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야기 5 – 성욱

세상 모든 만물은 다 이유가 있다.
수긍할 수 없는 말이었다. DJ박스에 한참을 앉아 있던 성욱은 그 말을 믿기로 했다.
컨트리음악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성욱은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혼자 그 말을 두 번 중얼거렸다.
미국의 컨트리 음악을 모두 데이터베이스화 하는 작업을 며칠 째 하고 있었다. 낮에는 바텐을 보는 영상이가 작업을 하고 저녁에는 성욱이 음악을 틀면서 교대하고 있었다. 컨트리 음악의 LP는 약 3천장쯤 되었다. 여태 작업한 양은 500장도 되지 않았다. PC통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컴퓨터가 과연 삶에 얼마나 쓸모가 있을까 의심하던 처지였다. 자기의 할아버지는 아일랜드 사람이라고 하는 사장이 이 일을 지시했다. 이 집에서 일을 한 지 6개월이 되었다.
낮에는 집게를 들고 고기를 구웠다. 11시쯤 출근을 하면 일찍 나온 동료들이 햄버거 패티를 한 장씩 싸고 있었다. 냉동된 패티를 불판에 올리고 간혹 스테이크를 굽기도 했다. 저녁에는 주방장이 출근하기 때문에 주방에 있던 성욱은 DJ 박스로 돌아가고 영상이는 바로 들어갔다.
하루종일 이 햄버거 가게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큼큼한 고기 누린내는 익숙해졌다. 간혹 관심이 가는 웨이츄리스가 새로 들어오기도 했다. 무엇보다, 어학연수를 갈 형편이 되지 않는 성욱에게 이 곳은 매우 좋은 어학연수기관이었다. 사장내외는 한국인 여자와 미국 남자였는데 남자 사장은 단어가 현란하지 않으나 매우 또렷한 발음을 구사했고 음악을 틀고 있다 보면 DJ 박스에 와서 신청곡을 말하며 이런 저런 말을 거는 사람들도 있었다.
성욱은 그럴 때마다 그들에게 되물었다.
“두 유 노우 메탈리카?”

컨트리음악을 주로 틀기 때문에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시대착오적인 옷을 입은 남자들도 꽤 드나들었다.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그들은 엔지니어라고 대답했다. 거의 다 엔지니어였다. 경영을 전공하는 성욱은 그들이 어떤 회사에서 어떤 대우를 받으며 일하는 지도 궁금했다. 음악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삶의 이야기로 옮겨갔다. 고국에 두고 온 가족들의 사진을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었고 음악을 틀어달라고 CD를 가져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외로움, 15년이 넘은 지하 햄버거 가게에 눅진하게 늘러붙어 있는 정서였다.

9시가 되었다.
웨이츄리스들이 바 앞으로 모여 줄을 맞췄다.
미스박이 매일 노래를 정했다. 손님이 없을 때는 새로 들어온 웨이츄리스들에게 미스박이 춤을 가르쳤다. 짧은 자주색 치마를 입은 젊은 웨이츄리스들이 라인댄스를 췄다. 매일 세 곡의 라인댄스를 췄는데 미스박은 오늘도 귀여운 글씨로 메모지에 노래 세 곡을 적어줬다. 이미 MP3로 만들어 저장해 둔 곡들이었다. 성욱은 오케이~! 라고 호기롭게 대답하며 노래를 틀었다. 새로 들어온 어린 웨이츄리스는 춤을 출 때마다 힘이 넘쳤다. 얼굴에 땀이 맺힐 정도로 열심히 춤을 추었다. 춤추는 여자들은 모두 즐거워보였다. 성욱은 그 모습이 보기 좋아 배워보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세 곡의 라인댄스가 끝나고 바 앞으로 자리를 옮겨 춤을 구경했던 손님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섰다. 바에서 물을 한 잔 마시고 주방쪽으로 가는 새로 들어온 어린 웨이츄리스에게 성욱이 말을 걸었다.
“현아?”
눈이 동그란 아이는 성욱이를 빤히 보았다.
“바닥 꺼질 거 같애.” 성욱은 말이 끝나자마자 목소리와 안 어울리게 요란하게 웃었다.
여자애는 사람 좋게 씩 웃었다.
“너 성격 좋지? 그래 보인다.”
“성격 좋은 게 뭘까아요.?” 현아는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주방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귀엽다. 10시가 넘어 손님들이 하나 둘 빠지기 시작하자 성욱은 음악을 걸어놓고 창고쪽으로 갔다. 주방에 있던 세 명의 청년도 창고쪽으로 나왔다. 목장갑을 끼고 쓰레기를 정리했다. 까만 봉투에 하룻동안 밀린 쓰레기를 쑤셔박았다. 빈 맥주병과 콜라병도 옮겨야 했다. 햄버거 가게는 지하 1층인데 창고쪽 문을 열면 골목의 계단이었다. 계단을 올라가 검은 쓰레기봉투를 전봇대 옆에 차곡차곡 쌓고 청년 넷이 쪼그려 앉아 별 시덥지 않은 농담을 하며 담배를 피웠다. 학교에 계속 다니고 있었다면 만나기 힘든 친구들이었다. 화장실에 들러 손을 닦고 DJ 박스에 들어가 앉아 헤드폰의 한 쪽만 대고 있는데 현아가 DJ 박스 앞에 서서 뭔가를 적고 있었다. 글씨를 적을 곳은 DJ박스 외에도, 여러 곳에 있었다.

“많이 벌었어?”
“아직 얼마 안 됬으니까 별로 없죠. 아까 스테이크 손님 있었는데, 3천원 주고 갔어요. 오늘의 빅팁.” 현아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작은 수첩에 숫자를 적고 있었다. 성욱은 현아의 글씨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오빠.”
“응?”
“성욱이오빠죠?”
“아. 내 이름 몰랐어?”
“성욱이오빠. 오빠 송승헌 닮았다는 소리 많이 듣죠?”
성욱은 얼굴이 벌개지며 크게 웃었다.
“되게 쑥스러워하네.” 현아는 수첩을 들고 씩 사라졌다.
뻘쭘해진 성욱이 앉지도 못하고 서 있는데 현아가 다시 나타났다.
“숱댕이 눈썹 성욱이 오빠. 오빠 고대 다닌다면서요?”
“아.. 휴학중이야.”
“고대 다니는 사람이 왜 이런 데서 일해요?”
성욱은 다시 요란스럽게 웃었다. 쑥스러워요 라는 문장이 성욱에 얼굴에 반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재밌잖아.” 현아의 표정이 어땠는지도 모르겠다. 성욱의 얼굴은 씨벌겋게 달아올랐다.

물이나 마시려고 DJ박스의 쪽문앞으로 문을 숙였다. 선반이 길게 놓여 있고 그 아래 공간으로 나와야 하기 때문에 몸을 잔뜩 웅크려야 했다. 쪽문을 나와 몸을 일으켜는데 다시 현아가 나타났다.
“오빠 되게 쉬운 사람이구나?” 성욱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잠시 멈춰 있었다.

학교에서는 만날 수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이 곳이 아니면 저런 여자애는 어디가서도 만날 수 없을 것이었다. 눈이 길고 얼굴이 호빵처럼 동그란 저 아이는 어디서 왔을까. 성욱은 자기가 안암동이 아닌 조치원 캠퍼스라는 걸 얘기해도 모를 거라고 확신했다.
성욱은 몸을 살짝 좌우로 흔들며 바로 가서 영상이에게 물을 한 잔 달라고 했다. 영상이 맥주컵에 물을 따라줬다. 단 숨에 물을 들이킨 성욱이 영상이를 보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연애나 해야겠다.”
영상이 성욱을 빤히 바라보며 정색하고 대답했다.
“미친놈. 너하고 안 해 이 개새끼야.”
성욱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영상을 쳐다봤다.
“너… 너.. 게이야?”
“아니야 이 미친년아 물마셨으면 꺼져.”

#한사람이야기

 

2014.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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