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를 잊는 파도

평생을 복수와 증오심으로 살던 사람이 있었다. 그 증오는 그 사람이 살아가는 힘이 되었다. 그렇게 30여년을 보내고 난 뒤 나는 그에게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이제 그만 원망하고 이제 그만 증오하라고 할 수 없었다. 그 사람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은 그 사람의 삶을 지탱해 온 핏줄이었다. 그 사람이 복수심을 멈추는 날은 그의 생명도 끝날 것이 자명했다. 그“복수를 잊는 파도” 계속 읽기

저녁

새벽녘 두어 번 뒤척였다고 휴대폰 어플이 알려준다. 내가 잘 잤는지, 잘 못 잤는지, 그런 것도 기계에게 묻고 사는 한심한 삶. 내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씹다버린 사과모양의 전자제품인지도 모른다. 내가 나인지 사과가 나인지, 이미 그 경계는 허물어 진 것 같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말을 찾아 헤맨다. 쓰리고 아린 상처를 적확하게 표현해 줄 단 한 줄의“저녁” 계속 읽기

저녁

새벽녘 두어 번 뒤척였다고 휴대폰 어플이 알려준다. 내가 잘 잤는지, 잘 못 잤는지, 그런 것도 기계에게 묻고 사는 한심한 삶. 내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씹다버린 사과모양의 전자제품인지도 모른다. 내가 나인지 사과가 나인지, 이미 그 경계는 허물어 진 것 같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말을 찾아 헤맨다. 쓰리고 아린 상처를 적확하게 표현해 줄 단 한 줄의“저녁” 계속 읽기

주스, 피자, 거울

1999년 냉장고에 병으로 된 델몬트 오렌지 주스를 사다놓던 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집의 냉장고는 검은색이었고 같이 살던 여자의 것이었다. 나는 6천원쯤 하는 커다란 델몬트 오렌지 주스를 냉장고에 넣으며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했다. ‘병 주스를 사 먹을 수 있다니. 고생은 이제 끝났어. 다음은 파스퇴르 우유다.’   2006년 몇 년이 지나 도미노피자를 시켜먹던 날을 맞이했다. 이“주스, 피자, 거울” 계속 읽기

절반의 부모 절반의 아이

부모님의 생애사를 쓰겠다는 사람들이 모여 강좌신청을 했다. 8주간의 강좌는 생애사쓰기에 대해 소논문을 작성하신 수리장애인복지관 이형진관장님이 특강으로 마무리했다. 엄마를 이야기하며 눈물짓는 선한 사람과, 아버지의 처절했던 삶의 투쟁에 대해 울먹이는 사람이 있다. 나에겐 둘 다 생경스러운 풍경이다. 몇 년전이었다면 배알이 뒤틀리거나 기분이 착찹했을 것이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은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태초부터 없던 것과 다를“절반의 부모 절반의 아이” 계속 읽기

고양이 털끝

갑작스럽게 전화가 왔다. 이따 회의에 오시죠? 라는 뜬금없는 말이었다. 느릿한 억양으로 말하는 이 남자는 두꺼운 뿔테의 안경을 썼다. 얼굴의 반을 가리는 안경이었다. 매우 지적으로 보이려는 수작임에 틀림없었다. 지적이라기 보다 의뭉스럽다는 말이 걸맞은 사람이었다. 연락을 받은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오라면 가야 하는 입장이다. 그게 내가 할 일이었다. 시간에 맞춰 도착하겠노라고 말했다.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고 가지 않을“고양이 털끝” 계속 읽기

사람구경

1. 나는 사람을 믿지 않지. 라고 쉽게 말하곤 했다. 그게 아마 작년까지였는지, 올 여름까지였는지 모르겠다. 사람은 예측할 수 없지. 라고 지금은 바꿔 말할 수 있다. 영 능력이 안되는 것 같던 사람이 갑자기 뒷심을 크게 발휘하는 경우도 있고, 매우 잘 해낼거라 기대했던 사람이 바닥을 기는 경우도 본다. 사람들의 진정성, 순수성, 자율성, 자치적 능력들을 전혀 믿지 않으며“사람구경” 계속 읽기

어떤가요 여기는

그래도 일기를 한 줄이라도 쓰고 나면 낫다. 상황을 적고 그럼 이제 내가 가져가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적는다. 매일 매일 나는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고 싶은 모양이다. 오늘은 어제 움켜쥔 것을 버릴 때가 되었다고 적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사람에게 공들이며, 보상이 올 것이라고 믿어마지 않았던 어리석은 마음을 버린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남는 것은 칭찬도 보상도 아닌“어떤가요 여기는” 계속 읽기

내게 거짓말을 했던 시간

심심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심심하다는 건 어떤 느낌이죠? 언제나 단순한 표현에 대해서 끝없이 캐묻는게 정신분석이다. 음. 그건 마치 뭐랄까.. 누가 있었으면 좋겠다? 누가 같이 이야기하고 놀아줬으면..? 좋겠다는 기대? 이게 외롭다거나 슬프다거나 그런 느낌은 아니구요. 약간 뭐랄까.. 유아틱? 하다는 느낌이죠. 그러니까 심심해~ 라고 하는 건 마치 저희 아들이 집에서 분명히 놀고 있는데도 뭔가 더 재미난 거를 찾고“내게 거짓말을 했던 시간” 계속 읽기

서운함이 분노가 될 때 – 실은..

흰 가운을 입고 안경을 쓴 그니가 말했다. 속상하다는 걸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을 때 감정의 변화가 오잖아요? 그 때는 단순히 속상한 마음, 서운한 마음, 섭섭하고 사소한 것들이 이제 분노가 되거든요. 감정이 변하는 거죠. 그래서 그 감정이 변했을 때 터뜨리지 않으려고 거리를 더 두는 경향들이 있기도 해요. 그러다 보면 말을 안 하게 되기도 하고 물리적 거리를 멀리“서운함이 분노가 될 때 – 실은..” 계속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