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가 주는 오만함을 경계하라

[서평]활자 잔혹극 – 루스 렌들

영국 미스테리 소설의 거장 루스 렌들의 <활자 잔혹극>은 1977년작이다. 한국에는 북스피어 출판사가 2011년에 소개했다. 끌로드 샤브롤의 영화 “의식(儀式)”의 원작소설이다.

▲ 루스 렌들 (지은이) | 이동윤 (옮긴이) | 북스피어 | 2011-11-25 | 원제 A Judgement In Stone (1977년)

오만의 유혹, 세계의 파멸

소설의 첫 문장은 도발적이다. 사건의 결과를 내던지고 시작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자 이런 일이 있었어. 그 속에 숨은 이야기를 내가 지금부터 잘 설명할텐데, 듣고 싶으면 듣고 아님 말어’ 라는 태도로 보인다. 소설은 살인사건의 범인을 밝히고 시작한다. 독자가 찾아내야 할 것은 그 원인이다. 문맹인 가정부가 지식인 가족을 살해한다. 그 곁에는 광신도인 미치광이가 하나 붙어 있다.
주인공은 사회와 격리된 채 살아왔다. 문맹이라는 건 제도권 교육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며 누구도 이 주인공을 살뜰하게 보살피거나 주인공의 미래를 진지하게 염려한 적 없다는 말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나, 이 글을 읽는 당신이나, 문맹이 느낀 수치심은 과연 어떤 것인지 사실 잘 알 수 없다. 글을 알기 때문에 전혀 알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 마지막 해제에 장정일이 적은 발문이 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약간의 단초가 된다. 영어권 국가에 갔는데 말을 한 마디도 못해 죽고 싶은 심정이 들었던 적 있다면. 이라는 부분을 읽으니 개인의 경험이 생각났다.

10년도 훨씬 더 전에 공부를 하겠다고 중국대륙으로 갔다. 중국어는 학원을 몇 달 다녔지만 사실 한 열 마디 정도 하는 게 전부였고, 영어가 어느 정도 통하겠거니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하며 대책없이 떠났다.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부터 난감한 상황이 펼쳐졌다. 나는 영어로 된 호텔명만 알고 간 것이고, 내가 아는 주소도 영어로 된 것이라 발음이 명확치 않았다. 택시기사 한 명에게 호텔명을 댔더니 공항에 줄 지어 서 있는 택시기사 수십 명이 몰려들었다. 그 땅은 영어는 통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새로운 단어는 중국어로 바꾸어 말했고, 내가 도착한 상하이라는 도시는 사투리마저 심해서 어학연수 기간 내내 표준어를 배워봤자 벙어리나 다름없었다. 말도 글도 안 통하는 몇 개월을 보내며 어릴 때 본 중국무협드라마에서 본 이미지가 떠올랐다. 팔다리가 다 잘려서 항아리속에 목만 내밀고 살아있는 반역자의 모습이었다.
이후, 말을 떼고 글을 배우고 알량한 글밥으로 공부를 했을 때의 심정은 좌절감, 열패감, 소외감, 박탈감, 온갖 부정적인 감정표현명사는 다 갖다 붙여도 무방하다.
나의 개인적인 체험이 설마 주인공의 감정을 반푼어치라도 이해할 수 있게 만들까?
아닐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평생을 문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온 것이다.
주인공에게 문맹이라는 건 치명적인 비밀이요 상처다. 불행하게도, 주인공은 숨기고 싶은 상처를 후벼파는 대상들에 둘러싸여 산다. 결국 주인공은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

작가는, 주인공의 이 문제가 그저 감정의 것으로 건드리고 넘어가지 않는다. 한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문화전체와 문자라는 기표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문자로 둘러싸인 삶과 지식인연 하는 것과, 타인의 삶을 통제하려고 드는 기득권층의 계급성을 두고 문화의 차이로 인한 삶이 달라지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질문을 던진다. 문화수혜자와 문화박탈자의 경계는 또 다른 계급갈등으로 이어진다. 한 사람이 어떤 삶을 꾸려가는가는 사실 의지의 문제와 동떨어질 수도 있다고 말한다.
언어의 기의도 누구에게나 동일하진 않다. 굳이 성문화하지 않은 약속이 있다고 치면, 언어의 기표는 특별한 교육을 거쳐야 습득할 수 있다. 근대교육은 분명 특별한 영역이다. 그저 너무 흔해서 보편화된 것처럼 보일 뿐,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문맹이 아닌 이들이 말하는 보편이나 평범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본인이 기득권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기득권들의 놀음은 아닐까.

예를 들어, 쪽방촌에 사는 70대 이상의 노인들은 메모를 길게 하지 못한다. 문자습득이 순탄하지 않았고 문자는 그저 명사, 이름씨로 존재하지만 문자를 사용해 감정이나 생각을 전달할 정도의 문자 습득력은 없다. 이것은 문해력과 바로 직결되는데 타인의 기표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하며 평생을 살아가게 되면 온전히 사람의 표정과 어투, 말씨를 통해 세상을 이해할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휘갈겨대는 수많은 문자를 보며 온통 어지러운 세상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글씨는 쓸 줄 알지만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엉망이었다. 이 사람은 초등학교를 3년 정도 다닌 게 학력의 전부였다. 가정내 폭력으로 가출이 아닌 구출을 받아, 어릴 때부터 남의 집 살이를 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의 남편이 문맹인 거 같다고 나에게 고백한 적 있다. 그 남편은 고아로 보육원에서 자랐고 역시 초등학교를 다 마치지 못했다. 결혼 후 모든 공기관과 은행 업무를 이 사람이 도맡아서 했는데 남편은 글자를 써야 하는 상황이 예상되기만 해도 짜증을 부리고 포악을 떤다는 것이다. 남편의 얘기를 전하던 그는 모르면 모른다고 할 것이지 포악을 떨 게 뭐냐고 투덜댔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문맹이라는 이유로 살인을 저지른다는 개연성을 생각해보면 아감벤을 떠올릴 수 있다. 조르주 아감벤은 <호모사케르>에서 “만일 오늘날에는 명백하게 규정된 하나의 호모 사케르의 형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라고 말했다. 루스 렌들이 말하는 문맹이라는 형상은 그저 여러 종류의 호모 사케르 중 하나일 것이다.

문해자들은 문맹을 보면 가르치려 든다. 문맹자의 의지박약을 말할 것이고 동정하고 연민하며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겠다고 안달을 할 것이다. 타인을 가르치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성실히 살지 않고 있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인간이 많다. 과연 그것이 인간이 인간에게 해도 되는 행동인가? 존엄의 문제와 과연 무관할까? 이는 통제의 한 방편이거나 폭력의 묘한 양상은 아닐까?

주인공의 이름은 유니스다. 유니스가 살인을 저지른 것은 한 존엄한 존재가 가진 온전한 세계의 침탈을 꿈꾼 한 가족에 대한 인간으로써의 저항일 수도 있다.

“유니스는 숨쉬는 돌이었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라는 문장이 눈에 띈다. 유니스는 문자가 필요 없는 원형 그대로, 문화가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특정한 세계, 요컨대, 자연계의 상징으로 보였다.

영어 원제는 A Judgement In Stone이다. 위에 소개한 문장이 그 핵심문장이 되는 셈이다. 사전을 다시 뒤져 in stone을 확장해 찾아보면 carved in stone이라는 관용어구가 나온다. 변경불가능한, 이라는 뜻이다. 돌은 그런 것이다. 돌에 새긴 심판, 이라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말할 것이다. 문맹 너머, 유니스라는 한 개체가 가진 특질과 그 개체가 40년간 흡수해 온 문자를 제외한 사회문화의 많은 것들이 상징하는 바일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지울 수 없는, 변경 불가능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떠한 세계.

조선 후기 문인 김려(1766-1821)는 사유악부(思有樂府)에서 ‘세상이 어지러워 화 당하기 쉬우니 글짓기를 조심하라’고 전했다. 글짓기나 글쓰기가 과연 세상이 어지러울 때나 조심해야 할 일일까. 우리는 글 속에 파묻혀 얼마나 많은 것을 돌아보지 못하고 오만을 떨며 죽어가는가. 배운 것이 탈이고, 아는 것이 병이로다. 무수히 부딪히는 세계와 세계의 충돌, 그 사이에 벌어지는 크레바스 같은 파멸은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작가의 의지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래 읽히는 작품은, 늘 온당한 이유가 있다.

▲ La Ceremonie, 1995 | 감독 : 클로드 샤브롤 Claude Chabrol | 주연 : 상드린느 보네르(Sandrine Bonnaire), 이자벨 위페르 (Isabelle Huppert)

[서평] 해녀와 나 – 너 독새끼가 뭔주 아나?

우도 어멍들과의 1년, 육십 넘은 막둥이의 변주곡

제주는 근현대사의 비극을 간직한 섬이다. 최근 몇 년간 관광산업이 급성장해 제주는 이제 국내외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 명소가 되었다. 최근 10년 사이 이 도시에서 제주에 한 번도 안 간 사람은 나뿐인 것 같다.

책을 읽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집중이 잘 안 될 때 나는 사진집을 찾는다. 요즘은 공공도서관에도 좋은 사진집이 많이 들어와 있다. 사진집은 여타 단행본보다 제작비가 많이 들어 그 값이 꽤 나간다.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책이 늘어날수록 이미 읽은 것도 소장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데 사진집류가 주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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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초이 찍고 지음 / 남해의봄날 펴냄

 

이 사진집은 준초이라는 사진가가 제주 옆 우도에서 1년을 보내며 기록한 바다 어멍들의 이야기다. 준초이는 이제 나이로 따지면 노년에 가깝다. 책 소개에 보면 2005년 제주에서 광고 촬영을 하던 그가 멀리서 들려오는 숨비소리에 이끌려 우도에 들어가 해녀 사진을 찍은 것이 그의 운명을 바꿨다고 쓰여 있다. 이 책은 사진과 작가의 이야기가 같이 어우러져 있는데 사진의 기술력이나 예술성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만큼 완성도가 높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이미지 옆에는 도시에서 온 사진작가가 바다와 해녀들을 대하는 어설픈 모습이 소박하게 적혀 있다.

 

“이땅 마중 올 때 독새끼난 50개 삶아오라, 너 독새끼가 뭔주 아나?”
“예! 계란!”

날이 더우니 시원한 물을 가져다주려고 냉장고에서 차갑게 얼은 생수를 가져다 줬는데 차가운 바다에서 한참 물질을 하다 온 해녀들에겐 하나도 도움이 안 되었다거나 의미심장한 대답을 기대했는데 툭 던지는 일상의 언어에 놀란다거나, 그 사진기 들고 다녀서 처자식 먹여나 살리겠냐는 어멍들의 이야기에 쑥스러워하는 작가의 낮은 마음이 정겹다.

해녀들은 자존감이 높다고 한다. 자식들이 제발 물질만은 그만하라 말려도 바다에 들어가면 먹을 것을 캐오고 돈으로도 바꿀 수 있으니 노동이 주는 기쁨을 누리며 산다는 것이다. 준초이는 쉽게 말해 잘나가는 광고사진 작가였다. 그런 그가 바다 어멍 앞에선 까까머리 어린 아이처럼 보인다. 작가는 해녀들과 친분을 쌓기 위해 내리 바닷가에서 머뭇거리고 계란도 삶아놓고 기다린다.

우도에서 1년을 보낸 작가는 더 없이 행복했을 것이다.
김영갑의 제주사진은 철저히 고독했다면 준초이의 바다와 해녀는 뜨거운 정열과 뭉클함이 있다. 왠지 모르게 심심한 주말이라면 이 검고 푸른 바다를 누비는 신령같은 해녀들과 그 곁에 쭈삣거리는 대가의 이야기를 들어봄직 하다.

통영에서 작은 출판을 하고 있는 남해의 봄날에서 펴냈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앞만 보고 달려가는 숨가쁜 프리랜서로 살아온 내가 우도에서 보낸 1년은 내 인생에 다시 없을 시간이었다. 분명 존재했을 현재라는 시간대를 음미하지 못하고 앞으로만 뛰어가는 내 모습이 한때는 자랑스러웠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습이 남에게 비춰질 것이 창피하다. 과거, 현재, 미래로 이루어진 삶의 몸통에서 현재는 토막난 채로 과거와 미래 어느 쪽인가로 흡수, 통합되어 버렸던 시절이었다. 해녀들은 언제나 현재를 산다. “물때를 어질지 마라” 하시던 옛 어른들의 지혜는 이들의 삶이 얼마나 자연의 섭리에 맞게 흘러가는지를 보여준다. – 책 216쪽 중에서

《고양이 마을로 돌아가다》-  나쁜 자본주의와 이별하기

 

히라카와 가쓰미 지음 / 남도현 옮김 / 이숲 펴냄

 

문득 서평을 쓴다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읽으라고 초강추라고. 꼭 읽으라고.” 한 줄이면 될 것 같다.
한 권에 책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을 할 필요가 뭐가 있냐는 생각이 드는 건 굳이 쪼개어 해체하거나 느낌을 덧붙이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고양이와 같이 사는 나에겐) 제목이 참 매력적이다.
고양이 마을로 돌아가다니. 고양이는 인간이 키우는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로 위상을 높였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고양이를 모시고 산다고 말한다. 어쩌면 지구의 주인은 고양이인지도 모른다는 말을 진지하게 들을 때 나 역시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고양이는 도시에 산다. 전혀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서도 고양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고양이를 대하는 도시민의 태도가 그 도시의 인간미를 측정하는 지수가 된다고도 한다. 작은 생명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가 모여 그 도시 시민이 생명을 대하는 가치관을 보여준다.

이 책은 멀리가지 않고 도시의 골목을 거닐며 자본주의에 대해 성찰한 한 사업가의 명상이다. 주장이라고 보기엔 논조가 부드럽고 이야기라 하기엔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다. 또한 책상에 앉아서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언저리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고양이 마을도, 그가 관찰한 고양이들을 지켜보다가 나온 이야기다. 이전에 출간했던 저자의 책중에 《‘소비를 끊는’ 공중목욕탕 경제의 권유》라는 책도 있는데, 이 책에도 공중목욕탕과 가업을 잇지 않으려 하는 청년들의 이야기처럼 동네를 산책하며 고심했던 소재들이 등장한다.

책은 1장과 2장으로 나뉘어 있따. 1장은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적 이야기를, 2장은 골목길에서 찾은 자본주의와 자본이 바꿔놓은 우리 일상의 이야기들을 한다. 일본과 한국은 여러 모로 닮아있다. 한국은 일본의 전철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이유로 저자의 이야기가 더 정겹게, 실감나게 들릴 것이다.

작가는 1950년 도쿄 출생으로 사업가이자 저술가이다. 벤처사업가 중 하나라고 알려졌는데 참신한 업종을 창업한 경력이 있는데 저술한 책을 보니 기존의 체제와는 다른 길을 걷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히라카와 가쓰미가 쓴 그간의 책은 《반전략적 비스니스의 권유》, 《주식회사라는 병》, 《경제성장이라는 병》, 《이행기적 혼란-경제성장 신화의 종말》, 《소상인小商人에의 권유-경제성장에서 축소 균형의 시대로》, 《골목길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다》, 《소비를 그만두다》 등이다. 그러니까 기본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계속 제시하고 주장하고 있다.

묵직한 경제학원론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겉핣기식 책은 아니다. 발로 쓴 글은 어딘가 깊이가 있는 법이다. 혼자 읽고 음미하기도 좋지만 여러 사람이 모인 독서모임에서 자신의 일상과 비교해가며 함께 이 책을 읽는 것도 매우 좋겠다.

 

나는 연명 치료를 원하지 않지만 (이런 문제는 그때가 돼야 알 수 있겠지만), 인간의 죽음을 법제화한다는 생각에는 거부감이 든다. 그리고 연명 치료를 원하지 않는 자연사를 ‘존엄사’라 부르는 것에도 반대한다. 무엇보다도 이런 발상에 ‘당사자의 책임’이라는 근거를 끌어들인다는 점이 못마땅하다. (중략)
내가 존엄사 법안에 반대하는 이유는 죽음이 전적으로 개인적인 사건이며, ‘죽음’이라는 개념이 일반적 정의가 필요한 법과 어울리지 않아서다. 죽음이 개인의 문제라는 인식에서는 법안의 취지나 내 생각이나 똑같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죽음은 개인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개인적인 것으로 규정할 수 없는 집단적, 집합적인 면이 있고, 또 역사적인 면이 있다. 이런 측면이야말로 죽음을 생각할 때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법안에는 이런 부분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임상 차원에서 죽음은 역시 개별성이 문제시된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양한 죽음이 있고, 그에 따라 다양한 대책이 있기에 이 문제를 획일적으로 다룰 수 없다. (중략) 결국, 죽음은 내 것인 동시에 내 것이 아닌 무엇이다. (58-59)

“처음부터 지금까지 실마리는 없었다.” 헤이안 시대(794~1185) 진언종을 창시한 구카이가 지은 『삼교지기(三敎指기)』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실마리는 인간의 지성 밖에서 희미하게 빛을 발할 뿐이다. (98)

토드는 가족 분류를 설명하면서 아주 흥미로운 점을 지적한다. 외혼제 공동체 가족이 분포된 곳은 러시아, 중국, 베트남, 구(舊)유고슬라비아, 쿠바, 헝가리 같은 국가들이다. 즉, 사회주의 국가들은 거의 외혼제 공동체 가족 구조로 구성돼 있다. 이것은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나는 이런 지적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시각을 근본적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즉, 공산주의 국가처럼 ‘권위주의’와 ‘평등주의’라는 두 가지 규제력을 통해 통치되는 공동체는 원래 외혼제 공동체 가족 체계에도 존재했던 셈이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도 하나의 구상인 것이다.
*토드 『세계의 다양성(La Diversite du monde. Structures familiales et modernite)』의 저자 엠마누엘 토드

많은 사람이 일본 전체가 순식간에 파멸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경험했다. 만약 원전 사고의 영향이 도쿄까지 미쳤다면, 수도의 기능이 마비됐을 뿐 아니라 모든 정치 기능이 수도에 집중된 일본 전체의 기능이 마비됐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 기능을 분산하고, 수도 이전을 고려하는 등 집중을 막으려는 논의는 정치가 사이에서 진지하게 검토되지 않고 있다. 국가만이 아니라 세계도 집중이 아니라 분산을 통한 공존을 구체화하는 것은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자연에서 배워야 할 지혜다. 효율만을 중시하는 중앙집권 체계와 지속을 위한 공존 체계라는 두 가지 사고방식이 서로 싸우는 것이 오늘날 상황이다. (126)

지구의 모든 생물 중에서 인간만이 이토록 많은 쓰레기를 배출한다. 문명인의 생활은 어쩌면 쓰레기를 만들고, 쓰레기를 치우는 삶이다. 개도, 고양이도, 가축도, 야생동물도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다. 그들의 배설물을은 시간이 흐르면 땅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집을 짓거나 부수지 않는다. 보금자리는 자연 그대로 풀숲이나 나무뿌리 사이, 혹은 인간이 만든 건축물에 있다. 해가 뜨거운 여름에는 어디가 시원한지, 추운 겨울에는 어디가 따뜻한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아니 그런 것은 생각지도 않고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간다. 인간만이 자연에 도전하고, 자연과 대립하고, 자연을 가공한다.
최근에 ‘지속 가능한 사회’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인간을 제외하면 어떤 생물도 지속 가능한 사회라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아간다. 지속 가능한 사회는 오로지 인간에게 국한된 개념으로 다른 생명체한테는 너무도 당연해서 염두에 둘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다.
(133-134)

사무실 뒤쪽에는 나무가 많은 공원이 있는데, 뒷문으로 나가 잠깐 쉬다 보면 이네무리 군이 햇볕을 쬐며 기분 좋은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다. 이네무리 군이 나무 아래서 오줌을 누고 나서 요령 있게 모래로 덮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은 참으로 정교하게 조직돼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중략)
우리는 고양이들의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당신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134)

정치가는 자기 정치 생명의 큰 부분을 주식회사에 의존하고 있다. 주식회사의 경영자들 또한 성장을 지속시키지 못하면 그 소유자인 주주들에게 버림받을 운명에 처한 사람들이다. 혀재 국가는 주식회사에 의해 지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면 국가가 구사하는 경제 성장 전략은 실제로 주식회사의 전략이고 국가가 말하는 성장 시나리오의 내용 또한 주식회사 경영자의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 (136)

문명의 발전은 어떤 가혹한 자연조건에서도 살아갈 조건을 갖추도록 도구와 기계를 만들어냈다. 가혹한 자연조건을 완화하고,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어느 정도 에너지가 필요할까? 우리는 자연이 아니라 자신을 통제하면서 자연과 관계 맺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무한하다고 생각했던 자연은 소진할 것이며, 오늘날 바로 그런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140)

찬찬히 바라보면, 정상경제를 우리가 발로 딛고 서 있는 이 땅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일하고 살아가는 바로 이 땅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일하고 살아가는 바로 이곳을 소중히 여기고, 품격 있는 국가로서 실현할 수 있는 경제를 새롭게 구상해보자. 품격 있는 국가는 품격 있는 의식을 통해 구현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153)

이성복 새 시집 – 래여애반다라

빛에게 

빛이 안 왔으면 좋았을 텐데

빛은 왔어 

균열이 드러났고

균열 속에서 빛은 괴로워했어

저로 인해 드러난 상처가 

싫었던 거지

빛은 썩고 농한 것들만 

찾아 다녔어

아무도 빛을 묶어둘 수 없고

아무도 그 몸부림 잠재울 수 없었어

지쳐 허기진 빛은 

울다 잠든 것들의 눈에 침을 박고,

고여 있던 눈물을 빨아 먹었어

누구라도 대신해

울고 싶었던 거지,

아무도 그 잠 깨워줄 수 없고

아무도 그 목숨

거두어 줄 수 없었으니까 

언젠가 그 눈물 마르면

빛은 돌아가겠지,

아무도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곳,

그런 곳이 있기나 할까

아무도 태어나지 않고

다시는 죽지 않는 곳, 

그런 곳에 빛이 있을까 

 

– 이성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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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나면 반갑고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 

2013. 3. 

강권하고 싶은 책 – 백년만의 북 리뷰 :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해로운가

제임스 길리건 / 교양인 펴냄 / 13,000원

영어 원제는 Why some politicians are more dangerous than others. 
국내에서 처음 소개되는 학자인데, 미국에선 violence와 preventing violence를 집필하여 출간한 바 있는 정신의학자이다. 

 굳이 이 책들의 표지까지 갖다 붙인 것은 듣보잡이라고 공격할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소개 : 1966년부터 2000년까지 34년간 하버드대 의대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뉴욕대 정신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수십 년간 폭력 행동의 심리적 메커니즘과 폭력 예방책을 연구해 온 폭력 문제의 권위자이다. 
하버드대 법정신의학 연구소 책임자로서 1977년부터 1992년까지 매사추세츠 주 교도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폭력 예방을 위한 사회심리학적 프로젝트를 실시해 교도소 안의 살인율과 자살률을 획기적으로 떨어뜨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991년 하버드 대학에서 ‘폭력의 뿌리’라는 주제로 강의한 뒤 그 내용을 정리해 <폭력: 국가 전염병에 관한 성찰>로 펴냈다. 이 책은 폭력의 심리적, 사회적 원인을 분석한 문제작으로 꼽히며 지금까지도 폭력 연구에서 교과서적 저작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2000년에 클린턴 대통령의 요청으로 청소년범죄예방위원회를 총괄했으며, 2005년에는 국제연합(UN) 총회에서 발표된 아동 폭력에 관한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다.  – 알라딘 출처 

이 책은 폭력치사 (자살과 살인)와 각 정당의 집권기에 이상한 수치 변화가 있는 것을 관찰한 정신의학자의 보고서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사실과 수치를 토대로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에 집중한다. 


간단하게 말해, 제임스 길리건이 표시한 수치의 그래프는 다음과 같다.

공화당이 집권하는 시기, 폭력치사 수치는 상승한다. 

민주당이 집권하는 시기, 폭력치사 수치는 하강한다. 

이러한 공통된 통계가 나오는 이유는 두 정당의 정책 때문이다. 
사람들은 개인을 보고 투표하는 경우가 있으나 명백하게 정치인은 정당에 속해 있으며, 이 두 정당의 정책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폭력성을 증대시키기고 감소시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제임스 길리건이 대전제로 깔고 가는 것은 살인과 자살은 같은 종류의 폭력행위라는 것이다. 
사실 살인이라는 대범위안에 나는 타살과 자살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공격성이 내면으로 향하는 자는 자살을 하는 것이고, 외부로 나가는 사람은 타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정신의학자는 아니자만)
폭력성과 공격성을 띈 심리상태에서 타해(폭행)을 가하는 사람이 있고 자해를 하는 사람이 있다. 
이 것은 폭력과 공격성의 분출 방향이 다를 뿐이지 그 기저는 같다고 생각하는 바이므로, 나는 제임스 길리건의 대전제에 동의한다. 

저자는 책의 앞부분에서 이러한 여러가지 통계수치들을 이야기하고 책의 중반부에서 그 차이점이 벌어지는 이유를 말한다.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진영과 공화당으로 대표되는 보수진영의 차이점은 죄책감과 수치심의 차이로 정리한다. 언뜻 보면 이 두가지 심리는 같은 것으로 보이지만, 명백히 다른 심리상태이다. 


수치심의 윤리는 수치와 굴욕이, 다시 말해서 불명예와 치욕이 가장 큰 악덕이고 수치의 반대, 곧 자부심과 명예(존경)가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 체계다. 죄의식의 윤리는 죄가 가장 큰 악덕이고 죄의 반대, 곧 순결이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자부심 (교만)이다.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누르고 겸손을 품는 길의 하나로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하고, 반대로 수치심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끌어올리고 자신의 수치심과 열등감을 누그러뜨리는 길의 하나로 사회/경제적으로 우월한 신분에 있는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한다는 것이다. 


이 것을 좀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약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성향이 강하고 수치심의 윤리에 젖은 사람은 강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성향이 강하다. (132-133쪽) 


그러니, 이러한 성향이 정당 지지에 대해 확연한 차이점을 가져오는데다가 극 정당을 구성하는 인력들의 기본 정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보수정당은 경쟁을 부추키고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며, 중하류층과 극빈층을 이간질 시켜 상류층을 역으로 보호하는 정책 “이중정복(소수가 다수를 다스리는 로마의 대표적 정책)”을 사용한다. 


정치경제학자 더글러스 힙스는 이렇게 지적한다. “민주당 정부는 실업을 줄이고 성장을 끌어올리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팽창 정책을 추구하기 위해 높은 물가 상승률을 무릅쓸 가능성이 공화당 정부보다 높다.(중략) 1951년 이후 일어난 여섯번의 불황 중에서 다섯 번이 .. 공화당 정부때 일어났다. 이 경기 위축은 하나 같이 .. 인플레이션과 싸우느라 의도적으로 만들어졌거나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라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기업가집단이 상당히 폭력적이고 경쟁위주에 익숙해, 진보집단과의 윤리 도덕적 결정에 대해 상이한 차이점을 보이고, 보수집단은 기업가 집단과 유사함을 예로 든다. 다시 말해 이러한 보수집단은 폭력치사사건을 개인의 문제로 귀결시키는 반면 진보집단은 사회시스템의 문제로 공론화 시키는 경향이 크다는 주장이다. 

공화당 집권기에 폭력치사 사건이 증가하는 것에 대해 개인의 실업률과 빈부격차의 차이에 크게 주목하는데, 보수집단을 지지하는 지도를 그려봤을 때 옛남부(Old South)와 거친 서부(wild West)로 집중된다. 이것은 ‘카우보이와 인디언’이라는 역사적 유산과 상징과 결부된 주들이 여기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보수집단 – 권위주의적 인격 – 수치심에 젖은 사람 – 경계선 성격장애, 나르시시즘, 편집증, 반사회적, 우파권위주의의 인격구조 – 노예제도가 있던 11개 주(옛남부), 켄터키, 오클라호마 같은 2개 접경주, 서부 산악 주와 사막 주, 대부분의 중서부 대평원 

진보집단 – 평등주의적 인격 – 죄의식에 젖은 사람 – 우울증, 강박관념, 도덕적 마조히즘 유형 – 두 해안지역, 태평양 연안주와 북대서양 연안 주, 뉴잉글랜드와 위스콘신, 미네소타 (스칸디나비아 유산이 강한 북중부), 일리노이, 미시건 등. 

공화당은 경제에 강하고, 민주당은 경제에 약하냐에 대한 질문에 대해 
저자는 실업률과 실업지속도가 단 한 번의 예외없이 모든 공화당 정부때 올라갔고 모든 민주당 행정부 때 내려갔다는 것을 말한다. 
불황의 경우, 민주당의 불황은 86개월, 공화당은 246개월의 수치가 나타났으며 공화당은 정권을 잡은 동안 민주당보다 매년 2.3배나 더 긴 불황을 가져왔다는 통계수치를 이용한다. 
“공화당이 민주당으로부터 물려받은 단 한 번의 불황은 111년동안 1921년 단 한 번 일어났는데 겨우 4개월만에 끝난 반면, 민주당이 네 명의 공화당 대통령으로부터 물려받은 4번의 불황은 끝나는 데 모두 27개월이 걸렸다. “

말하자면 저자가 인용한 내용 그대로 “공화당 열성 지지자들로부터 높은 소득세, 높은 자본 이득세, 높은 법인세, 높은 사망(상속)세와 과도한 규제로 경제 성장을 질식시키는 경쟁자 민주당과는 달리 자기네 정당은 경제를 성장시키는 정당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것은 모두 개 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정책의 차이가 실업과 불황을 가져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개개인의 수치심과 죄책감을 증폭시켜 자살과 살인같은 폭력치사가 전염병처럼 창궐하느냐 마느냐의 여부를 결정짓는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다. 

저자는 상당한 진보주의자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정치적인 것보다는 이 사람은 정신의학자로서 폐쇄된 교도소에 대한 긴 연구기간, 그리고 인간의 폭력성에 대해 연구를 하다 보니 인간은 폭력에 노출될 수록 폭력적이 되고 (비폭력적인 범죄자를 가장 폭력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교도소 수감이다. 라는 주장) 그 폭력은 인간의 취약한 심리, 수치심과 죄책감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에 대해 연구를 지속하다 보니 이러한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연구가 민주당이나 미국내 진보세력들에게 상당히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은 뻔하다. 

책을 읽는 내내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이라고 생각해봤으나, 
기껏해서 50년 남짓 된 공화제 정부(민주주의라고 보긴 어렵다) 체제하에,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것은 말하자면 김영삼 정부때부터라고 볼 수 있는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고작 네 명의 대통령을 거치면서 어떤 특정한 통계를 갖기도 어려울 뿐더러, 이 중에 과연 진보정당이라고 할 것이, 김대중, 노무현..정부도 과연 진보정당집권기였는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혹자들은 박정희 시대에 경기부양책으로 인해 이 나라가 잘먹고 잘살게 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일일이 수치와 통계와 그 후의 벌어진 후폭풍 (지금까지도 이어지는)에 대해서 구구절절이 설명하고 설득하려면 2-3일 가둬놓고 가르쳐도 모자랄 판이다. 게다가 이 나라에서 이제서야 갑론을박 하고 있는 진보타령에 대해서도, 사실 진보.. 라기 보다는 중도진보..라든가 대부분이 보수우파인 나라에서, 과연 좌파..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가. 이건 물론 상대적인 기준을 갖다 대면, 우리나라에서 그만하면 좌빨진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좌파의 원류인 유럽에 갖다 대면 당신은 국수주의자요. 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 상황이니 적용하긴 어렵다. 

그러나! 

최근들어, 불거지는 여러가지 이익집단(이라고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겠다만, 개개의 분열된 사회문제들)들의 갈등에 대하여, 공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진보적 성향을 띈다.이 현상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진보들은 “공감능력이 뛰어나게 발달한 사람들”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데, 제임스 길리건은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약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성향이 강하다고 정리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경쟁을 선호하고 강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본인은 전혀 상류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저 수치심을 더 강하게 느끼는 성향을 타고 났거나, 살면서 발달된 것일 뿐. 그게 옳고 그름의 문제로 치부하긴 어렵다는 것이지만, 
사회가 적어도 살만하게 돌아가려면 보수집단의 집권이 그닥 유리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 2010년에 발표된 이 나라의 통계 하나를 적어보겠다. 

한국인 2010년 한 해동안 1만 5,566명 자살, 
인구 10만명당 31.2명 자살 OECD 1위, 
세계 2위(1위가 궁금한가. 1위는 리투아니아였다. 평균 남성 70명, 여성 14명이 자살한다고 한다. 
10-30대 사망원인 1위 자살, 
출산율 222개 나라중 217위

이 책을 번역한 이희재씨의 글이 읽을 만 하여 뒤에 적으며 글을 마무리하겠다. 

“분할 정복 전략이 주효하려면 범죄율이 높게 유지되어야 한다. 범죄는 주로 못 사는 사람이 저지르고 그 피해도 주로 못 사는 사람이 입는다. 잘사는 사람은 사설 방범업체가 철통같이 지켜주므로 범죄율이 올라가도 피해를 별로 보지 않는다. 절대 다수의 못사는 사람들은 범죄에 그대로 노출되므로 범죄를 저지르는  똑같이 못사는 사람에 반감을 품고, 말로만 범죄 엄단을 내세우는 공화당을 찍게 마련이다. 

길리건 박사는 미국의 중산층과 서민 99퍼센트가 좀 더 사람답게 살려면 1퍼센트의 분할 정복 전략에 휘둘리지 말고 어떤 당이 99퍼센트를 위한 정책을 내놓는지를 보고 투표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중요한 것은 정당이 추구하는 정책이지 인물이 아니다. 

[2010년 통계 인용] 한국은 잘 사는 사람에게는 천국이고 못 사는 사람에게는 지옥임을 높은 자살율과 낮은 출산율이 말해준다. 

자기 목숨을 끊는 행위를 지금은 자살이라고 하지만 예전에는 자진(自盡) 이라는 말을 썼다. 진이 빠져서 당하는 죽음, 어쩌면 한국인의 자살은 배경없고 힘없는 개인에게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안기면서 극단적 경쟁을 강요하고 소수의 상층부에게는 권력과 금력의 무경쟁 세습을 무한정 허용하는 불공평한 경쟁 지상주의 사회에서 버틸대로 버티다가 탈진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택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2012.2.28.

총선이 얼마 안 남았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민주통합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다. 
아 물론 당명을 바꾼 새누리당도 절대 진보정당이 아니다. 
여기까지. 

황천의 개 – 후지와라 신야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492529

신야의 책은 처음이다.
제목이 맘에 들어 골랐다.
황천의 개라니 이렇게 냉소적일 수 있는가.

후지와라 신야가 <청년플레이보이>지에 실었던 에세이를 묶었다.
그는 아사하라쇼코라는 옴진리교 교주에 대한 탐색으로 시작하는데
그가 미나마타병의 희생자였다는 친형의 증언을 진즉에 얻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친형이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약자가 되었다는 입장을 고려해, 만코(쇼코의 형)가 죽은 다음에 글을 완성해 책을 묶어냈다.

뭔가 연결이 되지 않는 듯한 몇 편의 글이지만 그 중심은 같다.
후기산업사회에 아주 일찍 돌입한 일본의 오늘을 지배하는 철학(?)과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 할 것인지 그의 존재 자체가 말해준다.

젊을 때 떠났던 인도의 여행에서 얻어온 것들과 삶과 죽음, 진실과 허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마치 비슷한 시절 인도를 다녀온 후지와라 신야의 삶과 아사하라 쇼코의 삶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읽고 나서 퉁 – 하는 책이 있다.
이 책이 그런 책이다.

2011. 11. 27.

건국의 정치 – 김영수


철학적인 의미에서 정치 공동체의 궁극적 목적은 ‘잘 먹는 삶’이 아니라 ‘좋은 삶’이다. 
그러나 생존이라는 측면에서 국가는 ‘필요’의 영역이며, 필요중 가장 일차적인 것은 ‘식량’이다.
중국의 전통적 사유에 따르면, 백성의 복질은 ‘욕망을 가진 존재’이다. 
그렇게 때문에 유가에서는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으며,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라고 주장했다.
또는 “먹는 것은 백성의 근본이요, 백성은 나라의 바탕이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토지는 백성의 하늘이다.
이 때문에 맹자는 仁政은 밭둑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국가의 ‘선’은 백성들의 필요를 얼마나 만족스럽고 정의롭게 해결하느냐에 좌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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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시대란 반드시 토지 소유의 극심한 불균형과 때를 같이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시대의 반란 세력이 고창한 정치 이념은 공통적으로 균평(均平)이었다. 공자 역시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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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공민왕의 말처럼, 고려는 대규모 전쟁을 승리를 이끌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왜구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였다. 즉 고려 정부는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에서 한계에 도달했던 것이다. 국가는 백성들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을 보장할 수 없었으며, 생활을 개선할 능력도 없었다. 따라서 왜구 문제의 개선은 개혁파들의 국가 운영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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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何同心友(부하동심우)  마음을 같이한 벗이
各在天一方(각재천일방)  하늘 한구석에 각각 있는지
時時念至此(시시염지차)  때때로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不覺今人傷(불각금인상)  저절로 사람을 슬프게 하네.


鳳凰翔千仞(봉황상천인)  봉황새는 천 길을 높이 날아서
徘徊下朝陽(배회하조양)  돌고 돌아 조양으로 내려가는데
伊人昧出處(이인매출처)  이 사람은 출처에 너무 어두워
一動觸刑章(일동촉형장)  한번 움직이면 법에 저촉 저촉되누나.


芝蘭焚愉馨(지난분유형)  지란(芝蘭)은 불탈수록 향기 더하고
良金淬愉光(양금쉬유광)  좋은 쇠는 갈수록 더욱 빛나는 것
共保堅貞操(공보견정조)  굳고 곧은 지조를 함께 지키며
永矢莫相忘(영시막상망)  서로 잊지 말자 길이 맹세를 하세.




[출처] 次韻寄鄭達可夢周(차운기정달가몽주).鄭道傳(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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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재는 자신의 은거가 단지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키는 것 이상으로 유학의 순수한 정신을 보존하기 위한 것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치가 진리와 분열될 때 취하는 제 2의 태도이다. 한말의 유학자 전우(田愚) 역시 망국을 당하여 제자들과 함께 서해의 고도로 떠났다. 
(중략)


그들 모두는 엄격한 의미에서 이상주의자였으나, 역사는 항상 순수한 전형만을 미래의 것으로 남겨놓는다. 그러나 신은 이 세계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두 종류의 제물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순결한 제물이며, 다른 하나는 상처받은 제물이다. 


순결한 제물은 역사의 성화(聖火)를 위해, 상처받은 제물은 역사의 현실을 위해 소용된다. 인간은 상처받은 제물 역시 신의 현현임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신의 순수성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신의 고뇌를 이해한다면, 인간은 상처받은 제물을 위한 변명의 자리도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역사에서 상처받은 자들을 위한 역사의 작은 위로라고 생각한다. 


– 김영수 “건국의 정치” 마지막 문장.






가끔 남들에게 막 강요하고 싶은 책이 있다. 
이번에 읽은 김영수 쓰고, 이학사에서 펴낸 건국의 정치:여말선초, 혁명과 문명 전환이 그러한 책이다. 


조선의 건국 이전 고려말기의 상황을 일일이 꼬집어 보되 
정치학 전공자 답게 정치학적 관점에서 풀이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엄청나게 많은 문장들이 적용된다. 


문학적인 미려한 문장과 깊이 있는 통찰의 철학이 매력적이다. 
약 800여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흥미있는 사람이라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2011.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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