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를 진행한 정신건강보건센터의 수업을 끝냈다.
조현병과 양극성장애를 앓고 있는 참가자들이었고, 이들은 모두 재활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다.
글쓰기 수업은 다양한 재활프로그램중의 하나였다.
수업 도중에 한 참가자는 증상이 심해져 입원을 했다. 대부분 오래 약을 복용한 이력이 있다고 했다. 나는 몇 몇 참가자들의 언어가 어눌해진 것이 약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2008년쯤이었나. 나도 그랬으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혀가 말려있었다.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서 가족은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손에도 힘을 줄 수 없어서 글로 뭔가를 전할 수도 없었다. 눈에 초점이 맞을 때까지 그저 기다렸다. 안경을 쓰고 사물이 잘 보일 때까지 30분 이상이 걸렸다. 그 때쯤 되면 혀도 풀려서 말을 할 수 있었다. 운동신경이 둔해져 길을 걷다가 넘어졌다. 당시의 나를 기억하는 가족들은 눈의 초점이 늘 탁했다고 전한다.
방금 전에 한 일이 기억나지 않아서 계속 수첩을 들고 다니면서 적었다. 아기가 어렸다. 밥을 줬는지 안 줬는지 알 수가 없으니 계속 적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놓고 산에 올랐다. 호압사에 가서 108배를 하거나 300배를 하거나, 땀을 흘리고 웃는 셀카를 찍고 내려오기도 했다. 양극성 장애때문에 혀가 어눌해지는 것인지 약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당시 내가 먹었던 우울증약은, 일반 우울증 환자들의 세 배에서 다섯 배 정도 되는 양이었다. 자살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고, 의사는 내가 입원해야 할 단계라고 했으나 일상에서 버티는 게 회복이 빠를 거 같다며 약을 강하게 처방했다. 내가 약을 완전히 끊은 것은 2016년이었다. 약 8년, 양극성장애, 우울, 공황장애등의 복합적 정신과 투병이 간헐적으로 있었다.)
4회기를 넘어서면서 참가자들의 말이 많아졌다. 몇 명은 망상이 있는 게 확실했고 몇 명은 강박이 엿보였다. 꾸준히 치료를 받는 재활자들이라 수업에 적응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참가자들은 아름다웠던 과거를 나에게 들려줬다. 반짝이는 시냇물과 북적이던 마을잔치, 행복했던 여름날의 화목한 가족의 나들이, 사랑받고 자란 어린시절, 자랑스러운 어버이에 대해서 말하기도 했다. 지금도 사랑하는 가족에 대해서 말했다.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 많이 아팠다. 헤어진 연인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얼마나 그리운지 말했다.
마지막 수업이었던 오늘, 나는 10년 후 나의 모습을 써보자고 했다. 구체적인 모습을 만들어내는데 힘겨워했지만 이내 여러가지 모습을 만들어냈다. 운전면허를 따서 가족들을 태우고 속초에 놀러가기, 집에서 짜장면을 만들어 가족들과 즐겁게 먹기, 꽃꽂이 하기, 봉사활동 다니기, 시집을 출판하기, 사람을 많이 만나는 직장에서 일하기. 지금 내가 모두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나는 10년이면, 다 할 수 있을 것이니 절대 이 꿈을 잊지 말자고 말했다.
웃으면서 말했다.
수업일지를 쓰며 나는 다시 운다.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내.
그들을 괴롭힌 누군가가 있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누군가가 있었을거라고, 어떤 사건이 있었을거라고. 그들의 영혼이 나에게 그리 말하는 듯 했다.
어쩌면, 내가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연두가 가득하던 계절에 만나, 장미꽃이 만개한 날 헤어졌다. 꽃이 다 피었다는 것은 곧 진다는 이야기다. 경주(가명) 씨가 자기를 잊지 말아달라고 했다. 경주 씨의 삶의 이야기를 나누어줬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잊지 못할 거라고 대답해줬다.
모두의 회복과 행복을 빈다.
진심으로 간절히.
아픈 수업이었으나,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안녕. 아름다운 사람들.
이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울어도 된다.
지난 주 내내 안 좋은 생각이 들어 힘들었다는 참가자가 “평안하다”는 단어를 골랐다. 오늘은 괜찮다고.
바쁘게 살아야 하는데 게으름을 피운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참가자는 “미안하다”와 “바쁘다”를 골랐다. 그에게 일주일에 닷새를 바쁘게 산다면 이틀은 게을러도 괜찮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환하게 웃었다.
시를 쓰고 SNS에 올리는 참가자도 있다. 오래된 약물복용으로 감정이 얼굴을 뚫지 못하거나, 가상의 풍선 하나 만들어놓고 그 안에 들어앉은 것 같은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최근들어 많이 호전되었다는 한 참가자가 유년시절 가족들과 산속의 계곡에 놀러가 아버지와 함께 가재를 잡고, 아버지가 가재는 절대 날 것으로 먹으면 안된다고 얘기한 게 기억난다는 추억담을 적었다.
그가 쓴 글을 내려놓고 다른 일정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나는 그의 글을 읽고 눈물이 터져서 서둘러 휴지를 꺼내 눈가를 꾹꾹 눌렀다. 글 아래 포스트잇을 붙여 적었다.
“사랑받고 자란 유년시절이 반짝이네요. 진실한 마음을 담은 단정한 문장이 좋습니다. 함께 뛰놀던 마을의 이야기도 궁금해집니다.”
가장 행복했던 날을 함께 적었다.
내가 선정한 행복했던 순간은 자신이 평생 닿지 못할 열망을 담고 있다. 어떻게 해도 그 순간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을 알아서, 기억이라고 이름 붙이고 서랍 어딘가에 넣어두는 것. 행복한 날을 떠올리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순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비통한 날을 떠올릴 때는 자신을 대견해하고 잘 넘겼다고 억지로라도 생각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올가미가 있다.
자기 목을 조르는 올가미. 벗어날 수 없는 내 올가미. 그 목줄을 내가 쥐고 있는데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올가미.
나를 후려치는 감정을 모두 똑바로 바라본다는 건 대체 얼마나 강인해져야 하는걸까.
이것은 병이고, 완치가 어려우나, 잘 관리하면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라는 센터의 안내문을 곱씹는다.
3회차.
교실에 앉은 최 씨는, 간명하고 간결하게, 자기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했다. 내가 주는 주제로 시작해 유치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끌어오는데, 엘리트계층이라 주장하는 자들의 욕망 가득한 글과 다르게 담백하고 소박한 욕심을 담아 자신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 결론을 냈다.
오늘의 주제는 “나는 무슨 색깔인가요”였다.
최 씨는 나는 빨간 색입니다. 라고 서두를 시작했다. 아이언맨의 슈트가 빨간 색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시작한 이야기는 아이언맨의 삶 속으로 쑥 들어갔다가, ‘나도 아이언맨처럼 다른 사람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라고 마무리했다.
나는 최 씨의 정확한 발병사유를 모른다. 아마 곧 알게될 것이라 생각했다. 한 사람이 써내는 글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의 궤적을 대략 유추하게 되고 그 사람의 결핍이 어느 지점인지 보이는 때가 온다.
생애사쓰기에서는 나의 가장 최초의 공동체를 이야기하게 되는데 좋으나 싫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족을 얘기한다. 최 씨는 자신의 최초 공동체의 인물들을 적으며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패륜적인 면을 적었다.
“지금은 어머니와 같이 지내시나요?” 내가 물었다. 그가 지난 주에 어머니가 운동기구를 사다주었다고 말했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은 질문이라 여겼다.
“네. 엄마하고, 남동생도 같이 있어요.”
“남동생하고는 어때요?”
“서로 생활을 침범하지 않아요.” 나는 정말 이상적인 관계라며 박수를 치고 웃었다.
최 씨가 오늘 간략하게 적은 것만 봐도 아동학대,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것이 너무도 명확했다. 건너편에 앉은 김 씨는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는 자녀였는지를 계속 강조했다. 그 사랑에 비해, 그렇지 못한 어떤 상황이 있었을 것이다.
한 시간반동안, 이들과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아프다.
엄마는 이모가 ‘미쳐서 죽었다’고 했다. 이모는 조현병이었을 것이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폐쇄병동에 갇힌 이모는, 밥을 차려다주면 제어할 수 없을 때까지 밥을 먹었고, 제어할 수 없을 때까지 김치만 먹곤 했다고 말했다. 기껏해야 20대 초반이었던 엄마는 그런 이모의 보호자였다. 두 자매는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일을 겪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두 사람은 전쟁이 끝날무렵 예닐곱살이었으니까. 지금의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 있었을 것이다.
이모는 병원에서 나온 뒤, 육체에 병을 얻었고 치료 기회를 놓쳤고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엄마는 세상에 남았고 성격장애가 고착되었다. 결국 내가 당신을 외면해야 하는 노년을 맞았지만, 당신은 여전히 혈기왕성하게 잘 지낸다.
생명력.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강인하게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바람불면 꺼질 듯이 여리여리하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녹두빛을 좋아한다던 김 씨는 2주 연속 “무언가 해야한다.”는 이야기를 적고 있다. 김씨가 적은 이야기는, 스파게티를 만드는 법, 난초를 키우는 법, 건강하게 사는 법. 같은 것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김수복의 시를 소개했다.
“봄나무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두 눈을 감고 한없이 호수의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눈을 뜨고 죽고 싶었던
겨울에서
이제는 한없이 바람에게 말을 걸고 싶은
봄나무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라는 구절을 읽으며, 터지는 눈물을 눌렀다.
사는 건 쉽지 않고 외로움은 끝이 없는데.
아무 잘못 없이, 병을 가졌다는 이유로 평생을 차별받고 배제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프고, 또 아프다. 다른 말을 찾을 수 없이. 아프다.
서울의 어느 정신건강지원센터,
조현병 자활대상자들의 글쓰기,
제 2주차.
모 지역의 정신건강센터에서 7회기의 삶 쓰기 강좌를 진행한다. 대상자는 조현병환자들이다. 여기 환자라는 이름을 붙이는 게 어색하다. 환우라는 말은 더 이상하고.
조현병이라는 이름은 정신병이라는 이름보다는 낫다. 나는 정신병이라는 이름보다 뇌신경질환같은 이름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조현병에 대해서 공부를 더 해야 한다. 지식은 일천하다.
긴장하고 만났지만 글쓰기 능력도 괜찮고 의사소통도 잘 되었다. 각자의 세계를 흰 종이에 쭉 써내려가는 것을 보며 마음이. 뭐랄까. 심장에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시 쓰기를 즐긴다는 참가자가 써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업무용 다이어리에 이렇게 적었다.
모두 각자의 세계가 있다. 누구나 자기만의 세상을 산다. 그 세계는 각자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그 세계를 말이나 글, 소리나 그림과 같은 각자의 언어로 풀어낼 수 있다면 축복이다. 모두의 세계는 존중받아야 하며, 그 자체로, 아름답다.
글을 쓰는 타인의 세계를 탐색한다.
세계와 세계의 씨줄과 날줄을 이어보고 퍼즐을 맞춰본다. 타인의 숲에 흩어진 보물을 찾아낸다. 구슬을 엮어 목걸이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목련이 피면 봄이 왔다는 걸 알 수 있다.”
오늘 처음 만난 김 씨가 쓴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