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야기 12. – 미정이

열 손가락 가득 색색의 메니큐어를 바르고 칠판 앞에 서서 교장에게 이르지 말라던 여선생이 있었다 추천도서 목록을 파란종이에 적어 내 주머니에 넣어주고 작은 피크닉 옷장 하나 있는 자취방 구경도 시켜주던 입이 크던 서울대 출신 여선생 어느 날 나를 불러 바들바들 떨면서 자퇴를 해버린 내 짝이던 미정이 얘기를 했다 글쎄 걔가 동자승이 씌인 무당이었댄다 지금은 점집에 가“한 사람이야기 12. – 미정이” 계속 읽기

한 사람이야기 – 10. 남욱

휘경역에서 탄 지하철은 꿉꿉한 냄새가 났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오늘따라 더욱 불쾌하다. 괜히 기분이 좋지 않다는 증거겠다. 마음따위 살필 여력은 없다. 짜증이 나면 짜증이 나는 것이고 이 감정을 폭발시킬 어떤 것들을 찾아야 한다. 그게 하루를 견디는 방법이다. 오늘 저녁은 술을 마실 것이다. 그 후엔 여자의 집에서 잠을 자야지. 내일은 어차피 아르바이트 비번이기도 하다. 오전“한 사람이야기 – 10. 남욱” 계속 읽기

한 사람이야기 – 9. 마후라아줌마

그 길의 1층은 대부분 옷가게들이었다. 서울시내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옷을 팔았다. 유난히 큰 사이즈의 옷이나 큰 신발, 맞춤 와이셔츠, 용과 태극기가 그려진 하얀 면티부터 요란한 금박무늬의 가운들, 화려하지만 전혀 고급스럽거나 세련되지 않은 드레스, 브랜드이긴 한데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 앉은 자리에서 세월을 울컥울컥 집어삼킨 듯한 소품을 파는 가게, 도장을 파는 가게, 초상화를 그리는“한 사람이야기 – 9. 마후라아줌마” 계속 읽기

한 사람이야기 – 8. 옥희

한 사람이야기 – 8. 옥희 홀이 시끄러웠다. 웨이츄리스들은 군데 군데 흩어져서 인상을 구기고 한 테이블을 쏘아보고 있었다. 손님들도 더러 그 테이블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의자에 깊이 앉아 그 테이블의 남자들을 빤히 보는 손님도 있었다. 시선이 집중된 테이블을 제외한 곳에 앉은 사람들은 대부분 단골손님들이었다. 웨이츄리스들이 그들이 즐겨먹는 메뉴가 뭔지, 테이블에 올려놓고 가는 팁이 얼마인지 이미 정해져 있는“한 사람이야기 – 8. 옥희” 계속 읽기

한 사람이야기 7 – 지원

웃고 있었다.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낀 채, 앞에 있는 사람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앞에 앉은 갈색머리의 남자도 호기롭게 웃었다. 지원의 큰 입은 웃을 때 진가를 발휘했다. 가지런한 치아, 붉은 입술, 넓게 퍼져 광대근육 바로 아래로 올라붙는 입꼬리가 시원했다. 앞머리를 길게 내리고 안경을 썼다. 사람들이 왜 안경을 쓰느냐고 물으면 그저 눈이“한 사람이야기 7 – 지원” 계속 읽기

한 사람이야기 6 – 쑈리

쑈리는 어두운 방안에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입에 담배를 문 채로 벌떡 일어나 커튼을 제쳤다. 창을 열자 비루한 햇빛이 쏟아졌다. 햇살이 좋은 모양이다. 눈 앞에 흰 먼지들이 날아다녔다. 쑈리에게 모든 창문은 너무 높았다. 담뱃재가 길어져 떨어지려 하자 쑈리는 바닥에 놓인 검은 재떨이에 재를 털었다. 방안에 불을 켰다. 궁상은 질색이다. 질색하는 궁상을 몇 시간을 떨고“한 사람이야기 6 – 쑈리” 계속 읽기

한 사람이야기 5 – 성욱

세상 모든 만물은 다 이유가 있다. 수긍할 수 없는 말이었다. DJ박스에 한참을 앉아 있던 성욱은 그 말을 믿기로 했다. 컨트리음악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성욱은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혼자 그 말을 두 번 중얼거렸다. 미국의 컨트리 음악을 모두 데이터베이스화 하는 작업을 며칠 째 하고 있었다. 낮에는 바텐을 보는 영상이가 작업을 하고 저녁에는 성욱이 음악을 틀면서“한 사람이야기 5 – 성욱” 계속 읽기

한사람이야기 4 – 곤화

유리로 된 샷시문은 닫을 때마다 불안했다. 유리창에 반짝, 소주케틀이라는 맞은편 가게의 글자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험한 골목에 가게를 낸 것은 염려하지 않았으나 가게 문을 닫을 때마다 불안이 다시 떠오르곤 했다. 골목이 험하다는 건 드나드는 사람들이 험하기 때문이다. 험한 사람들이 드나들어서가 아니라 흥분한 사람들이 드나들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흥분한 이유는 어두운 밤 좁은 골목길 현란한 간판과 더불어 소주케틀이라는“한사람이야기 4 – 곤화” 계속 읽기

한 사람이야기 3 – 정아

“에휴. 이러고 살아서 뭐하나 모르겠다.” “같이 죽어. 같이 죽어? 엄마 우리 같이 죽어?” 다섯 살 짜리 아들이 정아의 손을 잡았다. 정아는 신발을 신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길고 작은 정아의 눈은 또 초승달이 되었다. “뭘 같이 죽어? 쪼끄만게!” “엄마 맨날 죽어?” 정아는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하였다. 약 3초간. “너 어디 할머니 앞에 가서 그 소리 해봐라. 뭐라“한 사람이야기 3 – 정아” 계속 읽기

한 사람이야기 2 – 김언니

김언니는 오늘도 소방서 앞에서 골목을 올라간다. 어이 김언니 오늘도 한 잔? 호객을 하는 사내가 웃으며 말한다. 김언니의 눈동자는 이미 풀어졌고, 머리도 길게 풀어졌다. 앞이 흔들리는지 걷다가 눈을 부릅떴다. 김언니는 눈이 컸다. 눈썹도 짙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얼굴인데 얼굴크기도 작지 않았다. 걸을 때는 늘 팔자로 걸었다. 작지 않은 키에 어깨가 단단하여 힘이 좋아 보이는 체형이었다. 김언니를 보고“한 사람이야기 2 – 김언니” 계속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