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새벽녘 두어 번 뒤척였다고 휴대폰 어플이 알려준다. 내가 잘 잤는지, 잘 못 잤는지, 그런 것도 기계에게 묻고 사는 한심한 삶. 내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씹다버린 사과모양의 전자제품인지도 모른다. 내가 나인지 사과가 나인지, 이미 그 경계는 허물어 진 것 같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말을 찾아 헤맨다. 쓰리고 아린 상처를 적확하게 표현해 줄 단 한 줄의 문장을 찾아 긴 터널을 쑤석거려도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다. 어스름은 삽시간에 사위를 덮고 아이들이 내 새끼를 부르는 소리가 크게 들리면, 아이도 돌아오지 않는 저녁. 늙은 개 한 마리는 네 다리를 곧게 뻗고 편안하게 자기 시작한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라고 말하는 것과, 아프다고? 씨발 나도 좆나 아프다고! 라고 말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빨을 드러낸 작은 개새끼는 커다랗고 하얀 아름다운 진돗개를 보고 주제넘게 짖고 있다. 빈 식탁은 굴러다니는 몇 가지의 펜만 싸안고 아무 것도 잉태하지 못하는 버려진 땅처럼 울고 있다. 계절이 바뀌는 바람이 분다. 고통의 무게는 가늠하지 않는 것이며 비교하는 일은 절대 불가한 것이라고 남들 앞에서 쉽게 말해도 머리통을 짓누르는 이 두통의 무게는 펜잘이나 게보린 수백 알로도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세상천지 아무도 남지 않은 그 느낌을 알고 싶어서 사막에 서보는 자가 있고, 마음의 고통과 몸의 고통을 일치시키기 위해 손목에 커터칼로 글씨를 쓰는 아이가 있다. 사랑, 이라고. 말해 본 적 없는 사연 때문에 가짜 자아를 만들어 자신을 둘로 나누는 청년이 있고 세상은 모두 내 편이라고 스스로에게 거짓말하며 계속해서 돈을 꾸고 도망가는 여자가 있다. 글줄께나 쓴다는 그 어떤 문인도 헤아리지 못하는 각자의 마음들이 어느 집 밥상위에서 작두를 탄다. 피칠갑을 하고 갯벌을 기어가던 어느 미친년이 했던 말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갈꺼여 갈꺼여.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내 지문이 없으면 열리지 않는 저 작은 전자기계 속으로 들어가 휘적거리며 다녀야 할까. 말라비틀어진 씨앗은 어디서 열리는 것인지 기계에다 대고 말을 하면 저 년이 알려줄까.

2014. 9. 1.

저녁

새벽녘 두어 번 뒤척였다고 휴대폰 어플이 알려준다. 내가 잘 잤는지, 잘 못 잤는지, 그런 것도 기계에게 묻고 사는 한심한 삶. 내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씹다버린 사과모양의 전자제품인지도 모른다. 내가 나인지 사과가 나인지, 이미 그 경계는 허물어 진 것 같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말을 찾아 헤맨다. 쓰리고 아린 상처를 적확하게 표현해 줄 단 한 줄의 문장을 찾아 긴 터널을 쑤석거려도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다. 어스름은 삽시간에 사위를 덮고 아이들이 내 새끼를 부르는 소리가 크게 들리면, 아이도 돌아오지 않는 저녁. 늙은 개 한 마리는 네 다리를 곧게 뻗고 편안하게 자기 시작한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라고 말하는 것과, 아프다고? 씨발 나도 좆나 아프다고! 라고 말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빨을 드러낸 작은 개새끼는 커다랗고 하얀 아름다운 진돗개를 보고 주제넘게 짖고 있다. 빈 식탁은 굴러다니는 몇 가지의 펜만 싸안고 아무 것도 잉태하지 못하는 버려진 땅처럼 울고 있다. 계절이 바뀌는 바람이 분다. 고통의 무게는 가늠하지 않는 것이며 비교하는 일은 절대 불가한 것이라고 남들 앞에서 쉽게 말해도 머리통을 짓누르는 이 두통의 무게는 펜잘이나 게보린 수백 알로도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세상천지 아무도 남지 않은 그 느낌을 알고 싶어서 사막에 서보는 자가 있고, 마음의 고통과 몸의 고통을 일치시키기 위해 손목에 커터칼로 글씨를 쓰는 아이가 있다. 사랑, 이라고. 말해 본 적 없는 사연 때문에 가짜 자아를 만들어 자신을 둘로 나누는 청년이 있고 세상은 모두 내 편이라고 스스로에게 거짓말하며 계속해서 돈을 꾸고 도망가는 여자가 있다. 글줄께나 쓴다는 그 어떤 문인도 헤아리지 못하는 각자의 마음들이 어느 집 밥상위에서 작두를 탄다. 피칠갑을 하고 갯벌을 기어가던 어느 미친년이 했던 말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갈꺼여 갈꺼여.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내 지문이 없으면 열리지 않는 저 작은 전자기계 속으로 들어가 휘적거리며 다녀야 할까. 말라비틀어진 씨앗은 어디서 열리는 것인지 기계에다 대고 말을 하면 저 년이 알려줄까.

2014. 9. 1.

이 모든 역사는 나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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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바닥을 보는 때가 있다.

자기 내면의 깊은 바닥을 치는 순간이 온다.

바닥을 보는 일은 끔찍한 일이다.

한 개인의 바닥은 더럽고, 추잡스럽고, 미련하고, 이기적이다.

더러운 것이 눈에 띄는 순간 덮어버리고 싶은 건 당연하다.

한 사람이 얼마나 강인한가는 여기서 드러난다.

한 사람의 내면의 힘은 변화무쌍하여, 언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눈을 감아버리고 도망을 가기고 하고 언제는 자세히 들여다 볼 수도 있다. 그 힘은 저것이 더러운 것은 사실이나, 나의 배설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에 온다. 말하자면, 내가 싼 똥을 보고, 저건 내 몸에서 나온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과 같다.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칭찬받는 사람이고 싶었으며, 남들에게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싶었고, 의지가 강하다거나, 대단하다거나, 나는 너처럼 하지 못할거야. 라는 찬사를 받고 싶었다.

 

5개월째, 내 자신을 완전히 해체하여 하나씩 뜯어보는 일을 하고 있다.

물론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있다.

내가 싸갈기고 외면한 똥들은 어느 새 산을 이루어 나는 똥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꼴이 되었고, 그 냄새가 너무 지독하여 아무나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급기야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으니까.

 

이 지저분한 바닥을 쓸고 다니는 동안, 하나씩 내가 버려둔 배설물들을 치우는 동안에도 나는 여전히, 남들에게 칭찬을 받고 사랑을 받고,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게 가면을 뒤집어 쓰고 사는 동안 내 바닥은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는지, 꽉 막힌 양재IC에서 눈물이 흘렀다. 내가 훌륭했던가, 내가 잘 해냈던가,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성과물을 선보이며 받았던 그 찬사들은 다 무엇이던가 생각했다.

 

나라는 사람은, 모든 감정을 덮어주고 발버둥을 쳤던 거다.

그건 내가 훌륭하거나 놀라운 일을 해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칭찬을 받고, 어떻게 하면 인정을 받고, 어떻게 하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 그 기술을 꾸준히 스스로 익혀왔기 때문이다. 썩어 문드러지는 내 감정도 나의 것인 것처럼, 그렇게 키워온 가면을 쓴 나의 기술도 나의 것이다.

 

버림받을까 두려운 것은 가장 큰 공포였으며, 역량을 인정받아야 생명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7살 무렵, 스탠드가 켜져 있는 어두운 방에 동생은 자고 있고 엄마는 오지 않던 그 밤에, 책상위에 올려놓은 새 신발을 보며 엄마는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내내 벌벌 떨며 기다리던 그 기억에서 시작한다. 어쩌면 그 이전에도, 그 훨씬 더 이전에도, 나는 잘 해내지 못하면 죽을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여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 힘은 결국 나를 길렀고, 나는 지금 모두 잠든 내 집안에서 내 컴퓨터 앞에 앉아 이런 글을 쓰고 있게까지 만들었다. 공포와 위협도 나를 길러낸 힘이 된다. 그 역시 내 바닥에 숨어 있던 나의 것이므로.

 

나의 썩어버린 바닥에 사람들을 하나씩 끌어왔다. 아빠, 엄마, 남편, 동생, 딸, 아들을 끌어와 이 바닥이 이렇게 더러운 것을 좀 보라고, 나는 이 냄새를 견딜 수 없다고 그 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신음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은 모든 것이 관계속에서 이루어진다. 그 중에 평생을 보고 살아야 하는 가족들과의 관계는 절대적이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모든 관계를 부정하고 나는 내 바닥을 숨기며 우물 위로 올라가기에 급급했다. 그 간절함 역시, 나의 것이다.

 

내가 치우지 않은 바닥에서 내가 울부짖으며 바라봤던 사람들을 땅위로 하나씩 올려보낸다. 아직 한 사람이 남았고, 또 몇 명이 더 튀어나올 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나씩 바닥을 청소중이다.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 모든 문제도 나의 것이다. 모든 성과와 칭찬과 찬사도, 나의 것이다. 이 모든 역사는 나의 것이다.

2013. 5. 30.

무섭다는 말

예민한 아이는 새벽녘 제 부모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으면 곧잘 잠에서 깬다.
새벽 2시 50분.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앉아 있던 아이가 에미를 부른다.
엄마 저기 뭐가 있어.
엄마 저기 뭐가 이상해.
빛에 비친 그림자였거나, 안방에 숨어 들어온 늙어가는 개였을게다.
괜찮아 괜찮아. 아이를 다독여 다시 재우고 나도 모르게 아이가 가르킨 방향을 외면한다.

무섭다는 말.
언제 해봤을까.
기억이 없다.

아이 무서워.
아이 두려워.

이 아이는 나를 대신해, 무섭고, 두렵다는 것을 이야기 해 주는데,
내 기억속의 나는 당췌, 무섭다는 말을 입밖으로 내뱉어 본 적이 없다.

아이가 묻는다.
엄마는 세상에서 뭐가 제일 무서워?
글쎄…
한 참을 생각해도 싫은 건 있어도 무서운 게 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견고하게 만들어 온 밖에 내세우기 위한 자아는 이제 세월의 더께를 입어 더욱 더 곤고해진다.
딱딱하게, 움직이지도 않고, 석고상에 이끼가 끼듯.
무섭다는 말, 해 본 적도 없이, 이제는 무섭다고 말하기도 쑥스러운 나이를 먹었다.

그 모든 것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스스로 무장하여 갑옷을 입혀 대문앞에 세워놓은 저 것이.
이제는 나인 척 하고 수십년을 살아서, 자기가 나 인 줄, 내가 자기인 줄, 나도, 그것도 착각하고 있다.

경리장부 20년 주물러, 자기가 대표이사 인 줄 아는 경리직원처럼.
그렇게 되어버렸다. 주객의 전도.

무섭다는 말.
누구에게 할까.

어느 봄밤, 아이를 재우고 나와 벚꽃 사진을 찍는 나를 마주쳐, 술에 취한 채 흐느적대면서, 옆에 한 참을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그 날의 당신을
이 밤, 생각한다.
생각한다.

110420_Nikon 026

2013 1. 31.

키티를 잡아먹은 호랑이

얼마전에 문득 이런 키티 시리즈가 떠올랐다.
키티가 호랑이옷나 다른 동물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인데,
누군가는 이걸보고 호랑이가 키티를 잡아먹었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키티 안에 있던 호랑이가 스물스물 나와서 껍질을 뒤집고
키티를 감싸안은 것은 아닌지.

한 사람의 분노와
한 사람의 슬픔과
한 사람의 우울은
이렇게 속에 껍질을 뒤집고 숨어 있다가
스르르 입을 통해 나와서 그 존재를 모두 감싸 안아 버리는 형국.

그래서 그 존재가, 분노와 슬픔이나 우울에 감싸안겨 버리는 형국.
결국 옷을 벗을 수 있는 건 키티 자신 뿐이다.

2012. 3. 2.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복수 : .죽는 거 보다 더 힘든게… 살던 세상 바꾸는 일이예요. …죽는건 세상을 버리면 되지만, …살던 곳 바꾸는 건, …세상을 바꾸는 일이니까…

경 : (얼굴을 닦아주며 미소) 복수씨, 위대해요. …세상을 바꿨으니까…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천상천하유아독존에 대해서 불교에서 뭐라고 말하는지 
찾아보면 바로 나오는 일이지만. 
하늘과 땅 사이에 오로지 나만이 존귀하다. 라는 말은, 
모두가 각자의 세상을 갖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하여, 내 세상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타인의 세상을 침범하지 말 것이며, 
두 사람간의 갈등은 하나의 우주와 또 다른 우주의 충돌이겠구나. 
라고 혼자. 씨부려 본다. 
2012. 2. 24. 

세계, 어제와 오늘.

표출되지 못한 언어들이 마구 쏟아진다
정확성을 잃은 감정들이 쓰레기더미처럼 쌓여간다
아이들은 그렇게 거리를 헤매이고 
TV에 나오는 누군가를 모방한다
흠모하진 않으나 가슴속 깊은 곳에 시기심이 있다
내가 저 아이보다 못한 게 무엇이 있느냐는 
바닥을 친 자존감이 솟구쳐 오른다 
아이들은 그렇게 헛된 것을 쫓아 
재빠르게 자존감을 회복할 방법을 찾아 헤맨다
+
딸아이가 애견미용학원을 다닌지 한 달이 된다.
지난 주엔 나와 7년을 산 개의 목욕을 시켰다.
한달만에 능수능란한 관리사가 되었다.
어제의 아이는 사라지고 
어린 시절의 아이가 다시 내 앞에 서 있다. 
케익 하나 사다 주면 헤헤 하고 내내 웃던 보조개와 
스파게티는 이렇게 먹는거라고 가르쳐 주던 나를 보며 부끄럽게 웃던 얼굴로
진작에 좀 .. 이라는 나의 타박에 
눈가가 빨개져도 울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그 아이가 아르바이트도 시작했다.
어차피 공부엔 관심도 없고 흥미도 없다. 
아이는 그저 세상에 뛰어들어 인생을 느끼고 싶을 뿐이다.
아르바이트는 비정규직이다.
아이를 낳으면 알바를 많이 시키겠다고 다짐했건만 
막상 내 아이가 알바를 하겠다고 나서니 선뜻 칭찬이 나오지 않는다.
왜 험한 세상을 일찍 배우려고 하느냐. 
조금 더 기다렸다가 만나도 늦지 않는다.
라고 말했지만 
아이는 고개를 젓는다. 
허무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졌다고 한다.
엄마, 한 걸음을 떼니까 두 번째 걸음이 쉬워요. 라고 말하는 아이의 옆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그동안 우리 얼마나 힘들었니.
다 되었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래, 참 잘 하고 있구나. 라고 
매우 구태의연하고 상투적인 대답을 해주었을 뿐이다. 
누군가의 인생을 보고 
절대 비난하지 말라고 말했다. 
한심하고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는 사람이라도 
맹목적으로 비난하지 말고 
항상 측은지심을 갖고 왜 저 사람이 저런 삶을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해서 고민하라 했다.
그게 과연 그 사람의 잘못인지
이 사회의 문제인지 잘 살펴보는 사람이 되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관용을 베풀어
윤리와 도덕의 기준을 낮추어 너에게 적용시키지 말라고 했다. 
분명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고 
다가서지 말아야 할 세계가 있고 
접하지 말아야 할 직업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의 기준, 너의 잣대가 되어야지
남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아이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아무도 무시하지 않아요. 라고 대답한다.
엄마는 아직도 .. 제가 그래 보여요? 라고 묻는다. 
아니. 네가 그래 보이는 게 아니라, 
청소년기의 네 나이 또래의 모든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해. 
네 동생이 네 나이가 되면 네 동생에게도 똑같이 말할꺼야. 
며칠 전에 할머니 걱정이 되어 
몸에 좋은 음식을 해드리고 싶어 고민하다가 
도곡동의 한 한의원에 찾아가 상담을 하고 온 것은 
아주 기특하고 훌륭하고 기쁜 일이다. 
근데 솔직히 엄마는, 
진작에 조금이나마, 
늦기 전에 조금이나마. 
조금 덜 아프게 하지 그랬니 .하는 마음이 들어. 
그 날은 좀 화가 났었다. 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아이는 눈가가 벌개지지만 쑥스럽게 웃었다. 
나는 또 아이에게 못을 하나 박은 셈이다. 
말하지 말았어야 했나. 
아니, 
나는 말해야 했다.
후회도 하고 반성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뼈아픈 고통도 느껴봐야 한다고.
다른 사람이 주는 상처보다 
차라리 내가 주는 상처가 낫다고. 
자위하고 싶다. 
아이는 커간다. 
자기의 세계속에서 
다른 사람의 세계를 관찰하고 부딪치고 느끼면서
아주 잘. 자라고 있다.
매우,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만으로 다섯살하고도 6개월이 지난 작은 아이는
요즘 태권도를 다녀오면 뛰어나가 동네 형들이랑 놀기 바쁘다.
엄마 안녕. 
하고 저 혼자 문을 닫고 나가고 
저 혼자 자전거를 타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그러다 간혹, 
엄마가 태권도에 데리러 와. 
라고 말한다. 
왜 데리러 오라고 했어?
아이와 오솔길을 걸으며 물으면
그냥. 이라고 대답하며 내 팔에 제 얼굴을 문지른다.
어두워질 때까지 아이들과 놀다가 
밥먹을 시간이 되면 돌아오는 
나의 작은 아이는,
마치 내가 어린 시절을 지낸 80년대의 아이처럼 저녁을 보낸다.
그렇게 키우겠다고 결심했던 일이 성사되어 
이 역시 감사한 일이다. 
나는 아직 마흔도 되지 않았으나 
동생에게 피부가 탄력을 잃었다는 얘기도 듣고
이제 밤도 새지 못하고
예전처럼 술도 많이 마시지 못하고
가끔 화장실 세면대 거울 앞에서 흰머리를 발견한다.
흰머리를 발견해도 뽑지 않는다. 
이미 남편은 염색약을 써야 할 정도가 된 지가 오래다. 
늙어가는 중이다. 
조금씩 나도 어른이 되고 
아주 조금씩, 늙어가는 중이다. 
스무살 무렵엔 빨리 서른이 되고 싶었다. 
진절머리 나는 질풍노도의 혼란을 지나 서른이 되면 어딘가 안착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막상 30대의 반을 훌쩍 지나고 나니 
이제는 마흔이 되고 싶다. 
그럼 좀 더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간혹 그저 세월을 건너뛰어 쉰 정도가 되었으면 한다.
아무에게도 화내지 않고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 나이. 
언젠가 엄마가 쉰 다섯 쯤 했던 말처럼
“이제 이 나이쯤 되면 다 이해할 수 있단다”
나에게 나이는 환상이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은 나이가 아니라 
인격이다.
사람으로서 
가장 인간답고 숭고하게 살다가 
아름답게 기쁜 마음으로 
참 잘 지내었다. 라고 말하며 떠나고 싶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은 아름다운 마무리다. 
악다구니 쓰지 않고 고요하고 평화롭게 이별하고 싶다. 
그 날을 위해서 조금씩 걷는다. 
때론 울고 웃고 욕하고 따지고 생각하고 움직이면서
하루 하루를 산다. 
얼마전 남편이 몇 년전의 나의 습성에 대해서 강한 편견을 갖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라고 생각하지 마. 
당신이 말하는 그 습관은 그 때의 나일 뿐이고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아. 
이미 몇 년간 그렇지 않았잖아. 
그리고 덧붙였다. 
나는 매일 매일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 살아. 
라고. 
나는 내일,
오늘 보다 조금 나은 사람이 되어 있을거다. 
2011. 9.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