원을 옮길 때 받았던 의무기록지, 의사의 소견서, CT 촬영 안내문, 영상CD, 혈액검사결과, 임상실험권유안내서, 더 이상 병원에서 해줄 것이 없다고 했을 때 받았던 되의뢰서, 발급기관은 온통 병원이었다. 5년간, 병원수발을 들며 모든 기록을 40페이지짜리 두 개의 클리어파일에 정리했다.

기록을 모아두지 않으면 그 일도 사라지는 것처럼, 마치 없었던 일이 되는 것처럼, 나는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을 붙잡는 심정으로 하나씩 기록을 모았다.

사그라지는 생명이 기록된 영상CD에는 암세포가 동글동글한 모양으로, 하얗게 가득차 있었다. 이제 이 모든 기록이 소용없다는 걸 알게 된 건, 임종 일주일 전이었다.

어머님의 옷가지를 태우며 나는 클리어파일을 통째로 불속에 집어던졌다.

통증도, 고통도, 모두 사라질 것이라 말하며, 남은 진통제도, 진통제패치도, 아미노산도 기록과 함께 불속으로 던져버렸다.

이듬해 아버지의 자서전을 내고 싶다는 한 사람을 만났다. 구남매의 막내라던 그는 자기 아버지를 엄청난 기록광이라고 소개했다. 팔순을 넘긴 아버지의 기록을 그대로 두기 아까워 책으로 묶어 정리하고 싶다는 얘기와 함께 요즘은 아무도 쓰지 않는 흰 편지지를 펼쳐 보였다. 편지지에는 자필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팔순 노인의 글씨가 그득했다. 문서의 제목은 “비망록”이었다. 어떤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적어둔 기록. 비망록.

구남매의 아버지는 전라남도 고흥군 나로도에서 평생을 살았다. 단 한 번도 외지로 나간 적 없고 고흥군 면사무소에 다닌 것이 이력의 전부다. 막내아들은 아버지의 두꺼운 수첩을 하나 가져왔다. 단행본만한 합성피혁 다이어리에 본인의 사주, 조상들의 생몰년도, 제삿날부터 큰 딸의 결혼식 때 지출한 내역과 지난 30년간 자식들이 보내온 용돈과 방문기록까지 꼼꼼히 적혀 있었다. 경기도 남부에서 출발해 전라남도 고흥까지 달려갔다.

1980년대에 지었다는 집은 나로도 바닷가가 내려다보였다. 노인은 멋쩍게 웃으며 별 일도 아닌데 일을 크게 만들었다며 작은 상자를 하나 꺼내보였다. 노인은 1960년대부터 손바닥만 한 농협수첩에 매일 매일 일지를 적었다. 감상은 적었다. 그날 있었던 일을 또박또박 연필로 꼼꼼하게 적었다. 그날 무엇을 샀고 무엇을 팔았고, 몇 째가 서울에서 전화를 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하루도 빠짐이 없었다. 연말이 되면 농협에 가서 수첩을 하나 구해오고 매일 밤 작은 소반을 놓고 앉아 그날의 일을 적은 것이 50여권이 넘었다. 두꺼운 클리어파일에는 신문스크랩, 자식들에 대한 서류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자료는 차고 넘쳤다. 손수 정리해 둔 비망록노트를 기반으로 구술을 받았다. 노인의 듬성듬성한 이야기는 글로 옮겨져 그대로 책이 되었고, 책 뒤편엔 손수 정리한 비망록을 그대로 스캔해서 실었다. 이 분은 스스로 자기 연대기를 표로 만들었는데, 본인의 삶과 지역사건, 국내 사건과 국외사건까지 같이 나란히 들어 있었다.

왜 이렇게 기록을 하셨냐는 질문에 노인은 그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라며 웃었다.

구술을 시작할 때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초연하던 노인의 눈가가 붉어졌다.

“내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였소. 그게 내 한인디, 뱃사람이 아닌디, 배를 하나 인수해서 그 배안에서 하룻녁 주무시던 중에 화물선인가 뭐인가가 충돌해가지고 침몰했지. 지금도 다들 옛날 사진은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어째 우리 아버지는 초상 하나도 없소. 아버지 인상이 어쩌코롬 생겼다 대충 이런 것으로 연상해서 만들수가 있다 하는디 이제 다 끝나버렸지 않소. 이제 끝나부럿어.”

나무처럼 한 곳에서 뿌리내리고 산 노인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서류 한 장 남아있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꾹꾹 눌러쓰는 연필로 이어갈 수 있을까.

“어째 초상하나 안 남기고.”라고 먼 산을 보던 노인의 선한 눈매가 가슴에 박혔다.

고흥에서 돌아와 시댁의 안방을 뒤적거렸다. 1988년부터의 가계부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매일의 기록을 넘겨보다 1995년 7월 손녀, 3.8, 출산 9시, 고대병원. 이라는 기록을 발견했다. 그 아래는 과일 4,000, 차기름 10,000, 과자 1,200, 소주 2,000이라는 그날의 소비가 적혀 있었다. 몇 권의 가계부를 뒤적거리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의 가계부도 있어 꺼내보았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것은 이런 것이었다.

“8월 24일, 장남 가는 날, 어머니와 있다가 병상에 엄마 돈 두고 떠나감. 눈물을 흘리면서 갔다. 아버지 마음 몹시 아프다. 엄마의 가슴에서 손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 기도.

8월 25일. 아내가 병원 퇴원. 은환엄마가 엄마 머리 감겨주고 둘째 집으로 가다.”

가계부는 곧 끝났다. 어머님의 기록은 아버님의 서툰 문장으로 이어져 나에게까지 남았다.

2015년 12월 14일 씀

 

 

22원 그리고 10원

 
지난 금요일 롱바이라는 동네에 갈 일이 있어서 자전거를 타고 출발을 했었다.
날씨는 갑자기 추워졌고, 시간은 촉박해, 털모자와 목도리를 하고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보니 땀이 나서 옷은 젖어가는데 바람이 칼같아서 속도는 나지 않았다.
이제는 아무렇게나 아플 수도 없는 생활임을 알고 있었다.
자주 가던 시엔시아루 스타벅스앞에 다다라 자전거를 묶어놨었다.
그리고 오늘 저녁 자전거를 다시 찾으러 갔다.
 
원두커피가 떨어져 가서 4봉지를 사면 한봉지를 꽁짜로 주는 스타벅스 수첩에 도장을 한 개 받으면서 골드 코스트를 가장 굵게 갈아달라고 했다. 그리고 22원을 내고 작은 컵에 담긴 카페 모카를 주문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겨울. 스타벅스에서는 붉은 색 크리스마스 종이컵을 쌓아놓고 있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마시고 갈 것이라 머그컵에 커피를 담아주었다. 아마 전세계 어디를 가도 같은 노래가 나오겠지, 스타벅스에서는 조용한 캐롤이 나오고 있었다. 언제나 그 곳의 음악은 들릴 듯 말 듯 하다. 언제나처럼, 하얀 건물로 된 시엔시아루 스타벅스밖의 야외테이블에는 독한 연기를 내뿜는 홍쑤앙시라는 담배를 피우는 상해의 중년남자들이 하나 둘 앉아있고 안에는 노트북을 펼쳐놓은 남자와 여자들, 광동어를 하는 사람들, 일본어를 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있다.
우리가 늘 앉던 2층 창가엔 자리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커피를 들고 1층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커피를 다 마시는 그 시간을 기다렸다.
 
묶어놓았던 자전거의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다. 자물쇠가 잠겨버린 자전거는 매우 무거웠다. 튼튼한 자물쇠가 굴러가지 않는 자전거 바퀴에 끼어 타이어의 한 쪽 바닥만 긁히고 있었을 것이다. 장기판을 벌리고 있는 자전거 수리공을 찾아 자물쇠를 펜치로 끊어 버리고 새 자물쇠를 샀다. 그는 나에게 자물쇠값 20원을 달라고 했고 수공비는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 수리공의 옆에 써 있던 回收 香煙이라는 글자를 보면서 담배를 돌려받아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를 고민했으나, 나는 그에게 묻지 않았다.
 
10미터도 가지 못해서 자전거 뒷바퀴가 펑크 났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자전거를 끌고 가 그에게 바퀴에 바람을 넣어달라고 했으나, 타이어는 바깥쪽도 안쪽도 모두 펑크나 있었다. 언제나처럼, 자전거 수리공들이 모두 그러는 것처럼, 안쪽 타이어를 끄집어 내어 바람을 넣었다가 더러워진 물이 담겨있는 세수대야에 타이어를 부분씩 담궈서 물이 새는 부분을 확인한다. 그리고 은박지로 된 강력한 테잎을 붙이는 것이 이들의 수리법이다. 바깥 타이어는 어떤 물리적인 힘에 의해 찢어져 있었다. 오는 길에 찢어졌는지, 누군가가 내 자전거를 가져가려다가 자물쇠 열기에 실패하고 화가 나서 타이어를 찢어버렸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타이어안에 못쓰게 된 폐타이어의 조각을 이어붙여 자전거는 다시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2원을 다시 주었다.
키가 작은 그 남자는 아까 자물쇠를 살 때 얘기했으면 다시 2원을 주지 않아도 됬을 거라며 웃었다. 22원. 커피값, 그리고 자전거를 고친 수리비.
 
슈주허를 넘어오는 길에 달이 커다랗게 떠 있는 걸 보고, 아이를 안고 포르노 CD를 파는 여자들을 뒤로 한 채 사진을 찍었다. 문혁때나 썼을 법한 군청색 모자를 쓴 노인이 길을 잃어서 그러니 10원만 보태달라고 했다. 검은 핸드백을 메고 동그란 항아리 몸을 가진 노부인이 그 뒤에 따라 서 있었다. 팅부동이라고 거절을 했으나, 이미 나는 그들의 말을 모두 알아듣고 있었다. 지갑을 열어 10원을 건네는 나에게 그들은 핸드폰 번호를 달라고 했다. 내일 갚겠다고.
나는, 괜찮다고, 조심해서 가시라고 인사를 했다. 설령 그들이 거짓말을 했더라도, 내 양심은 뿌듯한 것이었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도둑이 되거나 거지가 된다. 그들은 어느 편이었을까. 정말로 길을 잃은 노부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비슷한 방법으로 구걸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거지에 비슷한가, 도둑에 비슷한가. 모든 것은 명확하지 않다. 어디쯤엔가 비스무리하게 서 있는 것이었다.
 
22원짜리 커피를 사 먹고 자전거를 타고 슈주허 다리를 건너던 나처럼.
 
2004. 11. 28.

소나기가 지나간 저녁

 
지난 밤에 공씨디를 사러갔던 대형전자상가에는 내가 찾는 공씨디가 없었다. 지난 금요일쯤 그 곳에 갔을 때 남아있는 19장의 씨디를 모두 챙겨나왔는데, 그 빈자리 그대로였다. 빈자리 그대로, 장사를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어젯저녁 심한 돌풍과 비가 내렸던 그 축축하고 어두운 길을 걸어왔었다.
 
집 근처에 있는 다른 전자상가는 흡사 용산전자상가의 축소판 같았다. 공씨디를 여러종류 쌓아놓고 파는 집이 많이 있었다. 예상보다 저렴한 가격, 양질의 씨디를 스물 다섯장 사고 돌아오는 길에 비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올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집을 나서기 전부터 하늘이 어두웠고, 명확하지 않는 하늘을 바라보는 내 시야안으로 비구름이 분명히 몰려오고 있었는데, 나는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단순히 귀찮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비를 맞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여름, 비를 한 참 맞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감기에 걸린다고 했다. 소설이나 영화속의 주인공들은 유난히 나약한 탓에 폐렴에 걸리기도 했다. 그러다 죽는 주인공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존재가 아님을 알고 있다. 적당히 집에 걸어들어가도 그리 많이 젖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에 자주 가던 국수집에 들어가 만두국을 한 그릇 시켰다. 이 집은 여름에 냉만두국과 더운 만두국을 같이 파는데, 문 앞에 멍한 눈으로 서 있던 종업원은 찬 거? 더운 거? 라고 생뚱하게 들리지도 않는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만사가 귀찮은 그 태도, 내 깊숙한 곳을 보는 것만 같아 두려웠다. 50원짜리 지폐를 내고 잔돈을 퉁명스럽게 거슬러 받으며 나는 창가자리에 앉아서 비가 쏟아지는 길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느 새 오색의 비옷을 챙겨입고 자전거 위에서 페달질을 하고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기다리는 아늑하고 가난한 집으로.
 
방금 전 내가 돌아온 그 길 어귀엔 대형 극장의 공사가 몇 개월째 계속 되고 있었다. 저 멀리 내가 다니던 헬스장도 보였다. 그 어귀에서 쇠그릇을 앞에 놓고 얼후를 연주하던 남자가 얼후를 집어들고 일어섰다. 내가 어젯밤 이 길을 지났을 때 주머니를 뒤져 1원을 건네줬던 그 남자 같았다. 대머리가 살짝 벗겨진 그 남자가 앉아있는 그 자리엔 바로 뒤 극장을 짓는 공사장에서 나오는 독성 가득할 법한 시궁창 냄새가 올라오는 액체가 흐르고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빗줄기가 거세지자 남자는 더럽고 낡은 바지를 걷어올렸다. 갈색 슬리퍼를 입은 그 남자의 발은 비를 맞는다 해도 도무지 깨끗해질 것 같지 않았다. 호주머니에서 누렇게 변색된 수건을 꺼내 남자는 벗겨진 머리와 얼굴을 닦았다. 그 남자에게 뛰어가 5원짜리 지폐를 건네주고 싶었다. 5원이면, 밥도 한 그릇 먹을 수 있고, 1원을 보태면 어느 욕실에 들어가 샤워라도 한 차례 할 수 있는 돈이다. 10원이면, 내일 아침도 먹고 내일 점심까지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저 멀리 습기 가득찬 통유리창이 달린 그 헬스장을 다녔을 때 그곳까지 가는 곳에 앉아있던 서너명의 얼후를 든 남자들과, 구부러진 다리를 가진 남자 아이와, 머리가 하얗게 탈색된 남자아이를 안고 있던 여자를 기억했다. 그 때, 나는 매일 매일 그 길을 지나며, 매일 매일 그들을 외면했다. 이제 나의 가난이 그들의 가난을 동정하게, 그들의 가난을 이해하게 한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쌀 한 톨 건네주지 않는다는 진실도. 그 사람에게 내가 돈을 주고 싶다는 생각은 나누고 싶은 생각에서였는지도 모른다. 나의 한 끼와 그의 한 끼가 동일해지도록, 나의 근원없는 억울함과, 그의 이유있을 억울함에 대해서 공감을 형성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내가 만두국을 반쯤 먹고 나서 양이 많다고 느꼈을 때쯤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 전 나에게 살기 싫은 표정을 보여줬던 그 여자 종업원은 내 뒤에 바로 들어온 두 명의 젊은 사내들에게 농지거리를 하며 살살 거리고 있었다. 남자라는 존재가, 그녀의 삶을 바꿔놓는가. 때로 여자는 남자를 살게 한다. 그리고 때로 남자가 여자를 살게 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무슨 이유로 잣대를 들이미는가. 사람은, 동물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인데.
 
자신의 밥줄을 가만히 들고 서서 비를 맞고 있던 그 남자가 사라지고, 나의 만두국 그릇속의 만두도 남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단 한 번도 비오는 하교길에 누군가의 우산속에 뛰어든 적도, 누군가가 마중을 나온 적도 없었다. 비가 조금 더 많이 온다면, 그래서 지금 추레하게 슬리퍼를 끌고 나온 나에게 누군가 우산을 씌워준다면 그 사람이 당황할 만큼 그 우산속에서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다행스럽게, 비는 그쳤고, 나는 울 기회를 놓쳤다.
 
한 차례 소나기가 지나간 길엔 풀과 물이 만난 냄새가 가득했다. 상해의 그 고단한 여름은 사라진 것만 같았다. 길에는 시원한 바람, 비 온 뒤에 산책을 해야겠다는 그 누군가의 말이 생각나는 공기만 가득했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나에게 그래도 혼자 자기엔 조금 넓은 침대가 있고 에어컨까지 달린 작은 집이 있다는 사실이 더 할 수 없는 사치로 느껴졌고, 그 사치를 영유하고 싶었다.
 
요즘은, 해가 너무 늦게 진다.
 
2004. 7. 13.

볶음 국수 한 그릇

 
먼 하늘에서 구름이 밀려오는 게 보였다.
 
구릉구릉 거리는 소리가 공기를 휩싸더니 바람이 심하게 불기 시작했다. 비가 오려나보다 생각하자 마자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는데, 후두둑 거리는 소리가 요란해 마치 우박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 비는 오래 가지 않았고, 10여분 만에 그쳐버렸다. 비가 그쳤다고 생각하고 슬리퍼를 신고 국수나 한그릇 먹어야겠다 하고 아파트를 나섰을 때 굵은 빗방울은 셀 수 있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조금씩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복도 창가에 서서 다시 집으로 올라가 우산을 챙겨나와야 할까를 아주 잠깐동안 고민하다가 그냥 몇 방울의 비라면 맞아보기로 했다.
 
국수집에 도착할 때쯤엔 그 몇 방울의 비도 멈추었고, 오랜만에 찾은 그 국수집의 볶음국수의 가격이 4위안인지, 5위안인지가 잠시 헷갈렸다. 계산대에 서서 종업원 아가씨에게 4원인지 5원인지를 묻고 동전 4개를 올려놓고 자리에 앉으려고 거의 텅 빈 식당을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TV 소리가 났고 맨 가운데 테이블 의자위에 커다란 흰 고양이가 늘어져 있었다.
귀여워하기엔 너무 커다란 고양이, 나는 그 자리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벽쪽 테이블에 앉았다. 눈이 마주친 고양이는 의자에서 내려와 어슬렁거렸고 반바지를 입은 내 다리 주변으로 왔다갔다 하더니 내 의자밑으로 들어가 맨 발을 툭 건드렸다. 흠칫 놀라 다리를 움직였더니 고양이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TV 소리는 작은 흑백TV를 테이블위에 올려놓은 직원아저씨의 것이었다. 주방에선 키가 큰 젊은 요리사가 커다란 후라이팬 위로 올라오는 불과 함께 놀이를 하는 듯 했다.
 
그 때쯤 바로 옆에 안경을 쓰고 키가 작은 여자가 오렌지색 티셔츠를 입고 비닐봉지를 탁자위에 소리나게 올려놓으며 앉았는데 맞은 편에 동행한 열 일고여덟 살쯤 되어보이는 남자아이에게 계속해서 목소리를 억누르며 화를 내고 있었다.
상해방언은 스즈츠 발음이 많아 듣기에도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탁한 소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언어를 짓눌러가며 그녀는 계속해서 소년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소년은 탁자위에 배낭을 확 집어던지기까지 했으나 물론 싸움이 될 상대도 되지 않아보였다. 그녀와 소년은 모자간처럼 보였는데다가, 여자의 목소리는 짓누르는 깽깽거리는 목소리였고 남자아이는 계속해서 징징거리며 웅얼거리는 말투로 말꼬리를 질질 끌고 있었다.
 
볶음국수가 다 되었다는 말을 주방에서 했을 때 이 집에서 아침을 먹을 때처럼 나는 습관적으로 일어나 주방에서 작은 탕 그릇과 국수그릇에 젓가락까지 챙겨 내 자리로 돌아왔고, 나보다 한 걸음 늘 늦을법한 종업원 아가씨가 뻘쭘하게 옆으로 다가왔으나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자리로 돌아왔다.
 
급기야 옆자리의 소년은 울음을 터뜨렸고 주방사람들도 힐끔힐끔 그 모자를 쳐다봤으나 여자의 깽깽거리는 꾸중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내 국수를 가져다 줄 기회를 빼앗긴 종업원 아가씨가 소년의 식사를 가져다주자 아이는 울면서 징징거리면서 음식을 밀어넣고 그 앞자리에 앉아 아무것도 먹지 않는 여자는 계속해서 짓누르는 목소리로 앵앵거리고 있었다. 소년은 반쯤 식사를 하고 벌떡 일어나 냅킨을 가지러 갔다와서는 자리에 앉았다가 밖으로 휙 나가버렸고 여자는 여전히 변함없이 끈질기게 쫑알거리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 손님수보다 많던 종업원들이 모두 빤히 밖을 쳐다보았고 야채를 도마위에 올려놓고 신나게 칼질을 하고 있던 남자는 휘파람을 불면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킥킥 댔다. 나는 상해방언을 모르므로 그 두 사람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장난스럽게도 내가 그 순간 한 생각은, 상해방언을 할 줄 안다면, 이 땅에서 사람들이 왜 저렇게 싸우는지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수를 다 먹고 일어나는 길엔 잘 먹었다고 말할 필요도, 잘 가라는 인사도 필요없는 순간이었고, 국수집을 나오자마자 그 앞의 한 남자가 나를 바라보며 맨손으로 코를 팽팽 풀어대고 있었다.
뚱뚱한 시츄가 뚱뚱한 아줌마와 함께 궁둥이를 들썩거리며 지나갔고 아파트 단지에는 면식이 있는 사람들끼리 이제 들어오냐는 안부를 묻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나는 터덜걸음을 걸으면서 핸드폰으로 문자메세지를 주고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다가 담배를 사야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고 다시 아파트 단지앞에 있는 편의점엘 갔다.
 
비는 여전히 오지 않는데 하늘은 구룽구룽하는 소리를 내고 친구에게선 한국드라마 “엄마야 누나야” 가 너무나 재미있다는 문자가 왔다.
 
2004. 5. 21.

NOT THAT BADLY

 
# 1.
 
“근데 이 나라 사람들은 왜 식당이고 술집이고, 잡상인들이 이렇게 드나들게 내버려두죠? 여기도 그래. 복권까지는 괜찮다 쳐. 뻥튀기까지도 넘어가. 근데 왜 술집에 들어와서 한치 안주 사라고 그러는데도 왜 주인이 가만히 내버려두죠? 설마 이런 술집까지 국영인 건 아니겠죠?”
“외국인들만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베트남 사람들은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나라가 아직 가난하지만 남의 고된 생계수단을 빼앗으면서까지 부자가 되려고 하진 않아요.”
 
방현석 소설 《존재의 형식》中…
 
 
# 2.
 
10원짜리 시들어빠진 장미꽃을 들고 와 사달라고 졸라대던 계집아이는 그 골목에서 상주하고 있었다. 그 계집아이에게 장미꽃을 다섯 송이 사고 난 다음에, 그 아이에게 학교를 가겠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아이는 콧방귀를 뀌며 등을 돌렸다. 그 다음번 술취한 나를 본 그 아이는 아는 체를 했다. 그리고 더 이상 나에게 꽃을 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흥청거리는 거리를 잰걸음으로 걸어가던 나에게 달려들던 빡빡머리 사내아이에게 학교에 가겠냐고 물었었다. 그리고 엄마 아빠는 어디에 있냐고 물었었다. 아이는 대답을 하지 않고 손만 내밀었었다. 그리고 나는 지갑을 뒤져 10원짜리 지폐를 건네주었다. 저만치에 서 있던 애 업은 여자가 득달같이 뛰어왔었다. 애업은 여자. 그녀와 나의 나이차이는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시간이 지나고, 이번 달에 만났던 아이들과 애업은 여자는 깨끗한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리고 아가씨 예쁘네요 라는 말까지 건네기를 서슴치 않았다. 아이들은 땟국물에 쩔어있지 않았으며 느물거리며 웃어대기까지 했다. 그 아이들이 작년 이맘때 혼자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그 길에서 만났던 아이들인가는 기억나지 않는다.
 
巨鹿路에 있는 Good Fellas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예쁜 여자애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하루에 12시간 근무이지만, 대학생이 1000위안짜리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그 빠에는, 늘 담배상자를 목에 건 젊은 여자가 들어와 술취한 손님들에게 밀수담배를 공급해주었다. 가끔은 DVD를 든 남자가 들어와 혼자 와 앉아있는 외로운 노란머리의 남자들에게 DVD를 고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주기도 했다. 우리는 빠 밖에서 부채질을 하고 있는 양꼬치 장사에게 숫자를 말하면 그녀가 빠 안에까지 가져다 주었다. Good Fellas의 2시가 넘으면, 시내의 모든 빠가 문을 닫고, 거기에 몰려 있던 인구들이 그 좁아터지고 환기 안되는 자리에 앉거나 서서, 담배를 사고 양꼬치를 뜯어먹으며, DVD를 고르기도 했다.
 
과연, 그들의 마음도, “남의 고된 생계수단을 빼앗으면서까지 부자가 되려고 하진 않아서” 인것인가. 모든 것이 용서되는 이 땅에서의 윤리는, 귀찮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다면 나의 모든 판단은 원점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었을까. 모종의 관계, 음모이론에 충실한 나의 기준은 왜 이다지도 선량하지 못한 것이었을까.
 
2001년 밥 빌리러 양푼을 들고 옆집 식당으로 들어가던 내가 밥을 먹던 식당의 어린 종업원을 이해하지 못하던 서양아이들을 나무라던 저녁이 있었다. 남의 생계. 남의 고된 생계. 나는 또 오늘 누구의 고된 생계를 훼방놓고, 누구의 고된 생계를 용서했는가.
 
2004. 4. 28.
아주 오래된 어느 날의 기억을 발견해서 옮긴다.

초승달 2

살수록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는 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자꾸 겪게 된다는 뜻이다.

이따봐용맘미. 라고 카톡을 보내는 딸아이의 수줍은 미소는 왜 이리도 처연한가.

하루 종일 술독에 절궈져 초저녁부터 코를 고는 사내 앞에서 티비를 틀어놓고 춤을 추는 아이의 허벅지가 튼튼하다.

늙은 개와 손바닥만한 아파트단지를 두 바퀴 돌았다. 이제는 누구 앞에서도 울고 싶지 않은 나이가 되었구나.

하늘에 초승달이 날을 세운 채 반짝인다.
이 가슴에 와서 꽂힐 것처럼. 누구를 노려보는지.

2014. 1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