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령기장애아동과 그 가족의 예술매개교육 성과 – 소셜워크 땡스맘

소셜워크 “땡스맘” 자문의견서

작성자 : 이하나

문화공동체 히응 / 지역교육네트워크 이룸 대표

2015년부터 시작한 땡스맘 프로그램은 장애인당사자와 장애인가족으로 구성된 바이올린 앙상블이다. 바이올린을 매개로 장애가족 간의 소통을 꾀하고 더 나아가 세상과의 소통을 추구한 이 공동체는 지난 5년간 주최측과 지도강사의 헌신으로 상당한 성과를 이뤄냈다고 평가한다.

이에 대해 본 자문위원은 지난 5년간 소셜워크 땡스맘을 지켜본 경험을 바탕으로 향후 소셜워크의 땡스맘에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기술하고자 한다. 장애가족의 예술교육을 테마로 한 본 자문서에서는 소셜워크의 꿈다락 프로젝트를 “땡스맘”으로 칭하기로 한다.

  1. 장애인과 그 가족의 음악교육

땡스맘을 처음 열었을 때 교육수혜자 모집은 장애아동과 그 가족으로 한정했다. 2019년 장애통계연보를 살펴보면 다수의 장애아동이 중복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0세부터 17세까지의 장애아동은 통계에 잡힌 것만 72,618명에 이르는데 2018년 기준 전체 아동인구의 0.89%에 이른다. 이 통계대로라면 소셜워크가 주로 활동하는 안양지역의 장애아동은 약 752명에 이른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장애유형별 통계를 보면 중복장애를 고려하여 언어장애가 가장 많고, 그 뒤로 뇌병변과 자폐성 장애가 뒤를 잇는다. 땡스맘의 참여아동들도 다수가 자폐와 지적장애였으며 지체장애는 1명뿐이었다.

2019년 장애통계연보 / 한국장애인개발원 발행

안양지역은 타 지역에 비해 장애인복지를 책임질 수 있는 장애인종합복지관이 두 곳이 있다. 관악장애인종합복지관과 수리장애인종합복지관이다. 또한 2018년 장애인종합지원센터를 개소해 장애인단체가 입주해 있어, 타 지역에 비해 사용자들로부터 장애복지지원이 잘 되는 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우수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타 지역이 워낙 형편없다는 상대적이며 주관적인 평가다. 장애아동을 보호하는 가정에서는 거주지 관할 지역에 편하게 다닐 수 있는 복지관이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보호를 받는다는 의식을 갖게 된다.

2019년 장애통계연보 / 한국장애인개발원 발행

또한 안양에는* 장애인부모들이 만든 사회적협동조합이 다수 포진해있다. 대표적으로 사회적협동조합 세잎클로버, 다누리장애통합사회적협동조합, 열손가락서로돌봄사회적협동조합, 희망터사회적협동조합을 꼽을 수 있다. 땡스맘 초창기 구성원은 위 협동조합과 장애인부모회, 각 복지관의 교차 이용자로,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돌봄을 추구한다. 각자의 사정으로 공동체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못하거나, 참여를 주저하기도 하지만 장애인복지지원에 관련된 정보는 대체로 잘 공유되는 편이다. 1기 모집에는 위 단체와 기관을 통해 장애부모들이 먼저 정보를 접하고 자녀들과 참여하게 되었다.

본 자문위원은 위에 열거한 각 기관, 단체를 통해 2013년부터 공통사업으로 생애사쓰기 등 글쓰기 프로그램을 진행한 바 있다. 장애부모들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장애부모들이 자기 삶을 표현하는 생애사쓰기 프로그램에서 발견한 것은 여태까지 자녀들에게 행해온 교육이 대부분 훈련이었으며 비장애인과 비슷한 기능을 획득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비장애아동이 사교육을 통해 더 우월한 지적능력과 수학능력을 성취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면, 장애아동은 각종 복지프로그램과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비장애아동을 따라가려는 노력을 해 온 셈이다. 요컨대, 이들의 교육은 장애아동의 주체적 성격이나 그 특성을 존중하지 못하고 장애의 특성 자체를 소거하는 쪽으로 진행되어 왔다.

*2020년 충북문화재단에서 발간한 “장애인 예술 매개자 양성과정 결과자료집”에 따르면, ‘음악교육에 있어서 정확한 음을 내고 기능적인 면을 강조한 장애인 예술교육에 회의를 느낀다’ 거나, ‘장애의 특성을 완전히 배제한 훈련형 교육을 진행해 온 것이 장애인 예술교육의 문제점’ 이라고 지적한 참여자의 발언을 볼 수 있다. 지역에서 장애교육을 수행해 온 복지관의 담당복지사나 비장애인교육만을 전담했다가 장애인교육에 참여한 본 자문위원도 다수의 장애인대상 교육이 ‘비장애인처럼 되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은 ‘장애는 없애야 하는, 극복해야 하는, 그 정도를 줄여야 하는’것이라는 사상을 기반으로 하며 장애인 특유의 고유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장애아동은 비장애아동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교육을 지원할 수 있으면 다양한 교육과 훈련을 받게 되는데 대부분 행동교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비장애아동과 동일한 기술을 습득하고 특별히 재능이 있는 경우 더 혹독한 훈련을 받기 마련이다.

실제로 본 자문위원이 만나본 20대 청년 자폐인의 경우 작곡과 악기연주에 재능이 있었다. 이를 인지한 보호자는 아동기에 음악학원을 보냈고, 그 음악학원에서 여러 차례 구타를 당하며 훈련했다고 고백했다. 이 청년은 자신이 재능이 있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으나 이런 경험으로 인해 음악훈련을 기피하게 되었다. 하지만 성인기에 접어들어 직업훈련에 집중하게 된 후에, 즉 보호자가 자녀에게 음악훈련을 중단한 뒤에서야, 음악을 즐기기 시작했다.

어떤 보호자는 ‘마치 동물을 훈련시키듯 아이를 훈련시켜왔다’는 고백을 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비장애인 보호자 입장에서는 장애를 가진 아이가 장애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비장애인과 유사한 생활의 기술을 갖춰야 하고, 생활의 기술을 획득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써 온 것이다.

2. 바이올린이라는 악기

음악을 취미로 삼아 연주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악기는 피아노와 기타정도가 있다. 도시 곳곳에 있는 교습소의 영향이 크다. 건반악기의 경우 기본적인 음계를 알면 누구나 쉽게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인 요소이며, 기타는 현악기 중에서도 화음을 중심으로 쉽게 연주할 수 있어 단체모임에서 반주를 해낼 수 있다는 요인 때문으로 보인다. 이 두 악기는 종교집단과 청년층을 중심으로 197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 보편적인 악기가 되었다. 그 외 *바이올린은 현악기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악기이지만, 연주에 난이도가 있어 누구나 쉽게 접근하는 악기라 보긴 어렵다. 우선 소리를 내기 위해서도 20시간 이상의 훈련이 필요하고 바른 자세를 갖추고 양손을 사용하며 음계가 구분되어 있지 않고 손가락의 미묘한 위치에 따라 반응하기 때문에 초기 입문자에게는 건반악기보다 훨씬 어렵게 느껴진다.

소셜워크에서 땡스맘 프로그램에 바이올린을 선택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우선 악기를 구입하거나 휴대하기 간편하다. 교향곡에 쓰이는 대부분의 음계를 낼 수 있어 다양한 곡을 연주하기 좋다. 바이올린은 서양음악에서 가장 중심이 되고 기본이 되는 악기라 향후 발전가능성이 무한하다. 결정적으로 한국인들에게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는 ‘지니고만 있어도 근사해보이는’ 악기에 해당한다. 지금의 성인들에게는 접근성이 낮은 고급 악기라는 인식도 있다.

땡스맘에 참여한 장애아동과 그 가족들이 바이올린을 배운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장애인이 바이올린도 할 수 있나, 어려운 악기가 아닌가?’ 하는 편견을 쉽게 드러냈다.

땡스맘에 참여한 장애가족은 다수가 어머니였다. 각 기수마다 1명 정도의 아버지가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참여도는 현저히 떨어졌다. 비장애아동의 학교 활동에 아버지들의 참여도가 높아지는 추세에 비하면 상당히 보수적인 비율을 유지하고 있는데 자녀의 돌봄이 어머니에게 한정되어 있다는 장애가족의 특수성도 반영한다. 2013년 ㈜이야기너머와 수리장애인종합복지관이 공동수행한 ‘장애인과 장애인가족의 생애사쓰기’를 지켜본, 당시 수리장애인종합복지관의 이형진관장은 “장애부모는 장애에 함몰되어 있다”고 표현한 바 있다. 장애아동을 둔 어머니들은 자녀를 임신하고 출산했다는 이유로 선천적 장애를 가진 자녀에 대해 원인 모를 죄책감에 평생 시달리며, 가족들로부터 쉽사리 냉대를 받는다. 자녀의 장애에 대한 책임이 모태에 있다는 사회적 편견과 장애아동을 비장애아동처럼 신체와 지능의 기능을 극대화시켜 사회에 안착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에 시달린다. 장애 자녀에 관한 돌봄이 우선되다보니 본인의 자기계발과 사회생활도 모두 장애자녀와 관련된 내용이다. 자녀가 장애판정을 받고 난 뒤에 본인의 이전의 삶은 완전히 소거되며, 오직 장애자녀의 돌봄전담자로 살아가게 된다. 가족공동체의 적극적 조력이 없으면 자녀에 대한 모든 책임은 어머니에게 귀결된다.

소셜워크에서는 장애가족의 참여를 원했으나 결국 자녀를 데리고 다녀야 하는 어머니들이 자녀를 교육시키기 위해 합류하게 된 셈이고 초기에는 ‘나는 배울 생각이 없고 아이만 배우면 된다’며 한 발 물러서는 어머니도 있었다.

소셜워크 땡스맘에 참여한 어머니들은 다수가 가정내에서 ‘당신이 바이올린을 배운다고?’라는 비호의적인 반응을 접했으며 이에 대해 때로 절망하고 화를 느끼기도 했다.

3. 예술이라는 매개교육과 매개자의 역할

소셜워크 땡스맘의 활동에서는 주강사의 역할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기획자가 설계한 것은 나아갈 방향과 행정적 지원이었고 프로그램과 구성원들은 주강사가 책임지고 이끌어왔다.

땡스맘의 주강사로 활동한 김혜영 씨는 경력 25년 이상의 바이올린 레슨 전문강사다. 2015년 처음으로 땡스맘 수업을 하면서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넘나들며 숙련된 강의 스킬을 선보였다. 그는 자문위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청소년기부터 종교단체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해 온 것과 다년간의 단체활동을 해 온 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김혜영 씨는 지적장애와 신체장애를 구분하지 않았고 장애와 비장애의 선을 긋지 않았다. 또한 장애교육에 대해 특별한 교수법을 배운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장애아동의 개별적 특성을 인지하고 그에 맞춘 교육을 실행해왔다.

본 자문위원이 5년 넘게 김혜영 씨의 교수법을 지켜봤을 때 김혜영 씨의 교수법은 오히려 특수교육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발휘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의 교육은 장애아동을 장애의 틀에 가두지 않고 신체장애와 지적장애를 구분하지 않았다. 자폐아동은 지적장애나 언어장애의 복합장애가 있는데 각자의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음악으로 소통하고자 했다. 자폐정도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은 달랐지만 장애여부를 떠나 미추에 대한 구분은 동일했고, 아름다운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는 똑같이 받아들였다. 더러 자폐아동 중에 소리에 매우 예민하고 새로운 자극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한 경우도 있으나 땡스맘에 참여한 아동들은 연주가 매끄럽지 않은 소리에도 크게 스트레스를 표하지 않았다. 바이올린 소리에 예민해지면 아동들은 참여를 잠정 중단할 수 있었다.

땡스맘에 참여한 장애아동들은 수업권을 보장받았다. 장애여부를 떠나 본인이 연습을 더 하고 싶으면 하고, 하고 싶지 않을 때는 쉬는 것이 가능했다. 두 명의 바이올린 교사가 많게는 20여 명을 한 번에 가르쳐야 하다 보니 시간 공백이 생겼다. 이렇게 비는 시간이 오히려 아이들에게 더 도움이 되었다.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연주를 지켜보거나 때로 재충전을 하면서 다시 연습을 할 욕구를 일으키기도 했다. 여러 명이 함께 상호작용을 하니 타인의 연주를 듣고 모방하거나 자기연주와 비교하기도 했다. 정확하게 분할된 시간이 아니라 느슨하게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 장애아동들은 무럭무럭 성장했다. 이는 비장애아동의 교습에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5년을 거쳐 학령기를 지나 성인기에 접어든 참여자도 있으며 바이올린 연주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무대에 오르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아동들은 어머니와 함께 바이올린을 통해 동등한 관계를 수립하기도 했다. 장애아동과 그 어머니의 관계는 언제나 어머니가 주도하고 이끌어가고 지시하는 구조였다면 두 사람이 동등한 수준에서 시작하는 바이올린 교습은 두 사람 모두 같은 선에서 시작해 비슷하게 성장했다. 물론 3년을 넘어서자 어머니들의 실력이 더 성장했으나 아이들도 바이올린과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있어 일방적으로 지시하거나 지도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땡스맘은 매년 발표회를 갖는 것 뿐 아니라 지역의 크고 작은 행사에 연주자로 참여할 기회도 얻었다. 소셜워크와 지역의 연대단체들이 자리를 마련했고, 강사주도로 구성원들의 동의를 얻어 연주기회를 확장했다. 장애아동과 그 가족이 바이올린을 배우고 연주한다는 것은 지역사회에 적지 않은 감동과 파동을 일으켰으며 땡스맘 구성원들은 무대위에서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으며 응원과 지지를 확인해 감동을 느끼고 자존감을 회복했다. 회차를 거듭하며 다양한 레퍼토리를 준비하게 되었고 연주실력도 향상되었다. 땡스맘 구성원들은 이제 주말시간은 당연히 땡스맘 프로그램을 하는 날로 인지하고 있으며 참여도도 상당히 높다. 매주 만나다 보니 구성원들의 친목도 좋아지고 함께 아이를 키우는 공동체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참여자들의 연령대와 아이들의 나이가 모두 다른데, 장애아동의 성장기, 사춘기를 거치게 되는 과정을 공유하며 서로 공감하고 연대하고 있다.

4. 장애가족의 자조모임과 독립

땡스맘은 2015년 이후 지속적으로 아르코문화예술재단의 꿈다락 프로그램으로 진행되고 있다. 중간에 1년 지원이 끊어졌을 때는 소셜워크의 자부담으로 프로그램을 지속했다. 구성원들은 땡스맘을 그만 둘 생각이 없으나 그에 대한 자립의식은 매우 희박하다.

이들은 자립에 대한 인지는 있으나 여력이 부족하다고 자평한다.

특히 학령기 아동을 둔 장애가족은 아이을 돌보는 일에 모든 시간을 할애한다. 별도의 모임을 자립적으로 구성하거나 이끌기엔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하다. 땡스맘 참여자 중에는 직장생활을 병행하는 경우도 있다. 자조모임을 구성하려면 경제적 재원을 마련하고 공동체의 구조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 작업에 헌신할 여력을 갖춘 구성원은 없는 셈이다.

장애가족이 장애자녀로 인해 갖게 된 죄책감은 여러 형태로 발현된다. 이들은 지속적인 지원에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감정을 다소 갖고 있다. 어딘가 의존해야 한다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절망, 고마움, 부채의식이 교차한다.

땡스맘 구성원은 인터뷰를 통해 ‘여기 나와야 숨이 트이는 느낌’이라고도 한다. 이들에게 자조모임을 만들어 나가라는 요구는 또 하나의 책무를 던지는 셈이 된다.

장애인부모회의 임원은 본 사안에 대해 ‘학령기 아동을 둔 장애아동부모가 자립자조모임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단언했다. 개인의 사생활도 챙기기 어려운 마당에 별도의 활동을 하긴 어렵다는 것이다. 모임을 구성하려면 적어도 아이들이 자라 성인기에 접어들어 비중증 장애아동이 직업훈련이 가능해져야 한다고 못박았다.

안양지역의 특수성으로 복지관이 둘이나 있고 지역 연대조직도 많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부모는 자녀와 분리된 생활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회전반에 걸친 문제로 사회 전체가 함께 장애아동을 키우는 단계에 접어들어야 장애부모의 개인적 독립이 가능할 것이다.

장애가족이 자조모임을 더 많이 만들게 되면 장애인의 개별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질테고 그것이 곧 구별짓지 않은 평등한 교육풍토를 만들어 낼 것인데 안타까운 현실이 이를 가로막는다.

5. 땡스맘이 보여주는 세상과 나아갈 방향

2015년부터 시작한 땡스맘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수행단체와 전담 강사의 헌신과 노력이 크다. 참여자들의 인내도 공동체를 지속하는데 큰 동력이 되었다. 성과가 쉽게 나지 않은 악기연주였으나 어떤 성취도를 꼭 이뤄내야 하는 과제해결부담은 덜했던 것이 그 원인이라 볼 수 있다.

땡스맘은 경제적, 사회적 기준에서 ‘무용한 것을 계속 해나가는’ 예술의 힘으로 긴 시간을 함께 했다. 예술은 쓸모 있어지는 순간 프로파간다로 전락되기 쉽다. 예술교육의 힘은 바로 무용해보이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탐미의 본성을 일깨우고 그로 인해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땡스맘은 일면 이 부분에 대해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지원사업에 의존하고 있는 땡스맘에 향후 어떤 형태의 모임을 지속하고 예술교육을 확장해 나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와 컨설팅이 필요하다.

공기관의 공모사업은 대부분 지원이 목적이며, 자립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확장해 나가야 한다. 예산을 한정없이 지원할 경우 특정단체 몰아주기나 의존적 조직 동원이라는 의혹에 휩싸이기 쉽기 때문에 대부분 특정기간이 지나면 지원을 중단하는 일몰형으로 운영된다.

하지만 앞서 기술했듯 장애아동의 가족으로 구성된 특수성과, 사회전반에 걸친 돌봄연대체의 부재로 인해 땡스맘은 일반적 지원사업의 구조에 편승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바이올린 실력과 구성원들의 자존감은 향상되었더라도 이 구조로 언제까지 프로그램을 지속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구성원들도 동일한 형태로 계속 프로그램의 수혜자로만 남게 되면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

6년간의 운영을 마친 땡스맘은 이제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공공의 지원, 또한 그 지원체계 구축을 위한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예술을 매개로 한 여타의 장애인당사자와 그 가족의 동아리 모임과 비교연구하면 향후 장애문화예술교육의 모델링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개인의 헌신으로 지속되는 공동체 모델이 5년을 넘어갈 경우 헌신한 개인의 희생을 공동체가 보상할 수도 없게 된다. 예술을 매개로 하는 장애교육에서 매뉴얼이 가능한가, 장애통합교육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등, 땡스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궁무진하다.

따라서 본 자문위원은 2021년에는 땡스맘의 지속가능성, 확장성을 위해 체계적 연구과정을 꼭 수행하고 이를 발표해 장애예술교육계와 연대연구하고 발전방향을 모색하길 권한다.

2021년 1월 작성

자문위원 이하나 (문화공동체 히응, 지역교육네트워크 이룸 대표)

2012년부터 지역에서 교육문화활동을 시작했으며, 2013~2014년 ㈜이야기너머의 기획이사로 재임할 때 ‘장애인과 그 가족의 생애사쓰기 프로그램’으로 장애계에 첫 발을 들였다. 2015년부터 소셜워크 땡스맘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개인적으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고 간헐적으로 땡스맘의 객원연주자로 공연무대에 합류한다. 2019년 충북예술재단의 장애인문화예술지원사업 지역 문화예술 특성화 지원사업에 출강한 바 있으며, 2018년~2019년에는 수리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청년발달장애인생애사쓰기 프로그램을, 2020년에는 발달장애 작가모임인 사단법인 로아트의 임원진 생애사쓰기를 진행했다.

시민단체인 지역교육네트워크 이룸에서 수년간 민주시민교육을 진행해왔고, 전문집필노동자, 문화예술교육기획자로 <포기하지 않아 지구(2019, 빨간소금)>, <태안환경보건센터 12주년 백서(2020, 환경부)>, <코로나팬데믹과 한국의 길(2020, 창비, 공저)>,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2020, 교육공동체 벗, 공저)>등을 썼다.

*안양지역의 장애부모 공동체 형성 과정에서 시청의 담당자가 협동조합 인큐베이팅을 매우 잘 해냈다는 후기가 있다.

*2020년 장애인문화예술지원사업 지역 문화예술 특성화 지원사업 결과자료집 : 충북문화재단과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발행

*오케스트라의 음을 조절할 때 피아노가 아닌 바이올린의 음을 기본으로 하며, 수석바이올리니스트는 악단의 대표자 역할을 한다.

[기고]귀신이 하는 일

온라인 시대, 보이지 않는 비대면 노동에 관하여

2020년, 코로나19의 감염에서 내가 먹고 살기 위해 했던 일의 절반은 사업계획서를 수정하는 일이었다. 그 중의 절반은 담당자에게 비용산출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설명하는 일이었다. 

“온라인인데 왜 더 비싸요?”

“장소대관 안해도 되는데 이렇게 돈이 들어가요?”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실시간 하시면 되잖아요”

“유튜브에 일주일에 한 건씩 업로드하면 되지 않나요? 애들도 한다던데”

“왜 꼭 해외 사이트를 사용하려고 하시죠? 국산 화상채팅앱도 있다던데요” 

나에게 저런 질문을 한 사람들의 80%는 공무원이었고, 정부지원자금을 받아 1년짜리 사업을 진행하는 사람들이 나머지 20% 정도 된다. 1인미디어의 시대, 4차산업혁명의 시작이라는 주제어가 사람들의 인식을 어떻게 꼬아놨는지 확인했다. 그 실타래를 푸는 작업으로 상반기가 다 지나간 셈이다.

“모바일 기기로 유튜브 실시간 방송을 시작하려면 일단 방송할 채널의 구독자 수가 1천 명이 넘어야 합니다. 계정도 없으시다고요? 유튜브로 송출하려면 발언자 소리가 잘 들리도록 해야 합니다. 행사를 제대로 촬영하려면 적어도 3대의 마이크와 3대의 카메라와 이 기계를 잡을 사람이 필요합니다. 편집은 소프트웨어로 하지만 결국 사람 손이 갈 수밖에 없어요”라는 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온라인에서는 모든 사람이 정보와 콘텐츠의 소비자가 될 수 있고 생산자도 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누구나 계정만 가지면 방송도 할 수 있고 책도 펴낼 수 있다. 거짓은 아니다. 그러나, 정보나 콘텐츠를 만들어내려면 사람들이 볼 만한 내용을 구성할 기획력이 있어야 하고, 그 기획에 따라 짜임새 있는 스토리를 전개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필요하며, 현장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살려낼 수 있는 기계와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온라인으로 회의를 진행한다는 것은 기계의 힘을 빌려야 한다. 누구나 접근은 가능하지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수준의 품질은 누구나 만들어낼 수 없다. 기계와 기술만 있다고 가능한 것도 아니다. 실시간 송출이라는 건 안정적인 통신환경이 필요하다. 일정한 데이터가 기복 없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야 비슷한 용량을 가진 화면이 보이지 않는 통신선을 타고 내 눈앞에 놓일 수 있다는 걸, 일일이 설명해야 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만난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저 모든 장비와 기계와 통신선이 필요없이 한 장소에 모여 앉으면 되는 일이니까. 마이크를 굳이 갖다 놓지 않아도, 카메라 두 세대가 각도를 달리해서 따로 찍지 않아도, 통신선을 끌어와 장비에 연결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마이크가 없을 때는 듣는 사람은 귀를 기울이거나 상반신을 앞으로 내밀면 되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 성대와 배의 힘까지 이용해 소리를 키울 수 있는 만큼 더 큰 목소리를 내면 된다. 카메라가 없어도 고개를 돌리거나 잠시 허리를 곧추세우는 것으로 내가 원하는 각도를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인간의 신체는 이다지도 위대하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러웠던 것을 온라인 공간으로 옮겨와 복원한다는 것은 여러 사람이 투입되어 숙련된 기술과 비싼 장비를 써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온라인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대답하다 보면 지치기도 했다. 나름대로 어떤 사람들은 잔꾀를 부려 비용을 절감하거나 필요한 장비를 축소해서 진행하자고 했다. 처음에는 그에 응하기도 했으나 하반기로 갈수록 나도 배짱을 부렸다. “네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해요. 그렇죠.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요. 네네, 하지만 그렇게는 못합니다. 안됩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코로나19의 전염이 다음 해에도 지속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각종 행사의 온오프라인 병행은 2020년을 기점으로 자리 잡을 거라 판단했다. 초기에 시작되는 일들의 기준을 잡아둔다 해도, 일은 반복되면서 폄하되고 훼손되기 십상인데 조금 더 강력한 규칙을 적용해야 융통을 발휘할 범위도 생기지 않겠는가. 

기준이 없이 온라인 행사와 교육이 중구난방으로 진행되다 보니 각 예산집행처의 담당자 권한도 강력해졌다. 담당자가 온라인 행사에 투입될 비용의 산출근거를 이해하면 결정권을 가진 상사의 결재를 받을 수 있고, 그래야만 예산집행이 결정되는 것이다. 어떤 담당자는 온라인 회의 툴을 왜 미국산을 쓰냐면서 국산도 있다고 “국산품애용정신”을 발휘하기도 했다. 공기관에서 해외결제를 용납해줄 리 없다고 체념한 어느 단체 담당자는 개인사비로 유료버전을 구매해 시비를 마무리했다. 

특강이나 교육프로그램 강의 섭외때에도 녹화했다가 쓰면 안되느냐는 질문이 빗발처럼 들이쳤다. 녹화영상을 어디에 배포할 것이며, 어느 플랫폼에 업로드할 것이며, 언제까지 사용할 것인지 계약서를 쓰고 얘기하면 모두들 없던 일로 하자고 말을 바꿨다. 녹화영상은 상호소통이 없어서 임기응변이 용납되지 않기 때문에 더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온라인으로 전환해서 성공적인 그림을 만들고 싶다는 곳도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성공적인 그림은 방송국에서나 가능한 모습이었다. 

온라인시스템이 기계화되었다고 해서, 어플에서 모든 걸 해준다고 해서, 그걸 작동하는 사람이 카메라 뒤에 서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다들 모든 걸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앞서 얘기한 기계와 기술이 필요 없이 몸을 비트는 것만으로 대부분 해결되는 인체의 신비를 이해하지 않을뿐더러, 화면 뒤에 숨어있는 사람들은 고려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나의 방송을 만들기 위해 24시간 쉬지 않고 일하는 스텝들과 실감이 나는 영상을 찍기 위해 동상과 열사병, 근골격계 질환을 감수하는 제작자들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산악인들이 에베레스트에 올라 깃발을 꽂고 만세를 부를 때, 무거운 등짐을 지고 카메라 뒤에서 묵묵히 허술한 옷차림으로 걸어 올라가는 셰르파들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명 아니었을까. 

소프트웨어 하나를 만들려면 수많은 협업과 지난한 노동이 필요하다. 심심풀이로 했던 게임의 오류를 잡아내느라 밤을 새우다 죽어가는 개발자들의 이야기가 소리 없이 사라질 때, 콤마 하나 더 찍어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홈페이지 때문에 애먼 상담원에게 분풀이를 하는 일이 늘어나는 것이다. 기계나 시스템이 돌아가는 원리는 종사자가 아닌 이상 다 알 필요도 없고 다 알 수도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변치 않은 단 한 가지 원리까지 무시하면 곤란하다. 2020년에 내가 접한 저 많은 황당한 질문은 모든 일을 사람이 해야 한다는 걸 무시한 태도였다. 4차 산업혁명으로 모든 일을 기계가 대체하게 된다는 게 노동자가 필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기계화는 기계를 다룰 수 있는 사람만이 숙련된 노동으로 기계를 조작하고, 기계가 고장날 경우 정확한 대응을 할 수 없는 관리자들만 우왕좌왕하는 상황을 만든다. 기계는 오류가 나기 마련이다. 기계는 기계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같이 있어야 원활하게 작동하며 그 가치를 빛낼 수 있다. 무대를 설치하고 의자를 깔고 내빈석이라는 글자를 출력해 종이에 붙이는 것만이 노동으로 보인 것일까. 촬영을 한 뒤 편집을 하고 업로드를 하는 것은 귀신이 하나? 

우리의 시공간을 연결해주는 작업은 내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버스나 전철을 타고 가서 행사장에 앉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보이지 않는 타인의 노력만이 앉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게 해준다. 덜 움직여도 되는 편리한 개인의 삶은 언제나 누군가의 노동을 깔고 앉아 있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다. “편리하고 빠르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노동이 켜켜이 쌓여가는 소리다. 보이지 않는 노동은 귀신같이 일한다. 아무도 모르게, 소리도 없이 이름도 없이, 사용자가 고개를 들어봐도 몸을 일으켜도 보이지 않고, 보이지 말아야 한다. 

인류가 처음 기계로 영상을 봤을 때, 귀신의 짓이라 했다. 우리는 여전히 그 노동들을 귀신으로 취급하며 2021년을 맞았다. 노동자는 이름이 있다. 그들의 노동은 귀신놀음이 아니다.

한국노동 기관지 노동과 희망에 게재된 글입니다. http://news.inochong.org/detail.php?number=2893&thread=22r07&fbclid=IwAR3LYyciM4Y2bev1LTRYcGohTPVsk6y6ywSKwcQBi12uh9bEOU5OT9BANPU

[새책]출간 소식

2020년 코로나가 장기화 되면서 이 시대의 학교와 교육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느냐는 주제로 청탁을 몇 건 받았습니다. 학교와 학교밖을 연결하는 일을 2014년부터 해왔고, 학교를 지원하는 교육지원청, 교육부와의 업무협력을 해온 시민단체 책임자이며 전문 집필이 가능한 위치라는 것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대부분의 교육관련 담론은 전문영역의 연구자들이 말하기 마련이죠.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학교와 지역교육청을 둘러싼 우리들과 마을의 이야기입니다. 가장 처음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학교공동체의 역할’에 대한 원고를 썼고, 이 원고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이야기를 민들레에서 만드는 계간 민들레에 ‘마을교육공동체’에 대한 글로 썼습니다.

민들레에서 펴낸 <함께 만드는 마을교육공동체> 민들레선집 3 에는 마을교육공동체의 현실과 방향을 고민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이 책에는 대안교육에서 공교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현장의 마을교육공동체에 대한 필진들의 글이 같이 있습니다. http://aladin.kr/p/nyot5

계간 창비에 실렸던 글은 개고하여 학교 공동체와 마을교육의 유기적 결합에 대해 더 추가했습니다. 창비에서 나온 <코로나 팬데믹과 한국의 길> 은 교육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이야기가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은 전문연구자들이 다수이고 사회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한 내용입니다. http://aladin.kr/p/iyOKQ

교육공동체 벗이 펴낸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는 코로나와 관련된 제 원고중 가장 마지막에 쓴 글입니다. 학교의 본질과 마을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고민을 담았습니다. http://aladin.kr/p/lyO1g

제가 쓴 글들은 어찌 보면 매우 원론적인 내용입니다. 학교는 지식의 전달체가 아니며 공동체를 살아갈 시민을 길러내는 곳이어야 합니다. 학교와 마을은, 정부와 시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협력하여 자본에 대응해야 합니다. 국가는 이전처럼 막강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적은 모두 자본에 깃들어 있습니다. 위기의 시절에 현장에서 느낀 내용을 외부에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특수한 상황이라 유일한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나마 같이 울고 웃으며 고민해왔던 동지들의 이야기가 조금 더 널리 퍼져나가길 바랍니다. 모두들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방향은 함께 더 치열하게 논의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교육부는 새해에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세심한 정책으로 상처받은 교육공동체를 감싸 안길 바랍니다.

[칼럼]집에가자 : 재택근무를 그만두며

한국노총 발행지 <노동과 희망>에 청탁을 받고 기고한 글입니다.

한국노총 노동과희망 바로 가기

 

어릴 적 상상했던 2020년에도 오늘의 풍경이 숨어있었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 화상회의와 화상전화교육, 팔다리가 가늘고 머리통만 커진 인간들.
하늘을 나는 자동차는 없지만, 비대면 업무와 온라인학습은 뜻밖의 바이러스 때문에 앞당겨졌다. 강제 재택근무에 돌입한 사람들은 초반에는 가족들 때문에 집중이 안된다더니, 거리두기 권고가 3주를 넘기자 집중력이 떨어져 업무시간이 늘어지고 출퇴근이 없으니 밤낮없이 일만 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월요일 오전 8시 50분이면 메시지창이 열린다

2005년, 결혼과 임신을 하면서 재택근무를 시작한 나는 2020년 지금까지 재택근무중이다. 가족사업과 작은 회사 두 개 거치면서도 절반은 재택근무를 했다. 독립해서 프리랜서를 거쳐 개인사업자를 낸 지금까지도 굳이 사무실을 얻지 않았다. 사무실 월세도 부담이지만, 대리돌봄이 불가능한 육아문제가 가장 컸다. 아침을 먹고 아이가 학교에 가면 9시부터 거래처들의 업무가 시작된다. 나도 그 시간에 맞춰서 책상에 앉는다. 월요일 오전이 되면 8시 50분, 또는 8시 이전부터 메세지창이 열리기 시작한다. 일을 하기 싫어도 시작해야만 하는 외부의 압박이 온다. 점심시간에도 전화기가 조용하다. 아이가 어릴 때는 ‘일 그만하고 놀자’고 조르기도 했고, 친구들을 우루루 데리고 와서 소란스럽기도 했다. 친구들과 집에서 놀고 있으면 먹을 것만 챙겨준 뒤 신경을 안 써도 되지만 어느 순간 분란이 일어나면 일을 중단하고 일어나 중재도 해야 한다.
사무실이 없으니 회의를 할 때면 항상 내가 상대방의 장소로 찾아갔다.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꽤 든다. 하루에 회의 세 건이면 하루가 몽땅 날아갔다. 작년부터는 이동시간을 아끼자며 온라인 미팅을 하는 팀도 생겼다.

 


▲재택근무를 하는 이하나씨의 책상

 

아이가 잠든 후 반 11시에 다시 하루가 시작된다

재택근무에서 어려운 것은, 업무와 일상의 분리다. 육아 때문에 재택근무를 선택했으니 육아와 살림은 당연히 함께 지고 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순간적인 집중력을 높이는 기능을 발달시켜야만 한다! 아침 9시부터 커피 한 잔 내려 컴퓨터 앞에 앉으면서 업무를 시작하고 가족이 없는 시간엔 절대 집안일을 하지 않았다. 모든 살림살이를 다 뒤로 미룬다. 눈앞에 설거지가 쌓여있는 걸 못 참는다면 재택근무를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전에 집중해서 일을 하고 나면 점심시간엔 뇌가 지치는지 졸음이 쏟아진다. 여기서 재택근무의 장점이 발휘된다. 내 멋대로 점심을 걸러도 되고, 다른 직장인들이 밥 먹고 커피 마시는 시간에 낮잠을 잔다. 오후가 되면 집으로 돌아온 아이가 간식을 내놓으라고 외친다. 아이가 오기 전에 기력을 회복해두어야 늘어지는 오후에 아이도 돌보고 일도 하는 것이다. 저녁 시간에 내가 어질러놓은 것까지 밀린 집안일을 하며 업무로부터 한 번 더 쉰다. 저녁을 해 먹이고 아이를 재운 뒤 다시 책상에 앉는 시간이 밤 11시였다. 혼자 집중해야 할 일이 있으면, 아이가 잠든 이후인 11시부터 하루를 다시 시작했다.

 

다년간의 재택근무를 거치면서 내가 찾은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오전 9시 전에 일어나 샤워하고 머리도 감고, 아침을 먹고 커피도 내리고 언제든지 미팅을 나갈 준비가 된 채로 일을 시작한다. 옷은 굳이 갈아입지 않아도 괜찮다.

2. 오전 9시 이전에는 되도록 컴퓨터를 켜지 않는다. 하루 일정을 정리하거나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본다. SNS도 괜찮다.

3. 업무 관련 장비는 가장 좋은 것으로 쓴다. 장시간 앉아 있게 되고 수시로 야간작업에 돌입하기 때문에 키보드, 마우스, 마우스 패드, 의자는 능력치 내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고른다. 나는 MS의 스컬프트 키보드와 마우스를 쓰고 있는데 의자는 PC방 의자로 바꾸고 싶다.

4. 하루를 마무리 짓는 시간을 정해야 한다. 저녁 7시까지는 어렵더라도 밤 10시라든가. 연장근무는 아무래도 새벽 2시에는 끝낸다거나.
5. 동시에 여러 프로젝트를 혼자 진행한다면 집중해서 한 가지 일을 마치고 의자에서 일어나 다른 걸 한다. 안 그러면 화장실 갈 때 말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점점 의자가 나인지 내가 의자인지 모르는 지경이 된다. 이때 스트레칭을 하면 더 좋겠지만 게으른 자는 자기 성향에 순응하도록 한다.
6. 수시로 수다를 떨 수 있는 절친과 간간히 메신저로 채팅을 하면서 외로움을 달랜다. ‘혼자 일한다는 건 고립되기 쉬운 일이라 절대적으로 SNS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재택근무의 함정은 끊임없는 셀프착취

재택근무의 장단점을 상당히 파악한 지금이 이르러서야, 나는 다음 달에 사무실을 얻기로 결정했다. 집안에서 내가 차지하는 공간이 점점 넓어져서 가족들이 앉을 자리도 없어졌다. 정리정돈을 못 하는 성향이라 온 집안이 내 업무의 잔해들로 가득하다. 가정을 지키며 돈도 번다는 유세를 떨 수 있으나 집안의 고요한 폭군의 입지에 오른다. 당사자인 나는 끝도 없이 24시간 근무체제를 유지하게 된다. 낮에 자고 밤에 일해도 되지만, 습관이 되면 회의도 가기 싫어진다.

 

재택근무는 끊임없는 셀프착취에 빠질 수 있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출퇴근길을 오가며 보게 되는 도시의 풍경과 사람들의 표정을 모르고도 랜선으로만 일을 하며 업무에만 몰입할 수도 있다. 시간을 아끼려 화상회의를 하고 업무공간을 벗어나지 않으며 효율을 잔뜩 높일 수도 있다. 아파트 단지안의 빈집의 대낮은 산사만큼 고요하다.

 

사람을 만나는 게 공포가 되는 시대에, 다시 밖으로 나가겠다는 결단을 한 것은 사람을 부딪히고 싶어서다. 누군가 나의 공간에 편하게 찾아오고 그에게 커피를 내려주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나는 시간, 모르는 사람들이 밥을 벌기 위해 뛰어다니는 모습을 창가에 서서 지켜보는 시간이 필요해졌다. 거슬리는 옆 사무실의 큰 소리나, 공동공간을 두고 일어나는 자잘한 신경전도 적당한 자극과 활기가 될 지도 모른다. 침체된 채 저녁도 새벽도 없는 자기노예화에서 벗어나, 매일 돌아갈 곳, 매일 그리운 곳을 두고 ‘집에 가자’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어쨌거나 모든 일은 사람이 만나야 이루어지니 말이다.

 

#재택근무 #업무와일상의분리 #셀프착취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명랑할매

https://www.vop.co.kr/A00001466408.html

2020년 2월 7일, 민중의소리 발행

서울의 한복판에 있는 복지관이었다.

생애사쓰기를 하러 온 노인들이 스무 명 넘게 앉았다. 각자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이미 있었다. 연금생활자가 많았다. 먹고 사는 데 큰 걱정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노후가 편안한 사람들은 대부분 공직자 출신이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다수 그랬다. 직장을 다니던 사람들은 중간에 IMF를 비껴가지 못했다. 장사하던 사람들은 더했다. 어떻게든 IMF 이전에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은 거센 풍파에 밀려 다 한 번씩 쓰러졌다.

복지관의 위치나 평소 이용자의 소득수준에 따라 생애사쓰기 프로그램에 모이는 사람들도 달라진다. 사회복지사가 일일이 연락해서 프로그램 설명도 잘 듣지 못한 채로 교실에 와서 앉아 있는 경우는 저소득층이 많지만, 자발적으로 모집공고를 보고 오는 사람들은 경제적 형편이 낫다. 저임금 고노동에 몰입해서 하루라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적다는 말이다. 아껴 쓰면 큰 문제 없이 산다는 것이고, 자녀들이 일정한 소득을 유지해서 부양의무에서 벗어난 이들이기도 하다. 이 복지관은 프로그램 공고를 보고 자발적으로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아껴 쓰고 근면하게 일해 중산층에 진입한 이들이다. 이들이 처음 공기관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는 매번 생활비가 모자라 빚을 얻어 쓸 정도로 공무원 급여가 형편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퇴직할 때쯤에는 모든 상황이 좋아졌다. 정확한 신분보장이 되니 은행대출도 쉬웠고 정보도 빨리 얻었고 따박따박 고정적인 급여가 나오니 맘만 먹으면 집은 살 수 있었다. 저항하지 않아도, 어쩌면 저항하지 않아야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니 보수적인 생활태도를 가졌다.

계속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명랑할매” 읽기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겨울 빨래

https://www.vop.co.kr/A00001461784.html

2020년 1월 19일 민중의소리 발행

그해 겨울, 생애사쓰기 수업을 했던 한 복지관에서 연락이 왔다. 복지관 이용자 중 복지지원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데 면담이 잘 안된다면서 면담을 진행해서 글로 정리해달라는 것이었다. 약간 의외의 일이었다. 구술생애사기록정도로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흔쾌히 응했다. 다섯 명의 사람을 2주에 걸쳐 여러 번 만났다.

후드티를 뒤집어쓴 한 여성이 면담 장소인 작은 회의실로 들어왔다. 면담자 정보를 보니 나이는 40대 후반이었다. 내가 만날 사람들 중에 가장 젊은 사람이었다. 가난이 지워지지 않는 눈물자국처럼 옷섶에 묻어있었다. 이 사람은 깍지 낀 손을 계속 조물락거리며 바빠서 나오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빨래를 하고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겨울철에 빨래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툭툭 끊어지는 문장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수도가 손 닿는데에 있는 게 아니고, 저 위에 있으니까,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꼭지를 열었다 잠갔다 해야되거든요. 쪼그려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물 다시 틀고, 잠그고, 그나마 수도가 안 얼어서 다행이지. 밖이 추우니까. 세탁기 하나 있으면, 좋을 텐데. 세탁기 들어갈 자리도 없고.”

겨울 수도
겨울 수도ⓒpixabay

서울시내 한복판, 재개발이 임박한 그 마을에는 수십 채의 집이 남아있었다. 어떤 집들의 대문에는 “철거”라는 글자가 붉은 스프레이로 쓰여 있었다. 대부분 마을을 떠났고,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가스보일러가 있지만 빨래를 하는 수도에는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아파트 같은 데는 좋지요? 뜨거운 물도 사시사철 나오고. 보일러 조금만 때도 엄청 따뜻하다던데. 임대 간 사람들이 얘기하더라고요.”

백 씨. 이 사람은 가난했다. 아들이 둘 있는데 둘 다 지병이 있었다. 백씨는 두 아들의 병이 질환인지 장애인지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걸핏하면 쓰러지는 병이라고만 했다. 뇌전증 같은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게 뭐냐고 되물어서, 간질을 요즘은 뇌전증이라고 한다고 말해주었는데 그건 아니라고 했다. 아무튼 걸핏하면 쓰러진다고만 했다. 남편은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이 같은 병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어 집을 떠났다. 백 씨의 말에 따르면,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남편이 떠난 이후로 생계를 책임지고 육아와 간병을 홀로 해왔다. 결혼 전에는 직장도 다녔고, 친구들과 어울려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시고 춤추러도 가는 보통의 20대를 보냈다. 백씨는 아픈 두 아들의 엄마로 거듭나면서 세상과 단절되었다. 큰 아들은 스무 살이 넘었고, 작은 아들은 그때 고3이었는데 작은 아들은 취업을 할 수 있는 정도라서 직장을 얻었다고 좋아했다.

세 번을 만나는 동안 백 씨는 계속 너무 힘들다는 말을 반복했다. 자기는 정말 지쳤고 더 이상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제는 자기도 늙었는지 온몸이 아프고 쑤셔서 무슨 일도 할 수 없다고. 공공근로도 나가봤지만 아들만 남기고 집을 비울 수가 없다고.

두 시간이나 길게 무슨 할 말이 있냐고 말했던 백 씨는 매번 두 시간을 훌쩍 넘기고 조금 더 이야기를 하다가 갔다. 나는 백 씨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복지관에 넘겨주었다. 복지관에서는 백 씨가 필요한 복지혜택 중에 받을 수 있는 것을 찾으려고 했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냐고 반문했던 백 씨는 만나는 시간 내내 때론 즐겁게 때론 비통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겨울 빨래
겨울 빨래ⓒpixabay

즐거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할 때는 밝은 표정이 되었다. 자기가 살던 고향의 빛 좋던 들판과 부모님이 자기를 돌봤던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는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는 아이였다고 했다. 말 하는 것 자체를 꺼리던 백 씨는 ‘누가 내 이야기를 이렇게 들어주나’ 라는 말도 했다. 기득권이 될수록 자기 이야기를 할 기회가 많아진다. 사회와 고립되고 단절될수록 자기 이야기를 할 기회가 줄어든다. 자기 삶을 쓰는 일도 무엇이든 더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하다. 더 많이 배웠거나 더 많은 기득권을 가질수록 자기 삶을 돌아보고 늘어놓을 기회가 더 많다. 백 씨는 그렇지 못한 사람 중 하나였다. 말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말하는 방법도 잊는다. 수십 번 자기 주장을 말해본 사람은 점점 더 잘 말하게 된다. 세상에 펼쳐본 적 없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을 다잡는다.

어른이 되어도, 어미가 되어도 수십 번 마음을 고쳐먹기 마련이다. 조금 더 잘 살아야지, 조금 더 잘 해봐야지, 오늘부터는 밥을 건강하게 차려먹어야지, 아이에게 화내지 말아야지.

얼음이 얼지 않고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이 지나간다. 세탁기에서 편하게 꺼낸 빨래를 널며 손가락이 시릴 때 백 씨를 떠올린다.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을까. 나를 만났을 때 살던 집보다 빨래하기 편한 곳으로 이사를 갔으면 내 마음이 편하겠다.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팔자 때문이 아니라고

https://www.vop.co.kr/A00001458067.html

2019년 12월 31일 민중의 소리 발행

올해도 생애사쓰기 수업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주로 공공기관에서 오전에 수업을 열고 노인대상으로 수강생을 모집한다. 어떤 기관은 65세 이상으로 한정하기도 하고 다른 프로그램에 참여한 노인이용자들에게 모집공고를 주로 알리기도 한다. 굳이 노인으로 한정할 것은 없지만 여러 기관에서 선호하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대체로 한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는 감동이 있다. 특히 자기 삶을 글로 정리하겠다고 모이는 사람들의 특성이기도 하다. 떳떳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이라야 자기 삶을 글로 써보겠다는 욕심을 갖게 된다. 글도 쓰고 발표도 하고 나중에 책자로도 묶어낸다는 프로그램 설명이 있으니 대부분 공개할 자신이 있는 사람들만 모이게 되는 것이다.

어떤 기관에서는 글로 쓸 여력이 안 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모아놓기도 한다. 그런 경우엔 수업시간에 편하게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게 하고 그걸 받아 적어 글로 변환해주기도 한다. 교육프로그램에 구술사기록의 원칙을 철저하게 적용하지는 않는다. 내가 목적하는 바는 자기 목소리가 담긴 이야기를 책자에 넣고 그 과정을 사람들이 기억하고 결과물을 보존하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기관이 모두 이들의 이야기를 소중하게 다루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경험했던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가 종이에 새겨진 것을 보며 귀하게 여긴다.

서울 중구 정동길에서 한 어르신이 폐지 담은 리어카 끌고 이동하는 길에 은행나무 낙엽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서울 중구 정동길에서 한 어르신이 폐지 담은 리어카 끌고 이동하는 길에 은행나무 낙엽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김철수 기자

길게는 석 달 정도 자기 삶을 계속 반추해가며 기록해 나가는 작업은 쉽지 않다. 중간에 연락도 없이 안 나오는 경우가 대다수다. 초반에 모집한 사람들에 비해 30%정도가 남으면 성공인 셈이다. 서른 명 넘게 모집해도 많이 남으면 열 명 남짓이고, 대부분 그보다 더 적은 숫자가 마지막까지 원고를 써서 제출한다. 60대를 노인이라 말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적어도 70대가 넘어야 노인이라 할 수 있는데, 직접 글을 쓰고 자기 글을 고쳐오고 사람들 앞에서 낭독을 할 수 있는 80대들이 많이 늘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전쟁을 겪고 가난을 헤쳐온 사람들은 어린 시절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억울하게 죽은 가족을 잊고 있다가 다시 떠올리기도 하면서 자기 삶의 ‘기구한 운명’을 탓하기도 한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가 얼마나 구구절절한지 한숨을 쉬면서 스스로의 ‘팔자가 기구해서’, 또는 자기 부모의 ‘팔자가 사나워서’라고 서술한다. 자기 삶을 되새길 때는 대한민국의 연대표에 자기 삶을 채워나가는 숙제를 낸다. 해방, 전쟁, 1.4후퇴, 4.19혁명, 이승만하야, 5.16 군사쿠데타를 말하다 보면 한 개인이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알아차리게 된다. 사회적 사건 옆에 가족과 개인의 서사를 보태 적다 보면 팔자 때문이라기보다 나도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느끼면서, 정치적 사회적 사건이 나의 사생활을 뒤틀기도 한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의도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여러 사안들에 대해서 묻는다.

일제강점기를 거친 사람들이 기억하는 해방은 학교에서 배운 것과 달랐다. 태어났을 때 이미 일제가 지배하고 있었고, 집안에 딱히 민족과 일제를 설명할 사람이 없으면 당연히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그들에게 해방은 ‘국가의 패망’이었다. 어린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에는 일본의 패전을 슬퍼하며 울던 사람들과 두 팔을 번쩍 치켜들며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이 공존했다. 그때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을 뿐이다.

박복한 팔자 때문이라고 말하면 이야기는 쉬워질 것이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개인의 잘못이 아니고 당신이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여성들의 경우 바람난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가 항상 있었다. 어떤 수업을 들어가도 한 명 이상 같고도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멀쩡히 살아있는 자기 어머니를 두고 새어머니를 얻어 식까지 올린 아버지도 있고 오랫동안 두 집 살림을 하거나, 아예 집을 나가버리는 경우도 있다.

박복한 팔자 때문이라고 말하면 이야기는 쉬워질 것이다. 인과관계를 찾을 필요도 없고 그저 그런 운명에 의해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던 일들을 설명하기 쉬워진다. 박복한 팔자는 한 사람에게 귀착되고 그 사람을 원망하게 된다. 이유는 없다. 팔자때문이니까.

서울 용산구 쪽방촌에서 한 노인이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
서울 용산구 쪽방촌에서 한 노인이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뉴시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들이 겪어왔던 일들은 우리가 같은 땅에서 같은 제도 아래 같은 역사를 겪었기에 파생된 일들이다. 한 나라에서 같이 사는 건 운명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같은 시험을 보고 같은 교육을 받고 같은 재난을 겪어서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있듯이, 같이 보고 겪은 것들 때문에 인생이 뒤집어지기도 한다. 내가 저지른 게 아닌데 내가 피해를 본 일들이 있다면 그건 개인의 잘못이 아니고 당신이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제 욕심을 채우는데 눈이 먼 권력자들의 성급한 결정때문은 아니었는지 돌아보자고 말하고 싶었다. 어쩌면 이 말은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오래된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 모든 일들이 다 나 때문은 아니라고.

올해 만난 당신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나에게 나눠주면서, 들어줘서 고맙다고 해준 덕에 나 역시도 잘 버텼다. 건강이 허락될 때 살아온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다던 당신들이 조금만 더 건강하면 좋겠다. 노인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야 할 때마다 서글펐다. 당신들의 삶은 충분히 반짝이고, 이미 넘치도록 아름답다고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모두 고마웠다고.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좋은 나라 만나서

2019년 12월 8일 민중의소리 발행

https://www.vop.co.kr/A00001452759.html

 

내 고향은 이북의 돌산입니다. 황해도 은률군 서부면입니다. 사홍선 동네라고 했습니다. 구월산 밑에 있습니다. 나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습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하라 하니, 일제 때 이야기부터 해야겠습니다. 열 일고여덟 젊은 시절에 영장이 나왔습니다. 그때는 일본이 큰 전쟁을 할 때라 젊은 사람들에게 모두 영장이 나왔습니다. 근로정신대라고 전쟁터에 일을 하러 가야 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위안부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여자들을 데려다가 몹쓸 짓을 한다고요. 끌려가면 죽을지 살지 알 수 없는 일이니 무조건 피해야 했습니다. 빨리 결혼을 하면 안 끌려갈 수 있다들 했습니다. 동네마다 혼처를 찾느라 난리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아무데나 그저 빈 자리가 있으면 무조건 보내야 한다고 성화였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성급하게 결혼시켰어요.

시집은 피목촌이라는 동네였습니다. 시댁은 그 일대에서 아주 잘 사는 집이었습니다. 그때는 100칸짜리 집을 지으면 거만하다 해서 아흔아홉 칸을 짓고 살지 않았습니까? 시댁이 그런 집이었어요. 그런데 가보니 신랑이, 몸의 반을 못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돈 많은 집이니 전답은 다 소작을 주고 나는 할 일이 없었어요. 농사도 안 짓고 할 일도 없었어요. 밥 해주는 사람, 빨래 해주는 사람 다 있었어요.

가서 보니 남편은 몸이 그렇지만 돈은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그리운 것도 없고 아쉬운 것도 없었습니다. 시부모님은 당시만 해도 아들이 장가를 못 들 것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들어오니 나름대로 흡족하셨던 모양입니다. 나는 이것도 내 정해진 운명이라 생각하고 정붙이고 살며 아이도 낳았습니다.

남편은 몸이 불편했으나 풍족했던 시댁
해방되니 모두 일꾼들의 것이 되고 무일푼 신세

일제 강점기가 지나니 시대가 바뀌더군요. 그 많던 전답이 모두 일하던 일꾼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일푼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 전쟁이 터졌습니다. 인민군들이 들어와 집을 자기들 사무실처럼 썼어요. 우리를 알몸으로 내쫓아버렸습니다. 거처가 마땅치 않고 나는 젊으니 시댁 어른들이 친정에라도 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애들 둘을 끌고 돌아다니려니 길이 막막했습니다.

우리 엄마는 날 낳고 돌아가셨고 우리 형제들에겐 계모가 있었습니다. 친정을 가도 안 반가워하겠지만 일단 언니를 찾아가봤습니다. 동네가 홀라당 비어 있었습니다. 폭격 맞아 죽었는지 어쨌는지 집은 빈집이 되었고 식구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빈집에 몸을 쓰지 못하는 남편과 애들 둘을 데리고 앉아 있는데 계속 비행기는 와글와글 돌아다니고 총소리 나고 폭격이 이어지고 살 수가 없었습니다. 언니가 없는 집에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디다. 그저 시간이 가길 기다린 건지, 누가 오길 기다린 건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가족들<br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가족들 ⓒ자료사진

아군과 인민군이 밤마다 싸우고 사람들은 징집을 당하지 않으려고 도망가다가 잡히기도 했습니다. 해가 지나고 봄이 되었습니다. 언니도 돌아오고 친정에서 그럭저럭 전쟁을 피하며 버티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시누이를 데리고 우리 친정으로 왔습니다. 시댁이 있는 동네는 더 이상 살 수가 없게 되었다고만 했습니다. 어느 날 시아버지가 동리까지 왔습니다. 아버님은 시어머니와 시누이를 확인하더니 여러 말 할 거 없고 어서 길을 떠나자고 했습니다. ‘이래도 고생하고 저래도 고생하니 가다 죽더라도 가자’고 하셔서 다 같이 피난길을 나섰습니다. 한참을 가다 보니 섬으로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친정 오빠가 신천에 살았는데 피란길이 멀어 그 집에 들렀습니다.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헛간에 들어가 보니 쌀이 좀 있어서 속곳 바지에 쌀을 싸고 남은 옷가지에 마구잡이로 쌌습니다. 식구들이 다 이고 지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시아버지가 이불 보따리를 이고 시어머니는 우리 애들이랑 시누를 데리고 바닷가로 갔습니다. 솥단지 밥단지 숟가락은 어찌 가져가요 물어보니 아버지가 네가 쌀만 맡아라 해서 나는 쌀만 지고 시어머니는 요만한 솥단지하고 수저만 들고 애들 건사하며 갔어요.

바닷가에 도착하니 피난민들이 바글바글했어요. 그때는 기계로 가는 배가 없고 풍선(風船)이 20여척 서 있는데 선착장에 가득가득 짐이 실려 있었습니다. “이 배가 어디로 가나요?” 물으니 전부 다 이남으로 갈 거라고 했습니다. 물이 들어오면 배가 나갈 건데 파도가 잔잔하면 모두 다 순탄하게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피난민들이 모두 그 배를 타고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동네는 산이 옴폭하고 그 산 아래에 바다를 바라보는 집들이 쭉 서 있었어요. 집들은 전부 다 비어 있었습니다. 배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총소리가 나고 갑자기 난리가 났습니다. 시아버지가 ‘물이 들어오면 섬으로 건너가야 한다. 애들하고 니 엄마하고 어떻게든 갈 테니 쌀 이고 먼저 가라’고 하셨어요. 여기저기서 막 쏴대니 배가 못 들어오는 겁니다. 바다에 있는 작은 섬으로 가야 해요. 물이 막 들어차기 시작해서 금방 배가 올 거 같았어요. 어디서 누가 총을 쏘고 난리가 났어요. 어디서 누가 쏘는지 모릅니다.

여기저기서 총소리가 나고 사람들도 막 쓰러지는 거 같은데 나는 쌀자루 이고 차오르는 물을 따라 나가는데 물이 점점 차올라요. 머리에 이고 있던 쌀자루도 너무 무겁고 도저히 더 갈 수가 없었어요. 갯바위 위에 쌀을 내려놓고 사람 오기를 기다리는데, 사람들이 와야 말이죠.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안 오는 거예요.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죽을 판이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판이라.

바위에 앉아 한참을 기다리는데 물이 다시 쭉 빠져서 쌀을 끌고 다시 육지로 가려고. 중간에 작은 섬에 사람들 몇 명이 바글바글 모여 있더라고요. 거길 들어가서는 식구를 잃어버렸다 얘기를 하니 쌀은 어따 뒀냐 물어서 나도 모르겠다, 하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젖 먹이던 아이가 있어서 젖은 불어오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물 들어오면 식구들이 오려나 내내 기다리는데 저 멀리 서 있는 배가 활활 불에 타고. 쌀이고 뭐고 다 실어놨는데 다 불타버렸어요. 이제 다 죽었구나 싶었습니다.

전쟁이 나고 친정 언니 집을 거쳐 피난길에 들린 신천 오빠집
바닷가 총격에 온 가족을 잃고 홀로 남으로
질긴 목숨, 그래도 살아지더이다

사람 목숨이 참 질기다고. 그때 죽을 것 같았는데 안 죽어집디다. 기다려도 아무도 안 오는데. 새끼 둘 다 내버렸지, 시아버지 시어머니 다 어디 갔는지 모르지. 남편도 모르고. 아무도 안 오고. 그렇게 바닷물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하는데 아무도 안 오고. 그날부터 내가 혼자가 되었습니다.

서울 용산구 쪽방촌에서 한 노인이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
서울 용산구 쪽방촌에서 한 노인이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뉴시스

2년 전, 서울에서 만난 김 모 노인은 노인자서전 쓰기 수업을 하러 온 강사라 하니 내 손을 잡고 앉아 보라더니 이 이야기를 쉬지 않고 한 번에 쏟아냈다. 그해 그 해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미군 배를 타고 백령도에 당도했다. 백령도에서 다시 배를 갈아타라기에 그대로 따랐다. 군산에 도착하자 트럭이 여러 대 왔다. 피난민들이 살 곳으로 데려다준다는 말을 듣고 트럭에 올랐다. 트럭은 부안에서 사람들을 내려놓고 떠났다. 자식 둘과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부안에 내린 젊었던 김 노인에게 누군가 방을 한 칸 내주었다. 김 노인은 거기서 혼자가 되었다. 피난민들에게 준다며 어디선가 된장과 고추장을 걷어다 주었다. 남의 집 살이를 하며 끼니를 때웠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아이의 아버지는 고향에 따로 부인이 있었고 결국 고향의 부인에게도 돌아갔다. 김 노인은 호적을 만들지 못한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김 노인은 그 이후의 이야기는 아주 짧게 얘기했다.

서부역 뒤 기찻길에 앉아 있으면 서울역으로 들어가는 기차에서 배추 겉잎을 밖으로 던져버렸다. 버린 배춧잎들을 모아 바구니에 담아 머리에 이고 식당에 가서 팔면 잘 받아주었다. 방 하나 얻고 연탄 몇 장 사서 겨울을 견디고, 배춧잎을 주워 팔다가 배추를 받아 팔게 되니 형편이 좋아졌다고 했다. 그 사이 아이 둘은 ‘알아서’ 크고, 김 노인은 ‘세월이 좋아’ 수급자가 되었다. 김 노인은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흡족해했다. 사는 게 쉽지 않고 고생도 많이 해서 더 살고 싶은 욕심은 없지만 ‘나라에서 살라고 해주니’ 가는 날까지 감사하며 살겠다고 했다.

김노인이 말한 피난길의 이야기는 한국전쟁사에 남아있는 황해도 신천 사건으로 추정한다. 김노인에게 그 사건은 모든 것을 잃고 혼자 낯선 곳에서 살아가야 했던 일생의 큰 사건일 뿐, 어떤 이유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것도 평가하지 않는 것을 들으며 전쟁이란 그런 것이겠다고 짐작했다. 아흔 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작은 임대아파트를 얻게 되어 나라가 고맙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어떤 감정도 쉽게 표현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의 앞에서는.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종로 5가, 카바이드 불빛

https://www.vop.co.kr/A00001449361.html

2019년 11월 20일, 민중의소리 발행

남편은 성실했다. 매달 따박따박 받아오는 봉급으로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차츰 살림을 늘려나갔다. 살림을 늘린다는 것은 어제까지 쓰던 낡은 냄비를 버리고 새 냄비를 사는 것, 그 중에서도 조금 더 좋은 것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성실하게 매일 매일 좋은 대우를 받으며 직장을 다니던 남편이 듬직했다.

어느 날 남편이 회사에서 받는 봉급보다 더 벌 수 있으니 사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성실한 거로는 누구 뒤지지 않는 사람이다. 성실하고 부지런하면 무엇인들 못하랴. 남편이 잘 해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 남편이 차린 공장과 어린 아이들과 같이 살던 조그만 집까지 모두 은행으로 넘어갔다. 남편이 이 고비를 넘기면 된다고 할 때, 나는 이웃과 친구들을 찾아 푼돈이라도 꾸어 남편에게 주었다. 금방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점점 들어가는 돈만 늘어났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집을 비워줘야 했는데 빚이 있으니 멀리 갈 수도 없었다. 살면서 갚겠노라 약속하고 바로 옆 동네로 이사했다. 빚을 꿔준 사람들과 연락도 끊지 않았다. 누군가는 와서 욕도 하고 화도 냈지만 다 내가 돈을 빌리고 약속한 날짜에 갚지 못했으니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계절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편은 집에 드러누워 일어나지도 않았다. 미안하다고만 했다. 성실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이었다. 나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답답했다. 내가 무지해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무슨 도움을 줄 수는 없을까, 아무 것도 알지 못하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무작정 버스를 탔다. 버스는 종로 5가를 지나갔다. 해가 진 지 몇 시간이 지났다. 어둑한 밤거리에 다들 집에 돌아갈 법도 한데 카바이드 불빛이 한데 잔뜩 모여 있었다. 나도 모르게 버스에서 내려 불빛을 따라갔다.

겨울 포장마차 노점 불빛(자료사진)
겨울 포장마차 노점 불빛(자료사진)ⓒ뉴시스

카바이드 불빛은 출항을 앞둔 오징어잡이배처럼 빛나고 있었다. 불빛은 수 십대의 리어카 위에 있었다. 리어카 위에는 국수, 오뎅, 꼼장어 같은 게 놓여 있었다. 장사를 나가는 사람들이 한군데 모여 있었던 것이다.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부터 애기 업은 젊은 여자도 있었다. 그들은 리어카 위에 뭔가를 척척 올리더니 하나씩 대열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는데 가슴이 콩닥거렸다.

“아저씨, 나도 장사하고 싶어요. 아저씨 나 좀 알려줄 수 있어요?”
“남편이 죽었어요?”

아. 장사를 나가는구나. 내가 잠들던 시간에 이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하루를 시작하는구나. 잠도 제대로 못자고 다음 날 해질 무렵 어제 갔던 장소를 다시 찾아갔다. 한 남자가 제일 커다란 리어카에 지갑과 잡화를 올려두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먼데서 그 남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그 남자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물건 살 폼도 아닌데 리어카 앞에 버티고 있으니 그 남자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그 남자에게 말했다.

“아저씨, 나도 장사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돼요? 아저씨 나 좀 알려줄 수 있어요? 나 돈 벌어본 적 없어요.”

남자는 나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물었다. “남편이 죽었어요?”

여기까지 적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수년 전 성업하던 식당을 접었다. 식당이 있던 건물이 경매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지금은 복지관에서 영어도 배우고 컴퓨터도 배우고 미처 졸업하지 못한 학교의 졸업자격 시험도 통과했다. 칠순을 넘기고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몇 차시였던가. 생애사쓰기 수업 중에 카바이드 불빛을 발견한 순간의 이야기를 써왔다. 써 온 글을 내가 대신 읽었다.

“밤 9시에 혼자 버스를 탔다. 가다보니 종로 5가였다.” 라는 문장을 읽고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밤에 일 없이 혼자 버스를 탔을 때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다들 아시죠? 이게 무슨 기분인지.” 라고 물었고, 칠순을 넘긴 수업 참가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가 되었든 다른 곳으로 나를 데려다 줄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그 위에 거침없이 올라타고 싶은 마음, 그 신산함에 대하여, 동의를 구했다.

남편이 죽지 않았으나, 돈을 벌지 못하는 남편은 마치 죽은 것과 다름없는 것처럼 여겨졌던 시절. 이야기의 주인공은 노점상을 시작한다. 누워서 꼼짝을 하지 못했던 남편은 아마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우울증을 앓고 있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노점상을 거치다 노점상 철거 투쟁에도 나섰다. 정부가 마구잡이로 노점상들을 때려 부쉈고 데모도 해봤다던 이야기를 짧게 언급하고 그 시절의 이야기는 쓰지 않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지인의 도움으로 식당을 열었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는 사명감으로 살았다. 식당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자식을 유학까지 보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밤 12시에 일이 끝나는 고된 노동을 십 수 년 겪고 비로소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구청의 철거 단속에 항의하는 노점상(자료사진)
구청의 철거 단속에 항의하는 노점상(자료사진)ⓒ민중의소리

카바이드 불빛에 홀려 장사를 시작한 사람은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졸기도 했고 바닥만 보면 눕고 싶었다고 적었다. 그 정도의 고된 노동이 있어야, 나이 먹어 복지관에 다니며 여생을 즐길 수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 이 사람은 경매로 넘어간 건물주 때문에 권리금 한 푼도 못 받고 보증금만 건져 가족을 먹여 살린 식당을 접었다. 후회는 없다고 했다.

나는 이 사람의 노동이 과연 온당한 대가를 받았던 것인지 따져보고 싶었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뼈를 깎는 고통이 없이 평온한 노후를 얻을 수 있을까. 카바이드 불빛에 생계의 희망을 보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도 가히 이해할만 했다.

[이하나의 한 사람 이야기] 내가 대굴빡부터 얘기하께

2019년 11월 14일. 민중의 소리 발행

https://www.vop.co.kr/A00001446084.html

“나는 내 이름 내가 지었지.
피란민으로 남한에 내려왔거든. 내려와서 동네 이장이 호구조사 나왔을 때, 이름이 뭐냐고 묻길래, 저는 이름이 김명자입니다. 이렇게 대답했어. 그 이름이 맘에 들었거든. 명자. 아끼꼬. 원래 어릴 때는 우리 아버지가 독자인데, 우리 할머니가 독자가 큰 딸을 낳아놓으니 이쁘다면서 이쁜아 이쁜아 이렇게 불렀지. 그래서 그게 그냥 이름이 됐어. 다른 이름이 없었던 건데, 호적에다가 이쁜이라고 올릴 수는 없잖아. 그래서 내가 나는 이름이 김명자요, 라고 한 거야.

자, 내가 대굴빡부터 얘기하께잉?

먹고 살기 힘들어서 우리 할머니는 지금 내 나이만큼 되었을 때야.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딸을 일곱을 낳았다고. 내가 맏딸이고. 할머니까지 해서 우리 식구가 모두 다 남만주로 갔어. 거기 가서 딸을 하나 더 낳았지. 그래서 우리 집에는 딸이 여덟이 됐어. 나하고 밑에 동생 셋은 이름이 있는데, 나머지는 이름이 없어. 딸그만이, 딸그뿐이, 뭐 그랬어.

그 당시에 재수 좋은 사람은 헤이타산 끌려가고 재수 나쁜 사람은 정신대로 끌려갔어. 정신대 알아? 내가 그때 열여섯 살 먹었는데, 열여섯 살 먹어서 결혼을 하면 안 잡아간다 하길래, 그때 우리 살던 집 근처에 스물여섯 먹은 총각이 혼자 와서 살드라 이거야. 그래서 그놈하고 결혼을 했지. 그게 우리 영감이여.

일본놈이 언제 손을 들었냐 하면 음력으로 7월 초이레 12시였어. 중국에서, 몽고에서, 만주에서 일본놈 하고 미국놈 하고 싸움을 했어. 미국놈이 이기고 일본놈이 졌지. 그때는 중국에서 만주족들이니 몽고사람들이 우리를 막 창으로 찔러 죽여버린다고 해. 무서워서 우리는 너무 무서워서 거기서 살 수가 없어. 소련놈이 이북에서 정치한다고 하고, 미국놈은 이남을 정치한다고 해. 그래서 거기서 낳은 아들을 데리고 이제 내려오는데 겨울을 내내 걸어서 여덟 달을 걸어서 내려왔어. 내려오는 길에 너무 추우니까 아들이 얼어버렸어. 서울에 도착했는데 아들이 얼어 죽어버렸어. 그래서 남대문에 죽은 거 버리고.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가족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가족들ⓒ자료사진

그리고 그 담에 임신을 해서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이 일흔 넷이여 시방. 그 아이를 지 아부지가 딱 짊어지고 내려왔다고. 일본놈들이 면이란 면은 다 걷어가서 솜도 없고 이불도 없어. 여름옷도 없고. 그래서 홑이불 뜯어가지고 묶어서 애 아부지가 그 딸을 업고 내려왔다고. 그게 지금 일흔 넷이여.

여덟 달을 빌어먹으면서 내려오는데 한 번은 어디를 걸식을 하러 갔어. 밥을 뜩뜩 긁어서 밥풀만 줘. 그때는 양은그릇도 없고 다 투가리 들고 다녔어. 우리 밥 좀 주시오, 했더니 우리도 점심이 얼마 없응게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오, 하는 소리를 듣고 뒤로 돌아서는데 눈물이 비 오듯 하더라고. 날은 추워서 강가에서 바들바들 떨고. 그때는 우리 아들이 아직 안 죽었어. 밥을 얻어먹으면 한 숟갈, 두 숟갈 뜯어서 먹이고, 그래가지고 그 아들을 업고 내려왔거든.

여덟 달을 걸어서 내려왔어. 빌어먹으면서 내려왔어. 걸어서 여덟 달을 빌어먹으면서 내려왔어. 아들은 얼어서 죽어버리고. 죽은 거 남대문에 내다 버리고. 애 아부지도 내려오다가 얼어버려서 내려와서는 죽어버리고. 오는 데 추웅게 죽어버리더라고. 그때 내가 서른셋이여. 여태까지 내가 혼자 살았어.”

지금으로부터 6년 전, 한 복지관에서 만난 노인이다. 을축년 소띠 1925년생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총기 있었다. 남만주에서 내려와 서울에 자리 잡았던 주소도 줄줄 읊었다. 첫 수업때 아들이 죽은 이야기를 했다. 황해도에서 태어났다는 김명자옹은 먹고 살기 힘들어 남만주로 이주했다가 해방 이후 전쟁 즈음에 서울로 내려온 것 같았다. 말이 매우 빨랐고, 알아듣기 어려운 단어를 섞어 말했다. 변형된 일본어가 곳곳에서 튀어나왔고 나이 탓에 발음이 어눌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김명자옹은 첫 수업이후로 다섯 번을 더 만났다. 매번 수업이 끝날 때마다 나를 잡았다.

“선생님, 내 얘기 좀 들어봐. 내가 대굴빡부터 얘기하께”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항상 같았다. 남만주에서 추운 겨울을 견디며 여덟 달을 걸식을 하며 걸어 내려왔다. 남대문에 도착하니 등에 업은 두 살배기 아들이 얼어 죽었다. 남대문에 아기 시체가 쌓여있었다. 피난 내려오며 죽은 아이들의 시체를 모아두었더라. 나도 거기다 아기를 던졌다. 묻어주지도 못했다.

아들의 죽음에서 멈춘 김명자옹의 삶
노인은 얼마나 많이 죽은 아들의 이야기를 했을까

내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담당복지사를 붙잡았다. “선상님, 내 얘기 좀 들어봐. 내가 대굴빡부터 얘기하께”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같았다. 구체적으로 상상하면 끔찍하고 처절해서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얘기였다. 매주 같은 시간에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사뭇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노인의 손을 잡았으나 감정에 휩싸이지 않으려고 더러 마음의 귀를 막았다.

2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주최로 열린 세월호참사 전면 재수사, 국민고소고발인대회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눈물을 흘리고 있다.. 2019.11.02
2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주최로 열린 세월호참사 전면 재수사, 국민고소고발인대회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눈물을 흘리고 있다.. 2019.11.02ⓒ김철수 기자

노인은 얼마나 많이 죽은 아들의 이야기를 했을까. 자기 옛 주소까지 기억하는 총명한 사람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손을 붙잡고, 처음부터 얘기한다는 것이 항상 남만주에서 걸어 내려와 등에 업은 아이가 죽은 것이었다. 그 사람의 생애 처음은 남만주가 아니었고, 아이가 죽은 일도 그 사람의 삶의 첫 장면이 아니었는데, 김명자옹의 처음은 남만주에서 걸어 내려와 아이가 죽었고, 그 아이를 묻어주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어쩌면 그게 김명자옹에게는 삶의 전부였을 것이다.

상실은 사람을 멈추게 한다. 김명자옹은 묻어주지도 못한 얼어 죽은 아들 이후의 삶을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때 죽지 않은 딸이 일흔이 넘었다는 것 외에는.

아이들을 잃고 난 다음엔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누군가 애써 잡아끈다고 그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이들의 죽음은 그 무엇보다 무고하기에, 그 슬픔도 대책이 없다. 태연하게 “명복을 빈다”라고 말하기도 죄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