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그 곳인가, 거기 그 사람인가

당시 의 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했던 광복동의 금강다방에는 김환기, 손재형, 배렴 등이 매일 출근하다시 했고, 금잔디 다방에는 한묵, 이중섭, 유병희, 정규가 포진해 있었다. – 월간 플랫폼36 ㅡ중

당시에 이 다방들이 물이 좋거나 대단한 설비를 갖추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방, 지금말로 커피전문점 혹은 까페라는 데는 사교와 어떤 이에겐 생존의 장소이다.
프랑스에서 까페가 번창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가난한 문화예술인들이 집보다 편하고 따뜻한 작업실을 커피 한 잔 값에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진상중에 개진상중이다. 분명 더러 종업원에게 몇 푼 빌려가거나 그나마도 떼어먹는 놈도 있었을 게 뻔하다.

근데 저 윗 기사를 읽고 보니, 자생하여 일어난 바로 이런 문화공간, 한국근대기의 다방이나, 프랑스 근대기의 다방이나, 그 대단한 설비와 시설투자가 아니라 그 집에 희한하게도 그런 종자들이 꼬이기 시작했다는 거다. 그건 분명 거기 누군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거지와 다름없는 행색의 예술가의 작품을 알아봐 준다던지, 그와 대화를 할 수 있다던지, 남몰래 커피를 한 잔 더 갖다준다던지 하는 그 누군가.

플랫폼이라는 잡지의 저 문장을 읽는 순간 ㅡ 음, 우리는 지금 뭔가 거꾸로 생각해
거기에, 그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내가 간다 가 아닌,
거기를 그럴싸하게 만들어 놓아야 그 사람이 올거라고 믿지 않는가. 싶다.

차가운 건축물이 사람에게 악수를 하진 않겠지. 외려 따스한 사람의 체온이 건축물을 덥힐 것이다.

새로 만드는 새 블로그의 첫 글이다.
난 이 블로그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데스크탑에서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아마 점점 더 의자에 바른 자세로 앉아 똑바로 모니터를 보며 글 쓰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인쇄술 발명이후 최대의 변환기를 맞는 2012년, 새로운 형식의 블로그를 새로운 형식의 단말기에서, 새로운 자세로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 모이는 모든 글들은 대부분, 어디서 본 듯 하고 느껴본 듯 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공간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2012. 12. 5.
맥모닝이 생각나는 밤새 눈 내린 새벽

http://sunshinenews.co.kr/다방과-인스턴트커피-유행3/

피난문단의 중심, 다방

6·25 전쟁으로 인하여 서울의 다방은 거의 폐업하게 되었지만, 반면 부산은 피난시절에 여기저기 다방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커피문화가 점차 확산되어 갔다. 다방에는 약속이나 특별한 용무가 없으면서도 언제나 문인들이 모여 들었으며 특히 「밀다원」에서는 ‘피난문단’의 삶을 담은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부산에서의 아지트는 뭐니뭐니 해도 광복동에 있는「금강다방」이었다. 김동리, 조연현 등 웬만한 문인은 거의 그 곳에 모였고 김동진, 김대현, 윤용하도 빠지지 않았다. 죄다 별로 할 일도 없으니까 하루 종일 다방에서 살다시피 한 셈이었다. 이처럼 부산의 광복동은 6·25 전쟁으로 피난민들이 몰려들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거리에 다방이 하나 둘씩 들어서고 자연히 문화 예술계 인사들의 쉼터가 되었다. 한편 임시수도의 역할을 하던 부산의 다방들은 9·28 수복 후 서울로 옮기거나 사라져 갔는데, 그 분위기는 자양분으로 남아 6~70년대「태백다방」,「등대다방」,「백조다방」, 등을 거쳐 고전음악 감상실, 민속주점 등으로 젊음과 낭만의 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이처럼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지금처럼 문인들이 자유롭게 모일 수 있는 클럽 같은 것을 갖춘다는 것은 사치라고 인식될 수 있던 시기였기에, 문인들은 그들만의 공간으로 대개 손쉬운 단골 다방을 정해 놓고 이야기도 나누고 연락처로 활용하기도 하는 등 아지트로서의 역할을 다방이 하게 되었다. 즉 다방에서 음악회, 그림 및 사진 전시회가 열렸고 시낭송회, 문학토론회 등의 문학행사도 열렸으며, 때로는 연극무대와 영화관이 되기도 하였고 기타 동창회, 간담회 등이 열리기도 하는 등 음악·미술·문학·사진·연극 등의 모든 문화예술의 무대로「종합예술의 장」으로서 활용되었던 것이다.

손님과 마담과의 신경전

하지만 모든 다방이 이렇듯 문인들에게 하루 종일 자리를 제공할 만큼 너그러운 것은 아니었다. 지금이야 다방이나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하루 종일 앉아있는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드물지만 50년대에는 차 한 잔을 시켜놓고 아침부터 영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다방 마담 입장에서는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자리만 차지하는 손님들이 눈에 곱게 들어올 리가 없었던지라 이런 손님들과 끊임없는 신경전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주인이 차 한 잔을 먹고 너무 오래 앉아 있는 손님을 내쫓자 여기저기 앉아 있던 손님들이 모조리 분개하여 주인과「죽일 놈, 살릴 놈」하면서 욕을 하며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또한 온종일 앉아 있어봤자 차 한 잔밖에 팔아주지 않는 문화인들을 내쫓기 위해 다방의 마담은 한 물 가서 시들해진 유행가를 마구 틀어대기도 하였다. 하지만 문화인들은 이런 마담의 답답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후퇴는커녕 꼼짝 않고 앉아 있으면서 애꿎은 엽차만 더 달라고 성화를 부리기도 하였다.

요즘같이 다방에 손님이 없어서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들이지 못해 애가 타는 이 때에 그 시절 마담의 행실은 퍽이나 기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때의 상황은 지금과는 모든 사정이나 형편이 사뭇 달랐다. 한 달 내내 외상차를 마시다가도 어쩌다 돈이 생기면 한꺼번에 갚았고, 한 번 자리에 엉덩이를 댔다 하면 온종일 나갈 줄 몰라 로테이션이라고 말하는 손님 순환이 안 돼 돈벌이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차 한 잔 시켜 마시면 볼일 다 끝낸 것처럼 후딱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뜨내기 손님들이 아니고 진종일 눌러앉아 세월만 낚겠다는 신선들만이 우글거렸던 때였다.

이처럼 다방을 이용한 고객도 시세를 따라 바뀌었다. 8·15 해방 이후부터 건국도상의 정치적 혼란통에는 정객(政客), 정치·사회 운동가들이 아지트로 삼았고, 문인들이 오후 한때 묻혀 문학을 논하고 예술을 토론하는 문화인 살롱 역할도 했다. 6·25때 부산에서는 집 잃고 가족 잃은 실향민들의 모임터로 환도 후까지 그러했다.

또한 전후 우리나라의 다방은 정치 현실과 경제적 필요로 생겨났고 주로 미군정과 동란 때의 GI와 그를 따라다니는 엄청난 깡통, 껌, 커피 등 잉여 군수물자를 바탕으로 생겨난 일종의 신기루 같은 전쟁 경기(景氣)의 부산물이었으며, 도시생활 문화의 대표적인 존재로 자리잡아가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 커피전문가 오두진

http://news.knou.ac.kr/ezview/view.html?no=9416&body_keyword=

화랑은 다방의 미래다?

다방의 사전적인 의미는 `앉을 자리를 갖추어 놓고 차 또는 청량음료 등 주류 이외의 음료수를 판매하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커피 한잔으로 자릿값을 대신하는 사교의 장이 다방이다. 부담 없는 가격과 분위기 탓인지, 약속장소로써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지금은 커피숍이나 카페라는 외래어에 밀려 촌스러운 이미지를 상징하는 `추억의 장소’로 전락했지만 8·15광복을 전후하여 다방은 `가방끈 긴 실업자’들의 쉼터였다.

뿐만 아니라 문화시설이 미비했던 시절, 다방은 문화예술의 공급지이기도 했다. 혼신의 땀이 밴 작품들을 전시하여 대중에게 전하는 한편 작가들의 창작의욕을 고취시켰다. 차와 더불어 문화예술도 팔았던 것이다.
시인 이상이 `제비’라는 이름의 다방을 열었듯이 적잖은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이 다방을 개업했다. 비교적 지식인층에 속하는 주인들은 각자의 취향을 살려서 갈곳 없던 문화예술을 끌어안았다. 특히 문화시설이 부족했던 6·25직후에는 다방이 문화예술의 산파역을 담당했다. 비록 어둠침침한 실내였지만 문화예술 행사는 `갈봄 여름 없이’ 피어났다. 각종 문화의 밤 개최, 출판기념회, 시화전, 미술전시회 등이 그것이다. 다방은 그 시절의 든든한 대리모였다.
작가들은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다방을 찾았고, 업주는 손님 유치전략의 일환으로 가난한 작가들에게 흔쾌히 벽면을 내주곤 했다. 그 침침한 벽면에서 우리의 미술은 가파른 절벽에 매달린 꽃처럼 궁핍한 시대를 밝혔다.
6·25때 피난지 부산에서 수화 김환기, 장욱진 등이 개인전을 갖거나 몇몇 단체전이 열린 전시장도 다방이었다. 또 원로 미술평론가 이경성이 `미술평론가’가 된 것도 1951년 봄 부산 금강다방에서였다. 당시 광복동 일대 다방 6곳에서 `3·1절 기념미술전람회’가 대대적으로 개최되고 있었다. 이경성이 그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작품을 관람하다가, 우연히 수화를 만났다. 그때 수화가 신문에 게재할 전람회 평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반강제적인 부탁에 못 이겨 평을 쓴다. 이렇게 하여, 다방에서 미술평론가로 입문한 것이다. 이때 이중섭은 늘봄다방에 배치되어 작품 `도원’을 출품했다.
인사동에도 전시회를 전문으로 하는 다방이 하나 있다.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이 그곳이다. `대안공간’답게, 상업화랑이 외면하는 실험성 강한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 장소를 제공하며 미술의 한 축을 견인하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름이 `사루비아다방’일까? 이유는 이름 그대로다. 이곳은 예전에 인사동을 찾는 작가들이 모여서 세상사와 미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같은 이름의 다방이었다.
어두컴컴한 지하 1층에, 그것도 시멘트 벽면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서 마치 비밀 집회장소 같은 내부공간이 시선을 압도하지만 전시회가 열리면 의식 있는 작가들이 빠짐없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젊고 싱싱한 작품들이 이 지하 다방에 몸을 푼 채 발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옛날 다방은 지금 대가가 된 작가들이 성장할 수 있게 도와준 인큐베이터였고 화랑의 대리모였다. 마치 사람들이 제 집을 마련하기 전에 남의 집에 셋방살이하듯이 미술도 그랬다. 한때 다방에 세 들어 살다가 자생력을 키운 뒤 화랑으로 당당히 독립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의 화랑은 다방 미술의 미래였다.

http://www.khan.co.kr/olympic/2010/khan_art_view.html?artid=200212011749521&code=900101&s_code=at011
미투데이l트위터lMSN
[길](14)부산 광복동 (상)

댓글 0
ㅣ0ㅣ0

-낡은 조개껍질같은 추억의 뒷골목-

부산의 대표적 상권, 광복동. 이곳은 가로수가 하나도 없다. 눈에 보이는 건 상점의 크고 작은 간판뿐이다. 그러나 광복동은 젊음의 거리, 패션의 거리만은 아니다.

이 길이 전설처럼 품고 있는 내력, 피란시절 맨몸뚱아리 하나로 섰던 거리, 호기심으로 뚫어지게 쳐다보았던 보석가게, 카메라가게, 화려한 옷가게. 상가 곳곳에 숨은 섬처럼 흩어져 있는 문화공간이 있기에 광복동 거리는 추억할 만하다.

#일본인이 만든 인조거리 광복동

광복동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도시계획’이 시행된 곳이다. 1900년대 초반만 해도 개펄이었던 곳을 일본인들이 1905년부터 30여년간 메워 새로운 길과 동네를 만들었다.

광복동의 본적은 동래군 부산면. 고종 14년(1877년) 1월30일 부산구 조계 조약에 따라 일인들이 조차지라는 명목으로 거류지로 정해 왜식으로 변천정 1정목, 2정목, 3정목이라 하였다. 1947년 7월20일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해 광복동 1가, 2가, 3가로 고쳤다. -한국지명요람, 한국땅이름큰사전 참조-

해방후, 동명 개칭때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번창한 곳에서 조국 광복을 기린다는 뜻에서 이 지역을 광복동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곳의 땅이름은 해방과 함께 광복을 맞았지만 거리는 그렇지 못했다. 1960년대 이미 번듯한 상가가 형성된 상업중심지였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왜색을 탈피하지 못했다. 외국을 드나들던 선원들이 부산항을 통해 갖고 들어온 일제 전자제품과 고급카메라 등 ‘신식’ 물건들이 가게 쇼윈도를 장식한 탓이다.

옛시청 쪽에서 들어오는 광복동 입구엔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동광동 쪽으로 난 골목길은 일본서적 골목으로 통한다. 아직도 한 두군데 일본잡지 등을 파는 가게가 구멍가게처럼 남아 오래된 세월을 버티고 있다.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카메라가게들은 40~50년의 역사를 지닌 ‘광복동의 골동품’과 같은 존재들이다.

광복동길을 걷다 용두산공원에서 내려오는 계단을 지나 이쯤에 다다르면 젊음의 거리라는 이곳에 머리 희끗한 할아버지들도 몇몇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 뒤에서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대개 이렇게 시작된다.

“옛날에 말이야, 내가… 예전에 이 골목에 있던 가게가… 이 자리에 말이지…”

안 봐도 안다. 그 분들의 눈가엔 왕년에 한가닥 하셨던 그 때 그 시절이 오래 묵은 때처럼 묻어 있는 것을.

#다방문화가 꽃피던 시절

이런 광복동은 6·25전쟁때 피란민들이 몰려들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거리에 다방이 하나 둘씩 들어서고 자연히 문화 예술계 인사들의 쉼터가 되었다.

김동리의 대표적인 단편 가운데 하나인 ‘밀다원시대’의 무대가 된 밀다원다방을 비롯, 소설가 이호철씨가 황순원 선생을 만나 작품을 보였다는 금강다방, 역시 문인들이 많이 모였다는 스타다방 등이 광복동에 몰려 있었다.

박철석 동아대 교수(시인), 임명수 시인에 따르면 밀다원다방은 남포동 입구의 서울깍두기에서 광복동 길목으로 나오는 곳, 즉 현재의 로얄호텔에서 옛시청 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문학평론가 김병익의 한국문단사에는 당시 광복동의 문인들의 표정이 선명히 나타나 있다.

“이들은 어디서고 밤을 지내면 ‘낯수건과 칫솔이 들어 있는 낡은 손가방 하나’를 들고 ‘금강’ ‘춘추’ ‘녹원’ ‘청구’ 등 바다가 보이는 다방으로 흩어져 하루를 보냈는데(중략) 이 다방은 당시 갈 곳 없는 문인들의 안식처였고, 찾기 힘든 동료들의 연락처였으며, 일할 곳 없는 작가들의 사무실이었고, 심심찮게 시화전도 열리는 전시장이기도 했다. 이들은 여기서 원고를 썼고, 약간의 고료가 생기면 차나 가락국수를 시켜 먹고 혹은 선창가의 대폿집에 들어가 ‘피란살이의 시름과 허탈·자학·울분’을 동동주에 띄우며 ‘예술대회(유행가 부르기)’를 열기도 했다”

네온사인 번쩍이는 술집과 오락실이 들어찬 이 거리에 한 시대의 낭만이 존재했다니…. 지금은 케케묵은 얘기 같지만 바로 여기에 상업중심지 광복동의 존재 의의가 있다. 그냥 상업지대가 아니라 피란시절 ‘문화의 단칸방’과 같았던 곳…. 그런 내력을 간직한 상가…. 다시 그 길을 걷는다. 단 한군데라도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더라면 좋으련만…. 돌아서며 이내 안다, 금싸라기땅에서 그런 것은 욕심이라는 것을.

다방들은 9·28수복 후 서울로 옮기거나 사라졌다. 그러나 그 분위기는 자양분으로 남아 60~70년대 태백다방, 등대다방, 백조다방 등을 거쳐 고전음악감상실, 민속주점 등으로 젊음과 낭만의 문화를 꽃피운다.

/부산/이동형기자 spark@kyunghyang.com/

ⓒ 경향신문 & 경향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12. 1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