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콧수염 사내가 말했지. 요즘들어 잘 알지도 못하는 그 사내가 참 그립네.
처음에는 비극으로 나중에는 희극으로 온다는 말은 참담하다. 수많은 비극을 겪어야만 한다는 건지.
“칭얼칭얼”을 하지 못해 그 자리에 “씨발씨발”을
넣는 어른들이 있네. 익숙했던 풍경은 수십년이 지나도 그대로 반복되고, 우물속에 빠진 두레박에 어린 계집애 둘이 떨고 있는 그림이 되네.
달님 달님
우리를 살리시려면 튼튼한 동아줄을 내려주세요. 달님은 귓구녕이 막혔는지 대꾸가 없네. 손톱이 파이도록 기어 올라온 우물가에 입을 떡 벌리고 서 있는 호랑이 한 마리.
떡 하나 줄께 잡아먹지 말렴. 제발. 너도. 고양이가 되는 건 어떻겠니. 누군가를 잡아먹는 건 너무 고달픈 일 아니겠니.
2014. 12. 28.
오후부터 비가 내렸다. 가까운 곳에 친구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언제나 같은 생각을 한다.
초등학교부터 한 동네에서 살던 녀석들과 겨울밤 거의 매일 모여 삼치구이에 소주를 마시던 생각을 한다. 꼭 삼치를 시켜달라 하고 꼬닥꼬닥 졸던 녀석이 있다. 집에 가서 자라고 욕지거리를 해도 있다 갈꺼라 했다. 그 때 우리는 서른을 몇 년 남겨두고 있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할 것 같지 않았으나 늘 취해서 헤어지곤 했다. 초등학교 동창들은 만나면 퇴행현상을 보인다. 우리는 늘 별 일 없이 만나서 별 일 없이 헤어졌다. 퇴근길에 집 앞에 와서 나와. 라고 말하면 그냥 나가던 시절이다.
비오는 저녁 운전은 해야 하는데 아이는 전화를 해서 끊지 않는다. 나와, 하면 나가던 시절에서 무려 14년 정도가 지난 저녁이 되니 차를 돌려 동네 친구에게 간다. 동네 친구와 남의 영업집에서 삼치를 구워 소주를 마시는 게 아니라 내일을 생각해서 동네 친구의 까페에서 히비스커스차를 마신다.
내일따위 없던 시절에서 아주 멀리 돌아왔다. 그 먼 길을 돌아돌아 다시 동네친구를 만나게 되는 비오는 밤, 길거리에 풍선이 굴러다녔다. 흰색과 연분홍색 고운 풍선 네 개가 하나로 묶여 있다. 어느 아이가 잃어버렸을지, 아니면 행사장에서 굴러온 것인지, 누가 힘겹게 얼굴이 벌개지도록 불어댄 풍선인지 기계로 한 방에 부풀린 풍선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왠지 저 풍선엔 누군가의 숨이 담겨 있어 차로 치이면 안될 것만 같다. 우회전으로 들어오는 차도 풍선이 신경쓰이는지 속도를 낮췄다. 풍선을 불면 날아갈 수 있을 것 같던 때를 굽이굽이 돌아오면 풍선을 부는 게 노동이 되는 세월이 기다린다. 그래도 마음속엔 풍선을 함부로 터트리면 안된다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누군가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긴 풍선이 빗속에 굴러다닌다. 누군가의 숨결이 잦아드는 그 밤에도 그랬겠다.
2014. 9. 2.
해 지는 시간이 늦어진다.
하루가 추웠다. 나만 추웠겠는가. 그도 추웠을 것이고, 당신도 추웠을 것이고, 우리 모두, 조금씩 시린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따듯한 것이 생각나서 나는 설렁탕을 사러 간다. 검은 나의 차를 타고 어스름이 내리는 거리에, 네온사인이 들어오는 광경을 본다. 가족들과 밥을 먹으러 나온 사람들이 식당에 삼삼오오 앉아 있기도 하고 야근을 하기 전 허기를 달래려는 남자들이 신발을 반쯤 벗은 채 앉아 설렁탕을 훌훌 먹고 있다.
외롭다고 말을 하면 그 뒷모습이 초라해보일까봐
쓸쓸하다고 말을 하면 내 신발의 뒷축을 감추고 싶을까봐
아프다고 말을 하면 앞선 자의 눈이 아련해 질까봐
오늘도 가면을 쓰고 하루를 지내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긴 한 숨을 쉰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가.
그 모든 대답은 나에게 있는데 애써 들여다 보는 시간이 엄습해오는 걸 느끼는 바로 그 때가 어스름.
침대맡에 앉아 일기를 쓰는 그 한적한 시간에 물밀듯이 밀려드는 안타까움에 대하여.
그럴 나이와 그럴 때가 따로 있다는 말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밀어내면서
최백호의 신보를 뒤적거리는 밤들이 이어지더라도,
그래 내일은 또 무슨 할 일이 산적해 있다는 것이 다행인 시절.
벚꽃은 아직 피지 않았고 여름은 멀리에 있다.
뒤틀리는 무릎의 통증을 느끼며 삐딱하게 서서 창밖을 바라본다. 휴대폰을 꺼내 그 어스름을 담는 시간. 그저 내가 기억하기 위해, 내 눈보다 다른 것에 의존하는 시간. 그런 시간들이 촘촘히 이어져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가고, 나이를 먹고 아이는 자란다.
2013. 4. 10.
갑작스럽게 내 신변을 환기할 필요가 있었다.
밤벚꽃 아래 남자고등학생 애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덩치에 안 어울리는 놀이기구를 타고 놀고 있다. 공기는 차가운데 아이들의 목소리는 뜨겁다. 별 것 아닌 농담에 깔깔대는 앳된 사내의 목소리에 사춘기와 변성기를 지낸 여물지 않는 수컷의 성성함이 낯설다.
그저 아이들은 웃고 있을 뿐인데, 그 소리들을 제어해 본 적 없는 치기에 아파트 단지가 우렁우렁하다.
줄여입은 교복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작은 아파트 단지를 겅중겅중 달려가는 아이들의 기다란 종아리 뒤에 숨어버리는 이 공간이 이다지도 좁은 줄 처음 알았다.
나의 개는 끊임없이 생명이 움트는 땅의 냄새를 맡고, 하루종일 메말라 있던 나의 눈에는 끊임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다. 어느 순간 저 아이들이 성년이 되어 스스로 목소리를 제어할 줄 아는 그런 날이 오면, 오늘은 단 몇 걸음에 달려가던 이 아파트단지가 갑자기 거대한 괴물이 되어 버릴 것이다.
봄밤은 미친년 옷고름 씹어먹듯 흥야흥야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