꼿꼿하게 견디는 삶

구구절절 갈등이 있었다.

어쨌거나 수개월이 지났고, 내가 맡은 일을 마무리했다.

장애인복지관에서 생애사쓰기를 한 게 2013년. 그 원고를 억지로 책으로 내놔보자고 덤빈 게 그 해 가을. 오직 그 책을 위해 출판등록을 했고 그 책을 위해 인디자인을 배웠다.

변화된 장애아엄마들과, 한껏 뿌듯해진 중도장애인과 다섯 군데 사회복지학과를 돌며 북콘서트를 연 게 2014년. 그리고 올 해는 장애아이들과 그 엄마들이 함께 바이올린을 배우는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사진은 계약에 없었지만 내가 찍고 싶어 찍었다.

 

토요일마다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수업을 했다.

자폐 아이가 다수였고 소아마비인지 다리가 불편한 아이가 하나, 다운증후군 아이가 하나.

장애인을 기억할 때, 이름이 아닌, 질병의 이름과 증상으로 지칭한다. 그들을 기억하는 방법이 이렇게도 저열하다. 부끄럽기 짝이없다.

그래 다시 그 이름을 불러보자. 형주와 민지와 준영이는 자폐아다. 하영이는 다리가 불편하고, 주희는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다.

엄마들이 바이올린을 잡으면 아이들은 각자의 세계로 돌입했다.

키 크고 잘생긴 형주는 책상에 앉아 계속해서 낙서를 했다. 큼직한 글씨로 마구 마구 뭔가를 썼다. 그러다 일어나 저보다 한참 작은 엄마를 내려다 보며 물었다. “엄마 뭐해?”, “엄마 왜 그래애?”

민지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기분이 동하면 계속 교실을 뛰어다녔다. 앉은 자리에서 비타오백을 다섯 개씩 까먹었다. 가끔 손톱을 물어뜯다가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교실바닥에 진동이 울렸다. 간혹 바이올린을 잡고 마구 소리를 내다가 제 엄마의 양볼을 잡고 뽀뽀를 해댔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엄마, 민지가 눈을 맞추는 엄마에게 뽀뽀로 말을 했다.

준영이는 구석에 앉아 의자를 돌리고 놀다가 가끔 엄마를 바라봤다. 나와도 눈을 맞췄다. 내 가슴속으로 파고들기도 했다. 손으로 반짝빤짝 시늉을 내며 교실을 계속 돌았다. 바이올린 선생님과 눈도 맞추고 소리를 내기도 했다.

주희는 혼자 칠판에 뭔가를 쓴다. 1인극을 하듯이 계속 이야기를 한다. 재미난 동화를 듣는 기분이다. 소리를 크게 내고 의성어와 의태어도 잘 쓴다. 마구 이야기를 하다가 칠판에 아는 글자를 한참 적고 혼자 웃는다. 가끔 엄마와 대화도 하고 사람들과 한 두 마디 주고 받는다.

하영이는 입을 꼭 다문 엄마 옆에서 열심히 연습을 한다. 엄마와 똑같이 입을 꾹 다물고. 다리가 불편하다고 앉은 적 없다. 가끔 연습을 쉴 때만 앉았다. 늘 부끄럽고 쑥스러워했다.

 

시린 봄에 수업을 시작했다.

갑자기 온도가 떨어진 11월에 발표회를 열었다.

엄마들은 드레스를 빌려 입었다. 주저하는 엄마들을 선생님이 밀어부쳤다.

한 것도 없고 잘 하지도 못하는데 옷만 꾸민다고 욕 먹을 거라는 엄마들에게 바이올린 선생님이 충분히 입을 자격이 되는 사람들이니 꼭 입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운 옷을 입은 엄마들이 아이들과 무대에 섰다.

눈물이 나서 뷰파인더가 보이지 않았다.

 

영상을 찍으며 뒤에 서서 혼자 스카프로 눈물을 마구 닦았다.

그러니까, 그런 것이다.

어느 한 순간, 남들 앞에서 말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아이가 당신과 많이 다르다고, 나의 아이는 당신이 왜 화를 내는지도 알 수가 없고, 당신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무조건 죄송하고 미안하다고, 폐를 끼쳤다고 그렇게 늘 말해야 하는 것이다.

남들에게 내 아이가 얼마나 다른지 설명해야 하고 내 아이가 얼마나 부족한지 내 아이가 얼마나 느린지 말해야 하는 것이다. 한순간이라도 다른 아이와 같아지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내 아이가 눈을 마주치고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주는 단 하루만 있으면 내일 죽어도 좋겠다고 그 엄마가 말했다. 평생 아이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지옥을 누가 알겠냐고 말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아이가 다르다고, 내 아이는 특별한 점이 있다고 늘 말해야 하는 삶인 것이다. 이유가 있어야 삶인가. 이유가 없으면 삶이 아닌가.

고난이 겪는 성숙이 있다고, 좀 덜 성숙한 채 막살면 어떤가, 그러면 인간이 아닌가.

대충 살 수 없는 시간을 꼿꼿하게 견뎌야 산다.

 

커튼 뒤에서 미리 나와 빼꼼 쳐다보는 주희와, 무대에 엄마에게 뭔가를 물어보기 위해 마구 걸어 나오는 형주와 무대에 오르지 않은 준영이와 민지가, 같이 있었다. 기억속에도, 마음속에도.

찬란한 소리가 있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2015. 11. 26. DSC_8555

자전거 타는 아이

며칠 전에 본 풍경이다.
집 앞에 나서면 좁은 4차선 도로가 있고 500미터쯤 나가야 16차선쯤 되는 대로가 나온다.
내가 어딜 가든 항상 대로앞에서 우회전이나 좌회전을 하게 마련이고 대로 바로 앞에 횡단보도가 있다. 신호등이 잘 안 보일 때가 있고 여기까지는 동네골목이나 마찬가지라 늘 천천히 움직인다.
가끔 버스가 뒤에서 엄청 빵빵거리지만.

저녁이었다. 7시쯤 되었다. 사방이 완전히 어두웠고 저녁의 동네마트는 북적거렸다. 나는 그 날 우회전을 하려고 뼈다귀해장국집 앞 횡단보도 앞에서 일단 멈췄다. 보행신호가 시작되었고 마트에서 장을 본 사람들이 길을 건넜다.

그 중에 자전거를 탄 꼬마아이가 있었는데 엄마 아빠와 함께 마트에 다녀오는 듯 했다. 아빠의 손엔 마트 비닐봉투가 들려져 있었다. 횡단보도에 못 미쳐 아이가 자전거 안장에서 미끄러졌다. 요즘 나오는 어린이 자전거엔 짐칸이 없다. 아이의 궁둥이가 주루룩 빠지면서 바퀴 바로 위의 플라스틱 받침대에 엉거주춤하게 걸쳐졌고 아이는 중심을 잃었는데 신호등이 짧다보니 애 아빠가 애 손과 자전거를 같이 잡고 질질 끌기 시작했다. 애 엄마로 보이는 사람은 일찌감치 건너 호주머니에 손 넣고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둘을 보고 있었다.
애아빠는 왼손엔 마트봉투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중심 잃은 자전거와 아이를 한꺼번에 질질질 끌고 있자니 아이가 드디어 꼬라지가 났다.

으앙! 하고 한 쪽 다리가 하늘로 한 번 올라갔다가 바닥에 완전히 자빠지려던 아이는 벌떡 일어나서 거세게 울며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횡단보도 바로 앞이었고 신호는 이미 끝났다.

애 엄마는 호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고 뭐라 뭐라 말을 했고 아빠는 한 숨을 쉬는 사이 아이가 도로로 돌진했다. 나는 우회전을 할 수 있도록 신호가 바뀌었지만 불안해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애 아빠가 아이를 거세게 잡아당겼다. 나는 아이를 덥썩 들어올려주길 바랐으나 아무도 그러지 않았고 아이는 두 번째 내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창문을 내리고 “애를 좀 안아요!” 라고 하고 싶어서 창문을 살짝 내렸는데 애 아빠가 아이를 인도 안 쪽으로 깊숙히 밀어넣고 한 손으로 마트봉투와 자전거를 붙잡고 있었다.
아이는 분이 풀리지 않아 계속해서 울었고 애엄마는 아이 등짝을 두 번 후려갈기고는 다시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이아빠는 보따리와 자전거를 끌고, 아이는 엉엉 울며 제 부모를 따라갔다.

저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횡단보도를 멋지게 건너는 미션을 수행하지 못해 엄청나게 화가 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아 매일 매일이 도전이고 그래서 힘겨워한다. 아이에 따라 다르지만, 도전을 즐기는 정도도, 실패했을 때 악다구니를 쓰는 정도도 모두 다르다.

그 부모가 아이의 마음을 한 번이라도 헤아려 주면 좋았으리라 생각했다.

그러자마자 나는 얼마나 그러고 있는지 점검해보았으나 역시 잘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늘도 나는 아이의 투정과 계속대는 깐족댐에 화를 냈다. 왜 그러는 지는 화를 내고 난 다음에 알게 된다. 사과를 하지 못하고 아이를 재웠다. 자기 전에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아홉살을 복잡한 감정을 느낄 수 있으나 처리할 수 없는 나이이다. 그건 어른이고 애고 미성숙한 인간에겐 언제나 난제다.

오늘은 많이 미안했다.
어떤 한 가지 사건이, 아이에게 전달하는 메세지가 수십가지여서 그게 어렵고 버겨울 때 아이들은 짜증을 내고 깐족대고 장난을 치고 약을 올리고 말을 안 듣고 주제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꺼낸다.

아이가 곤히 자고 나니, 자전거를 못 타서 분통이 터지던 그 아이가 생각난다.

2014. 11. 17.

머리 못 감는 아이

신생아 목욕시키는 건 꽤나 귀찮은 일이다. 
페친의 포스팅을 읽다가 나도 그게 참 두렵고 어려웠던 기억이 났다. 
게다가 내 아이는 봄에 태어나 배밀이를 하기 전까지 뜨거운 여름을 보냈기 때문에 늘 땀이 흥건하여 매일 씻겨야 했다. 백일까지는 아이 아빠가 많이 씻겨주었는데 아홉살이 된 올 해 여름 끝물에 드디어 혼자 머리를 감게 되었다. 한 번 해보라고 시켰더니 곧잘 해내어 많이 칭찬해주었다. 오늘도 아이는 내가 설거지를 하는 사이에 혼자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다. 젖은 머리로 잠들었는데 아무래도 감기가 걸릴 것 같아 자는 아이의 머리맡에 앉아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려주었다. 

생각해보면. 

딸아이는 어릴 때 제 할머니가 키웠는데, 나를 처음 만난 초등학교 4학년때까지도 혼자 머리를 못 감았다. 머리는 긴데 혼자 감을 수 없다 하니 가끔 우리 집에서 자고 가면 머리를 감겨달라 했다. 머리도 혼자 묶을 줄 몰라 머리도 묶어줘야 했다. 

‘뭐 이런 애가 다 있지?’ 
그 때는 그런 속내를 들켜선 안되는 시기였기에 입밖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열 한 살이나 되어 혼자 감지도 못하고 묶지도 못하는 긴 머리를 하고 다니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건 내가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희한한 케이스라고 생각했던 거다. 

어릴 때부터 무수하게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여고를 나오기도 했지만 친구들과 어릴 때 몇 살까지 엄마가 머리를 감겨줬는지 말해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데 내가 내 이야기를 먼저 해버리는 바람에 아이들이 입을 닫았을 지도 모른다. 나도 선명하지 않은 기억은 조각조각 여기 저기 처박혀 있다가 가끔 이런 자라닮은 솥뚜껑들을 보고 문득문득 떠올라 조합이 된다. 사람마다 우울해지기 쉬운 케이스가 있다고 하는데, 그건 아마 이렇게 많은 기억들을 쪼개놓고 살다가 한 번에 조합을 하면서 오늘만 사는 게 아니라 과거도 같이 살아가는 뇌구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맘에 들거나 안 들거나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닌 유전자적 구조이거나, 성장과정의 수많은 이야기들 때문이거나. 그건 내가 부모를 택할 수 없었던 것과 같다. 

동생이 아직 태어나기 전이니 나는 네 살이었거나 동생이 태어난 해라면 다섯 살이었을 거다.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일을 하다가 일찍 들어온 엄마가 나보고 혼자 샤워를 하라고 했다. 그 때 우리 집은 큰 방이 두 칸, 작은 방이 한 칸에 안에 욕조도 있는 목욕탕까지 딸린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나중에 가보니 연립주택과 유사했지만 그 때는 그런 구조를 모두 아파트라고 불렀다. 나는 목욕탕에 들어가 혼자 할 수 없다고 징징거렸다. 무슨 연유인지 욕조엔 물이 한 가득이었는데 아마 당시엔 단수가 되는 일도 종종 있었거나 물을 받아놓고  쓰는 문화가 습관이 되어 있어서 욕조에 물이 가득 담겨 있었을 것이다. 바가지로 물을 퍼서 씻어야 하는데 머리를 감을 수 없다고 징징대기 시작하자 동생을 임신해 배가 어지간히 나왔던 엄마가 벌컥 컴컴한 목욕탕에 들어와서 왜 혼자 머리를 못 감냐고 소리를 지르더니 내 머리채를 잡고 욕조안에 깊이 처박았다. 그리고 이제 감으라고 했다. 

욕조 옆에는 2조식의 무지개 세탁기도 있었는데 나는 그 세탁기통에도 한 번 들어간 적이 있다. 엄마가 벌컥 들어서 집어넣고 죽여버린다고 했던 건데 그게 같은 날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칠곡계모사건이 터졌을 때 아이를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는 기사를 보고 아 그래도 우리 모친은 버튼을 누르진 않았어. 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상한 것은 나는 그런 기억이 매우 선명한데도 불구하고 물에 대한 공포도 없고, 욕조에 대한 공포도 없고, 세탁기나 폐쇄된 공간에 대한 공포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충분히 있을 만한데 없다는 게 더 이상하다. 건강하다는 얘기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몇 번 안되기 때문이다.  

엄마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외롭게 자랐고 외롭게 살았다. 청춘도 외로웠고 결혼을 해서도 외로웠다. 아버지와 엄마는 서로 그 문제를 같이 해결하지 못했고 같이 살면서도, 헤어져서도 엄마는 외로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애초에 그닥 외로운 사람도 아니고 그다지 부정적이거나 우울한 사람도 아닌 듯 하여 엄마와 헤어지고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지만 엄마의 문제는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채 칠십을 바라보고 있다. 

아버지가 헤어지고 난 뒤 혼자서 쭉 산 것도 아니었지만 혼자서 딸 둘을 키우는 그 짧은 기간마다 모든 화를 나에게 풀었다. 엄마의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돈벌이도 못하고 현실에 보탬도 안되는 쓸모없는 년들”이라는 개념이었다. 나는 그 개념을 당시에 알 지 못해 싸우지 못했고 그저 지속되는 매타작에 반복하여 저항할 뿐이었다. 매번 한 번도 지지 않고 바득바득 소리 지르고 반항하는 큰 딸년인 내 덕분에 진이 다 빠진 모친은 내 동생은 돌아보지도 못했다. 스물 한 살이 되어 독립해서 나올 때까지 지속되던 폭력도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지 못했다는 게 신기하다. 어쩌면 그게 내가 여태 이렇게 잘 살고 있는 생명력이라는 생각이 오늘에서야 든다. 엄마가 뭔가 무기가 될 만한 것을 들면 나는 도망을 치거나 손으로 막거나 일일이 따져 대들거나 골목을 튀어나가거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저항했다. 주눅이 들면 사람이 이상해진다는 얘기를 듣고 공황발작이 일어난 것처럼 쇼도 해봤는데 돌아오는 건 두 배의 저주와 두 배의 폭력이었을 뿐. 게다가 우리 모친은 여고 때 육상선수 출신이라 내가 온 동네를 뛰어다녀도 금방 잡혀오기 일쑤였다. (이 부분에선 좀 웃어야) 

마흔을 넘겨, 혼자서 80년대에 딸 둘을 키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 좀 알 것 같은 이제, 엄마의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결국 본인이 도전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단 한 번도 진실한 모습을 들여다보거나 마음의 거울을 보거나 단 한 명의 타인 앞에서도 그 속내를 꺼내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으려고 한다. 

나의 생명력이 끝없는 엄마의 매타작에 대한 저항에서 기원했다면, 엄마의 생명력은 끊임없는 원망과 저주에 기원한다. 그래서 당신은 주변에 은은하게 피해를 주면서도 매우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불사조처럼 백살은 너끈히 넘기고 살 것같은 나의 모친이 언제쯤 기운이 빠질 지, 언제쯤 생명을 다 할 지 알 수 없다. 과연 엄마의 장례식에 누가 올까 궁금하다. 아직도 엄마는 욕망이 끓어 넘쳐 “돈벌이도 못하고 자기 삶에 보탬이 안되는 훼방꾼 
같은 년들”의 기본개념은 곤고하다. 그 생각은 내가 스스로 물려받아 가끔 나를 자학할 때 사용하는 도구가 되곤 한다. 
부모가 아이를 바라보는 생각은 고스란히 눈동자를 통해 전달된다. 엄마와 손잡고 걸어본 적 없어도 나는 엄마가 어떤 생각으로 나를 바라봤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타인앞에 내 딸일 때는 지상최고의 여성이 되지만, 단 둘이 있을 때는 당신 인생을 망친 주범이 된다. 엄마가 나에게 들었던 각종 매와 연탄집게와 빗자루, 등산용 지팡이 따위는 오늘도 가끔 나를 내려친다. 여전히 나는 저항하고 있다. 

그게 아니지 않냐고. 엄마 생각은 분명히 틀린거라고. 아닌 건 아닌거라고. 돈이 없으면 안 먹으면 되지 왜 선생 김밥을 엄마가 싸야 되냐고. 생일파티 안해도 된다고. 나는 죽어도 외상으로 두부를 사올 수 없다고. 여전히, 오늘도, 내일도, 아마 그 다음날도, 엄마는 아직도 손에 매를 들고 있고 나는 여전히 그 매를 어떻게 하면 낚아 채서 던져버릴까 고민하고 있을 뿐이다. 

2014. 9. 18.  

절반의 부모 절반의 아이

부모님의 생애사를 쓰겠다는 사람들이 모여 강좌신청을 했다. 8주간의 강좌는 생애사쓰기에 대해 소논문을 작성하신 수리장애인복지관 이형진관장님이 특강으로 마무리했다. 엄마를 이야기하며 눈물짓는 선한 사람과, 아버지의 처절했던 삶의 투쟁에 대해 울먹이는 사람이 있다. 나에겐 둘 다 생경스러운 풍경이다. 몇 년전이었다면 배알이 뒤틀리거나 기분이 착찹했을 것이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은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태초부터 없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몇 개월전 중요한 저녁 약속이 있던 날이었다. 남편은 그 날 급하게 직원회식을 해야 했고 빠져 나올 수 없었다. 작은 아이를 데려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큰 아이도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수원에서 돌아오는 고속도로에 해가 지고 있었다. 비참했다. 가슴에 불이 오르는데 태풍같은 파도가 넘실거렸다. 한 방에 쓸려나갈 듯, 운전대를 쥐고 있는 날이면 어디든 들이받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 저녁 노을은 더욱 나를 괴롭혔다. 고등학교 1학년, 자퇴서를 쓰고 돌아오던 날 마을버스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더없이 평화롭고 화창했다. 내 세상은 무너지는데 누군가는 빨래를 널고 아이를 낳고 학교에 가고 돈을 벌고 밥을 먹었다. 그 날 나는 세상과 완전히 격리되어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를 봐 줄 사람이 없어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태초부터 그 딴 것은 없었다고 말할 것이었으면 바라지도 말아야 옳지 않은가. 세상이 그러하고 삶이 그러하듯 내 마음도 부조리했다.

더 유치할 때는 차라리 고아인 채로 보육원에서 자랐으면 괜찮았을 거라고 생각한 적 있다. 더 많은 동정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동정은 때로 돈도 되고 후원도 되고 사람이 되어 나를 밀어줬을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 아버지를 다시 만나고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큰아버지의 손을 잡을 때 세상의 모든 고아들에게 죄스러웠다.

 

부모가 부모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부모가 아니다 라는 명제를 머릿속에 깊이 박았다. 시간이 더 지난 다음에서야 세상의 모든 부모가 “부모다워야 하는가”에 대해 다시 질문했다. 그저 나는 그런 삶을 받았을 뿐이다. 엄마가 만든 성에 갇혀 아무 것도 저항하지 않으며 산다해도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 성문을 깨부수고 나온 것은 나였다. 성문을 모두 망가뜨려놓고 왜 저 성이 저 따위로 생겨먹었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화염병을 던지는 꼴이었다. 아버지는 성밖 숲으로 도망쳤다. 화가 나서 도망쳤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꼴뵈기 싫어 그림자가 없는 어둠으로 숨었다. 나중엔 해가 중천에 떠서 그림자를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짧아지는 매일 매일 화창한 곳으로 옮겨갔다. 나는 계속 그림자를 보고 살았다. 성 안에서 쪼그려앉아 그림만 그리고 있는 동생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살았다.

성에서 나왔으니 됐어.

거울 앞에 앉아 스스로에게 그 말을 해주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부모님의 생애사를 쓰겠다는 사람들과 앉아 밀면을 먹었다. 부산과 대구의 음식이야기를 하다가 이북음식 이야기로 옮겨갔다. 엄마가 담궜던 동태가 들은 김장김치와 손바닥만한 왕만두에 대해 이야기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인지 굳이 알고 싶지 않다. 엄마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 것은 하루 종일 마음에 남는다.

 

오후엔 어린아이를 같이 돌보고 키워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 역시 엄마이고 그 아이들이 더 어렸을 때가 있었다. 아이교육에 대해 열을 내지 않는다. 세상은 여전히 부조리하고 적당히 적응하고 타협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길 바랐다. 어미가 일일이 개입해서 해결될 일은 아무 것도 없으며 내가 원하는 교육과 아이가 원하는 교육이 동일할거라고 자만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보기보다 훨씬 강인하고 어른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유연하다. 아이들이 겪는 모든 고통을 어른들에게 던져준다면 그 어떤 어른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가진 생명력을 모조리 살아가는데 집중하여 쓴다. 타인의 삶에 개입하지 않고 그림자를 만들지 않고 지나치게 계산하거나 예측하지 않아 어른들보다 훨씬 더 큰 힘을 지닌다.

남들의 교육관을 듣는 동안 내 아이는 집에서 좋게 말해 자유롭게 나쁘게 말해 방치된 채 동네 형들과 게임을 하고 시간을 보냈다. 배가 고프다고 칭얼댄 것은 몇 시간전부터이다. 전화가 연속해서 오지 않는 것은 뭔가 재미난 것을 찾았다는 뜻이며, 전화를 계속 걸어대는 것은 아무 자극이 없는 정적을 참을 수 없다는 말이다.

 

아이는 스스로 저녁까지 해결했고 나가서 뛰어놀았다. 아이와 함께 아파트 지하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 바람은 선선하여 기분이 좋았고 우리 앞 동에서는 누군가 첼로 연습을 하고 있다. 첼로 소리를 들은 지 보름이 넘었는데 매일 비슷한 시간에 첼로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마음이 넉넉해지는 순간에 세월호 생존자 아이들이 도보행진을 하며 안양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이들을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었으나 내 눈앞에 알짱대는 내 아이를 더 먼저 돌봐야 했다. 죽은 아이들의 부모들은 광화문과 여의도에서 단식투쟁을 하고 있고 살아남은 아이들은 죽은 친구의 부모들을 만나러 도시를 가로질러 행군을 한다.

 

저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가 하룻 밤 땀에 삭아질 수 있을까. 평생을 지배할 아이들의 트라우마가 무엇인지 엿볼 수 있어서 두려움이 가득하다. 아이들의 손을 잡아줄 수 있을까, 만난다 한 들 내가 안아 줄 수나 있을까. 내가 가진 용기는 먼발치에서 보고 눈물 흘리다 돌아오는 게 전부일거다. 아이들이 걷는 모습을 인터넷 생중계로 본다.

어쩌다 세상은 이렇게 부모와 아이들로만 이루어졌나.

아이를 지키지 못한 것을 죄스러워 하는 부모들과 어쩔 수 없었다고 깔깔대며 웃는 엄마의 모습이 겹쳐져도 이제는 화가 나지 않는다. 사람은 모두 다르고, 매우 특별한 사람이 나를 낳은 것 뿐이다. 역사는 지워지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2014. 7. 16.

오늘의 숙제

1.

 

오래 묵은 친구를 만나기로 한 날이다. 멀리 여름나라에 살다 와서 아이 겨울 옷을 물려주려고 같이 옷을 정리하고 개고 싸고 하던 중에 작은 놈 같은 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숙제 프린트 했냐고 묻는다.

무슨 숙제?

그거 숙제 있잖아. 사진 붙여 가는거.

어.. 나는 모르는 일인데.

우리 아들이 알림장도 잘 안 가지고 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숙제를 해 가는지 안 해가는 지 잘 모르지만 가끔 점검은 한다. 숙제 점검을 하더라도 대부분 해 지고 난 다음이고 전화가 걸려온 시간은 오후 2시쯤.

아이는 집에 오자마자 가방과 실내화 주머니를 멀찌감치 팽개쳐두고 티비 리모콘부터 잡는다. 일단 런닝맨이나 정글의 법칙을 한 편 보고 방과후 일과를 시작하는 습관이 들었다. 두 편 세 편 넘어가고 유난히 시끄럽게 들리는 날엔 그만 보라고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래 너도 학교 댕겨왔으면 쉬어야지. 하고 냅두는 편인데 사실은 잔소리 하기 귀찮고 애하고 씨름하기도 귀찮아서 그렇다.

 

2.

 

친구 엄마의 얘기는 오늘 숙제로 가고 싶은 국내 여행지를 골라 사진을 프린트해서 선없는 종합장에 붙이고 그걸 발표하는 게 있다는데 집 프린터가 안되더란다. 몇 명이랑 통화를 한 끝에 다들 안된다 혹은 잉크가 떨어졌다 하길래 우리 집은 프린터가 웬지 잘 돌아갈 거 같아 도움을 구하려고 전화를 했단다. 안그래도 며칠전에 잉크패드도 갈고 프린터 점검을 마친 상태. 그러면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주면 내가 프린트를 해주겠다고 선뜻 대답했다. 세 명분을 부탁했는데 독도, 제주도, 불국사, 석굴암, 우도의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을 프린트만 해 주면 되는 일어었다. 친구 엄마는 집에만 있다 보니 컴맹 된 거 같다며 제대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다시 전화를 했길래 메일함을 열어보니 네이버 백과사전 링크가 걸려 있다. 사진은 따로 저장이 안되서 일일이 캡쳐를 떴는데 PNG로 저장했다가 프린터에 안 잡혀 다시 JPG로 다 돌렸다. 여섯장 정도 된다. 캡쳐 떠서 크기 조절해 프린트를 하고 있는데 내가 이게 남의 숙제를 해 주고 있는 꼴인가 싶었다.

뭔가 아닌 거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3.

 

내가 아이패드로 즐겨 하는 게임은 SIMS Play 라는 건데, 집 짓고 사람 캐릭터 만들고 마을을 꾸려가는 게임이다. 여러명이 공동으로 사는 집을 짓기도 하고 혼자 사는 집을 만들기도 한다. 공동주택, 즉 Share house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지 책도 한 권 나온 걸 봤다.

뭔가 아닌 거 같은데, 남의 숙제를 해주고 있는 거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드는 찰라.

그래 집집마다 프린터를 다 한 대씩 두고 있을 필요가 있나. 이런 게 나누는 거 아닐까. 어찌 보면 대행해 주는 거 같아 보이는 일과 누군가 물질적/비물질적 재산을 가지고 공유하는 것은 어디부터 어디까지 다른가 궁금해졌다.

 

오래전엔, 누군가 손으로 하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남의 옷을 지어주기도 했을 것이고 큰 일은 돈을 받았겠지만 친분이 있다면 단추 하나 달아주는 일 정도는 거저 해주기도 했을 것이다. 나에게 프린터가 있고 내가 화면캡쳐를 할 줄 알고 파일명을 변경할 줄 알고 사진크기를 변경할 줄 안다면 (업계에 계시는 분들은 모르겠지만 이런 작업도 꽤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그런 재주와 물적 자산을 공유한다는 것도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대신, 상부상조, 할 필요는 있을 거다.

 

4.

 

아들의 작아진 옷가지는 새로운 주인을 찾아 생명을 연장할 것이다. 보따리가 많아 친구를 집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에 프린트한 사진을 전해줄 엄마들을 만났다.

나까지 아이 엄마 넷. 학교 정문 앞에서 만나 얘기를 하는데 아이들의 숙제 이야기를 한다. 시 외우기, 쓰기 숙제, 수학숙제 얘기를 하다가 종합장은 원래 유선, 무선 두 가지를 챙기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다. 나는 할 말이 없는 거다.

멀뚱하니 있다가

“나는 몰라. 홈페이지 보면 숙제가 뭔지 있지만, 뭐 알림장도 안 가져오는 놈 챙겨주면 뭐해. 지 말로는 쉬는 시간이나 아침에 가서 한다고 하던데. 확인은 안되고.” 라고 했더니 옆에 엄마가 우리 아들은 알아서 하는 스타일이니 뭔 걱정이냐며 좋겠다고 한 소리를 늘어놓는다.

“아 글쎄 그 자식이 알아서 하는지 뻥을 치는지는 모르는 일이지.” 라고 했지만 아마 알아서 잘 할 거란다. 선생님이 숙제 검사를 하긴 하냐고 물으니 검사는 다 하시고 스티커 받아오는 거 보면 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노무 스티커판이 알림장에 있는데 이 놈은 알림장을 안 가져온다니까. 그리고 이제 관심없대. ”

“예환이는 알아서 할 거야. 아침에 가서 한다는 생각을 하는 거 자체가 다른 거야.” 란다.

 

태권도 마칠 시간이랑 교묘하게 맞아 떨어져 먼저 가겠다 하고 도장 앞에서 아이들을 봉고차에 태우고 있는 사범에게 우리 아이가 나왔나 물었다. 2층에 있는 도장까지 젊은 사범이 올라갔다 오더니 어머님 오신다고 얘기 없었으면 아마 혼자 갔을거라고 한다. 나도 그럴 줄 알았다. 차 타고 다니면 빙 돌아서 오래 걸린다며 혼자 뛰거나 퀵보드를 타고 다닌 지 1년이 되어간다. 집에 왔더니 아들놈이 도복도 안 갈아입고 게임하고 있다.

 

“야. 니네 뭐 시 외우기 숙제 있다매?” 나는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어. 다 했어. 도토리. 근데 싸인받아야 되는데.”

“오올..다 했어?”

“어. 진작에 다 했지. 근데 싸인 안 받았어.”

“엄마가 알림장에 싸인해주는거?”

“응.”

“얌마 니가 알림장을 가져와야 싸인을 해주든가 말든가.”

“니네 뭐 쓰기 숙제도 있다매.”

이 자식이 말이 없다.

“너 안하고 엄마한테 얘기 안할라 그랬지!!” 했더니 아들놈이 씩 웃는다.

“너 숙제 안하면 선생님한테 안 혼나?”

“안 혼나. 스티커 뺏기면 돼.”

“그럼 스티커 많이 뺏겨라.”

“눼~~”

 

5.

 

잔소리 하기 귀찮고 싸우기도 귀찮다. 방치하는 걸지도 모르겠고 내 머릿속엔 아이 숙제보다 다른 것들이 더 많을 뿐이다. 내가 야단치지 않으면 밖에 나가서 흠씬 깨지고 올 것이고, 선생님한테 야단맞고 친구들한테 놀림받기도 할거다. 경험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다쳐보고 넘어져보고 틀려보고 울어보지 않으면 절대 절실하게 느낄 수 없다고 믿는다. 얼마 전 큰 애가 동생의 친구관계 문제를 얘기하며 동네 형들이 제 동생을 이용해 먹는 거 같지 않냐는 말을 했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만 놀게 해야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나는, 그래서 너는 내가 그만 놀으라 하니까 네 하고 그만 논 적 있드냐? 라고 되물었다.

지가 깨져보고 지가 당해보지 않으면 와닿지 않는 건데 그걸 뭘 지가 좀 당해봐야 아는 거 아냐? 라고 다시 물으니 큰 애는 에휴. 하며 돌아앉았다. 뭔 한숨인지 모르겠다. 복합적인 거겠지. 그렇다고 해서 큰 애가 그 때 나 좀 말려주지, 또는 말리지 말지라는 원망은 아직 한 적 없다.

6.

 

아이는 동네 형들이 놀러와 딱지치기를 하며 놀고 있고 아직 숙제 할 생각도 없는 모양이다. 배는 부른 모양이고 나는 앉아서 이런 글이나 쓰고 있다. 내가 어떤 원칙을 갖고 있는 것도 없고 그저 아이들은 모두 각자 역량과 기질이 다르다고 믿을 뿐이다. 집에서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밖에서 배우는 게 많고, 집에서 굳이 꾸짖지 않아도 밖에서 욕 먹는 일도 많고, 싸돌아다니고 아이들과 패를 지어 불량하게 껄렁거리며 돌아다니더라도 길바닥에서 쓴 맛 보는 일이 더 많다는 것도 안다.

내가 아는 것은 고등학교 때까지 성적이 좋다고 꼭 좋은 대학에 가는 것도 아니며 좋은 대학을 나온다고 좋은 직장을 잡는 것도 아니며, 좋은 직장을 다닌다고 그게 철밥통인 것도 아니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조건을 갖고 있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라는 거다.

공부는 내내 뒷전이다 이제와서 원서쓰기에 혈안이 된 큰 아이에게도 이번에 못 가도 그만, 대학 안나와도 그만, 니가 필요하면 서른에 가도 되고 마흔에 가도 되는 게 대학, 어딜 가나 너만 잘하면 그만, 그렇지만 네가 분위기에 잘 휩쓸리는 기질이 있다는 건 인정. 이 정도로 얘기하며 타협중이다.

그저 내가 확실하게 아는 건, 아침에 학교 가기 전에 이는 닦아야 남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고 집에 와서는 무조건 손을 씻어야 감기에 덜 걸린다는 확실한 사실 두 가지다.

부담되는 교육비를 투자하는 대신 내 앞가림이나 잘 해 부양의 부담을 주지 않는 부모로 늙는 게 더 현명하다고 믿는다. 내가 내 앞가림 잘 하고 지내면 아이들도 그럭저럭 보고 배울 거라고도 믿는다. 이건 그저 믿음이다. 제도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도 대안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저 그럭저럭 무리하지 않게 살아가는 것, 그래서 부담되지 않는 부모가 되는 게 목표일 뿐이다.

 

7.

긴 이야기를 적은 것은 매일 매일 부모교육, 부모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가득한 기사와 글이 SNS에 차고 넘쳐서이다. 나 역시 외면하기 어렵고 우리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공동체의 구성과, 나눔과 공유, 누군가의 몰빵 또는 독박쓰기, 혹은 대리자와 대표자의 역할, 상부상조와 품앗이, 그런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 굳이 첨언하자면,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온 지 2시간을 넘기기 전에 꼭 집에 도착하려고 한다. 혹은 대리인이라도 있도록 스케줄을 조정한다. 이유는 숙제 때문이 아니고, 배가 고프다며 울면서 전화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오후 2시쯤이 되면 어디에 있던 열심히 달려 집에 도착한다. 아직은 이 아이에게 엄마가 가장 필요할 때는 배가 고플 때이기 때문이다. 

 

 2013. 11. 13. 

 

엄마 나는 왜 살아?

아빠 누나와 바다에 갔다와서 아주 늦은 저녁을 먹던 아들이 묻는다. 
“엄마. 나 요즘 꿈을 꾸는 게 있어.”
“뭔데?”
“아니. 궁금한 게 있어. 알고 싶은 거. 고민이야.”
“뭔데 말해봐” (갈치 바르는 중) 
“엄마. 사람은 왜 태어나고 왜 죽고 왜 살아?” 
(젓가락 정지 동작멈춤)
“그러니까 나는 왜 태어나고 나는 왜 살아?”
“•_•;;;;;;;;;”
“나 요즘 꿈이야. 궁금해서 꿈꾼다는 말이야.” 

“예환이한테는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지?”
(일어나서 몸을 반으로 나누는 시늉을 하며 여기 엄마 여기 아빠? 하고 묻는다) 
“엄마한테도 엄마의 엄마랑 엄마의 아빠가 있고, 아빠한테도 아빠의 엄마와 아빠의 아빠가 있어. 그리고 할아버지 한테도 할아버지의 아빠와 할아버지의 엄마가 있는 것처럼 다 그런 거거든?”
“그래서??”
“사람은 영원히 살고 싶을 때 애기를 낳아. 엄마 아빠가 죽고 없어도 예환이 안에 엄마 아빠가 있으니까 살아있는 거야.”

– 여기서 감동적인 피드백이 온다면 그것은 여덟살이 아니다. 제 아빠가 티비채널을 돌려 정글의 법칙이 왕왕대는 순간 아이는 제 질문을 잊었다. 

이 어미가 그게 궁금해서 지금 근 20년동안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었건만.. 날로 먹는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봉가 ㅋ 그러니 부모가 공들인 것은 자식은 조금 쉽게 가지진 못해도 접근할 수 있다는 게 이런건가.

 

2013. 8. 19. 

삼겹살 연상

엊저녁에 느닷없이 백만년만에 집에서 저녁을 드시겠다는 바쁜 따님께서 삼겹살을 먹고 싶다 하더니 애들 아범까지 가세해서 8시가 넘은 시간에 삼겹살 한 근에 갈매기살까지 굽기 시작했다. 귀찮아서 불판을 안 꺼내고 후라이팬에 구운게 화근이었다. 부엌 가스렌지 싱크대를 넘어서 기름이 방울방울 온 집안에 튀기 시작했다. 대체 튀겨지는 돼지의 기름은 어디까지 전달될 수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아침에 일어나니 온 바닥이 미끈거린다.
구워먹는 고기 중에 제일 탐탁치 않아 하는게 삼겹살인데 단 한 번도 내색한 적 없다. 상추와 깻잎을 씻고 기름장과 쌈장을 만드는 것도 지 새끼 차려 먹이는데 공 들이는 애들 아범이 알아서 했지만 연기와 냄새 때문에 에어컨도 못 틀고 서서 고기 굽는 나만 짜증이 잔뜩이었다. 삼겹살의 절차는 먹는 것은 일부분이고 준비하고 마무리하고 청소하는 절차까지 복잡하고 번거롭기 그지없어서 식당에서 돈 주고 사먹는 것이 얼마나 싼 지 다시 깨닫게 하는 것이다.

언제고 기회가 오면 나는 애시당초 삼겹살을 좋아하지도 않고 집에서 구워먹는 건 정말 끔찍하다 라고 말하게 될 날이 올 지도 모르겠다만, 떠오르는 건 가족들이 모르는 엄마의 식성이라는 거다.
얼마 전 노인복지관 프로그램을 같이 운영하시는 50대의 강사가 시어머니의 입맛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는 에피소드를 전하시며 아들들이 얼마나 자기 엄마 식성을 모르는지 깨달았다 하신 적 있다. 돌아가신 시어머니도 평생 그런 내색을 안 하셨다. 한 번은 입맛이 안 좋으셨던 투병 말기에 시댁에 늘 있던 반찬인 명태코다리찜을 좀 해볼까요 하고 물으니 나 원래 그거 안 먹는다 하셨다. 저는 늘 그 반찬이 있길래 좋아하시는 줄 알았다 하니 느이 아버님이 좋아하시지. 라고 대답하셨다.

결혼 후 내가 포기하지 않은 것이 물것보다 육지것을 좋아하는 내 식성인데, 김치찌게를 끓여도 꽁치김치찌게와 돼지고기넣은 것으로 두 가지를 끓여내거나 돼지고기비지찌게를 잔뜩 끓여 아무도 안 먹어도 혼자 다 처먹는 건 마지막까지 포기해선 안된다는 이상한 고집이었다. 평생을 먹어왔고 길들여진 내 식성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으며, 그건 어쩌면 나의 엄마 아빠, 그 위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었던 것이라고 말이다.

싫어하는 일을 하는 동안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계속해서 이어진다. 설거지를 쌓아놓고 인류의 가사노동을 생각하는 것처럼 바닥에 잔뜩 흔적을 남긴 돼지의 사체에 대해서 오늘은 조너선 사프런 모어의 와 그 책과 표지디자인이 비스무레한 과 제레미 러프킨의 을 식탁위에 깔아놓고 싶은데 그 책들이 식탁에 올려지는 순간 이 집에서는 냄비받침으로 전락할 것이다.

게다가 나는 여전히 육식을 거부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이건 단지 삼겹살은 밖에서 먹으면 안되겠냐!! 하는 감정적인 문제를 이성적으로 풀어내려는 아주 치졸한 먹물근성일 뿐이다.

2013. 7. 19.

엄마의 일요일

일요일,

지난 달에 국립극단 안티고네를 예약했고,

나는 마감을 해야 할 일이 있고,

날씨는 더없이 좋고,

벚꽃잎이 흩날리는 찬란한 일요일이였다.

 

예정대로였다면,

오전에 일찍 일어나 일을 하다가 여유있게 공연장에 가서 연극을 보고 집에 돌아오면 될 일이었다. 어린 아이는 아빠와 함께 있을 것이므로.

 

그러나, 남편은 급작스럽게 출장을 갔고, 그 출장은 늘 급작스러우며, 일정은 전적으로 본인의 사정과 거래처의 문제에 준하기 때문에 변경되는 일은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하는 경우 외에는 없으며, 그런 급박한 출장이 잡히는 경우는 주로 내가 모든 스케줄을 변경해야 하는 결과가 있다.

금요일에 남편이 출장을 갔고,

나는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아이와 놀고 시간을 보내고 밥을 해먹이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려고 매우 매우 애를 썼으며, 토요일엔 맛있는 콩나물과 쭈꾸미를 넣고 맛있는 탕도 끓여 먹었으며, 오늘도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하고 여유있게 연극을 보러 가고 아이는 제 이모에게 맡겨야지 라고 생각했지만, 일은 순조롭지 않아 나는 늦게 일어났고, 아이는 뭉기적 거렸고, 애 이모도 마감해야 할 일이 있어 피곤한 상태라 일찍부터 애를 보내기가, 애한테도 내 동생한테도 미안해서 뭉기적거렸고, 1시간 10분 전에 차를 몰고 공연장으로 출발을 했는데 날씨가 너무 좋은 탓에 길이 엄청나게 막혀서 자동차 전용도로에 진입도 못하고 차를 돌려서 돌아왔으며, 마음을 비우고 아이와 함께 꽃구경이나 하자 하고 호숫가에 갔으나 아이는 가는 길에 차 안에서 곯아 떨어져 버렸으며, 밥을 먹고 몇 가지 구경을 하다가 집에 돌아와서 9시에 아이를 재우고 나의 남은 일정을 소화하고자 했지만 아이는 낮에 푹 낮잠을 잔 탓에 11시가 넘도록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고, 나는 11시 20분에서야 컴퓨터에 앉아서 미진한 일을 하나 마무리 했다.

이건 모두 내가 엄마이기 때문이다.

그건 가정의 경제를 백프로 책임지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며, 육아를 주로 담당해야 하는 환경의 문제이며, 그 와중에도 내가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고 내 일을 하겠다고 붙잡고 있기 때문이며, 결정적으로 고등학력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예전에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기지배 공부 해봤자 팔자 사나와진다” 라는 말이 바로 이 말이었다 싶다. 차라리 배운 것도 없고 꿈도 없고 돈 벌어다 주는 사내 밑에서 고분고분하게 애나 키우고 엄마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자기 존재가치 따위 단 한 번도 고민하지 않은 채 그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산다면 인생은 오히려 더 풍요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억울하다거나, 화가 나는 단계도 지났다. 그저 이제는 아, 아직 이 나라에서 배운 여자가 사는 것은 매우, 쉽지 않고, 팔자 사나운 일이구나. 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2013 4.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