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시간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괴로운 마음을 안다. 
그건 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죽음을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 헤매는 것도 안다.
죽음을 통해 뭔가 다른 것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것도 안다. 
죽고 싶다라는 말은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내 세상을 바꾸고 싶다. 라는 절절한 호소였다는 것도 
아주 뒤늦게 알았다. 
무거운 시간들이 흘러간다. 
눈이 녹아가고 있는데 봄이 와도 화려하지 못할까 두렵다.
지리멸렬하다는 단어가 가슴에 맺힌다.
인연도 사랑도 모두가 업보다
지은 것이 많아 풀어야 할 것이 많다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사는 모습들이 애당초 이런 것이라는 것
그저 조금 더 쉽게 가고 싶어서 
울고 불고 안달했다는 것을
이제 안다
그저 걸으면 될 일이다
해는 뜨고 달이 진다
내가 걷는 동안 
내가 엎드려 쉬는 동안
시간은 가고 아이들을 자란다
겨울나무는 소리없이 자라고
봄나무는 요란하게 노래할 뿐
그저 걸으면 될 일이다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말고 
묵묵히 걸으면 될 일이다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때로는 고개를 쳐들고
그 날 그 날 
그저, 가야 할 곳을 잊지 말고 
걸으면 될 일이다 
2012. 2. 14. 

이틀

이틀이 지났다.
점과 점이 이어져 선이 되듯
시간이 이어져 하루가 되는데,
모든 것이 뚝.뚝. 끊겨 있다.

자고 일어나면 꿈이었나
의심하는 순간 이미 알고 있다
꿈이길 바라는 마음을

똑똑
노크한다

부른다
엄마 – 라고.

전화기를 본다

없다 아무도

아무 것도 남지 않았고
보안경비를 건다

밤은 가고
나는 잔다
너도 잘 것이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밤.

나는 안다

그 어딘가에
헤메는 우리의 두 손과
더듬는 우리의 두 발을

머쓱한 그 자리의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의 젖은 물들.

2012. 2. 10.

ER

여기는 모두가 살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다.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더 붙잡기 위해, 공포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매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위해 오는 곳이다.

살기 위해 오는 사람들 가운데
죽기를 원했다가 다시 살기를 원해 오는 생명이 있다.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 같은 노인이 끊임없이 말하기 위해 노력한다.
언제나 지나간 것은 미련스럽고
딱 한 번만이라고 말한 순간은 이미
늦은 때이다.

주춤하고 서 있는 골목에서 아무 일 없다는 듯 휘파람 불며 걷고 싶다.
너도 그러길 바란다.

2012. 2. 7.

버틸 수 있길

말기 암 환자에게 병원은, 더 이상의 치료법이 없습니다. 라고 말한다.
자 임상실험을 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아니면?
아니면 그냥 수치가 얼마나 올라가는지 관망하시겠습니까..가 생략된 말이다.

여름의 한 가운데였다.

그 사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환자는 더욱 악화되고 약해지고 슬퍼졌다.

그리고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의연하게.
명대로 살다 가련다. 더욱 초연하게.
욕심부리지 말자. 포기한 채.
고통 없이 끝났으면 좋겠다. 애절하게.

그리하여 더 이상 하루로 늦출 수가 없는 나는
새벽 6시에 일어나 큰 아이의 수련회 가는 길을 위한 도시락을 싸고
작은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화장을 하고 청소를 미뤄두고
가스밸브를 잠그고 10시에 주차장으로 내려가 시동을 건다.

성내동에 위치한 한 병원,
면역요법만을 연구한다는 생경한 의사를 만난다.
너무 늦게 오셨다는 얘기는 여기서도 듣는다.

그리고 그가 소개한 모처를 찾아가기 위해 네비게이션에 주소지를 찍고
혼잡한 도로에 서 있다.
그 곳에서 만나기로 한 여자는 점심을 먹으러 가는 중이라 했다.
나는 식사를 하고 오시라 했다.
2시에 만납시다.
내가 도착한 시간은 1시 남짓 넘은 시간.
근처에 있는 오래전 왕의 무덤에서 아침에 싸온 김밥을 먹으려고 주차장에 들어섰다.
월요일 휴관.
주차장만 운영.

근처 어디 벤치가 있을까 하여 조금 걸어봤으나 모두 상가와 상가에 딸린 야외테이블이다.
게다가 추석을 앞둔 햇빛은 무겁고 뜨거웠다.

나는 다시 주차장으로 들어가 시동을 켜고, 공회전을 시킨 채로 차 안에서 김밥을 먹었다.
공회전을 시키면 안좋다던데, 환경오염에 차에도 문제가 생긴다는 얘기 따위는 잊기로 한다.
때로는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을 던져 버릴 필요가 있다.
정치를 비꼬는 남자들의 화창한 웃음소리속에서 김밥을 먹는다.
그리고 차를 몰고 나와 만나기로 한 모처의 주차장으로 들어간다.
비싸고 달디 단 커피를 하나 시켜 마시고 조정래의 소설을 읽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시간을 보낸다.

집 근처에서 미술학원을 하는 동생에게 전화를 건다.
작은 아이가 태권도를 마치면 그리고 보내라 할테니 애를 부탁한다고.

아이는 9시 20분까지 유치원으로 가서, 3시까지 시간을 보내고
바로 태권도장의 셔틀버스를 타고 태권도장에 가서 한 시간을 보내고
다시 태권도장의 셔틀버스를 타고 이모학원으로 가서 저녁나절까지 기다릴 것이다.

그 건물은 보안이 유지되는 곳이라, 방문할 곳의 호수를 누르고 입주자가 문을 열어주길 기다려야 한다. 5분전에 도착해 호수를 눌렀다. 문은 아무 음성없이 열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50대의 인상좋은 여자가 문을 연 채 나를 기다리고 있다.
주거형 오피스텔을 개조한 사무실.

그녀에게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기 위해,
의학적 사실만을 전달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는 것들의 1개월치를 주문하고 설명을 듣고 계산기를 같이 두들기고
오랫동안 참아왔던 배설을 하겠다는 양해를 구하고
카드를 꺼내 결제를 한다.

159만원.
일시불.
한 달치다.

항암제는 300만원정도였고,
모대학병원에서 만들어낸 신약은 320만원이었다. 한 달치에.

쌓아놓은 돈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는 돈이다.
일하고 벌고 융통하고 어떻게든 만들어 내는 돈.

돈은 구할 수 있는데, 약이 없다는 것과
약은 있는데 돈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의 경중을 따질 수 없다.
비참한 것은 모두 마찬가지요,
고통은 비교할 수 없는 문제다.

며느리가 오시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라는 그녀의 말에,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삼키고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다섯 번 정도 하고 뒤돌아선다.
대체 내가 그녀에게 무엇이 감사한 것인가.
그저, 존재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것일까.

그러나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마지막이 아니라고 해줘서.

큰 아이가 먹어야 하는 약의 하루분이 모자라다.
테헤란로를 지나는 사이에 병원에서 네 번 전화를 걸어 겨우 통화를 한다.
1시간 이후 도착하기로 약속을 한다.
1분 뒤를 예측할 수 없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척 1시간 후를 약속한다.

선글라스마저 무거운 시간.

전화를 건다.
근처 야산에 바람쐬러 가셨단다.
도착하시는 시간에 맞춰 드릴 물건이 있으니 찾아뵙겠다고 한다.
분명히 내가 먼저 도착해 기다릴까봐 부랴부랴 짐을 챙기기 시작하였을지도 모른다.

아직 거동을 하시고 식사도 하시니 희망이 있습니다.
라는 문장 하나만을 믿는다.

지하철역 근처 병원에 들러 딸랑 약 한 봉지를 받고
근처 문구점에 내려가 15분을 기다려 문서복사를 하고
약 복용법을 적기 위해 유성펜과 접착메모지를 산다.
약국에 들러 박카스 한 병을 사려는데
지갑엔 오만원짜리 뿐이다.
죄송합니다.
나는 사만 구천 오백원을 거슬러 받고 그 자리에서 박카스를 들이킨다.

주차된 차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에 작은 구멍가게에서 2000원짜리 깡통커피와 생수를 산다.
그리고 다시 시동을 건다.
익숙한 길은 운전이 수월하다.
그 주택가 골목은 언제나 주차하기가 어렵다.
다행히 오늘은,
전봇대를 박을 우려가 가장 높은 자리가 비어있다.

가방이 하나 봉투가 하나 쇼핑백이 하나
3층계단을 올라가 고장난 초인종을 확인하고 전화를 건다.
문 열어주세요.

나를 보고 웃는 얼굴이 둘.

그리고 나는 쇼핑백을 부려놓고 하나씩 꺼내 검정 유성펜으로
아침, 점심, 저녁, 취침전이라 쓰지 않고 주무시기 전. 이라 적는다.
공복 섭취 요망. 이라 적지 않고 공복에 드시면 좋아요. 라고 적는다.

아이가 도착했다는 메세지가 온다.
5시가 넘었다.

얼굴 하나, 나에게 박카스를 내민다.
나는 오늘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던 것처럼 박카스를 마신다.

때마침 들어선 다른 형제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나는 내 짐을 챙겨 다시 출발한다.

비록 나의 모든 노력이 헛되더라도,
그저 최선을 다했다는 나만을 위한 위로가 아니라.
억지를 써서라도 무엇이든 하려는 나를 보고
나를 보고 웃는 얼굴, 그 하나가,
사는 날까지, 기운차게 살아보자고 다짐해주시길.
그래도 좋은 기억이었다고 생각주시길.

그러나 그렇지 않으실 것을 안다.
너희가 나 때문에, 고생이 많고, 돈을 많이 쓰고, 배려를 너무 많이 하고,
그런 모든 것이 늘 미안한 분.

내가 당신을 만나,
당신의 단 한 번 이기적인 모습을 보았더라면,
나는 이렇게까지 서럽지 않을 것이다.

명대로 살다 죽겠노라,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간디. 라고 하지 마시고
그래 조금 더 노력해보자 좋은 날이 오겠지. 라고 말씀해주시길.

바라는 마음때문에 그 한마디 듣고자
내 억지가 조금이나마 의지가 되길,
내 정성이 조금이나마 버틸 힘이 되길.
통증으로 진통제만 삼키는 날이 오더라도 우울하거나 절망하거나
차라리 이럴꺼면 그만 죽여달라고 울부짖지 않으시길.

육신의 고통은 경감할 수 없다 한 들
마음의 고통만이라도 줄일 수 있길.

내가 좀 더 현명하지 못했던 것과
내가 좀 더 부지런하지 못했던 것과
내가 좀 더 건강하지 못했던 모든 것들이 회한으로 남는 시간.

당신의 몸을 점령하고 있는 그 날랜 것들이
당신을 모두 집어삼키는 날이 오더라도
그 날이 되더라도
마음만은 미쁘시길.

단지 그거 하나.
웃으면서 가시는 그 날까지.

당신이,
내가,
내 자식이 나의 부재를,
그리고 우리 모두가.

버틸 수 있길.

2011. 9. 5.

+ 투병중이신 시어머님의 회복도 완치도 아닌,
그저 마음의 평안을 빌며 적음.

눈물에 대하여

술취해 들어온 남편이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곧 잠들 그의 안경을 벗겨준다.

그가 말한다.
나는, 절대로 울지 않을꺼야.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꺼야.
지금부터 굳게 맹세할꺼야.
나는 절대로,
눈물.
단 한방울도.
흘리지 않을꺼야.

그의 말을 들으며
입을 열지 않고 말한다.

나는 울꺼야.
눈물이 강이 되도록 울꺼야.
내 몸안에 모든 물기를 다 짜내도록 울꺼야.

내 눈물로 강을 만들어 황천가는 배를 띄울꺼야.
슬렁슬렁 노 저어 훠이 훠이 웃으며 가시도록.
나는 내 눈물로 강을 이뤄 배를 띄울꺼야.

당신이, 단 한 번이라도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이다지 참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당신의 삶이 얼마나 남았는가 헤아린다.
한낮의 정원에서 급작스레 슬픔이 탑이 무너지듯 내 몸위로 쏟아진다.
부디 고통이 적길,
부디 신음하지 않길.

나는 지금 연옥에 있다.
당신의 손을 꼬옥 잡고.

2011. 8.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