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풍경 – 백화점

100807_Nikon 063 사본.jpg 서점은 백화점 안에 있다.
급하게 마련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꼭 백화점으로 갈 필요는 없었는데 마트와 옷가게와 문구점이 이동거리를 생각했을 때 가장 적게 움직일 동선은 백화점에 있는 문구점과 서점, 판매점을 휙 도는 것이다.

걸음을 아껴야 한다. 겨울이니까.
문구 코너에 가서 검은색 클리어파일을 사야했다. 어디선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 피아노 연주가 들리는데 분명히 누군가 연주하는 소리였다. 음원을 틀어놓은 것과 그랜드 피아노의 해머가 두들기는 소리는 명확하게 다르다.
백화점의 가운데는 길게 뚫려 있다. 보이지 않는 기둥이 있는 것처럼 뻥 뚫린 공간을 가운데 두고 건너편에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여자의 주변엔 아이를 안은 어른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 각국에서 온 제 각각의 펜에 둘러싸여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고 연주는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으로 이어졌다.
스테들러, 사라사, 시그노, 몰스킨, 이룸, 프랭클린 사이에 서 있었다. 계산대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다들 한 권 정도의 책을 들고 있었다. <나는 부동산과 맞벌이한다>, <미움받을 용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이들의 학습만화와, 장난감만 손에 쥔 사람도 있었다.

자기 확인을 위해 사는 물건들이 가득한 공간, 사람들은 굳이 필요하지 않은, 없어도 오늘을 넘길 수 있는 물건을 산다. 물건의 필요성은 주관적이다. 물건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굳이 오늘 사지 않아도 될, 시그노 펜 한 자루와, 펜텔의 펜 두 자루와 2016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을 내가 검은 파일 위에 올려 계산을 기다린 것처럼.
돈을 내기 위해 계산대 앞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이 피아노 연주는 계속 되었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생명 없는 물건이 위로가 되는 공간에서 사람이 규칙대로 맞추어 연주하는 음악은 어떤 지위를 갖는가. 인간에게 위로가 되는 건 생명 없는 물건인가 아니면 물건을 사는 행위인가. 물건으로 위로를 받는다면 정말 그 물건은 무생물인가.
백화점에 창문도 시계도 없다는 건 잘 알려진 얘기다. 오로지 물건을 소개하기 위해 사람들은 내내 서있다. 가만히 진열대에 앉아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물건들은 누군가에게 불려가 꽃이 될 것이다. 위로가 되고 자존감을 회복시켜주고 자신감을 되찾아줄수도 있다. 하나의 물건이 만들어지기까지 적게는 수명, 많게는 수백 명의 손길이 닿는다. 만든 사람들이 손길 하나 하나에 영혼이 묻어 물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단순히 자본이 만들어내는 실재하나 실체가 없는 사물에 불과할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시시때때로 모양을 바꾸는 집이었다. 그 안엔 대체가족이 살고 공동체를 이루었다. 사랑하는 법에 대해 혼란스럽던 하울의 친구들은 환경이 변해도 계속 함께 했다. 우리가 사는 성이 그 때마다 변한다해도, 자본이 들고 나더라도, 우리의 사랑도 굳건할 것인가.

사물을 바라보고 주머니에 넣어 행복해진다면, 그 때부터 그 사물의 삶이 시작되는 지도 모른다. 얼마나 지독히 외로우면, 말 걸지 않는 사물을 사랑하며 계절을 건너는가.

2016. 1. 16.

http://www.koconews.org/news/articleView.html?idxno=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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