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명랑할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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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7일, 민중의소리 발행

서울의 한복판에 있는 복지관이었다.

생애사쓰기를 하러 온 노인들이 스무 명 넘게 앉았다. 각자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이미 있었다. 연금생활자가 많았다. 먹고 사는 데 큰 걱정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노후가 편안한 사람들은 대부분 공직자 출신이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다수 그랬다. 직장을 다니던 사람들은 중간에 IMF를 비껴가지 못했다. 장사하던 사람들은 더했다. 어떻게든 IMF 이전에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은 거센 풍파에 밀려 다 한 번씩 쓰러졌다.

복지관의 위치나 평소 이용자의 소득수준에 따라 생애사쓰기 프로그램에 모이는 사람들도 달라진다. 사회복지사가 일일이 연락해서 프로그램 설명도 잘 듣지 못한 채로 교실에 와서 앉아 있는 경우는 저소득층이 많지만, 자발적으로 모집공고를 보고 오는 사람들은 경제적 형편이 낫다. 저임금 고노동에 몰입해서 하루라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적다는 말이다. 아껴 쓰면 큰 문제 없이 산다는 것이고, 자녀들이 일정한 소득을 유지해서 부양의무에서 벗어난 이들이기도 하다. 이 복지관은 프로그램 공고를 보고 자발적으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아껴 쓰고 근면하게 일해 중산층에 진입한 이들이다. 이들이 처음 공기관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는 매번 생활비가 모자라 빚을 얻어 쓸 정도로 공무원 급여가 형편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퇴직할 때쯤에는 모든 상황이 좋아졌다. 정확한 신분보장이 되니 은행대출도 쉬웠고 정보도 빨리 얻었고 따박따박 고정적인 급여가 나오니 맘만 먹으면 집은 살 수 있었다. 저항하지 않아도, 어쩌면 저항하지 않아야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니 보수적인 생활태도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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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겨울 빨래

https://www.vop.co.kr/A00001461784.html

2020년 1월 19일 민중의소리 발행

그해 겨울, 생애사쓰기 수업을 했던 한 복지관에서 연락이 왔다. 복지관 이용자 중 복지지원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데 면담이 잘 안된다면서 면담을 진행해서 글로 정리해달라는 것이었다. 약간 의외의 일이었다. 구술생애사기록정도로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흔쾌히 응했다. 다섯 명의 사람을 2주에 걸쳐 여러 번 만났다.

후드티를 뒤집어쓴 한 여성이 면담 장소인 작은 회의실로 들어왔다. 면담자 정보를 보니 나이는 40대 후반이었다. 내가 만날 사람들 중에 가장 젊은 사람이었다. 가난이 지워지지 않는 눈물자국처럼 옷섶에 묻어있었다. 이 사람은 깍지 낀 손을 계속 조물락거리며 바빠서 나오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빨래를 하고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겨울철에 빨래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툭툭 끊어지는 문장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수도가 손 닿는데에 있는 게 아니고, 저 위에 있으니까,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꼭지를 열었다 잠갔다 해야되거든요. 쪼그려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물 다시 틀고, 잠그고, 그나마 수도가 안 얼어서 다행이지. 밖이 추우니까. 세탁기 하나 있으면, 좋을 텐데. 세탁기 들어갈 자리도 없고.”

겨울 수도
겨울 수도ⓒpixabay

서울시내 한복판, 재개발이 임박한 그 마을에는 수십 채의 집이 남아있었다. 어떤 집들의 대문에는 “철거”라는 글자가 붉은 스프레이로 쓰여 있었다. 대부분 마을을 떠났고,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가스보일러가 있지만 빨래를 하는 수도에는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아파트 같은 데는 좋지요? 뜨거운 물도 사시사철 나오고. 보일러 조금만 때도 엄청 따뜻하다던데. 임대 간 사람들이 얘기하더라고요.”

백 씨. 이 사람은 가난했다. 아들이 둘 있는데 둘 다 지병이 있었다. 백씨는 두 아들의 병이 질환인지 장애인지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걸핏하면 쓰러지는 병이라고만 했다. 뇌전증 같은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게 뭐냐고 되물어서, 간질을 요즘은 뇌전증이라고 한다고 말해주었는데 그건 아니라고 했다. 아무튼 걸핏하면 쓰러진다고만 했다. 남편은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이 같은 병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어 집을 떠났다. 백 씨의 말에 따르면,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남편이 떠난 이후로 생계를 책임지고 육아와 간병을 홀로 해왔다. 결혼 전에는 직장도 다녔고, 친구들과 어울려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시고 춤추러도 가는 보통의 20대를 보냈다. 백씨는 아픈 두 아들의 엄마로 거듭나면서 세상과 단절되었다. 큰 아들은 스무 살이 넘었고, 작은 아들은 그때 고3이었는데 작은 아들은 취업을 할 수 있는 정도라서 직장을 얻었다고 좋아했다.

세 번을 만나는 동안 백 씨는 계속 너무 힘들다는 말을 반복했다. 자기는 정말 지쳤고 더 이상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제는 자기도 늙었는지 온몸이 아프고 쑤셔서 무슨 일도 할 수 없다고. 공공근로도 나가봤지만 아들만 남기고 집을 비울 수가 없다고.

두 시간이나 길게 무슨 할 말이 있냐고 말했던 백 씨는 매번 두 시간을 훌쩍 넘기고 조금 더 이야기를 하다가 갔다. 나는 백 씨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복지관에 넘겨주었다. 복지관에서는 백 씨가 필요한 복지혜택 중에 받을 수 있는 것을 찾으려고 했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냐고 반문했던 백 씨는 만나는 시간 내내 때론 즐겁게 때론 비통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겨울 빨래
겨울 빨래ⓒpixabay

즐거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할 때는 밝은 표정이 되었다. 자기가 살던 고향의 빛 좋던 들판과 부모님이 자기를 돌봤던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는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는 아이였다고 했다. 말 하는 것 자체를 꺼리던 백 씨는 ‘누가 내 이야기를 이렇게 들어주나’ 라는 말도 했다. 기득권이 될수록 자기 이야기를 할 기회가 많아진다. 사회와 고립되고 단절될수록 자기 이야기를 할 기회가 줄어든다. 자기 삶을 쓰는 일도 무엇이든 더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하다. 더 많이 배웠거나 더 많은 기득권을 가질수록 자기 삶을 돌아보고 늘어놓을 기회가 더 많다. 백 씨는 그렇지 못한 사람 중 하나였다. 말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말하는 방법도 잊는다. 수십 번 자기 주장을 말해본 사람은 점점 더 잘 말하게 된다. 세상에 펼쳐본 적 없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을 다잡는다.

어른이 되어도, 어미가 되어도 수십 번 마음을 고쳐먹기 마련이다. 조금 더 잘 살아야지, 조금 더 잘 해봐야지, 오늘부터는 밥을 건강하게 차려먹어야지, 아이에게 화내지 말아야지.

얼음이 얼지 않고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이 지나간다. 세탁기에서 편하게 꺼낸 빨래를 널며 손가락이 시릴 때 백 씨를 떠올린다.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을까. 나를 만났을 때 살던 집보다 빨래하기 편한 곳으로 이사를 갔으면 내 마음이 편하겠다.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팔자 때문이 아니라고

https://www.vop.co.kr/A00001458067.html

2019년 12월 31일 민중의 소리 발행

올해도 생애사쓰기 수업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주로 공공기관에서 오전에 수업을 열고 노인대상으로 수강생을 모집한다. 어떤 기관은 65세 이상으로 한정하기도 하고 다른 프로그램에 참여한 노인이용자들에게 모집공고를 주로 알리기도 한다. 굳이 노인으로 한정할 것은 없지만 여러 기관에서 선호하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대체로 한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는 감동이 있다. 특히 자기 삶을 글로 정리하겠다고 모이는 사람들의 특성이기도 하다. 떳떳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이라야 자기 삶을 글로 써보겠다는 욕심을 갖게 된다. 글도 쓰고 발표도 하고 나중에 책자로도 묶어낸다는 프로그램 설명이 있으니 대부분 공개할 자신이 있는 사람들만 모이게 되는 것이다.

어떤 기관에서는 글로 쓸 여력이 안 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모아놓기도 한다. 그런 경우엔 수업시간에 편하게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게 하고 그걸 받아 적어 글로 변환해주기도 한다. 교육프로그램에 구술사기록의 원칙을 철저하게 적용하지는 않는다. 내가 목적하는 바는 자기 목소리가 담긴 이야기를 책자에 넣고 그 과정을 사람들이 기억하고 결과물을 보존하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기관이 모두 이들의 이야기를 소중하게 다루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경험했던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가 종이에 새겨진 것을 보며 귀하게 여긴다.

서울 중구 정동길에서 한 어르신이 폐지 담은 리어카 끌고 이동하는 길에 은행나무 낙엽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서울 중구 정동길에서 한 어르신이 폐지 담은 리어카 끌고 이동하는 길에 은행나무 낙엽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김철수 기자

길게는 석 달 정도 자기 삶을 계속 반추해가며 기록해 나가는 작업은 쉽지 않다. 중간에 연락도 없이 안 나오는 경우가 대다수다. 초반에 모집한 사람들에 비해 30%정도가 남으면 성공인 셈이다. 서른 명 넘게 모집해도 많이 남으면 열 명 남짓이고, 대부분 그보다 더 적은 숫자가 마지막까지 원고를 써서 제출한다. 60대를 노인이라 말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적어도 70대가 넘어야 노인이라 할 수 있는데, 직접 글을 쓰고 자기 글을 고쳐오고 사람들 앞에서 낭독을 할 수 있는 80대들이 많이 늘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전쟁을 겪고 가난을 헤쳐온 사람들은 어린 시절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억울하게 죽은 가족을 잊고 있다가 다시 떠올리기도 하면서 자기 삶의 ‘기구한 운명’을 탓하기도 한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가 얼마나 구구절절한지 한숨을 쉬면서 스스로의 ‘팔자가 기구해서’, 또는 자기 부모의 ‘팔자가 사나워서’라고 서술한다. 자기 삶을 되새길 때는 대한민국의 연대표에 자기 삶을 채워나가는 숙제를 낸다. 해방, 전쟁, 1.4후퇴, 4.19혁명, 이승만하야, 5.16 군사쿠데타를 말하다 보면 한 개인이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알아차리게 된다. 사회적 사건 옆에 가족과 개인의 서사를 보태 적다 보면 팔자 때문이라기보다 나도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느끼면서, 정치적 사회적 사건이 나의 사생활을 뒤틀기도 한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의도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여러 사안들에 대해서 묻는다.

일제강점기를 거친 사람들이 기억하는 해방은 학교에서 배운 것과 달랐다. 태어났을 때 이미 일제가 지배하고 있었고, 집안에 딱히 민족과 일제를 설명할 사람이 없으면 당연히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그들에게 해방은 ‘국가의 패망’이었다. 어린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에는 일본의 패전을 슬퍼하며 울던 사람들과 두 팔을 번쩍 치켜들며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이 공존했다. 그때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을 뿐이다.

박복한 팔자 때문이라고 말하면 이야기는 쉬워질 것이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개인의 잘못이 아니고 당신이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여성들의 경우 바람난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가 항상 있었다. 어떤 수업을 들어가도 한 명 이상 같고도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멀쩡히 살아있는 자기 어머니를 두고 새어머니를 얻어 식까지 올린 아버지도 있고 오랫동안 두 집 살림을 하거나, 아예 집을 나가버리는 경우도 있다.

박복한 팔자 때문이라고 말하면 이야기는 쉬워질 것이다. 인과관계를 찾을 필요도 없고 그저 그런 운명에 의해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던 일들을 설명하기 쉬워진다. 박복한 팔자는 한 사람에게 귀착되고 그 사람을 원망하게 된다. 이유는 없다. 팔자때문이니까.

서울 용산구 쪽방촌에서 한 노인이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
서울 용산구 쪽방촌에서 한 노인이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뉴시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들이 겪어왔던 일들은 우리가 같은 땅에서 같은 제도 아래 같은 역사를 겪었기에 파생된 일들이다. 한 나라에서 같이 사는 건 운명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같은 시험을 보고 같은 교육을 받고 같은 재난을 겪어서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있듯이, 같이 보고 겪은 것들 때문에 인생이 뒤집어지기도 한다. 내가 저지른 게 아닌데 내가 피해를 본 일들이 있다면 그건 개인의 잘못이 아니고 당신이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제 욕심을 채우는데 눈이 먼 권력자들의 성급한 결정때문은 아니었는지 돌아보자고 말하고 싶었다. 어쩌면 이 말은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오래된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 모든 일들이 다 나 때문은 아니라고.

올해 만난 당신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나에게 나눠주면서, 들어줘서 고맙다고 해준 덕에 나 역시도 잘 버텼다. 건강이 허락될 때 살아온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다던 당신들이 조금만 더 건강하면 좋겠다. 노인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야 할 때마다 서글펐다. 당신들의 삶은 충분히 반짝이고, 이미 넘치도록 아름답다고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모두 고마웠다고.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좋은 나라 만나서

2019년 12월 8일 민중의소리 발행

https://www.vop.co.kr/A00001452759.html

 

내 고향은 이북의 돌산입니다. 황해도 은률군 서부면입니다. 사홍선 동네라고 했습니다. 구월산 밑에 있습니다. 나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습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하라 하니, 일제 때 이야기부터 해야겠습니다. 열 일고여덟 젊은 시절에 영장이 나왔습니다. 그때는 일본이 큰 전쟁을 할 때라 젊은 사람들에게 모두 영장이 나왔습니다. 근로정신대라고 전쟁터에 일을 하러 가야 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위안부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여자들을 데려다가 몹쓸 짓을 한다고요. 끌려가면 죽을지 살지 알 수 없는 일이니 무조건 피해야 했습니다. 빨리 결혼을 하면 안 끌려갈 수 있다들 했습니다. 동네마다 혼처를 찾느라 난리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아무데나 그저 빈 자리가 있으면 무조건 보내야 한다고 성화였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성급하게 결혼시켰어요.

시집은 피목촌이라는 동네였습니다. 시댁은 그 일대에서 아주 잘 사는 집이었습니다. 그때는 100칸짜리 집을 지으면 거만하다 해서 아흔아홉 칸을 짓고 살지 않았습니까? 시댁이 그런 집이었어요. 그런데 가보니 신랑이, 몸의 반을 못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돈 많은 집이니 전답은 다 소작을 주고 나는 할 일이 없었어요. 농사도 안 짓고 할 일도 없었어요. 밥 해주는 사람, 빨래 해주는 사람 다 있었어요.

가서 보니 남편은 몸이 그렇지만 돈은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그리운 것도 없고 아쉬운 것도 없었습니다. 시부모님은 당시만 해도 아들이 장가를 못 들 것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들어오니 나름대로 흡족하셨던 모양입니다. 나는 이것도 내 정해진 운명이라 생각하고 정붙이고 살며 아이도 낳았습니다.

남편은 몸이 불편했으나 풍족했던 시댁
해방되니 모두 일꾼들의 것이 되고 무일푼 신세

일제 강점기가 지나니 시대가 바뀌더군요. 그 많던 전답이 모두 일하던 일꾼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일푼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 전쟁이 터졌습니다. 인민군들이 들어와 집을 자기들 사무실처럼 썼어요. 우리를 알몸으로 내쫓아버렸습니다. 거처가 마땅치 않고 나는 젊으니 시댁 어른들이 친정에라도 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애들 둘을 끌고 돌아다니려니 길이 막막했습니다.

우리 엄마는 날 낳고 돌아가셨고 우리 형제들에겐 계모가 있었습니다. 친정을 가도 안 반가워하겠지만 일단 언니를 찾아가봤습니다. 동네가 홀라당 비어 있었습니다. 폭격 맞아 죽었는지 어쨌는지 집은 빈집이 되었고 식구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빈집에 몸을 쓰지 못하는 남편과 애들 둘을 데리고 앉아 있는데 계속 비행기는 와글와글 돌아다니고 총소리 나고 폭격이 이어지고 살 수가 없었습니다. 언니가 없는 집에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디다. 그저 시간이 가길 기다린 건지, 누가 오길 기다린 건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가족들<br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가족들 ⓒ자료사진

아군과 인민군이 밤마다 싸우고 사람들은 징집을 당하지 않으려고 도망가다가 잡히기도 했습니다. 해가 지나고 봄이 되었습니다. 언니도 돌아오고 친정에서 그럭저럭 전쟁을 피하며 버티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시누이를 데리고 우리 친정으로 왔습니다. 시댁이 있는 동네는 더 이상 살 수가 없게 되었다고만 했습니다. 어느 날 시아버지가 동리까지 왔습니다. 아버님은 시어머니와 시누이를 확인하더니 여러 말 할 거 없고 어서 길을 떠나자고 했습니다. ‘이래도 고생하고 저래도 고생하니 가다 죽더라도 가자’고 하셔서 다 같이 피난길을 나섰습니다. 한참을 가다 보니 섬으로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친정 오빠가 신천에 살았는데 피란길이 멀어 그 집에 들렀습니다.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헛간에 들어가 보니 쌀이 좀 있어서 속곳 바지에 쌀을 싸고 남은 옷가지에 마구잡이로 쌌습니다. 식구들이 다 이고 지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시아버지가 이불 보따리를 이고 시어머니는 우리 애들이랑 시누를 데리고 바닷가로 갔습니다. 솥단지 밥단지 숟가락은 어찌 가져가요 물어보니 아버지가 네가 쌀만 맡아라 해서 나는 쌀만 지고 시어머니는 요만한 솥단지하고 수저만 들고 애들 건사하며 갔어요.

바닷가에 도착하니 피난민들이 바글바글했어요. 그때는 기계로 가는 배가 없고 풍선(風船)이 20여척 서 있는데 선착장에 가득가득 짐이 실려 있었습니다. “이 배가 어디로 가나요?” 물으니 전부 다 이남으로 갈 거라고 했습니다. 물이 들어오면 배가 나갈 건데 파도가 잔잔하면 모두 다 순탄하게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피난민들이 모두 그 배를 타고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동네는 산이 옴폭하고 그 산 아래에 바다를 바라보는 집들이 쭉 서 있었어요. 집들은 전부 다 비어 있었습니다. 배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총소리가 나고 갑자기 난리가 났습니다. 시아버지가 ‘물이 들어오면 섬으로 건너가야 한다. 애들하고 니 엄마하고 어떻게든 갈 테니 쌀 이고 먼저 가라’고 하셨어요. 여기저기서 막 쏴대니 배가 못 들어오는 겁니다. 바다에 있는 작은 섬으로 가야 해요. 물이 막 들어차기 시작해서 금방 배가 올 거 같았어요. 어디서 누가 총을 쏘고 난리가 났어요. 어디서 누가 쏘는지 모릅니다.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나고 사람들도 막 쓰러지는 거 같은데 나는 쌀자루 이고 차오르는 물을 따라 나가는데 물이 점점 차올라요. 머리에 이고 있던 쌀자루도 너무 무겁고 도저히 더 갈 수가 없었어요. 갯바위 위에 쌀을 내려놓고 사람 오기를 기다리는데, 사람들이 와야 말이죠.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안 오는 거예요.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죽을 판이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판이라.

바위에 앉아 한참을 기다리는데 물이 다시 쭉 빠져서 쌀을 끌고 다시 육지로 가려고. 중간에 작은 섬에 사람들 몇 명이 바글바글 모여 있더라고요. 거길 들어가서는 식구를 잃어버렸다 얘기를 하니 쌀은 어따 뒀냐 물어서 나도 모르겠다, 하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젖 먹이던 아이가 있어서 젖은 불어오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물 들어오면 식구들이 오려나 내내 기다리는데 저 멀리 서 있는 배가 활활 불에 타고. 쌀이고 뭐고 다 실어놨는데 다 불타버렸어요. 이제 다 죽었구나 싶었습니다.

전쟁이 나고 친정 언니 집을 거쳐 피난길에 들린 신천 오빠집
바닷가 총격에 온 가족을 잃고 홀로 남으로
질긴 목숨, 그래도 살아지더이다

사람 목숨이 참 질기다고. 그때 죽을 것 같았는데 안 죽어집디다. 기다려도 아무도 안 오는데. 새끼 둘 다 내버렸지, 시아버지 시어머니 다 어디 갔는지 모르지. 남편도 모르고. 아무도 안 오고. 그렇게 바닷물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는데 아무도 안 오고. 그날부터 내가 혼자가 되었습니다.

서울 용산구 쪽방촌에서 한 노인이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
서울 용산구 쪽방촌에서 한 노인이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뉴시스

2년 전, 서울에서 만난 김 모 노인은 노인자서전 쓰기 수업을 하러 온 강사라 하니 내 손을 잡고 앉아 보라더니 이 이야기를 쉬지 않고 한 번에 쏟아냈다. 그해 그 해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미군 배를 타고 백령도에 당도했다. 백령도에서 다시 배를 갈아타라기에 그대로 따랐다. 군산에 도착하자 트럭이 여러 대 왔다. 피난민들이 살 곳으로 데려다준다는 말을 듣고 트럭에 올랐다. 트럭은 부안에서 사람들을 내려놓고 떠났다. 자식 둘과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부안에 내린 젊었던 김 노인에게 누군가 방을 한 칸 내주었다. 김 노인은 거기서 혼자가 되었다. 피난민들에게 준다며 어디선가 된장과 고추장을 걷어다 주었다. 남의 집 살이를 하며 끼니를 때웠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아이의 아버지는 고향에 따로 부인이 있었고 결국 고향의 부인에게도 돌아갔다. 김 노인은 호적을 만들지 못한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김 노인은 그 이후의 이야기는 아주 짧게 얘기했다.

서부역 뒤 기찻길에 앉아 있으면 서울역으로 들어가는 기차에서 배추 겉잎을 밖으로 던져버렸다. 버린 배춧잎들을 모아 바구니에 담아 머리에 이고 식당에 가서 팔면 잘 받아주었다. 방 하나 얻고 연탄 몇 장 사서 겨울을 견디고, 배춧잎을 주워 팔다가 배추를 받아 팔게 되니 형편이 좋아졌다고 했다. 그 사이 아이 둘은 ‘알아서’ 크고, 김 노인은 ‘세월이 좋아’ 수급자가 되었다. 김 노인은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흡족해했다. 사는 게 쉽지 않고 고생도 많이 해서 더 살고 싶은 욕심은 없지만 ‘나라에서 살라고 해주니’ 가는 날까지 감사하며 살겠다고 했다.

김노인이 말한 피난길의 이야기는 한국전쟁사에 남아있는 황해도 신천 사건으로 추정한다. 김노인에게 그 사건은 모든 것을 잃고 혼자 낯선 곳에서 살아가야 했던 일생의 큰 사건일 뿐, 어떤 이유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것도 평가하지 않는 것을 들으며 전쟁이란 그런 것이겠다고 짐작했다. 아흔 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작은 임대아파트를 얻게 되어 나라가 고맙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어떤 감정도 쉽게 표현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의 앞에서는.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종로 5가, 카바이드 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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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20일, 민중의소리 발행

남편은 성실했다. 매달 따박따박 받아오는 봉급으로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차츰 살림을 늘려나갔다. 살림을 늘린다는 것은 어제까지 쓰던 낡은 냄비를 버리고 새 냄비를 사는 것, 그 중에서도 조금 더 좋은 것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성실하게 매일 매일 좋은 대우를 받으며 직장을 다니던 남편이 듬직했다.

어느 날 남편이 회사에서 받는 봉급보다 더 벌 수 있으니 사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성실한 거로는 누구 뒤지지 않는 사람이다. 성실하고 부지런하면 무엇인들 못하랴. 남편이 잘 해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 남편이 차린 공장과 어린 아이들과 같이 살던 조그만 집까지 모두 은행으로 넘어갔다. 남편이 이 고비를 넘기면 된다고 할 때, 나는 이웃과 친구들을 찾아 푼돈이라도 꾸어 남편에게 주었다. 금방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점점 들어가는 돈만 늘어났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집을 비워줘야 했는데 빚이 있으니 멀리 갈 수도 없었다. 살면서 갚겠노라 약속하고 바로 옆 동네로 이사했다. 빚을 꿔준 사람들과 연락도 끊지 않았다. 누군가는 와서 욕도 하고 화도 냈지만 다 내가 돈을 빌리고 약속한 날짜에 갚지 못했으니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계절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편은 집에 드러누워 일어나지도 않았다. 미안하다고만 했다. 성실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이었다. 나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답답했다. 내가 무지해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무슨 도움을 줄 수는 없을까, 아무 것도 알지 못하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무작정 버스를 탔다. 버스는 종로 5가를 지나갔다. 해가 진 지 몇 시간이 지났다. 어둑한 밤거리에 다들 집에 돌아갈 법도 한데 카바이드 불빛이 한데 잔뜩 모여 있었다. 나도 모르게 버스에서 내려 불빛을 따라갔다.

겨울 포장마차 노점 불빛(자료사진)
겨울 포장마차 노점 불빛(자료사진)ⓒ뉴시스

카바이드 불빛은 출항을 앞둔 오징어잡이배처럼 빛나고 있었다. 불빛은 수 십대의 리어카 위에 있었다. 리어카 위에는 국수, 오뎅, 꼼장어 같은 게 놓여 있었다. 장사를 나가는 사람들이 한군데 모여 있었던 것이다.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부터 애기 업은 젊은 여자도 있었다. 그들은 리어카 위에 뭔가를 척척 올리더니 하나씩 대열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는데 가슴이 콩닥거렸다.

“아저씨, 나도 장사하고 싶어요. 아저씨 나 좀 알려줄 수 있어요?”
“남편이 죽었어요?”

아. 장사를 나가는구나. 내가 잠들던 시간에 이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하루를 시작하는구나. 잠도 제대로 못자고 다음 날 해질 무렵 어제 갔던 장소를 다시 찾아갔다. 한 남자가 제일 커다란 리어카에 지갑과 잡화를 올려두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먼데서 그 남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그 남자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물건 살 폼도 아닌데 리어카 앞에 버티고 있으니 그 남자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그 남자에게 말했다.

“아저씨, 나도 장사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돼요? 아저씨 나 좀 알려줄 수 있어요? 나 돈 벌어본 적 없어요.”

남자는 나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물었다. “남편이 죽었어요?”

여기까지 적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수년 전 성업하던 식당을 접었다. 식당이 있던 건물이 경매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지금은 복지관에서 영어도 배우고 컴퓨터도 배우고 미처 졸업하지 못한 학교의 졸업자격 시험도 통과했다. 칠순을 넘기고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몇 차시였던가. 생애사쓰기 수업 중에 카바이드 불빛을 발견한 순간의 이야기를 써왔다. 써 온 글을 내가 대신 읽었다.

“밤 9시에 혼자 버스를 탔다. 가다보니 종로 5가였다.” 라는 문장을 읽고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밤에 일 없이 혼자 버스를 탔을 때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다들 아시죠? 이게 무슨 기분인지.” 라고 물었고, 칠순을 넘긴 수업 참가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가 되었든 다른 곳으로 나를 데려다 줄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그 위에 거침없이 올라타고 싶은 마음, 그 신산함에 대하여, 동의를 구했다.

남편이 죽지 않았으나, 돈을 벌지 못하는 남편은 마치 죽은 것과 다름없는 것처럼 여겨졌던 시절. 이야기의 주인공은 노점상을 시작한다. 누워서 꼼짝을 하지 못했던 남편은 아마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우울증을 앓고 있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노점상을 거치다 노점상 철거 투쟁에도 나섰다. 정부가 마구잡이로 노점상들을 때려 부쉈고 데모도 해봤다던 이야기를 짧게 언급하고 그 시절의 이야기는 쓰지 않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지인의 도움으로 식당을 열었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는 사명감으로 살았다. 식당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자식을 유학까지 보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밤 12시에 일이 끝나는 고된 노동을 십 수 년 겪고 비로소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구청의 철거 단속에 항의하는 노점상(자료사진)
구청의 철거 단속에 항의하는 노점상(자료사진)ⓒ민중의소리

카바이드 불빛에 홀려 장사를 시작한 사람은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졸기도 했고 바닥만 보면 눕고 싶었다고 적었다. 그 정도의 고된 노동이 있어야, 나이 먹어 복지관에 다니며 여생을 즐길 수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 이 사람은 경매로 넘어간 건물주 때문에 권리금 한 푼도 못 받고 보증금만 건져 가족을 먹여 살린 식당을 접었다. 후회는 없다고 했다.

나는 이 사람의 노동이 과연 온당한 대가를 받았던 것인지 따져보고 싶었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뼈를 깎는 고통이 없이 평온한 노후를 얻을 수 있을까. 카바이드 불빛에 생계의 희망을 보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도 가히 이해할만 했다.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내가 대굴빡부터 얘기하께

2019년 11월 14일. 민중의 소리 발행

https://www.vop.co.kr/A00001446084.html

“나는 내 이름 내가 지었지.
피란민으로 남한에 내려왔거든. 내려와서 동네 이장이 호구조사 나왔을 때, 이름이 뭐냐고 묻길래, 저는 이름이 김명자입니다. 이렇게 대답했어. 그 이름이 맘에 들었거든. 명자. 아끼꼬. 원래 어릴 때는 우리 아버지가 독자인데, 우리 할머니가 독자가 큰 딸을 낳아놓으니 이쁘다면서 이쁜아 이쁜아 이렇게 불렀지. 그래서 그게 그냥 이름이 됐어. 다른 이름이 없었던 건데, 호적에다가 이쁜이라고 올릴 수는 없잖아. 그래서 내가 나는 이름이 김명자요, 라고 한 거야.

자, 내가 대굴빡부터 얘기하께잉?

먹고 살기 힘들어서 우리 할머니는 지금 내 나이만큼 되었을 때야.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딸을 일곱을 낳았다고. 내가 맏딸이고. 할머니까지 해서 우리 식구가 모두 다 남만주로 갔어. 거기 가서 딸을 하나 더 낳았지. 그래서 우리 집에는 딸이 여덟이 됐어. 나하고 밑에 동생 셋은 이름이 있는데, 나머지는 이름이 없어. 딸그만이, 딸그뿐이, 뭐 그랬어.

그 당시에 재수 좋은 사람은 헤이타산 끌려가고 재수 나쁜 사람은 정신대로 끌려갔어. 정신대 알아? 내가 그때 열여섯 살 먹었는데, 열여섯 살 먹어서 결혼을 하면 안 잡아간다 하길래, 그때 우리 살던 집 근처에 스물여섯 먹은 총각이 혼자 와서 살드라 이거야. 그래서 그놈하고 결혼을 했지. 그게 우리 영감이여.

일본놈이 언제 손을 들었냐 하면 음력으로 7월 초이레 12시였어. 중국에서, 몽고에서, 만주에서 일본놈 하고 미국놈 하고 싸움을 했어. 미국놈이 이기고 일본놈이 졌지. 그때는 중국에서 만주족들이니 몽고사람들이 우리를 막 창으로 찔러 죽여버린다고 해. 무서워서 우리는 너무 무서워서 거기서 살 수가 없어. 소련놈이 이북에서 정치한다고 하고, 미국놈은 이남을 정치한다고 해. 그래서 거기서 낳은 아들을 데리고 이제 내려오는데 겨울을 내내 걸어서 여덟 달을 걸어서 내려왔어. 내려오는 길에 너무 추우니까 아들이 얼어버렸어. 서울에 도착했는데 아들이 얼어 죽어버렸어. 그래서 남대문에 죽은 거 버리고.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가족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가족들ⓒ자료사진

그리고 그 담에 임신을 해서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이 일흔 넷이여 시방. 그 아이를 지 아부지가 딱 짊어지고 내려왔다고. 일본놈들이 면이란 면은 다 걷어가서 솜도 없고 이불도 없어. 여름옷도 없고. 그래서 홑이불 뜯어가지고 묶어서 애 아부지가 그 딸을 업고 내려왔다고. 그게 지금 일흔 넷이여.

여덟 달을 빌어먹으면서 내려오는데 한 번은 어디를 걸식을 하러 갔어. 밥을 뜩뜩 긁어서 밥풀만 줘. 그때는 양은그릇도 없고 다 투가리 들고 다녔어. 우리 밥 좀 주시오, 했더니 우리도 점심이 얼마 없응게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오, 하는 소리를 듣고 뒤로 돌아서는데 눈물이 비 오듯 하더라고. 날은 추워서 강가에서 바들바들 떨고. 그때는 우리 아들이 아직 안 죽었어. 밥을 얻어먹으면 한 숟갈, 두 숟갈 뜯어서 먹이고, 그래가지고 그 아들을 업고 내려왔거든.

여덟 달을 걸어서 내려왔어. 빌어먹으면서 내려왔어. 걸어서 여덟 달을 빌어먹으면서 내려왔어. 아들은 얼어서 죽어버리고. 죽은 거 남대문에 내다 버리고. 애 아부지도 내려오다가 얼어버려서 내려와서는 죽어버리고. 오는 데 추웅게 죽어버리더라고. 그때 내가 서른셋이여. 여태까지 내가 혼자 살았어.”

지금으로부터 6년 전, 한 복지관에서 만난 노인이다. 을축년 소띠 1925년생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총기 있었다. 남만주에서 내려와 서울에 자리 잡았던 주소도 줄줄 읊었다. 첫 수업때 아들이 죽은 이야기를 했다. 황해도에서 태어났다는 김명자옹은 먹고 살기 힘들어 남만주로 이주했다가 해방 이후 전쟁 즈음에 서울로 내려온 것 같았다. 말이 매우 빨랐고, 알아듣기 어려운 단어를 섞어 말했다. 변형된 일본어가 곳곳에서 튀어나왔고 나이 탓에 발음이 어눌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김명자옹은 첫 수업이후로 다섯 번을 더 만났다. 매번 수업이 끝날 때마다 나를 잡았다.

“선생님, 내 얘기 좀 들어봐. 내가 대굴빡부터 얘기하께”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항상 같았다. 남만주에서 추운 겨울을 견디며 여덟 달을 걸식을 하며 걸어 내려왔다. 남대문에 도착하니 등에 업은 두 살배기 아들이 얼어 죽었다. 남대문에 아기 시체가 쌓여있었다. 피난 내려오며 죽은 아이들의 시체를 모아두었더라. 나도 거기다 아기를 던졌다. 묻어주지도 못했다.

아들의 죽음에서 멈춘 김명자옹의 삶
노인은 얼마나 많이 죽은 아들의 이야기를 했을까

내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담당복지사를 붙잡았다. “선상님, 내 얘기 좀 들어봐. 내가 대굴빡부터 얘기하께”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같았다. 구체적으로 상상하면 끔찍하고 처절해서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얘기였다. 매주 같은 시간에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사뭇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노인의 손을 잡았으나 감정에 휩싸이지 않으려고 더러 마음의 귀를 막았다.

2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주최로 열린 세월호참사 전면 재수사, 국민고소고발인대회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눈물을 흘리고 있다.. 2019.11.02
2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주최로 열린 세월호참사 전면 재수사, 국민고소고발인대회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눈물을 흘리고 있다.. 2019.11.02ⓒ김철수 기자

노인은 얼마나 많이 죽은 아들의 이야기를 했을까. 자기 옛 주소까지 기억하는 총명한 사람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손을 붙잡고, 처음부터 얘기한다는 것이 항상 남만주에서 걸어 내려와 등에 업은 아이가 죽은 것이었다. 그 사람의 생애 처음은 남만주가 아니었고, 아이가 죽은 일도 그 사람의 삶의 첫 장면이 아니었는데, 김명자옹의 처음은 남만주에서 걸어 내려와 아이가 죽었고, 그 아이를 묻어주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어쩌면 그게 김명자옹에게는 삶의 전부였을 것이다.

상실은 사람을 멈추게 한다. 김명자옹은 묻어주지도 못한 얼어 죽은 아들 이후의 삶을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때 죽지 않은 딸이 일흔이 넘었다는 것 외에는.

아이들을 잃고 난 다음엔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누군가 애써 잡아끈다고 그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이들의 죽음은 그 무엇보다 무고하기에, 그 슬픔도 대책이 없다. 태연하게 “명복을 빈다”라고 말하기도 죄스럽다.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공개불가

https://www.vop.co.kr/A00001442117.html

민중의 소리 : 발행 2019-10-18 12:05:51

“이거는 선생님만 보시고.. 공개는 좀…”
아무렇게나 뜯어온 다양한 종이에 연필로 꾹꾹 눌러쓴 글씨를 내보이며 부끄러워하는 사람들, ‘이거는 다른 사람에게 공개하지 말고, 선생님만 보시라’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남성노인들은 공개하지 않을 이야기는 아예 쓰지 않는 것인지, 그럴 이야기가 있으면 아예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것인지, ‘공개하지 말고 선생님만 보시라’고 했던 남성노인은 없었다.

여성들이 말하는 ‘선생님만 보시라’는 내용은 대부분 가족과 얽힌 이야기다.
올 봄에 만난 한 여성노인은 수업이 끝나고도 나를 붙잡고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갔다. 주인공의 남편은 오랫동안 도박에 빠져 살았다. 남편이 지방으로 일을 하러 간다고 해서 혼자 얼마나 외로울까 힘들까 걱정했다. 남편이 지방으로 일을 떠난 뒤 주인공은 이웃의 권유에 못 이겨 아이들을 데리고 집 근처 공원에 놀러갔다. 공원을 뛰어놀던 아이가 저기 아빠가 있다고 소리를 쳤다. 남편은 지방으로 일 하러 간 적 없었다. 집 근처 어딘가에 도박꾼들과 방을 얻어 기거하며 본격적으로 도박을 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 이후로도 남편과 이혼하지 않았다. 남편은 아직도 살아있고 이제는 도박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사람은 꽤 많은 글을 썼지만 복지관에서 책자로 만든다고 했을 때 원고를 내지 않았다.

“선생님, 나요, 이거 다 썼지만, 아직은 아닌 거 같어. 못 내. 이거는. 내가 진짜 부끄러워서. 언젠가는 할 수 있겠지. 언젠가는. 근데 지금은 아니야. 우리 애들은 이런 거 몰라. 이런 거까지는 공개 못해. 내가 이 동네 너무 오래 살아서….”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그이의 손을 잠깐 잡았다.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한국여성대회에서 한 참가자가 장미를 들고 폭력 근절을 요구하고 있다.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한국여성대회에서 한 참가자가 장미를 들고 폭력 근절을 요구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이 사람이 참가한 수업은 모두 여성만 있었다. 그 중 전업주부로 살아온 사람은 단 한 명이었고, 대부분 가장으로 살아온 여성들이었다. 남편의 폭행을 몇 장에 걸쳐 써온 사람도 있었고, 시댁의 횡포를 한 두어 줄로 적은 사람도 있었다. 폭력이 없는 남편들은 아팠다. 이들은 남편이 먼저 병들어 죽지 않는 이상, 버텼다. 수업에 참가한 여성들은 남편이 먼저 죽은 동료들을 “힘들게 살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본인들도 만만치 않게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남편이 먼저 사라지는 삶이 더욱 안타까운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한 달여가 지나, 가장으로 살았으면서 가장행세를 하지 못했던 여성들이 왜 남편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우리 동네에 남편이 먼저 간 이가 있었어. 근데 남편이 먼저 가면, 사람들이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여. 밤에 찾아와. 남자들이.”
“누가 찾아온다고요?”
“동네 남자들이 그렇게 찾아온다고.”
다른 여성들도 말을 보탰다.
“그렇지. 그럴 수밖에 없지. 아이고 우리 동네는 진짜 흉측한 일도 있었다니께. 친척 아저씨까지 온다더라고!!”
노인들은 그들 특유에 탄식을 쏟아내며 몸서리를 쳤다.
“선생님, 무슨 말인지 알지요?”
삼시세끼 밥도 제대로 못 챙겨먹던 시절에, 끼니보다 잦았던 성폭력의 그림자가 교실위에 나타났다가 가라앉았다.
“그래서 집에 남자가 있어야 하는 거야. 아무리 쓸모가 없어도, 집안에 들어앉아 있어야 하는 거라고.”
아빠가 없는데도 남자 신발을 현관에 두고, 음식을 배달시키면 빈 방을 향해 “여보!”라고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가 내 등줄기를 스쳐갔다.

일러스트.
일러스트.ⓒ제공 : 뉴시스

이 교실에 있었던 여성들의 남자들 중 다수는 기운이 있는 상태로 집안에 있으면 술을 마시거나 가족을 때렸고 그렇지 않으면 아프다가 먼저 죽었고, 집밖에 있으면 도박을 하거나 다른 여자를 만났다. 소수의 남자들이 충실히 가정생활을 했고 소처럼 일했다.
여성노인들은 계속해서 말했다. 얼마나 모진 세월이었는지, 힘겹게 살아왔는지, 가족에게 끊임없이 상처받으면서도 가족을 지키려고 얼마나 애써왔는지.

가장 처음의 상처는 가족에게 왔다.
물론, 가장 처음의 위로도, 가장 처음의 돌봄도 가족이었다. 한 교실 안에서 여성 노인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삶을 이야기할 때 남성노인들은 입을 꾹 닫고 눈을 반쯤 감았다. 그들의 마음은 어떠한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해수욕을 잊은 늦가을, 보드라운 마룻바닥에서 갑자기 느껴지는 서걱대는 모래알 같았다.
나는 이들에게 언제나 “더 말하라”고 강권한다.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에게 남고, 이렇게 글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퍼져나간다. 말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세상에 도착한 적 없이 허공을 떠돌다 증발한다. 삶의 성과를 가족의 평안으로 측정하는 여성노인들의 사이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상상해본다. 당신의 삶은 또 얼마나 모질었더냐고.
공개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남몰래 적어가는 그들의 손끝에서 우리들의 생존이 단 한 번 찬란한 빛과 만난 낡은 칼날처럼 번뜩인다.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모자를 쓴 노인

https://www.vop.co.kr/A00001438721.html

 

2013년, ‘노인 자서전 쓰기’ 프로그램을 처음 진행하게 되었다. 보조강사로 시작해 두어 번의 수업을 맡았다. 내가 맡은 첫 수업에는 남성 노인이 열 명이 넘었고 여성 노인이 세 명이었다. 그 이후에 만난 어느 집단도 이렇게 남성 노인이 많은 경우는 없었다. 그 교실의 남성 노인들은 모두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들의 모자에는 보훈, 호국 같은 글자가 수 놓여 있었고 몇 명은 그 모자에 배지를 잔뜩 달고 있었다. 모자를 쓴 노인들은 좀처럼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쓸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등을 의자에 깊이 넣고 이야기를 듣겠다는 자세였다.

노인들이 글을 쓰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나는 복지관 담당자에게 다시 물었다. 수강생의 특성을 알려달라고. 사전에 복지관측에서 나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은 참가자의 70%가 문맹이었고 나머지 30%도 문자를 해독하는 수준이라는 것. 문장을 완성해 한 편의 글을 써볼 기회가 없던 사람들이었다.

교실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후반 출생자였다. 잊고 있던 근현대사를 다시 뒤졌다. 1919년 3.1운동, 1921년 조선어연구회가 설립되었고, 1933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했지만 동아시아 전체를 전쟁을 몰고 간 일제는 1938년 한글교육을 금지시킨다. 1939년 징용령이 공포되고 1940년 창씨개명이 실시되었다.

일본 전쟁영웅 찬양 글을 쓰는 학생들
일본 전쟁영웅 찬양 글을 쓰는 학생들ⓒ경남교육청 홈페이지

그 교실에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앉아 있던 노인들은 그때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연표를 읽은 나는 다음 수업에서 이들에게 모두 일본어는 조금이라도 기억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다. 노인들은 갑자기 신나서 자기가 기억하는 일본어와 일본노래를 이야기했고 몇 년 전 일본 여행 갔을 때 통역이 필요 없었다는 허세까지 부렸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소학교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이들이 기억하고 있는 한글말살정책의 현상이 강의장에 고스란히 살아났다. ‘지금 돈으로 치면 500원씩 벌금을 걷어갔다, 우리 센세이는 때렸다, 집에 와서 한참을 울었다, 그걸 고자질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일본인 센세이보다 조선 선세이가 더 나빴다..’ 이들은 일본어를 얼마나 혹독하게 배웠고 잘했는지를 말했다.

나는 한국어를 배울 수 없던 상황에 대해 하나씩 점검하며 물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후반에 태어난 사람들은 학교를 다닐 수 있던 사람들이 적었고 다닌 사람들이 배운 언어는 일본어. 45년 광복을 맞아 하루아침에 선생들도 사라져 버렸다. 학교는 길을 잃었고 이들은 산으로 들로 소란스러운 정국을 구경하며 몰려다녔다는 이야기를 했다. 혼란스러운 정치대립이 이어져 길에서 싸움이 잦았다고 기억했다. 코에 솜털이 거뭇해질 때쯤 전쟁에 뛰어들어야했고 돌아와 보니 청년이었다.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던 사내들. 이들이 문맹으로 남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국가는 이들을 방첩대나 보안대라는 이름으로 불러 세웠고, 제대로 된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자원봉사로 이용했다. 그러다가 어느덧 경력도 이력도 없이 배지를 잔뜩 달고 노인이 되어 앉아 있는 이 사람들을 보며, 국가란 무엇인가 생각했다.

2017년 8월 22일 서울 여의도 자유한국당사 앞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무죄석방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

2017년 8월 22일 서울 여의도 자유한국당사 앞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무죄석방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정의철 기자

이들의 삶은 기록된 것보다 기록되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발화하지 못한 것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꿈틀거리다 어디론가 몸을 감췄다. 비가 오면 냄새를 피우는 썩은 사체처럼,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기회가 되면 사람들을 괴롭혔다. 공포와 불안은 혼백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내가 만난 노인들이 어제 광화문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빨갱이 세상을 막아야 한다는 공포는 어느 집에나 있는 억울하게 죽은 조상신이었다. 노인들의 목덜미엔 비참하게 죽어버린 혼백이 매달렸다. 모자에 배지를 달면 두려움이 사라질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어린 시절, 일본 선생의 매질을 기억하며 손가락을 구부리던 그들의 모자를 기억한다.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나는 다 실패여” – 민중의 소리

https://www.vop.co.kr/A00001435728.html  

2017년 1월이었다.
서울의 어느 노인복지관에서 ‘노인 자서전 쓰기’ 수업을 의뢰해왔다. 나는 그 수업의 보조강사이자 기록자로 참여했다. 복지관의 규모가 커서 수강생도 많았다. 노인들은 대부분 유년기의 기억을 이야기하다 울었다. 그들이 겪은 전쟁은 그저 비참이었다. 누군가 사라지고 누군가와 헤어진 이야기만 이어졌다. 자기를 살뜰하게 챙기다 사라진 아버지를 이야기하던 여성 노인이 펑펑 울었다. 노인들의 서사는 유년기에서 오랫동안 맴돌았다.

두꺼운 점퍼를 입고 맨 뒷자리에 앉아 글쓰기 교재를 뒤적거리던 남성 노인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내 인생은 실패입니다.”
강사로서의 역할은 포기하려는 사람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다독이는 일인지라 나는 그에게 최대한 친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실패인지 아닌지 이야기를 들어봤으면 좋겠는데요.”
그는 슬며시 웃더니 말을 이었다.
“다들 뭔가를 이뤘어요. 일이 있거나, 자식이 있거나. 여기 책에 있는 사람도 그렇고. 사람들이 살다 보면 뭐 하나라도 이룬단 말이죠. 하지만 나는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전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해 놓은 것이 없어요. 내 인생은 완전히 실패예요.”
나는 짓궂은 표정으로 “아닐걸요.”라고 말하고 웃었다.
“정말이에요. 나는 다 실패. 모든 게 다 실패.”

2017년 1월이었다. 나는 그에게 성공한 사람들은 오늘 모두 청문회장에 앉아 있다고 말했다. 굵은 주름이 남은 굽은 손가락으로 노인은 얇은 글쓰기 교재를 쥐고 가만히 있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남은 듯했다.
다른 노인들은 교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몸을 숙여 그의 앞에 다가갔다.
“아버님, 우리 모두 다 죽잖아요. 인생에 성공이 어딨어요. 모두 다 죽는다는 건 결국 다 실패한다는 말이잖아요. 아닌가요?”
노인이 허허허,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는 다 실패여….”
“어떻게 실패했는지 알려주세요. 그럼. 실패인지 아닌지 좀 보게요.”

노인이 환하게 웃었지만 어이가 없는 것인지, 기분이 나아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굽은 허리를 일으켜 노인이 나에게 목례를 했다.
그는 다시는 그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노인 자서전 쓰기 수업 참가자
노인 자서전 쓰기 수업 참가자ⓒ필자 제공

그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다시 만나지 못한 사람이지만 그의 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노인들이 “내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패”라고 뇌까리며 형광등을 켜둔 채로 모로 누울지, 나는 알 수 없다.

노인들을 만날 때마다 이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 모든 것이 실패였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고.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성공”은 무엇이냐고. 헤어진 그 사람에게 말하고 싶어 이 칼럼을 시작한다.

당신의 인생은 실패도 성공도 아니라고. 나도 비슷하게 살고 있다고.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