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십삽년 유월 십일

생각해보니 아침나절 내 차선에 어린 고양이가 죽어 있었다. 순간 속도를 줄이고 더 밟지 않게 건너갔다. 내 뒤에 오던 차도 더 밟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고양이는 차도의 정 가운데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이 될 무렵 골목길에 세워둔 차의 틈새로 다 큰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무척 놀라 속도를 늦췄고 다행히 고양이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고양이를 지나치고 난 다음 안양시청 앞에서 술에 취한 게 빤해 보이는 남자가 무단횡단을 하고 있었다. 아크로타워 앞에서 유턴을 하던 차들이 남자를 피해 주저 하며 천천히 움직였다. 10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고양이 얘기를 쓰고 나니 어젯 밤 낙동강 하류를 휩쓸고 있다는 뉴트리아 얘기가 떠오른다. 고양이는 아무리 개체수가 늘어도 생태계를 교란시킨다는 얘기까지 나오진 않는다. 사실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가장 큰 주범은 인간이다.

내가 그런 인간이다.
동물을 좋아하지만 동물보호에 앞장서고 싶지는 않다. 간혹 동물학대를 비난하는 글들을 보면, 이들이 과연 어떤 생명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인가 싶을 때가 있다. 그들은 동물을 학대한 사람을 함무라비 법전보다 더 격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욕을 퍼붓는다. 동물에 대한 사랑은 느껴지지 않고 동물사랑을 빙자한 – 그저 그 마음에 깊이 박힌 인간종에 대한 적대감만 느껴질 뿐이다.

밤이 깊어간다.
어두운 하늘엔 이불솜같은 구름이 가득하고 나는 조경업자가 돈을 받고 만든 인공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개와 함께 걷고 있다.

하루는 이렇게 지나고 어떤 생명은 길에서 사라지고 어떤 생명은 살아남았다.

운전을 하면 인생의 축소판을 걷는 것 같다고 말하던 사내는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갔다.

오늘 나는 살아남았고 산 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매일 매일 죽은 자들의 이야기만 탐닉하던 때가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한 자리에 있었고 나는 매일 그들을 찾았다. 모두 다 살아있을 때 했던 이야기들인데 나는 그들이 죽고 난 뒤 만났다.

매일 밤 죽은 자들의 도시를 헤매고 죽은 자들의 바다를 구경했다. 그들을 더 만나기 위해 산 자들을 외면했고 나의 생명도 점점 조악해졌다. 이제는 죽은 자들을 외면하고도 잠을 자곤 한다.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다.

누가 먼저 세상에서 사라지는 지,
내 눈앞에서 없어지는 지 알 도리는 없다. 대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조금 더 빨리 내가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신의 삶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라고 그들에게 말할 수 없다. 생명력이라는 건 누군가에게 끝없는 부러움이요, 채울 수 없는 욕망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을 돌아본 적 없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하루를 기억한 적 없다. 내일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하루를 살기 위해 어제를 잊고 내일은 미뤄둔 채, 내일은 언제나 내일이고, 어제는 언제나 어제이므로, 그렇게 하루만 살아온 삶이 있다.

단 하루, 오늘만 살기 위해, 오늘만 산다면, 아침나절 죽은 어린 고양이따위는 잊어야 했을 것이다.
하루를 기억할 수 없는 삶은 얼마나 고단한가. 그 삶은 모든 질문에 한 가지로 답한다. 없다. 라고.
기억도, 추억도, 행복도, 슬픔도 없다고. 그러나, 힘들었다고.
기억하지 못하는 삶은, 힘겹다.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천십삽년 유월 십일을 기억하며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