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쇼1기 – 생애사쓰기 과정 순항중

생쇼 1기 생애사쓰기 온라인강좌는 목표한 인원을 다 채워 총 11명이 참가했습니다.

1강에서는 전반적인 생애사쓰기의 의의와 우리가 생애사를 쓰면서 고민해봐야 할 지점에 대해 이야기했고

2강에서는 사례를 통해 다양한 서사기법에 대해서 이야기 나눴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강의가 있습니다.

이번에 다른 일정 때문에 수업참여가 어려운 분들을 위해 하반기에도 강좌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열심으로 참여하시는 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1 생쑈 1기 온라인강좌 수강생 모집

2013년부터 진행해 온 다양한 계층과 연령의 강좌 노하우를 바탕으로 생애사쓰기에 관심있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강좌를 유료로 처음 개설합니다. 늘 사회복지시설에서만 수업을 하다보니, 일반 참여자와 만날 기회가 적었습니다. 코로나팬데믹으로 온라인강좌가 확대된 만큼, 온라인강좌를 요청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개설해봅니다.

개인이 부담하는 유료강좌를 처음 열게 되어, 설레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합니다.

그간 공공기관과 취약계층대상으로만 진행해 온 생애사쓰기를 더 많은 분들과 함께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개인의 기록을 모아 공동체의 기록이 될 수 있도록, 세상속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각 기수의 성과물과 참가자 의지에 따라 소량의 책자제작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각 지역에서 생애사쓰기 강좌에 참여할 수 있도록 ZOOM으로 진행합니다.
기초과정을 수료하신 분만 심화과정에 입문하실 수 있습니다. 2021년에는 기초과정에 이어 여름부터 심화과정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강좌는 최대 인원 12명입니다. 선착순으로 마감합니다. 

  • 강좌 내용 
  • 민중기록의 필요성
  • 내 삶을 말하는 다양한 방식
  • 듣는 자의 자세
  • 내 삶의 주제 찾기
  • 지겨운 이름, 가족
  • 그 외 글쓰기 개요, 주제잡기, 나의 생애사쓰기 요령과 습작, 첨삭지도 
  • *합평은 없습니다. 이 글쓰기 수업은 비판없이 칭찬과 격려, 위로가 핵심입니다. 

세부 커리큘럼은 강좌 신청자에게만 제공합니다. 
신청이 마감된 후 첫 수업, 오리엔테이션에서 알려드립니다. 수강신청란에 상세한 내용을 적어주시면 세밀하게 맞춤강의를 준비하고자 합니다. 

  • 미리 알려드립니다. 
  • 참가자는 수업 녹음 녹화 불가합니다.
  • 타인의 스토리를 훔치지 않습니다.
  • 타인의 개인적 이야기를 동의없이 SNS에 게시하지 않습니다.
  • 다수의 수업에 방해되는 행위를 지속할 경우, 참가자의 동의를 얻어 수강자격을 박탈할 수 있습니다.
  • 과제는 강사와의 약속이 아니라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과제를 못했다고 결석하지 않습니다. 자리를 지키는 게 중요합니다.
  • 자기 이야기 공개가 꺼려질 경우 강사와 논의하여 조절합니다.
  • 강사는 참가자가 요청하는 학습자료를 성실히 공유합니다.   

아래 구글폼에서 강좌신청을 입력해주세요

강사 간단 이력 – 이하나

  • 생애사쓰기 강사, 집필노동자, 교육활동가
  • 2015-현재 경기도, 안양시 민주시민교육 협력사업 진행 및 강의
  • 現 문화공동체히응 대표, 지역교육네트워크 이룸 대표
  • 2013-2015 안양시 노인종합복지관, 율목생협조합원, 안양시 수리장애인종합복지관 장애인가족과 당사자 생애사쓰기 (강의, 출간진행)
  • 2016-2020 서울시·은빛기획 노인복지사업 내 삶 쓰기 보조진행, 서울 중림종합사회복지관 생애사쓰기, 동대문구 마을도서관 기억노트 쓰기, 수리장애인종합복지관 발달장애인청년 생애사쓰기, 안양시 평촌도서관 “보통사람들의 특별한 생애사” 진행중, 경기도 양주 회천노인복지관 노인생애사쓰기 진행, 성수종합복지관 내 삶 쓰기, 안양시 장애인부모회 “장애가족으로 산다는 것” 등 생애사쓰기 관련 다수 기획 진행 (강의, 출간진행)
  • 저서 『포기하지 않아, 지구』(빨간소금, 2018) / 『태안환경보건센터 12년의 기록』 (태안환경보건센터, 2020)
  • 공저 <전선을 건너온 삶의 여로에서> (공저, 은빛기획, 2018) / <죽음이 삶에게 안부를 묻다) (공저, 검둥소, 2019) / <코로나팬데믹과 한국의 나아갈길> (공저, 창비, 2020) /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 (공저, 교육공동체 벗, 2020) / <민주학교의 탄생> (공저, 생각정원, 2021)
  • 연재 <작은 책> 살아온 이야기 (2017-2018) / 서울시NPO지원센터·카카오같이가치 <퍼스트펭귄 스토리> (2018) / 민중의 소리 <한 사람 이야기> 2019~현재

[청소년생애사쓰기]합치면 마흔넷 출간

안양 YMCA 청소년인생학교 발표회를 열었습니다. 생애사쓰기 한 책이 나왔고요. 비대면 원칙으로 주인공과 가족들만 참여했습니다.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1년간 열심히 참여한 우리 청소년들 정말 장합니다. 칭찬해요!

안양YMCA는 매년 “청소년인생학교”를 진행합니다. 2020년에는 세 명의 청소년들이 생애사쓰기에 참여했어요. 열 다섯살이 무슨 생애사냐는 어른들의 편견이 있습니다. 하지만, 열 다섯 살도 삶이며, 열 다섯 살에게 15년은 인생의 전부입니다.

주말마다 모여 생애사쓰기의 기본을 배우고, 각 장별로 나누어 각자의 인생사를 적어봤습니다. 문화공동체 히응은 청소년글쓰기의 새로운 장르를 위해 교육을 기획, 운영하고 책으로 묶어내는 역할까지 맡았습니다.

청소년의 생애기간이 짧다고 무시하는 어른들에게 일침!

“합치면 마흔 넷! 만만치 않아”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표지그림은 작가 세 명이 함께 그린 공동작품입니다.

ISBN도 받고 출간을 기획했는데 구매예정자가 적어서 성사될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른들의 큰소리에 가려진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좀 더 널리 퍼질 방법이 없을지, 고민해보겠습니다. 세 분의 저자께도 응원과 지지, 격려보냅니다.

사단법인 로아트 – 생애사쓰기

발달장애인작가를 길러내는 사단법인 로아트와 6회차 생애사쓰기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2020년 5월 8일에 시작한 로아트 생애사쓰기는 법인 내 임원진을 대상으로 합니다.

6회차는 집단 생애사쓰기를 깊게 진행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가볍게 자신의 삶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보는 간단한 프로그램으로 진행합니다.

1강 – 생애사쓰기를 하는 이유

2강 – 자기 소개와 과거의 흔적 몇 가지 찾기

3강 – 가계도, 역사로 통해보는 내 근원 찾기

4강 – 연표 작성

5강 – 내 삶에 가장 큰 사건

6강 – 나와 사회

이번 강좌는 군포의 아름다운 갈치 저수지에 자리한, 카페 이백에서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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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의 생애사쓰기 결과를 보여드리며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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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공간에서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니, 뜻밖의 행운이네요.

이번 강좌는 6월 12일까지 진행됩니다.

문화공동체 히응의 생애사쓰기 강좌는

2013년부터 집단생애사쓰기의 노하우를 가진 대표자 이하나가 직접강의합니다.

관심있는 단체, 기관은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hana@allmytown.org / 031-455-2016

[강좌]장애가족 생애사쓰기

2020년 7월 2일 강좌 시작합니다. 총 12강으로 구성했으며, 늦게라도 함께 하고 싶은 분은 아래 전화번호로 연락해보시면 됩니다.

안양시장부모회_포스터 2020 안양시 시민인성교육 참가자 모집안내

●사업명:뜻밖의 여정,장애가족으로 산다는 것.
●일시:2020년 5월7일(목)~8월13일(목) 10시~12시, 매주목요일,총15회기
●장소:안양시장애인지원센터 3층 회의실
●대상:부모회 회원(부모) 및 안양시민20명.(장애인활동보조사,사회복지학과 학생,자원봉사자 등 가능)
●내용:마음열기 비폭력대화,자기회복의 생애사쓰기,장애가족의 사회적역할 외(주로 강의와 글쓰기수업으로 이루어짐)
●참가비:1인당 5만원(계좌 추후공지)
●신청문의 : 031-474-3356 (한국장애인부모회 안양시지부)
●코로나19로 시작날짜 변경될 수 있음

●주강사 : 이하나 (문화공동체 히응 대표)
뜻밖의 여정 1기 지도 강사, 생애사쓰기 강사, 집필노동자
<포기하지 않아, 지구>, <삶이 죽음에게 안부를 묻다>(공저)

●주관 : 안양시
●주최 : 한국장애인부모회 안양시지부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명랑할매

https://www.vop.co.kr/A00001466408.html

2020년 2월 7일, 민중의소리 발행

서울의 한복판에 있는 복지관이었다.

생애사쓰기를 하러 온 노인들이 스무 명 넘게 앉았다. 각자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이미 있었다. 연금생활자가 많았다. 먹고 사는 데 큰 걱정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노후가 편안한 사람들은 대부분 공직자 출신이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다수 그랬다. 직장을 다니던 사람들은 중간에 IMF를 비껴가지 못했다. 장사하던 사람들은 더했다. 어떻게든 IMF 이전에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은 거센 풍파에 밀려 다 한 번씩 쓰러졌다.

복지관의 위치나 평소 이용자의 소득수준에 따라 생애사쓰기 프로그램에 모이는 사람들도 달라진다. 사회복지사가 일일이 연락해서 프로그램 설명도 잘 듣지 못한 채로 교실에 와서 앉아 있는 경우는 저소득층이 많지만, 자발적으로 모집공고를 보고 오는 사람들은 경제적 형편이 낫다. 저임금 고노동에 몰입해서 하루라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적다는 말이다. 아껴 쓰면 큰 문제 없이 산다는 것이고, 자녀들이 일정한 소득을 유지해서 부양의무에서 벗어난 이들이기도 하다. 이 복지관은 프로그램 공고를 보고 자발적으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아껴 쓰고 근면하게 일해 중산층에 진입한 이들이다. 이들이 처음 공기관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는 매번 생활비가 모자라 빚을 얻어 쓸 정도로 공무원 급여가 형편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퇴직할 때쯤에는 모든 상황이 좋아졌다. 정확한 신분보장이 되니 은행대출도 쉬웠고 정보도 빨리 얻었고 따박따박 고정적인 급여가 나오니 맘만 먹으면 집은 살 수 있었다. 저항하지 않아도, 어쩌면 저항하지 않아야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니 보수적인 생활태도를 가졌다.

계속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명랑할매” 읽기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겨울 빨래

https://www.vop.co.kr/A00001461784.html

2020년 1월 19일 민중의소리 발행

그해 겨울, 생애사쓰기 수업을 했던 한 복지관에서 연락이 왔다. 복지관 이용자 중 복지지원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데 면담이 잘 안된다면서 면담을 진행해서 글로 정리해달라는 것이었다. 약간 의외의 일이었다. 구술생애사기록정도로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흔쾌히 응했다. 다섯 명의 사람을 2주에 걸쳐 여러 번 만났다.

후드티를 뒤집어쓴 한 여성이 면담 장소인 작은 회의실로 들어왔다. 면담자 정보를 보니 나이는 40대 후반이었다. 내가 만날 사람들 중에 가장 젊은 사람이었다. 가난이 지워지지 않는 눈물자국처럼 옷섶에 묻어있었다. 이 사람은 깍지 낀 손을 계속 조물락거리며 바빠서 나오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빨래를 하고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겨울철에 빨래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툭툭 끊어지는 문장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수도가 손 닿는데에 있는 게 아니고, 저 위에 있으니까,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꼭지를 열었다 잠갔다 해야되거든요. 쪼그려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물 다시 틀고, 잠그고, 그나마 수도가 안 얼어서 다행이지. 밖이 추우니까. 세탁기 하나 있으면, 좋을 텐데. 세탁기 들어갈 자리도 없고.”

겨울 수도
겨울 수도ⓒpixabay

서울시내 한복판, 재개발이 임박한 그 마을에는 수십 채의 집이 남아있었다. 어떤 집들의 대문에는 “철거”라는 글자가 붉은 스프레이로 쓰여 있었다. 대부분 마을을 떠났고,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가스보일러가 있지만 빨래를 하는 수도에는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아파트 같은 데는 좋지요? 뜨거운 물도 사시사철 나오고. 보일러 조금만 때도 엄청 따뜻하다던데. 임대 간 사람들이 얘기하더라고요.”

백 씨. 이 사람은 가난했다. 아들이 둘 있는데 둘 다 지병이 있었다. 백씨는 두 아들의 병이 질환인지 장애인지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걸핏하면 쓰러지는 병이라고만 했다. 뇌전증 같은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게 뭐냐고 되물어서, 간질을 요즘은 뇌전증이라고 한다고 말해주었는데 그건 아니라고 했다. 아무튼 걸핏하면 쓰러진다고만 했다. 남편은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이 같은 병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어 집을 떠났다. 백 씨의 말에 따르면,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남편이 떠난 이후로 생계를 책임지고 육아와 간병을 홀로 해왔다. 결혼 전에는 직장도 다녔고, 친구들과 어울려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시고 춤추러도 가는 보통의 20대를 보냈다. 백씨는 아픈 두 아들의 엄마로 거듭나면서 세상과 단절되었다. 큰 아들은 스무 살이 넘었고, 작은 아들은 그때 고3이었는데 작은 아들은 취업을 할 수 있는 정도라서 직장을 얻었다고 좋아했다.

세 번을 만나는 동안 백 씨는 계속 너무 힘들다는 말을 반복했다. 자기는 정말 지쳤고 더 이상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제는 자기도 늙었는지 온몸이 아프고 쑤셔서 무슨 일도 할 수 없다고. 공공근로도 나가봤지만 아들만 남기고 집을 비울 수가 없다고.

두 시간이나 길게 무슨 할 말이 있냐고 말했던 백 씨는 매번 두 시간을 훌쩍 넘기고 조금 더 이야기를 하다가 갔다. 나는 백 씨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복지관에 넘겨주었다. 복지관에서는 백 씨가 필요한 복지혜택 중에 받을 수 있는 것을 찾으려고 했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냐고 반문했던 백 씨는 만나는 시간 내내 때론 즐겁게 때론 비통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겨울 빨래
겨울 빨래ⓒpixabay

즐거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할 때는 밝은 표정이 되었다. 자기가 살던 고향의 빛 좋던 들판과 부모님이 자기를 돌봤던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는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는 아이였다고 했다. 말 하는 것 자체를 꺼리던 백 씨는 ‘누가 내 이야기를 이렇게 들어주나’ 라는 말도 했다. 기득권이 될수록 자기 이야기를 할 기회가 많아진다. 사회와 고립되고 단절될수록 자기 이야기를 할 기회가 줄어든다. 자기 삶을 쓰는 일도 무엇이든 더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하다. 더 많이 배웠거나 더 많은 기득권을 가질수록 자기 삶을 돌아보고 늘어놓을 기회가 더 많다. 백 씨는 그렇지 못한 사람 중 하나였다. 말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말하는 방법도 잊는다. 수십 번 자기 주장을 말해본 사람은 점점 더 잘 말하게 된다. 세상에 펼쳐본 적 없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을 다잡는다.

어른이 되어도, 어미가 되어도 수십 번 마음을 고쳐먹기 마련이다. 조금 더 잘 살아야지, 조금 더 잘 해봐야지, 오늘부터는 밥을 건강하게 차려먹어야지, 아이에게 화내지 말아야지.

얼음이 얼지 않고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이 지나간다. 세탁기에서 편하게 꺼낸 빨래를 널며 손가락이 시릴 때 백 씨를 떠올린다.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을까. 나를 만났을 때 살던 집보다 빨래하기 편한 곳으로 이사를 갔으면 내 마음이 편하겠다.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팔자 때문이 아니라고

https://www.vop.co.kr/A00001458067.html

2019년 12월 31일 민중의 소리 발행

올해도 생애사쓰기 수업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주로 공공기관에서 오전에 수업을 열고 노인대상으로 수강생을 모집한다. 어떤 기관은 65세 이상으로 한정하기도 하고 다른 프로그램에 참여한 노인이용자들에게 모집공고를 주로 알리기도 한다. 굳이 노인으로 한정할 것은 없지만 여러 기관에서 선호하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대체로 한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는 감동이 있다. 특히 자기 삶을 글로 정리하겠다고 모이는 사람들의 특성이기도 하다. 떳떳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이라야 자기 삶을 글로 써보겠다는 욕심을 갖게 된다. 글도 쓰고 발표도 하고 나중에 책자로도 묶어낸다는 프로그램 설명이 있으니 대부분 공개할 자신이 있는 사람들만 모이게 되는 것이다.

어떤 기관에서는 글로 쓸 여력이 안 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모아놓기도 한다. 그런 경우엔 수업시간에 편하게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게 하고 그걸 받아 적어 글로 변환해주기도 한다. 교육프로그램에 구술사기록의 원칙을 철저하게 적용하지는 않는다. 내가 목적하는 바는 자기 목소리가 담긴 이야기를 책자에 넣고 그 과정을 사람들이 기억하고 결과물을 보존하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기관이 모두 이들의 이야기를 소중하게 다루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경험했던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가 종이에 새겨진 것을 보며 귀하게 여긴다.

서울 중구 정동길에서 한 어르신이 폐지 담은 리어카 끌고 이동하는 길에 은행나무 낙엽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서울 중구 정동길에서 한 어르신이 폐지 담은 리어카 끌고 이동하는 길에 은행나무 낙엽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김철수 기자

길게는 석 달 정도 자기 삶을 계속 반추해가며 기록해 나가는 작업은 쉽지 않다. 중간에 연락도 없이 안 나오는 경우가 대다수다. 초반에 모집한 사람들에 비해 30%정도가 남으면 성공인 셈이다. 서른 명 넘게 모집해도 많이 남으면 열 명 남짓이고, 대부분 그보다 더 적은 숫자가 마지막까지 원고를 써서 제출한다. 60대를 노인이라 말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적어도 70대가 넘어야 노인이라 할 수 있는데, 직접 글을 쓰고 자기 글을 고쳐오고 사람들 앞에서 낭독을 할 수 있는 80대들이 많이 늘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전쟁을 겪고 가난을 헤쳐온 사람들은 어린 시절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억울하게 죽은 가족을 잊고 있다가 다시 떠올리기도 하면서 자기 삶의 ‘기구한 운명’을 탓하기도 한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가 얼마나 구구절절한지 한숨을 쉬면서 스스로의 ‘팔자가 기구해서’, 또는 자기 부모의 ‘팔자가 사나워서’라고 서술한다. 자기 삶을 되새길 때는 대한민국의 연대표에 자기 삶을 채워나가는 숙제를 낸다. 해방, 전쟁, 1.4후퇴, 4.19혁명, 이승만하야, 5.16 군사쿠데타를 말하다 보면 한 개인이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알아차리게 된다. 사회적 사건 옆에 가족과 개인의 서사를 보태 적다 보면 팔자 때문이라기보다 나도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느끼면서, 정치적 사회적 사건이 나의 사생활을 뒤틀기도 한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의도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여러 사안들에 대해서 묻는다.

일제강점기를 거친 사람들이 기억하는 해방은 학교에서 배운 것과 달랐다. 태어났을 때 이미 일제가 지배하고 있었고, 집안에 딱히 민족과 일제를 설명할 사람이 없으면 당연히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그들에게 해방은 ‘국가의 패망’이었다. 어린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에는 일본의 패전을 슬퍼하며 울던 사람들과 두 팔을 번쩍 치켜들며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이 공존했다. 그때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을 뿐이다.

박복한 팔자 때문이라고 말하면 이야기는 쉬워질 것이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개인의 잘못이 아니고 당신이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여성들의 경우 바람난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가 항상 있었다. 어떤 수업을 들어가도 한 명 이상 같고도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멀쩡히 살아있는 자기 어머니를 두고 새어머니를 얻어 식까지 올린 아버지도 있고 오랫동안 두 집 살림을 하거나, 아예 집을 나가버리는 경우도 있다.

박복한 팔자 때문이라고 말하면 이야기는 쉬워질 것이다. 인과관계를 찾을 필요도 없고 그저 그런 운명에 의해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던 일들을 설명하기 쉬워진다. 박복한 팔자는 한 사람에게 귀착되고 그 사람을 원망하게 된다. 이유는 없다. 팔자때문이니까.

서울 용산구 쪽방촌에서 한 노인이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
서울 용산구 쪽방촌에서 한 노인이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뉴시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들이 겪어왔던 일들은 우리가 같은 땅에서 같은 제도 아래 같은 역사를 겪었기에 파생된 일들이다. 한 나라에서 같이 사는 건 운명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같은 시험을 보고 같은 교육을 받고 같은 재난을 겪어서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있듯이, 같이 보고 겪은 것들 때문에 인생이 뒤집어지기도 한다. 내가 저지른 게 아닌데 내가 피해를 본 일들이 있다면 그건 개인의 잘못이 아니고 당신이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제 욕심을 채우는데 눈이 먼 권력자들의 성급한 결정때문은 아니었는지 돌아보자고 말하고 싶었다. 어쩌면 이 말은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오래된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 모든 일들이 다 나 때문은 아니라고.

올해 만난 당신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나에게 나눠주면서, 들어줘서 고맙다고 해준 덕에 나 역시도 잘 버텼다. 건강이 허락될 때 살아온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다던 당신들이 조금만 더 건강하면 좋겠다. 노인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야 할 때마다 서글펐다. 당신들의 삶은 충분히 반짝이고, 이미 넘치도록 아름답다고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모두 고마웠다고.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좋은 나라 만나서

2019년 12월 8일 민중의소리 발행

https://www.vop.co.kr/A00001452759.html

 

내 고향은 이북의 돌산입니다. 황해도 은률군 서부면입니다. 사홍선 동네라고 했습니다. 구월산 밑에 있습니다. 나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습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하라 하니, 일제 때 이야기부터 해야겠습니다. 열 일고여덟 젊은 시절에 영장이 나왔습니다. 그때는 일본이 큰 전쟁을 할 때라 젊은 사람들에게 모두 영장이 나왔습니다. 근로정신대라고 전쟁터에 일을 하러 가야 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위안부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여자들을 데려다가 몹쓸 짓을 한다고요. 끌려가면 죽을지 살지 알 수 없는 일이니 무조건 피해야 했습니다. 빨리 결혼을 하면 안 끌려갈 수 있다들 했습니다. 동네마다 혼처를 찾느라 난리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아무데나 그저 빈 자리가 있으면 무조건 보내야 한다고 성화였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성급하게 결혼시켰어요.

시집은 피목촌이라는 동네였습니다. 시댁은 그 일대에서 아주 잘 사는 집이었습니다. 그때는 100칸짜리 집을 지으면 거만하다 해서 아흔아홉 칸을 짓고 살지 않았습니까? 시댁이 그런 집이었어요. 그런데 가보니 신랑이, 몸의 반을 못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돈 많은 집이니 전답은 다 소작을 주고 나는 할 일이 없었어요. 농사도 안 짓고 할 일도 없었어요. 밥 해주는 사람, 빨래 해주는 사람 다 있었어요.

가서 보니 남편은 몸이 그렇지만 돈은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그리운 것도 없고 아쉬운 것도 없었습니다. 시부모님은 당시만 해도 아들이 장가를 못 들 것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들어오니 나름대로 흡족하셨던 모양입니다. 나는 이것도 내 정해진 운명이라 생각하고 정붙이고 살며 아이도 낳았습니다.

남편은 몸이 불편했으나 풍족했던 시댁
해방되니 모두 일꾼들의 것이 되고 무일푼 신세

일제 강점기가 지나니 시대가 바뀌더군요. 그 많던 전답이 모두 일하던 일꾼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일푼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 전쟁이 터졌습니다. 인민군들이 들어와 집을 자기들 사무실처럼 썼어요. 우리를 알몸으로 내쫓아버렸습니다. 거처가 마땅치 않고 나는 젊으니 시댁 어른들이 친정에라도 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애들 둘을 끌고 돌아다니려니 길이 막막했습니다.

우리 엄마는 날 낳고 돌아가셨고 우리 형제들에겐 계모가 있었습니다. 친정을 가도 안 반가워하겠지만 일단 언니를 찾아가봤습니다. 동네가 홀라당 비어 있었습니다. 폭격 맞아 죽었는지 어쨌는지 집은 빈집이 되었고 식구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빈집에 몸을 쓰지 못하는 남편과 애들 둘을 데리고 앉아 있는데 계속 비행기는 와글와글 돌아다니고 총소리 나고 폭격이 이어지고 살 수가 없었습니다. 언니가 없는 집에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디다. 그저 시간이 가길 기다린 건지, 누가 오길 기다린 건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가족들<br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가족들 ⓒ자료사진

아군과 인민군이 밤마다 싸우고 사람들은 징집을 당하지 않으려고 도망가다가 잡히기도 했습니다. 해가 지나고 봄이 되었습니다. 언니도 돌아오고 친정에서 그럭저럭 전쟁을 피하며 버티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시누이를 데리고 우리 친정으로 왔습니다. 시댁이 있는 동네는 더 이상 살 수가 없게 되었다고만 했습니다. 어느 날 시아버지가 동리까지 왔습니다. 아버님은 시어머니와 시누이를 확인하더니 여러 말 할 거 없고 어서 길을 떠나자고 했습니다. ‘이래도 고생하고 저래도 고생하니 가다 죽더라도 가자’고 하셔서 다 같이 피난길을 나섰습니다. 한참을 가다 보니 섬으로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친정 오빠가 신천에 살았는데 피란길이 멀어 그 집에 들렀습니다.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헛간에 들어가 보니 쌀이 좀 있어서 속곳 바지에 쌀을 싸고 남은 옷가지에 마구잡이로 쌌습니다. 식구들이 다 이고 지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시아버지가 이불 보따리를 이고 시어머니는 우리 애들이랑 시누를 데리고 바닷가로 갔습니다. 솥단지 밥단지 숟가락은 어찌 가져가요 물어보니 아버지가 네가 쌀만 맡아라 해서 나는 쌀만 지고 시어머니는 요만한 솥단지하고 수저만 들고 애들 건사하며 갔어요.

바닷가에 도착하니 피난민들이 바글바글했어요. 그때는 기계로 가는 배가 없고 풍선(風船)이 20여척 서 있는데 선착장에 가득가득 짐이 실려 있었습니다. “이 배가 어디로 가나요?” 물으니 전부 다 이남으로 갈 거라고 했습니다. 물이 들어오면 배가 나갈 건데 파도가 잔잔하면 모두 다 순탄하게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피난민들이 모두 그 배를 타고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동네는 산이 옴폭하고 그 산 아래에 바다를 바라보는 집들이 쭉 서 있었어요. 집들은 전부 다 비어 있었습니다. 배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총소리가 나고 갑자기 난리가 났습니다. 시아버지가 ‘물이 들어오면 섬으로 건너가야 한다. 애들하고 니 엄마하고 어떻게든 갈 테니 쌀 이고 먼저 가라’고 하셨어요. 여기저기서 막 쏴대니 배가 못 들어오는 겁니다. 바다에 있는 작은 섬으로 가야 해요. 물이 막 들어차기 시작해서 금방 배가 올 거 같았어요. 어디서 누가 총을 쏘고 난리가 났어요. 어디서 누가 쏘는지 모릅니다.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나고 사람들도 막 쓰러지는 거 같은데 나는 쌀자루 이고 차오르는 물을 따라 나가는데 물이 점점 차올라요. 머리에 이고 있던 쌀자루도 너무 무겁고 도저히 더 갈 수가 없었어요. 갯바위 위에 쌀을 내려놓고 사람 오기를 기다리는데, 사람들이 와야 말이죠.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안 오는 거예요.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죽을 판이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판이라.

바위에 앉아 한참을 기다리는데 물이 다시 쭉 빠져서 쌀을 끌고 다시 육지로 가려고. 중간에 작은 섬에 사람들 몇 명이 바글바글 모여 있더라고요. 거길 들어가서는 식구를 잃어버렸다 얘기를 하니 쌀은 어따 뒀냐 물어서 나도 모르겠다, 하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젖 먹이던 아이가 있어서 젖은 불어오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물 들어오면 식구들이 오려나 내내 기다리는데 저 멀리 서 있는 배가 활활 불에 타고. 쌀이고 뭐고 다 실어놨는데 다 불타버렸어요. 이제 다 죽었구나 싶었습니다.

전쟁이 나고 친정 언니 집을 거쳐 피난길에 들린 신천 오빠집
바닷가 총격에 온 가족을 잃고 홀로 남으로
질긴 목숨, 그래도 살아지더이다

사람 목숨이 참 질기다고. 그때 죽을 것 같았는데 안 죽어집디다. 기다려도 아무도 안 오는데. 새끼 둘 다 내버렸지, 시아버지 시어머니 다 어디 갔는지 모르지. 남편도 모르고. 아무도 안 오고. 그렇게 바닷물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는데 아무도 안 오고. 그날부터 내가 혼자가 되었습니다.

서울 용산구 쪽방촌에서 한 노인이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
서울 용산구 쪽방촌에서 한 노인이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뉴시스

2년 전, 서울에서 만난 김 모 노인은 노인자서전 쓰기 수업을 하러 온 강사라 하니 내 손을 잡고 앉아 보라더니 이 이야기를 쉬지 않고 한 번에 쏟아냈다. 그해 그 해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미군 배를 타고 백령도에 당도했다. 백령도에서 다시 배를 갈아타라기에 그대로 따랐다. 군산에 도착하자 트럭이 여러 대 왔다. 피난민들이 살 곳으로 데려다준다는 말을 듣고 트럭에 올랐다. 트럭은 부안에서 사람들을 내려놓고 떠났다. 자식 둘과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부안에 내린 젊었던 김 노인에게 누군가 방을 한 칸 내주었다. 김 노인은 거기서 혼자가 되었다. 피난민들에게 준다며 어디선가 된장과 고추장을 걷어다 주었다. 남의 집 살이를 하며 끼니를 때웠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아이의 아버지는 고향에 따로 부인이 있었고 결국 고향의 부인에게도 돌아갔다. 김 노인은 호적을 만들지 못한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김 노인은 그 이후의 이야기는 아주 짧게 얘기했다.

서부역 뒤 기찻길에 앉아 있으면 서울역으로 들어가는 기차에서 배추 겉잎을 밖으로 던져버렸다. 버린 배춧잎들을 모아 바구니에 담아 머리에 이고 식당에 가서 팔면 잘 받아주었다. 방 하나 얻고 연탄 몇 장 사서 겨울을 견디고, 배춧잎을 주워 팔다가 배추를 받아 팔게 되니 형편이 좋아졌다고 했다. 그 사이 아이 둘은 ‘알아서’ 크고, 김 노인은 ‘세월이 좋아’ 수급자가 되었다. 김 노인은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흡족해했다. 사는 게 쉽지 않고 고생도 많이 해서 더 살고 싶은 욕심은 없지만 ‘나라에서 살라고 해주니’ 가는 날까지 감사하며 살겠다고 했다.

김노인이 말한 피난길의 이야기는 한국전쟁사에 남아있는 황해도 신천 사건으로 추정한다. 김노인에게 그 사건은 모든 것을 잃고 혼자 낯선 곳에서 살아가야 했던 일생의 큰 사건일 뿐, 어떤 이유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것도 평가하지 않는 것을 들으며 전쟁이란 그런 것이겠다고 짐작했다. 아흔 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작은 임대아파트를 얻게 되어 나라가 고맙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어떤 감정도 쉽게 표현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의 앞에서는.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종로 5가, 카바이드 불빛

https://www.vop.co.kr/A00001449361.html

2019년 11월 20일, 민중의소리 발행

남편은 성실했다. 매달 따박따박 받아오는 봉급으로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차츰 살림을 늘려나갔다. 살림을 늘린다는 것은 어제까지 쓰던 낡은 냄비를 버리고 새 냄비를 사는 것, 그 중에서도 조금 더 좋은 것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성실하게 매일 매일 좋은 대우를 받으며 직장을 다니던 남편이 듬직했다.

어느 날 남편이 회사에서 받는 봉급보다 더 벌 수 있으니 사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성실한 거로는 누구 뒤지지 않는 사람이다. 성실하고 부지런하면 무엇인들 못하랴. 남편이 잘 해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 남편이 차린 공장과 어린 아이들과 같이 살던 조그만 집까지 모두 은행으로 넘어갔다. 남편이 이 고비를 넘기면 된다고 할 때, 나는 이웃과 친구들을 찾아 푼돈이라도 꾸어 남편에게 주었다. 금방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점점 들어가는 돈만 늘어났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집을 비워줘야 했는데 빚이 있으니 멀리 갈 수도 없었다. 살면서 갚겠노라 약속하고 바로 옆 동네로 이사했다. 빚을 꿔준 사람들과 연락도 끊지 않았다. 누군가는 와서 욕도 하고 화도 냈지만 다 내가 돈을 빌리고 약속한 날짜에 갚지 못했으니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계절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편은 집에 드러누워 일어나지도 않았다. 미안하다고만 했다. 성실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이었다. 나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답답했다. 내가 무지해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무슨 도움을 줄 수는 없을까, 아무 것도 알지 못하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무작정 버스를 탔다. 버스는 종로 5가를 지나갔다. 해가 진 지 몇 시간이 지났다. 어둑한 밤거리에 다들 집에 돌아갈 법도 한데 카바이드 불빛이 한데 잔뜩 모여 있었다. 나도 모르게 버스에서 내려 불빛을 따라갔다.

겨울 포장마차 노점 불빛(자료사진)
겨울 포장마차 노점 불빛(자료사진)ⓒ뉴시스

카바이드 불빛은 출항을 앞둔 오징어잡이배처럼 빛나고 있었다. 불빛은 수 십대의 리어카 위에 있었다. 리어카 위에는 국수, 오뎅, 꼼장어 같은 게 놓여 있었다. 장사를 나가는 사람들이 한군데 모여 있었던 것이다.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부터 애기 업은 젊은 여자도 있었다. 그들은 리어카 위에 뭔가를 척척 올리더니 하나씩 대열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는데 가슴이 콩닥거렸다.

“아저씨, 나도 장사하고 싶어요. 아저씨 나 좀 알려줄 수 있어요?”
“남편이 죽었어요?”

아. 장사를 나가는구나. 내가 잠들던 시간에 이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하루를 시작하는구나. 잠도 제대로 못자고 다음 날 해질 무렵 어제 갔던 장소를 다시 찾아갔다. 한 남자가 제일 커다란 리어카에 지갑과 잡화를 올려두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먼데서 그 남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그 남자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물건 살 폼도 아닌데 리어카 앞에 버티고 있으니 그 남자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그 남자에게 말했다.

“아저씨, 나도 장사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돼요? 아저씨 나 좀 알려줄 수 있어요? 나 돈 벌어본 적 없어요.”

남자는 나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물었다. “남편이 죽었어요?”

여기까지 적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수년 전 성업하던 식당을 접었다. 식당이 있던 건물이 경매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지금은 복지관에서 영어도 배우고 컴퓨터도 배우고 미처 졸업하지 못한 학교의 졸업자격 시험도 통과했다. 칠순을 넘기고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몇 차시였던가. 생애사쓰기 수업 중에 카바이드 불빛을 발견한 순간의 이야기를 써왔다. 써 온 글을 내가 대신 읽었다.

“밤 9시에 혼자 버스를 탔다. 가다보니 종로 5가였다.” 라는 문장을 읽고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밤에 일 없이 혼자 버스를 탔을 때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다들 아시죠? 이게 무슨 기분인지.” 라고 물었고, 칠순을 넘긴 수업 참가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가 되었든 다른 곳으로 나를 데려다 줄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그 위에 거침없이 올라타고 싶은 마음, 그 신산함에 대하여, 동의를 구했다.

남편이 죽지 않았으나, 돈을 벌지 못하는 남편은 마치 죽은 것과 다름없는 것처럼 여겨졌던 시절. 이야기의 주인공은 노점상을 시작한다. 누워서 꼼짝을 하지 못했던 남편은 아마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우울증을 앓고 있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노점상을 거치다 노점상 철거 투쟁에도 나섰다. 정부가 마구잡이로 노점상들을 때려 부쉈고 데모도 해봤다던 이야기를 짧게 언급하고 그 시절의 이야기는 쓰지 않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지인의 도움으로 식당을 열었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는 사명감으로 살았다. 식당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자식을 유학까지 보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밤 12시에 일이 끝나는 고된 노동을 십 수 년 겪고 비로소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구청의 철거 단속에 항의하는 노점상(자료사진)
구청의 철거 단속에 항의하는 노점상(자료사진)ⓒ민중의소리

카바이드 불빛에 홀려 장사를 시작한 사람은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졸기도 했고 바닥만 보면 눕고 싶었다고 적었다. 그 정도의 고된 노동이 있어야, 나이 먹어 복지관에 다니며 여생을 즐길 수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 이 사람은 경매로 넘어간 건물주 때문에 권리금 한 푼도 못 받고 보증금만 건져 가족을 먹여 살린 식당을 접었다. 후회는 없다고 했다.

나는 이 사람의 노동이 과연 온당한 대가를 받았던 것인지 따져보고 싶었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뼈를 깎는 고통이 없이 평온한 노후를 얻을 수 있을까. 카바이드 불빛에 생계의 희망을 보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도 가히 이해할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