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보면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모로 누워 잠든
네가 보인다
쓰담쓰담
한 번 더
쓰담쓰담
한 번 더
20170409
/동해 맹방
남자는 배를 타고 고기를 낚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그물을 손질하는 사이, 여자는 의자에 앉아 해금을 연주하고 있었다.
밖에 놓인 메뉴판엔 식사가 세 종류.
백합조개가 들어간 칼국수가 있었지만,
칼국수보다 커피가 궁금했다.
예상치 못한 사물은 낮게 말한다.
여기, 무언가 숨어 있다고.
드립커피가 3500원.
벽에는 LP판이 꽂혀있고 피아노 위엔 영농일지가 있었다.
어느 도예가가 선물했을 법한 도자기들과
바다를 좋아하는 작가가 붓을 뻗쳤을 바다풍경,
한지를 우그려뜨려 붙인 천장,
나무로 된 싱크대,
피아노 위 주인여자의 흑백사진과
멀찌기 걸려 있는 어부의 파안(破顔),
별바다호(號),가 잡아오는 물것으로
노래를 잇는 여자가 있는 곳.
별바다집.
20170402 인천 옹진 장봉도
아이들이 물 마시러 들락거리는
이 집은 어쩌면 우물
두레박 깊이 내려 시원한 물 한 모금
아니면 이 집은 펌프가 달린 수돗가
마중물 부어대면 쏴아하고 내려오는
녹맛이 나던 지하수
벌컥 벌컥 마셔도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잘만 가던
시원한 여름날
꼴락꼴락 늙은 개가 물 마시는 소리
와르르르 내 입에 쏟아지는 물 소리
손끝까지 가득한 출렁이는 물소리
물소리 그리고 눈물소리
자판을 두들기는 손끝마다 물방울
바닷가 바위위에 맞잡은 손이 떠올라
깍지낀 두 손바닥 손금마다 땀방울
턱 아래로 흐르는 진떡한 물줄기
바닷가 바위위의 깻잎쌈이 떠올라
오늘은 어디서 파도의 물방울을 맞고 앉았나
쏴아 쏟아질 거대한 파도소리
모든 게 휩쓸려 세상조차 사라지길
뇌수에 가득한 파도소리
한 번도 본 적 없는 파도소리
쏴아하고 부서질 하얀 포말에
세상 모두 휩쓸려 태초로 가길
2014. 8. 24.
입추가 지나면 바닷물이 찹다는데
주문진 아들바위 다리뻗은 두 연인
회 한접시에 소주 한 병
깻잎에 싸먹는 달큰한 생물의 삶
살아 펄떡이던 삶을 작살내고
오독오독 씹으며 오가는 웃음
맞잡은 두 손가득 이유있는 진땀들
바다멀리 옹졸한 하늘 아래
배롱나무 꽃 진다고
애업고 우는 미친 여편네
차디찬 바닷물이 나는 싫어라
아무 것도 보기 싫다며 얼굴을 파묻는데
어디서 날아오는 비릿한 바닷냄새
생살을 토막내는 거대한 해무
눈 뜬 날 것이 칼날을 세우고 달겨들면
배롱나무 아래 무수히 피어난
하루짜리 버섯보고
멍청하게 웃는 미친여편네
거품물고 하악대기 전에
약 두 알 털어놓고
차디찬 바닷물이 나는 싫어라
찝찔한 바닷바람 나는 싫어라
배롱나무 꽃 진다고
애업고 우는 미친 여편네
2014.8.23.
일주일간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책이 한 권 있다. 정유정의 소설, “7년의 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한 소년이다. 소년의 아버지는 살인범이다. 7년 전의 일이다. 7년 전의 그 밤이 갑자기 소년에게 밀려온다. 작가는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마을을 정확하게 설계했다. 책의 앞부분엔 이 마을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물론 가상의 마을이다. 이 마을의 중심은 저수지다. 소년은 저수지 근처의 삶을 살았다. 파도치지 않는 잔잔한 저수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모두 인간과 기계에 의해 통제되는 곳, 움직이지 않는 것은 썩기 마련일진대 소년은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보냈고 살인범의 아들로 살았다. 소년은 잠수를 했다. 검은 물결 속에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소설은 내내 어두운 밤이었다. 그야말로 칠흑 같은 밤만 가득했다. 검은 밤, 검푸른 물, 외로운 달 하나, 소름끼치는 누군가의 실루엣, 소년이 말하던 물의 이미지, 작가가 전해준 그 물의 기억은, 잔인한 마녀의 길고 더러운 손톱같았다.
진도는 아름다운 섬이다. 그 앞바다는 눈부셨다.
거센 풍랑과 파도가 그치고 바다는 길고 더러운 손톱을 감췄다. 비웃고 싶을 만큼 찬란한 햇살 아래 여유롭게 넘실대는 잔잔한 물결, 언제 그랬느냐는 듯 얼굴을 싹 바꾼 바다는 반짝이는 물살 위로 아이들을 하나씩 꾸역꾸역 토해냈다.
욕지기가 올라온다. 잔인한, 참혹한, 비참한, 무서운, 역겨운, 모든 것들이 저 배에 가득했다. 더러운 배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아름답고, 생기발랄하고, 뽀얀 젊음의 곱디 고운 아이들은 그 배에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아이들은 물결에 휩쓸려 아름다운 땅 진도로 돌아오고 있다. 바다는 수천가지의 얼굴을 가졌는가보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다 잡아 삼키지만, 돌려주고 싶은 것들이 있었을 거다. 그렇게 믿고 싶다.
문득,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 처음 갖는 구체적인 생각이다.
호탕하게 웃고, 힘차게 걸으며, 술에 취한 듯 아무데서나 춤추고 노래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졌다. 빛나는 햇살을 보며 바다를 떠올린다.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려면, 눈을 감아야 할 것이다. 타인의 고통, 누군가의 통곡, 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도 따위, 눈 감고 귀 막고 안 보고 안 들으며, 오로지 오늘은 햇살이 좋아서 웃고, 내일은 비가 오니 시원해서 좋다고. 눈 꾹 감고 외면하면 가능한 일이겠다.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심은 고이 접어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숨겨놓기로 했다. 매일 밤 꺼내서 한 번씩 읊어야 한다.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러나 사물이 명료하게 보이는 빛이 있는 한, 두 눈 똑바로 뜨고 두 귀를 번쩍 열고, 슬픔이 가득한 이 도시에 두 다리로 꼿꼿이 걸어야겠다. 잊지 말아야 한다. 깊은 곳에 숨겨둔 쪽지를 매일 꺼내 읽으리라.
우리를 용서하지 말아라. 나도 나를 용서하지 않겠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