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원 그리고 10원

 
지난 금요일 롱바이라는 동네에 갈 일이 있어서 자전거를 타고 출발을 했었다.
날씨는 갑자기 추워졌고, 시간은 촉박해, 털모자와 목도리를 하고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보니 땀이 나서 옷은 젖어가는데 바람이 칼같아서 속도는 나지 않았다.
이제는 아무렇게나 아플 수도 없는 생활임을 알고 있었다.
자주 가던 시엔시아루 스타벅스앞에 다다라 자전거를 묶어놨었다.
그리고 오늘 저녁 자전거를 다시 찾으러 갔다.
 
원두커피가 떨어져 가서 4봉지를 사면 한봉지를 꽁짜로 주는 스타벅스 수첩에 도장을 한 개 받으면서 골드 코스트를 가장 굵게 갈아달라고 했다. 그리고 22원을 내고 작은 컵에 담긴 카페 모카를 주문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겨울. 스타벅스에서는 붉은 색 크리스마스 종이컵을 쌓아놓고 있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마시고 갈 것이라 머그컵에 커피를 담아주었다. 아마 전세계 어디를 가도 같은 노래가 나오겠지, 스타벅스에서는 조용한 캐롤이 나오고 있었다. 언제나 그 곳의 음악은 들릴 듯 말 듯 하다. 언제나처럼, 하얀 건물로 된 시엔시아루 스타벅스밖의 야외테이블에는 독한 연기를 내뿜는 홍쑤앙시라는 담배를 피우는 상해의 중년남자들이 하나 둘 앉아있고 안에는 노트북을 펼쳐놓은 남자와 여자들, 광동어를 하는 사람들, 일본어를 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있다.
우리가 늘 앉던 2층 창가엔 자리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커피를 들고 1층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커피를 다 마시는 그 시간을 기다렸다.
 
묶어놓았던 자전거의 자물쇠가 열리지 않았다. 자물쇠가 잠겨버린 자전거는 매우 무거웠다. 튼튼한 자물쇠가 굴러가지 않는 자전거 바퀴에 끼어 타이어의 한 쪽 바닥만 긁히고 있었을 것이다. 장기판을 벌리고 있는 자전거 수리공을 찾아 자물쇠를 펜치로 끊어 버리고 새 자물쇠를 샀다. 그는 나에게 자물쇠값 20원을 달라고 했고 수공비는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 수리공의 옆에 써 있던 回收 香煙이라는 글자를 보면서 담배를 돌려받아 무엇을 한다는 말인가를 고민했으나, 나는 그에게 묻지 않았다.
 
10미터도 가지 못해서 자전거 뒷바퀴가 펑크 났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자전거를 끌고 가 그에게 바퀴에 바람을 넣어달라고 했으나, 타이어는 바깥쪽도 안쪽도 모두 펑크나 있었다. 언제나처럼, 자전거 수리공들이 모두 그러는 것처럼, 안쪽 타이어를 끄집어 내어 바람을 넣었다가 더러워진 물이 담겨있는 세수대야에 타이어를 부분씩 담궈서 물이 새는 부분을 확인한다. 그리고 은박지로 된 강력한 테잎을 붙이는 것이 이들의 수리법이다. 바깥 타이어는 어떤 물리적인 힘에 의해 찢어져 있었다. 오는 길에 찢어졌는지, 누군가가 내 자전거를 가져가려다가 자물쇠 열기에 실패하고 화가 나서 타이어를 찢어버렸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타이어안에 못쓰게 된 폐타이어의 조각을 이어붙여 자전거는 다시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2원을 다시 주었다.
키가 작은 그 남자는 아까 자물쇠를 살 때 얘기했으면 다시 2원을 주지 않아도 됬을 거라며 웃었다. 22원. 커피값, 그리고 자전거를 고친 수리비.
 
슈주허를 넘어오는 길에 달이 커다랗게 떠 있는 걸 보고, 아이를 안고 포르노 CD를 파는 여자들을 뒤로 한 채 사진을 찍었다. 문혁때나 썼을 법한 군청색 모자를 쓴 노인이 길을 잃어서 그러니 10원만 보태달라고 했다. 검은 핸드백을 메고 동그란 항아리 몸을 가진 노부인이 그 뒤에 따라 서 있었다. 팅부동이라고 거절을 했으나, 이미 나는 그들의 말을 모두 알아듣고 있었다. 지갑을 열어 10원을 건네는 나에게 그들은 핸드폰 번호를 달라고 했다. 내일 갚겠다고.
나는, 괜찮다고, 조심해서 가시라고 인사를 했다. 설령 그들이 거짓말을 했더라도, 내 양심은 뿌듯한 것이었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도둑이 되거나 거지가 된다. 그들은 어느 편이었을까. 정말로 길을 잃은 노부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비슷한 방법으로 구걸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거지에 비슷한가, 도둑에 비슷한가. 모든 것은 명확하지 않다. 어디쯤엔가 비스무리하게 서 있는 것이었다.
 
22원짜리 커피를 사 먹고 자전거를 타고 슈주허 다리를 건너던 나처럼.
 
2004. 11. 28.

소나기가 지나간 저녁

 
지난 밤에 공씨디를 사러갔던 대형전자상가에는 내가 찾는 공씨디가 없었다. 지난 금요일쯤 그 곳에 갔을 때 남아있는 19장의 씨디를 모두 챙겨나왔는데, 그 빈자리 그대로였다. 빈자리 그대로, 장사를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어젯저녁 심한 돌풍과 비가 내렸던 그 축축하고 어두운 길을 걸어왔었다.
 
집 근처에 있는 다른 전자상가는 흡사 용산전자상가의 축소판 같았다. 공씨디를 여러종류 쌓아놓고 파는 집이 많이 있었다. 예상보다 저렴한 가격, 양질의 씨디를 스물 다섯장 사고 돌아오는 길에 비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올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집을 나서기 전부터 하늘이 어두웠고, 명확하지 않는 하늘을 바라보는 내 시야안으로 비구름이 분명히 몰려오고 있었는데, 나는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단순히 귀찮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비를 맞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여름, 비를 한 참 맞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감기에 걸린다고 했다. 소설이나 영화속의 주인공들은 유난히 나약한 탓에 폐렴에 걸리기도 했다. 그러다 죽는 주인공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존재가 아님을 알고 있다. 적당히 집에 걸어들어가도 그리 많이 젖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에 자주 가던 국수집에 들어가 만두국을 한 그릇 시켰다. 이 집은 여름에 냉만두국과 더운 만두국을 같이 파는데, 문 앞에 멍한 눈으로 서 있던 종업원은 찬 거? 더운 거? 라고 생뚱하게 들리지도 않는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만사가 귀찮은 그 태도, 내 깊숙한 곳을 보는 것만 같아 두려웠다. 50원짜리 지폐를 내고 잔돈을 퉁명스럽게 거슬러 받으며 나는 창가자리에 앉아서 비가 쏟아지는 길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느 새 오색의 비옷을 챙겨입고 자전거 위에서 페달질을 하고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기다리는 아늑하고 가난한 집으로.
 
방금 전 내가 돌아온 그 길 어귀엔 대형 극장의 공사가 몇 개월째 계속 되고 있었다. 저 멀리 내가 다니던 헬스장도 보였다. 그 어귀에서 쇠그릇을 앞에 놓고 얼후를 연주하던 남자가 얼후를 집어들고 일어섰다. 내가 어젯밤 이 길을 지났을 때 주머니를 뒤져 1원을 건네줬던 그 남자 같았다. 대머리가 살짝 벗겨진 그 남자가 앉아있는 그 자리엔 바로 뒤 극장을 짓는 공사장에서 나오는 독성 가득할 법한 시궁창 냄새가 올라오는 액체가 흐르고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빗줄기가 거세지자 남자는 더럽고 낡은 바지를 걷어올렸다. 갈색 슬리퍼를 입은 그 남자의 발은 비를 맞는다 해도 도무지 깨끗해질 것 같지 않았다. 호주머니에서 누렇게 변색된 수건을 꺼내 남자는 벗겨진 머리와 얼굴을 닦았다. 그 남자에게 뛰어가 5원짜리 지폐를 건네주고 싶었다. 5원이면, 밥도 한 그릇 먹을 수 있고, 1원을 보태면 어느 욕실에 들어가 샤워라도 한 차례 할 수 있는 돈이다. 10원이면, 내일 아침도 먹고 내일 점심까지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저 멀리 습기 가득찬 통유리창이 달린 그 헬스장을 다녔을 때 그곳까지 가는 곳에 앉아있던 서너명의 얼후를 든 남자들과, 구부러진 다리를 가진 남자 아이와, 머리가 하얗게 탈색된 남자아이를 안고 있던 여자를 기억했다. 그 때, 나는 매일 매일 그 길을 지나며, 매일 매일 그들을 외면했다. 이제 나의 가난이 그들의 가난을 동정하게, 그들의 가난을 이해하게 한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쌀 한 톨 건네주지 않는다는 진실도. 그 사람에게 내가 돈을 주고 싶다는 생각은 나누고 싶은 생각에서였는지도 모른다. 나의 한 끼와 그의 한 끼가 동일해지도록, 나의 근원없는 억울함과, 그의 이유있을 억울함에 대해서 공감을 형성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내가 만두국을 반쯤 먹고 나서 양이 많다고 느꼈을 때쯤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 전 나에게 살기 싫은 표정을 보여줬던 그 여자 종업원은 내 뒤에 바로 들어온 두 명의 젊은 사내들에게 농지거리를 하며 살살 거리고 있었다. 남자라는 존재가, 그녀의 삶을 바꿔놓는가. 때로 여자는 남자를 살게 한다. 그리고 때로 남자가 여자를 살게 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무슨 이유로 잣대를 들이미는가. 사람은, 동물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인데.
 
자신의 밥줄을 가만히 들고 서서 비를 맞고 있던 그 남자가 사라지고, 나의 만두국 그릇속의 만두도 남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단 한 번도 비오는 하교길에 누군가의 우산속에 뛰어든 적도, 누군가가 마중을 나온 적도 없었다. 비가 조금 더 많이 온다면, 그래서 지금 추레하게 슬리퍼를 끌고 나온 나에게 누군가 우산을 씌워준다면 그 사람이 당황할 만큼 그 우산속에서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다행스럽게, 비는 그쳤고, 나는 울 기회를 놓쳤다.
 
한 차례 소나기가 지나간 길엔 풀과 물이 만난 냄새가 가득했다. 상해의 그 고단한 여름은 사라진 것만 같았다. 길에는 시원한 바람, 비 온 뒤에 산책을 해야겠다는 그 누군가의 말이 생각나는 공기만 가득했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나에게 그래도 혼자 자기엔 조금 넓은 침대가 있고 에어컨까지 달린 작은 집이 있다는 사실이 더 할 수 없는 사치로 느껴졌고, 그 사치를 영유하고 싶었다.
 
요즘은, 해가 너무 늦게 진다.
 
2004. 7. 13.

볶음 국수 한 그릇

 
먼 하늘에서 구름이 밀려오는 게 보였다.
 
구릉구릉 거리는 소리가 공기를 휩싸더니 바람이 심하게 불기 시작했다. 비가 오려나보다 생각하자 마자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는데, 후두둑 거리는 소리가 요란해 마치 우박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 비는 오래 가지 않았고, 10여분 만에 그쳐버렸다. 비가 그쳤다고 생각하고 슬리퍼를 신고 국수나 한그릇 먹어야겠다 하고 아파트를 나섰을 때 굵은 빗방울은 셀 수 있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조금씩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복도 창가에 서서 다시 집으로 올라가 우산을 챙겨나와야 할까를 아주 잠깐동안 고민하다가 그냥 몇 방울의 비라면 맞아보기로 했다.
 
국수집에 도착할 때쯤엔 그 몇 방울의 비도 멈추었고, 오랜만에 찾은 그 국수집의 볶음국수의 가격이 4위안인지, 5위안인지가 잠시 헷갈렸다. 계산대에 서서 종업원 아가씨에게 4원인지 5원인지를 묻고 동전 4개를 올려놓고 자리에 앉으려고 거의 텅 빈 식당을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TV 소리가 났고 맨 가운데 테이블 의자위에 커다란 흰 고양이가 늘어져 있었다.
귀여워하기엔 너무 커다란 고양이, 나는 그 자리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벽쪽 테이블에 앉았다. 눈이 마주친 고양이는 의자에서 내려와 어슬렁거렸고 반바지를 입은 내 다리 주변으로 왔다갔다 하더니 내 의자밑으로 들어가 맨 발을 툭 건드렸다. 흠칫 놀라 다리를 움직였더니 고양이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TV 소리는 작은 흑백TV를 테이블위에 올려놓은 직원아저씨의 것이었다. 주방에선 키가 큰 젊은 요리사가 커다란 후라이팬 위로 올라오는 불과 함께 놀이를 하는 듯 했다.
 
그 때쯤 바로 옆에 안경을 쓰고 키가 작은 여자가 오렌지색 티셔츠를 입고 비닐봉지를 탁자위에 소리나게 올려놓으며 앉았는데 맞은 편에 동행한 열 일고여덟 살쯤 되어보이는 남자아이에게 계속해서 목소리를 억누르며 화를 내고 있었다.
상해방언은 스즈츠 발음이 많아 듣기에도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탁한 소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언어를 짓눌러가며 그녀는 계속해서 소년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소년은 탁자위에 배낭을 확 집어던지기까지 했으나 물론 싸움이 될 상대도 되지 않아보였다. 그녀와 소년은 모자간처럼 보였는데다가, 여자의 목소리는 짓누르는 깽깽거리는 목소리였고 남자아이는 계속해서 징징거리며 웅얼거리는 말투로 말꼬리를 질질 끌고 있었다.
 
볶음국수가 다 되었다는 말을 주방에서 했을 때 이 집에서 아침을 먹을 때처럼 나는 습관적으로 일어나 주방에서 작은 탕 그릇과 국수그릇에 젓가락까지 챙겨 내 자리로 돌아왔고, 나보다 한 걸음 늘 늦을법한 종업원 아가씨가 뻘쭘하게 옆으로 다가왔으나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자리로 돌아왔다.
 
급기야 옆자리의 소년은 울음을 터뜨렸고 주방사람들도 힐끔힐끔 그 모자를 쳐다봤으나 여자의 깽깽거리는 꾸중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내 국수를 가져다 줄 기회를 빼앗긴 종업원 아가씨가 소년의 식사를 가져다주자 아이는 울면서 징징거리면서 음식을 밀어넣고 그 앞자리에 앉아 아무것도 먹지 않는 여자는 계속해서 짓누르는 목소리로 앵앵거리고 있었다. 소년은 반쯤 식사를 하고 벌떡 일어나 냅킨을 가지러 갔다와서는 자리에 앉았다가 밖으로 휙 나가버렸고 여자는 여전히 변함없이 끈질기게 쫑알거리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 손님수보다 많던 종업원들이 모두 빤히 밖을 쳐다보았고 야채를 도마위에 올려놓고 신나게 칼질을 하고 있던 남자는 휘파람을 불면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킥킥 댔다. 나는 상해방언을 모르므로 그 두 사람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장난스럽게도 내가 그 순간 한 생각은, 상해방언을 할 줄 안다면, 이 땅에서 사람들이 왜 저렇게 싸우는지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수를 다 먹고 일어나는 길엔 잘 먹었다고 말할 필요도, 잘 가라는 인사도 필요없는 순간이었고, 국수집을 나오자마자 그 앞의 한 남자가 나를 바라보며 맨손으로 코를 팽팽 풀어대고 있었다.
뚱뚱한 시츄가 뚱뚱한 아줌마와 함께 궁둥이를 들썩거리며 지나갔고 아파트 단지에는 면식이 있는 사람들끼리 이제 들어오냐는 안부를 묻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나는 터덜걸음을 걸으면서 핸드폰으로 문자메세지를 주고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다가 담배를 사야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고 다시 아파트 단지앞에 있는 편의점엘 갔다.
 
비는 여전히 오지 않는데 하늘은 구룽구룽하는 소리를 내고 친구에게선 한국드라마 “엄마야 누나야” 가 너무나 재미있다는 문자가 왔다.
 
2004. 5. 21.

NOT THAT BADLY

 
# 1.
 
“근데 이 나라 사람들은 왜 식당이고 술집이고, 잡상인들이 이렇게 드나들게 내버려두죠? 여기도 그래. 복권까지는 괜찮다 쳐. 뻥튀기까지도 넘어가. 근데 왜 술집에 들어와서 한치 안주 사라고 그러는데도 왜 주인이 가만히 내버려두죠? 설마 이런 술집까지 국영인 건 아니겠죠?”
“외국인들만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베트남 사람들은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나라가 아직 가난하지만 남의 고된 생계수단을 빼앗으면서까지 부자가 되려고 하진 않아요.”
 
방현석 소설 《존재의 형식》中…
 
 
# 2.
 
10원짜리 시들어빠진 장미꽃을 들고 와 사달라고 졸라대던 계집아이는 그 골목에서 상주하고 있었다. 그 계집아이에게 장미꽃을 다섯 송이 사고 난 다음에, 그 아이에게 학교를 가겠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아이는 콧방귀를 뀌며 등을 돌렸다. 그 다음번 술취한 나를 본 그 아이는 아는 체를 했다. 그리고 더 이상 나에게 꽃을 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흥청거리는 거리를 잰걸음으로 걸어가던 나에게 달려들던 빡빡머리 사내아이에게 학교에 가겠냐고 물었었다. 그리고 엄마 아빠는 어디에 있냐고 물었었다. 아이는 대답을 하지 않고 손만 내밀었었다. 그리고 나는 지갑을 뒤져 10원짜리 지폐를 건네주었다. 저만치에 서 있던 애 업은 여자가 득달같이 뛰어왔었다. 애업은 여자. 그녀와 나의 나이차이는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시간이 지나고, 이번 달에 만났던 아이들과 애업은 여자는 깨끗한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리고 아가씨 예쁘네요 라는 말까지 건네기를 서슴치 않았다. 아이들은 땟국물에 쩔어있지 않았으며 느물거리며 웃어대기까지 했다. 그 아이들이 작년 이맘때 혼자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그 길에서 만났던 아이들인가는 기억나지 않는다.
 
巨鹿路에 있는 Good Fellas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예쁜 여자애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하루에 12시간 근무이지만, 대학생이 1000위안짜리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일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그 빠에는, 늘 담배상자를 목에 건 젊은 여자가 들어와 술취한 손님들에게 밀수담배를 공급해주었다. 가끔은 DVD를 든 남자가 들어와 혼자 와 앉아있는 외로운 노란머리의 남자들에게 DVD를 고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주기도 했다. 우리는 빠 밖에서 부채질을 하고 있는 양꼬치 장사에게 숫자를 말하면 그녀가 빠 안에까지 가져다 주었다. Good Fellas의 2시가 넘으면, 시내의 모든 빠가 문을 닫고, 거기에 몰려 있던 인구들이 그 좁아터지고 환기 안되는 자리에 앉거나 서서, 담배를 사고 양꼬치를 뜯어먹으며, DVD를 고르기도 했다.
 
과연, 그들의 마음도, “남의 고된 생계수단을 빼앗으면서까지 부자가 되려고 하진 않아서” 인것인가. 모든 것이 용서되는 이 땅에서의 윤리는, 귀찮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다면 나의 모든 판단은 원점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었을까. 모종의 관계, 음모이론에 충실한 나의 기준은 왜 이다지도 선량하지 못한 것이었을까.
 
2001년 밥 빌리러 양푼을 들고 옆집 식당으로 들어가던 내가 밥을 먹던 식당의 어린 종업원을 이해하지 못하던 서양아이들을 나무라던 저녁이 있었다. 남의 생계. 남의 고된 생계. 나는 또 오늘 누구의 고된 생계를 훼방놓고, 누구의 고된 생계를 용서했는가.
 
2004. 4. 28.
아주 오래된 어느 날의 기억을 발견해서 옮긴다.

꿈없는 세상 – 그들의 눈동자

내가 상하이에서 학부를 다닌 화동사범대학은 말 그대로 사범대학인지라 국가에서 적극(?) 지원하고 졸업한 아이들의 취업이 모두 보장되어 있으며 등록금도 타 학교에 비해서 저렴한 학교였다. 상하이에는 명문이라 불리는 복단(FUDAN)대학교와 각 단과대학이 잘 되는 몇 개 대학이 있었는데, 이과쪽은 교통대(JIATONG), 건축은 동제대(TONGJI) 외에도 상해외대나 상해대학교등이 있었다. (대학이름은 한국식 한자 독음으로 표기함)

화동사대는 캠퍼스가 예쁘기로 유명했다. 애초에는 복단대에서 학부를 하려고 갔으나 복단대에 한국학생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모양새를 보고 학부를 옮기기로 했다. 내가 처음 갔던 2001년도 2월에 복단대의 한국유학생은 200명이었는데 그 가을학기에 400명이 되더니 2002년도 2월에는 한국학생만 2000명이 등록을 했다. 언어연수생에 국한한 숫자였다. 김정일이 2000년에 상하이를 다녀간 뒤 천지가 개벽했다고 선언한 후 한국에서 상하이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 급격하게 한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학부지만 나는 나름대로 한국에서 공부를 좀 하다 온 애들이 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24세 미만이었다. 나는 당시 스물 일곱이었으니, 내 위로는 주재원으로 왔다가 한 학기 정도 어학연수를 하려고 쉬는 아저씨들 외엔 몇 명 없었다. 학부를 하겠다고 온 내 또래도 당연히 없었다.

복단대는 중국 본토의 양자강 이남의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다. 학구열도 괜찮았으나 유학생이 과하게 몰리다 분리정책을 썼다. 대신 화동사범대학은 그렇게 많은 유학생이 몰리지 않아 분리하고 말 것도 없었다. 중문학부 한어언문학과 (중국어는 소수민족의 언어까지 통틀어 말하기 때문에 한어언문학부는 漢字로 된 문학만을 말한다)에 전무후무한 한국유학생이 있었으니 그게, 나와 나보다 다섯 살 어리던 박모씨. 우리 둘 뿐이었다.

화동사범대는 국가정책대학이라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타 학교보다 싼 학비와 기숙사 지원금등이 관건이 되었다. 다들 시골마을에서 플랜카드 하나씩 걸고 온 애들이라고 보면 된다. 양자강 이남 사람들은 체격이 작은 편인데 아이들이 어찌나 고만고만한지, 나이도 어렸지만 중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장 어린애는 열 일곱짜리도 있었다. 월반에 월반을 거듭한, 말하자면 그 고장에서는 대단한 수재였던 아이라는 거다. 중국내에서도 가난하기로 소문한 안휘성 아이들이 많았고 소수민족 아이들도 몇 있었으며 1학년 교실엔 그야말로 땟구정물이 줄줄 흐르는 코흘리개 같은 분위기였다. 상하이 현지에서 우리 과에 들어온 아이는 극소수였다. 혼자 뽀얀 얼굴에 배낭이 아닌 가죽가방을 메고 다니는 나에게 어디서 샀냐고 물어보곤 하는 아이가 상하이 아이였다. 유학생을 제외하고는 일괄적으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는데 기숙사는 8인실이었다. 2층짜리 침대를 벽에 붙여 두 개씩 놓으면 꽉 차는 방. 겨울엔 난방이 되지 않았고 온수공급도 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붉은 보온물통에 뜨거운 물을 받아다가 차가운 욕실에서 머리를 감았다. 11시인가 12시쯤 되면 기숙사에 전기는 차단되어 시험기간을 앞두고 한 달 정도는 강의실을 밤새 열어주었다. 아이들은 기숙사에서 나와 밤새 차가운 강의실에서 공부를 했다.

그 학교에서 아이들과 지내며, 나는 언제나 동동 떠 있는 섬같았다. 내가 당시 썼던 생활비는 한 달에 한국돈으로 35만원 정도였는데 그 정도면 충분히 먹고 술도 마실 수 있는 돈이었다. 가끔 스타벅스에 가서 하루종일 진치고 공부를 하다 올 수도 있었다. 외국인 유학생이라고 알바생이 시음음료도 잘 갖다줬다. 대신 내 동무들은 내복을 사느냐 휴대폰을 장만하느냐를 가지고 고민해야 했고 내가 쓰는 돈의 3분의 1정도로 한 달을 생활했다. 가끔 한인들이 중국어 과외선생을 구한다고 알아봐 달라 하여 잘 가르칠만한 친구를 보내놓으면 너무 어리다는 둥, 예쁘지 않다는 둥, 별 씹스러운 소리를 지껄였고 이 개자식들은 시간당 25위안 (당시 한화 4천원 가량)이 비싸다며 그것도 깎으려고 들었다. 나도 노하우가 생겨 2학년 끝날 무렵부터 한국인 중 누가 원어민 과외를 찾으면 이쁜 여자 찾으시려면 KTV(룸싸롱) 가시고 진짜 공부하실 거면 나한테 얘기하라고 대답하곤 했다.

내가 영어를 알려주고 중국친구가 중국어를 가르쳐주는 식의 언어교환을 하던 복단대 친구는 나보다 2학년 위였는데, 안휘성에서 온 아이였다.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그녀가 얻은 직장에서의 봉급은 택시기사의 반절도 안 되는 금액, 그러니까 내 한 달 생활비가 못 되었고 그 친구가 기숙사에서 나와 사는 주택은 우리식으로 말하는 닭장집 같은 곳이었는데 천장에 백열전구 하나 덜렁 달려 있는 방 하나에 공동주방을 쓰는 곳이었다. 그래도 그 친구는 맘에 든다고 좋다 했다.

부자동네로 소문난 절강성의 항주나, 복건성의 온주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온 아이들의 겁에 질린 눈동자가 자꾸 떠오른다. 커피숍에서 아이패드를 놓고, 노트북을 놓고 영어책에 미친 듯이 줄을 치며 이어폰을 끼고 있는 이 나라의 20대들을 볼 때마다 2002년도쯤 내가 함께 밥을 먹던 땟구정물 흐르던 그 아이들이 생각난다. 눈빛이 닮아서다.

10년도 훨씬 전에 하나언니 하나언니하며 노트를 빌려주는 아이들은 갑작스럽게 거대한 도시에 와서 돈의 위력에 주눅들어 하루 하루 조심스럽고 위태롭게 살아갔다. 중국어 과외를 하러 갔는데 이상한 몸짓을 보내는 한국남자도 만났고 눈 뜨면 코 베어간다는 한국속담같이 상하이라는 도시는 학교만 벗어나면 줄줄이 돈 달라는 곳만 있었는데 아이들의 미래는 보장되지 않았다. 아이들의 꿈은 월급 꼬박꼬박 받는 학교 선생이 되는 것이었다.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우거나, 고전문학의 당나라 詞도 잘 짓던 아이들의 재능에 비해, 아이들의 눈빛은 늘 흔들리고 불안했다. 물론 그 눈빛엔 맑고 순수함이 깃들어 있었고 3학년이 되어가면서 아이들은 살아남는다는 것이 뭔지, 도시가 뭔지, 돈이 뭔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 아이들에게 결여되어 있던 것은 정확한 방향과 철학, 꿈이었다. 막스 레닌 시간에 모두 엎어져 자던 아이들에게 철학은 돈 버는 일이었던 것처럼, 지금 내가 이 도시에서 옆 도시에서 만나는 청년들에게 자꾸 그 모습이 중첩되어 나타난다. 대신 이 나라 오늘의 눈빛은 원한과 불만이 조금 더 강하게 엿보인다는 것이다.

꿈을 위해 달린다고 얘기하는 청년들이 있다. 옆에서 지켜보면 도대체 쟤가 말하는 꿈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꿈을 위해 살아왔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있다. 그 역시도 그 사람이 말하는 꿈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온갖 부조리에 침묵하고 타협하며 결국 이 시대가 말하는 꿈은 돈을 많이 번 다음에 생각해야 하는 것인 모양이다.

저 사람이 무엇을 꿈꾸는지 명확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아주 소수지만. 그들을 응원하며 나도 그렇게 늙어가고 싶어졌다. 그간 타인의 눈에 비친 내 눈동자엔, 맑고 순수함 따위는 없었겠지만, 원망이나 불만이 조금이라도 가셔지는 날을 죽기 전엔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꿈 없는 세상, 꿈꾸기 힘든 세상에서, 제대로 된 꿈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 도시에 둥둥 떠다니는 불안한 눈동자가 거대한 황포강의 야경을 바라보던 아이들의 순수한 눈동자를 자꾸 그립게 한다.

2014. 9. 24.

2004년 12월 1일 -자전거 고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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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1일

이 날.
이 날 아마 날씨가 약간 춥긴 했고,
며칠 째 우울감에 휩싸여 있었을거다.
과외를 가는 길이었고,
길을 잘 못 들었는데 자전거마저 고장이 났었지.
그래서 길에서 만난 자전거 수리공에게 자전거를 고쳤는데, 아마 그 수리공이 터무니없는 값을 불렀을거야.

근데 그 터무니없는 값이라는 게 12위안이거나 20위안이었을게야. 그 때 아마 스타벅스 커피가 30위안이 좀 안됬나 그럴껄.

이 날도 분명히 시엔시아루 스타벅스에서 6시간 정도를 뭉개면서 외국인 유학생이라는 특권 아래서 무료 시음료도 몇 잔 받아먹고 그랬을지도 몰라.
이 날이 아니었다 해도, 그 전 날 그랬거나, 그 다음날 그랬거나. 아무튼 스타벅스를 도서관 삼아 다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리고 자전거 수리공과 흥정을 하는 거지. 한 잔의 커피값도 안되는, 그 저녁의 노동에 대해서.
손톱밑의 때는 평생을 닦아도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은, 호적은 분명히 없을 게 뻔한, 자기 이름이나 겨우 쓰면 다행인. 그 남자와 길바닥에서 말야.

그리고 슈주허를 넘으며 생각했겠지.
나는 대체 뭔가.
나의 돈은 무엇이고, 저이의 돈은 무엇인가.

가난이 내 영혼을 잠식하면,
나는 사기꾼이 될까 거지가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전거를 밀었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