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적 골목의 풍경

나 보광동 살 때는 집안에 들어와 앉아 있던 놈도 있었어.
반지하 창문 열어놨는데 안방에 마당 수도 틀어서 물 뿌린 놈도 있고,
샤워하는데 목욕탕 창문 여는 놈도 있었어.
그 놈 잡겠다고 머릿수건 두르고 나가서 112 불러 골목에서 내가 아는 온갖 욕을 해제꼈어. 동네 아줌마들이 튀어나와 아가씨 입 한 번 걸죽하다며 박수 쳐줬어.
알잖아 내가 욕 좀 하는 거.

어떤 씨발 개좆같은 새낀지 걸리기만 해봐라 자지를 잘근 잘근 잘라서 젓갈을 담가 니 아가리에 쑤셔 넣어줄테다. 목구녕에서 피를 토할 때까지 발라줄라니까 당장 나와 이 씹새끼야. 좆만한 새끼 어디 비겁하게 좆도 아닌게 나한테 이 지랄을 해?
개좆만도 못한 새끼니까 샤워하는 거나 훔쳐보고 지랄이지 씨발놈아 모가지를 산 채로 따버릴라니까. 내장을 꺼내서 줄넘기를 해버릴라니까.
씨발 새끼 좆을 다 까서 포를 떠버릴라니까 당장 나와!!

경찰이 와서 나를 말렸어.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하래.
10분 정도 씨발 소리를 수백번은 했을거야.
하도 쉬지 않고 이 목소리로 욕을 해대니까 경찰이 찾아보겠다고 막 움직이더라.

내가 용감해서 소리 질렀을까?
작은 강아지가 큰 개보다 많이 짖어. 딱 그 수준인거지.
나는 무서우면 욕을 해. 눈물보다 욕이 먼저 나와.

경찰이랑 그 새끼가 튄 곳을 찾아 동네를 다 뒤졌어. 연립주택과 다세대 주택 사이에 여자 빤스만 한 무데기 쌓여있더라. 나는 그 동네가 그런 동네인지 알았지.

내가 그때 스물 넷이었어.

대흥동 살 때는 밤에 자고 있는데 방안에 들어와서 불 끄는 놈이 있었어. 불이 딱 꺼지니까 잠에서 깬거야. 동생이랑 나는 반사적으로 자다 일어나 그 새끼 목덜미를 잡았어. 도망가더라. 머리채는 모자를 썼으니 안 잡히고 사람을 잡는다는게 셔츠를 잡았는데 셔츠 단추가 다 튿어져서 도망갔어. 역시 경찰을 부르고 일주일 넘게 경찰이 와서 순찰을 돌았지.

보광동에서도, 대흥동에서도, 경찰이 뭐랬는지 알아?
여기는 워낙 아가씨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이런 일이 많다는거야. 그래서? 그러면 순찰을 더 도셔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서울시내에서 이렇게 골목 많은 데가 없대. 장난해? 강북에 온 동네가 그런 골목이야. 경찰이 일주일 열흘 와서 순찰 돌아주긴 했어. 나는 파출소 번호를 전화기에 입력해놓고 수시로 전화를 걸어서 나 지난 번에 그 여자인데 요즘 순찰 안 도시냐고 묻곤 했어.

용감했다고?
만약에 걔들이 칼을 들었으면?
잠든 내 동생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 새끼가 염산을 들었으면?

용기가 필요해?
그런 건 필요치 않아.
난도질 당하고 죽지도 못한 채 살아남을 수도 있는 문제야.

나이 먹을 만치 먹고 애 낳고 평촌에 와서 살 때야.
아파트 벤치에 앉아 있는데 펜스 건너편에서 어떤 남자가 뭘 물어. 몇 가지 대답을 해줬더니 그 새끼가 뭐랬는지 알아?
아줌마 나랑 연애 좀 할래요?
미친 호로새끼 내가 왜 니랑 연애를 해?
질문에 대답해주면 연애하냐?

세상에 그런 새끼가 다 있냐니.
수두룩 빽빽한 게 그런 새끼들이야.

어떤 심정이냐고?
내 눈에 안 띄었으면 좋겠어.
모조리 다. 사라지라고.

2019. 6. 1.

 

누군가에겐 낭만적으로 보일, 보광동의 골목 (2014년 9월)

맥락 없는 두 가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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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구를 배우고 싶다는 아이에게 큣대를 바이올린 활이라 생각하라고 말했다. 왼손으로 지판을 잡고 오른손은 힘 있되 유연하게.
오랫만에 큣대를 잡아보니 정말 그랬다. 우연하게 비슷한 원리들이 있다. 어깨에 힘을 뺀다거나, 손목의 스냅을 이용한다거나, 손가락의 안 쓰던 근육을 쓴다거나.

물론 중딩은 바이올린 활을 어떻게 잡는지 모른다고 기억나지 않는다고 투덜댔다.

생각해보니 바이올린 레슨 받은지가 꽤 되었다. 4년 되었나. 지금은 스즈키 7권까지 하다가 다음 단계는 너무 어렵고 지루해진다며 모짜르트와 하이든 콘체르토를 연습하고 있다. 어디가서도 절대 연주할 수 “없는”, 독보적인 소리를 자랑할 수 있다. 그동안 레슨은 대여섯 번 정도 빼먹은 듯 하다. 선생님이 꾸준히 와주시니 나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했고, 그러다 보면 시간이 쌓인다.

친구가 다시 진료를 잘 받겠다 결심한 걸 칭찬했다. 갑자기 정신분석을 30개월 받은 게 떠올랐다. 그 긴 걸 어찌 했나. 빼먹은 건 두 세번 정도였다. 지금도 수요일 오전 10시는, 어딘가 가야 하는 낙인 같은 게 느껴진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지치고 때려치우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중단하면 언제 죽어도 모를 거라 했던 것 같다.

어젯 밤엔 세수를 하다가 지역사회에 일하기 시작했을 때는 내가 30대였다는 걸 깨달았다. 지역교육네트워크 이룸 사무국장입니다, 라고 처음 말한 건 2014년이었다. 2012년 관양시장을 처음으로 지금까지, 나는 어느 덧 마흔 다섯이 되었다.

아지를 처음 만난 건 2004년이고, 설이를 처음 만난 건 2010년이다. 시간은 알 수 없는 속도로 흘러가고 나는 쌓여가는 책을 바라보며 한숨 쉰다. 적당히 내 엉망인 일상을 외면하면서 천천히 먼저 간 자들의 길을 따라간다.

2.
수 년만에 돈의동 골목을 찾아갔다. 복지관의 간판이 바뀌었고 복지관 바로 앞에는 새로 기념패를 만드는 가게가 열렸는데 오늘이 개업식이었나보다. 각종 모터사이클 클럽에서 보낸 화환이 줄을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의 화분과 멋진 오토바이를 구경하다가 골목을 돌아나왔다.

오늘 창신동에서 만난 할매들은 “여 와서 산지 얼마 안돼”라고 했다. 얼마나 되셨나 물었더니 얼마 안된다는 게 45년이라 했다.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 45년은 얼마 안 되는 걸로 느껴질까.

무엇이 그리운지 잘 모르겠다.
가끔은 아무 것도 없었던 거 같기도 하다.

새로 산 두 권의 책이 바닥에 그대로 있다. 마을장터 행사의 가방을 아직도 풀지 않았다. 과거는 그대로 남는 것일까 미래와 만나 변하는 것일까.

마을과 골목에 대한 원고를 준비중이다. 내가 살아온 수많은 골목들을 떠올린다. 동자동의 엄지만화방 골목, 며느리가 목 매달아 죽었다는 마당 넓은 집의 보광동 골목, 다다다다 내 발걸음 소리가 크게 들리던 성북동의 언덕배기 낙원 아파트 골목, 안개꽃을 들고 나를 기다리던 남자친구의 손을 잡아 본 사춘기의 신창동 골목, 삐딱구두를 신고 계단을 내려가던 이모를 놀렸던 삼양동 골목, 폭염에 일사병으로 쓰러진 동생이 구급차를 탄 대흥동 골목, 무지개빛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가 미군의 높은 목에 팔을 감던 의정부 골목, 엄마가 달리던 골목, 매를 피해 달아난 샘표간장 뒷동네 골목, 그 수많은 골목을 모두 뒤에 두고 와서, 그립다 쉽게 말하기도 어렵다.

살아있는 자들은 모두 어디에 숨었나.

2019년 6월 1일

성수동 1가

성수동1가.
복지관이 있는 건물은 여러 기관들이 모여있다.

재활의원, 아트홀, 종합사회복지관, 구립성수도서관. 1층에는 서가가 있어서 공공도서를 꺼내볼 수 있고 2층에도 큰 서가가 있어 다양한 책들이 꽂혀 있다. 북까페도 있어서 커피 한 잔 마시며 모임도 하고 책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

이 건물로 가는 길은 조금 특별한데, 길 한쪽에 쿠팡 물류센터가 있다. 택배 차량들이 수시로 드나든다. 오늘 이 복지관에 가는 길에 마늘을 파는 트럭을 지나쳤다. 그리고 복지관 앞에 세 대의 트럭이 서 있었다. 한 대의 트럭은 과일을 팔고 있었고 팔을 벌린 사람이 세 사람쯤 서 있으면 될 만한 거리에는 다섯 켤레에 3천원 하는 양말을 파는 트럭이 있었고 그 한쪽 끝에는 찹쌀도너츠를 파는 트럭이 있었다.

수업은 1시 시작인데 할매들은 11시부터 나와 이미 2시간동안 글자공부를 하고 있을 것이다. 30분 일찍 도착해 10분 전에 교육장소의 복도로 간다. 작은 틈새공원에 벤치가 비어 있어 잠깐 바람을 맞고 앉아 있었다.

찹쌀도너츠를 만들어 파는 사람들은 남녀였다. 얼핏 보기에 나보다 어려보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부부일까? 또는 남매일지도 모른다. 혈연관계일거라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소득의 크고 작음을 떠나 무척 고될 것이다. 하루종일 바깥바람을 맞으며 길에 서서 일하는 것은 정말 고단한 일이다. 나처럼 모니터 앞에 앉아 자판이나 두들기는 족속들은 견디지 못하는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길에서 주전부리를 만들어 파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곤 한다. 나는 범접하지 못할 삶의 부지런함에 경탄한다. 새벽에 일어나 식재료를 준비하고 이른 아침 차를 끌고 밖에 나왔을 것이다. 남은 식재료는 오래 두지 못할 것이고 그날 준비한 분량을 다 팔지 못하면 손해가 날 것이다. 화장실도 참고, 밥 먹는 것도 참고 일을 해야겠지.

남대문시장의 기업은행 앞에 가면 호떡을 파는 부부가 있었다. 2년전일이다. 그 부부가 거기서 호떡장사를 한 지 꽤 되었다고 들었다. 재작년 거기서 호떡을 사며 건빵이가 남자에게 물었다. 식사는 하고 일하십니까. 남자는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점심은 거른다고 했다. 준비한 호떡을 다 팔면 집에 돌아간다고 했다. 여자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내내 호떡을 빚고 있었다. 침 삼킬 시간도 없어보였다.

고된 일을 같이 할 수 있는 건, 식구이기 때문이겠지. 식구란 그런 것이니까.

소박한 거리에 앉아서 나는 넋을 놓고 그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부끄러워졌다. 부끄러워진 나머지 포켓몬고를 열고 체육관 배틀을 시작했다. 외면하는 것은 편리한 방법이다.

이 거리의 어딘가에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쓰는 소설가가 살고 있는데, 조만간 같이 점심을 먹자고 청해야겠다. 근처에 형부식당이라고 5천원짜리 카레를 만들어 파는 집을 봤는데, 무척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음식을 만들 것만 같았다. 부지런히 새벽부터 음식을 준비할 사람들에게 돈을 내고 밥을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삶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따위는 아무리 생각해도 허망하고 가소로운 일이다. 팔과 다리를 움직여 노동하지 않는 자가 인생을 논해도 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나의 안온한 삶이 언제나 부끄럽고 부끄럽다.

 

2019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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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도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네 

메리 크리스마스

두 아들이 뇌전증을 앓고 있는 백씨는, 오전 내내 터진 수도를 고쳤다.
집주인에게 연락을 해봤자 안 좋은 소리를 해댈게 뻔했다.
관리를 잘 못해서 그렇다느니, 날씨가 이렇게 추우면 알아서 수도관을 보온해야지 뭘 했느냐고 말할 사람이다.
날이 추워지자 집안은 온통 한기다. 다 큰 아이들의 옷은 무겁고 두껍다. 한 겨울에 쪼그려 앉아 다 장성한 아이들의 빨래를 하고 있으면 어떻게든 생각을 끊어버려야 한다. 생각을 하면 안된다. 아파트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 사시사철 뜨거운 물이 나온다던데. 수도세도 훨씬 싸게 나온다는데.
미리 미리 준비를 했어야 한다던데 그 긴 세월 빚을 갚느랴고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2월에 졸업을 하는 작은 아이는 복지카드가 있으면 장애인작업장에라도 취업을 할 수 있다. 약만 꾸준히 먹으면 직장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은 아이는 그래도 큰 아들보다 나으니까.
엊그제는 아랫집 사는 미친년이 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자기 털신을 아들이 훔쳐갔다고 지랄을 해댔다. 이사온 지 몇 달 된 저 미친년은 억센 부산사투리를 쓰며 뻑하면 우리집 애들이 자기 물건을 훔쳐갔다고 지랄이다. 대문 앞에 새 밥이고 고양이 먹이를 가져다 놔서 안 그대로 지저분한 동네를 더 엉망진창을 만든다. 이 동네 십년을 살면서 누구하고도 깊게 말 섞어 본 적이 없는데 저 여자 때문에 모든 평화가 깨졌다.
“다 늙어빠진 여자 털신을 젊은 아이가 왜 훔쳐가는데요?” 백씨는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댔지만 미친년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내가 아줌마 털신 신고 다니는 꼴을 한 번도 못 봤는데 무슨 털신을 훔쳐갔다고 합니까? 아줌마 맨날 그 분홍색 목욕탕 쓰레빠 신고 다니는 거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아요!”
미친년은 보라색 덧신에 분홍 목욕탕 쓰레빠를 신고 있었다.
“그럼 누가 가져갔는데! 내 털신을! 느그 아들 말고 여기 내꺼 훔쳐갈 사람이 또 있나! 직업도 없이 빈둥거리고 있으니 남의 물건이나 탐내는 거 아이가!!!”
미친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경찰이 왔다. 한 두번이 아니다. 순경들이 아랫집 여자가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걸 보고 한숨을 쉬더니 여자를 데리고 갔다.
경찰서에 도착한 홍씨는 윗집 아들이 털신도 훔쳐가고, 전화기도 훔쳐갔다고 다 털어놓았다.
삐쩍 말라서 눈을 까리하게 뜨는 게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저 위쪽에 사는 양희자는 내 돈을 훔쳐갔어요.”
홍 씨는 경찰에게 떠들어댔다. 경찰이 볼펜을 들고 뭔가를 끄적끄적 적었다.
“그래서 잡아줄껍니꺼?”
“뭘요?”
“그래서 내꺼 찾아줄껍니꺼?”
“아주머니. 네 일단 알겠는데요. 증거가 있어야 이걸 수사를 할 수 있거든요. 그 앞에 방법 CCTV가 있으니까 저희가 좀 찾아는 볼께요. 이제 집에 돌아가셔서 쉬세요.”
순경이 홍 씨에게 비타민음료수를 까줬다.
“내가 아가 없어요. 내가 여태까지 아새끼 하나를 못 낳아봤다 아임니꺼. 그래서 저렇게 나를 무시하는 게라니까요.”
“아이고 그럴 리가 있나요. 아무튼 아주머니 날씨도 추운데 들어가셔도 돼요. 저희가 털신 찾게 되면 알려드릴께요.”
“꼭입니더. 내 털신 찾으면 알려주이쏘.”
홍 씨는 파출소에서 나와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갔다.
며칠 전 복지관 프로그램에서 만났던 상주여자가 길 한 복판에 멍하니 서 있었다.
“행님. 여서 뭐합니꺼?”
말을 건 홍 씨는 입을 닫자 마자 아차 싶었다. 괜히 말을 걸었다. 엄한 소리나 해 댈텐데 쓸데없는 짓을 했다.
“아, 저를 아십니꺼?”
상주 여자가 홍 씨를 첨본다는 듯이 대답했다.
홍 씨는 번쩍 머리가 시원해졌다.
“아입니더. 사람을 잘못봤심더. 미안합니데이.”
“아 그란데 내가 여기 복지관을 가야 하는데 입구가 어딘지 혹시 아시니껴?”
“여가 복지관 아니라요? 여 계단 올라가이소마.”
홍 씨는 손으로 복지관 입구를 가르쳐줬다.
완전히 미쳐가는구마. 홍 씨는 생각했다.
갈수록 태산이구만. 제정신이 아닌 거 같더니 나날이 심해지는 것 같다.
한 늙은 남자가 홍씨를 가만히 봤다. 홍 씨는 기분이 나빠져서 집 앞에 침을 퉤 뱉고 초록색 대문을 쾅 닫았다.
별 시덥잖은 노인네들이 다 지랄이고 지랄이. 홍 씨는 목에 건 수건을 들고 일바지의 아랫단을 툭툭 털었다.
홍 씨를 바라보던 노인은 복지관으로 들어갔다. 로비에 상주 여자가 서 있었다.
노인이 인사를 했는데도 상주 여자는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반찬도시락 서비스를 다시 받으라고 복지사가 전화를 해왔었다.
담당 복지사는 오늘도 눈을 초승달처럼 꼬리를 말고 웃었다.
“저기, 선생님.”
“네 아버님.”
“제가 지금 오다가 그, 우리 프로그램 같이 했던 상주 아주머니하고, 부산 아주머니를 봤는데 말입니다.”
“네.”
“근데 저를 못 알아보시는 거 같더라고요.”
“아……. 가끔 그러세요.”
“하이고 이런.”
“네 좀.. 최근들어서 잦아지시는 거 같아요. 방금 보셨어요?”
“네. 부산아주머니는 전혀 못알아보는 거 같고. 상주 아주머니는 로비에 아주 이상하게 서 있던데.. “
“저희도 걱정이네요.”
신 노인은 복지사에게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서류를 다시 확인해주고 피아노연습실로 향했다.
젊은 사람들이, 벌써부터 정신줄을 놓기 시작한다니. 입이 썼다.
복도에서 식당에서 자원봉사 하는 김 씨가 아는 체를 했다.
“어르신 오늘 동지라 팥죽 했어요. 이따 꼭 식사하고 가세요.”
교수 부인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인지 참으로 사람이 기품있고 차분하다.
“네 여사님 고맙습니다.” 신 노인은 허리를 숙여 깊이 인사하고 피아노 교실로 들어갔다.
신 노인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선 김 씨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문이 열리자 휠체어를 탄 청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보호자도 없이 혼자 휠체어를 능숙하게 밀고 사무실로 향했다. 김 씨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서 있었다.
병원에 누워 있는 둘째집 조카가 생각났다.
여름에 교회 수련회에 갔다가 수영장에서 머리를 다쳐 지금 병원에 누워 있은지 6개월째다. 목 아래로 아무 것도 움직이지 못하게 된 스물 네 살의 조카는, 제 누나가 휴직계를 내고 병간호를 하고 있다. 조카가 물리치료를 받는 모습을 보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그 이후로 병원에 한 번도 못 간게 석달째다. 우리 조카도 언젠가 일어나서 휠체어라도 탈 수 있게 될까. 그래도 막내 동생처럼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린 건 아니니 다행인걸까. 김 씨는 손에 쥐고 있던 고무장갑을 으스러지라 꽉 쥐었다.
조카네 강아지는 잘 자라고 있을까. 큰 조카가 맨날 병원에 있으면 강아지는, 혼자 집에 있게 되는걸까. 1년동안 해외를 나간다 해서 잠시 키워줬던 그 강아지라도 다시 데려올까. 강아지 이름은 메리다. 촌스럽기도 하지. 어쩌면 요즘애들인데 개 이름을 그리 촌스럽게 지었을까. 메리를 몇달이라도 맡아 키우면, 그러면 조카의 병실에 갈 수 있을까.
같이 식당 봉사를 하는 이 씨 아주머니는 마흔이 넘은 아들이 뇌병변이다. 네 살에 다쳐 마흔 다섯이 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우리 조카는 말도 하고 생각도 하고 눈물도 흘릴 줄 아니까 다행인걸까. 김 씨는 서둘러 식당으로 갔다. 몸을 움직여야 해. 자꾸 생각을 하면 안돼.
식당에서 팥을 삶는 냄새가 고소하게 났다.
– 지난 크리스마스에 썼던 글을 여기 안 올려서, 이제서야 올립니다.

갈고 팔고 버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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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의 키가 작은 남자는 남씨였던가, 그 사람은 화가라고 했다. 그는 키가 작으니, 창문 없는 고시원 방이 작지 않을 거 같았다. 키 작은 사람을 부러워하는 일도 생긴다. 유화에 쓰는 특유의 역한 기름내 풍기며 그가 그리는 그림을 7호실 오 씨는 “나까마 그림”이라고 불렀다. 그는 두어 달 고시원에 있다가 떠난 것 같다. 낮에는 막노동을 했고 가끔 일이 없는 날, 그러니까 비가 오거나, 노동을 팔지 못하고 봉고차에 실려 가지 못한 그런 날, 그는 고시원 방에서 물감과 테라핀 냄새를 풍겨가며 그림을 그렸다.
 
그는 연장이 들었을 거 같지도 않은 반달모양의 가방을 메고 새벽에 고시원을 나섰다. 남대문 경찰서를 지나 퇴계로쪽 남대문 시장 앞 육교 아래 가면 드럼통에 군불을 땐 사내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인력시장이 짧게 형성되면 거기 모인 사내들은 차례도 순번도 맥락도 이유도 없이, 자기 자신을 가장 늠름하게 내보이려 애쓰다가 봉고차에 실려 품을 팔러 갔다. 하루를 먹고 살 수 없는 날, 나까마 화가는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은 어디론가 또 팔려간다 했다.
 
품을 팔고, 그림을 팔고, 생명을 박박 갈아 하루를 버티면 또 다시 하루가 왔다.
우물에 빠져 둔탁한 머리통이 그 바닥에 닿을 때, 운 좋게 다른 세상에 펼쳐지면 좋겠다고, 그가 이사나가는 짐을 보며 생각했다.
 
1995년쯤의 이야기와 2005년쯤의 사진을 가지고
2017년에 쓴다.
사진은 용산구 동자동.

혓바늘이 돋는다

1.
엄마, 신이 인간을 만든 게 아니고,
인간이 신을 만든 게 아닐까?
– 그거 니가 몇 년전에도 물어봤던 거야.
그때도 엄마가 그런 거 같다고 했었어.
그랬나?
– 어.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까. 이 풍진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왜 이따위로 살아야 하는지, 왜 계속 싸워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까.

신이 있다고, 불가항력이라고, 내가 범접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믿어버리면 그때부터 모든 삶은 심플해진다.

이것이 내 팔자라고, 사주가 그렇더라고.
그렇게 믿어버리면 안간힘을 써도 안되는 일에 관해,
알 수 없는 우주의 기운을 믿어버리면,
내 인생이 그닥 쓰레기같지 않게 느껴지니까.
내 삶의 모든 노력이 공허하게 부정당하지 않는 기분이 드니까.

2.
다음 주에 끝나는 종로구 모처의 노인글쓰기 수업의 참여자들은 중산층 이상, 대다수 연금생활자로 보인다.
그 격차는 있겠으나, 대체적으로 고학력자들이고 글솜씨가 매우 빼어나다.
직접 한글파일에 사진을 붙이고 사진에 캡션을 붙이는 70대가 있다. 반포주공아파트가 천 만원일 때, 아파트를 사지 않고 카메라를 샀다는 노인이 있다. 평생 공직에 있어서 인생이 참 무료했고 오만하게 살았다고 고백하기도 하며, 개인의 모든 울분을 사회적 문제와 정치이슈로 간단하게 치환해버리는 수구전통의 성향을 가진 분이 거침없이 박근혜는 자결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남편이 은행원이었고 나중에 회계사가 되었는데도 사는 게 늘 가난했다고 고백한 77세 여성노인이 있었다. 모두들 은행원 월급이 썩 괜찮은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반문했고, 그녀가 혹시 사치를 한 건 아닌지, 욕심이 많았던 건 아닌지 의심하는 질문이 오갔다. 77세의 곱상한 이 할매는 성격이 명랑하고 장난기도 많아 뒤에서 보고 있으면 중학교 2학년 응원단장 같다. 사람들의 질문에 토라진 할매에게 다가가, 남편이 자수성가했고 줄줄이 동생들 공납금을 대셨다는 얘기를 들으니 무슨 사정인지 알 거 같다고 말을 걸었다.
저는 그거 이해해요. 밑빠진 독에 물 붓기죠. 라고 웃었더니,
육남매의 외아들이고 혼자 공부한 남편이었다며 자기도 육남매의 맏딸이었다고 했다.

이 나라에서 개천에서 난 용은, 그 개천의 장력에 의해 이무기로 생을 마감하기 마련이다. 집집마다 개천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하늘로 승천하지도 못한 채, 가시나무 가지에 걸려 억울하게 뜬 눈으로 소멸되는 삶이 있다.

줄줄이 매달리는 동생들의 공납금을 대고, 병든 가족의 병원비와 약값을 대고, 집집마다 있는 화상들의 사고를 치닥거리 하다가 지쳐 나가떨어졌던 사람들이, 왜 국가의 의무에 대해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나, 이해하고 싶어졌다.

복지관 뒤에 아파트에 혼자 사는 영감님은 월 300만원 정도 되는 연금을 받아 살고, 막내딸은 미국에서 박사과정 공부중이라 했다.

3.

큰 아들이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보증사기를 당하고 갑자기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한 상태로 1년이 흘러가, 며느리와 교대로 아들을 돌보는 84세의 노인은 월 40만원으로 살고 있다. 쓰러진 아들이 빚을 내어 구해준 전세집의 보증금이 5천만원이 넘고, 연락이 끊긴 둘째 아들도 호적에 올라 있어 아무 혜택을 받지 못하지만, 그래도 복지관에 나오면 시름을 잊는다고 고백했었다.

평생을 비정규 공무원으로 일했던 78세 노인은 부인을 일찍 여의고 딸들은 가난하고 아들은 소식을 모른다. 복지관 청소를 하며 노인사회활동 급여로 월 20만원을 받고, 노령연금 20만원도 받는데, 매달 월세가 22만원이다. 12월부터 2월까지는 노인사회활동이 중단되어 다음 달 월세를 내기 어렵다고 주거비 지원을 요청했다고, 복지사가 전했었다.

지난 달에 만난 노인들의 이야기다.

그 이전에는 쪽방촌에 사는 노인들을 만났고, 작년 겨울에는 쪽방촌의 작은장례에 갔다.  발이 없는 노인이 문상을 왔다. 그는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지하 장례식장으로 들어서 슬리퍼를 벗고 고인에게 절을 했다. 고인과 그는 지나가다 몇 번 본, 이웃이다.

나는 수업 중에 노인들이 하는 말을 기록하다가
“왜 노인들의 빈부격차가 이리도 큰가” 라고 적었다.
그리고 10초쯤 쉬었다가 바로 아랫줄에
늙으나, 젊으나 매한가지. 라고 덧붙였다.

4.

파업과 철야농성중에도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더라는 전설같은 사내가 환갑을 넘기고도 여전히 뽀얀 얼굴로 매일 TV에 나와 조근조근 말을 한다. 이제 그는 원했던 원치 않았던, 사람들이 그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난세의 영웅을 바란다.

그 방송국에서 하는 예능프로에 “운이 좋아 노래로 먹고 살게 되었다”는 빼어난 미모의 여가수가 나와 말한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건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의 꿈이 부정당하는 말과 같으니까. 그 사람이 간절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간절히 원했던 게 무엇일까.
그녀의 말과 달리, 사실 나는 아무 것도 간절히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간절히 원했던 건 살아남는 거였다.
폭탄이 빗발치는 전쟁터, 지뢰가 터지는 언덕을 넘어 까닥하면 온 몸이 터져버릴 지도 모르는 순간마다, 그저 살아남기를, 그저 별 일 없기를 바랐는지도.

5.

일찍 세상을 떠난 막내삼촌은, 1951년 1월 1일 생이었다. 천하에 불운한 팔자라고들 했다. 남들의 말처럼 삼촌은 자기 능력을 단 한번도 발휘하지 못하고 바다 건너에서 위암으로 일찍 갔다. 문득 삼촌 생각이 났다.

미국의 오바마 케어가 사라질 거라 한다. 나는 다시 아버지의 약을 부쳐야 할 것이다.

모두들 살아남고자 한다.
조금 더 근사한 모습으로 살길, 조금 더 의연한 모습으로 죽길.
올 겨울은 박근혜탄핵을 돕는 우주의 기운 때문인가 뜨듯한 겨울이다. 몸이 많이 피곤한데, 사람들의 상처가 자꾸 혓바늘처럼 입속에 맴돈다.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야겠다.

2017.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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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서울 중림동

꿈없는 세상 – 그들의 눈동자

내가 상하이에서 학부를 다닌 화동사범대학은 말 그대로 사범대학인지라 국가에서 적극(?) 지원하고 졸업한 아이들의 취업이 모두 보장되어 있으며 등록금도 타 학교에 비해서 저렴한 학교였다. 상하이에는 명문이라 불리는 복단(FUDAN)대학교와 각 단과대학이 잘 되는 몇 개 대학이 있었는데, 이과쪽은 교통대(JIATONG), 건축은 동제대(TONGJI) 외에도 상해외대나 상해대학교등이 있었다. (대학이름은 한국식 한자 독음으로 표기함)

화동사대는 캠퍼스가 예쁘기로 유명했다. 애초에는 복단대에서 학부를 하려고 갔으나 복단대에 한국학생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모양새를 보고 학부를 옮기기로 했다. 내가 처음 갔던 2001년도 2월에 복단대의 한국유학생은 200명이었는데 그 가을학기에 400명이 되더니 2002년도 2월에는 한국학생만 2000명이 등록을 했다. 언어연수생에 국한한 숫자였다. 김정일이 2000년에 상하이를 다녀간 뒤 천지가 개벽했다고 선언한 후 한국에서 상하이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 급격하게 한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학부지만 나는 나름대로 한국에서 공부를 좀 하다 온 애들이 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24세 미만이었다. 나는 당시 스물 일곱이었으니, 내 위로는 주재원으로 왔다가 한 학기 정도 어학연수를 하려고 쉬는 아저씨들 외엔 몇 명 없었다. 학부를 하겠다고 온 내 또래도 당연히 없었다.

복단대는 중국 본토의 양자강 이남의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다. 학구열도 괜찮았으나 유학생이 과하게 몰리다 분리정책을 썼다. 대신 화동사범대학은 그렇게 많은 유학생이 몰리지 않아 분리하고 말 것도 없었다. 중문학부 한어언문학과 (중국어는 소수민족의 언어까지 통틀어 말하기 때문에 한어언문학부는 漢字로 된 문학만을 말한다)에 전무후무한 한국유학생이 있었으니 그게, 나와 나보다 다섯 살 어리던 박모씨. 우리 둘 뿐이었다.

화동사범대는 국가정책대학이라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타 학교보다 싼 학비와 기숙사 지원금등이 관건이 되었다. 다들 시골마을에서 플랜카드 하나씩 걸고 온 애들이라고 보면 된다. 양자강 이남 사람들은 체격이 작은 편인데 아이들이 어찌나 고만고만한지, 나이도 어렸지만 중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장 어린애는 열 일곱짜리도 있었다. 월반에 월반을 거듭한, 말하자면 그 고장에서는 대단한 수재였던 아이라는 거다. 중국내에서도 가난하기로 소문한 안휘성 아이들이 많았고 소수민족 아이들도 몇 있었으며 1학년 교실엔 그야말로 땟구정물이 줄줄 흐르는 코흘리개 같은 분위기였다. 상하이 현지에서 우리 과에 들어온 아이는 극소수였다. 혼자 뽀얀 얼굴에 배낭이 아닌 가죽가방을 메고 다니는 나에게 어디서 샀냐고 물어보곤 하는 아이가 상하이 아이였다. 유학생을 제외하고는 일괄적으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는데 기숙사는 8인실이었다. 2층짜리 침대를 벽에 붙여 두 개씩 놓으면 꽉 차는 방. 겨울엔 난방이 되지 않았고 온수공급도 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붉은 보온물통에 뜨거운 물을 받아다가 차가운 욕실에서 머리를 감았다. 11시인가 12시쯤 되면 기숙사에 전기는 차단되어 시험기간을 앞두고 한 달 정도는 강의실을 밤새 열어주었다. 아이들은 기숙사에서 나와 밤새 차가운 강의실에서 공부를 했다.

그 학교에서 아이들과 지내며, 나는 언제나 동동 떠 있는 섬같았다. 내가 당시 썼던 생활비는 한 달에 한국돈으로 35만원 정도였는데 그 정도면 충분히 먹고 술도 마실 수 있는 돈이었다. 가끔 스타벅스에 가서 하루종일 진치고 공부를 하다 올 수도 있었다. 외국인 유학생이라고 알바생이 시음음료도 잘 갖다줬다. 대신 내 동무들은 내복을 사느냐 휴대폰을 장만하느냐를 가지고 고민해야 했고 내가 쓰는 돈의 3분의 1정도로 한 달을 생활했다. 가끔 한인들이 중국어 과외선생을 구한다고 알아봐 달라 하여 잘 가르칠만한 친구를 보내놓으면 너무 어리다는 둥, 예쁘지 않다는 둥, 별 씹스러운 소리를 지껄였고 이 개자식들은 시간당 25위안 (당시 한화 4천원 가량)이 비싸다며 그것도 깎으려고 들었다. 나도 노하우가 생겨 2학년 끝날 무렵부터 한국인 중 누가 원어민 과외를 찾으면 이쁜 여자 찾으시려면 KTV(룸싸롱) 가시고 진짜 공부하실 거면 나한테 얘기하라고 대답하곤 했다.

내가 영어를 알려주고 중국친구가 중국어를 가르쳐주는 식의 언어교환을 하던 복단대 친구는 나보다 2학년 위였는데, 안휘성에서 온 아이였다.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그녀가 얻은 직장에서의 봉급은 택시기사의 반절도 안 되는 금액, 그러니까 내 한 달 생활비가 못 되었고 그 친구가 기숙사에서 나와 사는 주택은 우리식으로 말하는 닭장집 같은 곳이었는데 천장에 백열전구 하나 덜렁 달려 있는 방 하나에 공동주방을 쓰는 곳이었다. 그래도 그 친구는 맘에 든다고 좋다 했다.

부자동네로 소문난 절강성의 항주나, 복건성의 온주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온 아이들의 겁에 질린 눈동자가 자꾸 떠오른다. 커피숍에서 아이패드를 놓고, 노트북을 놓고 영어책에 미친 듯이 줄을 치며 이어폰을 끼고 있는 이 나라의 20대들을 볼 때마다 2002년도쯤 내가 함께 밥을 먹던 땟구정물 흐르던 그 아이들이 생각난다. 눈빛이 닮아서다.

10년도 훨씬 전에 하나언니 하나언니하며 노트를 빌려주는 아이들은 갑작스럽게 거대한 도시에 와서 돈의 위력에 주눅들어 하루 하루 조심스럽고 위태롭게 살아갔다. 중국어 과외를 하러 갔는데 이상한 몸짓을 보내는 한국남자도 만났고 눈 뜨면 코 베어간다는 한국속담같이 상하이라는 도시는 학교만 벗어나면 줄줄이 돈 달라는 곳만 있었는데 아이들의 미래는 보장되지 않았다. 아이들의 꿈은 월급 꼬박꼬박 받는 학교 선생이 되는 것이었다.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우거나, 고전문학의 당나라 詞도 잘 짓던 아이들의 재능에 비해, 아이들의 눈빛은 늘 흔들리고 불안했다. 물론 그 눈빛엔 맑고 순수함이 깃들어 있었고 3학년이 되어가면서 아이들은 살아남는다는 것이 뭔지, 도시가 뭔지, 돈이 뭔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 아이들에게 결여되어 있던 것은 정확한 방향과 철학, 꿈이었다. 막스 레닌 시간에 모두 엎어져 자던 아이들에게 철학은 돈 버는 일이었던 것처럼, 지금 내가 이 도시에서 옆 도시에서 만나는 청년들에게 자꾸 그 모습이 중첩되어 나타난다. 대신 이 나라 오늘의 눈빛은 원한과 불만이 조금 더 강하게 엿보인다는 것이다.

꿈을 위해 달린다고 얘기하는 청년들이 있다. 옆에서 지켜보면 도대체 쟤가 말하는 꿈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꿈을 위해 살아왔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있다. 그 역시도 그 사람이 말하는 꿈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온갖 부조리에 침묵하고 타협하며 결국 이 시대가 말하는 꿈은 돈을 많이 번 다음에 생각해야 하는 것인 모양이다.

저 사람이 무엇을 꿈꾸는지 명확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아주 소수지만. 그들을 응원하며 나도 그렇게 늙어가고 싶어졌다. 그간 타인의 눈에 비친 내 눈동자엔, 맑고 순수함 따위는 없었겠지만, 원망이나 불만이 조금이라도 가셔지는 날을 죽기 전엔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꿈 없는 세상, 꿈꾸기 힘든 세상에서, 제대로 된 꿈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 도시에 둥둥 떠다니는 불안한 눈동자가 거대한 황포강의 야경을 바라보던 아이들의 순수한 눈동자를 자꾸 그립게 한다.

2014. 9.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