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던 마을, 일곱 살의 샘내


1981년쯤이었을거다.
서울에서 살던 우리는 가산을 홀랑 말아먹고 트럭 한 대에 남은 세간을 싣고 북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당신이 군복무를 했던 곳 근처에 살만한 곳이 있을 거라 했다. 엄마는 그 마을의 입구에 표지판처럼 나란히 두 개의 가게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마을의 이름은 샘내였다. 맑은 샘에서 물이 솟아 마을을 가로지른다고 해서 샘내라 불렀다. 당장 입에 풀칠할 것도 없는데 낭만은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샘내상회(지금도 샘내상회 간판을 달고 있는 듯 하다. 당시에는 도로쪽을 바라보는 가게가 두 개 있었다.) 에서 사이다 한 병을 사 마시며 엄마는 살 집을 구한다고 말했다. 가게주인(장미빌라 2차 주변으로 추정 / 흰 대문이 있는 집 평화로 1257번길 62-5)의 안내를 받아 우리는 마을 한 복판에 넓은 마당이 있는 집에 도착했다. 그 집은 뒤채가 있었는데 거기 셋방을 얻었다. 작은 방 한 칸이었지만 앞마당이 넓었다. 담장도 명확치 않았지만 대문은 있었고 늘 열려 있는 대문 밖에 마을광장처럼 펼쳐진 공터가 있었다. 집은 샘내의 개천에 딱 붙어 있었는데 개천과 집 사이에 거대한 바위와 소나무가 개천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우리집은 서울에서 액자공장과 거기서 만든 액자를 파는 가게를 했다. 빈손이 되어 샘내로 갔지만 배운 도둑질이라고, 엄마 아빠는 액자 만드는 일을 계속했다. 갓난아이가 누워있는 단칸방에서 액자를 만들 수 없어, 샘내상회 바로 뒤에 작은 작업장을 얻었다. 아빠는 덩치가 큰 사람이라 몸 한 번 돌리기도 쉽지 않은 좁은 자리에 작업대를 놓고 러닝셔츠만 입고 액자를 만들었다. 엄마는 아빠가 만든 액자를 머리에 이고 39번 영종여객 버스를 타고 의정부에 갔다. 성화를 파는 서점에 한 두 개씩 액자를 납품해 생활을 이어갔다.
어릴 때 나는 피부가 유난히 흰 편이었다. “서울에서 온 백혈병 걸린 아이”라는 소문이 났다. 내가 집 앞마당에 나와 작대기로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놀면 아이들이 나를 빙 둘러싸고 구경하기도 했다. 구경거리로 지낸 시간은 아주 짧다. 금세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천방지축으로 뛰어놀기 시작했다. 샘내상회에서부터 우리집 위쪽까지 또래 아이들은 몰려다니며 놀았다. 엄마는 가끔 나를 데리고 산마루 너머 어디를 가야 했다. 엄마를 따라 산길을 걷기도 했다. 봄이면 논바닥에 들어가 올챙이를 잡았다. 뒷다리가 나온 개구리를 보고 어쩐지 그만둬야 할 것 같아서 사이다병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와 산마루를 넘을 때 할미꽃을 꺾어와 냉장고 위에 올려두었다. 엄마는 할미꽃 함부로 꺾으면 나쁜 일이 생긴다고 하면서도, 할미꽃을 자꾸 꺾어다 두었다. 반딧불이도 많아서 몇 마리 잡아 유리병에 담아온 적도 있다. 할미꽃 옆에서 반딧불이가 밝은 빛을 냈다. 그날밤은 반짝이는 반딧불이 때문에 할미꽃이랑 자꾸 눈이 마주쳤다.
겨울에는 샘내가 꽝꽝 얼어붙어 그 위에서 썰매를 탔다. 엄마는 썰매타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보던 내가 안스러웠는지 서울을 다녀오는 길에 옛 영화를 못 이기고 빨간 스케이트를 사왔다. 아이들이 딱히 부러워하지 않아서, 뽐내려는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소나무가 있던 집에 살다가 월세를 밀렸다고 했는지, 큰 길 건너로 이사를 했다.
샘내상회앞에는 영종여객 39번 버스가 다니는 큰 길(* 평화로)이 있고 그 길이 남으로는 의정부, 북으로는 동두천으로 이어진다. 이 길을 건너면 또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마을의 느낌이 조금 달랐다.
길 건너 동네(* 현재의 개발지구 – 평화로와 철도 사이)에는 커다란 소가죽 공장이 있었다. 바람이 불면 소가죽의 시큼한 냄새가 밀려왔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냄새였다. 냄새를 따라가면 색이 다 빠진 소가죽이 아기 기저귀빨래처럼 넓은 벌판에 널려 있었다. 소가죽은 무거워도 가끔 흔들렸다. 우리는 소가죽을 널어놓은 곳에 들어가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다. 새로 이사한 집의 주인집엔 내 또래 아이들이 있었다. 주인아줌마는 소가죽 공장에 다녔다. 주인아줌마는 해지기 전에 집에 들어오곤 했는데 언제나 파란색 장화를 신고 있었다. 하루는 내가 주인집에 들어가 그집 아이들과 넋 놓고 티비를 보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주인아줌마가 “너는 맨날 여기 와서 티비 보냐?”라고 꾸지람을 했다. 벽 너머로 그 소리를 들은 엄마가 주인집에 놀러가지 말라고 일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월세를 밀렸던가, 우리는 처음 살던 집보다 조금 더 안쪽으로 이사를 했다. 처음 살던 마당이 넓은 집은 마을의 갈래길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그 집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들어가면 넓은 파밭이 있고 그 다음에 산길을 따라 집이 몇 개 있었다. 우리는 제일 끝집(* 평화로 1257번길 91-47로 추정- 인근에 묘지가 있었는데 로드뷰로 봤을 때 비슷해보임)으로 이사했는데 나와 동갑인 여자아이가 살았다. 집주인 딸의 이름은 신애였다. 신애네 집은 젖소도 키우고 돼지도 키웠다. 집의 뒤켠으로 가면 젖소 우리가 있었다. 너댓마리의 젖소가 느리게 돌아다니며 꼴을 먹었다. 아침마다 덕계리에 있는 서울우유 공장에서 우유를 받으러 왔다. 먹으면 크게 배탈이 난다고 절대 젖소의 젖을 먹으면 안된다고 했다.
우리가 세를 든 곳은 신애네 마당 오른쪽에 있는 돼지막사에 붙어 있는 가건물이었다. 돼지막사에서는 돼지를 꽤 많이 키웠는데 ‘꽤 많이’라고 해봤자 100여두 정도였을 것이다. 가끔 신애가 꼬마돼지들을 이끌고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신애는 작대기를 하나 들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돼지들을 몰고 다녔다. 커다란 어미돼지들은 파란 트럭에 실려가기도 했다. 돼지들이 차에 오를 때마다 꽥꽥대며 울었고 엉덩이에 붙은 더러운 똥과 진흙이 마구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는 차에 탈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면서 소리 내어 울었다. 신애네 집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에는 작은 집이 바깥 마당에 당근을 엄청 심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당근을 많이 심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집 아줌마는 우리들을 보고 아무 때나 당근을 뽑아다 먹으라고 했다. 매일 한 소쿠리씩 당근을 얻어다 먹었을 때는 바람이 서늘했던 것 같다.
그집은 화장실이 한참 밖에 있어 밤이 되면 휴지를 들고 뛰어갔다. 돼지막사 옆이라 쥐들이 들락거렸다. 독일에서 돌아온 큰 아빠가 귀국선물로 눕히면 눈을 감고 일으키면 눈을 뜨는 인형을 사왔다. 신기한 그 인형을 깜빡 잊고 마루에 놓고 잤다가 쥐들이 볼을 파먹기도 했다. 우리 집 바로 뒤에는 양봉장이 있었다. 그것도 신애네서 키우는 벌들이었다. 한번은 동생이 양봉통앞에 멍하니 서서 수십 방을 쏘이기도 했다. 서너 살인 동생은 늘 집안에 갇혀 있어서 말을 잘 하지 못했다.
신애하고는 싸우기도 했고 잘 놀기도 했다. 주인집 딸이라고 유세를 좀 부렸고, 나는 신애가 못하는 것을 뽐내면서 기싸움을 했다. 한번은 집 뒤에 언덕과 무덤가에서 불이 났다. 아빠가 소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몸으로 불을 껐다. 화상을 입어 밤새 끙끙대고 앓았지만 상처가 남을 정도는 아니었다.
신애네 집에서 산길로 돌아가면 옆 마을(평화로 1233번길 부근)로 갈 수 있었다. 그 길이 더 빠른 것 같진 않지만 큰차도로 다니면 위험하다고 엄마는 숲속 오솔길로 다니는 걸 좋아했다. 마을입구 큰도로에서는 사망사고가 자주 있었다. 숲길에는 까투리가 알을 품고 있는 걸 흔하게 봤다. 길 사이로 뱀이 스르륵 지나갔다. 뱀딸기와 산딸기가 지천으로 열렸다. 우리는 그 산길을 넘어 어떤 아이의 집에 다녔는데 엄마가 거길 왜 가끔 갔는지는 모르겠다. 나와 동갑내기인 딸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지적장애가 있었다. 엄마가 그 집 엄마한테 돈을 꾸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나중에 우리가 잠깐 키우던 메리라는 강아지가 큰 개가 되었을 때, 그 집에 주었다. 마을입구에 있는 샘물교회( 지금의 샘물교회)에서 선교원을 열었다. 학교에 들어가기 바로 전 해였다. 선교원에 몇 달 다녔는데 어느 날은 엄마가 수돗가에서 내일부터 선교원에 가지 말라고 했다. 돈이 없어서 못 보낸다고 했다. 신애는 노란 모자를 쓰고 선교원에 갔지만, 딱히 부럽지는 않았다. 나는 늘 내가 신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선교원을 다 다니진 못했지만 졸업식에는 오라고 해서, 교회에서 열리는 선교원 졸업식에 갔었다. 학사모 비슷한 걸 쓰고 사진도 한 장 찍었다. 서울 살 때는 사진이 많았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제일 먼저 파는 물건은 피아노나 카메라니까. 샘내에 살던 시절엔 카메라가 없었다.
이듬해 나는 덕산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학교는 두 정거장 북쪽에 있었는데 학교가 멀어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다. 샘내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매일 두 번씩 버스를 탈 만큼 돈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샘내에도 군부대가 있고 주변이 온통 군부대 천지인지라, 장갑차와 탱크와 서울우유 냉장차까지 지나다니는 길이라 위험하기 짝이 없으니, “모여서 걸어가라”는 것이었다. 가난한 부모들의 묘책이었다.
아침 8시에 샘물상회 앞에서 샘내에 사는 모든 덕산초등학교 아이들이 모인다. 이 시간에 늦으면 혼자 학교를 가야 한다. 6학년 1반 오빠가 맨 앞에 서고 학년별로 둘씩 짝 지어 줄을 섰다. 6학년들과 5학년들이 앞뒤로 나누어 동생들을 안으로 배치했다. 모두 모인 것이 확인되면 6학년 1반 반장 오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왼편에 산을 두고 오른쪽엔 큰 도로를 따라 학교로 걸어갔다. 가면서 봄에는 진달래꽃을 따먹었다. 걸음이 쳐지면 언니들에게 야단을 맞았다. 얼마쯤 걷는지 모른다. 고갯마루를 올라갔다가 조금 내려갈 때 서울우유 공장입구가 나타난다. 그쯤이면 학교에 거의 다 온 것이다. 한국일보에서 그림그리기 대회를 한다고 해서 이 장면을 그려 냈다. 1학년 때 상을 받아서 2학년 때도 똑같은 그림을 그렸는데 상을 또 받았다. 똑같은 걸 그려내도 상을 준다니 바보같이 느껴졌다.
담임선생님은 매일 네 바닥씩 글씨 쓰는 숙제를 내줬는데 동네 엄마들은 공책 값 든다고 불만이 많았다. 어떤 아이들은 공책 값을 아끼느라 지우개로 쓴 것을 다 지우고 새로 쓰기도 했다. 한여름에 비가 많이 와서 개천이 넘친 적 있다. 그때는 다리가 없이 징검다리만 있을 때라 학교를 가지 못했다. 학교를 다니기 직전이었던가, 엄마가 피아노를 배우라고 해서 어느 기와집에 다니기도 했다. 그 피아노학원 원장님이 선교원 원장이었으니, 마을의 유일한 사교육 전문가였달까.
나는 엄마가 결혼 전에 입던 바지를 잘라 입고 학교를 갔다. 그 동네에서 2학년이 된 뒤 신애네 집에도 월세를 밀렸던가. 아마 신애 엄마가 집을 빼라고 했는데 엄마가 버텼겠지 싶다. 비 오는 날 군인가족이 이사를 들어왔고 우리는 파란 트럭에 짐을 급하게 실어 의정부로 이사를 나갔다. 엄마는 신애엄마가 자기를 쫓아냈다고 저주를 퍼부었다.
우리는 의정부에 살다가 점점 남진했다. 엄마의 원대로 의정부에서 도봉구를 거쳐 서울의 성북구, 길음동 지나 삼선교까지 내려갔다. 엄마의 소원은 사대문 안으로 안착하는 것이었지만, 내가 고2가 되었을 때 다시 샘내로 들어갔다. 샘내 끝에 신애네 집 근처에 큰 빌라(* 천보빌라, 현재까지도 이름 그대로 유지)가 생겼다는 것이다. 엄마는 평수도 넓고 엄청 좋다고 말하면서 “신애네 집이 내려다보일 것”이라고 했다. 막상 이사를 들어가니 샘내의 물이 죄다 말라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살던 빌라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옛날처럼 동네 위로 올라가 가재를 잡고 송사리를 잡으며 즐거워했다. 그 빌라는 내가 알던 샘내와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지나치게 호화로웠다. 그 집에서 2년 정도 살다가 엄마가 하던 일이 부도가 났고 우리는 다시 서울로 이사를 나왔다.
샘내에서 살았던 일곱 살 무렵은 내 인생에서 가장 가난했던 때다. 하지만 그때의 샘내는 모든 것이 반짝였다. 햇빛을 받고 있는 파꽃이나,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 그 위에 정신없이 날아다니던 잠자리떼, 처음 이사한 집에 커다란 소나무, 나무를 타고 놀던 동네 언니의 이마에 내려앉는 노을과,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던 소가죽까지. 샘물상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오면 모두 녹아내렸던 그 여름의 오솔길도, 모두가 찬란하게 빛났다. 가난하다는 건 충분히 슬픈 일인데, 알록달록한 지붕들 때문이었는지, 겨울에도 반짝이며 흐르던 냇물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2019년. 당시의 마을지형을 생각하며 적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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