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활자 잔혹극 – 루스 렌들
영국 미스테리 소설의 거장 루스 렌들의 <활자 잔혹극>은 1977년작이다. 한국에는 북스피어 출판사가 2011년에 소개했다. 끌로드 샤브롤의 영화 “의식(儀式)”의 원작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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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스 렌들 (지은이) | 이동윤 (옮긴이) | 북스피어 | 2011-11-25 | 원제 A Judgement In Stone (1977년) |
오만의 유혹, 세계의 파멸
소설의 첫 문장은 도발적이다. 사건의 결과를 내던지고 시작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자 이런 일이 있었어. 그 속에 숨은 이야기를 내가 지금부터 잘 설명할텐데, 듣고 싶으면 듣고 아님 말어’ 라는 태도로 보인다. 소설은 살인사건의 범인을 밝히고 시작한다. 독자가 찾아내야 할 것은 그 원인이다. 문맹인 가정부가 지식인 가족을 살해한다. 그 곁에는 광신도인 미치광이가 하나 붙어 있다.
주인공은 사회와 격리된 채 살아왔다. 문맹이라는 건 제도권 교육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며 누구도 이 주인공을 살뜰하게 보살피거나 주인공의 미래를 진지하게 염려한 적 없다는 말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나, 이 글을 읽는 당신이나, 문맹이 느낀 수치심은 과연 어떤 것인지 사실 잘 알 수 없다. 글을 알기 때문에 전혀 알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 마지막 해제에 장정일이 적은 발문이 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약간의 단초가 된다. 영어권 국가에 갔는데 말을 한 마디도 못해 죽고 싶은 심정이 들었던 적 있다면. 이라는 부분을 읽으니 개인의 경험이 생각났다.
10년도 훨씬 더 전에 공부를 하겠다고 중국대륙으로 갔다. 중국어는 학원을 몇 달 다녔지만 사실 한 열 마디 정도 하는 게 전부였고, 영어가 어느 정도 통하겠거니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하며 대책없이 떠났다.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부터 난감한 상황이 펼쳐졌다. 나는 영어로 된 호텔명만 알고 간 것이고, 내가 아는 주소도 영어로 된 것이라 발음이 명확치 않았다. 택시기사 한 명에게 호텔명을 댔더니 공항에 줄 지어 서 있는 택시기사 수십 명이 몰려들었다. 그 땅은 영어는 통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새로운 단어는 중국어로 바꾸어 말했고, 내가 도착한 상하이라는 도시는 사투리마저 심해서 어학연수 기간 내내 표준어를 배워봤자 벙어리나 다름없었다. 말도 글도 안 통하는 몇 개월을 보내며 어릴 때 본 중국무협드라마에서 본 이미지가 떠올랐다. 팔다리가 다 잘려서 항아리속에 목만 내밀고 살아있는 반역자의 모습이었다.
이후, 말을 떼고 글을 배우고 알량한 글밥으로 공부를 했을 때의 심정은 좌절감, 열패감, 소외감, 박탈감, 온갖 부정적인 감정표현명사는 다 갖다 붙여도 무방하다.
나의 개인적인 체험이 설마 주인공의 감정을 반푼어치라도 이해할 수 있게 만들까?
아닐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평생을 문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온 것이다.
주인공에게 문맹이라는 건 치명적인 비밀이요 상처다. 불행하게도, 주인공은 숨기고 싶은 상처를 후벼파는 대상들에 둘러싸여 산다. 결국 주인공은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
작가는, 주인공의 이 문제가 그저 감정의 것으로 건드리고 넘어가지 않는다. 한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문화전체와 문자라는 기표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문자로 둘러싸인 삶과 지식인연 하는 것과, 타인의 삶을 통제하려고 드는 기득권층의 계급성을 두고 문화의 차이로 인한 삶이 달라지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질문을 던진다. 문화수혜자와 문화박탈자의 경계는 또 다른 계급갈등으로 이어진다. 한 사람이 어떤 삶을 꾸려가는가는 사실 의지의 문제와 동떨어질 수도 있다고 말한다.
언어의 기의도 누구에게나 동일하진 않다. 굳이 성문화하지 않은 약속이 있다고 치면, 언어의 기표는 특별한 교육을 거쳐야 습득할 수 있다. 근대교육은 분명 특별한 영역이다. 그저 너무 흔해서 보편화된 것처럼 보일 뿐,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문맹이 아닌 이들이 말하는 보편이나 평범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본인이 기득권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기득권들의 놀음은 아닐까.
예를 들어, 쪽방촌에 사는 70대 이상의 노인들은 메모를 길게 하지 못한다. 문자습득이 순탄하지 않았고 문자는 그저 명사, 이름씨로 존재하지만 문자를 사용해 감정이나 생각을 전달할 정도의 문자 습득력은 없다. 이것은 문해력과 바로 직결되는데 타인의 기표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하며 평생을 살아가게 되면 온전히 사람의 표정과 어투, 말씨를 통해 세상을 이해할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휘갈겨대는 수많은 문자를 보며 온통 어지러운 세상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글씨는 쓸 줄 알지만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엉망이었다. 이 사람은 초등학교를 3년 정도 다닌 게 학력의 전부였다. 가정내 폭력으로 가출이 아닌 구출을 받아, 어릴 때부터 남의 집 살이를 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의 남편이 문맹인 거 같다고 나에게 고백한 적 있다. 그 남편은 고아로 보육원에서 자랐고 역시 초등학교를 다 마치지 못했다. 결혼 후 모든 공기관과 은행 업무를 이 사람이 도맡아서 했는데 남편은 글자를 써야 하는 상황이 예상되기만 해도 짜증을 부리고 포악을 떤다는 것이다. 남편의 얘기를 전하던 그는 모르면 모른다고 할 것이지 포악을 떨 게 뭐냐고 투덜댔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문맹이라는 이유로 살인을 저지른다는 개연성을 생각해보면 아감벤을 떠올릴 수 있다. 조르주 아감벤은 <호모사케르>에서 “만일 오늘날에는 명백하게 규정된 하나의 호모 사케르의 형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라고 말했다. 루스 렌들이 말하는 문맹이라는 형상은 그저 여러 종류의 호모 사케르 중 하나일 것이다.
문해자들은 문맹을 보면 가르치려 든다. 문맹자의 의지박약을 말할 것이고 동정하고 연민하며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겠다고 안달을 할 것이다. 타인을 가르치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성실히 살지 않고 있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인간이 많다. 과연 그것이 인간이 인간에게 해도 되는 행동인가? 존엄의 문제와 과연 무관할까? 이는 통제의 한 방편이거나 폭력의 묘한 양상은 아닐까?
주인공의 이름은 유니스다. 유니스가 살인을 저지른 것은 한 존엄한 존재가 가진 온전한 세계의 침탈을 꿈꾼 한 가족에 대한 인간으로써의 저항일 수도 있다.
“유니스는 숨쉬는 돌이었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라는 문장이 눈에 띈다. 유니스는 문자가 필요 없는 원형 그대로, 문화가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특정한 세계, 요컨대, 자연계의 상징으로 보였다.
영어 원제는 A Judgement In Stone이다. 위에 소개한 문장이 그 핵심문장이 되는 셈이다. 사전을 다시 뒤져 in stone을 확장해 찾아보면 carved in stone이라는 관용어구가 나온다. 변경불가능한, 이라는 뜻이다. 돌은 그런 것이다. 돌에 새긴 심판, 이라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말할 것이다. 문맹 너머, 유니스라는 한 개체가 가진 특질과 그 개체가 40년간 흡수해 온 문자를 제외한 사회문화의 많은 것들이 상징하는 바일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지울 수 없는, 변경 불가능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떠한 세계.
조선 후기 문인 김려(1766-1821)는 사유악부(思有樂府)에서 ‘세상이 어지러워 화 당하기 쉬우니 글짓기를 조심하라’고 전했다. 글짓기나 글쓰기가 과연 세상이 어지러울 때나 조심해야 할 일일까. 우리는 글 속에 파묻혀 얼마나 많은 것을 돌아보지 못하고 오만을 떨며 죽어가는가. 배운 것이 탈이고, 아는 것이 병이로다. 무수히 부딪히는 세계와 세계의 충돌, 그 사이에 벌어지는 크레바스 같은 파멸은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작가의 의지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래 읽히는 작품은, 늘 온당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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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 Ceremonie, 1995 | 감독 : 클로드 샤브롤 Claude Chabrol | 주연 : 상드린느 보네르(Sandrine Bonnaire), 이자벨 위페르 (Isabelle Hupper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