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야기 11. 낮아줌마

졸음이 쏟아지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어제도 두 시간을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밤을 샜다. 하룻동안 해야 하는 일은 그닥 많지 않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는 자리다.
아줌마는 작은 의자를 펴고 담배를 물었다. 소란스런 영화의 배경음이 홀을 울리고 있었다. 엎어 놓은 맥주잔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아줌마는 담배를 다 피우고 저 물기를 마포자루로 한 번 걷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 8시에 출근해 냉동고를 열어 고기를 꺼내놓는다. 꺼내놓은 고기는 점심시간까지 자연상태에서 해동을 시킨다. 9시쯤 되어 미숙이가 출근을 한다. 그 때부터 하룻동안 팔아야 하는 야채들을 다듬는다. 양파를 꺼내 껍질을 까는 일은 어딜 가나 하는 일이다. 눈물이 나는 것에 익숙해 진 지 오래되었다. 상추를 하나씩 씻어 체에 받친다. 식재료상이 와서 토마토를 한 박스 놓고 갔다. 오늘은 찰진 것이 물건이 아주 좋다. 지하 주방에서 식재료들을 모두 씻으면 커다란 함지박에 담아 위로 올린다. 철제 계단이 늘 삐걱거리고 불안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곳이라 무념히 지나친다. 신경쓰기 시작하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불안한 요소들은 도처에 숨어 있다. 얼마 전엔 지하창고에서 불꽃이 일어 차단기를 내렸다. 신속하게 대처하면 될 일이지 불안을 감지해봤자 피곤한 건 육신 뿐이다.

파란색 빨간색 체에 받친 토마토와 상추를 조리주방에 올려다 준다. 이 가게에 주방은 지하 2층에 하나, 홀이 있는 지하 1층에 하나, 그리고 아줌마가 설거지하는 지하 1층 뒷편에 하나가 있다. 설거지를 하는 공간을 주방이라 명하기 어렵지만 적당한 이름을 찾아내지 못해 모두들 설거지 주방이라고 부른다.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재료를 모두 다듬어 올려다 주면 이제 점심을 먹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든다. 하나 둘 들어오는 사람들은 때로 혼자, 때로 여러 명. 아줌마는 가끔 설거지 주방을 벗어나 홀에서 혼자 영화를 보며 밥을 먹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저들은 무슨 팔자로 이 먼 나라까지 와서 제 나라 음식을 찾아 먹으며 밥을 빌어먹고 살고 있나. 설거지를 하는 나와 저들의 삶은 얼마나 닮아 있고 얼마나 멀리 있나. 머릿속을 휘감는 복잡한 생각이 들 때마다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것을 버리고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더 버리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 아침 8시에 출근에 저녁 5시까지 설거지를 하며 산다. 하루 종일 물에 손을 담그고 고무장갑을 꼈다가 벗었다가 맥주컵을 씻다 보면 그냥 하루가 간다. 대낮부터 뭔 술들을 그렇게 처마시는지 욕을 하다가도 부러운 인생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럴 때 아줌마는 주방밖에 서서 대낮에 혼자 앉아 영화를 보며 맥주를 마시는 남자들을 쳐다본다. 아줌마는 파란슬리퍼에 앞치마를 맨 채로 홀을 가로질러 바로 간다. 나 맥주 하나만 줘봐. 아줌마는 3500원을 앞치마에서 꺼내 미숙이에게 건넨다. 미숙이는 아무 말도 없이 카스 맥주 한 병을 꺼내 뚜껑을 따준다. 맥주 병을 건네는 미숙이가 눈을 흘긴다.
아줌마 눈 빨개요.
그렇겠지 뭐.
아줌마는 맥주컵에 맥주를 따라 벌컥벌컥 마신다.
또 못 주무셨어요?
언제는 잤니?
아줌마가 미숙이에게 눈을 흘긴다. 이내 웃는다.
휘청거리는 듯 하지만 휘청거리지 않는 결연한 걸음,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뒷모습, 그리나 흔들리는 늙은 종아리. 아줌마가 맥주병을 들고 설거지 주방으로 들어간다. 홀에 있는 그 어떤 사람도 아줌마를 쳐다보지 않는다.
오후 3시, 맥주잔을 씻는 일은 마무리가 되어가고, 쌓아놓은 맥주잔은 오후에 남자아이들이 나와 운반할터였다. 설거지 주방에 조그만 의자를 펴놓은 아줌마는 세제 옆에 놓인 소주병을 여 열어 맥주잔에 부었다. 한 잔을 다 마시니 졸음이 몰려온다. 밤에는 두 세 병을 마셔도 잠도 안 오더니, 꼭 이 시간엔 반 병만 마셔도 졸립다. 아줌마는 벽에 등을 기대로 긴 숨을 몰아쉬었다.

2014.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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