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만 보고 땅만 보고 – 노인생애사

결혼은 아버지가 소개해 준 사람이랑 했다. 막상 결혼해서 시댁에 가보니 너무 가난했다. 집이란 게 기어들어가고 기어나갈 형편이었다.

서울에 정착하기로 했다. 서대문 앞에 살았다. 거기서 아이들 사남매를 키웠다. 홍제동 꼭대기에서 아침에 밥을 먹고 출발하면 서대문 독립문 앞에서 수돗물을 받을 수 있었다. 물지게를 지고 가서 물을 길어서 집까지 걸어오면 점심시간이 넘은 오후 2, 3시였다. 매일 매일 사는 게 너무 고단했다.

돈을 벌어야 하니 아들을 업고 학교 옆 축대 옆에서 주전부리를 파는 장사를 했다. 그때만 해도 남편이 보수적이라 내가 밖에 나가 장사하는 걸 알리지 못했다. 나는 장사해서 번 돈으로 시골에 소를 한 마리 샀다. 소가 커서 새끼를 낳고 그 새끼가 커서 또 소를 팔면 큰 재산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막내딸이 돌도 안 되었는데 애 아빠가 병이 들었다.

입원을 해서 2년간 병원생활을 하니 샀던 소도 팔아야 했다. 막내는 퇴원해서 돌아온 제 아빠를 못 알아보고 아저씨라고 불렀다. 나중에는 동네에 이집 저집 놀러 다니며 “우리아빠는 몸이 아파서 집에 있어요.”라고 말하고 다녔다.

남편은 이후로도 일을 하지 못했다. 아이들을 굶겨 죽일까봐 매일 매일이 너무 두렵고 무서웠다. 하늘만 보고 땅만 보고 살았다. 힘들어도 힘들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학교 앞에 애를 업고 쭈그리고 앉아 장사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엄두도 안 난다. 아이들이 학교를 못 가게 되는 게 제일 무서운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다 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남편은 10년 동안 병석에 누워 있다가 하늘나라로 먼저 갔다. 남은 건 빚뿐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돈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넷이나 되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생선도 팔고, 파출부도 다니고, 청소일도 했다. 돈 버는 일은 다 했다.

*서울 모복지관 강모노인의 생애사 중의 한 토막.

이 분은 한글을 뗀지 얼마 안되어 글자가 많이 틀렸지만 수업 중에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내가 재구성하고 있다. 아이들이 굶어죽을까봐, 학교 못 갈까봐. 그게 제일 두려운 일이었다는 말, 하늘만 보고 땅만 보고 살았다는 말이, 가슴에 오래 남았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