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지 말아라

일주일간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책이 한 권 있다. 정유정의 소설, “7년의 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한 소년이다. 소년의 아버지는 살인범이다. 7년 전의 일이다. 7년 전의 그 밤이 갑자기 소년에게 밀려온다. 작가는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마을을 정확하게 설계했다. 책의 앞부분엔 이 마을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물론 가상의 마을이다. 이 마을의 중심은 저수지다. 소년은 저수지 근처의 삶을 살았다. 파도치지 않는 잔잔한 저수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모두 인간과 기계에 의해 통제되는 곳, 움직이지 않는 것은 썩기 마련일진대 소년은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보냈고 살인범의 아들로 살았다. 소년은 잠수를 했다. 검은 물결 속에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소설은 내내 어두운 밤이었다. 그야말로 칠흑 같은 밤만 가득했다. 검은 밤, 검푸른 물, 외로운 달 하나, 소름끼치는 누군가의 실루엣, 소년이 말하던 물의 이미지, 작가가 전해준 그 물의 기억은, 잔인한 마녀의 길고 더러운 손톱같았다.

 

진도는 아름다운 섬이다. 그 앞바다는 눈부셨다.

거센 풍랑과 파도가 그치고 바다는 길고 더러운 손톱을 감췄다. 비웃고 싶을 만큼 찬란한 햇살 아래 여유롭게 넘실대는 잔잔한 물결, 언제 그랬느냐는 듯 얼굴을 싹 바꾼 바다는 반짝이는 물살 위로 아이들을 하나씩 꾸역꾸역 토해냈다.

욕지기가 올라온다. 잔인한, 참혹한, 비참한, 무서운, 역겨운, 모든 것들이 저 배에 가득했다. 더러운 배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아름답고, 생기발랄하고, 뽀얀 젊음의 곱디 고운 아이들은 그 배에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아이들은 물결에 휩쓸려 아름다운 땅 진도로 돌아오고 있다. 바다는 수천가지의 얼굴을 가졌는가보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다 잡아 삼키지만, 돌려주고 싶은 것들이 있었을 거다. 그렇게 믿고 싶다.

 

문득,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 처음 갖는 구체적인 생각이다.

호탕하게 웃고, 힘차게 걸으며, 술에 취한 듯 아무데서나 춤추고 노래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졌다. 빛나는 햇살을 보며 바다를 떠올린다.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려면, 눈을 감아야 할 것이다. 타인의 고통, 누군가의 통곡, 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도 따위, 눈 감고 귀 막고 안 보고 안 들으며, 오로지 오늘은 햇살이 좋아서 웃고, 내일은 비가 오니 시원해서 좋다고. 눈 꾹 감고 외면하면 가능한 일이겠다.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심은 고이 접어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숨겨놓기로 했다. 매일 밤 꺼내서 한 번씩 읊어야 한다. 유쾌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러나 사물이 명료하게 보이는 빛이 있는 한, 두 눈 똑바로 뜨고 두 귀를 번쩍 열고, 슬픔이 가득한 이 도시에 두 다리로 꼿꼿이 걸어야겠다. 잊지 말아야 한다. 깊은 곳에 숨겨둔 쪽지를 매일 꺼내 읽으리라.

 

우리를 용서하지 말아라. 나도 나를 용서하지 않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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