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한 살과의 대화 2.

“어머님 저 왔어요.”
안경너머로 활짝 웃는 청년.
사윗감 아니다. ㅋ
딸래미 학교 동기인데 지난 여름에 동기들이 돌아가며 친구네 집을 방문하고 2박 3일씩 보냈다. 우리 집에도 2박 3일 묵었다 간 한 녀석.

오늘 다른 선배와 놀러와 하루를 자고 내일 다시 학교로 내려간다.

딸아이도 그렇지만 이 또래 아이들은 참 이런 저런 것들도 많이 물어보고 조언도 듣고 싶어한다. 나는 저러지 않았던 것 같다. 어른에게 뭘 물어본 적도 없고 니깟게 나이만 처먹었지 뭘 알겠냐는 표정으로 기성세대를 바라보던 내가 그래 엑스세대다.

자꾸 느끼는 건,
아이들은 타인의 시선에 지나치게 큰 영향을 받고, 모든 일을 애써 너무 잘 하려고 들며, “즐긴다”는 게 뭔지 그 실체를 알지 못하며 “칭찬을 받으면” 그게 다 이룬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내게 말하길,
칭찬받고자 하는 자기 마음과 잘하려고 애쓰는 자기 마음이 스스로를 얽매서 불편하고 분명히 그로 인해 열등감이 증폭되는 걸 느끼기 때문에 이 감정이 매우 거슬리는데 이게
자기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거다. 돌아보면 제 친구들도 다 그러고 있고 자기도 남 비난을 너무 쉽게 하면서 남들도 자기를 너무 쉽게 비난하기 때문에 너그러워져야 한다는 압박감도 같이 온다는 것이다.

병든 사회를 물려주었다.
아이들은 칭찬받기 위해 애쓰는 문화에서 어린시절을 고스란히 탕진했고 상받고 잘 해내야지만 자기가 가치있는 인간이 된다고 주입받으며 자라버렸다.

매일 매일 애쓰며 사는 게 고단하고 힘든데 그런 불평을 하면 안될 것 같아 그마저도 늘 숨기고 지낸다. 그러다 보니 친구를 놀리고 남을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는 공격성으로 자기
자신을 감추고 또 거울을 보며 자기자신에게도 손가락질을 하는 거다.

넌 한심해. 나도 한심해. 근데 가끔 니가 더 한심해.

이건 어쩌면 일베사상의 근간 아니었나.
나도 등신 너도 등신 우리모두 등신. 근데 쟤가 오늘은 최고 등신. 그러니까 놀리자.

2015. 1. 13.

듣는 자의 몫

1. 너 걔랑 놀지 마.

–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쉽게 하는 말.
너는 대체 왜 걔랑 노니? 딴 애랑 놀아!
동생이나, 자식들에게 쉽게 하던 말이다.

오늘 어떤 사진을 보고 있자니 아 그래도 얘한테는 걔가 유일하게 같이 노는 친구구나.. 다른 애가 아무도 없구나..

걔랑 놀지 말라고 하던 내가 해야 할 일은 친구가 되어주거나, 다른 친구를 소개해주는 일이었겠지, 걔랑 놀지 말라고 할 일은 아니었다.

2. 유기를 수차례 당하고 결국 내 손에 들어온 늙은 시츄가 한 마리 있었다.
목줄을 걸고 산책을 나갈라 치면 당췌 움직이질 않았다.
몇 번을 거듭한 끝에 산책을 나서긴 했지만 20분 정도 걷고 나면 바닥에 배를 깔고 앉아 일어나질 않았다. 잡아 끌고 궁둥이도 쳐봤으나 영 요지부동. 나는 그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때 나는 “이 시키 뺑끼쓰고 지랄” 이라고 쉽게 말했다. 개가, 게으르다고 비난했다.
그 개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노환으로 죽었다.

며칠 전 아지와 한 시간 정도 산책하는데 아지가 힘들어 보였다.
그 때 그 게으른 시츄는 게으른게 아니라 다리가 아파서 못 걸었을 수도 있다는 걸, 수년이 지난 며칠 전에 깨달았다. 사실이거나 아니거나.

3. 말할 수 없는 존재는 우리와 언어가 다른 개나 동물들이 아니다. 발화언어의 형식이 달라서 내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감정과 이유를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단지 그 표현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듣는 사람의 문제다.

이 모든 역사는 나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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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바닥을 보는 때가 있다.

자기 내면의 깊은 바닥을 치는 순간이 온다.

바닥을 보는 일은 끔찍한 일이다.

한 개인의 바닥은 더럽고, 추잡스럽고, 미련하고, 이기적이다.

더러운 것이 눈에 띄는 순간 덮어버리고 싶은 건 당연하다.

한 사람이 얼마나 강인한가는 여기서 드러난다.

한 사람의 내면의 힘은 변화무쌍하여, 언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눈을 감아버리고 도망을 가기고 하고 언제는 자세히 들여다 볼 수도 있다. 그 힘은 저것이 더러운 것은 사실이나, 나의 배설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에 온다. 말하자면, 내가 싼 똥을 보고, 저건 내 몸에서 나온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과 같다.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칭찬받는 사람이고 싶었으며, 남들에게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싶었고, 의지가 강하다거나, 대단하다거나, 나는 너처럼 하지 못할거야. 라는 찬사를 받고 싶었다.

 

5개월째, 내 자신을 완전히 해체하여 하나씩 뜯어보는 일을 하고 있다.

물론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있다.

내가 싸갈기고 외면한 똥들은 어느 새 산을 이루어 나는 똥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꼴이 되었고, 그 냄새가 너무 지독하여 아무나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급기야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으니까.

 

이 지저분한 바닥을 쓸고 다니는 동안, 하나씩 내가 버려둔 배설물들을 치우는 동안에도 나는 여전히, 남들에게 칭찬을 받고 사랑을 받고,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게 가면을 뒤집어 쓰고 사는 동안 내 바닥은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는지, 꽉 막힌 양재IC에서 눈물이 흘렀다. 내가 훌륭했던가, 내가 잘 해냈던가,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성과물을 선보이며 받았던 그 찬사들은 다 무엇이던가 생각했다.

 

나라는 사람은, 모든 감정을 덮어주고 발버둥을 쳤던 거다.

그건 내가 훌륭하거나 놀라운 일을 해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칭찬을 받고, 어떻게 하면 인정을 받고, 어떻게 하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 그 기술을 꾸준히 스스로 익혀왔기 때문이다. 썩어 문드러지는 내 감정도 나의 것인 것처럼, 그렇게 키워온 가면을 쓴 나의 기술도 나의 것이다.

 

버림받을까 두려운 것은 가장 큰 공포였으며, 역량을 인정받아야 생명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7살 무렵, 스탠드가 켜져 있는 어두운 방에 동생은 자고 있고 엄마는 오지 않던 그 밤에, 책상위에 올려놓은 새 신발을 보며 엄마는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내내 벌벌 떨며 기다리던 그 기억에서 시작한다. 어쩌면 그 이전에도, 그 훨씬 더 이전에도, 나는 잘 해내지 못하면 죽을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여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 힘은 결국 나를 길렀고, 나는 지금 모두 잠든 내 집안에서 내 컴퓨터 앞에 앉아 이런 글을 쓰고 있게까지 만들었다. 공포와 위협도 나를 길러낸 힘이 된다. 그 역시 내 바닥에 숨어 있던 나의 것이므로.

 

나의 썩어버린 바닥에 사람들을 하나씩 끌어왔다. 아빠, 엄마, 남편, 동생, 딸, 아들을 끌어와 이 바닥이 이렇게 더러운 것을 좀 보라고, 나는 이 냄새를 견딜 수 없다고 그 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신음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은 모든 것이 관계속에서 이루어진다. 그 중에 평생을 보고 살아야 하는 가족들과의 관계는 절대적이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모든 관계를 부정하고 나는 내 바닥을 숨기며 우물 위로 올라가기에 급급했다. 그 간절함 역시, 나의 것이다.

 

내가 치우지 않은 바닥에서 내가 울부짖으며 바라봤던 사람들을 땅위로 하나씩 올려보낸다. 아직 한 사람이 남았고, 또 몇 명이 더 튀어나올 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나씩 바닥을 청소중이다.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 모든 문제도 나의 것이다. 모든 성과와 칭찬과 찬사도, 나의 것이다. 이 모든 역사는 나의 것이다.

2013. 5. 30.

폭력의 반복

내재된 폭력의 기억이
다시 폭력을 부른다.
인간에게 복수심이란
존재를 유지하려는 관성,
혹은 형평성을 뜻하는 것인가 생각한다.

굳이 누군가에게 복수하겠다는 구체적인 마음을 갖지 않고 고상한 마음의 수련이나, 또 다른 행동의 승화로 변질되었을 때도, 잠재의식속에 숨어서 치유받기 매우 어려운 그 수많은 폭력의 기억들이, 타자를 향해, 혹은 자아를 통해 다시 발현된다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이 폭력인 줄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살았던 세월동안, 폭력은 이미 영혼 깊이 각인되어 살아가는 방법의 하나로 자리를 잡아 버린다.

각성이 일어나고 그 마음과 몸의 표현들이 모두 대단한 폭력성을 띄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한 다음엔, 이미 살아가는 방법과,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서 다른 여지를 다 차단해 버린 후다. 그리하여 가치관의 붕괴와 세계의 몰락이 동시에 발생하고 쉽게 이름 지을 수 있는 “우울증” 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몇 가지의 약물로 감정이 전달되는 시냅스들의 연결을 차단하고 깊이 사고하지 못하도록 나른한 육체를 만들어주어, 그 당시의 제 2의 반사적 폭력사태를 면하게 도와준다.

그러나 내재된 폭력의 문법을 고치는 방법은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고 세상엔 이미 혼자다.

세상의 모든 이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삶은 언제나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고 하나의 인간개체에겐 오직 하나의 우주가 존재하며 그 우주엔 오롯이 그 우주의 주인 단 하나다.

고립된 채 다른 세상의 문법을 배우는 일은 어렵다. 언어는 늘 타자를 모방하면서만 배울 수 있다. 모방이 불가할만큼 폭력에 길들여진 채 세월이 지나버리면, 반복되는 것은 좌절과 좌절의 연속이다.
게다가 이미 인간과 사회에 대한 맹목적 신뢰 없이 불신마저 무럭무럭 자라난다면.

그 이후는 걷잡을 수 없는 카오스.
그 누구도 사전에 막을 수 없고 오로지 결과, 상처와 폭력, 혹은 시체만이 남곤 한다.

2013. 01. 16

키티를 잡아먹은 호랑이

얼마전에 문득 이런 키티 시리즈가 떠올랐다.
키티가 호랑이옷나 다른 동물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인데,
누군가는 이걸보고 호랑이가 키티를 잡아먹었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키티 안에 있던 호랑이가 스물스물 나와서 껍질을 뒤집고
키티를 감싸안은 것은 아닌지.

한 사람의 분노와
한 사람의 슬픔과
한 사람의 우울은
이렇게 속에 껍질을 뒤집고 숨어 있다가
스르르 입을 통해 나와서 그 존재를 모두 감싸 안아 버리는 형국.

그래서 그 존재가, 분노와 슬픔이나 우울에 감싸안겨 버리는 형국.
결국 옷을 벗을 수 있는 건 키티 자신 뿐이다.

2012. 3. 2.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복수 : .죽는 거 보다 더 힘든게… 살던 세상 바꾸는 일이예요. …죽는건 세상을 버리면 되지만, …살던 곳 바꾸는 건, …세상을 바꾸는 일이니까…

경 : (얼굴을 닦아주며 미소) 복수씨, 위대해요. …세상을 바꿨으니까…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천상천하유아독존에 대해서 불교에서 뭐라고 말하는지 
찾아보면 바로 나오는 일이지만. 
하늘과 땅 사이에 오로지 나만이 존귀하다. 라는 말은, 
모두가 각자의 세상을 갖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하여, 내 세상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타인의 세상을 침범하지 말 것이며, 
두 사람간의 갈등은 하나의 우주와 또 다른 우주의 충돌이겠구나. 
라고 혼자. 씨부려 본다. 
2012. 2. 24. 

세계, 어제와 오늘.

표출되지 못한 언어들이 마구 쏟아진다
정확성을 잃은 감정들이 쓰레기더미처럼 쌓여간다
아이들은 그렇게 거리를 헤매이고 
TV에 나오는 누군가를 모방한다
흠모하진 않으나 가슴속 깊은 곳에 시기심이 있다
내가 저 아이보다 못한 게 무엇이 있느냐는 
바닥을 친 자존감이 솟구쳐 오른다 
아이들은 그렇게 헛된 것을 쫓아 
재빠르게 자존감을 회복할 방법을 찾아 헤맨다
+
딸아이가 애견미용학원을 다닌지 한 달이 된다.
지난 주엔 나와 7년을 산 개의 목욕을 시켰다.
한달만에 능수능란한 관리사가 되었다.
어제의 아이는 사라지고 
어린 시절의 아이가 다시 내 앞에 서 있다. 
케익 하나 사다 주면 헤헤 하고 내내 웃던 보조개와 
스파게티는 이렇게 먹는거라고 가르쳐 주던 나를 보며 부끄럽게 웃던 얼굴로
진작에 좀 .. 이라는 나의 타박에 
눈가가 빨개져도 울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그 아이가 아르바이트도 시작했다.
어차피 공부엔 관심도 없고 흥미도 없다. 
아이는 그저 세상에 뛰어들어 인생을 느끼고 싶을 뿐이다.
아르바이트는 비정규직이다.
아이를 낳으면 알바를 많이 시키겠다고 다짐했건만 
막상 내 아이가 알바를 하겠다고 나서니 선뜻 칭찬이 나오지 않는다.
왜 험한 세상을 일찍 배우려고 하느냐. 
조금 더 기다렸다가 만나도 늦지 않는다.
라고 말했지만 
아이는 고개를 젓는다. 
허무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졌다고 한다.
엄마, 한 걸음을 떼니까 두 번째 걸음이 쉬워요. 라고 말하는 아이의 옆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그동안 우리 얼마나 힘들었니.
다 되었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래, 참 잘 하고 있구나. 라고 
매우 구태의연하고 상투적인 대답을 해주었을 뿐이다. 
누군가의 인생을 보고 
절대 비난하지 말라고 말했다. 
한심하고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는 사람이라도 
맹목적으로 비난하지 말고 
항상 측은지심을 갖고 왜 저 사람이 저런 삶을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해서 고민하라 했다.
그게 과연 그 사람의 잘못인지
이 사회의 문제인지 잘 살펴보는 사람이 되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관용을 베풀어
윤리와 도덕의 기준을 낮추어 너에게 적용시키지 말라고 했다. 
분명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고 
다가서지 말아야 할 세계가 있고 
접하지 말아야 할 직업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의 기준, 너의 잣대가 되어야지
남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아이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아무도 무시하지 않아요. 라고 대답한다.
엄마는 아직도 .. 제가 그래 보여요? 라고 묻는다. 
아니. 네가 그래 보이는 게 아니라, 
청소년기의 네 나이 또래의 모든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해. 
네 동생이 네 나이가 되면 네 동생에게도 똑같이 말할꺼야. 
며칠 전에 할머니 걱정이 되어 
몸에 좋은 음식을 해드리고 싶어 고민하다가 
도곡동의 한 한의원에 찾아가 상담을 하고 온 것은 
아주 기특하고 훌륭하고 기쁜 일이다. 
근데 솔직히 엄마는, 
진작에 조금이나마, 
늦기 전에 조금이나마. 
조금 덜 아프게 하지 그랬니 .하는 마음이 들어. 
그 날은 좀 화가 났었다. 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아이는 눈가가 벌개지지만 쑥스럽게 웃었다. 
나는 또 아이에게 못을 하나 박은 셈이다. 
말하지 말았어야 했나. 
아니, 
나는 말해야 했다.
후회도 하고 반성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뼈아픈 고통도 느껴봐야 한다고.
다른 사람이 주는 상처보다 
차라리 내가 주는 상처가 낫다고. 
자위하고 싶다. 
아이는 커간다. 
자기의 세계속에서 
다른 사람의 세계를 관찰하고 부딪치고 느끼면서
아주 잘. 자라고 있다.
매우,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만으로 다섯살하고도 6개월이 지난 작은 아이는
요즘 태권도를 다녀오면 뛰어나가 동네 형들이랑 놀기 바쁘다.
엄마 안녕. 
하고 저 혼자 문을 닫고 나가고 
저 혼자 자전거를 타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그러다 간혹, 
엄마가 태권도에 데리러 와. 
라고 말한다. 
왜 데리러 오라고 했어?
아이와 오솔길을 걸으며 물으면
그냥. 이라고 대답하며 내 팔에 제 얼굴을 문지른다.
어두워질 때까지 아이들과 놀다가 
밥먹을 시간이 되면 돌아오는 
나의 작은 아이는,
마치 내가 어린 시절을 지낸 80년대의 아이처럼 저녁을 보낸다.
그렇게 키우겠다고 결심했던 일이 성사되어 
이 역시 감사한 일이다. 
나는 아직 마흔도 되지 않았으나 
동생에게 피부가 탄력을 잃었다는 얘기도 듣고
이제 밤도 새지 못하고
예전처럼 술도 많이 마시지 못하고
가끔 화장실 세면대 거울 앞에서 흰머리를 발견한다.
흰머리를 발견해도 뽑지 않는다. 
이미 남편은 염색약을 써야 할 정도가 된 지가 오래다. 
늙어가는 중이다. 
조금씩 나도 어른이 되고 
아주 조금씩, 늙어가는 중이다. 
스무살 무렵엔 빨리 서른이 되고 싶었다. 
진절머리 나는 질풍노도의 혼란을 지나 서른이 되면 어딘가 안착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막상 30대의 반을 훌쩍 지나고 나니 
이제는 마흔이 되고 싶다. 
그럼 좀 더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간혹 그저 세월을 건너뛰어 쉰 정도가 되었으면 한다.
아무에게도 화내지 않고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 나이. 
언젠가 엄마가 쉰 다섯 쯤 했던 말처럼
“이제 이 나이쯤 되면 다 이해할 수 있단다”
나에게 나이는 환상이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은 나이가 아니라 
인격이다.
사람으로서 
가장 인간답고 숭고하게 살다가 
아름답게 기쁜 마음으로 
참 잘 지내었다. 라고 말하며 떠나고 싶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은 아름다운 마무리다. 
악다구니 쓰지 않고 고요하고 평화롭게 이별하고 싶다. 
그 날을 위해서 조금씩 걷는다. 
때론 울고 웃고 욕하고 따지고 생각하고 움직이면서
하루 하루를 산다. 
얼마전 남편이 몇 년전의 나의 습성에 대해서 강한 편견을 갖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라고 생각하지 마. 
당신이 말하는 그 습관은 그 때의 나일 뿐이고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아. 
이미 몇 년간 그렇지 않았잖아. 
그리고 덧붙였다. 
나는 매일 매일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 살아. 
라고. 
나는 내일,
오늘 보다 조금 나은 사람이 되어 있을거다. 
2011. 9.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