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한 살과의 대화 1.

큰 아이와 몇 시간에 걸쳐 띄엄띄엄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의 고민은 과를 바꾸는 것인데 그 바닥에는 취업과 진로에 대한 고민이 있다. 나는 대학 4년간 해야 할 일은 가장 넓게 보고 넓게 경험하는 일이라 생각해왔고 아이에게도 그러길 바란다고 권해왔다.

직장들어가 승진하는 게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면 어쨌거나 즐겁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게 우선이고 전공과 먹고 사는 문제는 연관이 없지도 있지도 않은 개인의 그 때 그 때의 사정에 달려 있으니 취업을 우선시 해서 결정하지 않길 바란다 했다.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으나 지금 20대들의 상황은 생각보다 매우 나쁘다. 스펙 좋은 아이들은 특정 계층에 몰려 있고 어차피 내 새끼들은 그 계층과 승부를 볼 수 없으며 그런 일로 스트레스 받길 원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예측불허인 일들은 산처럼 몰려올테니 그저 한 순간 한 순간 즐거울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겠느냐 했다.
덧붙여, 이 글로벌한 세상에 이 나라가 어떻게 될 지도 모르고 인공재해로 인해 한 나라가 작살나는 경우도 많은 위험시대에서는 어느 나라에 가서도 먹고 살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했다.
예를 들어, 네가 낯선 도시에 여행을 갔다가 돈이 떨어져 한 끼 식사를 벌어먹을 수 있는 거리에서 펼칠 수 있는 재주 같은 건 꼭 키웠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아이가 물었다.

“엄마때는 우리보다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취업도 잘 되고?”

“좋았다고 할 수 없지만 너희보다야 나았지.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를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그냥 잘 될 거라고 생각했지. 그러다 다들..
대학 졸업하고 취업이 되었다가 모두 취소통보를 받았지. 네 아빠도 ㅎ대기업에 취업이 됐다가 취소당했다 하지 않더냐.
그 전조증상 같은 것도 있었어. 고 3때 한 달에 한 분씩, 친구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거야. 자살은 없었어. 심근경색, 뇌졸중, 간경화 뭐 그런 스트레스성으로 줄초상이 이어지는데… 굿 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했었어.

뭐 취업할라니까 IMF터져서.. 다들 공짜로 일하고 전문 자격증 따고 그랬어. 엄마는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하고 살아서, 잘 몰라. 너 같은 고민을 해 본적이 없다.”

취업고민 해 본 적 없다. 그래서 늘 비정규직이라는 단어가 있지도 않은 시절에 비정규직으로 떠돌았고 퇴직금으로 스타킹 한 박스 받아본 적 없다. 그래도 먹고 살 수 있었다. 내가 뛰는 만큼 스물 한 두살에도 잠을 줄이면 몇 백씩 벌기도 했으니까.

지금은 아니다.
지금 아이들은 벽이 점점 좁아지는 큐브속에서 두려움에 떨고만 있다.

어차피 옛사람들이 말하는 입신양명 못할 거,
그저 즐겁고 행복하길 바랄 뿐.

2015. 1. 12.

굿나잇

1.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노는 대부분 추측에서 벌어진다.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뻔할 때, 그 역시 내 생각이다.
그에게 묻지 않았다. 맞냐고. 내가 보기엔 거짓말 같은데 맞냐고.
눈을 맞추고 대화를 하다보면 모순을 찾을 수 없다. 대신 평정을 유지하며 관찰해야 한다.

추측은 추측을 낳고 눈덩이가 되어 원망과 분노에 사로잡힌다.
대부분의 이런 분노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어떤 것을 빼앗길까봐 빼앗기기 전에 두려워하다가 두려움은 인정하기 싫은 자아가 분노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겁이 나는 게 아니고, 이 분노는 정당한 나의 권리야!

분노가 정당한 권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시작점이 추측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잊어선 안된다.
추측은 또 다른 추측을 낳고 오해는 눈덩이처럼 커져가니까.

추측과 두려움이 분노가 될 때 해야 할 일은 당사자와 대화를 시도하는 일이다.
분노를 표현하지 말고, 화가 나게 된 경위에 대해서 설명하고 이 문제가 당신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니 나의 불안한 감정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지 않겠냐고 묻는 것이다.

그래야겠다.

2.

삶이 어떤 전환점을 돌아갈 때 삶은 생명과 에너지를 가진 것이라 관성의 법칙을 가져서 쉽게 전환하지 못한다. 게다가 살아온 세월이 이미 30년이 넘었다면 관성은 습관이 되어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애쓴다.

에밀 시오랑이 말하길, 우리는 매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데 사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을 잊는 것이라 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때로 재앙을 불러오기도 한다. 원래 그랬으니까. 라는 말은 재난사고에만 따라붙는 말이 아니다.
한 생명의 삶에도 분명히 적용된다.

3.

가진 것을 내려놓으면 내려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 순간부터 다른 것들이 생기기 시작할 것이다.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던 그물에서 벗어나는 순간 공기는 상큼할 것이지만 그것도 언젠가는 다시 시큼털털하게 느껴지리라.

계속해서 나는 새로운 아침이라고 우길 필요가 있다. 이 골목의 어귀를 돌아나가면 낯선 것들이, 또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내 고향의 냄새가 가슴 깊이 찰랑인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4.

허무맹랑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더욱이 성인이 된 지 꽤 오래되었다면 모든 일들은 당연한 귀결이다. 단지 내 생명의 관성과 탄성이 어느 정도였는지가 다를 뿐이다.

오늘도 그리하여
굿나잇.

오늘.

1. 이른 저녁 들른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들렸다.

– 나는 딱 육십까지만 살래.
– 어머 언니 안돼. 우리가 언니 보고 싶을 때 아무 때나 봐야돼.
– 육십은 너무 젊지 요새는.
– 곡기를 딱 끊으면 된다더라. 나는 그렇게 죽을꺼야.
– 아 진짜 왜 그러니?
– 난 자살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
– 어머 무슨 소리야! 하나님 믿는다는 사람이 그런 소리 해도 돼? 자살은 죄악이야.
– 그러니까 곡기를 끊는 게 제일 좋은 거 같아. 난 추해지기 전에 죽고 싶어.

자기 의지로 죽고 싶다는 여자는 병원 간병일을 했던 경험을 이어서 말하고 있었다.
내 뒤에는 남녀가 앉아 있었는데 지방대 나와 석사를 하면 인정을 받을 수 있냐고 여자가 묻고 있었다. 듣고 있자니 심사가 뒤틀렸다.

2. 며칠 전 아이와 긴 산책을 하는데 아이가 다시 물었다.
엄마 사람은 어차피 죽을 건데 왜 살아?
일년째 이어지는 질문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 잘 죽으려고 살지.
– 뭔 소리야.
– 엄마는 그렇게 생각해. 일단 태어난 건 되돌릴 수 없잖아. 그럼 어떡해. 기왕 태어났으니까 되돌릴 수 없는 건 포기하고. 죽는 날 사람들이 이 사람 참 잘 살다 갔다고 죽어서 아쉽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살아야지.
아이는 알아듣는 듯이 조용해졌다.
– 너 할머니 장례식 기억나? 손님이 정말 많이 왔지?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걸 슬퍼했어. 그건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그만큼 잘 사셨다는 뜻이야. 그게 쉬운 게 아니야. 평생 나쁜 짓을 하고 산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해봐. 사람들은 나쁜 놈 잘 죽었네. 하고 만세를 부를 수도 있잖아.
– 축제를 할 지도 몰라.
– 그러니까.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잘 살아야 하는거지. 엄마는 그렇게 생각해.

3. 에밀 시오랑의 책의 부제는 ‘태어남의 불행에 대해’이다.
어차피 인생은 그런 거라는 거다. 염세주의라기 보다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삶의 수많은 생채기들은 발목을 잡고 늘어지지만 그래도 하루의 10초 정도, 행복감을 느낄 때 사람들은 웃으며 살아가고 미래에 대한 꿈이 보이면 가열차게 걷기도 한다.

해피해피한 인생이 어디 있겠나. 아무리 뒤져봐도 그런 인생은 없다. 해피해피한 인생은 무료한 인생일 뿐.
작품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인간은 대부분 출생의 비밀, 환난과 고통, 지속되는 도전, 고칠 수 없는 신경증과 정신적 장애를 가졌다. 그건 작품의 주인공뿐 아니라, 지금 저 밖 공원에서 떠드는 아이들과 어디선가 곤히 자고 있는 평화로운 사람들 모두에게도.

단 한 번도 쉬운 인생은 없었다.

4. 우리는 모두 아프다.
나도. 당신도.
아프지 않은 날도 있다.
아! 오늘은 아프지 않구나.
그래서 하루를 넘기도 또 살아있다. 반복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오늘은 아프지 않을거야. 라고 때론 거짓말도 하면서.

인생은 한끗차이

밤.

건너편 아파트 단지의 테니스장에는 조명이 눈부시다.

나는 개를 끌고 아파트 단지 한 바퀴를 돈다.

지하주차장은 모든 아파트의 현관으로 연결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사람이 걸어나올 길은 없다.

차만 다닐 수 있는 주차장 입구에서 한 남자가 걸어나온다.

저 남자는 왜 저 길로 올라오는 것일까.

가끔 이 보다 더 늦은 시간, 밤 11시가 넘어가 혼자 단지를 걷던 남자가 출구를 묻는 경우가 있다. 대리기사들이다.

그들에게 출구를 알려주고 돌아서며 생각한다. 인생은 한 끗차이.

어쩌다 여기까지 와서 나는 저 사람에게 출구를 알려주고, 저 사람은 나에게 출구를 묻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서 헤어졌던가.

 

꽉 막힌 양재대로에서 귤을 파는 사내가 있다.

여름이 되면 참외를 판다.

그 전에는 뻥튀기를 팔거나 전자모기채를 파는 사내들도 있었다.

그 때도 생각했다. 인생은 한 끗차이.

우리는 어디서 헤어져서 나는 차 안에서 저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가.

 

그랬다. 주유소에서 발바닥에 불이 나게 뛰면서 기름총을 꽂고 휴지를 갖다주고 영수증을 끊을 때 아가씨 이거 먹어. 하면서 차 안에 있던 귤이나 사탕을 주고 가던 사내들이 있었다.

큰 아버지가 근무했던 신문사의 회사 차량을 보고 큰아버지의 이름을 물었다.

그들은 나에게 그를 어떻게 아느냐 물었다. 나는 그저 먼 친척이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그 때 나에겐 큰아버지의 명예보다 비빌 언덕, 나의 혈연이, 정확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안도감, 혹은 한 달에 30만원쯤의 돈이 필요했다. 그 때 큰아버지에게 그런 걸 받기 위해 찾아가지 못했다. 인생은 한 끗차이. 그 때 나는 기름 쩐 내나는 옷을 어찌하지 못하고 손을 열 번씩 씻고 저녁마다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이제는 다 지난 일인데 지우고 싶지는 않다.

비 오는 날 버스 정류장에서 과격한 차가 흙탕물을 튀기고 지나가 단 한 벌인 정장바지가 홀딱 젖어버린 순간과, 동생은 굶고 있을텐데 이걸 과연 먹어도 되나 한 참을 망설인 끝에 혼자 설렁탕을 사먹었던 기억과, Shut the fuck up 이라고 소리지르던 고객님에 대해서, 잊지 않으려 한다. 과거를 언제나 끌어안고 가고 싶은 것은 인생은 한끗차이라는 걸 잊고 싶지 않아서다. 내가 누군가에게 흙탕물을 튀기지 않기 위해서, 지하주차장에서 높은 구두를 신고 억지 웃음을 짓는 언니들에게 사탕 하나 나눠주기 위해서, 나에게 밥을 가져다 주는 사람에게 욕하지 않기 위해서.

기억하고 싶다.

 

인생은 한 끗차이.

 

2013. 6. 1.

회전목마

1.

사람은 근본적으로 보수성을 띄게 되어 있고 궁극적으로 회귀하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흔히 인사불성 상태로 술을 마시고도 집으로 찾아 들어가는 걸 귀소본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릴 예정이면 정신 못차리고 자다가도 희한하게 눈이 떠지기도 한다.

말하자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시공간을 찾아간다는 얘기로 들린다.

2.

폭력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폭력의 가해자가 되거나 피해자가 되기 마련이라는 얘기가 있다. 여태까지 대부분의 연구는 학습된 무기력으로 피해자가 되고, 학습된 분노의 방식으로 가해자가 된다고 한다.

폭력의 기억은 가장 큰 트라우마일 것이다. 그게 누구로부터 받은 것이든, 본인이 가한 것이든, 어떤 경로로 어떻게 발휘되었는가의 여부를 떠나, 가장 아픈 기억이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자기 인생에 가장 큰 구멍이 생겼다고 여길 것이다.

3.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 개인이 자기 인생에 가장 큰 구멍이 된 부분을 복구하고 싶은 본능은 없을까

혹은,
그 환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무리 어떤 폭력이 가해지더라도 단지 “익숙하기 때문에” 고향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면, 매맞은 어머니 아래서 자란 딸이 다시 그 인생 유전을 겪는 경우 말이다. 버려진 유년기를 보낸 장년의 가장이 다시 스스로 버림받기를 선택하는 경우 말이다.

학습된 무기력, 혹은 학습된 폭력의가해 외에도, 딱히 어떤 폭력의 기억이 없더라도 자기 과거의 어떤 특정한 부분으로 회귀하려는 무의식의 작용은 없을까 하는 것이다.

어찌저찌해서 돌고 돌아 다른 삶을 산다고 고단하고 지리하게 노력했는데 결국은 원점인 느낌 말이다.

4.

오래전에 장서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회전목마 라는 MBC 주말드라마가 있었다. 그 제목의 뜻은 돌고 돌아도 결국 원점이라는 것이었다. 두 자매가 지지리도 고생을 하며 성장하는 내용이었는데 삶의 불행은 언제나 원점이었다.

그게 딱히 불행이라 하기도 어렵고 행복이라도 하기도 어렵더라도, 인생 전반에 걸친 하나의 주제가 있을 것이고 언제나 그렇게 비슷하게 지내온 한가지의 중심되는 분위기가 있었다면,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은 옷 같은, 남들에게 평범한 행복이라든가, 남들에게 일반적인 일상 같은 게 너무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게 느껴져서, 남들이 보기엔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그 낯선 행복을 아무 생각없이 벗어버리는 일 말이다.

5.

그래서 결국은 외로움이라든가, 방치라든가.. 그런 것들이 나에게 어울리는 옷이라고 생각해서 다시 회전목마를 타고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이 돌고 또 돌아 다시 외로운 상태로, 방치된 상태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아닌가 말이다.

구태여 예를 들자면,
나에게 가장 편한 밥반찬인, 굽지 않고 숟가락으로 떠먹는 스팸에 계란후라이 하나. 뭐 그런 것처럼 말이다.

2013. 4. 12.

자기 역사를 지우다 – 드라마 야왕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부모가 자살기도 하는 것을 목격하다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만 살아남았다.

아버지가 죽는 현장에서 한 남자가 엄마를 구해낸다.

아이는 고아원에서 자라다가 재혼한 엄마가 아이를 찾으러 온다.

성폭행을 일삼는 의붓아버지에게서 도망쳐 엄마와 단 둘이 살아간다.

지병으로 엄마가 죽는다.

소녀는 어리고, 돈이 없어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

이 때 이웃의 한 청년이 나타나 소녀를 돕는다.

소녀는 결심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나에게 세상으로 나갈 길은 공부.

소녀는 영민한 머리로 공부를 하고 대학을 간다.

가난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소녀를 돕던 청년은 학비를 대기 위해 기술직을 버리고 유흥업소의 접대부로 일을 한다.

이제 소녀는 여자가 되었다.

유흥업소에서 접대부로 일하는 남편이 부끄럽다.

여자는 이제 과거와 정체성을 지우고 싶다.

입사면접에서 가난의 흔적, 오해, 독한 기질 때문에 탈락한다.

여자는 여기서 물러날 수 없다.

남편이 호스트로 일하는 돈으로 여자는 미국유학을 감행한다.

타고난 미모, 영민한 머리로 재벌의 아들의 사랑을 얻어낸다.

거칠 것이 없어진 여자는, 거슬리는 것들을 제거하는 폭주를 시작한다.

손이 하늘에 닿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여자는 권력의 중심에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다.

언제나 들어갈 수 없는 성벽,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 자기가 가진 무기를 꺼내 들은 여자는

처참하게 모멸 당하고 버려진다.

이제 아무도, 그녀를 돕지 않는다.

그녀는 혼자지만, 누구보다 생명력이 강하다.

이 여자아이의 가정이 가난에 허덕여 자살시도를 하지 않는 사회였다면,

그 어머니와 아이가 구출되었을 때 다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가 정비되어 있었다면,

여자아이가 성폭행으로 유년시절을 거듭해야 했을 때 누군가 이 아이를 구해주었다면,

성폭행가해자를 과실치사로 살해하게 된 것이 법으로 절대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여자와 연인에게 있었다면.

정당한 기술을 배웠던 여자의 연인이 그 직업으로 여자가 대학을 무사히 마칠 수 있는 조건이었다면,

혹은 여자의 배경 없는 신분과 독기 어린 눈빛도 품어줄 수 있는 기업의 리더가 있었더라면.

그녀가 권력의 상층부까지 상승했을 때, 그 집안에서 동물적 본능으로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더라면.

이제는 평생의 적이 된 그녀의 옛 남자는 여자에게 지속적으로 말한다.

산동네의 그 여자로 다시 돌아가라고.

권력과 돈의 맛을 본 여자는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지우고 다시 만든다.

역사를 수정하고 재구성하는 여자는 보수적 사회적 통념 하에서

아비를 죽이고 딸을 죽이고 남편을 죽이는 악녀로 재탄생한다.

여자는 산동네의 소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녀를 환영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그녀는 이제 다시 혼자다.

어떤 것을 평생 사랑하는 일은 인간이 해내기 어려운 일이지만,

어떤 것을 평생 미워하고 증오하는 일은, 인간이 해내기 조금 쉬운 일이다.

지독하게 외롭고 슬픈 여자는 사회적 피해자와 희생자에서 가해자로 거듭나는 과정을 걷고 있다.

여자는 더욱 더 독한 가해자로 끝까지 달려갈 것이다. 이제 관성과 가속도가 붙었으므로.

돌아갈 수 없다.

정체성을 지우고 자기 역사를 다시 쓰는 일.

그녀 안에 숨은 나를 본다.

난 그녀를 미워할 수 없다.

왜 그녀가 산동네의 주다혜로 돌아가야 하는지, 나는 그 말이 더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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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정언니

숭고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러하다.
다 큰 성인의 벌거벗은 몸을 앞으로 뒤로 옆으로.
겨드랑이와 항문주변까지 구석구석 밀어내어 피부의 죽어버린 껍질을 벗겨내는 일.
단지 완력으로만 되는 일이 아니고 요령과 기술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힘의 조절이다.
힘을 빼야 할 때 빼고, 강하게 밀어야 할 때 밀어야 하는 것일진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완급 조절을 하지 못한다.
아이들이 크게 실수하고 잘 넘어지거나
친구간에 크게 싸움이 나고 우격다짐을 하는 일이 그런 이유다.

비록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도,
돈을 받는다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든 일을 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인이 되어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는다거나,
누군가에게 살뜰한 아낌없는 대접을 받는 일은,
천국에 와 있는 듯한 몽롱함까지 가져다 준다.

인체를 이해하고, 때로는 사랑하기도 하리라.
청결함에 대해서, 건강함에 대해서,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
그리고 노동의 숭고함에 대해서, 팔다리를 움직이는 일에 대해서,
물과 기름과 땀의 구별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겪고 느끼고 지켜보았을까.

체구가 작은 그녀는 나에게 더 큰 돈을 받고 뜨거운 타올을 얹어 온 근육을 풀어내고
밟고 문지르고 두들기고 눌러주기를 한 시간여.
고개를 숙일 때마다 찢어질 거 같던 등짝의 고통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쥐약을 먹고 일한다는 그녀의 깔깔대는 웃음은
박카스 한 병에 다시 일어나는 일상이며,
맨소래담과 잘게 썰은 오이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기술자다.

5천원의 팁을 얹어 드리며 꾸벅 인사를 한 나는 맨몸뚱이였는데
갸날픈 체구의 검은 속옷을 입고 흰 타올을 허리에 두른 그녀가 말하기를
일주일은 주간, 일주일은 야간이니 전화번호를 가져가라 한다.
그녀의 호칭은 연정언니.
사우나파크의 세신관리사.

2013. 2. 2.

폭력의 반복

내재된 폭력의 기억이
다시 폭력을 부른다.
인간에게 복수심이란
존재를 유지하려는 관성,
혹은 형평성을 뜻하는 것인가 생각한다.

굳이 누군가에게 복수하겠다는 구체적인 마음을 갖지 않고 고상한 마음의 수련이나, 또 다른 행동의 승화로 변질되었을 때도, 잠재의식속에 숨어서 치유받기 매우 어려운 그 수많은 폭력의 기억들이, 타자를 향해, 혹은 자아를 통해 다시 발현된다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이 폭력인 줄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살았던 세월동안, 폭력은 이미 영혼 깊이 각인되어 살아가는 방법의 하나로 자리를 잡아 버린다.

각성이 일어나고 그 마음과 몸의 표현들이 모두 대단한 폭력성을 띄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한 다음엔, 이미 살아가는 방법과,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서 다른 여지를 다 차단해 버린 후다. 그리하여 가치관의 붕괴와 세계의 몰락이 동시에 발생하고 쉽게 이름 지을 수 있는 “우울증” 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몇 가지의 약물로 감정이 전달되는 시냅스들의 연결을 차단하고 깊이 사고하지 못하도록 나른한 육체를 만들어주어, 그 당시의 제 2의 반사적 폭력사태를 면하게 도와준다.

그러나 내재된 폭력의 문법을 고치는 방법은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고 세상엔 이미 혼자다.

세상의 모든 이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삶은 언제나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고 하나의 인간개체에겐 오직 하나의 우주가 존재하며 그 우주엔 오롯이 그 우주의 주인 단 하나다.

고립된 채 다른 세상의 문법을 배우는 일은 어렵다. 언어는 늘 타자를 모방하면서만 배울 수 있다. 모방이 불가할만큼 폭력에 길들여진 채 세월이 지나버리면, 반복되는 것은 좌절과 좌절의 연속이다.
게다가 이미 인간과 사회에 대한 맹목적 신뢰 없이 불신마저 무럭무럭 자라난다면.

그 이후는 걷잡을 수 없는 카오스.
그 누구도 사전에 막을 수 없고 오로지 결과, 상처와 폭력, 혹은 시체만이 남곤 한다.

2013. 0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