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규제는 과연 게임을 규제했는가

2004년 10월 몇몇 시민단체들이 ‘청소년 수면권 확보를 위한 대책마련 포럼’을 결성해 청소년들의 수면권을 보장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온라인 게임의 셧다운 제도 도입을 촉구했다.

2005년 7월 ‘청소년보호법 일부개정법률안'(대표발의 한나라당 김재경)이 발의되어 처음으로 셧다운 제도 입법이 시도되었으나 게임 업계와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의 의견 충돌 문제로 입법은 무산되었다.

2006년 10월에는 온라인 게임을 포함한 인터넷 중독 방지를 목적으로 ‘정보통신 서비스 중독의 예방과 해소에 관한 법률’이 발의(대표발의 한나라당 김희정)되어 장시간 몰입 시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주의문구와 서비스 이용을 시작한 지 특정 시간이 경과하면 경고문구를 표시하며, 장시간 이용 시 페널티를 부과하며 특히 청소년 이용자에 한해 그 친권자, 후견인 등 법정대리인의 요청에 따라 서비스를 제한할 수 있다는 등의 내용을 법으로 담고자 했으나 마찬가지로 당시에는 무산되었다.

2008년 7월에 ‘청소년보호법 일부개정법률안'(대표발의 한나라당 김재경)이 발의되어, 온라인 게임 업체가 밤12시부터 오전6시까지 온라인 게임 서비스의 제공을 금지하고 있으며, 이를 어기고 온라인 게임 서비스를 제공할 경우, 해당 온라인 게임 업체를 1,000만원의 벌금 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된다.

2009년 4월에 ‘청소년보호법 일부개정법률안'(대표발의 통합민주당 최영희)이 발의되었고, 법안의 내용은 밤12시부터 오전6시까지 온라인 게임 서비스 금지, 청소년 연령 확인 및 게임 가입시 친권자 동의, 게임에 인터넷 게임 중독 경고 문구 표시 등이며 이를 위반하면 1,000만원의 벌금 또는 2년 이하의 징역으로 김재경 의원의 법안과 유사하며 더 상세했다.

2010년 6월 3일에 문화체육관광부의 개정안와 여성가족부의 개정안을 합의하여, 셧다운제 도입의 중재안을 마련하였고, 이후 2011년 4월 29일에 대한민국 국회 본회의에 ‘셧다운제’ 도입을 골자로 대상을 만 16세 미만으로 제한하는 ‘청소년보호법 개정 법률안’을 상정, 통과되었다.

2011년 11월 20일에 공식적으로 셧다운 제도가 시행되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1월까지 계도 기간을 결정하였다.

2014년 4월 24일 헌법재판소에서 합헌 결정을 내렸다.

위키백과 – 대한민국의 셧다운제도

1

위 내용은 위키백과에 실려 있는 셧다운제에 대한 설명이다. 대한민국은 전세계중 유일하게 청소년이라는 특정 계층에게 게임시간을 제한하는 법률적 조치를 실행하였다. 중국이 법적으로 게임을 도박등 규제대상으로 규정한 적이 있지만, 특정 연령계층에 대한 법률적 제한이 실시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최초에 이 법안을 제안한 청소년단체, 라는 곳에서는 “수면권 보호”라는 명목을 내세웠다. 이는 청소년들의 잠잘 권리를 보장한다는 말이다.

특정한 계층이, 또 다른 특정계층의 수면권을 보호할 권한이 있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법적으로 어떠한 계층이 구분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연령대에 대한 구분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꽤 많은 나라에서 동일하게 연령에 대한 제한을 두고 있기도 하다. 청소년이나, 미성년을 보호한다는 명목아래, 공연관람물에 대한 등급제를 실시하고 어떤 계층에게는 관람을 허용하고 어떤 계층에게는 관람을 금지하는 일은 이미 대부분의 문명국가에서 암묵적으로 허용되고 있는 계층의 구분이다.

게임업계에서는 이에 대한 괄목한만한 저항이 없었으며,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대부분의 성인들은 청소년 셧다운제가 필요하다고 동의한 편이며, 게다가 이 법률은 헌법재판소에서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셧다운제를 대부분 게임에 대한 규제로 보고 있지만 이를 단순히 게임에 대한 규제로 볼 수 있겠는가?

얼마 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핵없는 미래를 물려주자”는 구호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적 있다. 청소년은 그 누구에게도 보호를 요청한 적이 없는데, 청소년을 대상화하며 보호해야 할 계층으로 규정하는 정의는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늘 매우 당연하게, 청소년과 미성년들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정해두고 그에 대한 정책을 제안하고 펼쳐왔으며 국가제도 아래 모든 기관이 이 기준을 아무 의심 없이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보호라는 명목은 그들이 보호받을만한 대상이라는 것을 함의하며, 보호받을만한 대상이라는 것은 미약하고 부족하다는 뜻을 포함한다. 청소년 셧다운제 제안의견 중에는 청소년은 사리판단이 부족한 대상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었다. 우리가 정규교육에서 사춘기 시절에 우리 자신을 타자화하며 학습받은 것 중에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것이 있는데, 그 명제에는 “사춘기는 사리판단이 부족하며 정신적 신체적으로 미성숙한 시기”라는 대전제가 깔려 있다. 과연 청소년은 사리판단이 부족하고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모두 미성숙한가?

미성년은 오히려 도덕적 윤리적 기준이 엄격하다. 나는 그중 가장 도덕적인 기준이 높은 시기를 초등학교 입학 직전으로 본다. 이후 아이들은 자라나며 세상을 접하게 되고 여러 가지 도덕과 윤리를 어겨도 큰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청소년기의 돌출적인 행동은 사리판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에너지의 과잉과 뇌구조의 재편성으로 인한 완급조절의 실패로 보이지만 사실은 청소년계층에게 가해지는 과다한 폭력과 통제가 그 원인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청소년계층의 사리판단력은 성인과 비교해서 모자람이 없다. 범죄자의 대다수는 성인이다. 법이라는 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전 연령층이 언어를 습득하면서부터 가질 수 있는 기본 행동 양식인데 이를 가장 많이 어기는 계층이 그렇지 않은 계층에게 “너희들은 사리판단력이 부족하다.” 라고 정의내릴 수 있는 근거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셧다운제를 포함한 게임에 대한 규제는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미성년자를 대상화하며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사실은 그들의 특성을 규정하고 그들의 개성을 통제하려는 습성이다. 온전한 사회적 합의를 거치지 않은 암묵적 동의에 대한 침묵이 이어졌으며 그간 다양한 반론이 제기되지 못한 결과물이다.

이 사회는 미성년자를 통제하려는 정책을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다. 미성년자들이 펼치는 모든 행동은 새로운 것들이다. 구세대의 문화를 파괴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때마다 성인들은 미성년자들의 “미성숙함”이 기괴한 문화를 만들어 낸다고 비아냥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불과 몇 년 전, 학생들의 짧은 교복치마에 대해 성인들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그들은 볼썽사나운 교복개조라고 폄하하며 국가의 미래까지 걱정하면서 그와 동시에 더 이상 옷을 입었는지 벗었는지 알 수 없는 걸그룹들을 창조해냈다. 걸그룹들은 일정 구성원이 미성년자이나 철저하게 성을 상품화하는데 앞장서왔고 그들의 의견이 어느 정도 반영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사람의 재능을 상업화하고 대중 앞에 내세운 것은 분명히 어른들이었다.

교복치마 논쟁이 정신없을 때 삼선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아이들의 문화가 비난을 받았다. 그들이 큰돈을 들여 사 입는다는 노스페이스 파카에 대해서도 국가의 미래를 운운하며 걱정들을 토해냈다.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던 어른들은 앞장서서 아웃도어 시장을 전세계 어디에도 유래없는 거대한 시장으로 만들어냈으며, 삼선슬리퍼에 대해서 안전을 문제삼던 어른들은 각종 대형사고를 만들어 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아웃도어 사업을 일으킨 것도, 그 시장을 키운 것도, 인재가 아니라고 우길 수 없는 대형사고를 만든 것도 모두 성인들인데 그들은 단지 아이들이 먼저 만들어내는 새로운 문화가 나타날 때마다 조국의 안위를 걱정하며 미성년자를 비난하기에 혈안이 되었다.

먼저 가는 자의 머리채를 잡아 당겨 주저앉히고 왜 앞장서서 가느냐고 폭력을 행사하는 동네 양아치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문화가 이 사회에 깊이 팽배해 있다. 미성년자들이 성인들보다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빠른 것은 유연하며 개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성인들은 낯선 것을 일단 터부시하며 두려워한 뒤 공격을 하다가 결국 그 문화를 광적으로 흡수하고 재생산하며 산업화한 다음 부를 축적하는데 열을 올린다. 이런 문화의 패턴이 이 사회에선 수없이 반복되어 왔다.

생각해보라.

청소년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문화에 대해서 왜 비난을 하는지 “어른”이라는 자들의 솔직한 의견은 대부분 한가지로 모아진다.

“꼴 뵈기 싫어서.”

이는 낯설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경함에 대한 치졸한 반응일 뿐이다.

셧다운제와 청소년에 대한 게임규제 역시 다를 바 없다. 선거권을 가진 성인들이 규제하는 것은 단순히 게임이 아니며, 그들은 청소년의 수면권을 보호하는 데 진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이 규제하는 것은 새롭게 밀려들어오는 문화를 받아들일 수 없는 본인들의 경직된 자아로 가득한 구태한 문화일 뿐이다.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야 하고,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세상의 많은 것들이 왜곡된다. 이는 사회뿐 아니라, 가장 작은 단위의 공동체인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역으로 가정에서 발생한 교육에 대한 강박이 바로 사회로 나아가 합리적이지 않은 법령을 만들어 낸 것이 바로 게임셧다운제를 비롯한 각종 청소년에 대한 규제인 것이다.

2015년 8월 18일

옛이야기속의 계모

매일 하나씩 읽어주는 옛이야기보따리.
아이가 재미가 붙었는지 읽어달라고 한다.
오늘은 계모얘기를 읽었는데,

생각해보니 전통설화/신화/전래동화 , 즉 옛이야기에 등장하는 계모들은

1. 어느 날 갑자기 집에 들어오고
2. 아버지와의 애정관계는 불분명하며
3. 계모가 등장함과 동시에 아버지는 사라지거나 역할이 미미해지거나, 생계를 책임지느라 자식을버려두고 계모에게 양육을 맡긴다.
4. 이를테면, 새로 들어온 계모들의 역할은 한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보모 및 육아담당으로 들어오고, 밥벌이는 하지 않는다.
5. 다시 말하면, 아내가 없는 홀아비는 계모를 들여와 생계를 해결해주고 보육을 맡기는 기능으로 “사용” 하는 듯 보인다.
6. 여권신장따위 개도 안 물어갈 소리였던 전근대 사회에서 부계사회와 일부일처제였던 사회적 제도에서 홀로된 여자가 자식을 키우는 일은 경제적 궁핍이 당연했으되
7. 경제적, 사회적 활동을 활발히 해야만 했던 홀아비들은 육아를 전혀 담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8. 이렇게 짝을 잃은 남과 여는 단순한 계약관계 및 자식육성을 위해 결합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형태를 띈다.
9. 가족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대부분 이런 이야기에 임무로 수여받은 “남자의 자식”에 대한 육아를 게을리 하는 계모들은 그 사실이 발각되면 곧 쫒겨나고 만다.

말하자면 옛이야기에서의 계모는 그저 밥술이나 얻어먹을 수 있는 새로운 취직자리를 얻어 자기 자식을 데리고 “주거이동”을 하게 되는데, 아버지는 늘 밖에 나가 있으니 “부부”의 기능을 한다고 보기 어렵다.

새로운 일자리는 홀아비의 아이를 키우는 일인데 그 일을 게을리 하였으므로 당연히 해고되는 것이다.

옛이야기에 등장하는 계모들은 계모가 아니라 그저 새로 들인 보모를 계모라고 통칭하였던 것은 아니었던지.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런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속의 “새어머니”라는 존재는 “아버지와의 관계는 무관한”, 그저 양육을 맡았기 때문에 “어머니”라는 이름을 잠시 빌려쓴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했다.

888970_583307958347598_1937032352_o

이 책은 보리출판사에서 나온 서정오선생님의 글모음인데 이야기가 구어체로 되어 있어서 마치 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해 주는 것 같이 읽어줄 수 있다. 옛날 이야기를 머리맡에서 해주는 게 중요하다 싶어서 아이가 어릴 때는 이솝우화나 삼국유사를 다시 읽고 내가 이야기를 가공해 해주기도 했는데 이 책을 읽어주는 건 게으른 방법이긴 하지만, 워낙 우리말을 맛깔나게 잘 쓰시는 분이기 때문에 마음이 놓인다.

7살까지만 해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올 초부터 부쩍 매일 하나씩 읽어달라고 하고 있다.

읽다보면 아이가 잘 모르는 입말의 낱말들이 상당히 많이 나와서 우리의 옛풍속, 즉 장작이 한 짐, 쌀이 천 석, 이런 표현이 나오면 질문이 술술술 이어진다.

이 중 “두꺼비서방님”이라는 옛이야기는 허물을 벗고 근사한 낭군이 된 두꺼비의 허물을 태워버린 색시가 서방님을 찾아 갖은 모험을 다 하는 이야기인데, 우리나라 이야기로도 충분히 <반지의 제왕> 못지 않은 대형 스펙타클 서사 판타지 영화가 가능할텐데..라는 상상을 해봤다.

2013. 3. 8.

이틀

이틀이 지났다.
점과 점이 이어져 선이 되듯
시간이 이어져 하루가 되는데,
모든 것이 뚝.뚝. 끊겨 있다.

자고 일어나면 꿈이었나
의심하는 순간 이미 알고 있다
꿈이길 바라는 마음을

똑똑
노크한다

부른다
엄마 – 라고.

전화기를 본다

없다 아무도

아무 것도 남지 않았고
보안경비를 건다

밤은 가고
나는 잔다
너도 잘 것이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밤.

나는 안다

그 어딘가에
헤메는 우리의 두 손과
더듬는 우리의 두 발을

머쓱한 그 자리의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의 젖은 물들.

2012. 2. 10.

ER

여기는 모두가 살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다.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더 붙잡기 위해, 공포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매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위해 오는 곳이다.

살기 위해 오는 사람들 가운데
죽기를 원했다가 다시 살기를 원해 오는 생명이 있다.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 같은 노인이 끊임없이 말하기 위해 노력한다.
언제나 지나간 것은 미련스럽고
딱 한 번만이라고 말한 순간은 이미
늦은 때이다.

주춤하고 서 있는 골목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 휘파람 불며 걷고 싶다.
너도 그러길 바란다.

2012. 2. 7.

버틸 수 있길

말기 암 환자에게 병원은, 더 이상의 치료법이 없습니다. 라고 말한다.
자 임상실험을 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아니면?
아니면 그냥 수치가 얼마나 올라가는지 관망하시겠습니까..가 생략된 말이다.

여름의 한 가운데였다.

그 사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환자는 더욱 악화되고 약해지고 슬퍼졌다.

그리고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의연하게.
명대로 살다 가련다. 더욱 초연하게.
욕심부리지 말자. 포기한 채.
고통 없이 끝났으면 좋겠다. 애절하게.

그리하여 더 이상 하루로 늦출 수가 없는 나는
새벽 6시에 일어나 큰 아이의 수련회 가는 길을 위한 도시락을 싸고
작은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화장을 하고 청소를 미뤄두고
가스밸브를 잠그고 10시에 주차장으로 내려가 시동을 건다.

성내동에 위치한 한 병원,
면역요법만을 연구한다는 생경한 의사를 만난다.
너무 늦게 오셨다는 얘기는 여기서도 듣는다.

그리고 그가 소개한 모처를 찾아가기 위해 네비게이션에 주소지를 찍고
혼잡한 도로에 서 있다.
그 곳에서 만나기로 한 여자는 점심을 먹으러 가는 중이라 했다.
나는 식사를 하고 오시라 했다.
2시에 만납시다.
내가 도착한 시간은 1시 남짓 넘은 시간.
근처에 있는 오래전 왕의 무덤에서 아침에 싸온 김밥을 먹으려고 주차장에 들어섰다.
월요일 휴관.
주차장만 운영.

근처 어디 벤치가 있을까 하여 조금 걸어봤으나 모두 상가와 상가에 딸린 야외테이블이다.
게다가 추석을 앞둔 햇빛은 무겁고 뜨거웠다.

나는 다시 주차장으로 들어가 시동을 켜고, 공회전을 시킨 채로 차 안에서 김밥을 먹었다.
공회전을 시키면 안좋다던데, 환경오염에 차에도 문제가 생긴다는 얘기 따위는 잊기로 한다.
때로는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을 던져 버릴 필요가 있다.
정치를 비꼬는 남자들의 화창한 웃음소리속에서 김밥을 먹는다.
그리고 차를 몰고 나와 만나기로 한 모처의 주차장으로 들어간다.
비싸고 달디 단 커피를 하나 시켜 마시고 조정래의 소설을 읽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시간을 보낸다.

집 근처에서 미술학원을 하는 동생에게 전화를 건다.
작은 아이가 태권도를 마치면 그리고 보내라 할테니 애를 부탁한다고.

아이는 9시 20분까지 유치원으로 가서, 3시까지 시간을 보내고
바로 태권도장의 셔틀버스를 타고 태권도장에 가서 한 시간을 보내고
다시 태권도장의 셔틀버스를 타고 이모학원으로 가서 저녁나절까지 기다릴 것이다.

그 건물은 보안이 유지되는 곳이라, 방문할 곳의 호수를 누르고 입주자가 문을 열어주길 기다려야 한다. 5분전에 도착해 호수를 눌렀다. 문은 아무 음성없이 열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50대의 인상좋은 여자가 문을 연 채 나를 기다리고 있다.
주거형 오피스텔을 개조한 사무실.

그녀에게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기 위해,
의학적 사실만을 전달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는 것들의 1개월치를 주문하고 설명을 듣고 계산기를 같이 두들기고
오랫동안 참아왔던 배설을 하겠다는 양해를 구하고
카드를 꺼내 결제를 한다.

159만원.
일시불.
한 달치다.

항암제는 300만원정도였고,
모대학병원에서 만들어낸 신약은 320만원이었다. 한 달치에.

쌓아놓은 돈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는 돈이다.
일하고 벌고 융통하고 어떻게든 만들어 내는 돈.

돈은 구할 수 있는데, 약이 없다는 것과
약은 있는데 돈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의 경중을 따질 수 없다.
비참한 것은 모두 마찬가지요,
고통은 비교할 수 없는 문제다.

며느리가 오시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라는 그녀의 말에,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삼키고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다섯 번 정도 하고 뒤돌아선다.
대체 내가 그녀에게 무엇이 감사한 것인가.
그저, 존재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것일까.

그러나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마지막이 아니라고 해줘서.

큰 아이가 먹어야 하는 약의 하루분이 모자라다.
테헤란로를 지나는 사이에 병원에서 네 번 전화를 걸어 겨우 통화를 한다.
1시간 이후 도착하기로 약속을 한다.
1분 뒤를 예측할 수 없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척 1시간 후를 약속한다.

선글라스마저 무거운 시간.

전화를 건다.
근처 야산에 바람쐬러 가셨단다.
도착하시는 시간에 맞춰 드릴 물건이 있으니 찾아뵙겠다고 한다.
분명히 내가 먼저 도착해 기다릴까봐 부랴부랴 짐을 챙기기 시작하였을지도 모른다.

아직 거동을 하시고 식사도 하시니 희망이 있습니다.
라는 문장 하나만을 믿는다.

지하철역 근처 병원에 들러 딸랑 약 한 봉지를 받고
근처 문구점에 내려가 15분을 기다려 문서복사를 하고
약 복용법을 적기 위해 유성펜과 접착메모지를 산다.
약국에 들러 박카스 한 병을 사려는데
지갑엔 오만원짜리 뿐이다.
죄송합니다.
나는 사만 구천 오백원을 거슬러 받고 그 자리에서 박카스를 들이킨다.

주차된 차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에 작은 구멍가게에서 2000원짜리 깡통커피와 생수를 산다.
그리고 다시 시동을 건다.
익숙한 길은 운전이 수월하다.
그 주택가 골목은 언제나 주차하기가 어렵다.
다행히 오늘은,
전봇대를 박을 우려가 가장 높은 자리가 비어있다.

가방이 하나 봉투가 하나 쇼핑백이 하나
3층계단을 올라가 고장난 초인종을 확인하고 전화를 건다.
문 열어주세요.

나를 보고 웃는 얼굴이 둘.

그리고 나는 쇼핑백을 부려놓고 하나씩 꺼내 검정 유성펜으로
아침, 점심, 저녁, 취침전이라 쓰지 않고 주무시기 전. 이라 적는다.
공복 섭취 요망. 이라 적지 않고 공복에 드시면 좋아요. 라고 적는다.

아이가 도착했다는 메세지가 온다.
5시가 넘었다.

얼굴 하나, 나에게 박카스를 내민다.
나는 오늘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던 것처럼 박카스를 마신다.

때마침 들어선 다른 형제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나는 내 짐을 챙겨 다시 출발한다.

비록 나의 모든 노력이 헛되더라도,
그저 최선을 다했다는 나만을 위한 위로가 아니라.
억지를 써서라도 무엇이든 하려는 나를 보고
나를 보고 웃는 얼굴, 그 하나가,
사는 날까지, 기운차게 살아보자고 다짐해주시길.
그래도 좋은 기억이었다고 생각주시길.

그러나 그렇지 않으실 것을 안다.
너희가 나 때문에, 고생이 많고, 돈을 많이 쓰고, 배려를 너무 많이 하고,
그런 모든 것이 늘 미안한 분.

내가 당신을 만나,
당신의 단 한 번 이기적인 모습을 보았더라면,
나는 이렇게까지 서럽지 않을 것이다.

명대로 살다 죽겠노라,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간디. 라고 하지 마시고
그래 조금 더 노력해보자 좋은 날이 오겠지. 라고 말씀해주시길.

바라는 마음때문에 그 한마디 듣고자
내 억지가 조금이나마 의지가 되길,
내 정성이 조금이나마 버틸 힘이 되길.
통증으로 진통제만 삼키는 날이 오더라도 우울하거나 절망하거나
차라리 이럴꺼면 그만 죽여달라고 울부짖지 않으시길.

육신의 고통은 경감할 수 없다 한 들
마음의 고통만이라도 줄일 수 있길.

내가 좀 더 현명하지 못했던 것과
내가 좀 더 부지런하지 못했던 것과
내가 좀 더 건강하지 못했던 모든 것들이 회한으로 남는 시간.

당신의 몸을 점령하고 있는 그 날랜 것들이
당신을 모두 집어삼키는 날이 오더라도
그 날이 되더라도
마음만은 미쁘시길.

단지 그거 하나.
웃으면서 가시는 그 날까지.

당신이,
내가,
내 자식이 나의 부재를,
그리고 우리 모두가.

버틸 수 있길.

2011. 9. 5.

+ 투병중이신 시어머님의 회복도 완치도 아닌,
그저 마음의 평안을 빌며 적음.

눈물에 대하여

술취해 들어온 남편이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곧 잠들 그의 안경을 벗겨준다.

그가 말한다.
나는, 절대로 울지 않을꺼야.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꺼야.
지금부터 굳게 맹세할꺼야.
나는 절대로,
눈물.
단 한방울도.
흘리지 않을꺼야.

그의 말을 들으며
입을 열지 않고 말한다.

나는 울꺼야.
눈물이 강이 되도록 울꺼야.
내 몸안에 모든 물기를 다 짜내도록 울꺼야.

내 눈물로 강을 만들어 황천가는 배를 띄울꺼야.
슬렁슬렁 노 저어 훠이 훠이 웃으며 가시도록.
나는 내 눈물로 강을 이뤄 배를 띄울꺼야.

당신이, 단 한 번이라도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이다지 참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당신의 삶이 얼마나 남았는가 헤아린다.
한낮의 정원에서 급작스레 슬픔이 탑이 무너지듯 내 몸위로 쏟아진다.
부디 고통이 적길,
부디 신음하지 않길.

나는 지금 연옥에 있다.
당신의 손을 꼬옥 잡고.

2011. 8.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