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적 골목의 풍경

나 보광동 살 때는 집안에 들어와 앉아 있던 놈도 있었어.
반지하 창문 열어놨는데 안방에 마당 수도 틀어서 물 뿌린 놈도 있고,
샤워하는데 목욕탕 창문 여는 놈도 있었어.
그 놈 잡겠다고 머릿수건 두르고 나가서 112 불러 골목에서 내가 아는 온갖 욕을 해제꼈어. 동네 아줌마들이 튀어나와 아가씨 입 한 번 걸죽하다며 박수 쳐줬어.
알잖아 내가 욕 좀 하는 거.

어떤 씨발 개좆같은 새낀지 걸리기만 해봐라 자지를 잘근 잘근 잘라서 젓갈을 담가 니 아가리에 쑤셔 넣어줄테다. 목구녕에서 피를 토할 때까지 발라줄라니까 당장 나와 이 씹새끼야. 좆만한 새끼 어디 비겁하게 좆도 아닌게 나한테 이 지랄을 해?
개좆만도 못한 새끼니까 샤워하는 거나 훔쳐보고 지랄이지 씨발놈아 모가지를 산 채로 따버릴라니까. 내장을 꺼내서 줄넘기를 해버릴라니까.
씨발 새끼 좆을 다 까서 포를 떠버릴라니까 당장 나와!!

경찰이 와서 나를 말렸어. 알았으니까 그만 좀 하래.
10분 정도 씨발 소리를 수백번은 했을거야.
하도 쉬지 않고 이 목소리로 욕을 해대니까 경찰이 찾아보겠다고 막 움직이더라.

내가 용감해서 소리 질렀을까?
작은 강아지가 큰 개보다 많이 짖어. 딱 그 수준인거지.
나는 무서우면 욕을 해. 눈물보다 욕이 먼저 나와.

경찰이랑 그 새끼가 튄 곳을 찾아 동네를 다 뒤졌어. 연립주택과 다세대 주택 사이에 여자 빤스만 한 무데기 쌓여있더라. 나는 그 동네가 그런 동네인지 알았지.

내가 그때 스물 넷이었어.

대흥동 살 때는 밤에 자고 있는데 방안에 들어와서 불 끄는 놈이 있었어. 불이 딱 꺼지니까 잠에서 깬거야. 동생이랑 나는 반사적으로 자다 일어나 그 새끼 목덜미를 잡았어. 도망가더라. 머리채는 모자를 썼으니 안 잡히고 사람을 잡는다는게 셔츠를 잡았는데 셔츠 단추가 다 튿어져서 도망갔어. 역시 경찰을 부르고 일주일 넘게 경찰이 와서 순찰을 돌았지.

보광동에서도, 대흥동에서도, 경찰이 뭐랬는지 알아?
여기는 워낙 아가씨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이런 일이 많다는거야. 그래서? 그러면 순찰을 더 도셔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서울시내에서 이렇게 골목 많은 데가 없대. 장난해? 강북에 온 동네가 그런 골목이야. 경찰이 일주일 열흘 와서 순찰 돌아주긴 했어. 나는 파출소 번호를 전화기에 입력해놓고 수시로 전화를 걸어서 나 지난 번에 그 여자인데 요즘 순찰 안 도시냐고 묻곤 했어.

용감했다고?
만약에 걔들이 칼을 들었으면?
잠든 내 동생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 새끼가 염산을 들었으면?

용기가 필요해?
그런 건 필요치 않아.
난도질 당하고 죽지도 못한 채 살아남을 수도 있는 문제야.

나이 먹을 만치 먹고 애 낳고 평촌에 와서 살 때야.
아파트 벤치에 앉아 있는데 펜스 건너편에서 어떤 남자가 뭘 물어. 몇 가지 대답을 해줬더니 그 새끼가 뭐랬는지 알아?
아줌마 나랑 연애 좀 할래요?
미친 호로새끼 내가 왜 니랑 연애를 해?
질문에 대답해주면 연애하냐?

세상에 그런 새끼가 다 있냐니.
수두룩 빽빽한 게 그런 새끼들이야.

어떤 심정이냐고?
내 눈에 안 띄었으면 좋겠어.
모조리 다. 사라지라고.

2019. 6. 1.

 

누군가에겐 낭만적으로 보일, 보광동의 골목 (2014년 9월)

맥락 없는 두 가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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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구를 배우고 싶다는 아이에게 큣대를 바이올린 활이라 생각하라고 말했다. 왼손으로 지판을 잡고 오른손은 힘 있되 유연하게.
오랫만에 큣대를 잡아보니 정말 그랬다. 우연하게 비슷한 원리들이 있다. 어깨에 힘을 뺀다거나, 손목의 스냅을 이용한다거나, 손가락의 안 쓰던 근육을 쓴다거나.

물론 중딩은 바이올린 활을 어떻게 잡는지 모른다고 기억나지 않는다고 투덜댔다.

생각해보니 바이올린 레슨 받은지가 꽤 되었다. 4년 되었나. 지금은 스즈키 7권까지 하다가 다음 단계는 너무 어렵고 지루해진다며 모짜르트와 하이든 콘체르토를 연습하고 있다. 어디가서도 절대 연주할 수 “없는”, 독보적인 소리를 자랑할 수 있다. 그동안 레슨은 대여섯 번 정도 빼먹은 듯 하다. 선생님이 꾸준히 와주시니 나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했고, 그러다 보면 시간이 쌓인다.

친구가 다시 진료를 잘 받겠다 결심한 걸 칭찬했다. 갑자기 정신분석을 30개월 받은 게 떠올랐다. 그 긴 걸 어찌 했나. 빼먹은 건 두 세번 정도였다. 지금도 수요일 오전 10시는, 어딘가 가야 하는 낙인 같은 게 느껴진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지치고 때려치우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중단하면 언제 죽어도 모를 거라 했던 것 같다.

어젯 밤엔 세수를 하다가 지역사회에 일하기 시작했을 때는 내가 30대였다는 걸 깨달았다. 지역교육네트워크 이룸 사무국장입니다, 라고 처음 말한 건 2014년이었다. 2012년 관양시장을 처음으로 지금까지, 나는 어느 덧 마흔 다섯이 되었다.

아지를 처음 만난 건 2004년이고, 설이를 처음 만난 건 2010년이다. 시간은 알 수 없는 속도로 흘러가고 나는 쌓여가는 책을 바라보며 한숨 쉰다. 적당히 내 엉망인 일상을 외면하면서 천천히 먼저 간 자들의 길을 따라간다.

2.
수 년만에 돈의동 골목을 찾아갔다. 복지관의 간판이 바뀌었고 복지관 바로 앞에는 새로 기념패를 만드는 가게가 열렸는데 오늘이 개업식이었나보다. 각종 모터사이클 클럽에서 보낸 화환이 줄을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의 화분과 멋진 오토바이를 구경하다가 골목을 돌아나왔다.

오늘 창신동에서 만난 할매들은 “여 와서 산지 얼마 안돼”라고 했다. 얼마나 되셨나 물었더니 얼마 안된다는 게 45년이라 했다.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 45년은 얼마 안 되는 걸로 느껴질까.

무엇이 그리운지 잘 모르겠다.
가끔은 아무 것도 없었던 거 같기도 하다.

새로 산 두 권의 책이 바닥에 그대로 있다. 마을장터 행사의 가방을 아직도 풀지 않았다. 과거는 그대로 남는 것일까 미래와 만나 변하는 것일까.

마을과 골목에 대한 원고를 준비중이다. 내가 살아온 수많은 골목들을 떠올린다. 동자동의 엄지만화방 골목, 며느리가 목 매달아 죽었다는 마당 넓은 집의 보광동 골목, 다다다다 내 발걸음 소리가 크게 들리던 성북동의 언덕배기 낙원 아파트 골목, 안개꽃을 들고 나를 기다리던 남자친구의 손을 잡아 본 사춘기의 신창동 골목, 삐딱구두를 신고 계단을 내려가던 이모를 놀렸던 삼양동 골목, 폭염에 일사병으로 쓰러진 동생이 구급차를 탄 대흥동 골목, 무지개빛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가 미군의 높은 목에 팔을 감던 의정부 골목, 엄마가 달리던 골목, 매를 피해 달아난 샘표간장 뒷동네 골목, 그 수많은 골목을 모두 뒤에 두고 와서, 그립다 쉽게 말하기도 어렵다.

살아있는 자들은 모두 어디에 숨었나.

2019년 6월 1일

메리 크리스마스

두 아들이 뇌전증을 앓고 있는 백씨는, 오전 내내 터진 수도를 고쳤다.
집주인에게 연락을 해봤자 안 좋은 소리를 해댈게 뻔했다.
관리를 잘 못해서 그렇다느니, 날씨가 이렇게 추우면 알아서 수도관을 보온해야지 뭘 했느냐고 말할 사람이다.
날이 추워지자 집안은 온통 한기다. 다 큰 아이들의 옷은 무겁고 두껍다. 한 겨울에 쪼그려 앉아 다 장성한 아이들의 빨래를 하고 있으면 어떻게든 생각을 끊어버려야 한다. 생각을 하면 안된다. 아파트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 사시사철 뜨거운 물이 나온다던데. 수도세도 훨씬 싸게 나온다는데.
미리 미리 준비를 했어야 한다던데 그 긴 세월 빚을 갚느랴고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2월에 졸업을 하는 작은 아이는 복지카드가 있으면 장애인작업장에라도 취업을 할 수 있다. 약만 꾸준히 먹으면 직장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은 아이는 그래도 큰 아들보다 나으니까.
엊그제는 아랫집 사는 미친년이 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자기 털신을 아들이 훔쳐갔다고 지랄을 해댔다. 이사온 지 몇 달 된 저 미친년은 억센 부산사투리를 쓰며 뻑하면 우리집 애들이 자기 물건을 훔쳐갔다고 지랄이다. 대문 앞에 새 밥이고 고양이 먹이를 가져다 놔서 안 그대로 지저분한 동네를 더 엉망진창을 만든다. 이 동네 십년을 살면서 누구하고도 깊게 말 섞어 본 적이 없는데 저 여자 때문에 모든 평화가 깨졌다.
“다 늙어빠진 여자 털신을 젊은 아이가 왜 훔쳐가는데요?” 백씨는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댔지만 미친년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내가 아줌마 털신 신고 다니는 꼴을 한 번도 못 봤는데 무슨 털신을 훔쳐갔다고 합니까? 아줌마 맨날 그 분홍색 목욕탕 쓰레빠 신고 다니는 거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아요!”
미친년은 보라색 덧신에 분홍 목욕탕 쓰레빠를 신고 있었다.
“그럼 누가 가져갔는데! 내 털신을! 느그 아들 말고 여기 내꺼 훔쳐갈 사람이 또 있나! 직업도 없이 빈둥거리고 있으니 남의 물건이나 탐내는 거 아이가!!!”
미친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경찰이 왔다. 한 두번이 아니다. 순경들이 아랫집 여자가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걸 보고 한숨을 쉬더니 여자를 데리고 갔다.
경찰서에 도착한 홍씨는 윗집 아들이 털신도 훔쳐가고, 전화기도 훔쳐갔다고 다 털어놓았다.
삐쩍 말라서 눈을 까리하게 뜨는 게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저 위쪽에 사는 양희자는 내 돈을 훔쳐갔어요.”
홍 씨는 경찰에게 떠들어댔다. 경찰이 볼펜을 들고 뭔가를 끄적끄적 적었다.
“그래서 잡아줄껍니꺼?”
“뭘요?”
“그래서 내꺼 찾아줄껍니꺼?”
“아주머니. 네 일단 알겠는데요. 증거가 있어야 이걸 수사를 할 수 있거든요. 그 앞에 방법 CCTV가 있으니까 저희가 좀 찾아는 볼께요. 이제 집에 돌아가셔서 쉬세요.”
순경이 홍 씨에게 비타민음료수를 까줬다.
“내가 아가 없어요. 내가 여태까지 아새끼 하나를 못 낳아봤다 아임니꺼. 그래서 저렇게 나를 무시하는 게라니까요.”
“아이고 그럴 리가 있나요. 아무튼 아주머니 날씨도 추운데 들어가셔도 돼요. 저희가 털신 찾게 되면 알려드릴께요.”
“꼭입니더. 내 털신 찾으면 알려주이쏘.”
홍 씨는 파출소에서 나와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갔다.
며칠 전 복지관 프로그램에서 만났던 상주여자가 길 한 복판에 멍하니 서 있었다.
“행님. 여서 뭐합니꺼?”
말을 건 홍 씨는 입을 닫자 마자 아차 싶었다. 괜히 말을 걸었다. 엄한 소리나 해 댈텐데 쓸데없는 짓을 했다.
“아, 저를 아십니꺼?”
상주 여자가 홍 씨를 첨본다는 듯이 대답했다.
홍 씨는 번쩍 머리가 시원해졌다.
“아입니더. 사람을 잘못봤심더. 미안합니데이.”
“아 그란데 내가 여기 복지관을 가야 하는데 입구가 어딘지 혹시 아시니껴?”
“여가 복지관 아니라요? 여 계단 올라가이소마.”
홍 씨는 손으로 복지관 입구를 가르쳐줬다.
완전히 미쳐가는구마. 홍 씨는 생각했다.
갈수록 태산이구만. 제정신이 아닌 거 같더니 나날이 심해지는 것 같다.
한 늙은 남자가 홍씨를 가만히 봤다. 홍 씨는 기분이 나빠져서 집 앞에 침을 퉤 뱉고 초록색 대문을 쾅 닫았다.
별 시덥잖은 노인네들이 다 지랄이고 지랄이. 홍 씨는 목에 건 수건을 들고 일바지의 아랫단을 툭툭 털었다.
홍 씨를 바라보던 노인은 복지관으로 들어갔다. 로비에 상주 여자가 서 있었다.
노인이 인사를 했는데도 상주 여자는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반찬도시락 서비스를 다시 받으라고 복지사가 전화를 해왔었다.
담당 복지사는 오늘도 눈을 초승달처럼 꼬리를 말고 웃었다.
“저기, 선생님.”
“네 아버님.”
“제가 지금 오다가 그, 우리 프로그램 같이 했던 상주 아주머니하고, 부산 아주머니를 봤는데 말입니다.”
“네.”
“근데 저를 못 알아보시는 거 같더라고요.”
“아……. 가끔 그러세요.”
“하이고 이런.”
“네 좀.. 최근들어서 잦아지시는 거 같아요. 방금 보셨어요?”
“네. 부산아주머니는 전혀 못알아보는 거 같고. 상주 아주머니는 로비에 아주 이상하게 서 있던데.. “
“저희도 걱정이네요.”
신 노인은 복지사에게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서류를 다시 확인해주고 피아노연습실로 향했다.
젊은 사람들이, 벌써부터 정신줄을 놓기 시작한다니. 입이 썼다.
복도에서 식당에서 자원봉사 하는 김 씨가 아는 체를 했다.
“어르신 오늘 동지라 팥죽 했어요. 이따 꼭 식사하고 가세요.”
교수 부인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인지 참으로 사람이 기품있고 차분하다.
“네 여사님 고맙습니다.” 신 노인은 허리를 숙여 깊이 인사하고 피아노 교실로 들어갔다.
신 노인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선 김 씨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문이 열리자 휠체어를 탄 청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보호자도 없이 혼자 휠체어를 능숙하게 밀고 사무실로 향했다. 김 씨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서 있었다.
병원에 누워 있는 둘째집 조카가 생각났다.
여름에 교회 수련회에 갔다가 수영장에서 머리를 다쳐 지금 병원에 누워 있은지 6개월째다. 목 아래로 아무 것도 움직이지 못하게 된 스물 네 살의 조카는, 제 누나가 휴직계를 내고 병간호를 하고 있다. 조카가 물리치료를 받는 모습을 보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그 이후로 병원에 한 번도 못 간게 석달째다. 우리 조카도 언젠가 일어나서 휠체어라도 탈 수 있게 될까. 그래도 막내 동생처럼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린 건 아니니 다행인걸까. 김 씨는 손에 쥐고 있던 고무장갑을 으스러지라 꽉 쥐었다.
조카네 강아지는 잘 자라고 있을까. 큰 조카가 맨날 병원에 있으면 강아지는, 혼자 집에 있게 되는걸까. 1년동안 해외를 나간다 해서 잠시 키워줬던 그 강아지라도 다시 데려올까. 강아지 이름은 메리다. 촌스럽기도 하지. 어쩌면 요즘애들인데 개 이름을 그리 촌스럽게 지었을까. 메리를 몇달이라도 맡아 키우면, 그러면 조카의 병실에 갈 수 있을까.
같이 식당 봉사를 하는 이 씨 아주머니는 마흔이 넘은 아들이 뇌병변이다. 네 살에 다쳐 마흔 다섯이 되었다고 했다. 그래도 우리 조카는 말도 하고 생각도 하고 눈물도 흘릴 줄 아니까 다행인걸까. 김 씨는 서둘러 식당으로 갔다. 몸을 움직여야 해. 자꾸 생각을 하면 안돼.
식당에서 팥을 삶는 냄새가 고소하게 났다.
– 지난 크리스마스에 썼던 글을 여기 안 올려서, 이제서야 올립니다.

백화점

서점은 백화점 안에 있다.
내일 있을 일 때문에 급하게 마련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꼭 백화점으로 갈 필요는 없었는데 마트와 옷가게와 문구점이 이동거리를 생각했을 때 가장 적게 움직일 동선은 백화점이었다.

걸음을 아껴야 한다. 겨울이니까.
문구 코너에 가서 검은 색 파일을 사야했다. 어디선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 피아노 연주가 들리는데 분명히 누군가 연주하는 소리였다. 음원을 틀어놓은 것과 그랜드 피아노의 해머가 두들기는 소리는 명확하게 다르다.
백화점의 가운데는 길게 뚫려 있다. 보이지 않는 기둥이 있는 것처럼 뻥 뚫린 공간을 가운데 두고 건너편에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여자의 주변엔 아이를 안은 어른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 각국에서 온 펜에 둘러싸여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쉽게도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고 연주는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으로 이어졌다.
스테들러, 사라사, 시그노, 몰스킨, 이룸, 프랭클린 사이에 서 있었다. 계산대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다들 한 권 정도의 책을 들고 있었다. <나는 부동산과 맞벌이한다>, <미움받을 용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이들의 학습만화와, 장난감만 손에 쥔 사람도 있었다.
자기 확인을 하기 위해 사는 물건들이 가득한 공간, 사람들은 굳이 필요하지 않은, 없어도 오늘을 넘길 수 있는 물건을 산다. 물건의 필요성은 주관적이다. 물건은 단지 실제로 쓰이기 위해서이기 보다 때로 위안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 굳이 오늘 사지 않아도 될, 시그노 펜 한 자루와, 펜텔의 펜 두 자루와 2016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을 내가 검은 파일 위에 올려 계산을 기다린 것처럼.
돈을 내기 위해 계산대 앞에 서서 서서 내 차례를 기다리는 사이 피아노 연주는 계속 되었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생명없는 물건이 위로가 되는 공간에서 사람이 규칙대로 맞추어 연주하는 음악은 어떤 지위를 갖는가. 인간에게 위로가 되는 건 생명없는 물건인가 아니면 물건을 사는 행위인가. 물건으로 위로를 받는다면 정말 그 물건은 무생물인가.
사물을 바라보고 주머니에 넣어 행복해진다면, 그 때부터 그 사물의 삶이 시작되는 지도 모른다. 얼마나 지독히 외로우면, 말 걸지 않는 사물을 사랑하며 계절을 건너는가.

2016. 1. 16.

꿈없는 세상 – 그들의 눈동자

내가 상하이에서 학부를 다닌 화동사범대학은 말 그대로 사범대학인지라 국가에서 적극(?) 지원하고 졸업한 아이들의 취업이 모두 보장되어 있으며 등록금도 타 학교에 비해서 저렴한 학교였다. 상하이에는 명문이라 불리는 복단(FUDAN)대학교와 각 단과대학이 잘 되는 몇 개 대학이 있었는데, 이과쪽은 교통대(JIATONG), 건축은 동제대(TONGJI) 외에도 상해외대나 상해대학교등이 있었다. (대학이름은 한국식 한자 독음으로 표기함)

화동사대는 캠퍼스가 예쁘기로 유명했다. 애초에는 복단대에서 학부를 하려고 갔으나 복단대에 한국학생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모양새를 보고 학부를 옮기기로 했다. 내가 처음 갔던 2001년도 2월에 복단대의 한국유학생은 200명이었는데 그 가을학기에 400명이 되더니 2002년도 2월에는 한국학생만 2000명이 등록을 했다. 언어연수생에 국한한 숫자였다. 김정일이 2000년에 상하이를 다녀간 뒤 천지가 개벽했다고 선언한 후 한국에서 상하이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 급격하게 한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학부지만 나는 나름대로 한국에서 공부를 좀 하다 온 애들이 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24세 미만이었다. 나는 당시 스물 일곱이었으니, 내 위로는 주재원으로 왔다가 한 학기 정도 어학연수를 하려고 쉬는 아저씨들 외엔 몇 명 없었다. 학부를 하겠다고 온 내 또래도 당연히 없었다.

복단대는 중국 본토의 양자강 이남의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다. 학구열도 괜찮았으나 유학생이 과하게 몰리다 분리정책을 썼다. 대신 화동사범대학은 그렇게 많은 유학생이 몰리지 않아 분리하고 말 것도 없었다. 중문학부 한어언문학과 (중국어는 소수민족의 언어까지 통틀어 말하기 때문에 한어언문학부는 漢字로 된 문학만을 말한다)에 전무후무한 한국유학생이 있었으니 그게, 나와 나보다 다섯 살 어리던 박모씨. 우리 둘 뿐이었다.

화동사범대는 국가정책대학이라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타 학교보다 싼 학비와 기숙사 지원금등이 관건이 되었다. 다들 시골마을에서 플랜카드 하나씩 걸고 온 애들이라고 보면 된다. 양자강 이남 사람들은 체격이 작은 편인데 아이들이 어찌나 고만고만한지, 나이도 어렸지만 중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장 어린애는 열 일곱짜리도 있었다. 월반에 월반을 거듭한, 말하자면 그 고장에서는 대단한 수재였던 아이라는 거다. 중국내에서도 가난하기로 소문한 안휘성 아이들이 많았고 소수민족 아이들도 몇 있었으며 1학년 교실엔 그야말로 땟구정물이 줄줄 흐르는 코흘리개 같은 분위기였다. 상하이 현지에서 우리 과에 들어온 아이는 극소수였다. 혼자 뽀얀 얼굴에 배낭이 아닌 가죽가방을 메고 다니는 나에게 어디서 샀냐고 물어보곤 하는 아이가 상하이 아이였다. 유학생을 제외하고는 일괄적으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는데 기숙사는 8인실이었다. 2층짜리 침대를 벽에 붙여 두 개씩 놓으면 꽉 차는 방. 겨울엔 난방이 되지 않았고 온수공급도 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붉은 보온물통에 뜨거운 물을 받아다가 차가운 욕실에서 머리를 감았다. 11시인가 12시쯤 되면 기숙사에 전기는 차단되어 시험기간을 앞두고 한 달 정도는 강의실을 밤새 열어주었다. 아이들은 기숙사에서 나와 밤새 차가운 강의실에서 공부를 했다.

그 학교에서 아이들과 지내며, 나는 언제나 동동 떠 있는 섬같았다. 내가 당시 썼던 생활비는 한 달에 한국돈으로 35만원 정도였는데 그 정도면 충분히 먹고 술도 마실 수 있는 돈이었다. 가끔 스타벅스에 가서 하루종일 진치고 공부를 하다 올 수도 있었다. 외국인 유학생이라고 알바생이 시음음료도 잘 갖다줬다. 대신 내 동무들은 내복을 사느냐 휴대폰을 장만하느냐를 가지고 고민해야 했고 내가 쓰는 돈의 3분의 1정도로 한 달을 생활했다. 가끔 한인들이 중국어 과외선생을 구한다고 알아봐 달라 하여 잘 가르칠만한 친구를 보내놓으면 너무 어리다는 둥, 예쁘지 않다는 둥, 별 씹스러운 소리를 지껄였고 이 개자식들은 시간당 25위안 (당시 한화 4천원 가량)이 비싸다며 그것도 깎으려고 들었다. 나도 노하우가 생겨 2학년 끝날 무렵부터 한국인 중 누가 원어민 과외를 찾으면 이쁜 여자 찾으시려면 KTV(룸싸롱) 가시고 진짜 공부하실 거면 나한테 얘기하라고 대답하곤 했다.

내가 영어를 알려주고 중국친구가 중국어를 가르쳐주는 식의 언어교환을 하던 복단대 친구는 나보다 2학년 위였는데, 안휘성에서 온 아이였다.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그녀가 얻은 직장에서의 봉급은 택시기사의 반절도 안 되는 금액, 그러니까 내 한 달 생활비가 못 되었고 그 친구가 기숙사에서 나와 사는 주택은 우리식으로 말하는 닭장집 같은 곳이었는데 천장에 백열전구 하나 덜렁 달려 있는 방 하나에 공동주방을 쓰는 곳이었다. 그래도 그 친구는 맘에 든다고 좋다 했다.

부자동네로 소문난 절강성의 항주나, 복건성의 온주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온 아이들의 겁에 질린 눈동자가 자꾸 떠오른다. 커피숍에서 아이패드를 놓고, 노트북을 놓고 영어책에 미친 듯이 줄을 치며 이어폰을 끼고 있는 이 나라의 20대들을 볼 때마다 2002년도쯤 내가 함께 밥을 먹던 땟구정물 흐르던 그 아이들이 생각난다. 눈빛이 닮아서다.

10년도 훨씬 전에 하나언니 하나언니하며 노트를 빌려주는 아이들은 갑작스럽게 거대한 도시에 와서 돈의 위력에 주눅들어 하루 하루 조심스럽고 위태롭게 살아갔다. 중국어 과외를 하러 갔는데 이상한 몸짓을 보내는 한국남자도 만났고 눈 뜨면 코 베어간다는 한국속담같이 상하이라는 도시는 학교만 벗어나면 줄줄이 돈 달라는 곳만 있었는데 아이들의 미래는 보장되지 않았다. 아이들의 꿈은 월급 꼬박꼬박 받는 학교 선생이 되는 것이었다.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우거나, 고전문학의 당나라 詞도 잘 짓던 아이들의 재능에 비해, 아이들의 눈빛은 늘 흔들리고 불안했다. 물론 그 눈빛엔 맑고 순수함이 깃들어 있었고 3학년이 되어가면서 아이들은 살아남는다는 것이 뭔지, 도시가 뭔지, 돈이 뭔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 아이들에게 결여되어 있던 것은 정확한 방향과 철학, 꿈이었다. 막스 레닌 시간에 모두 엎어져 자던 아이들에게 철학은 돈 버는 일이었던 것처럼, 지금 내가 이 도시에서 옆 도시에서 만나는 청년들에게 자꾸 그 모습이 중첩되어 나타난다. 대신 이 나라 오늘의 눈빛은 원한과 불만이 조금 더 강하게 엿보인다는 것이다.

꿈을 위해 달린다고 얘기하는 청년들이 있다. 옆에서 지켜보면 도대체 쟤가 말하는 꿈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꿈을 위해 살아왔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있다. 그 역시도 그 사람이 말하는 꿈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온갖 부조리에 침묵하고 타협하며 결국 이 시대가 말하는 꿈은 돈을 많이 번 다음에 생각해야 하는 것인 모양이다.

저 사람이 무엇을 꿈꾸는지 명확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아주 소수지만. 그들을 응원하며 나도 그렇게 늙어가고 싶어졌다. 그간 타인의 눈에 비친 내 눈동자엔, 맑고 순수함 따위는 없었겠지만, 원망이나 불만이 조금이라도 가셔지는 날을 죽기 전엔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꿈 없는 세상, 꿈꾸기 힘든 세상에서, 제대로 된 꿈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 도시에 둥둥 떠다니는 불안한 눈동자가 거대한 황포강의 야경을 바라보던 아이들의 순수한 눈동자를 자꾸 그립게 한다.

2014. 9. 24.

마을지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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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수많은 도시민들은 도시의 시스템에 기생하여 살아가지 않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그러고 있는 것처럼 밀려오는 시스템에 거부감만 느끼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엉겨붙어 기생하고 있지 않나.
기생하여 사는 것은 그만큼의 불편함과 수치심을 동반하지 않았나. 그러면서 늘 불평하지 않았던가. 도시가 나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고.
내가 사는 곳에 대해 주인이라 느낀 적 없다.
나는 언제나 도시의 세입자였으며, 내 땅 한 칸 주장한 적 없다. 꾸역꾸역 밀려오는 정책은 파도처럼 늘 도시를 에워싸고 돌았으며 나는 그 안에서 늘 밀려났다.
내 집이 무너진 적 없다. 내 집을 가져본 적 없으므로.
언제나 나는 어디에서부턴가 떠나온 사람이며, 떠나갈 사람이었다.
사람이 한 곳에 정착해야 할 이유를 느낀 적 없으며, 고향은 언제나 이동 가능했다.
내 의지가 아닌 이유로 이동해야 한다면 나는 이동하는 호모노마드가 되려 했다.
말하자면 나는 그 어느 곳도 깊이 사랑한 적 없다.
끊임없이 나의 오늘을 부정하고 나의 정체성을 지우기 바빴다. 나에게 의미있는 장소는 타인에게도 같았다. 구태여 내 것만 아름다운 적 없다.
이제 기억속에 남은 그 거리들이, 나에게 과연 콩알만큼의 안정이라도 가져다주었는가 알 수 없다.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가.
살아가던 공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새로운 적응과 질서를 요구한다. 뜯어내고 고쳐내고 바꿔가는 것은 인간에게 적잖은 스트레스가 된다 한다.
늘 그렇게 부대끼며 살아온 자에게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찾는 일은 익숙하다. 집의 유통기한은 2년이며, 언제든지 보따리를 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외롭다고 말할 시간조차 없었던 것처럼, 낯설어서 어렵다고 말할 시간도 허락하지 않았다. 누가? 내가 나 자신에게.
삶의 일부분을 지우는 것, 끊임없이 나는 뒤돌아서서 내 그림자를 흙으로 덮었다. 삶의 공간을 잊고 끊임없이 떠도는 것, 천막 치고 사는 유목민의 고향은 땅이요 자연이지만, 1.5톤 트럭에 의지하는 도시민의 고향은 자고 일어나면 달라질 눈부시게 발전하는 조국의 빌딩숲이다. 모험과 도전은 돌아갈 곳이 있을 때만 즐겁다. 부유하는 불안정함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지운다.
새롭게 쓰기를 반복한다는 건 끊임없이 지워야 한다는 거다.
어느 날 문득 내 목덜미가 스산해 지는 것은 “나 자신”이 낯설어서이다. 나를 모두 잊기 위해 살아왔기 때문이다.
2013. 7. 7.

도시, 한 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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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재우다 잠들었고
새벽 2시 반이 넘어 깼다.
내가 자고 일어나면 무조건 밖에 나가는 줄 아는 개를 데리고 아무도 없는 길의 짧은 산책

아무도 없는 새벽,
신선한 공기를 마시러 나간 게 이런 풍경.
모두가 벽으로 둘러쳐진 아파트, 똑같은 풍경이라니

참으로 재미없고 정떨어진다.

아파트 생활 6년.
다시 또 생각한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2013.1.30.

어느 추운 밤 이야기

1.

딴따라나 재주꾼이나
그가 사는 곳, 그가 머무는 자리가 바로 작업실이고 무대다.
어디에 가면 화양연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바닥을 치는 자존감의 발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산이 좋지 않으면 저 산도 좋지 않다.

2.
할머니는 언제나 오만가지 재주 있는 년이 밥굶는다 했다. 오만가지 재주 중에 하나씩 버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3.
한 밤의 도로엔 바스러진 유리조각과 신속히 달리는 렉카차가 있다. 멍하니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고 서 있는 사람과 이 나라의 척박함에 진절머리 내는 청춘이 있다. 그래도 내일은 낫지 않을까 하고 믿어보고 싶지만 대부분의 내일은 어제와 비슷했다. 그저 그 중에 맘에 들었던 어제를 꼼꼼히 복기하고 재현하는 일로 내일과 모레를 채워보는 것이다.

4.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저 듣는 자들이 있다. 세상에 수없이 넘쳐나는 문자들이 나무를 베어낸 종이로 책이 되어 팔린다. 얼마나 말하고 싶었는가. 초대형 서점에 서서 수없이 많은 무명씨들의 감정의 배설물을 들여다 본다. 그리고 나 역시 어딘가에 끊임없이 싸지르고 있다.

5.
도시는 끊임없는 배설의 공간.
사람들은 악귀같이 꾸역꾸역 욕망을 먹고 짐승보다 격하게 싸지르며 밤을 탕진한다. 멍하니 있는 시간은 비생산적이고 스스로를 컨베이어벨트에 올린 채 끼륵끼륵 기어간다. 욕하고 째려보고 분노를 배설하여 허기지면 위산과다를 못 참고 또 꾸역꾸역 음식을 마신다. 모두 나와 같이.

6.
태생이 그런 것을 어쩔 수 없다는 섭리가 있다. 그리스 신화의 수많은 신들은 광폭한 절대 권력을 가졌다. 호메로스가 음모론의 기초라는 얘기를 들었다. 오이디푸스의 재앙은 오이디푸스 그 자신이었다는 말이 있다. 열심히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절대 선이 아닌 이유가 그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잘나고 용맹했다. 그게 그를 망쳤다. 공자의 知天命과 오이디푸스의 저주는 닮아있다. 그리스의 난잡한 신들은 지금의 재벌과 권력자의 모티브다. 인간이 사는 방법은 과연 무엇이 가장 현명한가. 그 답에 적어도 한 발은 가까워진 거 같기도 하다.

7.
움베르트 에코는 파리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은행원이 되어서라도 파리에 살고 싶다” 고 말했다 한다.
그 말을 열 번쯤 곱씹어 본다.
은행원이 그닥 나쁜 직업 같지도 않다. 수많은 군상을 관찰하고 퇴근은 제 시간에 할 테니까.

8.
더럽게 피곤한 밤이 깊어간다.
적어도 내게 삶은 언제나 치열해야만 했고 그래서 그게 정당했다.
그렇지 않게 살던 시절이 가장 괴로운 나날이었다는 걸 인정해야겠다.
늘 조금은 부족하고 외로워야 행복했다.
문 닫기 직전의 마지막 손님으로 앉은 라면집에서 추위에 김이 서려 허얘진 안경을 내려 놓고 있자 그니가 말했다.
“너 중국에 있을 때, 안경 바꿔야 되는데 돈이 없다고 했었잖아. 진짜 불쌍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돗수가 안 맞아 눈이 피곤해도 아마 나는 행복했던 기억만 남긴 게 분명하다. 그 때는 가난했고 조금 외로웠다.
오이디푸스의 저주와 공자의 知天命 과 그리스 신들의 교만한 장난질이 안경에 서린 김 같았다.

– 어느 졸라리 추운 날 밤.

주말 마트 휴업이 필요한 이유

1. 마트에 가야한다 하니 남편이 다녀와서 치킨을 시켜 달라 함.  (개 사료및 간식이 딱 떨어졌다. 집 앞과 근처 동물병원 역시 문을 닫았다) – 혼자 시켜먹을 줄 모름 – 나는 마음이 조급함

2. 주차장 만차, 게다가 몇몇 차주들의 야릇한 주차 – 스트레스 상승

3. 사람 많음. 혼잡 복잡 판매원들이 적극적 마케팅 – 피로도 상승
인구밀집도가 높아져 공기도 불쾌
매장이 크고 카트를 밀며 다니는 일에 육체적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허기짐까지 발생

4. 타인과의 장바구니 비교
– 내 카트가 꽉 차 있으면 돈 많이 나가는 일에 스트레스,
내 카트가 비어 있으면 상대적 빈곤감에 스트레스

5. 타인의 배우자에 대한 비교

박스자율포장대에서 혼자 포장을 하다가
포장하고 애 보고 하는 아빠들을 보며 급 분노 상승.
– 나는 왜 명절에도 “혼자” 5-60만원어치의 장을 봐야 하는가. 에 대한 뒷끝작렬 서러움 쓰나미
집에 다쳐서 누워있는 남편에 대한 분노 폭발
여기서 빨리 안 오냐고 전화오면 끝장나기 직전의 임계점 도달

6. 계산하며 남편카드로 결제 집에 있는 남편에게 SMS가 도착해
나의 현재 행동반경이 노출되는 것에 대한
사생활침해에 대한 불쾌감이 갑자기 급분노 상승
(분노에 분노가 덮혀 가속도를 밣기 시작)

7. 주차장에서 나오면서 김종배의 이털남을 들으며 주의를 분산시키려 하는데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횡포 내용이 나와 사회적 분노로 승화

8. 마트 주차장 앞 “소비자는 대형마트 휴업을 반대합니다.” 라는 문구에 사회적 분노 추가

– 결국 집에 오는 길에 혼자 교동짬뽕에서 짜장면을 먹으며
혼자 왔기 때문에 짬뽕과 짜장을 동시에 맛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탄식 추가

9. 집 지하 주차장에서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박스 하나 장바구니 하나 혼자 들고 올라가는 것에 대한 분노를 넘어선 탈진과 인생무상에 대한 개엿같은 기분까지 추가.

결론.

주말마트는 국민건강에 매우 해로우므로
절대적으로 휴업하는 것이 옳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