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여섯에 보낸 편지

중 3이었다. 반장이었다. 매년 그래왔다. 학생회장이기도 했다. 남녀공학에서 여학생회장이 나온 것에 반발이 거셌다. 그 해에는 유독 리더십에 대해서 고민했다. 
체력장이 있었다. 오래달리기가 난코스였다. 심장이 안 좋다고 주장하는 아이들이 몇 명 있었다. 시대마다 각광받는 로망의 병이 있다. 사춘기소녀들이 불치의 병에 걸려 사랑하는 연인의 품에 안겨 세상과 이별하거나, 따뜻한 사람들의 손길에 활짝 웃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병 말이다. 내 이전 세대에서는 그게 결핵이었다면, 내 시대에는 선천성 심장병이었다. 불경스럽겠지만, 그 때는 병에도 낭만이 있었다. 심장이 안 좋다고 하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단 한 번도 쓰러지거나, 양호실도 가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그저 얼굴이 좀 희고, 매우 게으른 편이었다. 

실적주의였을까. 전체주의였을까, 아니면 계속해서 사내아이들에게 도전받는 내 리더십에 대한 확인을 위한 요식행위였을까. 나는 우리반은 800미터 오래달리기를 전원 완주 통과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만들겠다고도 말했다. 공부를 많이 하던 시대가 아니라 아이들의 체력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걸핏하면 쓰러졌던 건 나다. 내가 완주할 수 있으면 그 누구도 할 수 있을거라 믿었다.

체력장은 입시에 반영되었다. 적용비율은 매우 적었어도 나는 1점도 뺏길 수 없다고 여겼다. 모두가 20점을 받는 상황이라면 적어도 우리반은 모두 20점을 받아야 했다. 

체력장 당일 오래달리기는 맨 마지막 순서였다. 체육부장이 뻔히 있는데도 그 학교에서는 반장이 모든 일을 다 했다. 나는 구령을 붙여가며 대열의 안쪽에 섰다. 두 팀으로 나눠 한 팀에 아마 스물 여덞명 정도였을거다. 첫 번째 팀은 아무도 문제없이 시간내에 동일하게 완주했다. 개별적으로 뛰어도 무방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으려면 같이 뛰는 게 가장 좋았다. 800미터을 구령 붙여가며 다 뛰고 난 다음 두 번째 팀이 뛸 차례였다. 

눈썹이 진하던 아이가 나에게 다가왔다. 
“하나야, 나 안 뛰면 안돼?”
“왜?”
“자신없어.”
“다 했는데?”
“그래도 자신 없어.”
그 아이는 큰 눈에 서양아이처럼 속눈썹이 짙었다. 

“내가 같이 뛸께.”

나는 두번째 팀의 대오를 맞추고 다시 그 옆에 섰다. 그리고 처음처럼 구령을 맞추며 나에게 자신없다고 한 아이의 손을 꽉 쥐었다. 
정해진 시간이 있었다. 3분 20초 정도 됐을 것이다. 내 손을 쥔 아이가 뒤쳐지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꽉 쥐고 허리를 한 팔로 감쌌다. 한 명이 더 처지기 시작했다. 나는 부반장인지 체육부장인지에게 구령 붙이는 것을 넘겼다. 
나와 두 아이는 내 양손을 잡고 대열의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구령을 같이 붙이며 더 뛰었다. 나는 그 두 아이들의 손을 잡은 채로 800미터를 한 번 더 완주했다. 
담임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반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오래달리기를 완주했다. 정해진 시간내에. 

그 이후로 체력장을 하다가 아이들이 죽는 일이 있었다. 중3때의 내 행동이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일이 됬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소름이 끼쳤다. 

사람들을 본다. 
많은 사람들은 멀리 보지 않는다. 넓게 보지도 않는다. 그걸 멸시하는 건 옳지 않다. 내가 가는 길과 다른 길로 가는 것을 비난하는 것도 옳지 않다. 멀리 보거나, 올바른 것을 판단하는 것도 개인의 역량이다. 그 사람의 건강, 깜냥에 따라 시야는 달라진다. 
능력이 부족한 것은 차별받아선 안된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일을 그만둬서는 안된다. 그 사람을 봐야한다. 

손을 잡고, 내 속도를 늦추고, 설령 내가 잠시 멈추더라도. 같이 가는 게 옳다. 
떠나겠다는 자를 붙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걸음을 맞춰야 하는 것은 구령을 붙이는 자가 할 일이다. 

중 3, 과거의 나는 이미 없다. 나는 그 때의 내가 아니다. 그 때의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도덕적인 인간이었다. 다시 돌이킬 수는 없다. 그 때의 나를 떠올린다. 열 여섯의 내가 마흔에 나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꽤 많다. 

2014.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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