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의 규칙

눈 내리는 오후, 늦게 일어난 탓에 끼니를 거르고 약속장소로 갔다.
만나기로 한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 60번쯤 겨울을 겪은 사람.
그가 대부분 잊었을 17년전 기억을 끄집어내어 상기시켜주어야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었다.
공공기관의 2층에 있는 무인까페.
미리 보내준 서류를 읽지 못했다기에 출력해 간 같은 서류를 넘겨주었다.
그가 집중해서 서류를 읽는 사이, 나는 1500원을 카드로 결제하고 큰 종이컵에 커피를 한 잔 뽑아왔다. 내가 커피를 가져온 후에도 그는 진지하게 서류를 읽고 있었다.

내가 앉은 자리는 공간의 정중앙에 놓인 TV가 보이는 자리였다. TV는 켜져 있었고, 몽골로 보이는 화면이 흘러갔다. 어린아이가 초원을 뛰어놀았고, 여자와 남자들, 염소인지 산양인지 모를 짐승들이 지나갔다.
고개를 잠깐 숙였다가 들었더니 화면 속의 사람들이 흰털의 그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있었다. 벌겋게 드러낸 짐승의 속살, 화면이 바뀌어 내장을 꺼내고 그 안에 고인 피를 사람들이 쓰는 양동이에 옮겨 담았다.

내가 그를 만난 이유는, 17년 전 시작된 일이 왜 이제야 완성이 되었는지, 그동안 어떤 욕망들이 오갔는지, 찬성하는 사람들의 명분은 또렷하고 단순한데, 반대하는 이들의 명분은 왜 그렇게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었는지, 그 단서를 찾기 위해서였다. 사실 나는 반대자들의 이유를 알지 못해도 그만이지만, 알고 싶었다. 욕망의 실마리를 잡아보려고 간 자리에서 살아있던 생명이 고기가 되어가는 압도적인 화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창밖에 내리는 흰 눈을 맞으며 멀리 달아나고 싶어졌다.

약속장소 바로 앞엔 샤니 빵공장이 있었다. 언제였더라. 인터넷에서 본 곳인데, 여태 경험한 중에 가장 최악의 근무지였다고, 샤니에서 보름을 견디면 어디든 견딜 수 있다고. 그런데, 그 이야기는 택배상하차가 생기기 전의 글이었던 거 같다. 보름을 견디면 어디든 견딜 수 있는 곳의 어디는, 어디일까?
집에 오는 길, 운전을 하던 박부장이 다시 한번 가고 싶은 곳을 말했다. 오늘 같은 날이어야 하는데. 우리가 갔던 곳 중, 눈이 와야 더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이나, 도담삼봉같은 곳 말이다.

한 지역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몇 가지 승자와 패자의 규칙을 찾았다.

첫 번째는 며칠전에 적은대로,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던 사건들은 결국 10년이나 20년을 두고서라도 그 물증들이 나타나는거다. 스스로의 행동이 물증이 된다. 대부분 올바르지 않은 행동들이라, 결국은 잘 드러난다. “의심스럽던 자들”은 욕망을 감춰서 이슈를 이슈로 덮는 데는 능숙하지만, 결국 어느 순간 덮을 이슈가 없어지거나 궁극적으로 욕망을 실현해야만 하니까,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간이 걸릴 뿐이지.

두 번째는, 내부총질을 하는 자는 필패를 면치 못한다는 것이다. 이 나라의 특성인지 모르겠으나, 내부고발과 내부총질은 다르다. 공익을 위한 고발이나 부당한 권력에 항거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돋보이고 싶어서, 앞서 가는 자를 추월하고 싶어서, 등 뒤에서 “저 자에게 구린내가 난다”고 떠들어대던 자는 부활하지 못했다.

세 번째는, 단순하고 정확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이유로 싸우는 사람들이 이긴다는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이것은 공익과 꼭 연결되지 않는다.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고, 어쩐지 의심스러운 이유를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지키려 했던 ‘보이지 않는 그 무엇’ 때문에 소멸하고 만다.

내가 찾은 이 싸움의 논리들이 완전히 틀려먹었을수도 있을테니, 앞으로도 잘 지켜봐야겠다. 어떤 싸움들이 결국 승리하는지, 알고 싶다.
갑자기 징기스 칸이 생각나네.

2020.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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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새끼는 어떻게 살아있는거지?

1930년대생 어르신들을 만날 일이 생겼다.

오늘 처음 자리를 가졌고, 내 딴에는 그 분들께서 다채로운 이야기를 구성지게 펼쳐주시지 않으실까 기대도 했으나 기대일 뿐이었다. 할아버지들은 단답형으로 이야기가 끊어지기 일쑤고 가장 연세가 많으신 구순의 할머니는 한맺힌 이야기를 반복하셨다.

 

1930년대.

이 분들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일본제국은 곤고했다.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국가나 민족에 대한 의식이나 개념이 생기기 전에 일본이름이 주어졌다. 학교에 가면 일본어를 배웠으며 일본선생에게 일본노래를 배웠다. 불과 여섯 살, 일곱 살, 많아봐야 열 살인 아이들에게 왜 일본이름을 썼냐고 물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1930년대생, 그들의 부모들은 190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 일제침략을 직접 목도한 세대일 것이다. 그들이 새파랗게 두 눈을 뜨고 국권이 침탈되는 과정을 지켜보았을 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갖지 못한 백성의 한 사람으로 나라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지는지, 내부가 얼마나 썩어들어갔는지 이미 다 체감하지 않았을까.

한 국가가 외세의 침략으로 무너지는 것은, 강력한 무력과 고도의 심리전이 같이 동반된다 하더라도, 어딘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분명히 존재했으리라. 물샐 틈이 없는 집구석에 도적이 들어오진 않으니. 어쩌면 일제시대의 개막을 환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본의 점령을 환영한 자가 과연 친일이었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 폭압과 차별에 대한 반감으로 어찌됬건 무엇이 됬건 “새로운 것”이 도래하길 기다리지 않았을까 말이다. 물론 친일의 문제는, 폭력을 인정하고 수긍하고 동조했다는 점이 크기에 비난받아 마땅하다.

국가와 민족을 생각해, 정치적으로 독립을 주창하고 굳게 맞서 싸웠어야 하는 것은 국가구조를 지켜내는 명목으로 녹을 먹는 자들이지, 논밭에서 뒹굴고 해지면 피곤해 곯아 떨어지는 백성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1930년대생.

이 분들은 자연스럽게 일본학교를 다니고, 국가와 민족의 사전적 정의를 알게 될 때쯤에 해방을 맞이 하게 된다. 그리고 신속하게 퍼져나가는 애국심과 민족주의의 급물살을 타게 된다. 그렇다면 이들은 1945년 8월에,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 것인가.

자기의 의지와 무관하게 배웠던 일본어와 불과 20년이 안되는 세월동안 정겹게 써오던 두 개의 이름들, 그 중의 하나를 처참하게 밟아버리고 정들었던 일본인 선생과 이웃들이 (모든 일본인 개개인이 제국주의인 것은 아니므로) 있었다 한들 모두를 부정해야 하는 역동의 순간을 맞이했을 것이다. 매일 보고 다녔던 일장기를 불태우고 저들은 모두가 다 악마와 같은 것들이라고 한 순간에 세상이 뒤집혔을 때, 10대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태평성대에도 자기 정체성에 혼돈을 느끼던 순간,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한 개념이 한꺼번에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그리고 해방과 동시에, 이들은 문맹이 된다.

배운 것은 일본어요, 썼다가 불이익을 당한 것은 조선어였으니, 그들이 조선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다시 돌아왔을 때 국가는 이데올로기에 휩싸여 이리저리 흔들렸고, 곧 전쟁이 터져 피란을 가거나 숨어 지내거나 전쟁터에 나가거나 살아 있기 위한 시간을 지낸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을 무렵, 피폐해졌거나, 혹은 무기력해진 모습으로 다시 새로운 세상에서 잘 살아나가기 위해 부지런히 벌어, 먹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악착같이 조선말을 다시 익히고 갈고 닦고 학교로 돌아간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19세기, 20세기만 그랬던가, 그 때 동아시아만 그랬는가.

인간은 그저 큰 물결에 휩쓸려 흘러 흘러 떠내려 간다. 그 중에 누가 더 근력이 좋아 떠내려가는 통나무를 끌어안는지, 그 통나무 위에 떠내려가는 누구를 건져 올리는지, 어떤 사람은 떠내려 가는 돼지를 실어 올릴 수도 있고 거센 물살 속에서도 실속 차리는 인간은 분명히 존재하고 힘에 부쳐 물밑으로 가라앉는 자도 있다.

물길은 끝없이 흐르고 우리는 언제 헤엄을 치고 언제 고개를 들며 언제 숨을 쉴 것인가 결정하며 떠내려 간다. 죽어가는 생명을 외면할 것인가, 같이 죽기를 불사할 것인가 말이다.

소용돌이 치는 물결, 아래는 한 치도 예측할 수 없는 흙탕물속에서 끝없이 내몰리고 휘몰아치는 일. 그런 자아들이 모여, 타인은 과연 어떻게 생존해 나가는 지 들여다보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누가 그런 얘기를 했었다.

한반도가 3면이 바다인데, 그 모든 바다를 포기하는 순간, 한반도의 모든 인간은 중앙만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고. 모두가 사대문안에 모여, 다른 놈은 어떻게 담을 타고 오르는가, 끊임없이 관찰해야 하는 것은, 누구도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으며, 어떤 집단도 정당한 제도를 만들어 번호표를 끊어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옆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다 알게 되는 정서의 출발.

그건 바로 “저새끼는 어떻게 아직도 안 죽고 살아있는거지?” 라는 끊임없는 생존의 위협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2013. 5. 20.

일본극우주의자들의 망언 및, 일베충 광주모독 때매 매우 속이 시끄러운 2013년 5월이다.

가정환경조사서라는 솥뚜껑

내일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이다.

학교 입학에 대해서 크게 개의치 않고 지냈다가 필요한 서류를 챙기기 위해 검토를 했다. 학교에서 나눠준 유인물 묶음에 입학식에 제출하는 서류가 있었다.

가정환경조사서 / 예방접종증명서 / 저녁 돌봄 지원서 세 가지다.

저녁 돌봄은 신청하지 않을 것이라 취학통지서를 받고 준비해 온 예방접종증명서를 민원사이트에서 출력했다. 각종 전염병에 대해서 미리 접종을 완료했다는 증명서인데, 입학식 전에 미리 접종을 받은 기관과 연락을 취해서 전산망에 올려달라고 요청을 해야 했다. 이런 서식은 최근에 전산화가 되었기 때문에 올해 입학하는 아이들은 어느 정도의 수작업이 필요한 부분이다.

가정환경조사서를 펴놓고 가족사항을 적는데 짜증이 밀려왔다.

아마 그 전에 봤던 학교 유인물에 영어와 한자가 마구 뒤섞여 있었던 것의 영향도 있을 것이고, 개인적인 다른 이유의 몇 가지 사건 때문에 좀 짜증이 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옛 말이 있다.

살면서 다들 그렇게 말하듯이, 옛 말 그른 거 하나도 없다.

이 속담은 매우 쉬운 말로 전하고 있지만 그 말은 사실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다.

가정환경조사서는 나에게 트라우마다.

내가 초등학교 즉, 그 때 말로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는 80년대였다. 그 시대에 나의 부모님은 이혼을 했다. 그 사람들은 30여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봐도 같이 살지 않는 편이 각자에게 훨씬 좋은 경우이다. 더 같이 억지로 살았다가 어떤 불행이 펼쳐졌을 지 예상할 수 없다.

이혼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잘못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별에 대해서 굳이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도 옳지 않다. 이미 한국이라는 이 고리타분한 보수의 나라에서, 조선조 이상하게 왜곡된 유교사상이 깊이 물들어 있는 이 환경에서, 이혼만은 절대 불경스러운 일이라며 참고 지내다가 결국 더 큰 불행을 앞두고, 아니면 이미 불행해 질대로 불행해 진 상태에서 서로에게 칼을 겨누며 헤어지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당신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의 이혼은 단지 두 사람만의 관계에서 작용하지 않는 것이 이 나라이다.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기에, 헤어지는 결혼부부들은 이 나라에 그리 많지 않다. 이 국가의 결혼은 수많은 인간관계와 불필요한 친족관계 때문에 얼기설기 꼬이는 경우가 훨씬 많다. 물론, 되도록이면 헤어지지 않고 사는 것이 좋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굳이 인간의 일부 나라에서 일부일처제를 고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깊이 따져본다면, 그 역시 주장의 논거는 희박하다. 단순히 그런 거 아닌가.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원래 그래 왔으니까. 글쎄 그 보다는 사회체제가 더욱 복잡해 지지 않았으면 하는 암묵적 동의 아닐까 싶은 것이다.

성장 후 여러 가지 이유로 이혼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였지만, 문제는 그 당시에 이혼녀의 딸로 살면서 받았던 여러 가지 상처들이다. 정작 당사자는 오죽했겠는가. 교회에서 주보를 나눠주는 시간에 사람들 많은 데서 “이집사 이혼했다며?” 라는 말도 들은 사람이 모친이다. 그게 그 때는 수모였다. 그런 시절이었다. 내가 늘 의아했던 것은 담임선생님에게 살짝 귀뜸한 일이 왜 전교에 소문이 퍼졌는가 하는 거다. 내가 고의적으로 누설을 했는지는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때는 “이혼자녀”라는 것이 매우 흔치 않은 사례였다. 전교에 단 두 명이 이혼자녀로 알려져 있고 그건 꼬리표가 되었다.

“쟤 엄마 이혼했대.” 라는 말.

가정환경조사서에 억지로 아빠를 적어 넣기도 했다. 아빠라는 존재가 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없으니까. 단지 같이 살지 않을 뿐이었고 자주 만날 수 없을 뿐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환향녀가 화냥년이 되던 세상을 지나, 사람이 죽어도 열녀가 났다고 숭앙하던 극악무도한 세상을 지나, 전쟁을 거쳐 수많은 남자들이 죽어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부부가 척을 지는 것은 대단히 불손한 일로 여겨지던 세상에서, 이혼은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강요했으며, 결핍된 것은 모자란 것이고, 그 모자란 것은 정상에서 벗어난 일이며, 정상에서 벗어난 것은 옳지 않다는 폭력이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흔히들 결손가정이라고 말했다. 최근에 들어서야 결손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이 좋지 않다며 굳이 그런 낱말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되묻는 사람들이 생겼지만, 국가와 사회가 정해놓은 가족의 이미지는 아빠 엄마 자식 둘로 이루어진 것이 정상, 그 외의 것은 비정상으로 여겨지던 규칙이 있었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것은 매우 폭력적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동일할 수 없고, 모든 것은 변화가 가능하다. 그 이유는 살아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것들은 변화할 수 있고, 다른 것들과 같을 수 없다. 다양성은 인간 존재의 근원이지만, 정치가 시작되고, 사회가 조직화되면서 정상과 비정상으로 범주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게 바로 통치하기 쉬운 조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줄을 세워, 이 줄에 들어서지 못한 자들은 이방인이라고 말을 하면, 그들은 법이 굳이 보호하지 않아도 되는 명분이 생긴다. 조르주 아감벤이 말했던 호모사케르의 존재 이유와 법철학이라고 하는 어려운 이름의 학문의 요점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법은 법 안에 있는 사람만 보호할 수 있고, 법 밖에 존재하는 것들은 외면해도 되는 정당성을 갖는다는 것. 그 편이 통치하기에 편하다. 누구도 반발하지 않으려 드는 것은 법안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방인이 되지 않고 법 안에 속한 존재가 되어 보호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보호받고 싶기 때문이다. 사회가 복잡하고 불안할수록 사람들에게 법은 마치 커다란 성채처럼 느껴진다.

그 성채 안에 들어간 자만,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규칙과 윤리, 도덕과 원칙, 이 것들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성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 폭력이 가득한 성채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는 사회를 만드는 일, 그 안에서 떨궈져 나오면 어쩔 것인가 하는 두려움을 이용하면 사람들은 “고분고분” 해진다.

 

사회적 질서를 위해, 사회적 문란함을 없애기 위해, 말도 안되는 이유로 정해놓았던 “올바른 가족상”에서 벗어났던 나는, 지금 그 “올바른 가족상”에 또 얼마나 멀리, 혹은 얼마나 가까이 서 있는지 모르겠으나, 가정환경조사서에 남편의 이름과 나의 이름을 적으면서 학력을 적는 란이 없다는 것을 새삼 희한하게 느꼈다.

 

없어야 마땅한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세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줄 서지 않으면 보호해 주지 않을테야. 이 나라는 전쟁이 언제 터질 지 모르는 나라니까. 게다가 삼면이 바다니 도망갈 데도 없고, 그 위엔 당신을 잡아 먹으려는 괴수들이 드글거리거든” 이라는 협박을 들으며 고분고분 줄 서던 기억.

 

가정환경조사서, 부모의 화목 정도와 내 집의 경제를 책임진 자들이 기업에 얼마나 많은 돈을 투자했는지 확인했던 그 고리타분한 서류가 30년을 돌아 나에게 다시 왔다. 내가 학부형이 되면 실내화를 빨지 않아도 되겠지 라고 생각했던 건 꿈이었으며, 이제는 학교에 경찰관이 나타나 학교폭력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학교폭력을 당하지 않으려면, 움츠러진 몸씨, 주눅든 말씨, 머뭇거리는 마음씨가 모두 문제가 된다고 했던 것은 정해진 매뉴얼이었을 게다. 그리고 그는 읽었다. 당당하고 큰 소리로 말하도록 합니다. 그 이유는 굳이 그가 덧붙여 읽지 않아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쫄면 피해자가 되니까” 라고.

가해자가 되지 말라는 말보다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키우고 조금 뻔뻔한 태도를 가지라고, 조용하거나 얌전한 성격은 법으로도 보호해 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삐딱한 마음이 들었다.

법과 폭력의 반복이 거듭되는 동안, 이제는 피해자가 될 성격과, 가해자가 될 성격의 유형이 나뉘고 있다. 모든 아이들이 당당하고 큰 소리로 말하고 “싫어. 저리 가. 하지 마”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세상의 폭력이 사라지는가.

 

이 사회는 사회의 조직보다 언제나 개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 더 많고, 사회가 개인을 지배한다는 것은 절대 인정하지 않으면서 “당신이 잘해야 국가가 잘할 수 있다”고 강요하고 있다.

 

대체 이 파렴치한 구조의 사상은 언제쯤 끝이 날까.

의리와 대의를 위해 싸우는 무사도 아닌, 징징대며 삥이나 뜯는 골목상권의 양아치 같은 이 조직은, 예전엔 자라였고 여태 솥뚜껑으로 남아 있다. 거리 곳곳이 솥뚜껑이다. 밥도 짓지 않은 무겁기만 한 솥뚜껑이, 솥은 어디로 간 지 뵈지도 않은 채 여기 저기서 날아다니고 있다. 이 나라의 전쟁과 테러는 솥뚜껑들이 해내고 있다.

 

2013년 3월

송충이의 솔잎

망해가는 마봉춘이 창사특집다큐를 찍으셨던데

아프리카의 한 부족이 관광객의 사진촬영 대상이 되어 돈을 받고 자기들의 삶을 보여주는 생존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있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한다는 옛말이 있는데.
나의 내면에 내재된 조상들의 솔잎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의문이 생겼다.

• 적어도 우리 기억속, 우리의 역사속엔 다양한 직업군이 있었고 모든 사람이 문명사회에 진입하기 전에는 성씨가 분류되기 전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아프리카에는 근대국가로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인지, 내가 모르고 있는 것 뿐인지
서구사회와 가까웠고, 그 문명의 유적으로 알려진 북아프리카의 이집트와 모로코는 분명히 전근대 고대국강 형태를 갖추고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 존재하였는데,

인류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화를 거듭했다면 정말 중앙아프리카 이남엔 고대국가의 이름이 단 하나도 없었을까?
마야와 잉카와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 정말 그 곳엔 지배와 통치가 허용되는 문명이 없이 공동의 평등한 삶만 존재했는가?
단순히 내가 모르는 것인가 혹시 누군가 필요에 의해 삭제했거나 왜곡한 것은 아닌가.

• 송충이의 솔잎은 유전자에 새겨진 정체성의 이야기다. 수십년 수백년 수천년을 그렇게 살아오면서 계발되고 특화된 각자의 성질에 대하여 되도록 정체성에 가까운 환경에서 살아갈 때 사람은 안정감을 느낀다.
오래전부터 농경사회였고, 유목이나 사냥보다 농경에 어울리는 땅에 살던 이 나라의 사람들은 도시에서 태어나 농촌으로 이주해도 歸農이라 말한다.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게 고향이고 정체성이고 유전자에 새겨진 역사이므로.

서구사회나 다른 민족들 중, 아직도 몽골은 유목생활을 반절정도 유지하고 있고 자연환경이 척박한 곳에서는 타고난 솔잎에 어울리게 사냥을 주로 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글쟁이 집안, 농사꾼집안, 장사꾼 집안이 대대로 내려오면서 축적되는 노하우가 있고 그 직군으로 살아가는 비법들이 삶에서 삶으로 구전되어 내려오며 삶은 비교적 익숙한 환경내에거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동물적 개체가 보수성을 유지하는 것은 당연한 생존의 문제이므로.

21세기.
우리는 모두 자신의 솔잎을
10년 이내 단기간에 쌓아온 스스로 만의, 한 개인의 노하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인류는 대와 세를 거쳐 이어져 내려왔고 삶속에 숨어 있는 역사성은 단지 10여년 만에 규정되거나 안정화되지 않는다.

우리가 헤매이는 이유는

너무 멀리 고향을 떠나왔기 때문이 아닐까.

– 아스팔트도 독하기 독한데, 지속되는 폭설때문에 제설방제에 사용된 염화칼슘이 그 독한 아스팔트를 뻥뻥 뚫어놓은 도로에서 당황하던 하루 종일을 결정짓는 생각을 해봤다.

9세기 ~ 18세기

식민 지배 이전의 아프리카에는 10,000개 이상의 국가와 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4] 이들은 제각각의 정치 조직과 지배 체제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는 아프리카 남부의 산족처럼 사냥과 채집 생활을 하는 작은 가족 집단도 있고, 아프리카 남부와 중부의 반투어권 씨족 집단처럼 좀 더 크고 조직을 갖춘 집단도 있으며, 더 나아가 아프리카의 뿔의 씨족 집단, 사헬 지역의 왕국들, 서아프리카의 요루바와 이그보(Igbo) 혹은 동아프리카의 스와힐리 해안의 무역 도시와 같은 자치 도시국가나 왕국처럼 더욱 체계를 갖춘 나라도 있었다.

기원후 9세기경 초기 하우사 등 일련의 왕조 국가들이 사하라 이남 사바나에서 서부 지역부터 중부 수단을 지배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강력한 나라는 가나, 가오, 카넴-보르누 제국이었다. 가나는 11세기에 쇠퇴하였으나, 말리 제국이 뒤를 이어 13세기에 서부 수단 대부분을 통합하였다. 카넴은 11세기에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서아프리카 해안의 삼림 지역에는 북쪽 무슬림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독립 왕국들이 성장하였다. 이그보의 은리 왕국(Nri)은 9세기에 세워진 초기 왕국이었다. 또 오늘날 나이지리아 땅에서 매우 오래된 왕국으로, 에제 은리(Eze Nri)가 다스렸다. 은리 왕국은 이그보 우크부(Igbo Ukwu)에서 발견된 정교한 청동 유물으로 유명하다. 이 청동 유물은 9세기경으로 보인다.[35]

요루바의 도시국가와 왕국 가운데 역사상 최초의 나라 이페(Ife)는 이페의 우니(Ooni)라는 성직자 오바(oba, 요루바어로 “왕” 혹은 “지배자”를 뜻한다)가 다스렸다. 이페는 아프리카에서 종교와 문화면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여겨졌으며, 청동 조각의 독특한 자연주의 전통으로 유명하였다. 이페의 정부 형태는 오요 제국(Oyo)에서 수용하여, 이곳의 오바(임금)은 오요의 알라핀(alaafin)이라고 하였으며, 한때 수많은 다른 요루바 혹은 비(非)요루바 도시국가와 왕국을 다스렸다. 다호메이의 폰 왕국(Fon)은 오요의 지배를 받는 비 요루바 나라 중 한 곳이었다.

알무라비툰은 사하라 사막의 베르베르 왕조로, 11세기에 광활한 북서 아프리카 지역과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였다.[36]바누 힐랄과 바누 마킬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온 아랍 베두인 부족의 연합체로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이집트를 거쳐 서쪽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이 이주하면서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이 융합하여, 지역 주민이 아랍화되고, 아랍 문화는 이슬람을 기초로 지역 문화의 여러 요소를 흡수하였다.[37]

아래 내용은 위키디피아

http://ko.m.wikipedia.org/wiki/아프리카#section_3

기억의 지배

1.

어제 트윗에 쓴 글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4학년때인가 5학년때인가 왕따를 당한 적이 있는데 폭력 이런 건 아니고 집단 따돌림. 갑자기 성적이 오른 걸 애들이 내 요점정리 쪽지를 보고 컨닝을 했다며 근 6개월간 나를 괴롭혔다. 결국은 애들의 강요로 담임에게 거짓자백도 했지.

봄에 봤던 시험을 가지고 가을이 깊어갈 때까지 나를 괴롭혔는데 내 등에 욕쓴 쪽지 붙이고 깔깔대고 뭐 그랬다. 나중엔 애들이 하도 몰아세우니까 나도 내가 컨닝을 했다고 착각을 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는데. 아직도 동갑내기 여자에 대한 포비아가 있다.



정확히 언제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 5학년때가 맞는 거 같다. 
4학년때는 담임과 관계가 정말 좋지 않았고, 그 담임선생은, 촌지를 요구하는 김옥자라는 선생이었는데 긴 파마머리에 잠자리 안경을 썼었다. 
당시의 일을 떠올렸을 때 내가 허위 자백을 한 것이 김옥자 선생이 아니라 중간에 병가로 자리를 비웠다 다시 복귀한 허재영 선생님이었으니 5학년때가 맞을 것이다. 


아무튼 사건은 위와 같이 벌어졌고 몇달이 지나 담임에게 허위자백을 했고 교실 밖에는 아이들이 나를 지키고 있었다. 그 때 주도를 했던 아이가 오윤숙이라는 아이였다. 머리가 유난히 노랗고 매우 날카롭게 생긴, 그런 인상의 아이였다. 

결정적인 이유는 오윤숙과 내가 성적으로 엎치락 뒤치락 하는 사이였는데 
나는 전교에 소문난 이혼녀의 딸이었고 – 당시 전교에 알려진 이혼가정은 단 둘 – 가정형편도 그닥 넉넉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스카우트를 하거나 여러가지 눈에 띄는 짓들을 했으니 그 아이 눈에 내가 가시같았을 지도 모른다. 

4학년때 우등상을 촌지때문에 받지 못해 매우 억울해 하며 하루종일 울었고 
엄마가 종업식날 학교를 찾아가 소고기 한 근을 갖다 주며 (당시는 이런 촌지도 가능하던 무려 80년대)
우등상을 주지 않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엿을 먹인 사건이 있었다. 

다음 해 (내가 5학년이 되던해에) 동생이 입학을 했는데 담임이 김옥자 선생으로 배정이 된 것. 
교실 뒤에 서 있는 엄마와 눈이 마주친 선생이 놀랐다는 전언을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입학 두번째 날에 동생이 반이 바뀌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1학년 6반으로 배정받았던 아이가 2반으로 변경된 것. 
이게 선생의 농간인지 아니면 학사처리의 실수이거나 일괄적으로 몇 몇 아이들을 이동시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내가 확인 한 바가 없으므로. 

이런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나는 기필코 촌지를 건네지 않더라도 1점차로 우등상을 밀리는 일이 절대 벌어져서는 안된다는 열두살의 굳건한 다짐으로 (풉;) 새벽부터 일어나 공부를 하는 기염을 토했고, 4학년 전체 성적 91점에서 98점으로 빅 점프를 한 것인데. (그 몇 점에 목숨거는 아이였다 내가) 그게 사달이 된 것이다. 

2. 

쓰다가 생각이 난 건데 
중학교 2학년 때 교회를 같이 다니던 친구들 몇 명, 유진, 수정, 혜영 뭐 이런 아이들 사이에서 남녀관계가 엮여서..
에..그러니까 유진이가 흠모하던 오빠랑 나랑 연애질을 시작한.. 그게 발화점이 된 것인데. 
사실 나는 정군을 좋아했었는데 (아 한 참 그럴 때 아닌가. 다들 양해해주시길) 정군이랑 잘 안되다가 윤군의 고백을 받고 윤군에게 틀어버린 것인데 유진이가 좋아하던 윤군을 그러니까 내가 빼앗아갔다..는 .. 
중2만의 논리에 밀려 몹쓸년이 되어버렸다. 
(너는 고백도 하지 않았잖아 응? 이라고 하기엔 사실 뭐 되게 애매모호한 점이 있다.)

아무튼 그리하여 이 문제도 근 일년간의 따돌림으로 이어졌는데 
교회 근처 골목에서 상당히 심한 욕설등을 당한 기억이 있다. 
그게 수차례 이어졌고 아이들이 그간에 쌓인 나에 대한 불만도 겹쳐서 (사실 당시에 내가 뭐 상당히 인격적이었다거나 선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중 2의 패거리 문화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버렸다. 나는 그 간극을 신앙에 집중하고 (컥) 학교에서 맡고 있던 학생회 간부 활동에 집중하고 (컥컥) 공부는 하지 않았으나 연애에도 집중했다. (환장) 

그러니까 나는 두 번의 따돌림을 겪었던 것인데 
경미하다고 생각이 되는 것은 반전체나 전교생에게 낙인이 찍힌 것보다는 
내가 어울리던 패거리에서 떨궈져 나간 것이라 다른 아이들도 남아 있었고 나에게 할 일도 늘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공부에 몰빵 한다거나 중학교 때는 다른 활동에 몰빵 했다. 
이 아이들과는 졸업식 즈음에 다시 화해를 했는데 역시나 나는 매우 기가 죽은 상태였고 
내가 학생회장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 얼만큼의 영향이 있었던가에 대해서. 
잠시 생각을 해보았으나 그건 알 수 없다. 
그런 수준의 아이들은 아니었던 거 같다. 
이 아이들과는 주로 유재하나 봄여름가을겨울의 이야기를 많이 나누던, 그런 친구들이었다. 


3. 

문제는 동갑내기 아이들과 두 번의 마찰을 빚은 후
나는 75년생 여자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때 가정내 우환으로 학교를 1년 쉬고 76년생들과 학교를 다녔는데 그 때는 아이들과 고딩에게 하늘같은 1년의 차이를 극복하고 참 잘 지냈다. 
그리고 졸업후 75년생들과는 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동기들이 모두 76년생이었으므로. 
친구들의 연령대가 77까지 내려가는 일도 펼쳐졌으나 잦은 이사와 이직, 결국 유학까지 가면서 여러가지 연결고리들이 사라져버렸고 지금 내가 연락을 하고 종종 만나는 75년도생 친구들은 초등학교 동창 남자 아이들(이젠 아이들이 아니지만) 두명 정도와 고등학교 동기는 아니지만 입학 때 같은 반이었던 동갑내기 3명이다. 

기실 나란 사람이 사회성이 상당히 좋고 사람을 잘 사귀고 여기저기 커넥터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발이 넓은 편인데 주변에 75년생이 이렇게 없다는 건 약간 의아할 정도이다. 

생각해보니 예전에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동갑내기 친구들과 고등학교 때 친구들을 함께 무리지어 몇 번 만났는데 상당한 피로감을 느껴 친한 친구에게 다른 아이들을 만나는 게 좀 어렵다고 고백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에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75년생 여자, 라든가 동갑이라든가 하는 얘기를 들으면 뒤로 주춤. 하게 되었던 기억이 분명히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최근 집단따돌림으로 인해 지적장애를 입었다는 어느 여학생의 사연을 듣고 나서 떠오른거다. 





4.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 

성폭행 피해자는 뉴스에서 성폭행에 대한 뉴스가 대대적으로 보도될 때 2차 3차의 정신적 상해를 입는다고 한다. 
나 역시 기억도 잘 하지 못하던, 그러니까 가슴속에 막 새겨놓고 곱씹고 그러던 일이 아닌, 
내 무의식, 잠재의식 저기 어느 구석방에 처박아놨던 기억과 상처와 난감했던 그 공기가 갑자기 터져 나온 것인데, 다행히도 2차 상해를 입을 정도는 아니다. 그건 당시에 별로 힘들지 않아서가 아니고, 지금 내가 많이 단단해졌기 때문이다. 

예전에 어느 책에서 
양쪽 성의 부모중에 편향적으로 관계가 좋지 않았던 성별의 부모와의 유착관계가 성장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는 설을 들었다.  예를 들자면 양쪽 부모 중 특별히 엄마와 관계가 극단적으로 나빴던 영유아기를 지내면 성장을 해서도 여성들과 잘 지내지 못하거나 엄마 또래의 여성들을 대하기 어려워진다는 말인데, 이건 익숙함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할머니와 지냈던 아이들은 세상의 모든 할머니를 친근하게 여긴다. 
어려서 단 한 명의 노인도 만나보지 못하고 자란 아이가 세상의 모든 노인을 어색하게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나는 아이들과 내 동생과 나의 인간관계의 폭을 보면서 우리의 기억나지 않는 영유아기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가를 생각해 보곤 한다. 

특정한 패턴이 사람마다 발견되는 것은 있다. 
내 경우는 연상의 남자들이 연상의 여자들보다 편하고 연하의 남자들보단 연하의 여성들이 편하다. 
그건 아마 내 기억속에 각인된 상처나 여러가지 경험들로 인해 스스로 방어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런 부류의 사람들이 나를 공격해왔다. 그러므로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다는 자체 방어 시스템이 가동되는 것이다. 

5. 

문제는 이러한 기억들이 제대로 박혀있는가도 있으나 오인되고 조작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 1차 따돌림을 당했던 초등학교때의 그 컨닝사건은 내가 허위자백을 하면서 정말 내가 컨닝을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혼란에 빠져 상당히 괴로움을 겪었다. 

성장과정에서 부모의 갈등으로 인한 한 사람의 상처받은 마음으로 인해 조작된 기억이 주입되고 세뇌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이게 서른 여덟이나 된 지금에 와서도 작용을 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은 그것으로 인해 나에게 상처를 주었거나 나와 갈등을 빚었거나 나의 기억을 조작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 기억이 나의 인생의 어떤 장애물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부분이다. 


현대 철학자 중 한 사람이자 철학적 해석학의 창시자인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는 객관주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개인의 선입견이 오히려 세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선입견이란 이해하는 사람, 즉 해석자에게 축적된 모든 정신적 자산 일체 (관습, 지식, 경험 등을 통해 생성된)를  뜻하며, 이러한 선입견이 ‘현재의 견해’로 작용하면서 이해를 촉진시킨다는 것이다. 이 정신적 자산이 없는 한 그 어떤 이해과정도 작동할 수가 없게 된다. 결국 선입견에 의해 이루어진 이해의 과정들은 인식의 근본적인 지평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주목할 또 다른 점은 바로 선입견, 즉 대상을 보는 현재의 관점을 ‘열린구조’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가다머는 선입견이 하나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개방되어 있고 변화한다고 말한다. (중략) 결과적으로는 뻔한 말일지 몰라도 선입견이라는, 경계해야 하는 가치를 정신적 자산으로 해석하고 열린 구조를 통해 이에 대한 오류를 방지하는 가다머의 해석.. 

선입견은 그 자체가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선입견이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 ‘닫힌 구조’로 인해 위험해지는 것이었다.  

– 선입견을 허하라  / 김선미 씀 
디자인 문화잡지 “지콜론 57호” 2011년 12월분 중에서 발췌  

그리하여, 
나는 내가 가진 선입견이 얼마나 닫힌 구조로 나를 봉쇄했는지 고찰해 보는 것이다. 
이 깨달음이 나에게 내가 가진 선입견을 다시 열린 문으로 밀어낼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짐작해 볼만한 것이다. 

얼마전 인생이 통채로 조작당한 느낌이 들었을 때, 내가 했던 생각도 이런 것이다. 
그 조작된 기억들이 나를 얼마나 방해해왔는가, 그런 이유로 내가 저질렀던 실수들은 무엇이며, 결국 지금의 나는 얼마나 또 내 삶의 바리케이트를 치고 스스로를 좀 먹고 있는 요소가 있는가 꼼꼼히 점검할 것. 

결론은 어쨌거나 지나온 나의 모든 아픔도 내 인생을 구성해 온 요소들이며, 그로 인해 형성된 지금의 나라는 인간 역시 과거에 대해선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선입견들이 꼭 내 인생을 방해해왔다고 규정짓기도 애매한 것이다. 

내가 꼭, 굳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때 과연 내가 더 행복해졌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는 것이다. 흔하게 내가 하는 이 말은 과거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고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와 다르다는 것이다. 
사람은 움직이는 동물이고 사람의 뇌는 끊임없이 분할하므로, 나의 사고가 달라진 하루 하루의 시점에서 나는 매일 매일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구난방 한 입으로 여러말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건 日新又日新에 해당되는, 인격도야, 혹은 불교적 철학에 닿아있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성인군자가 나치가 되진 않지만, 성인군자도 어떤 경험이 의식으로 들어와 장애가 되기 시작하면서 나치가 될 수도 있는 일이므로. 

6. 

최근들어 일어나는 일련의 학교폭력 사건의 노출 (난 이것을 언론 노출이라고 본다. 여태 없었던 일들이 갑자기 터지는 것이 아니라 늘 있었던 일들이 최근에 언론에 노출되기 시작한 것 뿐이다)과 고문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급작스럽게 사망한 故 김근태 의장을 생각한다. 

고문으로 인해 혹자들은 자기들이 정말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채 허위자백을 하고 이후 살아남기 위해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 조작된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신이 우파나 보수의 호위무사라고 생각하며 치명적인 범죄를 저지르고도 그런 기억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가슴속 어느 어두운 곳에 처박아 둔 조작된 기억들과 

전두환을 비롯한 몇 명의 독재자들을 열심히 보필하고 독재자의 딸을 대권주자로 추대하려는 사람들의 왜곡된 기억과 

새마을 운동이 사실상 농촌을 황폐화 시킨 박정희 독재정권의 매우 파렴치한 임기응변적 대책이었다는 것에 대해서 꼼꼼히 살펴보지 못하고 흰쌀밥 먹게 해준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하는 사람들의 안스러운 구호와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위원장님께서 돌아가셨다” 며 통곡을 하는 북한의 주민들과 

역사를 지우고 또 어린 아이들에게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심어주려는 위정자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당시엔 친일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라고 주장하는 인간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자기 합리화를 위한 스스로 조작한 기억과 가치관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7. 

기억은 우리를 지배한다. 
그러나 그 기억을 끄집어 낼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 기억을 끄집어 내어 다시 펼쳐서 하나씩 따져보고 다시 잘 접어 마음속에 다시 넣어두는 것도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이 작업은 매우 지난하고 고통스러워서 자기 자신이 명료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수 있는 정신상태가 유지될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합리화를 하고 변명을 하고 그런 일은 기억하고 싶지 않다며 기억을 해내지 않으면 깊은 나락으로 빠지는 것은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스스로의 삶을 돌이켜보고 조금 더 숭고한 인간미에 접근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믿는다. 

사람으로 상처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사실상 사람으로 인한 기억에 의해 베어진다. 
그 기억을 꺼내서 다시 접어낼 수 있는 힘이 그들과 함께 하길 바란다. 
기억은 분명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조작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감정은 쉽게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기억들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린다면, 
그 기억들이 아픈 기억이 아니었길 바라는 욕망을 버린다면, 
조금은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다. 

기억들은 기억으로 잔존한다. 
인정하고 보내주는 것. 나뭇잎 배에 글자를 적어 흘려 보내듯이, 유리병에 편지를 적어 먼 곳으로 떠나보내 듯이 기억으로 베어진 상처들을 모두 다 고이 접어 보낼 수 있길 빈다. 

2012. 1. 5. 
















대한민국 새판짜기

진보나 보수가 없는 이 나라에서 그러니까 지금 보수들은 말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다가 가카와 기득권을 비판하면 자기도 모르게 진보진영에 올라탄 꼴이 된다.

여론이나 파벌을 나누는 건 상당히 우스운 일이지만 굳이 규정하자면 기득권과 비기득권으로 나뉘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이 나라는 군림하고자 하는 놈들과 군림당하지 않으려는 세력으로 나뉘는 것인데. 그나마 웃긴 건 이게 1%와 99%의 대도 아닌 것이 이 1%축에도 못 끼고 자기가 누구 때문에 삥을 뜯기고 사는지 잘 모르면서 마치 자기가 1% 인 것처럼 착각한다는 거다. 그러면서 자기가 호위무사라도 된 듯 까부는 형국인데 대표적인 자가 강재천 되겠다.

사실 학문이라는 게 깊이 들어가다보면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드러나기 마련이고 공산주의는 현실적용하는 거에 모두 실패했는데 그건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유토피아적 발상 때문 아닌가. 그러다 보니 공부 좀 했다 하는 것들은 니들이 아는 게 이게 정답이 아닌 세상인데 내가 당신들에게 알려줄테니 잘 들어봐 이런 태도를 취하게 되니.. 이건 자본으로 군림하려는 새끼들을 깐다는 것들이 지식으로 또 군림을 하겠다고 하는 거 아닌가.
기분이 좋을 수가 없잖아.

그러다 보니 이건 마치 피라미드처럼 군림하려는 자본가는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앉아있고 그 밑에서 개뿔 가진 게 지식밖에 없는 지식분자들이 2차 군림을 꿈꾸면서 이들에 의해 선동된 자들과 반대하는 세력들이 박터지게 싸우고 있는 꼬라지밖에 안되는 거다.
중국의 혁명과정에서 지식분자들을 죄다 노동으로 교화시켜야 한다며 하방운동을 시켜버린 공산당과 모택동의 심정이 바로 이런 데에서 기인할 것이다.

그렇다고 분쟁과 토론이 나쁘니까 서로 연대하고 까지 말고 싸우지 말자고 얘기하는 건 그야말로 반민주주의적인 생각이겠다.
이 엄청난 역동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건 이 나라의 빈곤한 민주주의가 발전해나가는 과정이니 설령 이게 피곤하고 머리가
아프다 해도 조금 견디고 참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영화 도가니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리가 부러지면 멍이 들고 부어오르고 그 멍이 빠지고 깁스를 하고 뼈가 다시 붙어가는 과정이 있어야 다시 걸을 수 있는 것처럼 소란스러운 우리의 이 나라도 그 모두 과정중에 서 있는 아주 올바른 현상 아닐까.

건국 60년중에 민주주의 한 게 몇 년인가.
친일과 독재를 청산하지도 못한 바로 오늘의 시점에서 얼토당토 않은 자가 대권주자로 나서는 여기는 아직도 군림하려는 자에게 “여지를 주는” 답답하리만큼 선량한 국민들이 있는 나라다.

자본주의의 새로운 형태와 신자유주의의 몰락이 있다는 이 시기에 이 나라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기운은 잘 하면 뭔가 아주 혁신적인 형태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믿고 싶다.

2012. 1. 4.

휴대폰에서 어썸노트에 끍적거린 건게 너무 길어져서 뭐 블로그에 올려도 돠겠다 싶어서 올립니다.

건국의 정치 – 김영수


철학적인 의미에서 정치 공동체의 궁극적 목적은 ‘잘 먹는 삶’이 아니라 ‘좋은 삶’이다. 
그러나 생존이라는 측면에서 국가는 ‘필요’의 영역이며, 필요중 가장 일차적인 것은 ‘식량’이다.
중국의 전통적 사유에 따르면, 백성의 복질은 ‘욕망을 가진 존재’이다. 
그렇게 때문에 유가에서는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으며,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라고 주장했다.
또는 “먹는 것은 백성의 근본이요, 백성은 나라의 바탕이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토지는 백성의 하늘이다.
이 때문에 맹자는 仁政은 밭둑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국가의 ‘선’은 백성들의 필요를 얼마나 만족스럽고 정의롭게 해결하느냐에 좌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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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시대란 반드시 토지 소유의 극심한 불균형과 때를 같이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시대의 반란 세력이 고창한 정치 이념은 공통적으로 균평(均平)이었다. 공자 역시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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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공민왕의 말처럼, 고려는 대규모 전쟁을 승리를 이끌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왜구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였다. 즉 고려 정부는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에서 한계에 도달했던 것이다. 국가는 백성들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을 보장할 수 없었으며, 생활을 개선할 능력도 없었다. 따라서 왜구 문제의 개선은 개혁파들의 국가 운영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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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何同心友(부하동심우)  마음을 같이한 벗이
各在天一方(각재천일방)  하늘 한구석에 각각 있는지
時時念至此(시시염지차)  때때로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不覺今人傷(불각금인상)  저절로 사람을 슬프게 하네.


鳳凰翔千仞(봉황상천인)  봉황새는 천 길을 높이 날아서
徘徊下朝陽(배회하조양)  돌고 돌아 조양으로 내려가는데
伊人昧出處(이인매출처)  이 사람은 출처에 너무 어두워
一動觸刑章(일동촉형장)  한번 움직이면 법에 저촉 저촉되누나.


芝蘭焚愉馨(지난분유형)  지란(芝蘭)은 불탈수록 향기 더하고
良金淬愉光(양금쉬유광)  좋은 쇠는 갈수록 더욱 빛나는 것
共保堅貞操(공보견정조)  굳고 곧은 지조를 함께 지키며
永矢莫相忘(영시막상망)  서로 잊지 말자 길이 맹세를 하세.




[출처] 次韻寄鄭達可夢周(차운기정달가몽주).鄭道傳(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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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재는 자신의 은거가 단지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키는 것 이상으로 유학의 순수한 정신을 보존하기 위한 것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치가 진리와 분열될 때 취하는 제 2의 태도이다. 한말의 유학자 전우(田愚) 역시 망국을 당하여 제자들과 함께 서해의 고도로 떠났다. 
(중략)


그들 모두는 엄격한 의미에서 이상주의자였으나, 역사는 항상 순수한 전형만을 미래의 것으로 남겨놓는다. 그러나 신은 이 세계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두 종류의 제물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순결한 제물이며, 다른 하나는 상처받은 제물이다. 


순결한 제물은 역사의 성화(聖火)를 위해, 상처받은 제물은 역사의 현실을 위해 소용된다. 인간은 상처받은 제물 역시 신의 현현임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신의 순수성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신의 고뇌를 이해한다면, 인간은 상처받은 제물을 위한 변명의 자리도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역사에서 상처받은 자들을 위한 역사의 작은 위로라고 생각한다. 


– 김영수 “건국의 정치” 마지막 문장.






가끔 남들에게 막 강요하고 싶은 책이 있다. 
이번에 읽은 김영수 쓰고, 이학사에서 펴낸 건국의 정치:여말선초, 혁명과 문명 전환이 그러한 책이다. 


조선의 건국 이전 고려말기의 상황을 일일이 꼬집어 보되 
정치학 전공자 답게 정치학적 관점에서 풀이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엄청나게 많은 문장들이 적용된다. 


문학적인 미려한 문장과 깊이 있는 통찰의 철학이 매력적이다. 
약 800여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흥미있는 사람이라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2011.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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